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스틴 부인의 이혼 푸른사상 세계문학전집 2
케이트 쇼팽 지음, 여국현 옮김 / 푸른사상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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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은 꿈꾸고 사랑하고 관습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한다. 관습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마는 일도 잦지만 그럼에도 여기 실린 작품들이 19세기에 쓰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상당히 급진적이다. 비단 여성 문제뿐만 아니라 인종, 계층, 전쟁 문제까지 두루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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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4-02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잠자냥 님은 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제가 읽고 싶어한 책들을 언제나 저보다 한 발 앞서 읽고 이렇게 후기를 남기시다니 말입니다!!

잠자냥 2019-04-02 22:55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은 여성학젠더부분 마니아 1위를 향해 달려가시느라 바쁜 틈에 제가 먼저 읽었습니다.... 이 책, 사두신 거 봤는데 조만간 읽으시겠죠? ㅎㅎ

단발머리 2019-04-04 14:26   좋아요 0 | URL
잠자냥님 정말 어떤 분이십니까!
다락방님이 1위를 향해 달려가는것도 아시고, 다락방님이 이 책 사두신것도 알고 계시고.... (띠용!)
정말 궁금하단 말입니다!!!!

잠자냥 2019-04-04 14:53   좋아요 0 | URL
syo 님과 단발머리 님이 다락방 님 서재 핵인싸라면 저는 그저 락방 님 서재 숨은 정독자일 뿐입니다. ㅎㅎ

다락방 2019-04-04 14:56   좋아요 1 | URL
숨은 정독자라니...아, 너무 낭만적이에요. ♡

(낭만적이라는 단어를 쓰고나니 오래전 본 외화 <천사들의 합창> 생각나네요. 하핫)

잠자냥 2019-04-04 15:02   좋아요 0 | URL
(그 소녀는 라우라~)

다락방 2019-04-04 15:04   좋아요 0 | URL
오! 아시는군요, 잠자냥 님! 반가워요!! >.<

저는 ‘라후라‘로 알고 있었는데 라우라 였군요. 후훗.

단발머리 2019-04-04 16:42   좋아요 0 | URL
라우라, 라우라, 라우라....

그녀는 어디에 사는... 누구.... 어떤 여인인가.
라우라, 라우라, 라우라..... ㅎㅎㅎㅎ
 

때로는 소소한 에세이에서 더 큰 감동을 얻는다. 유명한 작가의 글도 아니고, 문학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작품이 아닌데도, 그 어떤 글을 읽었을 때보다 마음이 흔들린다. <아흔일곱 번의 봄여름가을겨울>이 바로 그런 책이다. 아흔일곱 번의 봄여름가을겨울이라니, 제목부터 왠지 숙연해지는 기분이 든다.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는 순천 할머니들의 일기라면, 이 책은 강원도에 사는 이옥남 할머니의 글이다. 할머니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일기를 쓰셨다. 삐뚤빼뚤한 글씨체에 맞춤법도 곧잘 틀리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그 어떤 글쟁이의 글보다도 읽은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순천 할머니들처럼 이옥남 할머니 또한 어려서는 글을 배우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도 글씨가 쓰고 싶었다는데, 할머니의 아버지가 배우지 못하게 했단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홀로 글을 배우신다. 아버지가 글을 못 배우게 한 게 ‘원이 돼서’ 부엌 아궁이 앞에 앉아 부지깽이로 재 긁어서 ‘가’ 자와 ‘나’ 자를 써보며 글을 읽혔다. 그러나 시집살이하는 동안은 글을 안다는 표정조차 지을 수 없던 할머니는 남편이 저 세상 간 뒤에야 적적함을 달래고자 도라지 까서 판 돈으로 공책을 사서 거기에 하루하루 일기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특별히 ‘일기’를 쓴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글씨를 좀 더 예쁘게 써볼까 글자 연습을 한다고 시작한 것이 어느덧 30년에 이르렀다.

