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가와 란포와 애드거 앨런 포. 두 이름을 나란히 놓고 보니 참으로 비슷하다. 그도 그럴 것이 에도가와 란포라는 필명은 에드거 앨런 포에서 따왔기 때문이다. 포의 이름에서 자신의 필명을 따온 것에서 알 수 있듯, 란포는 탐정물이나 판타지, 괴담, 범죄, 호러 등 장르를 넘나들며 일본 추리소설의 기틀을 다진 인물로 평가받는다. <파노라마섬 기담> 또한 확실히 에드거 앨런 포의 영향을 받아 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안에서 직접 포의 ‘아른하임의 영토’가 등장한다.

가난한 삼류작가 히로스케는 신이 만든 대자연에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신이 되어 아름다움의 극치인 지상낙원을 만들고자 늘 몽상에 잠겨 있는 인물이다. 히로스케는 자신의 몽상의 기원을 언급하는데, 그중에서도 ‘에드거 앨런 포의 <아른하임의 영토>가 더욱 그를 매혹’했다고 말한다. 포의 ‘아른하임의 영토’는 온갖 조원술을 동원해 만든 지상낙원 ‘아른하임’을 소재로 한 단편소설이다. 히로스케가 포의 아른하임을 언급하는 이 장면은 그가 아른하임 같은 이상적인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뜻을 피력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에도가와 란포가 포의 작품에서 착안해 자신의 작품을 창작하되, 그보다 더 강렬한 작품을 쓰고 싶다는, 남기고 싶다는 바람으로도 읽힌다.
 
히로스케는 마치 음악가가 악기로, 화가가 물감으로, 시인이 문자로 예술을 창조하듯이 생동하는 자연을 재료 삼아 자신의 예술적 이상을 표현하고자 하는 몽상에 빠져 있다. 그는 종종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내가 평생 써도 모자랄 정도로 많은 돈을 손에 넣는다면……. 우선 광대한 대지를 사들일 텐데, 어디가 좋을까, 수백 수천 명의 사람을 부려 내가 늘 꿈꿔온 지상낙원이자, 미의 나라, 꿈의 나라를 만들어 보이겠어.’ 이건 이렇게 하겠다는 둥 저건 저렇게 하겠다는 둥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자신의 머릿속에 완전한 이상향을 구축해 낸다. 그러나 그것은 한낱 몽상일 뿐이다. 현실의 히로스케는 처량하기 그지없어서 하루하루의 생활도 여의치 않은 일개 가난한 학생일 뿐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의 수완으로는 평생을 바쳐 죽도록 일해 봐야 겨우 몇 만 엔도 모으기 힘들 지경이다. 게다가 ‘보통 몽상가 기질의 사내라 하면 예술에 심취하여 거기서 작게나마 안식처를 발견하기 마련인데, 불행히도 히로스케는 예술적 성향을 가지기는 했지만 지독한 현실주의자여서 몽상 말고는 어떤 예술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할뿐더러 재능조차 없다.’

그런데 이렇게 하루하루 무기력 속에 실현 불가능한 상상만 하던 그에게 어느 날, 자신의 욕망을 현실화할 기회가 주어진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그때부터 외골수처럼, 미친 듯이 계획을 향해 질주를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꿈은 마침내 이루어진다. 무인도인 ‘먼바다섬’을 통째로 사들여 막대한 공사비를 들여서 파노라마섬을 완공하는 것이다. 그저 골방에 처박혀 헛된 꿈만 꾸는 이 무명 작가가 어떻게 그런 이상향의 극치인 파라다이스를 만들 수 있을까? 의아한데, 가장 큰 비밀은 그와 쌍둥이처럼 닮은 대학동창생 고모다 겐자부로의 죽음에 있다. 겐자부로의 죽음을 기회로 삼아 그는 기가 막힌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다.

