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리스의 <한밤이여, 안녕>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몇 해 전, 이 책을 읽었을 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그때는 ‘샤샤’의 의식을 뒤쫓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뒤로 나는 진 리스의 책을 읽고, 또 읽고 있더라. 단편집을 비롯해 <어둠 속의 항해>까지. 내가 처음 <한밤이여, 안녕>에서 느낀 진 리스는 뭐랄까 ‘징징댄다’는 느낌이 강했다.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문학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렇기 때문에 <한밤이여, 안녕>이 딱히 좋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슬픔은 그걸 표현하는 이가 억누를 때 더 슬픈 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밤이여, 안녕>의 샤샤는 아프다고, 슬프다고, 힘들다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아마 그래서 읽느라 진이 빠졌던가. 그러나 그 뒤로 진 리스의 작품을 읽으면서 깨닫는다. 아, 그 아픔과 슬픔, 고통이 그나마 여과된 것이었구나. 이렇게 살았으니, 그토록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겠구나.

진 리스는 영연방 도미니카에서 웨일즈 태생 아버지와 백인 크리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 자신은 백인으로 태어났지만, 그때부터 이방인이나 다름없었다. 백인 사회에서도, 그렇다고 흑인 사회에서도 어울리기 어려운 모호한 정체성 때문에 고통받는 모습은 작품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번에 다시 읽은 <한밤이여, 안녕>에서도 그런 구절들이 종종 눈에 들어온다. ‘나는 자존심도 없고,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고, 국적도 없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너무도 슬프다, 너무도. 괜찮아, 나는 여기 그냥 사는 거야. 마치 지푸라기가 소용돌이의 가장 자리에서 빙빙 돌며 떠다니다 점차 소용돌이의 한복판으로 빨려 들어가듯’(<한밤이여, 안녕>, 55쪽) 등등. 역시,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진 리스는 16세 때 영국으로 건너갔으나 아버지의 죽음 뒤 경제적으로 쪼들리면서 코러스 걸, 마네킹, 누드모델 등의 직업을 전전하며 고생스럽게 삶을 이어갔고 그럼에도 궁핍함은 그녀의 삶에서 떠날 줄 몰랐다. 그나마 물질적으로 의지했던 연인과 이별한 뒤에는 더욱 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삶을 바탕으로 써내려간 그녀의 작품은 주로 젊은 여성들이 사회에서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희생자나 피해자로 그려진다. 그들은 대부분 사회 통념에 갇혀 변변한 직업도 갖지 못한 채, 가난과 멸시를 견디며 척박하게 살아간다. 그런 고되고 팍팍한 삶이 자조와 환멸, 자기 연민이 가득한 냉소적인 언어로 묘사된다.

<한밤이여, 안녕>은 올해 초에 읽은 <어둠 속의 항해>보다 나중에 쓰인 작품이다. <어둠 속의 항해>의 주인공 ‘애나’가 나이가 든다면 <한밤이여, 안녕>의 ‘샤샤’의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왜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이 작품은 읽는 내내 감탄하게 된다. 물론, 이 감탄은 작품을 이렇게 쓰다니, 이런 표현과 통찰력을 보여준다니 하는, 쓰는 사람 관점에서 본 경이로움이다. 작품 전체는 고통스럽고 암담한, 이제는 늙어버린, 그런데 여전히 젊은 시절과 마찬가지로 그 어디에도 편히 안주할 수 없는 여성의 삶을 그리고 있다. 영국 여인 샤샤는 가진 것도 없이, 젊음도 시들어버린 상태로 비루한 호텔 방을 전전하며 삶을 이어가고 있다. 샤샤는 자신을 ‘인생이란 투쟁에서 져서 약간 파손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녀는 이 삶에서 잘해 보려고 애를 쓰지만, 항상 실패로 돌아가고, 그녀가 가는 길은 결코 다른 길로 연결되지 못한다. 언제나 막다른 골목이며, 문들은 늘 닫혀 있다.

