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도플갱어의 섬 일본 추리소설 4
에도가와 란포 지음, 채숙향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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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름에는 추리소설이지! 지옥철을 견디는 데는 추리소설이 제격이지! 하면서 집어든 에도가와 란포의 <도플갱어의 섬>- ‘심리시험’, ‘지붕 속 산책자’, ‘도플갱어의 섬’, ‘검은 도마뱀’ 네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역시 재미있어. 흥미롭게 빨려 들어가면서 읽었는데, 응? 이상하다, 이 기시감은 무엇? 알고 보니 ‘지붕 속 산책자’와 ‘도플갱어의 섬’은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책으로 읽은 작품이다. 그래도 다시 한 번 재미나게 읽었다. 결말을 알고 읽는 데 무슨 재미냐고 물을 수도 있다. 물론 추리소설은 범인은 바로 너! 이런 이유 때문이지! 우후훗- 하고 범인을 지목하고 범죄 방법이 드러나는 순간의 카타르시스 때문에 읽는다. 그러나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은 처음부터 범인이 드러나면서 시작하고, 심지어 범죄 방법까지 독자는 안다. 그런 상태에서 그 범죄를 탐정이나 형사가 어떻게 밝혀내는가를 지켜보기 때문에, 범인과 범행 수법을 안다하더라도 다시 읽는 재미가 크게 줄어들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범죄를 저지르게 된 동기, 인간의 이상 심리를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번에 네 작품을 읽으면서 란포 특유의 작법 스타일이랄까, 범죄자로 치자면 그만의 고유한 트릭이랄까, 그만의 개성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란포는 젊은 주인공, 주로 대학생이거나 대학을 갓 졸업한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이 책에 실린 네 작품 중 세 작품(‘심리시험’, ‘지붕 속 산책자’, ‘도플갱어의 섬’)이 그러한데, 주인공들은 주로 머리가 비상하게 좋은데도 이상하게 이 세상에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지붕 속 산책자’의 사부로나 ‘도플갱어의 섬’의 히로스케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사부로는 어떤 직업을 가져 봐도 통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노는 것도 마찬가지여서 당구, 테니스, 수영, 등산, 바둑, 장기뿐만 아니라 각종 도박에 이르기까지 오락백과 사전 같은 책까지 사들여 놀이라는 놀이는 죄다 시도해보았지만 직업과 마찬가지로 늘 실망만 한다. 여자와 술에도 마찬가지. 그래서 그는 “이런 재미없는 세상에서 오래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겠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히로스케는 또 어떠한가.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무료하게 살아간다. 학교 다닐 때는 스스로 철학과 출신이라 칭했으나 그렇다고 철학 강의를 들은 건 아니다. 한때 문학에 몰두하면서 그 방면 서적을 탐독하더니, 때로는 건축과 강의를 듣기도 한다. 사회학, 경제학에 이어,  유화 도구를 사들여 화가 흉내를 내는 등 엄청난 ‘변덕쟁이’였다. 무엇에도 오래 집중하지 못하고 금방 싫증을 내는 성격이다. 직업을 갖고 평범한 생활을 영위한다는 식의 생각이 없다. 그는 세상을 경험하기 전부터 세상에 완전히 질린 상태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면서도 하숙방에서 도무지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극단적인 몽상가로 언젠가는 자기만의 이상향을 세우리라는 몽상에 잠겨 있다.

