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글자 사전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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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두고 계속 보고 싶은 책. ‘책 : 인간의 사유와 인간의 말이 얼마나 정교하고 아름다운지 책을 통해 목격하는 행위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에 대해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한 글자 사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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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을 들춰보지 않은 지 꽤 됐다. ‘들춰보지’ 않았다고 쓴 까닭은 여기서 말하는 사전이란 종이 사전을 뜻하기 때문이다. 온라인 사전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보면서 종이 사전은 언제부터인가 펼쳐보지 않게 된 것이다. 오래 전부터 사전의 중요성은 익히 들어왔다. 지금도 국어사전 뜻풀이를 보면서 가끔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언어를 습득하기 위해 사전을 ‘읽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많다. 내게 사전은 ‘찾는’용도였다. 사전을 ‘읽고’ 있기에는 다른 재미난 책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만일 뜻풀이가 색다른 사전이 있다면 어떨까? 그런 사전은 신기한 느낌에 ‘뜻풀이’를 보는 재미로 읽고 싶을 것도 같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뜻풀이로 이뤄진 사전이 있다면 더 궁금하지 않을까?


연애(恋愛): 특정한 이성에게 특별한 애정을 품고 둘만이 함께 있고 싶으며 가능하다면 합체하고 싶은 생각을 갖지만 평소에는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무척 마음이 괴로운 (또는 가끔 이루어져 환희하는) 상태.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3판
백도: 과즙이 많고 맛있다.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4판
대합: 먹는 조개로서 가장 평범하고 맛있다.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4판
붉돔: 얼굴은 붉은 도깨비 같지만 맛있다.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3판
쑤기미: 꼴이 흉한 머리를 하고 있지만 맛있다.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3판


‘연애’를 합체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표현하다니, 그런 뜻풀이가 사전에 실리다니! 두 눈의 동공이 커진다. 게다가 백도, 대합, 붉돔 등등에 ‘맛있다’는 주관적인 표현을 쓰다니? 그 점도 놀랍다. 이것은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 사전 중 하나인 <신메이카이 국어사전>에 실린 용례 중 하나이다. <새로운 단어를 찾습니다 - 4천만 부가 팔린 사전을 만든 사람들>은 일본 사전계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겐보 히데토시’와 ‘야마다 다다오’ 두 사람의 관계를 중심으로 그들의 만든 사전의 특색을 살펴보고 그것을 통해서 말과 사전의 의미를 되짚어본다. 사전에 별다른 관심이 없으면서, 그것도 우리나라 사전이 아닌, 일본 국어사전을 다룬 이 책에 흥미가 생겼던 까닭은 바로 사전이 ‘말’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일본이라고 하면 쉽게 떠오르는 이미지, ‘오다쿠’ 같은, 그 이미지를 떠올리며 사전에 영혼을 바친 이 두 남자는 과연 얼마나 말에 미친 모습을 보여줄지 내심 기대했다. 그렇게 한 분야에 몰입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자극 받고 싶은 기분도 있었다.

저토록 주관적인 뜻풀이를 한 사람은 ‘야마다 다다오’로 그는 ‘겐보 히데토시’와 함께 한때는 같은 사전을 편찬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겐보와 야마다 두 사람은 도쿄 대학 동기생이고, 처음에는 힘을 합쳐 <메이카이 국어사전>을 만들던 협력자이자 친구 사이였다. 그런데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시점을 경계로 결별한다. 그 뒤 한 출판사에서 성격이 완전히 다른 국어사전 두 권이 탄생하게 된다. 야마다가 중심으로 편찬한 <신메이카이 국어사전>과 겐보가 중심으로 만든 <산세이도 국어사전>이 그 주인공이다. 두 사람이 내놓은 국어사전은 누적 합계 약 4000만부의 발행부수를 기록했고, 일본 전후 모든 세대가 두 사람의 사전을 접해왔다. 겐보가 만든 <산세이도 국어사전>을 살펴보자.


연애(恋愛): 남녀 사이의 그리워하는 애정(남녀 사이에 그리워하는 애정이 작용하는 것). 사랑(恋). -<산세이도 국어사전>, 제3판
백도: 과실의 살이 연노랑색의 복숭아. 흰 복숭아. -<산세이도 국어사전>, 제3판
붉돔: 도미와 비슷한, 몸체가 가늘고 긴 생선. -<산세이도 국어사전>, 제3판


야마다의 <신메이카이>에 비해 겐보의 <산세이도>는 큰 특징이 없어 보인다. 개성도 없는 듯하다. 무난하다. 늘 우리가 보아왔던 사전 그대로의 뜻풀이에 충실하다. 여기서 잠시, 우리나라 국어사전에서는 ‘연애’를 어떻게 풀이하고 있을지 궁금해서 찾아봤다.