할머니의 일기는 때로 시(詩)와 같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가 산골에 홀로 사는 할머니의 삶과 함께 잔잔하게 펼쳐진다. ‘그저 잠만 깨면 밭에 가서 세월을 보내고 이 나이 되도록 이때까지 살았다.’며 일복을 타고 났다고 말씀하시는 할머니는 정말 사계절 내내 매일 같이 일하느라 편할 날이 없다. 그러면서도 ‘사람이란 일을 해야지만 힘이 생기고 용기도 나게 매련이지 가만히 누워 있으면 바보와 같지 뭐니.’ 말씀하신다. 밭일 하고 나물 캐서 장에 내다팔고 그런 와중에도 틈틈이 책 읽고 이렇게 일기도 쓰신다. 들판에 나가 종일 일하니 꽃이 피고 새가 울고 개구리가 울고 등등 자연의 변화에 누구보다 민감하고, 그 변화에 따라 삶에 대한 통찰이 가득 넘치는 문장들을 빚어내신다.

봄에는 ‘사람은 춥다지만 풀과 꽃은 때를 놓칠까 바쁘게 서둔다.’ 쓰기도 하고,  ‘봄이 오면 새소리 이상하게 들리고 산에는 진달래꽃 동백꽃이 만발하고 대지에는 각색 사물이 봄을 맞아 즐거운 듯 시간을 다투면서 나오는데 사람은 왜 한번 가면 다시 못 오는가.’하며 곁에 없는 이들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여름에는 백합 향기를 맡으며‘하얀 백합이 보기에도 깨끗하고 즐거워서 사람도 그와 같았으면 좋겠다.’ 하신다. 그 마음은 나도 본받고 싶어진다. 가을에는 울긋불긋한 단풍을 바라보며 눈이 아주 즐겁다고 느끼다가도 ‘당분간 있다가 곱든 나뭇잎도 말라서 우수수 떨어지게 되겠지. 사람도 나뭇잎과 같이 나이 많고 늙어지면 나뭇잎 떨어지듯이 자연히 섭섭하고 슬퍼지고 우울해지게 마련이지.’ 하며 가을을 사람의 인생과 비유하기도 한다. 멋진 글을 쓰려고 애써서가 아니라, 자연스레 써나갔지만 소박하고 깊이 있는 표현에 절로 감탄하게 된다.



고추 말리는 기 애 보는 것 같다. 하나씩 만져봐서 바싹 한 건 골러서 넣고 누굴누굴한 건 뒤집어 말리고 방이 달궈놓으면 뜨거워 못 있는다. 뜨겁기 전에 얼른 뒤집고 나간다. (<아흔일곱 번의 봄여름가을겨울>, 116쪽)


그러나 무엇보다도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씨. 작은 짐승들까지 걱정하는 그 마음씀씀이에는 자못 고개가 숙여진다. 할머니는 날이 추워지자 그렇게 많던 새도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며 ‘어디 가서 뭘 먹고 겨울을 나는지 그것도 궁금하구나. 집도 없이 어디 가서 의지하고 있나 싶다.’며 겨울 날 새들을 걱정하고, 소나무 가지에 앉아 울고 있는 뻐꾹새를 보며 ‘가만히 앉아서 우는 줄 알았더니 몸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힘들게 운다’며 ‘일하는 것만 힘든 줄 알았더니 우는 것도 쉬운 게 아니구나. 그렇게 힘들게 우는 것을 보면서 사람이고 짐승이고 사는 것이 다 저렇게 힘이 드는구나’ 생각하신다. ‘힘들게 운다고 누가 먹을 양식이라도 주는 것도 아닌데 먹는 것은 뭣을 먹고 사는지. 몸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힘들게 우느라고 고생하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아프다.’ 하신다. 때로는 방게를 잡아와서 간장에다 끓이다가도 문득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한다. 죄가 될 것 같아서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그 전에 공수전 갑북이 할멈 살았을 땐 개구리를 구워서 다리를 들고 몸에 좋다고 이거 먹어보라 해서 내가 그기 입이냐고 개구리를 먹는 기 입이너 하고 내밀어 쐈는데, 그 할멈재이도 오래 못 살고 죽었다. (<아흔일곱 번의 봄여름가을겨울>, 18쪽)


