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삶
실비 제르맹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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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잠을 뒤로 하고 끝까지 읽게 되는 책. 저마다 숨겨진 비밀을 안고 상처도 껴안은 채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인간의 삶에 먹먹해진다. 그 너머에 또다른 삶이 있겠지. 실비 제르맹, 너무 늦게 알았지만 이제라도 알게 된 것을 감사하게 여기며 다른 모든 책도 읽어보려고 장바구니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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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마을에 한 가족이 이사를 왔다. 장모와 사위, 딸 셋으로 이루어진 가족이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은 한 집에 살지 않는다. 사위와 딸은 함께 사는데, 장모는 그들의 집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혼자 기거한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딸 부부와 함께 사는 게 서로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딸과 장모, 그러니까 이 두 모녀는 서로 만날 수가 없다. 장모가 딸네 집을 찾아가더라도 집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아니라, 건물 맨 꼭대기 층에 사는 딸을 엄마가 부르면 딸은 테라스로 얼굴을 내밀고 몇 마디 나눌 수 있을 뿐이다. 그나마 그 높은 곳에서 비추는 불빛 때문에 눈이 부셔서 딸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더욱이 딸은 단 한 번도 엄마가 사는 집에 온 적이 없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사위는 날마다 장모가 사는 집에 찾아와서 장모와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간다. 다정하기 짝이 없다. 대체 이 가족에게는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마을 사람들은 이 기묘한 가족을 두고 온갖 말을 해대기 시작한다. 단순한 사람은 장모를 시내 중심가 좋은 아파트에 모시기 위해 그렇게 사는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딸과 강제로 떨어져 살게 한 사위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장모가 스스로 자유롭게 살려고 그런 선택을 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모두가 사위가 벌인 짓이라고 생각하며 못된 사이를 헐뜯기에 바쁘다. 딸과 멀리 떨어져 사는 걸 견딜 수 없어 하는 불쌍한 어머니가 딸을 따라서 자기도 낯선 곳까지 이사 왔는데 사위의 질투와 소유욕 때문에 딸은 어머니를 만날 수도 없고, 마치 성에 갇힌 공주처럼 남편에게 감금당한 채 산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다. 누군가는 딸과 엄마 사이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날마다 사위가 장모 집에 찾아와서 그토록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알고 보면 장모와 사위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해괴망측한 추측까지 하는 사람도 있다.

그토록 다정하게 하루에도 여러 차례 장모를 찾아와 말벗을 해주는 사위인데 왜 도대체 딸과 엄마는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장모를 그렇게 생각한다면서 사위는 절대로 장모를 딸이 사는 집, 그러니까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는 일이 없다. 사람들의 추측처럼 딸과 엄마가 만나는 일은 사위로 인해 금지된 것 같다. 이 가족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마을 사람들의 궁금함, 호기심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가고 마침내 진실을 밝히고자 그들은 발 벗고 나선다. 자, 과연 그 가족의 진실은 무엇일까?

루이지 피란델로의 희곡 <여러분이 그렇다면, 그런 거죠>에 바로 이런 장면들이 그려진다. 장모인 ‘프롤라 부인’, 사위인 ‘폰자’, 그리고 ‘폰자 부인’이 문제의 인물들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낯선 이방인들, 그러면서도 기이하기 짝이 없는 가족의 행태에 호기심이 발동, 서로 알아낼 수 있는 온갖 정보를 동원해 그들 가족의 진실을 캐내기에 혈안이 된다. 맨 처음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역시 사위가 나쁜 놈이었다. 아내를 감금한 채 집 밖으로는 나오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소유욕과 질투에 눈이 멀어 그렇다는 이야기다. 늘 검은 옷을 입고 어쩐지 사납고 포악해 보이는 인상의 폰자 씨를 떠올리면 왠지 이 이야기가 100% 맞을 것 같다.