연애: 남녀가 서로 그리워하고 사랑함. -표준국어사전
연애: 상대방을 서로 애틋하게 사랑하여 사귐. -고려대한국어대사전
연애: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해서 사귀는 것. -우리말샘


우리나라 국어사전은 겐보의 <산세이도>와 거의 비슷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나는 위의 뜻풀이 중 ‘연애’ 항목에서 그나마 가장 마음에 드는 뜻풀이를 고르라면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을 선택하겠다. 나머지 뜻풀이는 모두 연애를 남녀 또는 이성애로 한정짓고 있기 때문에 딱히 올바른 풀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말을 처음 배우는 어린 아이들이 ‘연애’ 항목을 찾아봤을 때 그 뜻풀이가 ‘남녀’로만 한정되어 있다면 그 뜻풀이는 곧 생각의 한계를 결정짓는다. 남자와 남자 또는 여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해서 사귀는 것, 서로 그리워하는 것은 연애가 아닌 비정상적인 행태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말의 정의와 그 정의를 담고 있는 사전은 한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겐보와 야마다 두 사람의 ‘다름’은 사전 곳곳에서 계속 드러난다.


독서: 책을 읽는 일 -<산세이도 국어사전>, 제2판
독서: ‘연구나 조사 때문이거나 흥미 본위가 아니라’ 교양을 위해 책을 읽는 일. ‘드러누워 읽거나 잡지/주간지를 읽는 일은 본래의 독서에 포함되지 않는다.’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2판

범인(凡人): 보통사람. 하찮은 사람. -<산세이도 국어사전>, 제2판
범인(凡人): 스스로를 향상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거나 공명심을 갖고 있지 않거나 해서 다른 것에 대한 영향력이 전무한 채 일생을 마치는 사람. 가정 제일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는 대다수 서민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3판


똑같은 단어임에도 이처럼 서로 완전히 다른 뜻풀이에서 인간과 삶, 언어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차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뜻풀이만 보자면 야마다에 비해 겐보의 특장점이랄까, 개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왜 겐보가 일본 사전계의 양대 산맥의 한 축을 이루는지 의아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단어를 찾습니다>를 읽다 보면 겐보가 거의 일본 사전계의 중심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말과 사전에 영혼을 팔아버린 이 남자의 삶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처음에 나 또한 솔깃했던 사람은 야마다 쪽이었다. 대체 왜 저런 풀이를 하는 거야? 풀이가 지나치게 자의적인 거 아니야? 그럼에도 인간적이군, 재미있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처음에는 야마다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지만 겐보라는 사람과 그의 작업 방식을 지켜보는 동안 그에게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존경심이 절로 든다.

겐보가 만든 <산세이도 국어사전>의 특징은 ‘객관적’이며 중학생이 읽어도 이해할 수 있는 ‘단문이고 간결한’ 뜻풀이에 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겐보의 사전은 사전계에서 가장 ‘현대적인’ 사전으로 꼽힌다. 물론 ‘객관성’이나 ‘단문이고 간결하다’는 다른 보통의 사전에도 해당되기 때문에 두드러진 개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때문에 <산세이도>의 가장 알기 쉬운 개성은 ‘현대적’이라는 점이다. 겐보는 “그 시대에 널리 정착한 새로운 말이나 표현을 적극적으로 사전에 싣는다.”는 태도로 말을 수집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글자 그대로 ‘워드헌팅’ 50년- 도쿄 대학 국문과를 졸업한 24세에 사전 편찬 작업을 처음 맡고부터 50년 동안, 세상에서 쓰이는 말의 용례를 모아 한 장 한 장 카드에 기록한다. 그 용례 카드만 145만 개에 이른다. 이 145만 개라는 숫자는 도저히 한 사람이 50년 세월 동안 만들 수 없는, 불가능한 개수다. 그럼에도 겐보는 그렇게 했다. 이유는 단 하나. ‘소리도 없이 변하는 말의 기준을 정하고, 그 시대에 살아있는 현대어를 사전에 담기 위해서’였다.

그의 수집 대상은 신문, 잡지, 주간지, 월간지, 단행본에서 문학전집, 텔레비전, 라디오, 팸플릿, 삽입 광고지, 우편 광고, 간판, 게시판, 담화, 인사 등에 이른다. 때문에 그는 거리를 걸을 때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도, 가족들과 여행을 가서도 말 수집에 여념이 없다. ‘현대어 사전에는 살아 있는 표제어, 살아 있는 용례를 반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반영해 <산세이도 국어사전>의 제4판에는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영웅 이름이 실렸다.


