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신간 목록을 훑어보다가 시몬 베유(Simone Veil)의 새 책을 발견했다. 그때 내가 본 책은 ‘꿈꾼문고’에서 나온 <시몬 베유의 나의 투쟁>이었다. 이 책 표지에는 유대인을 뜻하는 ‘다윗의 별’이 그려져 있다. 게다가 책 제목도 ‘시몬 베유의 나의 투쟁’이니, 나는 당연히 그 유명한 철학자 시몬 베유(Simone Weil), <중력과 은총>, <신을 기다리며>를 쓴 철학자 시몬 베유의 새 책인가 싶었다. 그녀에게 이런 저작이 있었다고? 의아한 마음으로 책 소개를 읽어보다가 뜻밖의 문구를 발견했다. “1974년 프랑스 보건부 장관으로 임명된 직후, 자발적 임신중단에 관한 법, 일명 ‘베유 법’을 통과시키며 여성인권 신장에 앞장선 프랑스 정치인 시몬 베유.” 아하, 그제야 동명이인임을 깨달았다. 그런데 이 시몬 베유의 글도 궁금해진다. 그래서 사서 읽게 된 책이 <시몬 베유의 나의 투쟁>이다. 책을 받아들고 맨 먼저 읽은 장은 자발적 임신중단에 관한 법안을 상정하기 위해 그녀가 의회에서 연설했던 내용을 담은 글이었다. <시몬 베유의 나의 투쟁>은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위한 투쟁’ ‘유럽을 위한 투쟁’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 ‘더 나은 사회를 위한 투쟁’으로 이루어지고, 거의 연설문을 글로 담았다. 여성해방과 관련된 글 중심으로 천천히 읽어나가고 있는데, 이윽고 시몬 베유의 또 다른 책이 출간되었다. <나, 시몬 베유> 이 책은 그녀의 자서전이나 마찬가지다. 연설문을 죽 읽어가는 것보다 자서전을 먼저 읽는 게 좋을 것 같아 노란 책부터 읽기를 마쳤다.