낯선 땅인 프랑스에서 집도, 남편도 없이 혼자 떠돌아다니는 이 여인은 철저히 이방인이다. 그녀는 어두운 호텔 방에 홀로 머물거나 거리를 거닐면서 자신이 지나온 삶을 문득 문득 떠올린다. 그 삶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참혹한 인생. 그녀는 이제 ‘사랑받기 원하지 않으며, 아름답기를 원하지도 않고, 행복이나 성공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단지 한 가지다. 자신을 가만히 놔두는 것. 그런데 세상은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호텔의 옆방 남자는 혐오스러운 눈길로 그녀에게 치근대고,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젊은 남자 ‘르네’는 그녀에게서 돈 좀 뜯어내 볼 심산으로 샤샤의 주변을 맴돈다. 이런 비참한 세상에서 그녀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클로로포름을 들이마시고 또 한 번 목숨을 끊을 생각을 하기도 한다. ‘다음 주, 그렇지 않으면 다음 달, 그렇지 않으면 다음 해에 자살할 것’이라고 마음먹는다. 그렇지만 ‘먼저 낸 집세가 다 끝나기 전에는 그리고 아침식사대로 이미 지불한 돈이 다 끝나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107쪽). 자살을 생각하면서도 먼저 치른 돈을 떠올릴 만큼 그녀의 삶은 구질구질하다. ‘샤샤’는 늙은 진 리스의 또 다른 자아일 것이다.

<한밤이여, 안녕>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샤샤가 오래전에 본 가엾은 고양이 한 마리를 떠올리는 장면이다. 고양이는 샤샤가 보기에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학대받아 비참했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샤샤가 끔찍하게 생긴 고양이의 눈을 보고 있으면 그 콤플렉스를 볼 수 있었고, 고양이가 자신의 운명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제 운명을 알고 있던 그 고양이는 살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깡말랐고, 다른 수고양이들의 사냥감이었다. 온 동네 수고양이들이 그 가엾은 고양이의 등 위에 올라 타 마치 1시를 가리키는 두 개의 시곗바늘형태를 만들었다. 목에 난 상처는 날이 갈수록 심해 갔다.’(<한밤이여, 안녕>, 69쪽) 이 가엾은 고양이는 어느 날 자동차에 치여 죽는다. 샤샤는 고양이가 길가에 몸을 던졌고, 택시에 치여 죽었으며, 그 택시 기사가 고양이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한다. 샤사는 자신을 이 고양이와 동일시한다. 그리고 고양이를 죽게 만든 택시 기사가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한다. 고양이와 관련된 이 상징은 작품 결말과 어우러져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는 장치가 되는데, 여러 비평가들의 생각과 달리 나는 너무나도 참혹한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어둠 속의 항해> 의 열아홉 살 ‘애나’ 또한 진 리스의 분신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집안의 몰락 이후 더 이상 경제적으로 의존할 데가 없는 고아 신세가 된 애나는 고향인 카리브해를 떠나와 영국에서 새로운 삶에 적응하고자 부단히 애쓴다. 코러스 걸로 근근이 살아가지만 삶은 녹록치 않다. 힘겹게 몇 푼 벌면 어디로 가는지 결코 알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돈은 사라지고 만다. 애나가 세 들어 사는 집 주인인 도스 부인은 늘 못마땅한 눈초리로 그녀를 흘겨보며 감시자 역할을 해댄다. 도스 부인은 입버릇처럼 말한다. “안돼요. 젊은 아가씨가 이렇게 살면 안돼요.” 애나는 이 힘겨운 삶이 어서 빨리 흘러가 자신이 늙어버리길 바란다. ‘이 모든 망할 일이 다 끝났으면 좋겠어. 그럼 도무지 아무것도 아닌 일로 이렇게 침울한 기분에 빠져 있진 않을 텐데.’(<어둠 속의 항해>, 111쪽) 생각하지만, 열아홉 그녀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나날들은 너무나도 길다.

