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구 - 로마의 열병 / 다른 두 사람 / 에이프릴 샤워 얼리퍼플오키드 2
이디스 워튼 지음, 이리나 옮김 / 책읽는고양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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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구가 대체 뭐야? 이디스 워튼의 <징구> 출간 소식을 듣고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든 생각이다. 사람이름인가? 참 희한한 제목이네 싶었다. 책을 읽으면 답을 알 수 있겠지 싶었는데, 웬걸?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단편집에 실린 첫 번째 작품 ‘징구’는 교양 넘치는(?) 중산층 여성들의 소모임을 배경으로 한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새로운 지식을 갈망하는 이들로 함께 모여 점심을 먹고 어떤 주제를 정해서 토론을 벌이곤 한다. 일종의 독서모임 같은데, 그 작은 무리에서도 시기와 질투, 은근한 따돌림 등이 존재한다.

따돌림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로비 부인’으로, 모임 참가자들은 그녀가 자신들보다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이 런치클럽 멤버 중 한 사람인 ‘밴 블레이크’ 양은 로비 부인이 자신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게 다 남자의 평가를 믿고 여자를 받아들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먼 이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다 막 이곳으로 돌아온 로비 부인을 여태 만난 사람 중 가장 호감 가는 여성이라 칭찬하며 추천한 사람은 저명한 생물학자 ‘로랜드 교수’였기 때문이다. 런치클럽 회원들은 학식 있는 그의 말을 믿고 그녀를 받아들였는데, 로비 부인은 그들의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어느 날 이 모임에 유명한 작가 ‘오즈릭 데인’이 오게 된다. 클럽 멤버들이 오랫동안 공들인 끝에 작가를 모시는 데 성공한 것이다. 대단한 작가와 의견을 나눈다는 생각에 한껏 기대에 부푼 그녀들은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지 고심한다. 드디어 작가를 만나고, 짧은 인사 뒤에 여전히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고민하는 가운데, 느닷없이 문제의 로비 부인이 입을 연다. “징구에 대해 작가님이 그걸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씀해주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로비 부인은 그 주제가 얼마나 자신들에게 매력적인지 아느냐면서 오즈릭 데인을 압박하기도 한다. 징구? 대체 징구가 뭐지? 독자도 한 번 더 의문을 품게 된다. 오, 그런데 오즈릭 데인은 역시 작가였다. 그녀는 당당하게 되묻는다. “아, 그 징구 말이군요, 그렇죠?” 이에 로비 부인은 미소 지으며 화답한다. “아, 제가 제대로 설명을 못해서 이해를 못 하셨군요. 제가 좀 그런 경향이 있어요. 그나저나 다른 멤버들은 징구로 토론할 생각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의뭉스럽게 화제를 다른 멤버들에게 넘기는 로비 부인. 여기에 런치클럽 구성원들은 사뭇 당황하지만 곧 평정을 되찾고 ‘징구’에 대해 자신이 아는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누군가 “전 그것 때문에 인생이 변한 경우를 많이 봤어요.”라고 말하자, 또 다른 이는 “제게도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라며 마치 지난겨울에 그것을 경험했거나 읽었는데 이제야 기억이 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그러자 로비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거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써야 하는 게 문제예요. 좀 길어야 말이죠.”라고 말한다.

