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오레스테이아 열린책들 세계문학 197
아이스킬로스 지음, 두행숙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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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딸을, 아내가 남편을,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패륜적인 사건들의 연속. 그 가운데 인간의 운명과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불현듯 이 작품을 읽은 까닭은 유진 오닐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를 읽기 위해서였다. 이 가족 패륜 막장극을 유진 오닐은 어떻게 현대화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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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워치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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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비가 내렸다. 책을 덮으니 창밖으로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 때문인가, 괜히 센티멘털해진 마음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 내가 누운 이곳이 런던이라면, 그리고 이렇게 하염없이 비가 내리는 깊은 밤이라면, 도저히 잠을 청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면 그 거리 곳곳에 그들이 있을 것만 같았다. 나처럼 잠들지 못하고 런던 골목, 골목을 그들이 정처 없이 떠돌고 있을 것만 같았다. 케이, 헬렌, 비브, 줄리아, 덩컨 그리고 프레이저……. 1947년의 그들, 그 후 그들의 삶은 어떻게 됐을까? 3년 후가 아닌, 30년 지난 1977년의 그들은? 그리고 또 30년이 흐른  2007년의 그들은? 노년의 케이는 돌봐줄 자식도 없이, 곁에 그 누구도 없이 썰렁한 침대에서 깨어나 쓸쓸히 아침을 맞이할까? 비브는 또 어떻게 되었을까? 헬렌과 줄리아, 덩컨과 프레이저는? 책을 덮고도 <나이트 워치> 속 여섯 사람의 그림자가 머릿속에서 쉬이 떠나지 않는다.


<나이트 워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1947년에서 3년 전인 1944년, 그리고 거기서부터 또 3년 전인 1941년- 그러므로 이 책을 읽는 이들은 이 작품의 결말 아닌 결말을 시작으로 그들 여섯 사람의 인생을, 삶의 결정적인 한 때를 뒤쫓는 셈이다. 그런데 1947년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도 무엇 하나 또렷하게 결정된 것은 없다. 삶이 어떻게 흐를지, 그들이 앞으로 또 어떤 아픔을 만나고 그것 때문에 무너지고, 부서지고 또 나름 그것을 견뎌내며 살아갈지 알 수 없다. 그저 알 수 있는 것이라곤 3년 전의 그들, 그리고 6년 전의 그들 삶이 어떠했으며, 그 파장으로 말미암아 1947년, 현재 그들의 삶이 이렇게 된 것이구나 헤아릴 뿐이다. 지금도 그들은 여전히 젊기에 3년 후일 1950년, 그리고 또 3년이 지난 1953년에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마치 그 여섯 사람이 내 옆에서 살아 숨 쉬다가 책을 덮는 순간, 이제는 소식이 끊어진 그런 이들만 같다. 그래서 그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여느 사람들과 조금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틀림없이 존재했음에도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인 삶을 살고, 그런 사랑을 했어야만 했던 그 쓸쓸한 이들의 그림자가 비 오는 밤 내내 내 마음을 휘젓는다. 부디 이렇게 내리는 비를 혼자 쓸쓸히 맞는 일은 없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전쟁이 삼켜버린, 먼지와 어둠과 침묵 속에 묻힌 온갖 비밀들’을 간직한 그들 모두가 외롭고 고독했기에…….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7년의 런던.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이는 케이다. 그녀는 전쟁의 상처를 지닌 채 유령처럼 거리를 떠돈다. 그러나 전쟁보다도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긴 것은 이 세계이다. 세상의 잣대와 시선, 그 자체가 케이에게는 상처이다. 멀리서보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남장 차림의 그녀. 1947년이기에 그런 케이의 옷차림과 행동은 더욱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밖에 없다. 곱지 않은 눈초리, 괴물을 보는 듯한 시선에 갇힌 그녀. 헬렌은 또 어떠한가. 결혼정보업체에서 누군가를 짝지어주는 일을 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사랑은, 자신의 반쪽은 세상이 알지 못하도록 꽁꽁 숨겨야 한다. 남들이 그렇듯이 사랑하는 이와 거리에서 키스를 하거나 애정행각을 벌이는 일도, 공원에서 여느 여인처럼 나란히 누워 있는 일도 할 수 없다. 심지어 거리에서, 아니 제집에서 목소리를 높여 싸우는 일도 모두 금지다. 그녀가 사랑하는 이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를 누군가가 낚아채 갈 듯하고, 그래서 불안하고 외롭기 짝이 없지만 그녀에게 허리를 숙여 키스할 수도 없고, 그녀가 내 사람이라고, 내 연인이라고 세상 그 어디에도 말할 수가 없다. 그녀를 계속 붙들어놓을 만한 게 뭐가 있을까? 고민해보지만 그 어떤 제도로 묶어놓을 수도, 약속도 할 수 없는 현실 앞에 그저 쓸쓸히 침잠해갈 뿐이다.