울트라맨: SF 텔레비전 영화 <울트라맨>의 주인공. 우주에서 지구로 와서 정의를 위해 괴수들과 싸운다. -<산세이도 국어사전>, 제4판


제4판은 1992년에 간행되었다. <울트라맨> 첫 회가 일본 텔레비전에 방영된 해는 1966년이어서 산세이도 국어사전에 실리기까지 26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대체 어느 부분이 현대적인가 하는 의문이 들겠지만 국어사전 세계에서 이러한 채택 판단은 매우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편에 속한다고 한다. 이렇듯 <신메이카이 국어사전>이 ‘뜻풀이’에 중점을 두고 있는 데 비해, <산세이도 국어사전>은> 어떤 말을 사전에 올릴까하는 ‘표제어 선정’에 중점을 두었다. 철저하게 현대에 바탕을 둔 사전을 지향하는 <산세이도 국어사전>에는 ‘국어사전은 딱딱하다’는 편견을 깨는 말도 수록되어 있다.


엣치[H : Hentai(변태)] : 징그럽고 역겨운 (짓을 하는) 모습 -<산세이도 국어사전>, 제2판


또한 겐보는 ‘단어의 이미지’는 생활과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 즉 일상의 경험 속에서 추출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물’이라는 단어의 뜻풀이도 당시로서는 혁명적으로 바꾼다. 그때까지는 사전에서 ‘물’이라는 단어를 찾으면 주로 ‘수소와 산소의 화합물’이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아주 오래전 우리나라 사전도 이와 비슷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수소와 산소의 화합물이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물’의 이미지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


물: 수소2, 산소 1의 비율로 화합한 무색. 무미의 액체. 지구 표면의 대부분을 덮고 있다. -<메이카이 국어사전>, 개정판
물: 우리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투명하고 차가운 액체. -<산세이도 국어사전>, 초판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겐보는 여자를 인간에 대한 생리적 관점 대신 사회적 기능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방법으로 뜻풀이를 하기도 한다.


여자: 사람 중에서 다정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사람. -<산세이도 국어사전>, 초판
남자: 사람 중에서 힘이 세고 주로 밖에서 일하는 사람. 남성. -<산세이도 국어사전>, 초판


그리고 이런 뜻풀이도 있는데, 이 뜻풀이는 겐보 그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듯해, 책을 읽다가 한참 이 구절에서 눈이 머물렀다.


사랑: (상대의 행복이나 발전을 바라는) 따뜻한 마음. -<산세이도 국어사전>, 초판


이 ‘사랑’ 뜻풀이는 좋은 평가를 받아 그 후 다른 사전에도 비슷한 설명이 실리게 되었다고 한다. 평소에 겐보는 ‘사전에도 작가주의를 도입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사전 편찬자에게 지나치게 냉담하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진정 작가주의적 태도로 사전을 편찬했던 사람이 아닐까.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겐보 히데토시’에게 반해 그에 대해서 더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편 내가 좋아하는 인간 유형은 아니지만(이 책 독자라면 알 수 있을 ‘그 사건’ 때문에…….) ‘야마다’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야마다는 대체 왜 저토록 독특한 뜻풀이를 하게 되었을까? 그는 일본 사전계의 오랜 침체의 원인이 전근대적인 관행과 방법론의 무자각에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사전계에 만연했던 도용과 표절 관행을 뿌리 뽑고자 독특한 뜻풀이를 시작한 것이다. 기존의 사전과는 완전히 다른 풀이를 통해 ‘어디 표절해보려면 해봐라’하는 태도로 나온 것이다. 장문도 마다하지 않고 상세하게 뜻풀이를 쓴 그의 사전은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지만, 사전을 ‘찾는’ 것에서 ‘읽는’ 것으로 바꿔놓았다. 특히 야마다는 ‘사전은 문명비평’이라는 관점에서 ‘존엄한 인간이 하나의 인격으로 취급되는 것처럼, 사전 한 권에는 마땅히 편자 특유의 맛이 배어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웃기다: 그 녀석이 의원이라니 웃기는군.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초판
공복(公僕):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봉사하는 자로서의 공무원을 칭함. [다만 실정은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3판
재산: 미술품을 재산으로 사는 놈이 있다.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4판


이것 말고도 이 책에 실린 야마다가 쓴 <신메이카이 국어사전>의 뜻풀이를 읽고 있노라면 키득키득 웃음이 나오는 부분도 있고, 절대 동의할 수 없을 만큼 자의적인 풀이도 있다. 그럼에도 그 안에는 일종의 ‘풍자’가 깃들어있다. ‘말에는 표면적인 의미와 동시에 이면에 숨겨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야마다. 그는 그 ‘이면의 의미를 숨기지 않고 지적할 수 있다면, 이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무척 기쁜 소식이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그 충실한 결과물이 바로 <신메이카이 국어사전>이다.