‘파노라마섬 기담’은 히로스케의 몽상, 겐자부로의 죽음 뒤 그가 계획을 세우고 실행으로 옮기는 장면, 마침내 파노라마섬이 완공된 부분, 그리고 그 섬을 히로스케가 구석구석 돌아보면서 묘사하는 장면, 그리고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히로스케의 몰락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과정이 매우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기에 정신없이 책장이 넘어간다. 더군다나 히로스케가 자기 욕망을 실현하는 방식은 너무나도 충격적이라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는다. 이 작품에서 그나마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부분은 히로스케가 완성된 파노라마섬을 돌아보면서 그 섬의 온갖 진귀하고도 그로테스크한 풍경을 묘사하는 장면인데, 마치 하나의 파노라마 필름을 보듯이 끊임없이 기괴한 이미지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 장면은 조금 장황하기도 해서 이 작품이 처음 선을 보였을 때는 지루하리만치 세세한 묘사 때문에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묘사로 란포의 장기인 그로테스크하고도 에로틱한 분위기를 마음껏 엿볼 수 있다. 또한 눈앞에 재현된 환상을 통해 히로스케의 탐욕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장면들을 읽노라니, 애드거 앨런 포의 ‘아른하임의 영토’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서 집에 있던 <우울과 몽상>을 펼쳐 읽어보았다.
















야심을 경멸하는 것이 지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본질적인 원칙 중 하나라는 자신의 생각에 충실하기 위해 그는 음악가도 시인도 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높은 단계의 천재는 반드시 야심적이지만, 그보다 더욱 높은 단계에 있는 사람은 야심이라고 불리는 것을 초월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밀턴보다 훨씬 더 위대했던 많은 사람들이 ‘입을 다문 무명인’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들로 하여금 취향에 맞지 않는 노력을 하도록 유혹하는 몇 가지 우연한 사건이 없었다면, 한껏 예술의 영역에서 인간이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찬란한 성취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울과 몽상>, ‘아른하임의 영토’, 98~99쪽)


위와 같은 구절에서 보듯이 ‘아른하임의 영토’는 ‘파노라마섬 기담’과는 사뭇 다르다. 대자연을 인간 마음대로 인공적으로 가꾼다는 점은 비슷하지만,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그들이 저마다 빚어낸 이상향의 모습은 완벽하게 다르다. ‘아른하임의 영토’의 주인공인 앨리슨은 애초부터 부자인데다가 엄청난 유산까지 상속받는다. 보통 사람들의 재산을 훨씬 초과하는 부를 소유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일을 할 것이라고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즉 당대의 갖가지 방종 행각에 흥청망청 빠져들거나, 정치적 음모를 꾸미거나 혹은 귀족 작위를 돈으로 사거나, 미술품을 수집하거나, 혹은 문학이나 과학이나 예술의 아낌없는 후원자 노릇을 하거나, 자신의 이름으로 온갖 자선단체에 기부하거나’ 등등. 그런데 앨리슨은 음악가도 시인도 되지 않는다.  그는 풍경과 정원을 가꾸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뮤즈 신에게 가장 숭고한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야말로 지고한 아름다움의 형태가 결합된 끝없는 상상력이 펼쳐지는 영역이었다. 또한 그가 생각하기에 이 결합에 들어가는 요소들이야말로 지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꽃과 나무의 다양한 색깔과 형태 속에서, 그는 물질적인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한 자연의 역동적인 섭리를 본다. “지상에서 식물을 바라보는 시선을 즐겁게 하기.”(<우울과 몽상>, ‘아른하임의 영토’. 99쪽) 이것이 앨리슨의 목표였다.

그래서 앨리슨은 평범한 인생에서 벗어나,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이러한 환상을 실현하는 데 바치면서 행복을 찾는다. 자신의 계획을 혼자 감독함으로써 트인 공기 속에서의 자유로운 움직임 속에서, 계획을 실현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목표에서, 그의 영혼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정열과 아름다움에의 갈망을 만족시킨 영원한 동기에서 그는 행복을 찾았다. 때문에 ‘아른하임의 영토’의 앨리슨이 만들어낸 지상낙원은 ‘보는 사람에게는 그저 풍요로움, 따뜻함, 고요함, 한결같음, 부드러움, 섬세함, 우아함, 풍성함과 같은 느낌’과 함께 ‘부지런하고, 취향이 세련되고, 멋지고, 까다로운 새 요정의 꿈에서 나타날 듯한, 놀랍도록 발달한 문화에서 볼 수 있을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히로스케의 파노라마섬은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 세상에 완벽한 예술 세계를 구현하겠다는 애초의 생각은 비슷했을지 몰라도 그들이 만들어낸 세계는 서로 닮은 구석이 거의 없다. 히로스케의 파노라마 세계는 끔찍함 그 자체이다. 자연을 깡그리 무시하고 비정상적인 취향을 가미해 온갖 인공적 기교를 부려놓은 공간이다. 맹수와 독사로 가득한 동산, 숨 막히는 향기와 인간 세계의 수치를 잊어버린 나체 남녀, 그리고 섬 중앙에서 내려다보는 또 하나의 거대한 파노라마 풍경 등등. 이 기묘한 세계는 인간 세계의 상식에서 벗어나 어느덧 끝없는 몽환의 경계를 헤매게 만든다. 히로스케와 함께 이 섬을 둘러본 지요코가 느끼듯이 ‘현실 세계는 모두 먼 옛날의 꿈만 같고 부모와 자식, 부부, 주종 같은 인간 세계의 관계 따위는 안개처럼 의식 밖으로 희미해지고 만다.’