마침내 사람들은 프롤라 부인을 초대해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런데 프롤라 부인은 이웃들이 사위를 나쁘게 생각할까봐 폰자를 두둔하기에 바쁘다. 부인의 말에 따르면 사위는 매우 착하고 섬세하며 딸을 무척 사랑한다는 것이다. 딸한테 그보다 더 좋은 남편은 없을 거라고 말한다. 사위가 자기와 딸이 만나는 걸 막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생각해서 자발적으로 삼가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사위가 딸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독점욕이 심하기 때문에 그런 사위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딸과 자신이 자발적으로 만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부인은 딸이 행복하다면 자신은 그로써 행복하단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역시 사위가 나쁜 놈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런데 프롤라 부인의 말은 진실일까?

장모가 이웃들을 만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윽고 폰자도 그들을 찾아온다. 그런데 폰자의 이야기에 사람들은 더 놀라고 만다. 그는 장모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폰자는 한마디로 장모가 ‘미쳤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가 털어놓는 그간의 이야기는 사람들을 경악하게 한다. 나 또한 놀랐다. 폰자는 그런 장모를 돌보고, 딸을 장모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없이 그 둘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있단다. 차츰 사람들은 폰자의 말을 믿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말을 불신하는 이도 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폰자의 말을 믿는 부류와 프롤라 부인의 말을 믿는 부류로 나뉘어 옥신각신하기 시작한다.

과연 둘 중에 누가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사위의 말대로 장모는 미쳤을까? 아니면 오히려 장모의 이야기처럼 사위가 지나친 소유욕과 질투에 눈이 멀어 장모와 딸이 만나는 것까지 금지해버린 미친놈일까? 혹시 둘 다 미친 것은 아닐까? 이런 가운데 혹시 딸은 유령이 아닐까 하는 추측까지 나오게 된다. 저 딸이 밖으로 나와서 우리에게 속 시원하게 이야기해준다면 진실은 또렷하게 밝혀질 텐데! 사람들은 이제 딸을 밖으로 나오게 해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볼 궁리를 하기 시작한다. 자, 딸은 과연 밖으로 나올 수 있을지, 그리고 이 기묘한 가족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분이 그렇다면, 그런 거죠>를 읽기 시작했을 땐 나 또한 사위가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다. 장모가 마을 사람들에게 속내를 털어놓기가 무섭게 득달같이 달려와서는 자기의 말이 진실이라며 털어놓는 이야기, 그러니까 ‘장모가 미쳤다’는 말은 전형적인 가스라이팅 수법이 아닌가 싶어서, 이놈이 나쁜 놈이구나! 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사위의 이야기는 들을수록 꽤 그럴듯하다. 그래서 나는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마을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러다가는 급기야 나 또한 혹시, 딸은 사실 없는 게 아닐까? 유령 아닌가? 이런 생각까지 했다.

루이지 피란델로는 이 짧은 희곡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진실’이라는 게 얼마나 덧없는지,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진실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완전히 거짓이 될 수도 있는지를 날카롭게 그려나간다. ‘여러분이 그렇다면, 그런 거죠’라는 제목이 그것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면만을 본다는 것, 그리고 자기가 보고 받아들인 대로 진실이라고 믿어버린다는 것, 하지만 그게 과연 진실일지, 진실이라고 판단한 근거 자체가 모래성과 같다면 그 진실은 또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질문한다. 오히려 진실을 밝히겠다면서 한 가족의 사생활을 파헤쳐 말살해버리다시피 하는 저 마을 사람들의 저열한 호기심이 문제는 아닐까? 이 작품은 끝끝내 완벽한 진실을 알 수 없다. 아니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진실’은 이 작품을 읽고 해석하는 당신의 눈에 따라 달라진다.

