며칠 후면 한 친구를 만난다. 거의 십 년 만이다. 십여 년 전 친구와 나는 오해로, 아니 나의 일방적인 절교 선언으로 연락이 끊긴 채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문득 궁금했고, 가끔 그리웠다. 친구도 그랬는지, 내가 답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얼마 전 메일을 보내왔다. 그애의 메일을 컴퓨터 화면에 띄워놓고 한참 읽었다. 온갖 말들이 떠올랐지만 그 많은 단어 가운데 몇 마디만 꺼내서 친구에게 보냈다. 반갑다고, 잘 지냈느냐고.
그 후로 친구와 나는 메일을 몇 번 더 주고받았다. 내가 그 메일 계정을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아니, 메일을 읽고 나서 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친구는 내 답장에 기쁜 모양이다. 나도 그렇다. 다시 내게 소식을 전해주어서. 세월이 훌쩍 흘렀고, 친구와 나는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때보다 열 살은 더 먹었다. 그 사이 친구와 나의 신변에도 소소한 변화가 있었고, 그애와 나는 그런 소식들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이제, 며칠 후면 그애를 본다.
십 년 만의 만남, 무언가 소중한 선물을 주고 싶어서 나는 어떤 책이 좋을까 머리를 굴린다. 누군가는 그렇게 오랜만에 만나면서 웬 책 선물이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애와 나 사이에 책은 남다른 의미였다. 열네 살, 서로 처음 알게 된 이후로 학교를 함께 다니면서 주고받았던 그 수많은 편지들. 그중에는 책 이야기도 많았다. 지난해인가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회색노트》가 문고판으로 나온 걸 보고 나는 그애를 떠올렸다. 예전에 그애에게 편지 쓸 때면 ‘Tibi’라고 그 책에서 따온 표현을 쓰곤 했다. 그애도 기억할까? 자크와 다니엘 같은 그런 사이가 되자고 말했던가, 그 책을 선물했었는지 빌려줬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고등학교 졸업 후로도 한동네에 살았던 친구와 나는 종종 만나 집 근처에서 술을 마시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그즈음 읽던 책 중 좋았던 것을 챙겨가서 빌려주었고, 친구는 다음에 만날 땐 빌려간 책을 돌려주고, 나는 또 새로운 책을 빌려주곤 했다. 술자리에서는 책 이야기가 자연스레 오갔다. 우리만의 독서모임이랄까. 그런 세월이 이어졌다. 내 탓으로 인연이 끊어지고도 이따금 그때가 생각났다. 그래서 나는 친구에게 줄 책으로 고심 끝에 《숨겨진 삶》을 고른다. 《아일린》도 《거지 소녀》도 《카시지》도 《나이트 워치》도 떠올랐다. 그동안 헤어지지 않았다면 이 책들도 너에게 빌려줬을 텐데……. 그럼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나눴을까?
《숨겨진 삶》은 어떻게 보면 지금 그애와 내 현실에 맞아떨어진다. 우리는 이제야 소식을 조금 주고받지만, 그동안 서로의 삶은 세세히 알지 못한다. 네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다고, 네가 그동안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궁금하다고 더 묻고 싶지만 나만의 욕심일 수 있다. 《숨겨진 삶》의 ‘사빈’과 ‘마리’, ‘에디트’, ‘셀레스트’ 그리고 ‘피에르’에게는 하나같이 숨겨진 삶이 존재한다. 대부분 자기만의 비밀스러운 삶을 간직해왔고 그 숨겨진 삶은 그들 저마다에게 상처가 되고, 때로는 그 상처 때문에 자기 안에 갇히기도 한다. 그럼에도 모두가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친구는 그동안 하던 일을 접고 가죽공예를 시작했다고 한다. 뜻밖의 소식이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애를 전보다 더 잘 알게 되는 것 같다. ‘피에르’ 방에 걸려있던 노란 포스터, 로스코의 복제화가 피에르의 본질을 보여주듯이, 친구가 만든 가죽제품은 그애의 ‘숨겨진 삶이 식별되고 감지’되는, 그 한 사람이 이제껏 애써온 자취로 내게 다가온다.
어느 늦은 밤 《나이트 워치》를 읽은 뒤 문득 그애가 떠오르기도 했다. 등장인물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그들 삶의 궤적을 좇는 이야기 형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케이’, ‘헬렌’, ‘줄리아’, ‘비브’……. 그들의 인생도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랑과 우정으로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 때로는 그런 시절 때문에 고통받지만 그조차 눈부셨다. 그들의 삶은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에 이제 빛바랜 추억만이 남았다. 돌아보면 나 또한 인생의 순간순간에 전쟁 같은 시기가 있었고 그것이 지나가면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남겼다. 너 또한 그랬을 테지. 그런 힘겨운 순간을 넘기고도 사람은 살아간다. 그 순간들이 모여 인생을 이루는 건 아닐까. 그런 시간을 보냈을 그애에게, 그리고 나에게 이제까지 참 잘 살아왔다고 도닥여주고 싶다.