이 가엾은 애나에게도 사랑은 찾아와서 그녀는 부유하고 나이 많은 월터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월터에게 애나는 그저 스쳐가는 여인, 일종의 유희대상일 뿐이다. 애나는 월터를 만나면서 조금은 안락한 생활을 누리게 된다. 그 편안한 삶은 월터가 애나를 위해 기꺼이 마련해준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그 모두는 애나를 위해서가 아니다. 월터 그 자신이  자기 수준에 맞는, 편안한 곳에서 애나를 만나기 위함이다. 월터를 만나고 있다고 한들 애나는 그저 행복하지만은 않다. 월터가 양손으로 애나의 한쪽 손을 잡아 따뜻하게 해주면서 “차갑군.” 말할 때 애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차가워-진실처럼 차갑고, 인생처럼 차가워. 아니, 그 무엇도 인생처럼 차갑진 않아.’(<어둠 속의 항해>, 187쪽) 그저 사랑에 빠진 철부지 열아홉이라면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젊은 아가씨에게 이미 세상은 너무나 가혹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둘의 관계가 끝났을 때, 아니 월터가 애나로부터 더는 즐거움을 얻지 못하게 되어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고했을 때, 애나는 또 한 번 세상의 가혹함에 부딪힌다. 월터의 방식은 비열하기 짝이 없다. 그는 사촌 빈센트를 내세워 애나를 회유하고 협박한다. 빈센트는 애나를 걱정해주는 척 온갖 위로와 어른(!)으로서의 조언을 담은 편지를 보내지만, 그 편지가 담고 있는 진짜 의미는 오직 애나가 주제파악을 하고, 하루빨리 월터로부터 떨어지라는 것이다. 게다가 빈센트의 목적은 월터가 보낸 편지라는 물증을 회수해서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뒤탈을 없애는 것이다.


당신은 젊고, 모두들 말하듯이 젊음이란 위대한 것,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선물이니까. 가장 위대한 선물이라고 모두들 말하죠. 그리고 실제로 그래요. 당신 앞에는 모든 것이, 수많은 행복이 놓여 있어요. 그걸 생각해봐요. [...] 나는 시골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데, 당신이 정원에 들어가 꽃과 그 온갖 것의 향기를 맡을 때 이렇게 다소 불쾌한 종류의 사랑 따위는 정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어요. (<어둠 속의 항해>, 애나에게 보낸 빈센트의 편지)


빈센트의 말처럼 젊음은 정말 위대할까? 가장 큰 선물일까? 그리고 정말 애나의 앞에는 수많은 행복이 놓여 있을까? 가진 것이 많고 부유한 이들에게 젊음은 축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나처럼 이방인과 같은 신분, 어디에도 적을 둘 수 없는 불안정한 위치, 그런 와중에 오직 젊을 뿐이어서 외모만 눈에 띄는 여성에게 삶은 축복일 수 없다. 선물일 수 없다. 애나만 하더라도 자신의 외모를 보고 다가온 늙은 남자 월터에게 이용당할 대로 이용당하고 끝내 버려지지 않는가? <한밤이여, 안녕>의 샤샤 또한 젊은 시절을 그렇게 가혹하게 보내고 이제는 어느 낡은 호텔 방안에 자신을 가둔 채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농락하는 거리의 온갖 남자들로부터 방문을 걸어 잠근다. 커튼을 쳐버린다. 그럼에도 그들은 방문을 긁어대고, 방안으로 들어오겠다고 기를 쓴다. 정원에 들어가 꽃과 온갖 것의 향기를 맡는 일은 부유하고 젊은 여자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젊더라도, 애나처럼 힘겹게 삶을 유지해나간들 <한밤이여, 안녕>의 샤샤로 고독하게 늙어갈 뿐이다.