최근, 검찰 수사를 받던 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한 사건을 보고도 사람들은 진영을 나눠 서로 자기와 반대되는 진영에서 죽였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자기가 생각하는 ‘진실’을 뒷받침하기 좋은 사례들만을 늘어놓으면서 그러니까 이것이 진실이라고 말한다. 그래요, ‘여러분이 그렇다면, 그런 거죠.’ 저 먼 시절, 저 먼 이탈리아 땅의 루이지 피란델로는 그런 인간의 속성을 참 절묘하게도 꿰뚫어보고 있다.



덧) 내가 읽은 책은 절판이라(중고로 구해서 봄), 만일 이 작품을 읽어보고 싶은 분이라면, <루이지 피란델로 희곡선 1>을 구해서 읽으셔야 할 듯... 이 책은 지금 정가 40% 할인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데, 곧 절판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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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퍼센트 2019-12-03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지금 상황과 딱 맞네요, 잘읽었습니다~

잠자냥 2019-12-03 17:22   좋아요 1 | URL
이 책은 절판되기엔 너무 아까운 책이에요. 다른 출판사에서 새로 잘 나오면 더 좋겠어요. 책 만듦새는 그리 좋지 않아서요. ㅎㅎㅎ

케이 2019-12-06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다니던 회사에 남한테 지나치게 관심 많은 결혼한 여자들 무리가 있었는데...
회사에서 지급하는 복리후생비 청구한다고 어떤 젊은 여자 직원 A가 경기도 외곽 극장에서 본 심야 영화 티켓 두장을 영수증으로 제출 했거든요.
그 여자들이 모여 ˝A 직원 남자친구 없다고 하지 않았냐-밤에 영화를 보다니 남자친구가 있나보다-극장 위치가 서울이 아니고 경기도 외곽이다-A는 그 남자친구랑 경기도 외곽 놀러가서 자고 왔다.˝ 까지 발전시켜서 여직원 A가 남들한테 거짓말 하고 다니는 사람 취급을 하더라고요.
(듣고 싶어 들은 것이 아니라 자리가 가까워 어쩔 수 없이 다 들렸습니다. ㅜㅜ)
잠자냥님 쓰신 리뷰를 보니 그 극혐 무리가 떠오릅니다.....

그나저나 쓰신 책의 결말 너무 궁금한데요!!!!!!

잠자냥 2019-12-06 11:57   좋아요 0 | URL
헐 0.0 정말 극혐 무리군요... 그런 사람들 정말 똥보다 더 냄새나요.
설사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게 무슨 상관인지...;;
저도 최근 회사에서 어떤 분이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걸 자꾸 캐내려고 하셔서 피하느라 참 곤혹스러웠습니다. 휴.... 인간이란 참.... 한국사람들이 유독 타인에 대한 저열한 호기심이 좀 심하죠. 루이지 피란델로는 이탈리아인인데, 이탈리아인이 한국인이랑 좀 비슷하다는 말 많이 하잖아요. 그래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라는 종의 특성인지.....

이 책 100쪽 남짓인데 반전의 반전이 ㅋㅋㅋㅋㅋ 암튼 흥미로웠어요.
 
결혼, 죽음
에밀 졸라 지음, 이선주 옮김 / 정은문고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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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나라에서는 결혼과 출산율이 번번이 최저치를 갱신하고 있다. 오늘 본 기사에서도 서울 출산율이 역대 최저를 찍었다고 한다. 부부도 아이를 낳지 않는데, 결혼조차 하지 않으니 뭘 더 바라겠는가. 이 둘은 관련 없을 수가 없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비혼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죄악시하는 풍조 속에서는 더 그럴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모든 점을 헤아려봤을 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결혼해봤자 자신의 삶에 득이 될 게 없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는 게 아닐까.