두 책의 구성은 거의 비슷하다. <나, 시몬 베유>는 그녀가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시작해서 유대인으로서 홀로코스트를 겪고,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대학을 진학하고, 교정행정국 판사가 되고, 프랑스 보건부 장관에 올라 임신중단 법안을 통과시키고, 유럽의회 최초 선출직 의장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숨 가쁜 삶이 펼쳐진다. <시몬 베유의 나의 투쟁>이 ‘홀로코스트/유럽해방/여성해방’으로 크게 분류한 것과 거의 비슷한 삶의 궤적을 보여준다. 이런 삶을 바탕으로 시몬 베유의 정체성을 단 두 개로 정의하라면 ‘유대인’과 ‘여성’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시몬 베유는 강제수용을 겪었기 때문에 ‘인간사에서 타인의 존재를 모욕하고 격하시킬 수 있는 모든 것에 극도로 민감해졌다.’고 말한다. ‘신체적으로 밀착하는 것만큼이나 정신적인 소외를 싫어하게 되면서 스스로를 마치 감옥 내의 투사처럼 여길 수밖에 없었다’.(<나, 시몬 베유>, 115쪽) 고백했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 유대인과 여성이라는 정체성 못지않게 현재의 시몬 베유를 있게 한 존재로 어머니를 꼽을 수 있겠다. 베유의 집안은 화목했지만 아버지는 가부장제에 충실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녀의 집에서 정치는 언급될 수 없는 주제였는데, 부모의 정치적 성향이 달랐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우파 일간지를 구독했고, 어머니는 사회주의 경향의 신문을 구독했으며 아버지 몰래 중도좌파 또는 좌파 잡지를 읽었다. 그런 틈에서도 베유는 ‘아버지의 결정이나 금기가 어머니를 괴롭히는 것 같다’고 서슴없이 말하곤 했다. 게다가 베유와 언니들은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너무 (경제적으로) 의존한다고 생각했고, 그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돈을 버는 일을 하지 않았기에, 경제적인 자율성을 전혀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가계부를 상세히 보고해야 했다. 어머니는 딸들에게 여러 번 주의를 준다. 그들은 유념해 듣는다. 절대 잊히지 않는 교훈이 담긴 충고였다. “일을 해야 할 뿐 아니라 번듯한 직업을 가져야 한다.”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베유와 자매들은 여성은 남편이 반대하든 아니든 공부하고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유와 독립’에 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몬 베유가 홀로코스트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프랑스로 돌아와 대학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전공하고, 그 사이에 결혼해서 세 아이를 낳고 마침내 변호사협회에 등록하겠다고 나섰을 때 그녀의 남편은 불만을 터뜨린다. 그때 그는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하면서 사회 경력도 쌓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재능 있는 아내가 집에서 육아에 전념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베유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뭐야? 당신 일이 궤도에 오를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 일하기로 했잖아. 당신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잖아. 국립행정학교에 가서 잘 되고 있잖아. 내가 일하는 걸 막을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어.” 이렇게 말했지만 베유는 자신의 남편이 이토록 부정적인 답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 같다. 자신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남편 또한 아내가 직업을 갖는 것을 거북해한다. 게다가 그는 법의 엄밀성과 힘을 믿으면서도, 변호사라는 직업을 그리 존중하지 않는다. 베유가 변호사라는 직업에서 피고인과 피해자를 바라보는 데 반해, 그녀의 남편은 돈을 낼 수 있는 의뢰인의 입맛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변덕스러움만을 보았다. 만일 이때 베유가 남편 뜻에 따라 집안에서 세 아이를 키우는 일에 만족하며 살았다면 임신중단법은 어떻게 됐을 것이며, 과연 그녀가 프랑스 국립묘지인 팡테옹에 묻히게 되었을까? 그저 가족 묘지에, 남편 옆에 이름 없는 여인으로 묻혔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시몬 베유의 삶을 일일이 옮길 필요는 것을 것 같다. 다만 그녀는 고통의 역사를 몸소 겪은 뒤 그 고통을 다른 사람들은 겪게 하지 않으려고, 다시는 그 고통이 반복되지 않게 하려고 자신의 평생을 바쳤다는 점만은 이야기하고 싶다. 베유 자신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여성의 대의를 위해 투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가 살아갈수록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역설적이지만, 살면서 여성이기 때문에 얻은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우슈비츠에서는 베유가 여성이기 때문에 한 여성이 일이 덜 고된 작업반으로 그녀를 지정해서 옮겨주며 보호해준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 모든 것은 여성의 권리에 대한 자신의 입장이 개인적인 복수심에서 오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녀가 보기에 ‘여성을 위한 기회는 그저 운에 맡겨져 있었고 법이나 제도를 통해서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차별을 시정하는 대가로, 사회는 여성이 신음하는 불평등을 줄임으로써 구체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회의 불평등과 이를 바로잡기 위해 필요한 조치란 성차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사회통합과 결속에서도 중요’한 문제이다. 이 책들을 읽고 나서 <시몬 베유의 나의 투쟁> 표지를 다시 보니 ‘다윗의 별’로만 보이던 그것이 이제는 장미꽃처럼 보인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타인의 행복을 증진하는 데 바친 사람, 세상에 장미꽃을 주고 간 사람. 그녀, 시몬 베유.


