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자 메이 올콧의 작품을, 그것도 <작은 아씨들>을 다시 읽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성인이 되어 읽은 올콧의 작품은 <가면 뒤에서>가 유일했다. 올콧은 ‘A.M. 버나드’라는 가명 또는 익명으로 다수의 선정소설을 발표한 경력이 있다. <작은 아씨들>의 ‘조’가 가족을 위해 돈을 벌 목적으로 선정적인 소설들을 썼던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조’는 나중에 그 선정소설들을 불태우고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소설을 써서 작가로서 크게 성공하기도 하지 않은가. 올콧 연구가들은 이 소설이 바로 올콧의 <작은 아씨들>에 해당하며 그렇다면 조가 썼다는 선정소설처럼 올콧도 실제로 그런 소설들을 투고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갖고 그녀의 ‘선정소설’들을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1970년대에 나온 선집이 <가면 뒤에서: 루이자 메이 올콧의 숨겨진 스릴러들>이다.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여성주의 문학연구가들은 열광했다고 한다. 내가 어린 시절에 알던 <작은 아씨들>의 그 작가가 이런 책을 썼단 말이야?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작은 아씨들>의 ‘조’를 보라. 그렇게 능동적이고 활달하면서도 자아가 확고한, 여주인공은 없었다. 적어도 내가 어린 시절 읽은 작품들에서는 그랬다.
고백하건대 나는 소녀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을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왕자와 거지>나 <보물섬> 또는 <15소년 표류기>같은 모험담을 좋아했다. 내 또래 여자 아이들이라면 으레 좋아하는 <빨강 머리 앤>도 <소공녀>도 <작은 아씨들>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작품 속 세계가 주로 집 안에 ‘갇힌’ 소녀들의 이야기였기에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작은 아씨들>에서 인상 깊은 인물은 있었다. 바로 둘째 조. 조는 <작은 아씨들>의 딸 넷 가운데 가장 독립적이고 활달한 인물이다. 다른 자매들에 비해 주체적이고 자기만의 세계가 확고해서 나는 조를 좋아했다. 그런 조가 어른이 되어 작가가 되었을 때도 그 설정이 꽤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런 조에게 심하게 감정이입을 하기도 했다.
<가면 뒤에서>를 읽고 난 뒤 루이자 메이 올콧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어릴 때 <작은 아씨들>을 읽으며 내가 놓친 게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면 뒤에서> 덕분에 <작은 아씨들>을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책을 받아들고 일단 그 부피에 깜짝 놀랐다. 1권과 2권을 합본한 두께. 900쪽이 넘는다. 이렇게 두꺼웠다고? 어린 시절, 세계명작동화전집에서 책들을 빼내어 책으로 집짓기를 하면서 놀았던 나로서는 그때 그 어떤 책도 900쪽 분량은 되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그렇다면 그 무렵, 내가 읽은 <작은 아씨들>도 대부분의 많은 어린이용 책이 그랬듯이 축약본이거나 아이들에게 어울리지 않을 법한 내용은 삭제된 그런 책이었으리라. 몇십 년 만인가. 책을 펼쳐 읽으며 어린 시절의 기억 속으로 돌아간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읽는 책인데도 메그와 조, 베스, 에이미의 모습이 생생하게 눈앞에 되살아난다. 가난하지만 화목하고 다정한 가정. 지혜롭고 당찬 어머니. 허영도 많지만 맏딸로서의 의무를 언제나 잊지 않는 메그, 선머슴 같은 조, 소심하고 다정한 베스, 조 못지않게 고집스러운 막내 에이미 등등 아주 오랜만에 잊고 있던 친구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기분이다.