사랑하는 두 사람이 오직 사랑만으로 결혼한다는 말처럼 허무맹랑한 소리도 없을 것이다. 결혼에는 많은 계산이, 돈이 오간다. 그래서 결혼도 비즈니스라고 하지 않던가. 비단 이런 풍조는 요즘 우리나라의 현실만은 아닌 것 같다. 저 19세기 사람 에밀 졸라가 살던 프랑스에서도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졸라의 <결혼, 죽음>은 그 시대 결혼과 죽음에 얽힌 세태보고서와 같다. 귀족, 부르주아, 상인, 서민으로 나눠 그들이 결혼하게 되는 과정과 결혼식 당일,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을 짤막하게 스케치하고 있다. 그런데 매 이야기가 짧다고 그냥 가볍게 볼 수만은 없다. 그런 광경을 그려내는 붓을 든 이가 누구인가, 에밀 졸라가 아닌가. 정말 졸라, 날카롭다.

귀족의 결혼을 보자. 막심은 결혼 적령기에 접어들면서 앞으로 외교 쪽 업무로 나아갈 궁리를 한다. 그의 고모인 뷔시에르 후작부인은 아주 발이 넓은 노년 마님으로, 막심의 미래 설계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렇다면 결혼부터 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혼이야말로 한자리 해먹으려면 꼭 필요한 토대’라면서. 아, 이 얼마나 솔직한 말인가. 고모는 마당발을 이용해서 적당한 후보를 찾아 막심의 눈앞에 들이댄다. 막심은 묻는다. “금발이지요?” 그의 질문에 고모는 말한다. “아니 갈색일걸, 사실 나도 정확히 모르겠구나.” 뭐 어쨌든 그게 무슨 대수인가, 확실한 것은 신붓감이 열아홉 살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집안도 좋고 지참금도 어마어마한데, 금발이든 흑발이든 빨강머리든 무슨 상관이랴! 결혼하기까지 그들은 딱 다섯 번 만난다. 그동안 막심이 신부에 대해 알게 된 것은 통통한 편이고 피부가 하얗고, 음악을 좋아하고 남자 향수를 싫어하는 듯했으며 클레르라는 이름의 죽은 친구가 있다는 것 정도이다. 그쯤이면 충분하다. 집안이 좋은데 뭐, 됐다. 마침내 그들은 결혼식을 올린다. 귀족이니까 주위 눈도 있으니 결혼식 때 불우 이웃 돕기 행사를 살짝 걸친다. 막심과 신부 앙리에트는 각자 천 프랑씩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부한다. 열네 달 뒤 둘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것은……. 당신에 상상에 맡기겠다(궁금하면 책을 펼쳐보라. 아마 당신의 상상이 100% 맞을 것이다. 그만큼 결혼은 지리멸렬한 비즈니스가 아닌가).

귀족의 결혼이 사람들 이목을 중시하면서 교묘하게 꾸민 일종의 비즈니스였다면, 부르주아 계급의 그것은 한결 적나라하다. 법조계에서 공부하겠다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그 분야에서 최고로 꼽히는 학교 교육을 받게 한다. 이유는 오직 하나, 그 학교 출신이 최근 수지맞는 결혼을 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장래를 걱정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또 충고한다. “결혼을 하려무나. 집에 여자가 들어오면 빛도 나고 활기도 생기는 법이란다. 부잣집 딸로다가. 아내도 가격이 있으니……. 그래, 데비녀 씨 댁 딸이 괜찮겠구나. 대수공업자 집안인데 지참금이 백만 프랑이라지. 아마, 네게 딱 맞는 비즈니스겠구나.” 오, 이 솔직한 아버지여. 아내도 가격이 있다고 당당히 말하는 아버지여, 결혼이 비즈니스라고 당당히 말하는 아버지여. 그리하여 아들은 재산을 늘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결혼을 선택한다. ‘결혼식은 마치 아주 엄청난 자본을 좌우하는 사업 체결에 참관이라도 한 듯’ 치러진다.