당시 나는 남자들이 임신중단보다 피임에 더 적대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피임은 여성에게 자유를 부여하고, 이전까지는 남성의 손에 쥐어져 있던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도로 여성에게 가져온다. 그러므로 피임이란 이전부터 내려져오던 관념을 문제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임심중단은 여성을 남성의 전권으로부터 면하게 해주는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여성을 멍들게 하는 것이었다. (<나, 시몬 베유>, 152쪽)

“대부분 남성으로 이루어진 의회에서 이렇게 말씀드리기가 송구합니다만, 우선은 여성으로서의 저의 신념을 나누고자 합니다. 낙태 수술을 즐겁게 받는 여성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문제는 여성의 말을 듣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여성에게 낙태는 비극이고, 언제나 그러할 것입니다. 비탄에 빠진 이 여성들을 누가 보살피고 있습니까? 현재의 법은 여성들을 오욕, 수치, 고독에 빠뜨릴 뿐 아니라 익명의 존재로 만들고 구속에 대한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여성들은 자신의 상태를 감추어야 하고, 곁에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한 줄기 빛이 되어 도움과 보호를 제공해줄 사람 없이 홀로 남겨집니다.” (<나, 시몬 베유>, 270쪽)

“우리는 여성의 직업 활동과 더불어 여성의 삶의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용어들과 함께 종종 따라오는 잘못된 논쟁에 참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성들은 일을 해야 한다 혹은 집 안에 있어야 한다. 여성 해방이나 속박이냐 같은 논쟁 대신, 저는 여성들이 바랄 수 있고, 바라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선택의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여성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삶의 틀과 환경이 세워지고, 이어서 여성의 존재 방식의 모델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여성들은 일과 가정의 양립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공권력의 책무는 여성들의 이러한 욕구를 고려하는 것입니다’, <시몬 베유의 나의 투쟁>, 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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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박람회
외르케니 이슈트반 지음, 김보국 옮김 / 프시케의숲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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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죽어가는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한다면 어떨까? 이 작품은 지식인, 노동자, 예술가 세 사람의 죽음을 다큐멘터리로 찍어 방송하는 내용을 소재로 삶과 죽음, 예술의 문제를 질문한다. 중간중간 웃음 터지는 부분도 많은 블랙코미디. 죽음은 단 하나의 진실인데 그걸 담은 예술도 진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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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합격, 계급 - 장강명 르포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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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채와 문학공모전이라는 특이한 제도, 간판과 서열 문화, 공정한 기회를 주기 위해 마련된 제도가 어떻게 사람들을 좌절시키는 시스템이 됐는지 꼬집은 책. 흥미롭게 읽었다...만 한국인들의 간판에 대한 집착은 영원할 것이라고 본다. 장강명 글은 처음 읽어봤는데 참 쉽게 막힘없이 쓰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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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암살자 1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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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지 열흘째 되던 날 내 동생 로라는 차를 몰던 중 다리 아래로 추락했다.”

 

이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동생 로라의 죽음. 그 죽음과 함께, 아니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폭로되는 온갖 비극. 그 비극이 이제는 여든을 훌쩍 넘긴 아일리스의 관점으로 서술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눈먼 암살자>는 아이리스의 회고 외에도 또 다른 이야기들이 교차하듯이 펼쳐진다. ‘눈먼 암살자라는 소설이 바로 그것인데, 이 소설은 죽은 로라의 작품이다. ‘눈먼 암살자속에는 유부녀인 상류층 여성과 공산주의에 경도된 한 청년의 사랑이 그려지는데, ‘그녀가 은밀히 만나 섹스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녀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준다면서 공상과학소설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것이 눈먼 암살자속의 또 다른 이야기이다. 아이리스의 회상, 로라가 남긴 작품 눈먼 암살자속 그와 그녀의 러브스토리, 그들이 주고받는 지어낸 이야기. 3가지 이야기는 과연 어떤 연관이 있을까?

 