식물이나 동물 생각하는 마음도 이러하시니, 사람에 대한 애정은 오죽할까. 할머니의 자식 사랑, 손주 사랑은 애절하다. 모진 시집살이에 바람만 피며 그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던 남편. 그렇게 힘들게 살았으면서도 ‘자식들이 멀리 살지만 다 착해서 행복하다.’ 말하는 할머니는 ‘자식이란 무엇인지 늘 궁금하니까 늘 기다려진다.’ 한다. 자식들 아픈 게 당신 몸 아픈 것보다 더 걱정이고, 자식들이 용돈을 주고 가면 고마우면서도 맘이 아프다. 삶은 모질어서 할머니보다 14년이나 어린 동생이 치매에 걸린 모습을 봐야만 하고, ‘며칠 전에도 풋콩을 까서 안쳐 먹고 일어나라고 주고 왔는데, 그런지 삼사일밖에 안 됐는데 하나뿐인 친구가 그새 저세상으로 가’ 버린다. ‘하룻밤 새 친구 한 명 떠나고 이제는 정말 나 하나 외로이 홀로 다니게 되었네. 맘 같아서는 나도 빨리 친구 따라 갔으면 한 생각이 불현듯이 드는구나. (...) 나도 얼마나 더 살까. 나도 머지않아 따라 갈 거다. 될 수 있으면 친구 뒤를 따라서 갔으면 싶다. 언제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볼까.’라는 구절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가가 젖어든다.

사람을 향한 할머니의 애정은 가족이나 친구 등 가까운 이들로 한정되지 않는다. 할머니는 대구 지하철 화재 뉴스를 보고 눈물을 흘리다가 이장님 차를 얻어 타고 양양군청까지 나가서는 성금 십만 원을 보태고 오신다. ‘없이 사느라고 남의 신세만 지고 좋은 일 한번 못 해 보고 그게 한이 돼서’ 조금이나마 보냈다는 할머니. ‘아무개야 아무개야 하는 게 내가 눈물이 난다. 아이 옷 벗어 논 걸 껴안고 아이 엄마가 그렇게 우니 사는 게 숨이 붙었으니 살지 사는 게 사는 거 같겠나. 텔레비전 보면 맨 속상하기만 하다.’ 말씀하시는 할머니. 할머니는 읍내에서 불난리 난 사람들에게도 선뜻 당신의 옷을 꺼내 보낸다. 며느리가 선물해 준 남방, 아직 한 번밖에 입지 않은 외투, 예쁜 치마, 추리닝 등등.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은 풍요로운 시대를 살면서도 마음은 야박하기 짝이 없는 대다수 현대인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필요 없는 걸 주면 그것도 죄여, 내가 아까워하는 걸 줘야지.”(222쪽)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온통 이렇게 감동적이고 숙연해지는 글로만 가득한 것은 아니다. 할머니의 소소한 행복이 전해지는 글들도 많다. 손자가 준 용돈으로 믹서기를 사서는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며 ‘ 이제 콩을 담가서 갈아봐야지.’ 마음먹는 모습에서는 왠지 할머니가 귀여워서 웃음 짓게 된다. 또 ‘바깥은 춥고 냉냉해서 나가기도 싫고 방에 그냥 있으니 심심해서 그저 책이나 있으면 읽고 싶다.’는 할머니의 소박한 바람에는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모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다음과 같은 글에서는 누구라도 크게 웃을 수밖에 없으리라.



-오래 살다 보니-
밭에서 김을 매는데 젊은 여자가 보건소에서 나왔다면서
치매 조사를 하고 갔다. 나 사는 동네 아냐고 해서
강원도 양양군 서면 송천리라 했더니 올해 무슨 년이냐고
물어서 2014년이라고 대답했다.
오래 살다보니 별일이 다 있다. (<아흔일곱 번의 봄여름가을겨울>, 59쪽)