이렇게 말과 사전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 못지않게, 겐보와 야마다 두 사람이 결정적으로 헤어지게 된 계기가 무엇일까 쫓는 과정 때문에 이 책은 매우 흥미롭다. 마치 추리 소설의 단서를 하나씩 발견하듯이 저자는 두 사람이 편찬한 사전에서 그 이유를 추적한다.


시점: “1월 9일”이라는 시점에서는 그 사실이 판명되지 않았다. -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4판

실로: 조수 자리에 있었던 기간이 실로 17년[=놀랄 만하게 17년이나 되는 긴 기간에 이르렀다. 견디게 만드는 사람도 사람이지만 견디는 사람도 대단하다는 감개가 포함되어 있다]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초판


유독 1월 9일이라고 특정 날짜를 표기한 야마다, 그리고 자신이 겐보의 조수로 17년이나 있었다고 투정하듯이 뜻풀이에 쓴 야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저자는 겐보와 야마다의 주변 인물과 그 무렵 출판사 관계자, 사전 편찬 협력자 등을 만나 그 둘이 멀어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을 쫓는다. 그렇게 해서 밝혀진 그 사건의 진상 또한 어찌 보면 ‘말’의 의미를 두 사람이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 것에서 비롯되었기에 참으로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다.


사고(事故): 사건. 고장. -<산세이도 국어사전>, 초판


사고(事故): 그 일의 실시. 실현을 방해하는 좋지 못한 사정.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초판


겐보와 야마다는 그 1월 9일을 기점으로 결별해 죽을 때까지 서로 다시는 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가 만든 사전 속에서 한때 소중했던 벗에 대한 마음을 표현한다.


~면: 야마다라면 요즘 못 보는군. -<산세이도 국어사전>, 제2판

알력: 그런 일로 알력이 생겨 결국 헤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4판


무엇보다도 세월이 흐를수록 야마다의 심경 변화가 큰 듯하다.


실로: 조수 자리에 있었던 기간이 실로 17년[=놀랄 만하게 17년이나 되는 긴 기간에 이르렀다. 견디게 만드는 사람도 사람이지만 견디는 사람도 대단하다는 감개가 포함되어 있다]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초판


실로: “이런 좋은 벗을 잃는다는 것은 자신에게도 실로 커다란 불행이라고까지 말했다.”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4판


야마다는 ‘실로’라는 표현을 오래 전에는 자신이 17년이나 겐보의 조수로 일했다고 불평하듯이 뜻풀이를 해놓더니 제4판에서는 ‘실로’의 의미를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하며 ‘좋은 벗’을 잃어버린 슬픔을 말하는 용례로 바꾸었다. 게다가 ‘은인’이라는 단어의 뜻풀이도 크게 변한다.


은인: 은혜를 받은 사람. 신세를 진 사람.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4판

은인: 재난에서 구해주거나 물심양면에 걸쳐 지원의 손길을 뻗어주거나 분발할 기회를 주는 등. 그 사람이 그 후 무사하고 안온하게 살아가는 데 크게 이바지한 사람. -<신메이카이 국어사전>, 제5판


‘실로’와 ‘은인’의 뜻풀이 변화와 겐보가 쓴 ‘~면’의 뜻풀이에서 나는 조금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전과 말에 미친, 그래서 그 밖의 것에는 관심도 없는 듯 보였던 그들이었지만 인간이었기에 실수도 있고, 분노도 하고, 시기심도 있고, 자신만의 과업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는 결국 회한에 찬 마음으로 자신의 벗이자, 은인을 용서하고 또 고마워하게 된다. 일본 작가 이노우에 히사시는 사전의 정의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비범한 사람이 평범하지 않은 생활을 해서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 사전’이라고. 겐보와 야마다 두 사람에게 꼭 맞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물: 가장 무미의 맛. 그러므로 가장 최고의 맛. 그렇지만 가장 나중의 맛. 그럼에도 가장 최초의 맛. 바라보면 가장 평화의 맛. 뛰어들면 가장 쾌락의 맛. 범람하면 공포의 대상. 부족하면 궁핍의 요인. 한 모금으로 목을 적시고, 한 됫박으로는 나무를 적시고, 한 양동이로는 몸을 적신다.  -김소연, <한 글자 사전>


<새로운 단어를 찾습니다>를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방 한쪽에 꽂혀있는 김소연의 <한 글자 사전>이 눈에 들어왔다. 이 사전에 혹시 ‘물’이 있나 하고 찾아보니 있었다. 시인의 눈으로 풀이한 ‘물’이기에 그야말로 한 편의 시와도 같다. 그러면서도 담아야 할 의미는 모두 갖추고 있다. 아니,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한 글자 사전>을 다시 펼쳐 읽어본다. <새로운 단어를 찾습니다>를 본 후, 읽으니 이것이 왜 사전이 아니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야마다의 <신메이카이 국어사전>이 독특한 뜻풀이로 일본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면 김소연 시인의 <한 글자 사전>도 당당히 사전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표제어가 더 많다면 사전이 되고도 남음직할 것이다. 특히 ‘울’과 ‘멍’이라는 단어의 뜻풀이는 여러 차례 감탄하게 된다.