이 작품은 처음엔 그리 읽기가 수월하지 않다. 꼬장꼬장하고 어딘가 뒤틀린 듯한 노파 아이리스의 회상으로만 이어진다면 별 막힘없이 읽어나갈 텐데, 문제는 바로 중간 중간 삽입된 로라의 눈먼 암살자와 그 안에서도 그가 들려주는 비현실적인 이야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 세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 틈틈이 기사 형식으로 그 무렵의 중요한 사건들이 종종 나열된다. 그러므로 독자는 이 네 가지 이야기들이 과연 어떤 관련이 있을지 유추하느라 두뇌를 바삐 굴려야 한다. 그런데 어찌 보면 작품을 술술 읽어나가는 데 큰 장애가 되는 이 복잡한 구조는 사실 애트우드의 <눈먼 암살자>를 진심으로 찬탄하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하다. 1권의 중반을 넘어가면서 아마 대부분의 독자는 진심으로 이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면서 작가의 천재적인 솜씨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아이리스와 로라. 두 자매를 떠올리면 책을 덮고도 마음이 아프다. 유서 깊은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지만 그들을 지켜주던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난다. 게다가 전쟁, 저 멀리에서 일어나 전혀 상관없을 것 같았던 세계대전이 이 가정에 또 다른 먹구름을 드리운다. 참전했던 아버지는 그곳에서 형제들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집으로 돌아온 뒤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아이리스의 부모는 전쟁 전에도 딱히 서로 좋았다고 볼 수 없지만 전쟁 이후로는 완전히 남남과도 같은 사이가 되어버린다. 물론 아이리스가 보기에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어떤 면에서는 어머니에게 헌신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도달할 수 없었고, 그것은 어머니 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그들은 영원히 서로를 갈라놓는 치명적인 묘약을 마신 것 같았다. 같은 집에서 살고, 같은 식탁에서 먹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음에도.’(1, 137)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의 사업, 아니 체이스 집안을 일으키는 데 밑거름이 된 단추공장마저 기울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권위적인 아버지가 내릴 수 있는 선택은 그리 많지 않다. 첫째 딸 아이리스를 팔기로 한 것이다. 결혼이라는 이름 아래 리처드 그리픈이라는 신흥 부자에게. 그때 아이리스의 나이는 열여덟, 리처드는 무려 서른다섯 살이다. ‘정략결혼’- 비극은 이제 거침없이 시작된다.

 

아이리스에게 마치 선택권이 있는 듯, 네가 원하면 거절해도 된다면서 자기 또한 고통스러움을 드러내는 이 무책임한 아버지는 아이리스와 로라 두 자매에게 일어난 비극의 원죄이기도 하다. 어머니를 잃은 두 딸을 마치 무슨 얼룩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기 손에 남아 있다고 말하던 그. 그가 이제는 딸을 팔아 가계를 다시 일으켜보기를 꿈꾸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고고한 척, 고통받는 척 가장한다. 어디 이 무능력하면서 권위적이기만 한 아버지만 그러한가, 이 작품을 가만 들여다보면 주요 남성 등장인물들 가운데 누구하나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아이리스의 남편 리처드, ‘노동 착취 공장 거물인 그는 여러 면에서 악한이며, 어린 시절의 아이리스나 로라를 훈육했던 가정교사 어스카인 선생도 마찬가지이다. 로라와 아이리스는 어스카인과 씨름하는 동안 그에 맞서기 위해 거짓말과 속임수외에, ‘은근히 무례하게 구는 법과 말없이 저항하는 법을 배운다. ‘복수는 때를 기다리다 상대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하는 것이 최고라는 것을 배웠으며 들키지 않는 법을 배운다. 이 책을 읽을 독자를 위해 자세히 밝히기는 어렵지만, 로라와 아이리스가 호감을 지녔던 청년, 알렉스 또한 아이리스에게 했던 어떤 행동 때문에 좋게 볼 수만은 없다. 로라가 창작해 낸 세계 눈먼 암살자속의 또한 마찬가지이다. 제멋대로인데다가 전형적인 이기주의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남편을 떠나라고 종용하는 그 모습이란!


이렇게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두 소녀는 다른 나라, 혹은 다른 행성에 관한 이야기들을 좋아하면서 자란다. 그 이야기는 여성들이 빛나는 천으로 만들어진 아주 짧은 치마를 입고 있고 모든 것이 번쩍이는 미래로부터 온 우주선, 식물들이 말을 할 수 있고 거대한 눈과 엄니를 가진 괴물들이 거니는 소행성들로 이루어진다. 두 소녀를 돌봐주는 리니는 이런 것들을 실없는 이야기라고 지구와 비슷한 면이 전혀 없잖니.” 핀잔을 주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두 소녀들은 그런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녀들을 둘러싼 이 폭압적인 세계, 지구와 전혀 닮지 않았으므로.

