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니의 회화는 쉽고 편하다. 그러면서도 매우 독창적이고 개성 넘친다. 색채감은 또 어떤가. 가히 황홀할 지경이다. 게다가 매번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그 호크니의 작품을 만나기 위해 서울 시립미술관을 지난 토요일에 찾았다. 토요일이라 조금 걱정하기는 했지만 전시 초반이니 조금 괜찮지 않을까 싶었는데 웬걸, 오후 4시 무렵, 매표소에는 이미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안내원이 말한다. 표를 사고도 대기표를 받아 기다려야 하는데, 전시장에 들어가기까지 1시간 30분은 걸린단다. 순간 갈등했다. ‘사람 머리통만 보다가 가는 건 아닐까, 다음에 올까?’ 하지만 다음에 와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4시 20분쯤 표를 사고, 결국 입장한 시간은 5시 50분이었다. 1시간 30분은 족히 기다린 셈이다. 그러고도 줄을 서서 봐야할 지경이니, 조금 짜증이 난다.

이 긴 기다림, 넘치는 인파, 그래서 조금 곤두섰던 신경도 드디어, 전시장에 입장해 첫 번째로 나를 맞이하는 호크니의<환영적 양식으로 그린 차(茶) 그림>를 보는 순간 슬며시 풀어진다. 호크니가 이토록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바로 이런 작품들 때문이지 하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어쩐지 그 많은 인파도 용서(?)가 될 것 같다. 1시간 10여분 동안 작품을 둘러봐야 하니 마음이 조급했다. 가까스로 모든 방들을 돌아다니며 작품을 감상하고 나오니 정확히 7시, 마감 시간이다. 전시장 구성 순서는 호크니 전을 앞두고 읽었던 <데이비드 호크니 -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현대미술의 거장>의 구성과 거의 비슷하다. 1950년대 초부터 2017년까지의 회화, 드로잉, 판화를 선보이며 작가의 시기별 작품 특성을 살펴보고자 했으므로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시장에서 인기 있는 구간은 아무래도 호크니가 로스앤젤레스 산타모니카 인근에 거주하면서 그 도시들을 그리기 시작한 ‘로스앤젤레스’ 시기가 아닐까 한다. 이 섹션에서는 그 유명한 <더 큰 첨벙> 을 비롯, 날씨 연작 시리즈 중 <비>를 만날 수 있다. 조금 더 발걸음을 옮기면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클라크 부부와 퍼시>가 눈에 들어온다. 전시를 앞두고 읽은 <데이비드 호크니>에 따르면 이 작품은 서 있는 여자와 앉아 있는 남자의 구도 등이 전통적인 성역할을 벗어났으며 부부의 시선이나 몸짓을 보면 둘 사이가 그리 원만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실제로 눈앞에 펼쳐진 대형 크기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니 그러한 느낌이 한층 더 잘 전달된다. 이윽고 호크니가 자신의 부모를 그린 작품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그의 절친 <셀리아>도 만날 수 있다. 한편 <카바피의 시 14편을 위한 삽화> 시리즈를 통해서는 이국적인 건축물과 분위기를 배경으로 두 남성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의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셀리아>와 <카바피> 시리즈는 기존의 미술 작품과는 매우 다른 시선이 느껴진다. <데이비드 호크니>에 따르면 ‘호크니는 이전의 미술에서처럼 남성을 공격성과 힘의 상징이 아닌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묘사하여 미술에서 남성을 다루는 방식에 이미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 바 있다.’ 마찬가지로 ‘셀리아를 그린 호크니의 그림은 이성애자 남성 미술가의 작품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성적 대상이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그녀에 대한 자신의 반응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화가들과 다른 시선으로 남성과 여성을 묘사한 호크니에게 마음속으로 조용히 박수를 보내면서 다른 전시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1980년대에 들어선 호크니 작품을 보면 스타일과 매체 면에서 큰 변화가 왔음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이 무렵 사진, 연극 무대 디자인, 중국의 두루마리 회화 등을 연구하면서 3차원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2차원 평면에 어떻게 재현하는가 하는 문제에 집중한다. 호크니는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혁신적이고 모험적인 접근 방식으로 2차원 평면에 다채로운 그림을 그려가며 작품을 통해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준 것으로 유명하다. 이  전시관에서는 바로 그런 호크니의 ‘보는 방식’에 마음껏 공감할 수 있다. 호크니는 ‘본다는 행위’를 긍정적으로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사물을 살피는 데 더 관심이 있’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오랫동안 바라보기 그리고 열심히 바라보기는 호크니의 삶과 예술에서 핵심적인 행위이고, 또한 그의 가장 큰 두 가지 기쁨’이다. (<다시, 그림이다>, 27쪽)