이렇게 인생에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하던 인물들이 우연한 기회를 통해 눈이 번쩍 뜨이는 재미난 ‘놀이’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곧 ‘범죄’로 이어지고 만다. 주인공들은 대개 처음에는 일종의 유희처럼 금지된 선을 조금 넘는 정도에 그치는데, 거기서 조금씩 욕망의 싹이 자라나 마침내 절대로 넘어서는 안 될 선까지 넘고야 만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는 인간의 그릇된 욕망, 지나친 호기심이 ‘그’ 또는 ‘그녀’를 살인자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부로는 싫증을 잘 내는 성격 때문에 하숙집도 번번이 바꾸는데, 새로 옮긴 하숙집에서 어느 날 우연히 벽장을 발견한다. 벽장을 통해 천장으로 올라갈 수 있고, 그 천장을 돌아다니면서 말 그대로 ‘지붕 속 산책자’가 되어 다른 하숙생들의 방을 천장 위에서 엿보는 일에 재미를 들인다. 사부로는 그 전에 아마추어 탐정 ‘아케치 고고로’를 알게 되면서 지금까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범죄’에 새로운 흥미를 느끼게 되기도 했다. 탐정 소설을 읽으면서 가능하다면 자신도 그 범죄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눈부시고 요란한 놀이를 해보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까지 품게 된 가운데, 지붕 속을 돌아다니면서 남의 방을 엿보는 은밀한 놀이를 즐기게 된다. 여기까지는 관음증에 그치고 말았을 텐데, 그는 왠지 한대 후려갈기고 싶게 생긴 하숙생 ‘엔도’를 죽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사실 처음에는 천장 위에서 그를 엿보다가 잠든 엔도의 입에 침을 뱉으면 커다랗게 벌어진 그의 입 속으로 침이 똑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만일 그 입속에 독약을 넣는다면? 하는 생각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심리시험’의 후키야가 학비 걱정에 시달리던 참에 부잣집 노파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 노파가 돈을 숨겨놓은 비밀 장소를 알게 되고, 일종의 유희처럼 살인 계획을 세워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나, 히로스케(‘도플갱어의 섬’)가 우연히 대학시절 그와 쌍둥이처럼 닮았던 고모다 겐자부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범행을 꿈꾸는 것 등등 모두가 우연한 기회에 살인자가 된다. 조금 다른 경우이지만 ‘검은 도마뱀’의 흑천사, 즉 검은 여인은 범죄 자체를 즐기는 인물이다. 그녀는  탐정 아케치와 내기하듯, 게임하듯 범죄를 즐긴다. 더욱이 그녀가 범죄를 저지르는 동기는 돈이 아니다. 그녀는 이 세상의 아름다운 건 죄다 모아보는 게 소원이다. 보석, 미술품, 아름다운 사람까지..... 그녀에게 아름다운 인간은 미술품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이 부분은 자신만의 이상향을 꿈꾸던 히로스케와 닮았다. 그리고 그들은 애초에 별 거리낌 없이 무료한 일상, 지루한 삶, 흥미를 잃어버린 삶에서 일탈함으로써 쾌락을 느끼듯이,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도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경찰 조사를 받고 돌아온 후키야는 득의양양해서 으쓱해하면서 떠들기도 하고(‘심리시험’), 사부로는 살인을 저지른 뒤 자신의 솜씨를 자랑스러워할 여유까지 보인다. “나도 참 대단해, 이것 봐, 누구 하나 여기 이 하숙집에 무서운 살인범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잖아.”(‘지붕 속 산책자’) 어디 그뿐인가. 죽은 이를 사칭하고, 자신의 엄청난 비밀이 밝혀질까 봐 사랑하는 여인까지 죽이게 되는 히로스케는 자기가 만든 기이한 왕국을 보며 흡족해마지 않는다(‘도플갱어의 섬’). 앞서 말했듯 검은 도마뱀은 사람을 수집하고(그래서 죽이는 일도 주저하지 않고), 그 사람들을 모아놓고 황홀해하는 기이한 심리를 지닌 여인이다. 그릇된 욕망과 호기심이 악의 질주를 멈추지 못한다.