아니 징구가 뭐지? 읽는 나도 점점 궁금해진다. 마치 그들과 스무고개를 하는 기분이 든다. 밴 블레이크 양은 “그런 데 들어가는 시간을 아까워해선 안 되죠.” 말하는데 여기에 로비 부인은 “군데군데 너무 깊이 들어가서 말이죠.” 한다. 그렇다면 정말 그것은 책일까? “그렇다고 그냥 지나가버리기도 쉽지 않고요.”라는 로비 부인의 말에 플린스 부인은 “전 절대 건너뛰지 않아요.”라고 고집스레 말한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징구에 대한 말들이 많아질수록 왠지 ‘책’은 아닐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로비 부인이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아, 징구에서 그러면 위험하죠. 맨 앞에서도 건너뛰지는 못해요. 천천히 지나가야 해요.” 그런데 이 말에 누군가가 빈정대듯 말한다. “그걸 지나간다고 하기는 어렵죠.” 이렇게 그들끼리 ‘징구’에 대한 토론이 활발히 펼쳐진다. 징구는 ‘근원을 잘 알지 못하면 애를 먹는 곳’도 있고 그럼에도 ‘어떤 지점까지는 정말 전혀 어렵지 않’지만 ‘몇몇 부분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아서 근원에 가 닿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시도해본 적 있느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로비 부인은 자신의 친구 하나가 시도한 적 있는데 친구가 말하기를 ‘여자들은 도전하지 않는 게 좋단다.’ 이 말에 방 전체는 술렁인다. 한 부인은 하녀가 듣지 못하게 기침을 하고, 또 누군가는 토할 것처럼 창백해지며, 또 다른 이는 인정하기 싫은 사람을 곁에 둔 사람처럼 못마땅한 표정이 된다.

‘징구’는 과연 무엇일까? 누군가의 짐작처럼 책일까? 아니면 종교? 아니면 관습? 아니면 또 다른 어떤 것? 로비 부인은 이 커다란 숙제를 남긴 채 작가와 함께 자리를 뜬다. 망연자실하게 남겨진 부인들은 ‘징구’에 대해 갑론을박하지만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는다. <징구>를 읽는 이들이라면 ‘징구’를 최초로 언급한 로비 부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징구’에 대해 모르고 있음을 쉽사리 눈치 챌 수 있다. 심지어 작가 오즈릭 데인도 아는 척을 할뿐 ‘징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징구’의 정체는 작품 끝 부분에 드러나는데, 그 정체를 알게 된 뒤 이들이 나눈 대화를 다시 돌아보면 박장대소하게 된다. 물론 징구의 정체를 모른 채 그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지켜보노라면 그들의 허영,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면서 교양 있는 척하는 속물적인 태도에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이디스 워튼은 교양 넘치는 중산층 여성들의 삶을 배경으로 인간의 허영, 겉치레에 대한 조롱과 그들의 불완전함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그런데 왜 하필 여성들의 모임을 이디스 워튼은 조롱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 자신이 속했고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그래서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던 대상이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읽다 보면 살짝 기분이 상한다. 꼭 ‘징구’만이 아니라, 그 다음 작품인 ‘로마의 열병’ 또한 두 중년 여성의 가식적인 우정을 기반으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왜 하필 여자들을 이렇게 단점 많은 존재로 그린 걸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이디스 워튼이 살던 무렵, 여성들의 삶은 거의 그게 전부였다. 중상류층 여성들은 나가서 일을 할 수도 없으며 집안에서 얌전히 ‘꽃’처럼 존재하며 가정을 돌보는 일이 미덕이자 마땅한 것으로 여겨졌던 시대이다. 그러므로 그녀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밖으로 낼 수 없었고, 그렇기에 그 작은 모임이나 친구와의 관계 등에서 아귀다툼을 하듯 질투하고 시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배움에 대한 갈망은 있어서(‘징구’) 소모임을 만들어 교양을 쌓고자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고 그렇기에 그녀들의 지식은 넓지도 깊지도 않다. 그러나 교양 없음을 드러내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망신은 물론이요, 집안 망신이 될 수도 있음에 모른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는 척’ ‘아는 척’ 하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어떻게 보면 하나의 권력이 아닐까?