부르주아의 결혼이 이럴진대, 상인 계층의 결혼은 더 장사에 가까워진다. 그들의 결혼은 ‘돈’을 위주로 흘러가고, 결혼 후의 삶도 돈을 모으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부부는 돈을 열심히 벌어서 그 돈으로 파리 서북쪽 조용한 구석에 스위스식 별장을 지어 생활하기를 꿈꾸며 살아간다. 오늘날 결혼하는 평범한 부부의 모습도 거의 이러할 것이다. 아파트 한 칸, 노후에는 교외에 집 한 채 얻기를 바라면서 평생 돈벌이에 집착하는 삶……. 19세기 프랑스인들도 다를 바 없었다. 졸라는 말한다. ‘이 상인 부부가 서로 사랑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 지라도, 분명한 점은 돈을 토대로 잘 짜인 솔직한 동업자’라고. 그런데 서로 사랑한다고는 말할 수 없는 이 두 부부는 결혼한 후로도 늘 동침한다. 그 이유를 알게 되면 다들 포복절도하리라…….

서민의 결혼은 돈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스물다섯 청년 발랑탕은 클레망스에게 반해서 쫓아다니다가 결국 결혼에 성공하는데, 그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이것이 사랑인지 단순한 욕정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졸라가 보기에 결혼이란 돈, 아니면 욕정의 해소 그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자리에 사랑이 끼어들 틈은 없다. 사랑이라는 포장이 있을 뿐. 이들의 결혼 후 삶은 비참하다. 가난한 살림에 아이 셋을 기르느라 클레망스의 금발은 누렇게 변하고 얼굴은 상한다. 발랑탕은 술에 절어 생활한다. 잦은 부부싸움과 울어대는 아이들, 남편의 구타 등등. 소란스럽고도 구차한 인생이 이어진다.

귀족, 부르주아, 상인, 서민의 결혼을 쭉 읽어가다 보면 졸라의 시선이 점점 연민으로 변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위와 명예, 돈, 권력을 가진 이들을 묘사할 때는 냉소로 가득 차 있는데, 그래도 돈 없는 약자들의 삶을 그릴 때는 거기에 그나마 안타까움 같은 것이 깃든다. 이런 졸라의 시선은 ‘죽음’을 다룬 이야기들에서 더 뚜렷해진다. ‘죽음’ 또한 귀족, 부르주아, 상인, 서민, 농부로 나눠서 그려나간다. 귀족의 장례식장은 귀족의 결혼식처럼 허례허식으로 가득하다. 죽은 고인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다들 슬픔을 억지로 꾸며내고 있지만 그들 머릿속은 온통 딴 생각으로 가득하다. 한 노인에게 죽은 고인을 추모하는 말이 들려온다. “마음씨가 고왔으며 관대로움과 선량함이…….” 그 말을 듣던 노인은 턱을 조금 움직이며 중얼댄다. “그래 나도 그런 존재를 하나 알았었지....”라고. 노인에게 그런 존재는 누구였을까. 죽은 고인이었을까? 궁금하면 책을 펼쳐 보라. 졸라는 냉소 속에서 때때로 이런 유머러스함을 발휘한다.