1990년으로 접어든 호크니는 카메라가 세상을 동질화하고 능동적으로 보는 행위를 퇴화시킨다고 결론 내리고 세계를 묘사할 수 있는 실험적인 방식들을 계속해서 모색한다. <다시, 그림이다>에서 호크니는 사진은 우리 모두가 매우 따분하고 비슷한 방식으로 보게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카메라는 기하학적으로 대상을 보지만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부분적으로는 기하학적으로 보지만 또한 매우 심리적으로 보기’도 한다. ‘내가 저 벽에 걸린 요하네스 브람스의 사진을 본다면, 그 순간 브람스는 문보다 훨씬 더 크게 보일 겁니다. 그러므로 세계를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측정하는 것은 사실이 될 수 없습니다.’ (<다시, 그림이다>, 52~53쪽)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계가 사진처럼 보인다고 여긴다. 호크니는 ‘사진이 놓치고 있는 약간의 차이 때문에 사진이 세계로부터 크게 빗나간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 지점이 호크니가 찾고 있었던 것이다. 호크니는 사진을 그대로 옮기지 않고 발상의 원천으로 활용한다. 직접 관찰한 바에 바탕을 두면서 장면을 재구성했다. 그렇게 그의 작품은 회화, 판화, 드로잉에서 사진 등 다양한 장르와 더불어 이제는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면서 폭넓은 범주로 나아간다. 21세기에 제작된 그랜드 캐니언 풍경화와 고향 요크셔로 돌아가 제작한 거대 규모의 요크셔 풍경화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또는 새로운 포스트 사진 시대를 위한 야외에서 그린 회화> 등은 호크니가 보는 세상이 여전히 새롭고 신비로운 곳임을 자연스레 알려준다.

호크니는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는 것’(<다시 그림이다>, 164쪽)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려 지인들에게 보내곤 한다. 아이폰으로는 어둠 속에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좋아하는 이 어린아이 같은 화가. 그에게 새로운 기술은 흥분제와 같다. 사실 아이폰을 드로잉 수단으로 생각한 화가가 얼마나 될까? 그러나 이 노화가는 즐겁게 새로운 매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비단 이런 모습이 처음은 아니다. 호크니는 1980년대에는 복사기를, 그 후에는 팩스를 사용했다. 화가의 작업실보다 사무실에 더 적합해 보이는 이 기계들로 그는 판화를 제작했다. ‘엄밀함과 엄숙, 웅대한 의도를 소중하게 여기는 시대에 호크니는 그의 작품이 가볍다는 비판을 자초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데이비드 호크니>, 154쪽) 이렇게 새롭고 혁신적인 것을 거부하지 않고, 또 두려워하지도 않는 그의 열린 태도가 이토록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비결이 아닐까.

호크니는 새로운 매체 실험을 멈추지 않고 있다. 세상을 보고 재현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작품으로 끌어들여서 여전히 그의 작품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다.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 이번 전시에서는 비록 그의 아이폰 드로잉을 만날 수 없었고 내가 좋아하는 몇몇 작품들- 이를테면 <멀홀랜드 드라이브 : 작업실 가는 길>, <니콜스캐니언>,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와 돈 배처디>, <미술가의 초상화(두 사람이 있는 수영장)> 등을 볼 수 없어 아쉽긴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전시를 사람이 없는 평일 오전쯤(과연 그렇다고 사람이 없을지 의문이지만) 다시 한 번 꼭 보고 싶다. 그리고 내가 이 전시에서 만나지 못한 작품들도 언젠가는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호크니: 나는 욕심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돈에 대해서는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돈은 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흥미진진한 삶에 대해서는 욕심을 냅니다. 나는 삶이 항상 신나기를 바라고 실제로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물웅덩이에 떨어지는 빗방울에서도 재미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지요. 나는 쓰러지는 날까지 신나는 삶을 살 작정입니다. (<다시 그림이다>, 101쪽)

전시관을 나올 때 이 책의 이 구절이 떠올랐다. 호크니라면 틀림없이 쓰러지는 날까지 신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무나 얼굴, 해돋이를 보는 데에서 얻는 소박한 기쁨을 어떻게 하면 최대한 즐길 수 있을지 평생 고민하고 연구한 화가, 그의 작품들이 지금 여기 이 땅에 있다.