“언젠가 이 파노라마를 발명했다는 프랑스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적어도 최초로 발명한 사람의 의도는 이 방법으로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데 있었다지. 마치 소설가가 종이 위에, 배우가 무대 위에, 저마다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싶어 하듯이 틀림없이 그 사람도 자신의 독특한 과학적 방법으로 그 작은 건물 안에 광막한 별세계를 만들려고 시도한 거야.” (<파노라마섬 기담/인간 의자>, 89쪽)


히로스케는 세상에 없는 이상향을 만들고자 이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운다. 애초부터 세상에서 자기 설 자리를 제대로 찾을 수 없었던 그는 비뚤어진 방법으로 이상향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고자 더더욱 그릇된 길을 택한다. 억눌리고 비뚤어진 욕망으로 빚어낸 세계는 ‘별세계’이기보다는 악몽과도 같다. 에도가와 란포는 ‘이 세상은 꿈, 밤에 꾸는 꿈이야 말로 진실’이라고 말했다. 밤에 꾸는 꿈, 그 악몽과도 같은, 그러나 어쩌면 그렇기에 날것의 욕망을 고스란히 재현한 ‘파노라마섬 기담’은 강렬하게 뇌리에 남는다. ‘아른하임의 영토’에서 출발했으나 그 작품보다 몇 배는 충격적이고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를 이룩한 란포. 만일 애드거 앨런 포가 이 작품을 읽는다면 ‘내 작품보다 훌륭하오.’하며 박수를 쳐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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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뺀 세상의 전부 - 김소연 산문집
김소연 지음 / 마음의숲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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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단단하고 다정하며 깊은 글들. 큰 목소리로 주장하지 않으며 강요도 권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조곤조곤 삶을 풀어나간 그녀의 글들. 그 글에서 쉽지 않은 이 인생을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고, 또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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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 1
쓰루타니 가오리 지음, 현승희 옮김 / 북폴리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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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는 만화. 75세에 처음 우연히 어쩌다 BL만화에 빠진 할머니와 BL만화 덕후이지만 그 밖에 모든 것에는 서툰 17세 여고생의 우정이라는 설정이 흥미로워서 읽기 시작. 완간되지 않은 만화, 1년 뒤에나 나올지 모를 만화를 기다리는 할머니의 심정에 순간 서늘해졌다. 다음편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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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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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에 대한 사전 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때문에 ‘머리말’부분은 일단 넘어가고 본문이라고 생각했던 부분, 그러니까 ‘창백한 불꽃: 네 편으로 된 시’부터 펼쳐서 읽어갔다. 그런데 시를 조금 읽다 보니(물론 나보코프가 쓴 시라고 생각하면서) 뭔가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창백한 불꽃>에 대해 조금은 알고 읽어야 할 것 같아서 다시 앞으로 돌아가 ‘머리말’을 훑기 시작했다. 나는 당연히 이 ‘머리말’은 <창백한 불꽃>이라는, 나보코프의 작품 전반에 대한 설명이려니 했다. 그래서 ‘찰스 킨보트’라는 실제로(!) 존재하는 비평가가 <창백한 불꽃>에 대한 일종의 가이드 역할을 해주려니 생각하면서 읽어 나갔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다. ‘창백한 불꽃: 네 편으로 된 시’는 존 셰이드라는 시인의 작품으로, 그는 이 시를 중간 크기의 색인 카드 80장에 썼단다. 그 구절에서 나는 아쭈? 요것 보게? 하는 심정이 들면서 슬며시 웃기 시작했다. 이건 완전히 나보코프 그 자신의 이야기잖아! 나보코프가 색인 카드에 작품을 쓴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더더군다나 ‘머리말’을 읽어갈수록 ‘찰스 킨보트’ 그에 대한 의문이 든다. 그가 실제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비평가라면, 머리말을 이렇게 쓸 리가 없다. 이렇게 객관성을 상실한 채, 작품을 비평할 리가 없다. 게다가 수다스럽기 짝이 없는 말투도 어디선가 많이 본 느낌이다. 그의 말투에서는 <롤리타>의 수다꾼 ‘험버트’가 떠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어둠 속의 웃음소리>의 ‘알비누스’ 같기도 하며 <절망>의 ‘게르만’과도 닮았다. 수다스럽고, 자아도취적이며 어떤 면에서는 미치광이 같기도 한 ‘찰스 킨보트’. 그는 나보코프 작품 속 주인공들과 매우 닮았다. 그래서, 그제야 이 책 <창백한 불꽃>은 ‘머리말’과 ‘창백한 불꽃: 네 편으로 된 시’, ‘주석’, ‘색인’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작품임을 깨달았다. 이때부터 탄성이 나온다.