한 가정을 배경으로 메그와 조, 베스, 에이미 등 네 자매의 성장을 그린 이 작품에서 나는 이번에는 ‘조’의 성장에 한층 더 주목한다. ‘루이자 메이 올콧’ 그녀와 조를 동일시하면서 말이다. 성미가 급하고 말투가 신랄한 데다 침착하지 못한 조. 여성적인 특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그녀는 어릴 때부터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조는 원하는 대로 실컷 읽고, 달리고, 말을 탈 수 없는 게 가장 큰 고통이다. 그런 조가 갖고 싶은 것은 천재성이다. 언니인 메그가 가난한 집 여자애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결혼 기회를 잡을 수 없을 거라고 한숨을 쉴 때면 “그럼 혼자 살면 되지.”하고 용감하게 맞받아친다. 부잣집 남자와의 결혼을 통해 부자가 되기보다는 자기가 직접 돈을 벌어 언니를 호강시켜 주겠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한다. “불쌍한 언니! 내가 돈을 많이 벌 때까지 기다려. 마차와 아이스크림, 굽 높은 구두, 작은 꽃다발을 건네주고, 같이 춤출 빨간 머리 남자들도 덤으로 얹어서 줄게.” (84쪽)
지혜롭고 선량한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천사 같은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게 꿈인 메그에 비해 조는 그쪽 방면으로는 아예 관심이 없다. 책에 나온 것 외에 연애에 관한 이야기라면 아예 멀리하는 편이다. 조는 메그가 결혼으로 집을 떠나 자신들의 화목한 가정이 와해되는 것이 끔찍이도 두렵다. 그래서 이렇게 외치기도 한다. “맙소사! 왜 저희는 아들로 태어나지 않았을까요? 그랬으면 이런 걱정은 안 하고 살 텐데!” 이 화목한 가정이 와해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또 있다. 바로 베스. 베스의 꿈은 넷 중에 가장 소박하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안전하게 한집에 살면서 가족들을 돌보는 거’라고 말하는 베스. 베스가 왜 그토록 이 집을, 가족들 곁을 떠나기를 두려워했는지는 나중에 밝혀지면서 한결 더 아프게 다가온다. 어릴 때 내게 베스는 투명인간 같은 존재였는데, 이번에는 이 조용한 셋째의 아픔과 삶의 무게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그만큼 나도 자란 것일까.
메그에게서도 새로운 면을 본다. ‘조’처럼 나 또한 결혼해서 좋은 가정을 꾸리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꿈이라고 그런 삶을 소망하는 것일까? 의아했다. 그런 내게 메그는 도무지 좋아할 수 없는 캐릭터였다. 그런데 이제는 장녀로서 일찌감치 가난한 가족의 현실과 그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지고 있었을 그 조숙한 소녀가 눈에 밟힌다. ‘버르장머리 없는 네 아이들이라는 짐을 져야 하는’ 첫째였기에 다른 자매들보다 더 일찍 현실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런 자신의 삶을 한탄이라도 하듯 “가난한 데다 다른 여자들처럼 인생을 즐길 수도 없으니, 평생 소소한 재미나 가끔씩 느끼면서 악착같이 일하다가, 늙어서 추하고 심술궂은 할머니가 되겠지. 정말 우울하다!”(81쪽) 말하는 메그의 이 말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날카롭게 현실을 꼬집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돈을 벌려면 남자들은 일을 해야 하고 여자들은 돈 많은 남자와 결혼을 해야 해. 정말 지독하게 불공평한 세상이야.”(319쪽) 씁쓸하게 내뱉는 메그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결혼의 환상에 젖어 있는 철부지 소녀가 아니라 세상의 불합리함이나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분명히 자각하고 있던 캐릭터임을 새삼 깨닫는다. 그럼에도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 속에서 책임감 있게 가족 모두를 위해 가장 성숙한 선택을 한 것이리라.
“대단한 미인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니까 싫은 사람도 꾹 참고 대해야 한다고? 그것 참 훌륭한 도덕률이네.”