샤샤에게 그나마 그 작은 호텔 방이 위안거리라면, 애나에게는 고향에 대한 기억이 작은 위로이다. 마음은 언제나 저 먼 카리브해 고향과 그곳에서 가깝게 지내던 프래신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한 애나. 다시 힘을 내 ‘계속해서 살아가고 살아가고 살아가야 해.’ 다짐해 보지만 앞으로 그녀에게 펼쳐질 인생은 한없이 어두워 보이기만 한다. 손톱 손질 일을 하면서 실은 유사매춘 행위를 하고 있는 ‘애설’처럼 자기의 삶도 나락으로 계속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애설 또한 애나에게 조롱하듯이 말한다. “앞으로 몇 년간 얼마라도 돈을 모으지 못한다면 내가 어떻게 되겠니? 네가 한번 말해볼래? 조금만 기다리면 너도 알 거야. 네게도 일어날 일이야. 어느 날 너도 알게 될 거라고. 기다려봐, 조금만 기다려봐.” <어둠 속의 항해>는 이렇듯 애나를 비롯해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남자와 결혼하려고 노력하거나 로리처럼 사실상 매춘을 하는 것, 또는 서른을 넘긴 애설이 그러하듯 손톱 손질을 내세운 간접적인 매춘 사업을 하는 것으로 삶을 연명한다. 가난한 하층 계급 여성에게 그 밖의 선택은 없다. 이 척박한 삶이라는 ‘어둠 속의 항해’에서 애나를 그 무엇보다 무섭게 만드는 것은 돈의 힘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자본주의가 팽배한 이 사회에서 하층계급 여성으로서 살아가기란 그리 쉽지 않다. 애나는 ‘괜찮아질 거야.’ 스스로 위로하고, 내일은 다를 것이라고 기대도 해보고 다짐도 해보지만 그녀가 어둠 속을 항해하는 일은 끝없이 암울해 보이기만 한다. 진 리스가 살았던 세상은 여자에게 곧 ‘어둠’이자 ‘한밤’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진 리스의 <한잠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부인>에 실린 단편들 또한 그즈음 사회의 시선이나 제도 속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여성들의 삶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바로 그 담담함 때문에 그녀들의 삶은 더없이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진 리스의 이야기 속 여자들은 <한밤이여, 안녕>이나 <어둠 속의 항해>의 샤샤, 애나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의상 모델, 코러스 걸, 매춘부, 배우 등 주로 여성성을 상품화한 직업군에 속한다. 그렇지 않은 여자들이더라도 오직 결혼을 통해서만 사회, 경제적으로 안정된 지위를 차지한다. 하지만 그런 지위를 차지했더라도 남편 또는 애인의 상황으로 인해 한순간에 몰락하기도 한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이런 단편들은 진 리스의 자전적 이야기나 마찬가지이다. 그중에서도 「빈」의 ‘프랜시스’가 특히 그렇다. 프랜시스는 현재 남편 ‘피에르’ 덕분에 삶은 공허할지언정 경제적으로는 꽤 넉넉하게 살며 인생을 즐기고 있다. 그러나 피에르가 불미한 일에 연루되면서 그녀의 삶 또한 나락으로 떨어지기 일보직전이다. 프랜시스는 말한다. ‘내 잘못이 아니다. 남자들이 망친 것이다. 늘 내 정신을 업신여기고 몸에만 온통 신경을 썼기 때문에. 여자들은 무분별한 잔인함과 어리석음으로 나를 망쳐 놓았다.’