또 다른 여성들은 넓은 세계에 대한 갈망으로 낯선 이국땅을 여행하는 도중 옛 친구를 만나 함께 했던 추억에 잠기기도 하지만(‘로마의 열병’),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는 ‘슬레이드’ 부인은 상대적으로 자신보다 부유하고 편안하게 살고 있는 듯한 ‘앤슬리’ 부인을 마음속으로 시기하고 질투한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껴 놀라기도 한다. 슬레이드 부인이 부러워하는 것은 앤슬리의 경제적으로 넉넉한 삶, 보장된 듯한 노년이다. 때문에 이 작품에서는 자유롭게 여행하며 지내고 있으나 금세라도 무너질지도 모를 한 여성의 경제적으로 위태로운 위치를 교묘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 여자를 둘러싼 1명의 현 남편과 2명의 전 남편이 등장하는 작품 ‘다른 두 사람’은 한결 파격적이다. 거의 100년 전에 쓰인 작품인데도 지금 어디에선가 벌어지고 있는 풍경 같다. 자신의 아내가 결혼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신과의 결혼이 세 번째라는 사실을 알고도 결혼한 ‘웨이손’은 어쩌다 보니 아내 ‘앨리스’의 첫 번째 남편과는 그둘 사이에 태어난 딸의 양육 문제로, 그리고 두 번째 남편과는 사업 문제로 자꾸만 엮이게 된다. 이런 불편한 상황을 계속 마주하다 보니 웨이손은 이제까지 아내에게 느꼈던 매력이나, 그녀의 장점들로 여겨졌던 것들이 점점 단점, 치명적인 결함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급기야 아내 앨리스는 ‘오래된 신발처럼 쉽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수없이 많은 발이 신어서 편해진 신발.’ 말이다. 그가 보기에 아내의 유연성은 이런저런 방향으로 긴장한 결과 생긴 것이었다. 그녀는 차례대로 ‘앨리스 해스켓’, ‘앨리스 배릭’, ‘앨리스 웨이손’으로 옮겨가면서 각각의 이름에 자신의 사생활, 성격을 맞춰 나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웨이손의 생각처럼 앨리스의 유연성이 그런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해스켓이나, 배릭, 웨이손 그들- 그녀의 전남편들과 현남편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어온 것은 아닐까?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여자로 길들인 것은 아닐까?
 
마지막 작품인 ‘에이프릴 샤워’는 집안일과 학교 공부, 그리고 작가로서의 꿈을 키워나가던 한 소녀가 그 사이에서 상충되는 갈등을 겪는 일을 묘사하고 있다. 틈틈이 글을 쓰고,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지만 집안의 맏딸인 소녀는 아픈 엄마 대신 집안일을 돌봐야만 한다. 동생들을 돌보랴, 아빠를 챙기랴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간다. 엄마가 아플 때 집안일은 맏딸의 몫이라는 지극히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자신의 꿈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소녀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왠지 모를 연민과 함께 답답함이 밀려온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그런 삶을 어둡지 않게, 어떤 면에서는 발랄한 느낌이 들 정도로 밝게 그리고 있으며 <징구> 에 실린 다른 세 단편이 모두 나름의 반전으로 끝을 맺듯이 이 작품 또한 꽤(?) 놀라운 반전을 보여주면서 독서의 즐거움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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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9-07-16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징구가 대체 뭘까요!!!! 너무 궁금해서 당장 읽고 싶습니다!!!

잠자냥 2019-07-16 12:16   좋아요 0 | URL
궁금하죠? ㅋㅋㅋㅋ 안 가르쳐 줄 거예요. ㅋㅋㅋㅋㅋ

목나무 2019-07-16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징구 .. 네이버 사전을 찾아보기까지 했지만 그런 뜻은 아닐테고..아.. ‘xingu‘로 단어 검색하고 있고....
과연 무슨 뜻일까나요. 궁금해서 점심을 못 먹겠어요! ㅋㅋㅋㅋ

잠자냥 2019-07-16 12:18   좋아요 1 | URL
북치구 징구치구??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혹시 알게 되더라도 댓글에 정답 달면 안 돼요! ㅋㅋㅋㅋ