전시관을 나오니 해가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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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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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어디인지 모호한 공간, 실체도 존재는 더더욱 알 수 없는 ‘야만인‘- 그들이 올 것이라고, 그들이 폭력을 일으킬 것이라고, 보이지 않는 공포를 조장하며 제국을 통치하는 제국주의자들과 그 부역자들의 비겁한 모습을 통해 제국주의자들의 허위를 통렬하게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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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림이다 - 데이비드 호크니와의 대화 현대미술가 시리즈
마틴 게이퍼드 지음, 주은정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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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크니 전시를 앞두고 읽은 이 책, 그의 생각과 그림에 대해 한결 더 이해하게 된다. 카메라를 비롯해 아이폰과 아이패드 등 새로운 기계를 이용해서 그림 그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그야말로 호기심 넘치고 여전히 왕성한 이 화가- 아침마다 나도 그의 아이폰 드로잉을 받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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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3-22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집에 오래전부터 있는 이 책을 이제는 읽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마침 어제 전시회 할인 마지막 날이라길래 예매해 두었어요. 흐흣

잠자냥 2019-03-22 10:52   좋아요 0 | URL
앗! 어제가 전시회 할인 마지막 날이었단 말입니까! 흐흑... 놓쳤네요. 하지만 제값 주고 봐도 아깝지 않을 거예요- 전시회 전에 이 책 꼭 읽으세요~ 틀림없이 호크니 그림이 더 다정하게 다가올 거예요- 저는 일단 내일 전시를 =33

다락방 2019-03-22 10:56   좋아요 0 | URL
저도 어제 트윗 통해 밤 11시 넘어 알아서 자기 전에 부랴부랴 했어요. 네, 꼭 다 읽고 보러갈게요. 빠샤!
 
너는 갔어야 했다 쏜살 문고
다니엘 켈만 지음, 임정희 옮김 / 민음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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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켈만의 작품은 처음 읽는다. 짧은 분량에 강력한 서사를 자랑한다는 책 소개 문구에 혹해서 읽게 됐다. 쏜살문고가 그러하듯이 이 책 또한 정말 얇고 가볍다. 요즘 집에서 읽는 책들이 들고 다니기에는 무거운 편이라 이 가벼운 책을 어제 출근할 때 가방에 넣고 나왔다. 전철을 탄 뒤 읽기 시작. 12월 2일이라는 날짜와 함께 시작하는 ‘나’의 일기는 한 두 장만 넘기고도 금세 빨려 들어간다. 시나리오 작가인 ‘나’는 아내와 어린 딸과 함께 겨울 휴가를 떠나 이 별장에 도착했다. 며칠 동안 빌린 별장은 인터넷에서 사진으로 본 것보다 더 근사하다. 집 앞으로 100미터쯤 완만하게 비탈진 초원이 숲 가장자리까지 이어져 있으며 가문비나무와 소나무, 희끗희끗한 거대한 목초지가 펼쳐진다. 창문을 열면 바람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들리는 소리라곤 오직 그것뿐이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시작, 신선한 공기’ 완벽하다. 이렇게 한적한 곳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딸과 휴가를 보내며 작업 중인 시나리오를 완성할 꿈에 부푼 ‘나’. 그런데....... 