‘머리말’에서 킨보트는 제안한다, 존 셰이드의 ‘창백한 불꽃: 네 편으로 된 시’를 읽으면서 자신이 쓴 방대한 주석을 보라고, 아니 자신이 쓴 주석을 먼저 읽고 나서 셰이드의 시를 읽으라고 권한다. 물론 시를 읽어 가면서 그때그때 주석을 읽을 수도 있다. 어떤 방법으로 읽을까 하다가 내가 평소에 책 읽는 방식을 따르기로 했다. 나는 보통 어떤 책을 읽을 때 흐름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웬만하면 주석을 읽지 않는다. 그래서 <창백한 불꽃>도 셰이드의 시를 읽고 난 다음에, 킨보트의 주석과 색인을 읽는 방식을 택했다. <창백한 불꽃>은 주석도 작품을 이루는 하나의 큰 구성요소이기에, 아니 이 기나긴 주석 자체가 이 작품의 핵심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이것을 읽지 않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색인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무엇을 먼저 읽느냐에 따라 <창백한 불꽃>의 해석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된다.

셰이드의(그러나 실은 나보코프가 쓴) ‘창백한 불꽃: 네 편으로 된 시’는 굉장히 난해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 시가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을 시간과 자연에 대한 명상과 뒤섞어서 재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셰이드 자신의 삶을 일대기적 형식으로 엮었으며, 작품을 통해서 시인의 딸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다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 기나긴 시, ‘창백한 불꽃’은 존 셰이드라는 시인의 삶을 일종의 영웅서사시처럼 써내려간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창백한 불꽃’에 주석을 달고 편집한 킨보트는 이 시를 어떻게 풀이하고 있을까? 내 해석과 얼마나 비슷할지 비교하려는 생각과 함께 주석을 읽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사람 좀 보게? ‘이런 주석이 대체 어디 있어!’ 소리치고 싶을 정도다. 제 아무리 난해한 시를 풀이한다고 해도, 주석에는 일종의 룰이 있기 마련이다. 원 텍스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도에서 해석해야 한다. 그런데 킨보트의 주석은 지나치리만큼 텍스트에서 벗어난 이야기들로 이루어진다. 그의 해석을 읽어갈수록 ‘정말?’하고 반문하게 된다. 킨보트의 주석은 크게 3가지 내용으로 구성된다. 나처럼 존 셰이드 시인 그 자신의 삶과 관련해서 풀이하는 방식이 첫 번째이다. 킨보트는 셰이드와 관련한 전기적 정황과 아내 시빌과 그의 죽은 딸 헤이즐 등 주변 인물과의 관계를 통해 시를 파악하고자 한다. 물론 이 첫째 방법에서 셰이드와 킨보트 둘 사이의 관계도 그려진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킨보트는 과하게 등장한다. 그리고 둘째는 ‘젬블라’라는 어느 옛 왕국의 마지막 왕 ‘카를 크사베리에’ 얽힌 이야기이며, 마지막으로 이 국왕을 죽이려고 하는 ‘그라두스’라는 사내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킨보트는 이 세 가지 관점으로 주석을 달아 셰이드의 시를 설명해 나간다. 셰이드와 킨보트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다쳐도 난데없이 젬블라와 그라두스는 누구이며, 대체 이 사내는 무슨 근거로 이런 과대망상 같은 해석을 하는 걸까 싶은데, 알고 보면 이 모두는 킨보트에게 매우 중요한 소재이자, 주제였음을 ‘주석’을 읽어나가는 동안 알게 된다.