다락방 2019-07-16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저 어제 한박스 도착했는데 거기에 징구는 없어요. 다음 박스에 징구를 넣어야겠어요. 그 징구를 말이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19-07-16 14:09   좋아요 0 | URL
아니 왜 징구를 넣지 않으셨습니까? 그 징구를 말입니다. 다음엔 징구 한 권 꼭 들이세요. ㅋㅋㅋㅋㅋㅋ

2019-07-17 1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7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지의 걸작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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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작품이지만 ‘미지의 걸작‘은 분명, 발자크의 위대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어떤 문장은 마치 시(詩)처럼 읽히기도 한다. 회화에 대한, 화가들의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지만 ‘진정한 걸작‘을 쓰고자 평생을 바친 발자크 그 자신의 이야기, 즉 소설가와 문학의 이야기로 읽어도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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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7
페데리코 안다아시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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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토리스를 발견한 해부학자의 이야기. 역사와 허구를 적절하게 뒤섞은 이야기 속에서 그 시절 여성의 욕망을 어떻게 억압하고 금기시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지금 읽기에는 ‘빻은’ 구절도 많지만 나름의 반전이 통쾌. 마테오 씨, 클리토리스를 지배한다고 사랑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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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육체의 노화는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중 하나는 허리이다. 작년부터 허리가 아팠는데 참고 참다가 올봄에 병원에 갔더니 디스크 초기 판정을 받았다. 그때부터 통증 병원에 정기적으로 다니고 있다. 처음에는 일주일마다 병원에 갔는데 상태가 좋아짐에 따라 이주에 한번, 이제는 삼 주마다 한차례 병원을 간다.

병원에서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며 가만 앉아있노라면 이토록 많은 이들이 통증 때문에 병원을 찾는구나 싶어 새삼 놀란다. 주로 나보다 나이가 많은 환자들이 많은데 내 또래로 보이거나 그보다 어린 사람도 드물지 않다. 허리가 아픈 사람, 무릎이 아픈 사람, 어깨가 아픈 사람, 목이 아픈 사람, 손목이 아픈 사람 등등 통증 부위도 다양하다.

치료받기 위해서는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환자들은 모두 치료에 꼭 알맞은 옷으로 갈아입고 자기 순서를 기다리면서 다들 핸드폰을 보고 있다. 옷을 갈아입어도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이 핸드폰이다. 비단 통증 병원뿐만이 아니다. 올봄에 병원 다닐 일이 많아 이 병원 저 병원 그 환부에 특화된 병원을 찾아가서, 또 거기에 알맞은 옷을 갈아입고 있으면 다들 하나같이 환자복 차림에도 핸드폰은 꼭 들고 있다. 나 또한 별반 다를 게 없다.

드디어 내 차례가 온다. 시술실에 들어가 엎드린 채 허리에 주사 치료를 받는다. 치료는 10분을 넘지 않는다. 그동안 핸드폰은 침대 머리맡에 둔다. 주사를 맞고 나오면 어지럼증이나 저림 증세가 나타날 수 있어 회복실에서 10분에서 30분쯤 누워 있다가 가야 한다. 처음에는 이 시간이 조금 아까웠다. 끝나고 나서 약속이 있거나, 예약 환자가 많아서 병원에서 오래 기다린 날은 더 그랬다. 치료 뒤 바로 걸어서 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간호사들은 꼭 10분 이상 누웠다가 가라고 하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누워서 할 일이 없으니 또 핸드폰을 본다.

어느 날이었던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다가 사물함에 핸드폰을 깜빡 두고 나왔다. 다시 갖고 나올까 했는데, 다른 누군가가 탈의실에 이미 들어간 터라 그만 뒀다. 그날도 치료를 받기까지 오래 기다렸다. 할 게 없으니 심심했다. 주사를 맞고는 회복실에 가만히 눕는다. 주변은 고요하고 그곳엔 나 말고 다른 생명체는 아무도 없다. 핸드폰도, 책도, 음악도, 고양이도, 사람도, 아무것도 없다. 나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그 고요 속에 잠겼다. 머릿속에도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편안했다.