진실은 항상 드러나고 나쁜 짓은 항상 폭로된다, 사람의 아들은 역시 결국 탄로 나는 법이다.(셰익스피어 인용-‘지붕 속 산책자’)

그러나 완벽해 보이는 범죄를 저지른 이들에게는 늘 허점이 있으니, 그 허점은 주로 그들의 무의식이 빚어낸 결과이다. 살인을 저지를 때 찢겨진 병풍, 언제부터인가 피우지 않게 된 담배, 아주 오래 전에 썼던 삼류 소설 등등. 자신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생각지도 못했던 자기의 무의식이 결국 자기의 범죄를 지목하고 덜미가 되고 만다. 결국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 속 인물들은 주로 무료한 일상에 놓여 있다가 비뚤어진 호기심에서 유희처럼 살인을 저지르고, 자신의 완벽한 범죄에 우쭐거리지만, 하나의 허점, 무의식에 덜미를 잡히고 마는 것이다. 결국 란포는 모든 범죄는 인간의 그릇된 심리 상태에서 시작되고 인간 스스로 덫을 놓고 만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도플갱어의 섬>을 읽는 내내 인간 심리 탐구자 란포의 정신세계를, 그 머릿속을 산책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마치 사부로가 지붕 속을 거닐며 다른 하숙생들의 방을 엿보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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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 Yorke - ANIMA [디지팩]
톰 요크 (Thom Yorke) 노래 / 강앤뮤직 (Kang & Music)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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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을 가장 핫하고 보람차게 보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 톰 요크의 이 앨범을 듣고 7월 28일 올림픽홀에 가는 것! 톰 요크의 끝없는 재능이 이 앨범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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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9-07-23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톰 요크는 이제 락스타가 아닌 아티스트가 된 거 같아요. 하지만 전 그의 락스타 시절이 더 그립답니다. ㅜ_ㅜ 많이 덥겠지만 부디 즐거운 공연 관람 되시길 기원하며. 고등학생 시절, The bends 와 OK computer 수백번 들은 사람 올림.

잠자냥 2019-07-23 14:07   좋아요 1 | URL
우리 톰 ㅋㅋㅋ 이젠 정말 아티스트예요! 음악이 어쩜! 아티스트로 만든 이 음악들도 엄청 좋아요. 언제 기회되면 한번 들어보세요. 톰 요크 솔로 앨범 이제 3집인데 전 1집부터 3집까지 다 좋더라고요. ㅎㅎ The bends 와 OK computer 앨범은 정말 명반이죠. 지금도 제 아이폰에 고이 담겨 있습니다. ㅎㅎ
 
미지의 걸작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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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않았다. 지루했다고 해야 할까. 몇몇 작품을 읽은 뒤 큰 감흥을 받지는 못했다. 이제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미지의 걸작>으로 나는 발자크를 다시 본다. 수도사 차림으로 독한 커피를 달고 살면서(살아생전 그가 마신 커피는 거의 5만 잔에 달한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엄청난 강도로 글을 쓴 작가. 그의 <인간 희극>은 90여 편이 넘는 작품들로 구성되며, 등장인물만 2,000명에 이른다. 나폴레옹이 이루지 못한 것을 자신은 펜으로 이룰 것이라고 장담했다는 발자크. 평민의 아들이었으면서도 자기 이름에 귀족을 뜻하는 ‘드(de)’를 넣어 ‘오노레 드 발자크’로 불리기를 고집했던 사람.

그는 왜 그토록 미친 듯이 글을 썼을까? 발자크가 꽤 속물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작품에 실린 작가 소개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이 책은 그 사실을 ‘먼저’ 지적하고 시작한다. <미지의 걸작>은 앞부분에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을 인용하면서 발자크라는 한 인간을 소개한다. 츠바이크에 따르면 발자크는 속물인 동시에 결핍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발자크가 서른두 살에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성공을 바라는 야심 가득한 청년을 만날 수 있다. 발자크는 말한다. “조만간 나는 한 재산 장만할 겁니다. 문필가로서, 아니면 정치계에서, 아니면 언론계에서, 아니면 결혼을 통해서, 아니면 어떤 사업상의 일확천금을 통해서 말입니다.”