국: 아버지가 없는 밥상에서 더불어 없어졌던 메뉴
님: 옛날에는 사모하는 단 한 사람에게 사용한 가장 귀한 말이지만 이제는 친근한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두루 사용하는 가장 손쉬운 존칭.
득: 이것 없이는 이제 사랑도 하지 않는다.
등: 동물은 평화롭고 생선은 푸르며 사람은 애처롭다
땅: 생명이 싹트는 곳에서 돈이 싹트는 곳으로 바뀌었다.
멍: 다친 부위는 아름다움에 가까워진다. 노랑, 초록, 파랑, 보라, 절반 이상이 무지개와 같은 색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창안하였으나 권력을 비호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여: 여자들은 환영받지 못한 여동생으로 태어나 여고생이 되었다가 여대생이 되고, 여급에서 여사원에서 여사장이, 여가수나 여의사나 여교사나 여교수나 여류 화가나 여류 작가로 산다. 남자들은 환영받는 남동생으로 태어나 고교생이 되었다가 대학생이 되고, 사원에서 사장이, 가수나 의사나 교사나 교수나 화가나 작가로 사는 동안에.
울: 찬물에 조물조물 비벼 빨아야 한다. 세게 비틀지 않아야 한다. 뉘어서 말려야 한다. 그래도 바닥에 물이 울음처럼 뚝뚝 떨어진다.
티: 가난함은 티가 나고 부유함은 티를 낸다.  -김소연, <한 글자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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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6-18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글자사전 을 사야겠어요. 방금 주문 마쳤는데 취소하고 다시 해야하나..