하루 중 이렇게 모든 생명체로부터 동떨어져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거의 없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밤에 잠들기까지 늘 무엇인가를 듣거나, 보거나, 읽거나 했고 주변에는 거의 늘 사람이 있다. 사람이 없으면 고양이라도 있다. 내 고양이들은 이른바 ‘개냥이’라 이 녀석, 저 녀석 늘 나를 따라다닌다. 그런데 통증 병원 회복실에서는 비록 10분에서 15분 사이이지만 온전히 나 혼자 뿐이다. 스마트폰도 없다. 스마트폰이 없으니 전화도, 메시지도, 뉴스도, 트위터도, 인스타도 없다. 그 순간만큼은 온 세계가 침묵이다.
 
그날부터 나는 병원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올 때면 스마트폰을 챙기지 않았다. 회복실에 누워서 10분이 아니라 15분, 20분씩 머물다 나오곤 한다. 요즘에는 증세가 꽤 좋아져서 3주에 한 번 병원을 가는데, 일주일만 지나도 회복실에서의 고요와 침묵, 고독함이 그리워진다. 아마도 내가 허리 통증이 다 나아서 병원을 그만 다니게 된다면, 회복실에서의 이 10분은 영영 그리울 것 같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손바닥소설>에 실려 있는 ‘눈(雪)’이라는 작품에는 해마다 신년이면 홀로 조용히 어느 호텔방을 찾아가는 이가 등장한다. 주인공 ‘노다 산키치’는 정월 초하루 저녁부터 3일 아침까지 가족들을 떠나 도쿄의 고층 호텔에 혼자 숨어 지낸다. 몇 해째 그렇게 보내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다. 호텔에는 멋들어진 이름이 있지만 그는 이 호텔을 ‘환상 호텔’이라 부른다. 실제로 그는 호텔에서 3일 동안 환영과 함께 지낸다. 그가 머무는 방은 매년 정해져 있다. 눈(雪)의 방이다. 이 또한 산키치가 자기 혼자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그는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방의 커튼을 치고 곧장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그리고 두세 시간 안정을 취한다. 분주했던 한 해의 피로와 초조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려는 모습이다. 그렇게 쉬다 보면 초조함은 가라앉아도 피로는 오히려 솟구치는데, 그 피로의 밑바닥에 끌려들어가 머리가 저려올 즈음 환영이 나타난다. 방에 눈이 내리고, 눈은 그만의 것이 된다. 산키치는 소리 없는 조용한 함박눈에 감싸인다. 그리고 잠시 뒤 눈을 뜨면 방 벽이 온통 눈 풍경이다. 나목이 대여섯 그루 서 있을 뿐인 드넓은 벌판에 함박눈이 내리고, 집도 사람도 없는 쓸쓸한 풍경이지만 그는 눈 쌓인 벌판의 차가움은 느끼지 못한다. 그 풍경을 배경으로 그는 과거에 자신을 지나쳤던 사람들을 만난다. 눈 내리는 풍경 속에서 어린 자신을 안고 서 있는 아버지가 나타나기도 하고 그를 사랑했던 여인들을 마주하기도 한다. 그렇게 환영의 눈 속에서 산키치는 지난날 자신을 사랑해준 사람들을 마음껏 불러낸다. 새해 첫날 저녁부터 3일 아침까지, 그는 그렇게 도시의 어느 호텔 방에서 커튼을 치고 식사도 방으로 가져오게 하여 내내 침대에 드러누운 채 그런 사람들을 만난다.