그러나 동성의 연인을 사랑하는 헬렌만이 그 사랑을 숨겨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창 눈부실 나이인 비브 또한 외롭기는 마찬가지이다. 연인과 거리를 거닐 때면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볼까봐 늘 주위를 둘러봐야만 한다. 극장 바깥에 표를 사려고 서 있는 연인들과 부부들을 언제나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연인과 어딜 돌아다닌 적이 한 번도 없다. 나이트클럽이나 레스토랑에 가본 적도 없고, 그저 외진 곳만 줄기차게 찾아다녔다. 아니면 그의 차 안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앉아 있는 게 고작이다. 한집에서 함께 잠들 수도 없고, 당당하게 둘이 손을 잡고 거리를 거닐 수도 없다. 비브의 연인은 결혼한 남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다가 비브에게는 또 하나의 숨겨야할 존재가 있다. 교도소를 다녀온 남동생 덩컨의 존재가 바로 그렇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하는 헬렌과 비브는 서로의 사랑과 관련한 이야기도, 자신의 가족사도 털어놓지 못한다. 그녀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축을 이루는 사랑과 가족은 꽁꽁 숨겨야만 하는 그 무엇이다. 틀림없이 존재함에도, 보이지 않는 사랑, 삶……. 투명인간 같은 그들이 서 있는 쓸쓸하고도 황량한 세상을 지켜보노라면 마음 한구석이 저릿해온다.