잠자냥 2019-06-18 14:45   좋아요 0 | URL
<한 글자 사전>은 전자책도 나와 있어요. ㅎㅎ

잠자냥 2019-06-18 14:51   좋아요 0 | URL
그나저나 병원 탈출하자마자 책 사시는 이분.... ㅋㅋㅋ

다락방 2019-06-18 15:05   좋아요 0 | URL
점심 먹고 들어와서 책 주문하고 여태 졸았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휴 이제 정신 좀 차려야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19-06-18 15:19   좋아요 0 | URL
정신 좀 차리면 퇴근할 때~ 퇴근하고 나면 완전 멀쩡한 정신~ 밤이면 더 또렷해지는 정신~ 그것이 인생입니다.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6-18 15:23   좋아요 0 | URL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사는거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새로운 단어를 찾습니다 - 4천만 부가 팔린 사전을 만든 사람들
사사키 겐이치 지음, 송태욱 옮김 / 뮤진트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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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사전에 사로잡혀 평생을 사전에 바친 두 남자의 이야기. 둘 관계가 어쩌다 틀어졌는지 쫓는 과정도 흥미롭고, 그들 관계 변화에 따라 둘이 만든 사전의 용례 변화가 생기는 점도 무척 흥미롭다. 그들 인생을 뒤쫓으며 말의 의미를 생각하다 보면 먹먹한 감동이 밀려온다. 강추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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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에게 계급은 상처이자 부끄러움이다.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는 충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부끄러움>은 계급에서 비롯된 상처와 부끄러움의 절절한 자기고백적 기록이다. 아버지가 엄마를 죽이려고 했다는 문장만 보면 이제까지 소개된 아니 에르노의 작품들 <남자의 자리>, <한 여자> 또는 <단순한 열정>에서처럼 가족이나 자기 자신과 얽힌 부끄러움에 관한 지나치리만큼 솔직한 기록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물론 <부끄러움>은 아니 에르노가 열두 살 무렵, 6월의 어느 오후 아버지가 엄마를 낫으로 죽이겠다고 위협하던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아버지의 폭력은 아니 에르노가 속한 세계, 배우지 못한 하층 노동자 계급의 삶과 관련되어 있음을 곧 알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이 속한 계급의 그 삶을 ‘부끄러움’으로 인식한다.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는 절대로 갈 수 없었던, 아니 대부분이 가지 못하는 사립학교에 다니게 되면서부터 자기가 이 사립학교의 여느 아이들과 다르다는, 그리고 그 ‘다름’은 곧 자신이 속한 세계, 즉 계급이 그들이 속한 세계와 다르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스스로 ‘사립학교의 품위와 완벽함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고 느끼면서 ‘부끄러움 속에 편입되었다’고 생각한다. 마치 영화 <기생충>에서 가난을 숨길 수 없는 ‘냄새’로 묘사하듯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남루한 삶을 ‘부끄러움’이라는 단어로 정의한다. 아니 에르노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부모의 직업, 궁핍한 그들의 생활,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 그리고 우리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자신이 속한 세계,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이 하층 계급의 세계를 부끄럽다고 말하는 열두 살 소녀에게 누가 가난을, 네가 속한 계급을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그러면 못쓴다고 탓할 수 있을까? 숨길 수 없는 가난의 ‘냄새’처럼 아니 에르노가 속했던 계층의 사람들-그러니까 아버지와 어머니로 대표할 수 있는-은 레스토랑에서 우아하게 음식을 주문할 줄도 모르고, 월말이 되면 가게에서 팔다 남은 통조림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이며 집안은 늘 폭력이 난무한다. 그러고도 언제 악다구니를 쓰며 싸웠냐는 듯이 다시 웃고 떠들어댄다. 아니 에르노는 ‘범람하는 폭력, 알코올의존증, 정신병의 세계’에 자신이 원치 않았어도 ‘소속되고 만’ 것이다. 그녀가 속한 세계는 사생활이 존중받을 수 없는, 언제나 남에게 노출되기 쉬운 환경이다. 그렇기에 ‘점잖은 언행을 하고(욕이나 상스런 표현, 험담을 하지 않는 것) 분노나 슬픔 같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질투나 호기심 혹은 소문의 대상이 될 만한 것은 모두 감추게’된다. 이 세계에서 ‘예의란 일종의 보호 장벽인 셈이고, 따라서 부부 사이나 부모와 자식 사이의 예의는 위선이나 악의처럼 느껴져서 불필요한 것’이다. ‘거칠고 노골적이고 악을 쓰는 것이 정상적인 가족 간의 대화’이다. 이 계층에 속한 남들과 똑같이 ‘살자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목표이자 성취해야 할 이상’이며 이런 세계에서 ‘개성은 일탈, 심지어 조금 미친 것 같은 증세로 간주’된다.

그렇기에 전형적인 하층 계급 출신의 아버지는 갈등이 일어났을 때 조목조목 대화를 통해 풀기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분노를 낫을 들고, 죽일 듯이 위협하는 것으로 표현하며(그것이 이 계층의 일상과도 같은, 정상적인 삶이기에),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폭력을 내면화한 채 살아간다. 때로는 그런 폭력을 자신의 딸을 향해 아무렇지 않게 쏟아내는 폭언과 손찌검으로 대물림하기도 한다. 이런 세계에서 ‘부끄러움’은 그녀와 그녀 가족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으며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던 그 사건에서, 부끄러움은 그녀의 삶의 방식이 된다. 그리고 이런 인식은 학교에서 밤늦게 돌아온 어느 날, 선생님과 친구들이 아니 에르노를 집까지 데려다 준 그날, 극대화된다. 어머니는 ‘구겨지고 얼룩덜룩한 속옷 바람으로, 잠이 덜 깨 입을 굳게 다물고 머리를 산발한’ 채 현관 불빛 아래 나타난다. 그때 그녀는 처음으로 어머니를 사립학교 세계의 시선으로 본다. 그리고 그녀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 했던 장면과 아무 상관없는 이 장면은 ‘그것의 연장’으로 생각된다. ‘아무렇게나 풀어헤쳐진 이상한 셔츠 사이로 내비친 어머니의 알몸뚱이를 통해 우리의 진면목,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발각된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눈을 뜨자마나 허둥지둥 옷을 입고 일터로 나가야 하는 우리 부류의 여자들에게 잠옷이나 가운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이상한 사치품으로 여겨졌다. 잠옷이 존재하지 않는 나의 사고 체계 속에 살면서 부끄러움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했다. (<부끄러움>, 119쪽)


