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구가 대체 뭐야? 이디스 워튼의 <징구> 출간 소식을 듣고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든 생각이다. 사람이름인가? 참 희한한 제목이네 싶었다. 책을 읽으면 답을 알 수 있겠지 싶었는데, 웬걸?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단편집에 실린 첫 번째 작품 ‘징구’는 교양 넘치는(?) 중산층 여성들의 소모임을 배경으로 한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새로운 지식을 갈망하는 이들로 함께 모여 점심을 먹고 어떤 주제를 정해서 토론을 벌이곤 한다. 일종의 독서모임 같은데, 그 작은 무리에서도 시기와 질투, 은근한 따돌림 등이 존재한다.
따돌림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로비 부인’으로, 모임 참가자들은 그녀가 자신들보다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이 런치클럽 멤버 중 한 사람인 ‘밴 블레이크’ 양은 로비 부인이 자신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게 다 남자의 평가를 믿고 여자를 받아들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먼 이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다 막 이곳으로 돌아온 로비 부인을 여태 만난 사람 중 가장 호감 가는 여성이라 칭찬하며 추천한 사람은 저명한 생물학자 ‘로랜드 교수’였기 때문이다. 런치클럽 회원들은 학식 있는 그의 말을 믿고 그녀를 받아들였는데, 로비 부인은 그들의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어느 날 이 모임에 유명한 작가 ‘오즈릭 데인’이 오게 된다. 클럽 멤버들이 오랫동안 공들인 끝에 작가를 모시는 데 성공한 것이다. 대단한 작가와 의견을 나눈다는 생각에 한껏 기대에 부푼 그녀들은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지 고심한다. 드디어 작가를 만나고, 짧은 인사 뒤에 여전히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고민하는 가운데, 느닷없이 문제의 로비 부인이 입을 연다. “징구에 대해 작가님이 그걸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씀해주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로비 부인은 그 주제가 얼마나 자신들에게 매력적인지 아느냐면서 오즈릭 데인을 압박하기도 한다. 징구? 대체 징구가 뭐지? 독자도 한 번 더 의문을 품게 된다. 오, 그런데 오즈릭 데인은 역시 작가였다. 그녀는 당당하게 되묻는다. “아, 그 징구 말이군요, 그렇죠?” 이에 로비 부인은 미소 지으며 화답한다. “아, 제가 제대로 설명을 못해서 이해를 못 하셨군요. 제가 좀 그런 경향이 있어요. 그나저나 다른 멤버들은 징구로 토론할 생각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의뭉스럽게 화제를 다른 멤버들에게 넘기는 로비 부인. 여기에 런치클럽 구성원들은 사뭇 당황하지만 곧 평정을 되찾고 ‘징구’에 대해 자신이 아는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누군가 “전 그것 때문에 인생이 변한 경우를 많이 봤어요.”라고 말하자, 또 다른 이는 “제게도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라며 마치 지난겨울에 그것을 경험했거나 읽었는데 이제야 기억이 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그러자 로비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거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써야 하는 게 문제예요. 좀 길어야 말이죠.”라고 말한다.
아니 징구가 뭐지? 읽는 나도 점점 궁금해진다. 마치 그들과 스무고개를 하는 기분이 든다. 밴 블레이크 양은 “그런 데 들어가는 시간을 아까워해선 안 되죠.” 말하는데 여기에 로비 부인은 “군데군데 너무 깊이 들어가서 말이죠.” 한다. 그렇다면 정말 그것은 책일까? “그렇다고 그냥 지나가버리기도 쉽지 않고요.”라는 로비 부인의 말에 플린스 부인은 “전 절대 건너뛰지 않아요.”라고 고집스레 말한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징구에 대한 말들이 많아질수록 왠지 ‘책’은 아닐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로비 부인이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아, 징구에서 그러면 위험하죠. 맨 앞에서도 건너뛰지는 못해요. 천천히 지나가야 해요.” 그런데 이 말에 누군가가 빈정대듯 말한다. “그걸 지나간다고 하기는 어렵죠.” 이렇게 그들끼리 ‘징구’에 대한 토론이 활발히 펼쳐진다. 징구는 ‘근원을 잘 알지 못하면 애를 먹는 곳’도 있고 그럼에도 ‘어떤 지점까지는 정말 전혀 어렵지 않’지만 ‘몇몇 부분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아서 근원에 가 닿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시도해본 적 있느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로비 부인은 자신의 친구 하나가 시도한 적 있는데 친구가 말하기를 ‘여자들은 도전하지 않는 게 좋단다.’ 이 말에 방 전체는 술렁인다. 한 부인은 하녀가 듣지 못하게 기침을 하고, 또 누군가는 토할 것처럼 창백해지며, 또 다른 이는 인정하기 싫은 사람을 곁에 둔 사람처럼 못마땅한 표정이 된다.