‘머리말’에서도 의심스럽기 짝이 없던 이 남자, 킨보트에 대해서는 ‘주석’을 읽어나갈수록 의혹이 더욱 커진다. 과연 그가 하는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혹시 그는 문학에 미친, 존 셰이드라는 시인에 미친 스토커이자 미치광이, 관음증 환자는 아닐까? 이 모든 것은 그의 망상에서 비롯된 허구 중의 허구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고매한 우정을 나눴다는 그의 주장과 달리 셰이드는 킨보트를 그다지 반가워하지도 않고, 오히려 따돌리고 싶어 한다. 그런데 시인의 이 골치 아픈 이웃은 줄곧 셰이드를 따라다니면서 그에게 어떤 문학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하고(실제로 자신이 그러고 있다고 믿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혔으며), 시인은 그런 그가 안쓰러운 나머지 마지못해 이따금 만나주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진다.

애초에 ‘머릿말’에서도 그런 기미는 조금 엿보였다. 킨보트는 ‘우리의 친밀한 우정은 더욱 고상한, 오로지 지적인 차원에 기반했기에 감정적인 번민을 나누는 일 없이 자유로웠다’ 말하며 셰이드에 대한 존경은 킨보트에게 일종의 고산 치료였으며 이 늙은 시인을 볼 때마다 킨보트는 웅대한 산을 바라보듯 경이로움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셰이드를 숭배하면서 이렇게 혼잣말을 하기도 한다. ‘여기 그가 있다. 저것은 그의 머리다. 주변의 합성 젤리 같은 두뇌와는 질적으로 다른 두뇌가 그 속에 차 있다.’(<창백한 불꽃>, 34쪽) 그런데 셰이드를 향한 킨보트의 이런 광적인 숭배를 지켜보노라면 어느 작가와 그의 작품에 미친 독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를테면 영화 <미저리>에서 소설가 '폴'과 그의 작품에 완전히 꽂혀 광기어린 행동을 서슴지 않는 ‘애니 윌크스’의 그 무시무시한 얼굴이 킨보트의 얼굴에 중첩되는 것이다.