프랜시스의 이 말은 <한밤이여, 안녕>의 샤샤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샤샤는 자신을 계속 쫓아다니면서, 그녀의 호텔방으로 기어들어오려고 애쓰는 르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뭘 두려워하는지 알고 싶어요? 그래요, 그럼 말해 주지요.... 난 남자가 정말 무서워요. 남자보다 더욱 무서워하는 건 여자지요. 내가 너무나 두려워하는 건  망할 놈의 인간들이지요. 인간이 다 무서워요. 물론이지요. 누가 이 더럽고 탐욕스러운 인간들을 두려워하지 않겠어요?”(<한밤이여, 안녕>, 207쪽) 결국 샤샤는 인간들 때문에 또 한 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샤샤, 애나, 그리고 프랜시스를 비롯한 진 리스의 분신과도 같은 그녀들의 삶은 그토록 살아남으려고 고군분투하는데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그나마 진 리스에게는 글쓰기가, 그녀의 작품이 마침내 그녀 삶에 한줄기 빛을 던져주게 되었지만 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샤샤 또는 애나들은 지금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지, 아니 살아내는 것인지 생각해 보면 암담해진다. 이 세 작품의 제목 또한 의미심장하다. 이토록 힘겨운 인생을 살아가는 그녀들은 스스로 <한잠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부인> 하고 다독이며 <어둠 속의 항해>를 하듯 애써 나아가지만 결국 맞이하는 것은 한밤, 깊은 밤,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다. <한밤이여, 안녕>하고 그 어두운 밤을 마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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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이여, 안녕 펭귄클래식 51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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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다시 읽게되어 정말 다행이다. 예전에는 이렇게 좋은 작품인줄 왜 몰랐을까. 진 리스 작품 속 주인공들이 늙으면 샤샤처럼 되는 게 아닐까 싶어서 너무나도 가슴 아프다. 한밤을 멀리 보내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 어두운 밤을 맞이하는 이야기라 처절하게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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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5-31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어째서 품절인거죠? ㅜㅜ

잠자냥 2019-05-31 09:4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도 이번에 100자평 쓰려고 찾아보니, 펭귄에서 나온 이 책은 마카롱 에디션도 그렇고 둘 다 품절이네요? 진 리스가 1979년에 사망했으니... 아무래도 저작권때문에 다시 계약을 안했나 보네요(근데 이 책은 알라딘 중고 서점에 종종 보이더라고요).

다락방 2019-05-31 09:46   좋아요 0 | URL
펭귄이라면 제 책장 한 켠을 내어줄 수 있는데 말입니다......(시무룩)

일단 중고등록 해두긴 했어요.
 
우리 몸이 세계라면 - 분투하고 경합하며 전복되는 우리 몸을 둘러싼 지식의 사회사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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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몸은 어떻게 차별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가에 관한 학문적인, 그러나 매우 친숙한 글들- 지식이, 배움이, 앎이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람, 김승섭- 이 땅에서 계속해서 읽고 싶은, 읽을만한 저자를 발견한다는 건 참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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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 - 앤드루 숀 그리어 장편소설
앤드루 숀 그리어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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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본 미국드라마 <퀴어 애즈 포크 Queer As Folk>는 게이들의 일상을 다룬다. 그 드라마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대부분의 게이들이 그 무엇보다 젊음을 높이 사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젊은 육체와 절정기에 이른 아름다운 외모가 노화로 인해 사라질까봐 노심초사하는 장면들이다. 그래서 드라마 속 인물들은 대개 끊임없이 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외모를 가꾸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금씩 시들어가는 젊음, 불쑥불쑥 나타나는 노화의 증거들…. 이런 징후들을 그들은 대부분 두려워했다. 젊음이 사라지고 그래서 외모가 볼품없어지면 또 다른 파트너를 만날 가능성이 줄어든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어디 그 드라마 속 인물들만 그러할까. 현실의 이성애자는 물론 바이,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등등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이 노화를,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기를 꺼려할 것이다. 그런데 유독 그 드라마 속 게이들이 젊음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에는 어쩐지 안타까운, 연민이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들은 이성애자들처럼 어떤 제도화된 체제, 즉 결혼이라는 틀로 어느 정도의 안정적인 파트너십을 만들기가 어려웠다(물론 나는 결혼이 꼭 안정을 보장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어떤 게이들에게는 그런 제도조차 부러울 수 있다). 그중에는 운이 좋아서, 또는 서로 매우 성실한 파트너를 만나 결혼이라는 체제 안에 이르게 되는 커플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그래서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아 헤매야 하는 대다수 게이들에게 젊음은, 그리고 그 젊음에서 비롯된 아름다움은 목숨을 걸고 붙잡아야만 하는 그 무엇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젊음은 곧 외로운 처지를 벗어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셈이다.