“사랑과 전쟁은 모두에게 공평”하다고 케이는 묻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사랑은 그들에게 공평하지 않다. 원자폭탄과 강제 수용소와 가스실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사랑 때문에 행복에 잠기면서 죄책감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그 사랑은 공평하지 않다. 자신들이 사는 방식 때문에 좌절할 수밖에 없다. ‘몰래 다니는 것도 신물 나고, 구질구질하게 살금살금 다니는 것’도 싫다면서 ‘결혼만 할 수 있다면, 아니 그 비슷한 거라도.’ 라고 말하는 연인에게 그 어떤 대답도 해줄 수 없다. ‘좋아해서는 안 되는 것을 좋아하고, 느껴서는 안 되는 기분을 느끼는’ 케이, 헬렌, 비브, 줄리아, 덩컨, 프레이저. <나이트 워치>는 그들의 삶이 이렇게 덧없이 꼬여버렸는지를 뒤쫓는다. 오래된 골동품을 모으면서 옛날 물건에 집착하는 덩컨, 스스로 자신을 가둬둔 덩컨, 그는 왜 감옥에 다녀온 왔으며 프레이저와는 어떤 관계인지, 헬렌과 비브는 어쩌다 한 공간에서 일하게 된 것이며, 케이는 전쟁 통에 무슨 일을 겪었기에 저토록 유령 같은 삶을 살아가는지, 그리고 줄리아, 그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는 이들과 또 어떻게 얽혀있는지……. 이토록 쓸쓸하고 고독한 삶을 사는 그들에게 몇 년 전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궁금증에 그들 인생을 지켜보는 일을 멈추지 못한다. 책장을 넘긴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생생한 이야기. 삶이라는 전쟁, 그 전쟁을 거친 이들의 이야기가 내내 마음을 울린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들의 인생 또한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으로, 그 사랑이 빚어낸 아름다움으로 빛나던 시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따금 그 사랑 때문에 고통스럽기도 했을 테지만 그조차 눈부셨다. 그러나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그 사랑과 삶은 이제 빛이 바랬다. 꼭 물리적인 전쟁의 폭격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되돌아보면 나 또한 인생의 한 순간 순간에 전쟁 같은 시기가 있고 그것이 지나가면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남긴다. 그 고비를 넘기고 나서 사람은 또 살아가지만 퇴색해 버린 것은 고스란히 간직한 채 묻어둘 수밖에 없다. ‘당신은 무엇을 잃었습니까? 잘 지내십니까? 그걸 어떻게 견디는 겁니까? 뭘 하고 삽니까?’(152쪽) 케이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관찰하며 이렇게 묻는다. 이 질문은 문득 나에게도 묻게 된다. 세상이 완벽하지 않고, 사람은 더더욱 완벽하지 않기에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것을 잃어버리고, 그러고 나서 뒤늦게 깨닫고는 통렬하게 아파하기도 한다. 마치 헬렌이 잃어버린 잠옷 한 벌. 그 진줏빛 새틴 잠옷이 ‘지금까지 그녀가 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잠옷’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듯이 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 ‘이런 끔찍한 아수라장에 이처럼 생생하고 이토록 티 없이 깨끗한 존재가 숨겨져 있었다니,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660쪽)를 읽노라면 누구에게나 있었을 그 한 순간, 언젠가는 잃어버릴지언정 틀림없이 누구에게나 존재했을 그 찬란했던 한 순간의 기억 때문에, 그것을 잃어버린 그들의 쓸쓸한 뒷모습 때문에 마음에서 내내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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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9-06-10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비가 내리다니 너무 멋진 표현이예요! 근데 잠자냥님께서 말씀하신 누구에게나 존재했을 찬란한 순간 같은 거...저에겐 없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도 젊은 시절은 있었지만 젊기만 했지 놀라울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심심하기만 했거든요. 뭐 꼭 엄청난 사건이 벌어져야 눈부시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잠자냥님 리뷰를 읽으니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아름다운 시절에 있어선 난 정말 소외된 사람이란 생각이 갑작스레 들면서 서글퍼지네요.. 더 세월이 지나면 그때가 눈부신 시기였다고 나름대로 정의할 수 있는 어떤 기간이 생기려나요. 괜한 푸념이었습니다! 오늘도 정말 좋은 감상문 감사히 읽었습니다!

잠자냥 2019-06-10 15:53   좋아요 1 | URL
케이 님이다! ㅎㅎ <나이트 워치> 주인공 중 한 사람 이름이 ‘케이‘라서 이 책 읽다가 저도 모르게 케이 님 떠올리기도 했었답니다. 찬란한 순간..... 주제넘지만 케이 님이 좋아하는 책 읽으면서 어떤 구절에서 웃거나 행복해했던 순간도 어쩌면 찬란한 순간일지도 몰라요. 가끔 몸이 아프거나 아주 괴로운 일이 있을 때는 그런 아주 소소한 일상도 찬란한 한때로 여겨지더라고요. ㅎㅎ 헬렌이라는 인물이 잃어버린 잠옷의 가치를 아주 나중에야 깨닫듯이 말이에요. 그럼에도.... 케이 님의 삶에서 이제까지 그런 때가 없었다면 앞으로 살아갈 나날들 중에 꼭 그런 순간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랄게요!
 