-왜 자꾸 뛰나가너-
올해도 산에 도토리가 많이 떨어졌다.
날마다 도토리 까는 게 일이다. 망치로 깨서 깐다.
안 깨면 못 깐다. 반들반들해서.
돌멩이 위에 놓고 망치로 때리는데 자꾸 뛰나가서
에유 씨팔 뛰나가긴 왜 자꾸 뛰나가너 하고 욕을 하고는 내가 웃었다. (<아흔일곱 번의 봄여름가을겨울>, 141쪽)


강원도 양양 이옥남 할머니의 일기를 담은 <아흔일곱 번의 봄여름가을겨울>과 순천 할머니들의 일기를 담은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이 두 책은 특별할 것 없는 이들의 더없이 평범한 삶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도 이 두 책이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그 꾸밈없는 소박한 진심을 담은 글, 자기의 아픔과 고통스러운 삶마저도 숨김없이 써내려간, 그래서 읽는 이들의 마음에 생생하게 가닿는 그 진솔함에 있을 것이다. 이런 글들은 ‘글’이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감정을 마음에 새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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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 매 - 어느 사랑 이야기 쏜살 문고
글렌웨이 웨스콧 지음, 정지현 옮김 / 민음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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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부부와 그들 사이에 끼어든 아름다운 매 한 마리. 이 기묘한 삼각관계를 통해 사랑의 한계와 비극성, 결혼 제도의 불합리함, 인간 관계의 모순 등을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 은유와 상징이 넘치는 문장들, 그 깊이를 헤아리는 것은 모두 독자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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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일곱 번의 봄여름가을겨울
이옥남 지음 / 양철북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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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일곱번의 봄여름가을겨울이라니... 그 많은 계절을 온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인 할머니의 진솔하고 소박하면서 삶이 고스란히 담긴 글들. 이런 글에는 완전히 마음을 놓아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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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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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에는 주요 인물 세 사람이 등장한다. 이 작품의 화자인 치안판사, 그와 어떤 면에서는 대척점을 이루는 졸 대령, 그리고 그들, 즉 제3국 소속 이른바 ‘문명인’들이 정복하고 관리해야 할 대상인 ‘야만인’인 눈먼 여인이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이렇게 치안판사와 눈먼 여인, 졸 대령 세 사람을 내세워서 제국주의의 허위를 통렬하게 고발한다. 나는 이 세 사람의 관점에서 이 작품을 재구성해봤다.