<레스>를 읽다가 문득 그 게이 드라마가 떠오른 이유는 바로 그런 점 때문이었다. ‘레스’는 더는 젊지 않다. 중년에 접어든 지 이미 오래이며 이제 곧 쉰을 바라본다. 눈부셨던 젊음은 이미 그 곁을 떠났다. ‘어머니들이 두려워하는 것보다 더 높은 데까지 나무를 오르’던 열 살 도 지났고, ‘침대에 잠들어 있는 연인을 놀라게 해주려고 기숙사를 기어오르’던 스무 살도 지났으며 ‘인어처럼 푸른 바다 속으로 뛰어’들던 서른 살도 지났다.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던 마흔 살도 훌쩍 넘었다. 마흔아홉, 이제 무엇을 위해 뛰어들어야 할지 모를 나이이다. 어디 젊음만 그러한가. 그의 곁을 오래도록 지키던 젊은 연인 ‘프레디’도 떠났다. 9년 동안 함께 지냈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청첩장을 들이민 것이다. 상대는 레스 그 자신이 아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젊음도, 젊은 연인도 모두 한꺼번에 레스를 떠난 것이다.

프레디의 청첩장을 받은 레스는 고민한다. 둘이 오래도록 사귄 사이임을, 아니 동거한 사이라는 것을 결혼식장에 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알고 있을 터인데, 소심하기 짝이 없는 레스가 당당하게 결혼식에 참석할 리는 만무하다. 아니, 아무리 당당하고 쿨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토록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낸 연인의 결혼식에 맨 정신으로 참석할 수 있을까? 술에 만취하더라도 그런 일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쿨하게 외면하지도 못하고 핑계를 찾던 레스는 서랍 속에서 보물을 발견한다. 이름 없는 작가인 그이지만 그래도 세계 곳곳에서 각종 섭외 편지(아니 그런데 이게 어떻게 무명작가란 말인가? )가 와 있던 것이다. 베를린에서는 계절학기로 학생을 가르쳐달라고 하고, 멕시코에서는 문학 컨퍼러스 초청장도 와 있다. 이탈리아의 문학상 시상식, 일본 요리 탐방 기사 요청까지! 그동안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초대장들이 갑자기 눈에 들어온다. 그래 바로 이거야! 레스는 그 초대들에 응하기로 하고, 이를 핑계 삼아 프레디의 결혼식은 불참할 수밖에 없다면서 답장을 보낸다. 그러고는 드디어 이탈리아, 독일, 멕시코, 프랑스, 모로코, 일본으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떠났으니 즐거워야 할 텐데, 그는 그렇지 못하다. 전 연인 프레디의 그림자가 곳곳에서 떠오르고 설상가상으로 프레디를 만나기 이전에 15년 동안이나 함께 지낸 ‘로버트’의 그림자까지 드리워진다. 왜 아니겠는가, 멕시코 문학 컨퍼런스는 시인으로 퓰리처상을 받았으며 레스의 오랜 연인이었던 로버트에 대한 심포지엄이다. 멕시코뿐만 아니라 어딜 가나 그의 옛 연인들, 그러니까 로버트 또는 프레디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당연하지 않은가? 15년, 또는 9년이나 함께, 그러니까 레스의 청춘, 그 젊음을 모두 함께 보낸 이들인데, 그 긴 세월이 여행지에서 쉽게 잊힐 수 있을까. 로버트와 함께 있었던 이탈리아의 호텔, 프레디와 함께 프랑스를 횡단했던 짧은 여행…. 이곳에서는 로버트와의 추억이 떠오르고 또 다른 곳에서는 프레디와의 일화가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도 여행지이다 보니 간간이 새롭게 만나는 누군가와 썸을 탈 기회도 주어지는데, 그래도 이 남자, 레스의 머릿속은 로버트와 프레디 그 두 사람이 가득 채우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레스의 모습을 뒤쫓다보면, 그의 일생, 적어도 스무 살 무렵부터 마흔아홉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생 전반을 쫓아다니는 기분이 든다. 그는 젊고 아름다운 시절에 그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로버트를 만났고, 둘은 뜨겁게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그렇게 15년을 보낸 뒤, 로버트는 갑자기 레스를 떠난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젊다고 하기 어려운 레스가, 그토록 아끼던 파란 정장이 조금 어색해질 나이에 이르렀을 즈음, 새파랗게 젊은 청년 프레디와 사랑에 빠진다. 레스도, 로버트도 결국 사랑했던 것은 푸르고 싱그러운 젊은이. 젊음. 다시 오지 못할, 그래서 더 소중한 그 젊음이 아니었을까. 때문에 그토록 자기의 젊음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두려워했던 것은 아닐까. 여행은 일정 기간이 끝나면 결국 다른 장소로 이동해야 하듯이, 인생 또한 줄곧 ‘현재’에 머무를 수는 없다. 다음, 다음으로 넘어가야 한다. 시간의 흐름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가 그토록 맞이하고 싶지 않았던 쉰 살 생일도 코앞에 닥친다.