발자크는 생애 내내 그 무엇보다 돈을 원했다. 부를 통해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오래 전 나는 돈을 간절히 바라는 것 자체가 속물이며 인간으로서 부끄러운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발자크의 지적은 거의 맞다. 이 세계는 부를 쌓을수록 누릴 수 있는 자유도 많아진다. 그렇지 않은가? 게다가 발자크는 경제적으로 쪼들렸다. 귀족 출신도 아니며 가진 것이라곤 글 쓰는 재주뿐이고, 사업에도 번번이 실패하고, 그로 말미암아 생긴 엄청난 빚을 다시 글을 써서 번 돈으로 갚고, 그렇게 번 돈을 또 사업에 투자하고 실패하고, 다시 작업실에 자신을 가둔 채, 광적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삶. 그렇기에 발자크는 결혼을 통해 자신의 채무를 갚아주고 신분상승을 이뤄줄 귀족 여인을 평생 찾아 헤맨다. 그의 꿈은 이뤄졌을까? 놀랍게도 쉰 살이 넘어서 드디어 그는 귀족 여성과 결혼함으로써 그 자신의 오랜 바람이었던 상류사회 진입을 눈앞에 두게 된다. 그런데 인생이란 참으로 덧없으니, 과로로 쓰러진 발자크는 결혼한 지 몇 달 만에 허무하게 삶을 마감한다.

작품이 아닌, 발자크의 삶을 이렇게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까닭은, 이 책에 실린 두 편의 이야기는 발자크의 삶을 알 때 좀 더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 또한 츠바이크의 발자크론을 인용하면서 시작한 게 아닐까. <미지의 걸작>에 실린 짧은 두 편의 이야기, ‘영생의 묘약’과 ‘미지의 걸작’에서는 평생 손에 잡히지 않는 성공, 상류층이라는 신분 등 자신이 애초에 지니지 못했던, 그래서 결핍을 느꼈던, 때문에 더 간절히 바라고 욕망하게 되는, 그러나 끝끝내 가질 수 없었던 그 신기루와도 같은 것을 추구했던 발자크의 초상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도매상인에게 세상은 봇짐이거나 유통 중인 지폐 뭉치다. 대부분의 젊은 남자들에게 세상은 여자다. 일부 여자들에게 세상은 남자다. 그리고 어떤 영혼들에게 세상은 거실이고, 집단이며, 동네이고, 도시다. 하지만 돈 후안에게 세상은 그 자신이었다! (‘영생의 묘약’, 43쪽)


첫 번째 이야기인 ‘영생의 묘약’은 호색한의 대명사 돈 후안의 삶을 그린다. 끊임없이 여자를 유혹하고 그 여자를 얻게 되는 순간, 냉혹하게 여자를 버리는 행위를 거듭하는 돈 후안. 발자크가 돈 후안과 같았다는 소리인가? 묻는 이도 있으리라. 그러나 발자크는 이 바람둥이 돈 후안의 이야기에 조금 색다른 창작의 손길을 덧붙인다. 한순간의 쾌락만을 뒤쫓던 돈 후안, 그도 진실로 얻고자 했던 것이 있으니, 다름 아닌 ‘불멸의 삶’이다. 쾌락에 대한 끝없는 욕구와 그런 삶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넉넉한 재산을 지닌 돈 후안이지만 그런 그에게도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영원히 끝나지 않는 젊음이다. 그토록 많은 재산과 쾌락을 끝없이 누리려면 그는 죽지 않고 오래 살아야 한다. 그것도 영원한 젊은이로. 그러나 그게 가능한 인간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는 뜻밖의 기회를 통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묘약, 이른바 ‘영생의 묘약’을 손에 넣게 된다. 돈 후안은 영원한 젊은이로 이 삶을 누릴 수 있을까?

두 번째 이야기인 ‘미지의 걸작’은 ‘미술’을 소재로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걸작을 완성하고자 하는 천재 화가 프렌호퍼가 등장한다. 프렌호퍼는 발자크가 그려낸 상상 속 인물이지만 이 작품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는 포르뷔스를 비롯해 푸생은 실존 인물이다. 거기에 발자크는 시대를 풍미했던 루벤스, 렘브란트, 티치아노, 라파엘로 같은 실제 대가들의 화풍을 언급하면서 프렌호퍼의 입을 빌려 자신의 해박한 미술론을 한껏 펼쳐 보인다. 그런데 프렌호퍼의 예술론을 듣고 있노라면 ‘그림과 화가’라는 관계를 통해 ‘문학과 작가’ 또는 ‘소설과 소설가’의 관계에 대한 발자크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즉, 이 작품에서 미술은 하나의 상징처럼 다뤄지면서 문학을 비롯한 어떤 예술 작품 전체에 대한 예술가의 태도, 그에 대한 발자크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부서지기 쉬운 우리의 감정들 중 그 어떤 것도, 영광과 불행으로 점철되는 운명의 감미로운 형벌을 시작하는 예술가의 젊은 열정 같은 사랑과 닮은 것은 없다. (‘미지의 걸작’, 71쪽)