그녀가 이런 부끄러움을 통해 인식하는 깨달음은 단순한 물질적인 궁핍함에서 비롯된 수치심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녀는 자신의 수치심은 지배계층의 생활양식과 언어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열등감임을 깨닫는다. 잠옷이 이상한 사치품으로 여겨지고, 예의와 개성이 비정상적인 일탈로 여겨지는, 그런 세계에 속한 아니 에르노에게 오페라 <골콩드의 왕비>, 영화 <선셋 대로>, 아이스크림, 초원처럼 1952년에 그녀를 꿈꾸게 했던 단어들은 영원히 어떤 무게도 지니지 못할 것이다. 어릴 때부터 똑똑하고 남달랐기에 자신이 속한 Y시에서는 드물게 사립학교에 갔고, 대학에 진학해 문학교수가 되었으며,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는 작가가 된 아니 에르노. 그녀가 이 책에서 말하듯 ‘사진 속 여자아이와 지금의 나 사이에는 이제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그저 그녀 스스로 ‘이 책을 쓰게 만든 6월 일요일의 그 장면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이 속했던 계급을 벗어나 다른 계층으로 이동했기에, 유년 시절의 부끄러움과 열등감을 글로 쓰는 일, 그 상처와 아픔을 다시 헤집어 전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그럼에도 아니 에르노는 <부끄러움>을 통해 그녀와 가족, 그들이 속한 집단이 겪었던 소외감의 근원, 그 뿌리 깊은 불평등을 담담히 써내려간다.

아니 에르노는 스스로 ‘나 자신의 인류학자’가 되리라는 다짐 아래 언제나 자신이 속한 계급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를 멈추지 않았다. <남자의 자리>의 아버지의 일상, <한 여자>의 어머니의 삶,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였던 <단순한 열정>에서도 계급차이가 있는 두 남녀의 사랑을 그렸다. 그녀의 작품이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바로 그 말하기 어려운 하층 계급의 삶을 지독하리만치 건조하고도 담담한 문체로 써내려갔기 때문은 아닐까. 프루스트의 작품이나 사르트르의 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프랑스적인 삶, 그 귀족적인 ‘고급진’ 삶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니 에르노는 때로는 자기파괴적으로 느껴질 만큼의 적나라한 글을 통해 보여준다.

<부끄러움>을 읽으며 떠오른 또 다른 책은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이다. <부끄러움>을 1952년 여름 프랑스 북서지방 소도시 Y시에 대한 상세한 사회학적 보고서라고 한다면 <사물들>은 1960년대 프랑스인들의 삶을 건조하리만치 세밀하게 보여준다. <사물들>에서 그려진 세계는 아니 에르노가 속했던 하층 계급은 아닌, 그렇다고 프루스트와 사르트르 같은 작가들이 속했던 상층 계급도 아니다. 평범한 중산층 젊은이들의 삶이라고나 할까? 아니, 중산층에 편입되고자 애쓰는 젊은이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사물들>은 어떤 집의 복도를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이어서 그 집의 거실, 서재, 침실 등의 세부 묘사가 이어진다. 단순히 거실과 침실, 서재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 공간을 이루는 ‘사물들’의 세세한 묘사가 이어진다. 작가가 그리는 공간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 익숙한 느낌이다. 프랑스에서 살아 본 적 없는 내게도 친숙할 정도이다. <사물들 : 60년대 이야기>라는 부제에서 눈치 챌 수 있듯 이 작품은 60년대 프랑스 사회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입하려는 스물넷의 제롬과 스물 둘의 실비. 별다른 배경이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고, 고만고만한 대학을 나온 이들. 첫 출발로 삼는 직업 또한 고만고만하다. ‘대부분의 동료들처럼 제롬과 실비도 선택이 아닌 필요에 의해 사회심리 조사원’이 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저 단 한 가지, ‘더 잘 살고 싶다’는 욕망만으로 가득하다. 학생 신분에서 벗어나 그저 그런 직업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는 삶. 그 삶은 곧 ‘더 널찍한 방, 수돗물, 샤워실, 다양한 메뉴랄 것도 없이 단지 학교 식당보다 좀 나은 정도의 식사와 자가용, 음반, 휴가, 옷의 필요’를 느끼게 하는 삶이었다. 제롬과 실비는 현대인이라면 욕망할만한 집, 자동차, 물건들을 원하면서 그 욕망을 채우는 삶에 충실하게 적응해간다.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쿨하다고 여겨지는 상품을 욕망하고 소비하고, 그러면서 순간적인 만족을 느낀다. 그렇지만 곧 또 다른 ‘사물’- 광고, 잡지, 진열장 속의 사물들을 원하게 되는 삶. 현대인은 특별한 물건을 소비함으로써 자신이 남과 다르다고, 혹은 남들처럼 잘산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을 법한 ‘사물’을 갖지 못하면 불행해한다. 쳇바퀴 돌 듯 이런 삶이 반복된다. 그러면서 하루하루 늙어간다. <사물들>의 제롬과 실비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사물들>은 제롬과 실비가 학생 신분을 벗어나 사회에 진입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면서 현대인의 상대적 빈곤을 예리하게 보여준다.