눈먼 여인 : 나는 아버지와 함께 난데없이 이곳에 끌려와 고문당했다. 아버지는 내 앞에서 그들에게 모진 학대를 받다 목숨을 잃었고 나 또한 고문으로 반쯤은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그날 이후로 모든 것이 흐릿하게만 보인다. 이런 상태로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내 부족들이 있는 곳으로 갈 수가 없어 나는 이렇게 동냥을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늙은 남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내게 이곳에서 동냥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자기들은 부랑자들이 시내에 떠도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고. 어딘가 살 곳이 없으면 내 부족한테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일자리를 제안한다. 청소하고 빨래를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나는 그의 집에서 채소를 다듬으며 빵을 굽고, 수프 스튜 만드는 일을 돕는다. 그런데 그는 내 다친 발의 붕대를 풀더니 발을 씻겨준다. 이상한 사람이다. 이윽고 내 몸을 씻겨준다. 그러고 나서는 물기를 닦아준 뒤 내 몸에 아몬드 오일을 발라 마사지해준다. 그는 내 몸을 문지르는 행위에서 일종의 쾌감을 느끼는 것 같다. 매일 밤 이런 일이 반복된다. 그는 나를 씻기면서 내 상처를, 내 부족의 상처를 치유한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눈은 흐릿하지만 그가 하는 행위는 다 보인다. 그는 이 지역 치안판사이다. 그는 그들이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내 부족을 비롯해 이 땅의 토착민들에게 조금은 너그러운 것 같다. 하지만 그도 이 땅을 짓밟은 사람들에 속하지 않는가? 그들은 아무 죄 없는 나의 아버지를 앗아갔다. 그의 너그러움, 나를 돕고 있다는 생각은 그들이 이 땅에서 저지른 악행을 덜어내고자 하는 자기만족일 뿐이다. 나는 여기서 굶주리지도 않고 편하게 지낸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나를 부족에게 데려다주겠다며 길을 나선다. 길은 멀고 험하다. 그럼에도 나는 가야한다. 그와 내가 헤어져야 할 순간이 왔을 때 그는 묻는다. 가고 싶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고. 그는 그렇게 제멋대로이다. 내가 왜 도대체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를 단 한순간도 사랑한 적이 없다. 나는 내 부족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가 제공한 안락한 잠자리와 음식, 이 모두는 내 아버지를 앗아간 자들의 것이다. 나는 반쯤 눈먼 사람으로 살더라도, 그들이 야만인이라 부르는 내 부족과 함께 지내다 어느 날 다시 붙잡혀 또 고문당하더라도 나는 갈 것이다. 나는 이 늙은이의 자기만족용 애완동물, 심지어 성적노리개는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치안판사: 나는 한가로운 제국 변경에서 은퇴할 날을 기다리며 소일하고 있는, 제국을 위해 봉사하는 책임감 있는 시골 치안판사이자 관리다. 늙고 쇠약한 나는 이곳에서 평화로이 말년을 누리고 싶다.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먹고 자고 만족해한다. 내가 죽으면, 신문에 석 줄 정도의 기사는 실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평소에 나는 고전을 읽고 여러 가지 수집물 목록을 작성하고, 남부 사막지대의 지도들을 추려본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아침 일찍 혼자 호숫가로 가서 영양을 사냥한다. 나는 조용한 시대에 조용한 삶을 사는 것 이상을 바란 적이 없다. 그런데 요즘 이곳은 평화가 깨졌다. 지난해부터 야만인들 사이에 불안한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는 얘기들이 수도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장사꾼들이 야만인들로부터 공격받고 약탈을 당했다고 했다. 가축 도난이 빈번해지고, 그 수법도 대담해졌단다. 통계청 관리들이 행방불명되었다가 얕은 무덤에 매장된 상태로 발견되었다고도 했다. 국경순찰대와의 충돌도 있었다고 한다. 야만인 부족들이 무장을 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 틀림없이 전쟁이 일어날 테니 제국이 사전에 예방책을 강구해야 한다고도 한다. 그런데 나는 이런 불안한 징후를 전혀 보지 못했다. 나는 경험으로 한 세대에 한 번씩은 꼭 야만인들에 대한 히스테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이 또 시작된 것이다. 그 뒤로 보안청의 제3국 경찰들, 즉 국가의 수호자들이며 폭동 전문가들이고 진실의 신봉자들이며 취조 전문가들이 처음으로 변경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파견되어 국경 너머 야만인들을 잡아들이고 잔인하게 고문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급기야 나는 어느 날 거리에서 심하게 고문당해 온몸이 상처투성이인데다가 후유증으로 눈이 먼 젊은 야만인 여자를 만난다. 야만인들처럼 그녀의 눈썹은 검고 반듯하며 머릿결은 검고 윤이 난다. 나는 그녀에게 동정심을 느낀다. 아니, 이상하게 자꾸만 끌린다. 설명하기 힘든 매혹이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집안일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녀를 집으로 데리고 와 발을 씻기고 몸을 씻긴다. 그녀의 몸은 지져지고 찢기고 칼로 베인 자국투성이이다. 나는 그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싶다. 여자는 내 침대에 누워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나는 연인처럼 행동한다. 나는 그녀의 옷을 벗기고, 그녀의 몸을 씻겨주며, 그녀를 어루만지고, 그녀 곁에서 잠든다. 날마다 그녀의 몸을 문지르는 동작의 리듬에 정신없이 빠져들고 시간 밖에 존재하는 듯한 텅 빈 황홀감을 느낀다. 하지만 똑같은 의미에서, 나는 그녀를 의자에 묶고 두들겨 팰 수도 있다. 그렇다고 덜 친밀해지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나는 그녀를 자신의 부족에게 데려다 주기로 결심한다. 이것은 나의 속죄의식일까?