참으로 멋진 방법이지 않은가. 허둥지둥 정신없이 한해를 고생한, 그리고 또 그런 한해를 살아갈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조용한 호텔 방에서 홀로 생각에 잠기고 그렇게 환영 속에서 그리울 법한 사람들을 만나는 일…….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혼자서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며 생각을 차분히 정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람들과 함께 정신없이 새해를 맞이하는 것보다는 한결 좋아 보인다. 이 작품을 읽고 나 또한 언젠가 꼭 해봐야지 마음먹었지만 아직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작은 호텔방이라고나 할까. 15분 남짓의 회복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 회복실은 허리 통증보다 일상의 통증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었다. 그 눈(雪)의 방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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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7-11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새 퇴근하자마자 옷갈아 입고 손발만 닦고 이불에 누워서 30분쯤 멍하니 있습니다.
그제야 몸도 마음도 좀 느슨해 지고, 그 짧은 쉼으로 잠들 때까지 시간을 또 충실히 보내게 되더라구요.
이런 잠시나마의 휴식. 자기만의 시간... 정말 필요하다는 걸 요즘 절실히 몸도 마음도 느끼고 있는 중이랍니다. ^^
그나저나 디스크초기라니요.. T.T 저도 요통이 가끔 있어 침을 맞고 운동을 꾸준히 하긴 하는데...
완치는 바라지 않고 그저 덜 아프면 좋겠다 싶네요.
잠자냥님도 치료 잘 받으시고 우리 건강하게 나이들어요. ^^

잠자냥 2019-07-11 11:48   좋아요 1 | URL
그쵸? 멍하니 있는 시간이 참 소중하더라고요. 그래서 멍때리기 대회 같은 것도 열리나봐요. ㅋㅋㅋ 하지만 그런 대회는 사람들이 여럿 모여서 하니까 진정한 멍때리기라고 볼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오래 앉아 있는 직업은 결국 허리에 무리가 갈수밖에 없나봐요. 흐흐흑.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이렇게 몸이 아픈 신호를 보내니까 그때나마 정신 퍼뜩 차리고 재정비하고 그럴 수 있는 거 같아요. 설해목 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 ㅎㅎ

제네시스 2019-07-11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 아프면 만사가 귀찮고 의욕이 떨어집니다.
아프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하고, 늘 삶에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야겠어요.

올려주신 글 잘 보았어요. 감사합니다.

잠자냥 2019-07-11 12:14   좋아요 0 | URL
네, 몸이 아프면 모든 게 일단 귀찮고 부정적으로 보이지요. 그래서 나이 들수록 정말 건강이 최고라는 생각이 듭니다. ㅎㅎ
글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coolcat329 2019-07-11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허리가 아프시다니...ㅠ 저도 예전에 허리때문에 고생했는데 수영을 그야말로 미친듯이 해서 살도 빠지고 디스크 고쳤어요. 무엇보다 건강이 최고 재산이에요. 그 가운데 10분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얻으셨다니 해피엔딩이네요ㅎ 치료 꾸준히 잘 하시고 걷기, 수영같은 운동도 하시면 좋겠네요

잠자냥 2019-07-11 12:23   좋아요 0 | URL
많이 좋아졌어요! 그래도 완치!!!!! 하고 싶은데 과연 ㅋㅋㅋㅋ 걷기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락방 2019-07-11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가할 때요. 요가할 때 핸드폰을 가지고 들어가지 않거든요. 처음에는 그게 되게 신경쓰이더라고요. 사물함에서 내 핸드폰이 그대로 잘 있을까, 누가 가져가진 않을까 불안하고요. 그런데 며칠 지나고나자, ‘내가 한 시간동안 온전히, 핸드폰 없이 지내는 시간은 요가할 때 뿐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좋아지더라고요. 그 한시간이 되게 만족스러워졌어요. 그렇지만 요가 끝나고 나면 제일 먼저 폰을 확인하죠. 저야말로 폰 중독인가봐요.


제가 몇 해전에 이별을 겪고 고통스러워서 집에다가는 출근한다고 말하고 회사에다는 연차를 쓴 뒤에 지방의 한 호텔로 갔었어요. 거기서 그냥 가만히 침대에 누워서 잤어요.
잠자냥 님 이 페이퍼 보는데 또 그러고 싶어졌어요.
아무도 없는,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 호텔 침대에 눕고 싶어요. 가만히. 너무 좋을 것 같아요, 잠자냥 님.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좋은 글입니다, 잠자냥 님.