“위대한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통사법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만으로, 언어적 실수를 범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아!” (‘미지의 걸작’, 77쪽)


포르뷔스가 보기에 프렌호퍼는 예술에 열정적으로 빠져 있으며 다른 화가들보다 더 높이, 더 멀리 보는 인물이다. 그는 색채와 선의 절대적 진실성에 대해 깊이 성찰할 줄 안다. 프렌호퍼가 보기에 이미 유명해진 화가들은 아직도 진실한 그림을 그릴 줄 모르는 애송이들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의 작품은 그럴듯하게 그려지긴 했으나 살아 있지 않다. 그에 비해 자신의 그림은 “영혼을 지니고 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하나의 감정이고, 열정”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예술에는 신념이 필요하지. 이와 같은 창조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선 오랫동안 작품과 함께 살아야만 하네. 이 몇 개의 음영들을 위해서도 나는 많은 작업을 해야 했지.(...) 내가 이 효과를 재생하기 위해 믿을 수 없는 고통을 치렀을 거라 생각되지 않나?”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프렌호퍼의 이런 말들은 발자크가 자기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위대한 작가이고, 내 작품은 영혼을 지녔으며 이런 놀라운 작품을 쓰기 위해 나는 믿을 수 없는 고통을 치렀다고, 치르고 있다고.

그런데 이토록 자신만만하게 타인의 그림을 평가하고 거의 완벽에 가까운 예술론을 펼치는 프렌호퍼. 그 자신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최고의 회화 실력을 지녔다는 프랜호퍼는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걸작 <카트린 레스코>를 10년에 걸쳐 비밀리에 그려왔다. 포르뷔스와 푸생은 나날이 그의 걸작이 궁금해진다. 그리고 마침내 프렌호퍼의 걸작을 마주하게 되는데! 포르뷔스와 푸생은 경악할 수밖에 없다. 포르뷔스와 푸생이 본 그림은 프렌호퍼가 이야기했듯이 절대적으로 완벽한 회화이자, 그 누군가의 회화와도 견줄 수 없는 영혼이 살아 숨 쉬는 진실한 그림일까?

이런 질문 속에서 눈치 빠른 독자라면 프렌호퍼의 회화가 어떤 그림일지 예상 가능할 것이다. 마치 영원한 젊음, 불멸의 삶을 꿈꾸었던 돈 후안의 소망이 좌절되듯이,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듯이, 프렌호퍼의 뮤즈 카트린의 초상을 담은 회화는 포르뷔스와 푸생의 기대를 크게 무너뜨린다. 애초에 불가능했던 것을 꿈꾸었던 돈 후안과 프렌호퍼. 이 두 사람의 모습은 끊임없이 성공을 바라며, 신분 상승을 꿈꾸었던 발자크 그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돈 후안도 프렌호퍼도 그들이 욕망했던 것을 끝내 이루지 못한다. 오노레 드 발자크의 ‘드(de)'를 진실로 이룰 수 있는 삶, 귀족으로서의 삶을 눈앞에 두고 허무하게 죽어버린 발자크의 삶과도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다.