진정한 장소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미셸 포르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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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와 책 읽기에 관한 짧지만 깊이 있는 아니 에르노의 생각들. 그녀의 작품 전반에 대해 이해의 폭을 크게 넓혀준다.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잘 느끼는 곳’ 글쓰기가 ‘진정한 나만의 장소’라는 말 진심으로 멋진 말 아닌가. 이 인터뷰를 읽으니 그이의 모든 작품이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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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살바도르 산 파블로 - 1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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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이 커피가 궁금해서 책을 주문했달까... 평소 만델링을 좋아하는 편인데, 만델링의 묵직함과 뒷맛에서 느껴지는 고소함이 적절하게 뒤섞여 있다. 신맛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추천. 올 여름 아이스커피로 많이 마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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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혼란 - 지성 세계를 향한 열망, 제어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서정일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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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믿고 읽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인 슈테판 츠바이크. 그의 신간 <감정의 혼란>이 매우 아름다운 자태로 출간되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장바구니에 담다가 나는 잠시 고민했다. 왠지 이 익숙한 제목..... 분명 내가 읽었을 거 같은데? 검색해 보니 1996년에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된 적이 있다. 으음, 그럼 그렇지, 이걸 내가 안 읽었을 리가 없어. 한때 츠바이크에 푹 빠져서 그의 소설 중 국내에 출판된 책은 거의 다 찾아서 읽은 적이 있다. 아마 이 책도 그랬으리라. 그런데 확신이 들지 않아 미리보기를 했는데, 왜 이토록 새롭지? 안 읽은 작품인가? 이상하다 싶어서 결국 주문했다. 책을 받아서 지난 일요일 늦은 밤에 펼쳤는데, 으음, 흥미진진하다. 그러는 한편으로 내가 왜 이 책을 안 읽었던 것일까? 궁금한 생각도 든다. 어쨌든, 정말 재미있네? 계속 책장을 넘긴다. 이미 밤 열두시가 넘었다. 내일은 월요일이야, 그만 자! 싶은데 어느덧 100쪽을 넘겼고 이제 한 100쪽만 읽으면 돼! 그러니까 그냥 다 읽자 싶어졌다. 결국 2시간 남짓해서 이 책을 끝냈다. 아마 <감정의 혼란>을 무심코 집어 들어서 조금이라도 읽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멈추지 않고, 아니 멈추지 못하고 한 번에 읽기를 마칠 것이다.

이 작품은 30년 넘는 세월 동안 교수로서 확고한 지위를 누려온 늙은 학자 롤란트가 은퇴를 앞두고 자신의 젊은 날의 기이한 경험을 고백하는데서 시작한다. 그는 대학생이 된 첫 무렵에는 방탕한 나날을 보냈다. 책과 학문을 매우 중요시하던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에서 그는 도리어 학문을 멀리하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느닷없이 롤란트를 찾아온다. 방탕한 아들의 생활을 목격하고 만 아버지.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크게 꾸짖지 않는다. 오히려 뭐라 말할 수 없는 경멸 어린 시선과 침묵만이 아들과 마주한 방 안에 감돌뿐이다. 아버지의 뜻하지 않은 방문으로 롤란트는 몇 개월 동안 방탕으로 점철된 시간들이 무의미하고 덧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모든 저속한 향락들을 포기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정신적인 것, 학업에 온 힘을 쏟아 보고자 마음먹는다. 롤란트에게 어느덧 ‘진지함, 냉철, 훈육, 엄격함’에 대한 갈망이 싹튼다. 그리고 그는 우연한 기회에 셰익스피어 강의를 듣고 문학과 시, 예술이라는 세계에 홀린 듯 빠져든다. 이때 그를 그토록 매료시킨 장본인은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그 강의를 압도적으로 이끌던 한 사람. 사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어느 영문학 교수였다. 롤란트는 그 교수의 강의에 반해 그를 따르게 되고, 교수 또한 롤란트를 기꺼이 받아들이고는 그와 함께 지적 교류를 해나간다.