실제로 킨보트는 자신이 셰이드에게 직접적으로 영감을 불러일으켜줬고, 시를 쓸 주제를 그에게 줬다고 철저하게 믿고 있다. “그에게 영웅시격을 제안함”, “그 탈주 사건을 다시 이야기해줌”, “내 집의 조용한 방을 쓰라고 권함”, “내 육성을 녹음해두었다가 활용하는 것을 의논함”, ‘내 이야기의 석양빛이 셰이드가 3주 만에 천 행의 시를 쓸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창조적 활력을 발휘하는 과정에 촉매제 역할을 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등등 난리도 아니다. 그리고 바로 킨보트가 셰이드에게 영감을 준 주제이자 소재가 ‘젬블라 왕국의 마지막 왕’에 대한 이야기라고 믿기에 셰이드의 시를 ‘젬블라 왕국’과 관련해서 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시인에게 아낌없이 제공한 ‘생동감 넘치고 매혹적인 가슴 두근거리고 일렁이듯 반짝이는 모든 소재’로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싶은 충동과 작업 중인 그가 보고 싶어 달뜬 욕망’에 시달리고 심지어 그런 상태를 스스로 통제할 수도 없어서 시인의 집을 몰래 엿보는 데 온 정신을 쏟기도 한다. 이틀 밤사이에 그를, 셰이드의 집을 훔쳐보기를 ‘삼천구백구십번’씩이나 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니 셰이드나 그의 아내 시빌이 킨보트를 반길 리가 없다. 실제로 킨보트는 셰이드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지 못했으며, 그가 열두 번도 넘게 초대했으나 셰이드 부부는 오직 세 번만 응할 뿐이다(이 마저도 의심스럽지만). 어디 그뿐이랴, 시빌은 노골적으로 킨보트를 싫어하고 불신한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킨보트를 가리켜 “코끼리만한 진드기, 킹사이즈 말파리, 남미종 말파리 유충, 천재에 붙어먹는 괴물 같은 기생충”이라 부르곤 했다는 것을 나중에 킨보트는 알게 된다. 셰이드조차 킨보트가 자신이 쓰고 있는 시에 대해 궁금해 하고 질문을 던지면 교묘하게 샛길로 빠져나간다. ‘지난 너댓새 동안 그가 젬블라 왕의 모험을 정확히 어느 부분까지 집필했는지 신경질적으로 집요하게 통제 불능으로 궁금해 하는’ 킨보트를 피하기 바쁘다. 심지어 셰이드에게 시의 주제를 줬다고 말하는 킨보트에게 셰이드는 “무슨 주제?”하고 반문하기도 한다. 이렇듯, 킨보트가 시인에게 영감을 줬고, 셰이드의 시가 자신이 사랑해마지 않는 젬블라 왕국에 대한 이야기라는 그의 주장 모두가 한 늙은 시인을 사랑하고 문학에 미친 어느 불쌍한 망명자의 망상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은 <창백한 불꽃>을 읽는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이 독자에게 던지는 하나의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일 뿐이다. 이토록 복잡한 장치와 킨보트라는 믿을 수 없는, 시인과 문학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망상증 환자와도 같은 주인공을 내세움으로써, 그리고 셰이드라는 시인과 그의 시를 통해 나보코프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앞서 이야기했듯, 이 책은 읽는 방식과 순서 따라, 수많은 해석이 나올 수 있는데, 내가 읽은 방식으로는 텍스트 생산자와 그것을 비평하는 자 사이의 불협화음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킨보트라는 편집자이자 주석자- 셰이드의 시를 비평한 독자이자 비평가인 그의 태도와 그가 풀이한 해석을 읽노라면, 과하다 못해 과연 대체 무엇을 위한 비평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오래전에 잊힌 신화 또는 전설과도 같은 젬블라 왕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먹이며, 시인의 삶을 그다지 많이 알지도 못하면서 마치 그의 생, 그의 고통 모두를 다 안다는 듯한 태도로 그의 시 ‘창백한 불꽃’을 난도질하듯 풀이하고 자아도취적인 주석을 달고 있는 독자이자 비평가인 ‘킨보트’. 그는 셰이드로 상징되는 나보코프 같은 시인이자 소설가 또는 모든 예술가들이 가장 경계하고 멀리하고 싶은 인물은 아닐까? 그래서 나보코프는 어떤 예술 작품을 느끼기보다는 난도질하면서 기이하리만치 과하게 풀이하는 비평가들에 대한 하나의 경고이자 일침을 날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실제로 셰이드와 킨보트의 대화에서 이런 추측에 대한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학생들의 과제물에 대해 셰이드는 자신은 “대개 아주 너그러운 편”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런 그조차 용서할 수 없는 몇 가지 사소한 것들이 있는데, “읽으라는 책을 읽지 않는 것. 읽긴 읽되 바보천치 같이 읽는 것. 그 책에서 상징, 예를 들어 ‘작가는 녹색이 행복과 좌절의 상징이기 때문에 녹색 잎이라는 뚜렷한 이미지를 사용했다.’ 따위나 찾는 것”이 그중 하나이며 그는 “학생이 ‘단순하다’ ‘진실하다’라는 표현을 칭찬의 의미로 사용하면 점수를 파국적으로 깎아버리”곤 한다. “예를 들면 ‘셸리의 문체는 매우 단순하고 훌륭하다’라든지 ‘예이츠는 항상 진실하다’ 같은 해석”도 셰이드가 진저리치는 일로 그가 보기에 “이런 해석은 아주 만연해 있어서, 어떤 비평가가 어떤 작자의 진정성에 대해 얘기한다면, 그 비평가나 작가 모두 바보란 걸 알 수 있”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러므로 나의 이런 해석 또한 한 사람의 독자로서 킨보트와 같은 짓을 하고 있는 셈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나 또한 ‘읽긴 읽되 바보천치 같이 읽’어서 나의 이런 풀이 또한 <창백한 불꽃>이 담고 있는 수많은 의미를 거의 모두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창백한 불꽃>은 다 읽고 나면 이 작품의 진짜 화자는 누구일까 하는 새로운 의문까지 치솟지 않는가. 킨보트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창백한 불꽃’을 쓴 셰이드가 창조해낸 인물은 아닐까? 아니, 이와 정 반대로 셰이드라는 시인 자체가 킨보트가 창조해낸 인물은 아닐까? 만일 킨보트가 실제로 존재하되, 그의 정체가 러시아 망명자 보트킨이라면 이야기는 또 완전히 달라진다. 그렇기에 킨보트는 작품 말미에 “다른 변장과 다른 외관으로 꾸밀지도 모르지만,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어쩌면 또 다른 캠퍼스에서 그 어떤 명성도, 미래도, 청중도, 그의 예술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늙고 행복하고 건강한 이성애자 러시아 망명 작가로 다시 등장할지도 모른다.” 말하며 이 작품이 “세 명의 주역, 즉 상상 속의 왕을 죽이려는 미치광이와 자신이 왕이라고 상상하는 또 다른 미치광이 그리고 우연히 사선으로 굴러 들어와 두 허상 간의 충돌로 죽는 저명한 노시인이 등장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신파극”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와 주석으로 이루어진 소설, 색인과 머리말까지 갖춘 소설, 주석에 담긴 몇 가지나 되는 이야기들…….<창백한 불꽃>은 여러 번 다시 읽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고, 그때마다 새롭게 읽힐 것 같다. 셰이드의 경고처럼 바보 같은 해석을 할지라도 말이다. 셰이드 숭배자 킨보트는 “시인에 의해 정화된 진실은 아무런 고통도, 아무런 해악도 끼치지 않으며 진정한 예술은 거짓된 명예를 넘어선다.”고 말한다. 그리고 ‘참된 예술은 일반인의 눈으로 지각되는 보통의 사실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것만의 특별한 사실성을 창조하는 법’이라고도. 이 두 구절은 나보코프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얻고자 했던 바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이룩한 <창백한 불꽃>의 진실이 아닐까. <창백한 불꽃>은 소설이 독자에게 줄 수 있는 온갖 놀라운 경험을 선사하며, 허구의 불꽃으로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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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9-03-15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리뷰는 잠자냥님이예요!