한편, 똑같이 하층 계급에서 태어나 자신의 힘만으로 다른 계급으로 이동해간 여성의 삶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벨 훅스의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 책은 ‘계급’이라는, 사람들이 좀처럼 이야기하기 어려운 주제를 담고 있다. 벨 훅스는 “지금 당신은 어디에 서 있나요?”라고 입을 뗀다. 계급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서 있는 위치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며…….

벨 훅스는 흑인여성이다. 영문학 전공자로 젠더, 인종, 계급, 문화와 관련한 다수의 비평서를 쓰면서 문화비평가이자 페미니스트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흑인여성으로 페미니스트 운동을 하고 있다면 그녀가 속한 자리가 어디쯤일지 짐작은 갈 것이다. 남부 켄터키 주 흑인 분리 구역에서 태어나, 1973년 스탠퍼드대학을 졸업했다는 그녀의 이력을 보면서 흑인 분리 구역에서, 그것도 여자로 태어나 스탠퍼드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얼마나 험난한 세월을 보냈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런 그녀의 고단한 삶, 그러므로 더욱 애쓰는 삶은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니 에르노의 부끄러움과 수치심의 정체를 사회학적으로 밝혀본다면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가 된다고나 할까?

전형적인 노동자 계급, 가난한 흑인 집안에서 태어나 ‘풍요로운 세상’으로 이동한 벨 훅스- 그녀는 계급 문제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음을 이야기한다. 모두가 ‘흑인이기’ 때문이라는 인종 문제와 ‘여자이기’ 때문이라는 젠더 문제로 계급 문제를 희석할 뿐이었지, 그 문제를 정면으로 언급하기를 꺼려해 왔고, 그녀 또한 자신이 속한 세계가 흑인이고,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다 마침내 대학에서 인종과 성(性 )문제보다 ‘계급’문제가 가장 뼈아프게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미국 사회 어느 곳에서도 ‘계급’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얼마든지 노력하고,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부’를 창출하는 능력을 단순히 개인의 문제(근면, 성실한 태도 등)로 치부하며 흑인은 게으르고 일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 이념을 전파한다. 게다가 그런 가난한 자들을 부자들의 안락한 생활을 위협하는 존재(약물에 취해, 총기를 소지하고)로 설파하기까지 한다. 흑인도 노력하면, 여자도 노력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데, 정상에 다다를 수 있는데 단지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벨 훅스는 만일 진실로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당신도 성공해서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 속의 ‘그 정상’이라는 위치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반문한다.

벨 훅스에 따르면 ‘지배 계급은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할까봐 약물 중독을 심고, 노동 계급에게는 쇼핑 중독을 심었다.’ 노동 계급이 계속해서 가난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그녀는 광고의 악영향을 이야기한다. 물건을 사면 그만큼 당신의 지위가 향상된다는 거짓말로 가난한 사람들을 현혹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는 <사물들>의 실비와 제롬이 떠오른다. 광고를 보고 물건을 사면서 자신들의 삶이 더 나아지고 있다고 믿는 착각……. 벨 훅스가 보기에 가난한 사람들은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가난하기 때문에 재테크라는 말 자체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악순환으로 모든 인종의 여자들과 흑인 남성들이 빠른 속도로 가난하고 혜택을 박탈당한 계급으로 유입되고 있음을 그녀는 지적한다. 그리고 벨 훅스는 ‘계급 문제를 직시하고, 더 많은 사실을 깨달아 경제적 정의를 위해 제대로 투쟁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계급 없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면 제일 먼저 공정한 경제 체제부터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출발은 우리 모두가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직시하는’ 데부터 시작됨을 또 한차례 강조한다.

아니 에르노도, 벨 훅스도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었는지를 뚜렷하게 알고 있었다. 비록 그 위치가 자신에게 부끄러움과 상처가 됐을지언정 그것을 글로 써서 기록했다. 서로 다른 언어, 전혀 다른 표현이지만 그렇게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 신분제도가 사라졌으므로 자연히 계급도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순진한 믿음. 세계는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로 구별될 뿐 계급은 없다는 믿음, 모두가 부지런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안일한 믿음, 계급을 외면함으로써 그 계급에서 파생된 뿌리 깊은 불평등까지 덮어버리고 싶은 그 구조적 모순을 깨뜨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이런 책들은 프랑스나 미국이나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이나 모두 엄연히 계급과 계층은 존재하며 그것을 외면하고 모른척할 때, 오히려 거기에서 비롯된 불평등은 더 심화될 것이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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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니 에르노 지음, 이재룡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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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고 싶어했던 세계가 아니라,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가 속한 노동자 계급, 하층 계급의 세계를 죽이고 싶었던,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이야기. 계급적 상처와 그 부끄러움을 글로 승화한 용기는 참 대단하다는 생각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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