부르주아의 죽음도 모두 돈과 연관된다. 상인의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이 두 계층을 바라보는 졸라의 시선은 조금 다르다. 계층이 낮아질수록 연민과 안타까움이 커져간다. 이런 시선은 서민의 죽음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모리소는 얼음 깨는 일로 근근이 살아간다. 그런데 이 추위 때문에 어린 아들이 심하게 병들어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끔찍한 추위가 아들을 죽일 수 있다보니 얼음이 녹기를 바랐지만 그러면 그는 일자리를 잃게 된다. ‘일하러 갈 때는 허옇게 언 길을 보며 일거리가 있으니 안심’하지만 ‘드러누운 아이를 위해 태양이, 아니 미지근한 봄볕이라도 어서 나오기를 기원’하는 모순에 처한 것이다. ‘빈민에게는 온갖 종류의 날씨도 적’인 셈이다. 결국 얼음이 녹기 시작해 그는 해고당하고 만다. 일자리를 잃어 죽어가는 아이를 지켜 볼 불을 밝힐 양초조차 살 수 없다. 얼음도 녹았으니 아이는 살아나야 할 텐데, 그 간절한 바람은 덧없기만 하다. 아이가 떠난 뒤에야 도착한 구호품. ‘빈민 구제소는 항상 기차가 떠나버려야 도착한다면서’ 허탈하게 웃는 모리소를 지켜보노라면 가난한 이들에게 던져지는 삶의 무게로 인해 마음이 잔뜩 무거워진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결혼’은 이른바 ‘적령기’가 있어서 대부분 주인공들이 젊은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지는데, 그에 비해 ‘죽음’에서는 세상을 떠나는 이들의 나이가 다양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결혼’에서는 한껏 냉소적이던 졸라가 ‘죽음’에서는 좀 더 인간에 대한 연민을 보여준다. 삶 자체가 버텨나가기 매우 어렵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런 까닭에 나는 이 책에서 ‘서민의 죽음’이 가장  마음에 남는다. 한편, 마지막 3장에 실린 ‘어떤 사랑’은 사랑, 결혼, 죽음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이런 단편들을 쓸 수 있었기에 졸라는 그 장대한 루공 마카르 총서를 써내려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결혼, 죽음>은 졸라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그의 단편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졸라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졸라 입문서, 또는 맛보기용으로 꽤 괜찮은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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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Coldplay - Everyday Life
콜드플레이 (Coldplay) 노래 / Parlophone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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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 발매 후 좋다는 평을 듣고, 너무 기대를 했나보다. 크리스 마틴 목소리는 여전히 보석 같고 그 목소리와 잘 어울리는 몇몇 곡들은 꽤 좋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너무 욕심이 과한 느낌. 특히 넘치는 가스펠 송 어쩔... 이들의 1,2집을 사랑했던 팬들에겐 좀 많이 낯선 앨범. 제발 그때로 돌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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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9-11-29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콜드플레이 앨범 전체 안들은지 한참 오래 됐어요. 3집부터는 한두곡 정도만 좋고... 앨범 전체 완성도로서는 영~~~ 뭐 요즘 시대에 앨범을 완성해서 내준 것도 감사하긴 하지만. (그러면서도 들을 계획은 없다 ㅋㅋ)

잠자냥 2019-11-29 10:0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전 이 밴드 1,2집을 워낙 좋아해서, 늘 기대를 하기는 해요. 3집까지는 앨범 사고 그래그래... 아직까진 괜찮아 하다가.... 4집 <Viva la Vida.....> 여기서는 앨범 사고 조금 후회하다가... 그래, 그래도 들어줄만해 했다가... 5집 <Mylo Xyloto> 이건 앨범 사고 정말 후회했어요. 갖다 버리고 싶... ㅋㅋ 그 뒤로 6집, 7집은 앨범 사지도 않았고, 그나마 옛정으로 음원 받아서 심드렁하게 들어보기는 했거든요. 근데 이번 앨범은 싱글 발매 이후 워낙 좋다는 평을 많이 들어서 기대하고 오랜만에 덥석! 샀는데.... 하... 이제 기대를 접기로........ (이 앨범에서도 5번 트랙 ‘Daddy‘는 꽤 좋아요. 싱글로 밀었던 ‘Arabesque‘보다 전 이 노래가 더 좋더군요. 아마 1,2집 풍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노래는 좋아할 것 같아요.), 암튼 콜플이여... 뮤즈처럼.... 안녕...... ㅎㅎ

그러고 보면 새 앨범 낼 때마다 여전히 거의 만점에 가까운 평을 듣고 있는 라디오 헤드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케이 2019-11-29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콜드플레이 1집-2집은 앨범 수록곡 전곡 가사를 다 외울 정도로 좋아한답니다. 하지만........ 콜드플레이가 유명해진 3집부터 급격히 정말 급격히 팬으로서 당황스러울 정도로 앨범 분위기가 바뀌어서 밴드에 대한 흥미가 뚝 떨어졌어요. 콜드플레이 내한 공연도 옛정으로 가긴 했지만요. 말씀하신 곡은 1-2집 팬으로서 꼭꼭 들어보겠습니다!