그런데 이 교수에게는 좀 이상한 면이 있다. 어느 날은 강의가 굉장히 좋은데 또 어떤 날은 형편없기 짝이 없다. 어제 그토록 신들린 듯한 강의를 했던 사람이 오늘의 저 지루한 강의를 하고 있는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완전히 다르다. 교수에 대해 궁금해진 롤란트는 그가 쓴 책들을 찾아보기도 하는데, 저작 또한 평범하기 이를 데 없다. 학문적으로 딱히 주목받지 못할 그런 저작들이 고작 몇 권 존재할 뿐이며 그나마 어떤 저서는 여전히 미완성인 상태다. 학문적인 면만 그런 것이 아니다. 교수는 어느 땐 롤란트에게 한없이 다정다감하면서도 또 어떤 날은 차갑고 비정하기 짝이 없다. 롤란트가 언제나 그를 ‘언어의 전령이자 창조적인 정신으로 가득 찬 존재’로 생각하며 높이 받드는 것과 달리 교수에게 롤란트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평범한 학생인 것만 같다. 롤란트에게 교수는 ‘무의식중에 그를 뜨겁게 만들어 놓고 느닷없이 얼음을 쏟아붓는 사람’이며 ‘자신의 격정으로 스스로를 자극하더니 갑자기 반어적인 언어의 채찍을 움켜쥐는 사람’이기도 하며 ‘번갯불처럼 번쩍이고 뜨거움에서 차가움으로 돌변하는 사람’이다. 이런 교수에게 롤란트는 수없이 상처받으면서도 그에 대한 존경과 숭배로 그 곁을 쉽사리 떠나지 못한다.

교수와 아내의 관계 또한 기묘하다. 둘 사이는 얼음장처럼 차갑다. 교수는 아내가 있을 때는 자신의 학문적 계획이나 연구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 롤란트가 보기에 교수보다 한결 젊은 그의 아내는 책과 집안 형편 같은 것, 폐쇄적인 것, 조용한 것, 차분한 것에 대해서는 도통 감각이 없다. 그러나 그녀는 항상 흥얼거리고 미소를 잃지 않는다. 춤을 추거나 수영을 할 때, 달리기를 할 때처럼 육체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며 몸을 움직일 때 가장 기분 좋아 보인다. 즉 그녀는 남편의 정신적인 세계와 완전히 차단되어 있으며, 육체와 물질세계에 속한 사람이다. 싱그러운 에너지가 넘치고, 롤란트에게 친절한 그녀임에도, 남편 이야기가 나올 때면 자기도 모르게 날이 서서 비꼬곤 한다. 그러나 롤란트는 그런 그녀가 싫지는 않다. 한때 방탕하게 지내면서 육체적인 것, 자연의 세계가 주는 쾌락에 탐닉했던 그였기에, 여전히 몸을 움직이며 자연을 누리는 행복을 무시하기 어렵다. 곧 롤란트는 교수 못지않게 그의 아내에게도 호감을 느끼게 되고, 두 사람이 가까워질수록 교수의 아내는 롤란트에게 무언가, 교수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려다가 멈칫하는 순간이 종종 일어난다. 롤란트는 이 두 사람의 삶에 조금씩 개입하게 되면서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자신의 인생을 몰아간다.

<감정의 혼란>은 츠바이크의 많은 작품이 그렇듯이 교수와 그 아내의 비밀스러운 삶, 그리고 그 두 사람으로부터 크게 영향받는 젊은 대학생 롤란트- 이 세 사람의 관계를 중심으로 정신세계와 육체적인 세계, 즉 이성과 감성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대한 탐구와 그것이 조화를 이루지 못했을 때의 파장을 집요하고도 숨 가쁘게 그려 나간다.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교수의 정체(?)이다. 롤란트가 스탕달증후군을 느낄 지경으로 홀딱 반할만한 강의를 해놓고도 그다음 날은 거의 쓰레기와도 같은 무력한 강의를 하는 그. 젊은 학생들에 둘러싸여 강의할 때는 전지전능한 신과 같으면서도 홀로 작업한 저서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 롤란트를 매우 아끼는 듯하면서도 때로는 자신의 제자가 거의 모멸감을 느낄 정도로 차갑게 구는 그. 어느 날 훌쩍, 예고도 없이 집을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그. 아내와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토록 서로 차갑고도 먼 사이로 지내는 것일까? 롤란트가 교수에 대해 궁금한 것 못지않게 독자 또한 그의 비밀은 과연 무엇인지, 아니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서 책장은 멈추지 않고 넘어간다.