“그 점에 대해서는 별로 논쟁하고 싶지 않아. 세상 이치가 그렇다는 거야. 그 이치를 거스르려는 사람은 고통을 당하고 비웃음을 살 뿐이야. 난 세상을 개혁하려는 사람들이 싫어. 언니도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개혁가가 좋은데.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되고 싶어. 세상은 개혁가를 달가워하지 않지만 개혁가가 없으면 세상은 굴러가지 않아. 넌 구세대고 난 신세대인 셈이네. 넌 세상에 맞춰 살아. 난 세상의 모욕과 야유를 즐기면서 내 뜻대로 신나게 살 거니까.” (582쪽)
두 고집쟁이 조와 에이미의 이 대화는 꽤 의미심장하다. 로리와 이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질 일들을 알고 나면 더더욱 그렇다. 개혁가가 되어 독립적으로 살아가면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칭찬을 듣는 것을 가장 기쁘게 여겼던 조. 늙어서 관절이 굳을 때까지,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하는 날까지 계속 뛸 거라고, 철들지 않겠다고, 최대한 오래 아이로 살고 싶다고 말했던 ‘조’이지만 그런 그녀도 결국 현실에 순응하는 삶을 선택하게 된다. 일찍이 “난 여자라서 고상한척하면서 살아야 해. 어떻게든 순응하고 살아야 된단 말이야.” 절규하듯 로리에게 말했던 그녀이기에, 그 마지막 선택이 나는 좀 더 안타까웠다. 어릴 때 나는 조가 로리와 결혼하지 않아서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내 기억 속에 조는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았던, 멋진 작가가 된 모습으로만 남았었는데, 맙소사 이번에 읽어보니 나는 이 작품의 절반만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누구하고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자유롭게 사는 게 너무 좋아서 세상 어떤 남자를 위해서도 자유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조’이지만 한 남자 앞에서는 그녀의 결심도 흔들리고 만다.
작가로 우뚝 서서 글을 쓰면서 큰돈을 벌고 자유롭게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살아가는, 늙어서 관절이 굳을 때까지, 지팡이에 기대어 다녀야 하는 날까지 계속 조가 독립적으로 살기를 바랐는데, 결국은 ‘가정’에 머무는 삶을 선택하게 되어서 조금은 실망스럽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얻더라도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안착 않은 채, 마음껏 사랑하면서 글 쓰며 살아갈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 바예르의 조언을 듣고 깨달아 돈벌이만을 위한 글쓰기를 그만 두는 장면도 못마땅했다. 그 때문이 아니라, 조 스스로 깨우쳤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조는 그러고도 남음직한 캐릭터가 아닌가? 아마 이런 한계는 <작은 아씨들>이 동화로 쓰였고, 가정의 행복을 으뜸 가치로 여기던 시절에 쓰였기 때문일 것이다. 루이자 메이 올콧 그녀 자신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어린이들을 위한 책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면 ‘조’ 또한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세상에서 제일 좋은 연인은 바로 어머니들인 것 같아요.”(847쪽)라는 조의 말은 어린 시절의 내가 놓쳤던, 그러나 지금은 분명하게 보이는 새로운 발견 중의 하나이다. 메그와 조, 베스, 에이미 등 네 자매가 나름의 가치관을 갖고 올곧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네 자매의 어머니 마치 부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독립적인 조를 만든 사람도 결국 ‘마치’ 부인이었다.
“네 말이 맞아, 조.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는 아내가 되거나 남편감을 찾으려고 경박스럽게 구는 여자로 살기보다는 행복한 독신으로 사는 게 낫지.” 마치 부인도 단호하게 말했다.(201쪽)
“너희가 짊어져야 할 작은 짐에 대해 조언을 해줄게. 때로는 짐이 버거울 때도 있겠지만, 짐은 우리에게 유익한 거야. 짊어지는 방법을 깨달으면 점점 가볍게 느끼게 돼. 일을 하는 게 건강에 좋고, 누구나 해야 할 일은 많이 있어. 일을 해야 삶에 권태를 느끼지 않고 나쁜 짓을 멀리할 수 있는 거야. 일은 건강과 영혼에도 보탬이 돼. 돈이나 유행을 좆는 것보다 일을 열심히 해야 힘과 독립심을 기를 수가 있어.” (243쪽)
베스의 죽음 뒤 사랑과 슬픔으로 깨달음을 얻고 난 뒤 조가 쓴 작품은 매우 좋은 평가를 받는다. 아버지는 조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 글에는 진실이 담겨 있어. 그게 비결이야. 유머와 비통함도 생생하게 살아 있어. 이제 너만의 방식을 찾은 거야. 넌 유명세나 돈을 바라지 않고 진심을 담아 글을 썼어.”(844쪽). <작은 아씨들>이 바로 그런 작품이 아닐까.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이에게 사랑이 찾아온다’(921쪽)는 노래처럼 <작은 아씨들>은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작품이기에 이렇게 오랜만에 다시 읽어도 새롭게 읽히며 마음을 뒤흔드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