졸 대령: 나의 임무는 진실을 밝히는 일이다. 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진실을 밝혀내고야 만다. 진실을 밝히려면 특정한 말투를 알아차리면 된다. 사람이 진실을 얘기할 때는 특정한 말투를 쓰는 법이다. 나는 훈련과 경험으로 그걸 알고 있다. 물론 진실을 찾기 위해서는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 그들, 그러니까 야만인들은 처음에는 거짓말을 한다. 압력이 가해지면 더 거짓말을 한다. 거기에 압력이 더 가해지면 변화가 생긴다. 그러다 압력이 더 가해지면 그때에야 진실을 말한다. 그게 진실을 알아내는 방법이다. 이 변경의 정착지는 제국을 수호하는 최전선이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철수하지 않는다. 그런데 저 늙은 치안판사는 제국 수호자로서의 임무를 저버리고 우리의 적 야만인과 내통했다. 그는 처음부터 제3국 소속 경찰에게 비협조적이었다. 수년 동안 이렇게 침체된 곳에서 게으른 토착민들의 방식에 맞춰 살다 보니 구태의연한 생각에 젖어 있고, 제국의 안보를 임시적이고 불안정한 평화와 맞바꾸려는 위태로운 생각에 빠진 하찮은 민간인관리이다. 그런 인간이 기어코 야만인 여자 하나 때문에 적과 내통한 것이다. 그러고도 그는 우리가 자신을 법정에 세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가 이곳 시민들에게 인기가 많은 게 두려워서 말이다. 하지만 천만에! 그는 혐오스럽게도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천한 무리와 어울림으로써 스스로 명예를 실추시켰다. 그래놓고도 새로운 야망을 품고 있다. 그는 자신의 원칙을 위해 개인적인 자유를 희생할 용의가 있는, ‘단 한 명의 의로운 사람’으로 이름을 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이곳 사람들에게 ‘단 한 명의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그저 광대이고 미친놈일 뿐이다. 그는 지저분하고 악취 나는 인간이다. 일 마일쯤 떨어진 곳에서도 냄새가 날 정도이다. 그는 늙은 거지같이 생겼다. 쓰레기를 주워 먹고 사는 거지. 그런데도 그는 역사의 순교자로 기록되기를 원하는 것 같다. 하지만 누가 그런 인간을 역사책에 기록해주겠는가? 국경에서 일어나는 이런 문제들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조금만 지나면 잊힐 터이고, 변경은 이후 이십 년 동안 평화로워질 것이다. 사람들은 먼 과거의 역사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치안판사 같은 인물이 극도로 혐오스럽다.

내가 이 작품의 화자인 치안판사 ‘나’의 이야기부터 늘어놓지 않은 까닭은 그들이 마음대로 유린하는 대상인 ‘야만인 여인’, 그녀의 심정이 어떠했을지에 초점을 두고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녀 처지에서 보자면, 제3국 소속의 그들이 오히려 야만인이 아닐까? 그녀의 부족은 ‘일 년중 대부분은 물고기를 잡고 덫을 놓으며, 가을에는 노를 저어 호수의 먼 남쪽 기슭으로 가서 지렁이를 잡아 말리고, 형편없는 갈대집을 짓고 살며,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고, 갈대 속에 숨기나’ 할 뿐이다. 그런 그들이 제국을 향한 야만인의 거창한 음모에 대해 뭘 알겠는가? 그런데 ‘문명인’들은 남의 땅에 쳐들어와 마음대로 땅을 짓밟고 존재하지도 않는 ‘야만인’을 설정하고는, 자신의 부족들이 야만인이며 때문에 약탈을 하고 방화를 하고, 강간을 하는 등 제국의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라고 한다. 그러고는 그 구실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들을 붙잡아 고문하고 잔혹하게 죽여 버린다. 그런 행동을 서슴지 않는 그들이 오히려 야만인은 아닐까?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문명인’이라며 토착민인 자신들을 말살해버려야 할 대상으로 다룬다. 그 모두가 제국의 안녕을 위해서이다.