책을 읽다 보면 문득 이 교수는 혼자서는 타오를 수 없는 촛불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 공기든, 혹은 불꽃을 붙여줄 만한 작은 불씨든 그 무엇인가가 존재하지 않으면 타오를 수 없는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런 그에게 자신을 숭배하는, 자기의 학문적 열정과 거기서 비롯된 연구 결과를 높이 사는 한 젊은 청년, 그러니까 불꽃이 될 만한 존재가 나타나자 그는 다시 생기를 얻어 연구를 이어가게 되는 것은 아니었을까? 롤란트에게 교수가 정신과 영혼의 세계를 상징한다면 교수의 아내는 육체와 감성, 자연의 세계이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 줄타기하듯 끊임없이 정신적 긴장 상태에 놓여 있는 롤란트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는 이 책을 읽을 이들을 위해 말을 아끼고자 한다. 그럼에도 이 책 마지막 부분에서는 안타까움과 함께 이 세 사람 모두에게 나름의 연민이 든다는 점만은 밝히고 싶다.



덧1) 아주 오래전 메모를 뒤져보니, 나는 2011년에 <감정의 혼란>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더라. 고작 8년 만에 이렇게 책 내용을 깡그리 잊고서 완전히 새로운 책처럼 읽다니..... 나란 인간의 기억이란 참.... 집에 책도 없고, 거기다가 리뷰도 남기지 않았으니 이 책에 대해 더 기억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므로 책은 사서(응?) 읽고, 리뷰나 짧은 평이라도 꼭 남겨둬야 한다. 물론 이렇게 두 번, 세 번 읽어도 좋은 책이 이 세상엔 널리고 널렸지만 말이다.

덧2) <감정의 혼란>은 책 만듦새도 예쁘고 츠바이크 책이라 소장 가치도 충분히 있어, 이 책을 산 것은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은 띄어쓰기가 조금 엉망이다. ‘~처럼’을 띄어 쓰질 않나. ‘~커녕’을 띄어 쓴 부분도 보인다. ‘세 들다’ ‘세들다’처럼 어느 부분은 띄어 쓰고 다른 부분은 붙여서 쓰기도 했다. ‘때 마다’처럼 ‘마다’를 띄어 쓴 부분도 보인다. 나는 띄어쓰기 같은 부분은 예민하지 않게 넘어가는 편인데도 너무 많이 눈에 들어와서 조금 짜증 나더라. <감정의 혼란>이 아니라 <교정의 혼란>이라고나 할까……. 이 출판사의 발자크 <미지의 걸작>도 사둔 채 아직 읽지는 않았는데, 이 책도 그 모양이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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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9-06-07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덧1)은 절대 공감입니다. 어쩜 그렇게 완벽하게 새 책 읽는 느낌인지. 근데 이런 책 다시 읽을 때마다, 읽어가면서 생각이 날 거야, 라고 허튼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ㅋㅋㅋㅋ

잠자냥 2019-06-07 12:12   좋아요 0 | URL
ㅋㅋㅋ 그렇죠? 저도 읽으면 다시 생각날 거라고 생각하지만 절대 생각 안 나더라고요! 나참 ㅋㅋㅋㅋ 심지어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몇 년 뒤에 또 빌리고 있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

2019-06-11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11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