그애는 몇 해 전 서울을 떠났다. 작은 도시에 살면서 어느 독립서점에서 운영하는 독서모임에 종종 나가는 모양이다. 얼마 전에는 책방지기에게 추천해달라고 해서 한 책을 읽었다는데, 그 책을 읽는 내내 엄마와 딸 관계를 생각했다고 한다. 친구가 차분히 털어놓은 이야기에서 나는 처음 알게 된다. 그애는 말한다. 자라는 동안 엄마한테 많은 상처를 받았고, 그 화를 삭이면서 살아왔다고, 그렇게 치유되지 않은 상태로 스스로 엄마가 되고 나서야 이제 조금은 엄마를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고. 우리가 그토록 오래 술잔을 기울이며 만났어도 한 번도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혹시 오래전에 듣고도 내가 너무 어렸을 때라, 내가 덜 성숙했던 터라 친구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내가 그 책방지기였다면 《거지 소녀》를 권했을 텐데. 유년 시절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로즈’와 새엄마 ‘플로’와의 애증 관계를 섬세하게 그려나간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친구가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고 또 자기 아픔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그애와 나의 인생, 사소하지만 돌아보면 나름대로 소중한 순간이었을 그 시간들을 모아서 담담히 그려낸다면 아마 《거지 소녀》에서 묘사하는 삶과 비슷하지 않을까. 전체적으로는 평범하고 보잘것없으며 고통스러운 인생. 그 삶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또 애쓰는 사람들. 그런 고달픈 틈바구니에서 때때로 비춰지는 작은 햇살과도 같은 순간들……. 이토록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로즈와 플로, 그런 과정을 거쳐 마침내 진정한 자기와의 화해를 시도한 로즈. 친구도 로즈의 삶을 보며 자기의 상처를 치유하고 엄마와도 진정 화해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 분노하고 화를 삭이지 못했던 소녀들, 그래서 외롭기 짝이 없는 소녀들이 등장하는 《아일린》과 《카시지》도 우리가 함께 읽는다면 나눌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사랑받기를, 인정받기를,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기를 갈망하는 ‘아일린’의 모습은 한때 우리 모습이다. 십대와 이십대 초반 누구나가 느꼈을 법한 자기혐오, 자기연민, 어떻게 할 줄 모르겠는 세상과 주변 사람을 향한 격렬한 분노, 쓸쓸함과 외로움, 그러면서도 인정받기를 바라는 마음, 우리는 그런 마음들을 거쳐 왔다. 아일린을 보면 그 치기어린 순간들이 떠오르지 않느냐고 묻고 싶다. 그러나 그 시절도 이제는 사라졌기에, 어쩐지 그리운 마음으로 추억하게 되지 않느냐고. 《카시지》의 ‘크레시다’도 아일린 못지않게 외롭다. 그 외로움이 큰 상처가 되어 주변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다. 그러면서도 영민한 크레시다는 자신이 얼마나 얄팍한지, 얼마나 쉽게 상처받고 패배감을 느끼는지 똑똑히 안다. 그 시절의 내가, 그애가 그러했듯이.
스물네 살 때 아일린이 가장 원했던 건 모르는 사람들로 꽉 찬 곳에서 오후를 보내거나, 거리를 느긋하게 걷거나, 어느 먼 곳에서 안전하게 지내고, 어딘가 자신의 집에서 편히 머무는 삶이었다. 친구의 요즈음 생활을 보면 아일린이 바랐던 삶과 무척 닮은꼴이다. 소란스러운 서울을 벗어나 작은 도시에 정착하고, 그애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그래서 할머니라고 부르는 이를 벗 삼아 함께 산책하고, 자기만의 조그마한 공간에서 가죽제품을 만들고, 독립책방을 찾아가 독서모임을 하고……. 그리고 나처럼 못난 친구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고. 아일린이 ‘사랑에 대해 배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온 동네의 문을 다 두드려보고 나서야 맞는 집’을 찾았듯이, 친구는 자기에게 꼭 맞는 집을 찾은 것 같다. 그애의 그런 모습을 이제 마주할 예정이다. 이 책들과 함께 우리의 우정도 다시 시작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