눈먼 여인이 보기에 ‘치안판사’는 더 가관인 인물이다. 그는 선량하다. 그녀를 데려다가 상처를 치료해주고 일자리와 잠자리까지 제공한다. 그것도 모자라 밤마다 상처를 치유라도 해주려는 듯이 오일을 발라주고 그녀의 몸을 매번 쓰다듬다 잠이 든다. 이 늙은 치안판사는 대체 뭘 바라는 걸까? 그의 말처럼 ‘죄수들을 구할 수 없으니 자기 자신이라도 구하는 길’을 택한 것일까? ‘제국의 변방 오지에도 마음속에는 야만인이 아니었던 자가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다는 얘기를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그의 바람처럼 자신은 야만인이 아니었던 사람이라고 항변이라도 하고 싶은 걸까? 그는 민간인 치안판사를 위한 멋진 주택을 마다하고 군사 지휘관을 위해 마련해둔 창고와 부엌 바로 위에 위치한 어수선한 거처에 살고 있다. 망각하기 위해 틈만 있으면 잠을 잔다. 그러나 수치심을 잊기 위해 잠든다고 해서 그가 제국의 수호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나와 고문자들, 딱정벌레처럼 어두운 지하실에 앉아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고 ‘나와 졸 대령은 다르다고’ 아무리 마음속으로 외쳐도 그는 제국의 수호자이며 그 집행자 중 한 사람일뿐이다.

제국이 이 야만인의 땅에 들어와 100년 넘는 세월동안 이 땅을 마음대로 유린했기에 치안판사 같은 이들은 그곳에서 삶을 누릴 수 있던 것이다. 치안판사 그 자신도 말하지 않는가? 이곳에서 마음대로 인생을 살았다고. 마음대로 여자들을 취하면서 무제한적인 자유를 누리지 않았는가? 야만인의 땅에서 그곳 여자들을 자기 변덕에 맞춰 아내, 첩, 딸, 노예 혹은 그 모든 것을 아우른 존재, 혹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 수 있지 않았던가. 때문에 그가 아무리 졸 대령을 비롯한 제국의 수호자들이 야만인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놓고 토착민들을 가혹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며 고통받았다하더라도, 토착민들이 ‘게으르고 부도덕하며 더럽고 어리석다는 주민들의 편견을 굳히는 모습’을 보는 게 괴로웠다하더라도, ‘문명이 야만인들이 가진 미덕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든다면, 그 문명에 반대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말하더라도 그의 그런 모습은 연민을 불러일으키기 보다는 쓰디쓴 냉소를 머금게 한다. 위선자여, 당신도 결국 한통속이 아닌가 하고 소리치고 싶어진다. 제국의 정책 집행 방식에 대한 그의 분노는 과연 ‘변경에서 편안한 말년을 방해받지 않으려는 노인의 투정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일까?’(88쪽)

때문에 그가 눈먼 여인을 부족에게 데려다 주겠다면서 길을 나서는 모습조차도 졸 대령의 말처럼 ‘단 한 명의 의로운 사람’이자 ‘순교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만 읽힌다. 그는 출발하기 전에 그 지역 총독에게 이렇게 쓴다. “본인은 제3국의 공격적 행동으로 인해 생긴 상처를 다독거리고, 이전에 존재했던 상호간의 선의를 회복하기 위해 야만인들을 잠시 방문하고자 합니다.” 이 얼마나 안일한 생각인가! 단지 눈먼 여인을 부족에게 돌려보낸다고, 그들의 상처가 아물며 서로 간의 선의가 회복될까? 그가 눈먼 여인과 헤어지는 순간에 하는 말은 그래서 더 어처구니가 없다. 그는 그녀가 자신과 함께 도시로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그녀 스스로 선택해서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그는 그녀에게 뭘 기대한 걸까? 사랑이라도? 치안판사의 말에 단호하게 싫다고,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여인의 대답은 매우 통쾌하다. 아무리 치안판사가 먹을 것과 일자리와 잠자리를 제공할지언정, 그들, 그러니까 야만인들이 바라는 것은 땅을 되찾고 전에 하던 대로, 자신들의 가축을 몰고 초지에서 자유롭게 이동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치안판사는 때때로 야만인들이 들고 일어나 제국에게 본때를 보여 그들을 존중하는 법을 가르쳤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제국은 이곳이 자신들 소유이고, 제국의 일부이며, 자신들의 전진기지이자, 정착지이고, 중앙시장이라고 생각하지만, 야만인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아직도 제국의 문명인들을 잠시 머무는 방문객으로 생각하고 있다고도 말한다. 또 졸 대령으로 대표할 수 있는 제3국의 수호자들에게 이렇게 외치기도 한다. “당신이 적이란 말이야! 당신이 전쟁을 했고, 당신이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순교자들을 만들어줬소. 역사가 내 말을 증명해줄 거요!”라고. 그러나 그의 이러한 외침은 어쩐지 공허하다. 이 모두는 그 또한 제국의 수호자 중 한 사람이며 검은 안경 뒤로 표정을 가린 졸 대령과 달리 조금 선한 얼굴을 가진 제국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편안한 시절에 제국이 스스로에게 얘기하는 거짓말이고, 대령은 거친 바람이 불며 세상이 험악해질 때 제국이 얘기하는 진실이다. 제국의 통치술의 양면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 223쪽)