그러나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면 발자크는 자신이 꿈꾸던 세속적인 부와 명예, 신분 상승 등은 손에 잡을 만하면 놓치고 말았지만 예술가로서의 명성은 결국 이루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사랑의 열매는 빨리 없어지지만, 예술의 열매는 불멸한다네.”(‘미지의 걸작’, 122쪽) 라는 이야기처럼 사랑이나 성공, 귀족이라는 신분은 한없이 덧없기만 하다. 그러나 예술을 영원하다. 그리고 발자크는 자신의 걸작으로 불멸하고 있다. 세속적 욕망은 언젠가 이루더라도 결국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리라, 그러나 예술만큼은 영원하다는 것을 <미지의 걸작>은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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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7-22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못 읽고 반납했는데... 다시 빌려야 하나요.

잠자냥 2019-07-22 12:33   좋아요 0 | URL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펼쳐 보시면 알겠지만 본 내용은 짧아서 금세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Falstaff 2019-07-22 14: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또 발자크가 나왔군요. 포착되면 언제나 고민하게 만드는 작가가 아휴, 발자크입니다. ㅡㅡ;;
근데 단편 두 편의 가격이 좀 심하네요.

잠자냥 2019-07-22 14:43   좋아요 0 | URL
네 이 책은 아마 폴스타프 님이 직접 보시면 화낼 거예요. ㅋㅋㅋ 게다가 앞뒤로 이런저런 설명이 덧붙여져 있어서 본문 내용은 정말 얼마 되지 않습니다. 양장본에 책에 옷을(말 그대로 천을 입힌) 장정이라 아주 비싸게 받는 것 같습니다. 이 시리즈가 다 그래요(츠바이크 ‘감정의 혼란‘까지 두 권 나왔습니다만).

coolcat329 2019-07-23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자체도 고급스럽던데 귀족의 삶을 꿈꾸던 오노레 ‘드‘ 발자크가 봤으면 좋아했을까요?ㅎ 저도 읽을 책에 추가하네요^^

잠자냥 2019-07-23 14:09   좋아요 0 | URL
ㅎㅎ 자기한테 어울린다고 좋아했을 법한 고급스러운 책이긴 합니다. ㅎㅎ

카알벨루치 2019-07-23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 오만잔이 심장을 발자크~ㅋㅋ글 잘 읽고 갑니다 ㅎ

잠자냥 2019-07-23 15:29   좋아요 1 | URL
커피를 그렇게 마셔대고 밤새 글을 썼으니 죽을 수밖에요;;; 음. ㅎㅎㅎ
 
카시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2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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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가 사라진다. 스스로 사라졌을까, 정말 살해당했을까? 소녀의 실종을 둘러싸고 전쟁으로 망가진 영혼, 그와는 또다른 이 세계의 일상적인 폭력과 악의 형태가 날줄과 씨줄 엮듯이 펼쳐진다. 비뚤어진 인간의 어리석음과 결핍, 욕망, 그로 인한 파국 등등 무엇하나 놓치지 않은 빼어난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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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리커버 도서는 잘 사지 않는 편이다. 이미 읽은 책이라면 더 그렇다. 그런데 요즘엔 책도 (워낙 안 팔리니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공략하려는 의도인지) 소장 가치를 노리는 것 같다. 그래서 출판사마다, 온라인 서점마다 리커버 도서가 정기적으로 선을 보이곤 한다. 그러다 보니 읽은 책인데도 리커버 도서를 갖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경우가 이따금 있다. 꾹 참고 넘길 때가 많은데.... 이렇게 모아 놓고 보니 알라딘 리커버 도서가 좀 있다.



브레히트, 아라공, 마야콥스키 등의 시를 담은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시는 언어의 예술, 말맛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번역 시집은 거의 읽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책은 살 수밖에 없었다. 표지도 아름다웠지만, 이 리커버 판을 살 때 함께 나눠주던 굿즈(유리컵)가 몹시 탐이 나서 질렀던 기억이 난다. 컵도 아름답고, 책도 아름답다. 그 안에 담긴 시는 더 아름답다. 이 책은 금세 절판되었는지, 개정판으로만 만날 수 있다.