작품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삐걱삐걱 불길한 전조가 보인다. 시나리오 몇 편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한 ‘나’는 아주 무명은 아니다. 그렇지만 대개 성공한 시나리오 작가들이 영화감독으로 변모하는 것과 달리 그는 아직, 여전히 시나리오 작가일 뿐이다. 그에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의 아내 수잔나가 보기엔 그 점이 무척 못마땅하다. 그녀는 유명한 여배우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떠오르는 신예 작가였던 ‘나’와 잘 나가는 여배우의 결혼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도 남았는데, 지금 ‘나’는 이렇게 여전히 시나리오 작가로 멈춘 상태이다. 아내는 여전히 승승장구하는데도 말이다. 더군다나 아내는 대학에서 독문학과 어문학을 전공했지만 ‘나’는 대학에 다닌 적이 없다. 아내와의 대화 도중에 사사건건 열등감을 느끼는 ‘나’. <너는 갔어야 했다>는 이렇게 부부 사이의 미묘한 갈등과 함께 ‘나’가 작업 중인 시나리오가 교차하듯이 서술된다. 이런 점이 작품의 긴장감을 증폭시키면서, 무언가 곧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마 23분쯤 읽었을 것이다. 80쪽이 조금 넘는 이 책의 절반에 해당하는 40여 쪽을 정신없이 읽었을 무렵, 역에 도착했다. 작품에 완전히 몰입한 바람에 아침의 정신없는 전철도, 불유쾌한 출근길도 잊었다. 하마터면 한 정거장 더 갈 뻔했다. 궁금한데? 역에서 내려 회사까지 걸어가는 동안 읽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다. 점심 때 읽을까 싶기도 했는데, 퇴근 후의 즐거움을 위해 아껴두기로 했다. 드디어 퇴근. 전철을 타고 다시 책을 펼쳤다. 와우, 아침의 몰입은 예고편이었다. 출근길에 읽은 부분에서는 별장에서 기이한 일들이 일어나리라는 전조가 보였다면 퇴근길부터(그러니까 한 40쪽 이후부터는) 그 께름칙한 일들이 스멀스멀 현실화된다. 퇴근길 전철 안, 인간들이 내는 온갖 소음(통화, 잡담, 벨소리 등등)과 삶에 찌든 냄새를 모조리 잊을 정도로 책에 빠져든다. 아니, 벌써 내리라고? 잠깐만! 한 페이지 남았어! 한 장! 그래도 집에는 가야했기에 전철에서 내려, 표를 끊고 나가기 전에 서서 그 마지막 한 장을 읽었다. 심장이 두근두근하고 알 듯 모를 듯한 공포로 목덜미가 서늘하다.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읽었는지 뒷목이 뻣뻣하다. 전철로 23분. 다니엘 켈만은 어느 인터뷰에서 독자들이 이 책을 다 읽는 데 45분이 걸릴 것이라고 예측했단다. 출퇴근 전철로만 46분. 내려서 읽은 한 장까지 합치면 47분쯤 되려나? 거의 정확하다. 그 50분 남짓한 동안 롤러코스터 타듯이 재미와 두려움, 짜릿한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전철에서 읽었으니 망정이지, 만일 집에서 혼자 어두운 밤에 읽었다면 어땠을까? 주인공처럼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아니, 집이 아니라 그와 그의 가족들처럼 인터넷으로 집을 빌리고는 한가로이 휴가를 즐기면서 이 책을 읽었다면 정말 끔찍한 두려움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말 못할 갈등이 숨어 있지만 겉보기에는 남부러울 것 없는 가족, 근사하지만 낯설고 어딘가 기묘한 별장, 슈퍼마켓 주인을 비롯해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의 묘한 태도, 자꾸만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 이 모든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아니면 ‘나’의 불안정한 심리에서 기인한 착각 또는 환상인지, 아니면 그가 쓰는 시나리오의 일부분인지 이 모두는 읽는 이가 어떻게 풀이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다만 그에게서 복잡한 삶의 무게 속에 출구를 잃어버린 현대인의 모습이 엿보이기에 이 모든 일들이 그저 남일 같지는 않다. 게다가 인터넷을 통해 집을 빌려서 휴가를 떠난 가운데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더욱 오싹하다. 물론 이 나라에선 휴가를 떠나 에어비앤비로 집을 빌리든, 펜션을 예약하든 호텔에서 지내든 몰카 때문에 더 오싹하지만 말이다.


한 겨울, 작가인 주인공이 가족과 함께 낯선 공간에서 지낸다는 점에서 스티븐 킹의 <샤이닝>, 아니 이 작품을 영화화한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이 떠오르기도 한다. 아내와 아들과 함께 겨우내 호텔을 관리하며 느긋하게 소설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잭’- 그런데 소설은 쓰지 못하고 매번 시작 부분만 맴도는 잭. 폭설로 호텔이 고립되자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서서히 미쳐가는 잭. 스티븐 킹의 원작을 읽지 못한 터라 이 두 작품을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영화 <샤이닝>은 시작부터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려오고, 죽은 영혼이 보이는 잭의 아들, 흐르는 피 등등 오감을 자극하는 공포로 가득하다. 그에 비해 다니엘 켈만의 <너는 갔어야 했다>는 좀 더 은밀하고 조용한 방식으로 공포를 자아낸다. 이 작품은 낯선 별장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밀실 공포물이자 밀실 미스터리로 한 시간 동안 완벽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표지의 쓰인 책 제목이 매우 의미심장하게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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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갔어야 했다 쏜살 문고
다니엘 켈만 지음, 임정희 옮김 / 민음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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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독자를 사로잡는지, 또 그 이야기 속에서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정확히 아는 영리한 작가, 다니엘 켈만. 그의 다른 작품도 모두 읽어 보고 싶어진다. 짧지만 정말 강렬하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책을 집어든 순간 단숨에 끝까지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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