잠자냥 2019-07-11 14:22   좋아요 0 | URL
요즘에는 정말이지 저도 그렇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핸드폰과 24시간 밀착된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거기에서 비롯되는 스트레스도 말도 못하게 많을 거예요. 잠깐 핸드폰하고 떨어져 있으면 불안해지기도 하고, 그러다 핸드폰을 다시 만나면 반가움에 와락! ㅋㅋㅋㅋ 그런데 아무튼 잠깐이라도 핸드폰하고 이별하고 있으면 아주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하지요.

이별 때문에 좋지 않은 마음으로 떠났지만 호텔에 가만히 누워 잠든 시간 만큼은 정말 좋았을 거 같아요. 그 시간에 분명 힘을 얻어서 다시 우뚝 설 수 있었겠지요.... 락방 님에게 또 그런 시간이 있기를(아니, 이별 말고 ㅋㅋㅋㅋ 아무도 모르는 곳의 호텔에서 머무는 시간) 바라겠습니다(아니 근데 지금 ‘락방‘을 쓰다 보니 오타가 이렇게 나더라고요? ‘라강‘ 이것은 락방 님이 라캉을 읽으라는 계시인 것 같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강 님 ㅋㅋㅋㅋㅋㅋㅋㅋ

케이 2019-07-12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무 핸드폰에 의지하는 것 같아, 핸드폰 대신 신문이라도 보자는 생각으로 주말에만 오는 신문을 구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토요일에 받은 신문을 금요일까지 한번도 펼쳐보지 않고, 누워서 핸드폰만 하고 있는 저를 보며 어찌나 제 자신이 한심하던지요. ㅜ_ㅜ 주위를 보면 저만 그런 건 아닌 거 같지만, 안그래도 좋지 않은 머리가 점점 더 멍청해지는 기분입니다.
잠자냥님, 허리 관리 잘하시고, 부디 옥체 보존하시어 좋은 글 계속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도 칼퇴를 기원하며.

잠자냥 2019-07-12 10:11   좋아요 1 | URL
와! 종이 신문 본 지 꽤 오래된 거 같아요! ㅎㅎ 케이 님이 뭐 누워서 핸드폰만 보시겠어요? 가끔 책도 읽으시겠죠. ㅋㅋㅋ 근데 핸드폰이 참 시간 잡아먹는 귀신이긴 해요.
ㅋㅋ 아침부터 칼퇴 소리 들으니까 벌써 퇴근할 시간 같아요!
케이 님도 주말 잘 보내세요~
 
징구 - 로마의 열병 / 다른 두 사람 / 에이프릴 샤워 얼리퍼플오키드 2
이디스 워튼 지음, 이리나 옮김 / 책읽는고양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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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층의 속물적이고 허영에 찬 삶, 그 가식적인 세계를 날카로운 필치로 조롱하던 이디스 워튼. 여기 실린 단편에서도 그녀의 우아한 신랄함은 여전하다. 첫 작품 ‘징구’ 속 여성들의 속물적인 행동에 슬쩍 입가에 쓴웃음이 번진다. 그런데 더 읽다보면 페미니즘적 시각이 덧붙여져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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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7-10 0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냥 님은 정말... 대단해요!
저 이 책 사려고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 하고 있었는데 벌써 읽고 백자평까지...

잠자냥 2019-07-10 09:27   좋아요 0 | URL
단편집이라 금세 읽어요! ㅎㅎ 이 책은 아마 곧 리뷰도 쓸 거 같아요. ㅎㅎ

다락방 2019-08-22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 님.
땡투 누르고 이 책 오늘 세 권 주문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부자되세요!!

잠자냥 2019-08-22 12:22   좋아요 0 | URL
헐 세 권이나 ㅋㅋㅋㅋㅋㅋㅋㅋ 감사합니다~~~ 하트 백만 개 드릴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