사실 전 라디오헤드도 3집까지가 좋았고 그 뒤 앨범은 Amnesiac 까지만 사고 안샀는데요. Burn the Witch 를 듣고 대단하다 생각은 했어요. 아직까지(?) 이런 독창적인 곡을 만들 수 있다니 싶어서요.

근데 음... 뭐든 젊어 만들어야 좋은걸까요. 예술만큼은 늙어도 젊은이보다 더 잘할 수 있는거 아닐까 생각했는데 소설도 음악도 영화도 젊은 사람이 만든 게 확실히 더 나은 것 같단 생각에 늙어가는 1인으로서 가끔 슬픕니다. ㅜ_ㅜ (갑자기 딴 얘기)

P.S 뮤즈.......... 아아... ㅜㅜㅜㅜ 그들 역시 3집까진 괜찮았는데.

잠자냥 2019-11-29 10:44   좋아요 0 | URL
콜드플레이 공연장 갔었군요! 저도 갔었는데. ㅎㅎ 예매 전쟁이었는데 티켓 예매 신공 발휘! ㅎㅎ 콜플 1,2집은 여전히 좋아요. ㅎㅎ 그래서 어제 ‘daddy‘ 들을 때는 오랜만에 옛 음악 듣던 기분도 들더라고요.

라디오헤드 앨범은 2,3집이 역시 명작이죠. ㅎㅎ 그런데 내놓는 앨범마다 여전히 좋아요. 톰요크 솔로 앨범도 그렇고. 암튼 창작 능력은 무르익는 것보다는 오히려 불꽃 같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기는 하죠. 특히 음악, 그중에서도 록밴드는 대부분 1,2집이 그들 최고 앨범이 되는 경우가 대다수인 것 같아요. 하하하하. 뮤즈여.......... 뮤즈여..... -_-;;;
 
결혼, 죽음
에밀 졸라 지음, 이선주 옮김 / 정은문고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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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졸라! 그의 루공 마카르 총서 단편 버전이라고나 할까. 계층별 결혼과 죽음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린다. 이 짧은 단편들에서도 인간의 위선과 사회 문제를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촌철살인 문장에서는 웃음도 터진다. 사랑과 결혼, 죽음을 모두 아우른 마지막 작품 ‘어떤 사랑’이 특히 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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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1-28 0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놔 ㅋㅋ 저 이것도 꼭 읽어보고 싶어서 장바구니 넣어뒀는데 잠자냥 님이 역시나 벌써!! 게다가 별다섯이라니 몹시 좋네요ㅠ

잠자냥 2019-11-28 09:48   좋아요 0 | URL
처음에는 별 다섯까지는 아니었는데.... 읽어갈수록 좋아서 결국 ㅋㅋㅋ 졸라의 장편들에 비하면 정말~~~ 금방 읽어요.

ninja63 2019-11-28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처음 읽을때는 요즘 젊은세대들의 생각과는 많이 다르지 않은가 생각했지만.읽어내려갈수록 세대를 초월해서 살아가는 인간상은 정말 똑같구나 느꼈어요.그런현상을 작가의 감정을 배제한채 객관적으로 써내려간것이 오히려 가슴 먹먹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잠자냥 2019-11-28 12:53   좋아요 0 | URL
네 요즘 한국 사회의 결혼&죽음의 풍경과도 거의 다르지 않을 것 같아요. 프랑스에서는 결혼식 때 사회에 기부금을 내는 모습이 좀 신선했습니다(그것도 계층에 따라 다른 금액을!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