 

그래서 로라는 눈먼 암살자에 공상과학 소설 같은 이야기를 삽입한 것일까? 그러나 그 이야기는 어린 시절의 로라와 아이리스가 좋아했던 다른 나라, 혹은 다른 행성에 관한 이야기들과는 사뭇 다르다. 로라의 눈먼 암살자에는 카펫을 짜던 아이들이 실명하게 되면 여자애나 남자애 할 것 없이 모두 포주들에게 팔리고, 그 눈먼 아이들 중 매음굴을 탈출한 아이들은 비밀스러운 살인에 종사하게 된다. 청각이 예민하고, 소리 없이 걸을 수 있고, 가장 작은 틈으로도 빠져나갈 수 있어서 고용 암살자로 인기가 높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앉아서 끊임없이 카펫을 짜는 동안, 아직 그들의 시력이 온전할 동안 서로에게 귓속말로 속삭이던 이야기들은 모두 미래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 사이에는 눈먼 자만이 자유롭다는 속담이 떠돌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정말로 눈먼 자만이 자유로울까?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 진정으로 눈먼 암살자가 누구였는지 그 진실을 깨닫게 되면, 누구도 눈먼 자가 자유롭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로라가 이토록 참혹한 이야기를 작품 안에 그리게 된 것은 결국 어린 시절 다른 행성을 꿈꾸던 그 소녀들의 세상이 망가져버렸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 어디에도 소녀들이 꿈꾸던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이런 이야기를 눈먼 암살자의 입을 빌어 서술하도록 했으리라.

 

앞서 이야기했듯, <눈먼 암살자>의 모든 비극은 아이리스의 아버지가 권한 잘못된 결혼, 딸을 팔아 집안을 일으켜보려는 정략결혼에서 비롯되었다. 때문에 이 작품에는 애정 없는 결혼에 대한 비판 어린 시선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1권 초반부터 아이리스는 나는 어느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많은 재앙을 모면할 수 있었을 텐데. (1, 64)’라고 말하며, 리처드가 청혼하면서 건네는 반지를 반짝이는 빛의 파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첫날밤에 그녀는 큰 침대를 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그날 밤 나는 호텔의 거대한 침대 위에 몸을 웅크린 채 덜덜 떨며 누워 있었다. 발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내 앞에는 무한대로 펼쳐진 풀 먹인 하얀 침대보가 북극의 쓰레기처럼 놓여 있었다. 그것을 횡단하여 길을 되찾고 따뜻한 곳으로 돌아가는 일이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방향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아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384)

 

사람들은 행복한 결말을 보고 울 때와 같은 이유로 결혼식에서 운다. 확실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그 무엇인가를 결사적으로 믿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1, 404)

 

그러니까, 이런 것이 결혼이구나. 나는 생각했다. 이런 권태, 이런 경련, 그리고 분으로 뒤덮인 코 옆의 땀구멍을 함께 나누는 것. (1, 409)

 