‘징구’는 과연 무엇일까? 누군가의 짐작처럼 책일까? 아니면 종교? 아니면 관습? 아니면 또 다른 어떤 것? 로비 부인은 이 커다란 숙제를 남긴 채 작가와 함께 자리를 뜬다. 망연자실하게 남겨진 부인들은 ‘징구’에 대해 갑론을박하지만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는다. <징구>를 읽는 이들이라면 ‘징구’를 최초로 언급한 로비 부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징구’에 대해 모르고 있음을 쉽사리 눈치 챌 수 있다. 심지어 작가 오즈릭 데인도 아는 척을 할뿐 ‘징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징구’의 정체는 작품 끝 부분에 드러나는데, 그 정체를 알게 된 뒤 이들이 나눈 대화를 다시 돌아보면 박장대소하게 된다. 물론 징구의 정체를 모른 채 그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지켜보노라면 그들의 허영,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면서 교양 있는 척하는 속물적인 태도에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이디스 워튼은 교양 넘치는 중산층 여성들의 삶을 배경으로 인간의 허영, 겉치레에 대한 조롱과 그들의 불완전함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그런데 왜 하필 여성들의 모임을 이디스 워튼은 조롱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 자신이 속했고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그래서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던 대상이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읽다 보면 살짝 기분이 상한다. 꼭 ‘징구’만이 아니라, 그 다음 작품인 ‘로마의 열병’ 또한 두 중년 여성의 가식적인 우정을 기반으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왜 하필 여자들을 이렇게 단점 많은 존재로 그린 걸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이디스 워튼이 살던 무렵, 여성들의 삶은 거의 그게 전부였다. 중상류층 여성들은 나가서 일을 할 수도 없으며 집안에서 얌전히 ‘꽃’처럼 존재하며 가정을 돌보는 일이 미덕이자 마땅한 것으로 여겨졌던 시대이다. 그러므로 그녀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밖으로 낼 수 없었고, 그렇기에 그 작은 모임이나 친구와의 관계 등에서 아귀다툼을 하듯 질투하고 시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배움에 대한 갈망은 있어서(‘징구’) 소모임을 만들어 교양을 쌓고자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고 그렇기에 그녀들의 지식은 넓지도 깊지도 않다. 그러나 교양 없음을 드러내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망신은 물론이요, 집안 망신이 될 수도 있음에 모른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는 척’ ‘아는 척’ 하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어떻게 보면 하나의 권력이 아닐까?
또 다른 여성들은 넓은 세계에 대한 갈망으로 낯선 이국땅을 여행하는 도중 옛 친구를 만나 함께 했던 추억에 잠기기도 하지만(‘로마의 열병’),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는 ‘슬레이드’ 부인은 상대적으로 자신보다 부유하고 편안하게 살고 있는 듯한 ‘앤슬리’ 부인을 마음속으로 시기하고 질투한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껴 놀라기도 한다. 슬레이드 부인이 부러워하는 것은 앤슬리의 경제적으로 넉넉한 삶, 보장된 듯한 노년이다. 때문에 이 작품에서는 자유롭게 여행하며 지내고 있으나 금세라도 무너질지도 모를 한 여성의 경제적으로 위태로운 위치를 교묘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 여자를 둘러싼 1명의 현 남편과 2명의 전 남편이 등장하는 작품 ‘다른 두 사람’은 한결 파격적이다. 거의 100년 전에 쓰인 작품인데도 지금 어디에선가 벌어지고 있는 풍경 같다. 자신의 아내가 결혼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신과의 결혼이 세 번째라는 사실을 알고도 결혼한 ‘웨이손’은 어쩌다 보니 아내 ‘앨리스’의 첫 번째 남편과는 그둘 사이에 태어난 딸의 양육 문제로, 그리고 두 번째 남편과는 사업 문제로 자꾸만 엮이게 된다. 이런 불편한 상황을 계속 마주하다 보니 웨이손은 이제까지 아내에게 느꼈던 매력이나, 그녀의 장점들로 여겨졌던 것들이 점점 단점, 치명적인 결함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급기야 아내 앨리스는 ‘오래된 신발처럼 쉽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수없이 많은 발이 신어서 편해진 신발.’ 말이다. 그가 보기에 아내의 유연성은 이런저런 방향으로 긴장한 결과 생긴 것이었다. 그녀는 차례대로 ‘앨리스 해스켓’, ‘앨리스 배릭’, ‘앨리스 웨이손’으로 옮겨가면서 각각의 이름에 자신의 사생활, 성격을 맞춰 나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웨이손의 생각처럼 앨리스의 유연성이 그런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해스켓이나, 배릭, 웨이손 그들- 그녀의 전남편들과 현남편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어온 것은 아닐까?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여자로 길들인 것은 아닐까?
마지막 작품인 ‘에이프릴 샤워’는 집안일과 학교 공부, 그리고 작가로서의 꿈을 키워나가던 한 소녀가 그 사이에서 상충되는 갈등을 겪는 일을 묘사하고 있다. 틈틈이 글을 쓰고,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지만 집안의 맏딸인 소녀는 아픈 엄마 대신 집안일을 돌봐야만 한다. 동생들을 돌보랴, 아빠를 챙기랴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간다. 엄마가 아플 때 집안일은 맏딸의 몫이라는 지극히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자신의 꿈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소녀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왠지 모를 연민과 함께 답답함이 밀려온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그런 삶을 어둡지 않게, 어떤 면에서는 발랄한 느낌이 들 정도로 밝게 그리고 있으며 <징구> 에 실린 다른 세 단편이 모두 나름의 반전으로 끝을 맺듯이 이 작품 또한 꽤(?) 놀라운 반전을 보여주면서 독서의 즐거움을 안겨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