치안판사는 역사의 바깥에서 살고 싶었다고 말한다. 제국이 백성들에게 강요하는, 아니 사라져버린 백성들에게조차 강요하는 역사의 바깥에 살고 싶었다고. 그 스스로는 야만인들에게 제국의 역사를 강요하는 걸 원치 않았다고도 항변한다. 뒤늦게 그는 ‘저토록 부드럽고 꽃 같은 아이들에게, 그녀뿐만이 아니라 다른 아이에게도, 내 몸을 밀착시키며 무슨 짓을 했던 걸까? 나는 천하고 퇴화하는 인간들 속에 있었어야 했다. 그곳이 내가 속한 곳이다.’ (161쪽)라고 깨달을지언정, 그 깨달음과 회환은 역시 너무나도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줄곧 야만인 여인을 상처받고 손상된 몸을 가진 불구자로 본 반면, 그녀는 자신의 불완전한 몸에 익숙해져, 자신을 더 이상 불구라고 느끼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가 줄곧 그녀에게 눈이 멀었다고 말해도, 그녀는 자기는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치안판사는 야만인들이 눈이 멀고, 불구가 된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야만 제국의 수호자로서, 온정적인 얼굴로 그들을 보듬어줘야 할 구실이 필요해지니까. 그러나 ‘야만인’들은 불완전한 몸에도 불구라고 느끼지 않는다, 흐릿할지언정 모든 것을 본다. ‘문명인’들의 ‘야만적’인 행위를 보고, 또 본다. 과연 누가 진정한 ‘야만인’인지,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묻고 또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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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3-29 1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리뷰는 책 다 읽고 읽을께용~즐거운 금요일 되십시오!

잠자냥 2019-03-29 11:46   좋아요 1 | URL
넵! 그럼요~ 책 읽고 읽으셔야지 제맛이지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목나무 2019-03-29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책을 읽어야지 이 리뷰가 얼마나 재밌는지 제대로 알 것 같아요! ^^
잠자냥님~~ 행복한 주말 보내셔요. ^^

잠자냥 2019-03-29 14:05   좋아요 1 | URL
네! 책은 꼭 읽어보세요~ ㅎㅎ 주말 잘 보내시고요.

vertigo 2019-05-03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같은 책을 읽었는데 이해도가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요? 저는 이 책이 모호하고 어렵게 느껴지더라고요. 잠자냥님 리뷰 읽으면서 이 책에 대한 갈피를 어느 정도 잡을 수 있었어요. 부끄럽게도. 저는 책을 읽어도 등장인물에 대한 감정만 느껴질 뿐, 전체적인 감상은 이해(정리)하기 힘들더군요. 아직 독서력이 많이 부족한가봐요.ㅠㅠ 그래서 잠자냥님 리뷰 많이 참고하고 있어요. ㅎㅎ

잠자냥 2019-05-03 09:44   좋아요 0 | URL
책 읽고 감상하는 일에 정답은 없지요. ㅎㅎ 그래도 제 글이 이해하시는 데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이에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