카뮈의 <페스트>- <페스트>는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중학생 때 읽었다. 그러므로 성인이 되어 다시 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참에 이 리커버 도서가 나왔으니 냉큼 샀다. 쥐를 형상화한 모양이 혐오(?)감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지만 내 생각엔 <페스트>와 정말 잘 어울리는 표지 같다. 그리고 사실, 이 책도 그때 주는 굿즈가 탐나서 샀던 듯..... (그러니까 결국 리커버 도서는 표지보다 굿즈가 중요하다는? 응??)




레이 브래드버리 <화씨 451>- 이건 정말 표지에 반해서 샀다. 실물 받아보고 정말 멋있어서 더 깜놀. 양장본에 손에 잡히는 사이즈. >_< 게다가 같이 주는 굿즈, 책모양 에코백도 완전 마음에 들었다.....(이것 봐라 또 굿즈 타령이다;;). 게다가 이 책은 아직 읽지 않은 작품이라 망설이지 않고 샀다(여전히 안 읽고 있음;;). 책이 불타는 온도 화씨 451도를 실험해볼까 싶기도 하지만 이 책은 너무 아름다우니까 절대 태우면 안 됨!




존 르카레를 좋아한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당연히 읽었다. <죽은 자에게 걸려온 전화>도 읽어야지, 하는 참에 이 책이 나왔다. 합본이야. 그런데 가격은 거의 1권 값이야! 그렇다면 당연히 이 책을 사는 게 현명한(?) 소비자의 선택이 아닐까.... 하면서 샀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읽고 난 뒤 친구에게 주고 집에 없던 터라 더 망설이지 않고 샀다. 이 책 살 때 알라딘 굿즈가 '존 르카레 usb'였던 걸로 기억한다. 사실 거기에 더 낚였다. ㅋㅋㅋㅋㅋㅋㅋㅋ (굿즈 없으면 책 안 살 인간)




헤르타 뮐러 <저지대>- <숨그네>를 읽고 홀딱 반한 작가 헤르타 뮐러. 그런데 그녀의 작품은 솔직히 쉬이 손이 가지는 않는다. 너무나도 묵직해서 굳게 마음을 먹고 읽어야 한다고나 할까. 그래서 여태 <저지대>도 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 책 리커버판을 구매했다....... 이때도 굿즈로 뚜껑 있는 머그컵을 줬는데, 사실 그 컵이 좋아보여서.... 쿨럭;;; 근데 그 컵은 정말 좋다. 이 책은 아직도 판매 중이다. 여러분들아, 컵도 받을 수 있어요............... 고양이 키우는 분들은 날리는 냥님털에 뚜껑 있는 머그가 더 필요하지 않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솔제니친 <수용소군도>- 이 한정판이 출간되었을 때 난리가....(알라딘에서만 ㅋㅋㅋㅋ) 난 것으로 알고 있다. 다들 막 숨가쁘게 샀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 책 끝까지 읽은 분 아무도 없을 것이라능 ㅋㅋㅋㅋㅋㅋㅋㅋ 나 또한 그렇다. 책은 소장하는 맛도 있어야지요? 이 책도 그때 굿즈가 정말 탐이 났었지... 담요랑 텀블러. 둘 중 뭘 고를까 고민하다가 둘 다 갖고 싶어서 이 전집을 두 번이나 살까 고민하기도 했던 어리석은 나. 그래도 꾹 참고 하나만 샀다. 장하다.




마거릿 애트우드 <시녀 이야기>- 이분 책을 읽을까말까 늘 망설이다가 이 책으로 입덕했다. 위대하신 애트우드 님. 이 특별판은 지금 보니 절판이다. 왠지 뿌듯?



그나저나 이렇게 알라딘 리커버판 올리고 나니, 디자인보다 함께 껴주는 굿즈 때문에 책을 산 것 같다????? 친구들이 나보고 알라딘 굿즈 MD로 투잡 뛰고 있는 거 아니냐고 했는데 정말 그런 거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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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7-17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용소군도 케이스 보니까 또 빡치네요... 제가 저걸 열다가 뽀개서.....ㅠㅠ

잠자냥 2019-07-17 23:29   좋아요 0 | URL
ㅋㅋㅋ 그러게요. 어쩌다 그 지경이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