결혼식을 피하는 목적은 이루었지만 여행은 프레디의 기억을 잊게 하는 데 딱히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레스는 이 도피성 여행 중에 서서히 생각지도 못한 발견을 하게 된다. 그 깨달음. 아마 그래서 사람들도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닐까. 일상을 벗어나서 잠시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 그간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오게 되는 여행. 게다가 인간은 여행하듯이 이 사람, 저 사람의 마음속을 떠돌아다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사람 사이를 돌아다니다가 문득 어떤 작은 깨달음이라도 얻으면 좋겠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그 사람과 이 사람, 그리고 또 저 사람 사이를 오가면서 웃고. 행복한 기분에 잠기고, 또 때로는 상처받고 헤매면서 젊음의 한 때를 지나 서른을 넘고 마흔을 넘어 중년에 접어들고 그렇게 늙어가는 게 인생은 아닐까.

여행 중에 레스는 자기에게는 본보기와도 같았던 루이스와 클라크 커플마저 파경을 맞이한 것을 알게 된다. 20년이나 함께 세월을 보낸 그들도 헤어진 것이다. 그때 루이스가 레스에게 한 말은 오래 곱씹어볼만하다.



“죽을 때까지 관계를 이어갈 수도 있다는 것도 사실은 사실이지. 사람들은 옛날부터 쓰던 식탁이 박살나고 있어도, 고치고 또 고쳤어도 계속 써. 그냥 할머니 것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말이야. 그렇게 마을은 유령이 되고 말아. 그렇게 집이 쓰레기 창고가 되는 거야. 그리고 내 생각엔, 사람들도 그렇게 늙는 거지.” (<레스>, 224쪽)


레스가 여행 중에 만났던 ‘조라’의 말처럼 사람들 모두에게 평생의 사랑 같은 건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사랑은 ‘다른 사람이 편히 잘 수 있도록 개를 산책시키는’ 것이며 ‘세금을 내는 거고 악감정 없이 화장실을 청소하는’ 것이다. ‘삶에 동맹을 두는’ 것이다. 사랑은 불도 아니고 벼락도 아니며 누군가와 나 자신이 늘 해왔던 그런 거라는 평범한 깨달음. 로버트도, 프레디도 레스를 결국 떠났지만, 그게 옳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영원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붙잡고 있는 것들 때문에 유령 마을이 되고, 집은 쓰레기 창고가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15년과 9년, 그 기간 동안 레스는 로버트, 프레디와 삶에 동맹을 두고 후회 없이 사랑했다. 그렇기에 레스의 마흔아홉 살까지의 인생은, 비록 소소한 슬픔이 있을지언정 그 전반부 모두는 ‘희극’이리라. 그가 아무리 ‘모든 순간을 갈팡질팡 넘어가며 바보’가 되고 ‘오해하고 말실수 하고 우연히 마주치는 그야말로 모든 것에, 모든 사람에 걸려 넘어지고도’ 레스는 자기 삶에서 이긴 것이다. 그 자신은 자기 삶이 얼마나 행복으로 이어졌는지 깨닫지 못하더라도.