나는 자유연애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어. 결혼은 케케묵은 관습이라고 말했을 뿐이야. 결혼이 사랑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했어. 그것뿐이야. 사랑은 주는 것이고, 결혼은 사고파는 거야. 사랑을 계약에 집어넣을 수는 없어.”로라는 말했다. (2239)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한 이야기는 <눈먼 암살자>의 아주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 2권까지 모두 읽어 내린 이들은 로라의 죽음과 마침내 진실을 마주한 아이리스의 참혹한 심정, 그 오랜 세월을 악착같이 견뎌내고 여든이 넘도록 살아가고 있는 그녀의 안타까운 삶을 마주하면서, 이 책이 드러낸 수많은 진실 가운데 혹 내가 놓치거나 잘못 이해한 것은 없는지, 1권을 다시 펼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워티 닉시 호라는 그 아무것도 아닐 것 같았던 배 이름 조차 얼마나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는지 깨달을 것이며 이 두 소녀의 비극 앞에 가슴이 먹먹해질 것이다. 아이리스는 말한다. ‘반쪽 인생이라도 전혀 없는 것보다 낫다.’(2, 326) 그러나 정말 그녀들은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렇지 않았기에 눈먼 암살자에 이런 구절을 집어넣은 것이 아닐까. “눈먼 암살자는 온갖 소문을 다 들어 왔고, 그래서 그 여자들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어요. 그들은 사실 죽은 게 아니에요. 아무도 자신들을 귀찮게 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런 소문을 퍼뜨린 것뿐이죠. 실제로는 그들은 탈출한 노예들이거나 남편이나 아버지에 의해 팔려가는 운명을 피하기 위해 도망친 여자들이에요.”(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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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8-14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이건 또 얼마나 대단한 소설인 것입니까.....

잠자냥 2019-08-14 16:13   좋아요 0 | URL
<시녀이야기>와는 또 다른 대단한 소설입니다. 애트우드 님은 천재니까요! ㅋㅋㅋㅋㅋㅋㅋ

레삭매냐 2019-08-21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표지가 너무 구린 것 같아요...

잠자냥 2019-08-21 12:30   좋아요 0 | URL
책 내용을 이것저것 담느라 애쓴 거 같은데.... 너무 많이 담아서 오히려 망친 것 같아요. ㅎㅎ암튼 민음사에서 나온 애트우드 책 표지는 대부분이 참.... 애잔합니다.
 
나, 시몬 베유 - 여성, 유럽, 기억을 위한 삶
시몬 베유 지음, 이민경 옮김 / 갈라파고스 / 2019년 8월
평점 :
품절


자발적 임신중단법을 합법으로 이끌어낸 시몬 베유의 자서전. 오늘의 그이가 있기까지 ‘공부하고 일해서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라’는 어머니의 가르침과 강제수용소에서의 참혹한 기억이 ‘타인의 존재를 모욕하는 것’에 민감한 투사를 만들어 냈음을 알게된다. 또다른 베유들이 더 많아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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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08-14 0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어제 읽던 책에서도 정치가 시몬 베유에 대한 단락이 있더라구요. 임신중단법 진행 중에 숱한 협박을 받았더라는.... 자신의 고통을 승화시켜 다른 사람을 돕는데까지 나아가는 사람들은 정말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시몬 베유가 바로 그런 사람이죠.


그나저나, 제가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은, 읽고 싶다 찜해 놓은 신간을 저보다 먼저 읽는 알라디너.
고로 잠자냥님! 당첨!!!

다락방 2019-08-14 08:06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그러게나 말입니다.
잠자냥 님은 어쩌면 그렇게 신간을 누구보다 발빠르게 읽고 리뷰를 쓰시는지. 진짜 대단하세요!

단발머리 2019-08-14 09:16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제가 그 다음으로 부러운 사람은... 지난주에 뉴욕 다녀온 사람이어서 다락방님도 당첨!!

잠자냥 2019-08-14 10:05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 님/ 시몬 베유는 살아있을 때도 임신중단법 때문에 많은 협박을 받았는데, 2017년 세상을 떠난 뒤로도(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녀의 무덤에 나치 문장을 새겨놓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네요(임신중단법에 항의하는 사람들 중에는 뱃속 태아를 홀로코스트에 끌려간 유대인에 비유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에휴.

다락방 님/ 제가 관심있는 신간이 나오면 빨랑 읽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사람이라 그런가 봅니다. ㅋㅋㅋㅋㅋ 근데 그건 다락방 님과 단발머리 님을 포함한 알라디너 대부분이 그렇지 않나요? ㅎㅎㅎㅎ 저도 뉴욕 다녀온 사람 부럽.......... 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