레스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의 소설 <칼립소>처럼 오디세이를 뚝심 있게 기다려준 페넬로페는 없을지라도 뜻밖의 선물이 그를 기다린다. 때문에 레스의 쉰 이후의 삶도 전체적으로는 희극이지 않을까. 로버트가 레스에게 이야기했듯이, 지금 만나는 사람들은 절대 젊은 레스를 상상할 수 없을지 모른다. 절대로 레스는 쉰 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그게 전부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젠 사람들이 항상 레스를 어른으로 생각할 테니까. 그를 진지하게 생각할 테니까. 많은 이들이 인생에서 젊음이 사라지고 나면 그 뒤의 삶은 그저 쓸모없이 덧붙여진 빛바랜 별책부록이 아닐까 회의감에 빠지곤 한다. 나 또한 그렇다. 그러나 레스의 좌충우돌 여행기를 읽어나가다 보면 한없이 비극 같은 인생도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희비극은 인생에 적절히 뒤섞여 오면서 삶 전체를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터덜터덜 지친 여행 끝에 집으로 돌아간 레스에게 뜻밖의 선물이 기다리고 있듯이, 아무것도 기대할 것 없을 것만 같은 인생 후반기에 놀랄 만한 선물 하나쯤은 누구에게나 다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그 선물은 그래서 더 값어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레스>는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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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19-05-28 1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휴...저 이 책 7일만에 된밥 먹듯이 꾸역꾸역 다 읽었네요.ㅎ 몇 번을 포기하려다 억지로 읽어 내려온게 아까워서요ㅎ 잠자냥님의 리뷰는 이렇게 재밌는데, 저는 이 작품이 어렵고 지루해서 혼났네요.ㅠ 우리의 레스, 마지막 장면은 이런 저에게도 선물같았어요. 글 잘 읽었습니다.

잠자냥 2019-05-28 13:13   좋아요 1 | URL
하하하 ‘된밥 먹듯이‘라는 비유에 빵 터졌어요. ㅋㅋㅋㅋㅋ 그래도 마지막 장면은 괜찮았죠? ㅎㅎㅎ 책보다 재미난 리뷰라니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이 책 찾아보니 번역문장 때문에 잘 안 읽힌다는 사람들도 많더라고요.)

coolcat329 2019-05-28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힘들게 읽었지만 레스는 미워할 수 없네요^^

다락방 2019-05-28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는 읽기전에 리뷰 제목부터 너무 좋았어요. 완전 훅- 들어오는 제목입니다.

그나저나 이 책도 읽어야지.. 생각한 책인데 또 벌써 읽고 리뷰를.
잠자냥 님.. 오늘도 정말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제가 잠자냥 님 리뷰 읽으려고 알라딘 계속 하는 것 같아요. 감사해요 ㅠㅠ

잠자냥 2019-05-28 14:27   좋아요 0 | URL
저를 비롯해서 젊음이 사라져가고 있는 분들에게는 더 위로가 될 책 같아요. ㅎㅎ
다락방 님이 알라딘 서재 메인이나 다름 없는 분이신데! 멈추지 말고 쭉~ 하셔야죠! 화이팅입니다~!!
 
레스 - 앤드루 숀 그리어 장편소설
앤드루 숀 그리어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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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큭 웃다 보면 묘하게 가슴이 저릿해 오는 이상한 소설. 파란 정장이 더는 어울리지 않을, 청춘을 지나버린 이들이 읽는다면 더욱 공감할 작품. 인생은 희극 같으면서도 비극이고 비극 같으면서도 희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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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19-05-26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지금 이 책 반 정도 읽었는데 왜이리 재미없고 지겨운지요ㅠ 문장 자체가 쉽게 읽히지 않아 저의 문해능력에 심한 회의감이 드는 중이에요ㅠ

잠자냥 2019-05-26 22:12   좋아요 0 | URL
하하... 재미없을 수도 있지요. 퓰리처상 수상작은 저도 늘 기대했다가 기대에 못 미치는 작품이 많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