잠자냥 2019-03-15 22:4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_ _)

케이 2019-03-22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소설을 이런 방식으로 쓸 수도 있군요. 대체 이런 생각은 어떻게 하는지 나보코프 참 대단하네요!!

잠자냥 2019-03-22 14:13   좋아요 0 | URL
직접 읽으면 더 감탄하실 거예요! 나보코프는 천재임에 틀림없어요. ㅎㅎ

로아나 2019-03-23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구를 가장한 진실의 불꽃도 있고 진실을 가장한 허구의 불꽃도 있다.
 

<바르도의 링컨>은 죽은 자들의 목소리로 가득하다. 링컨 대통령이 아들을 잃은 뒤 무덤에 찾아가 자식의 시신을 안고 오열했다는 실화를 모티브로 한 이 소설은, ‘아들을 잃은 부모의 슬픔’이라는 소재만으로는 어떤 내용이 펼쳐질지 조금 뻔하기도 하다. 그런데 이 진부한 소재를 특이한 형식을 통해 새롭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죽음으로 비롯된 한 가정의 슬픔을 살아남은 이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의 목소리로 이끌어 나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죽은 자들의 목소리는 무려 40여 명에 이른다. 여기서 ‘바르도’란 ‘이승과 저승 사이’를 뜻하는 티베트 불교 용어로, 죽은 이들이 이승을 떠나 저세상으로 가기 전 머물러 있는 시공간을 가리킨다. 그런데 왜 이들은 천국도 지옥(만일 그런 곳이 실제로 존재한다면)도 아닌 이승과 저승 사이에 머무르고 있는 것일까? 이들은 삶에 미련이 남아 여전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그 중간 세계라고 할 수 있는 ‘바르도’에 머물고 있다.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의 몸이 다 나으면 언젠가 다시 가족에게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바르도’에 열한 살 소년 윌리 링컨이 나타난다. 소년의 등장에 망자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순수하고 죄 없는 어린 영혼은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바르도에 오래 있을수록 고통은 더 심해져만 간다. 아이들이라면 마땅히 바로 저세상으로 떠나야 하는데 윌리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윌리의 아버지인 링컨은 한밤중에 묘지에 나타나 아들의 시신을 끌어안고 아이를 보낼 생각이 없는 듯 숨죽여 흐느낀다. 이런 링컨을 보고 이곳 유령들은 감동받는다. 제 아무리 죽은 이에 대한 사랑이 지극해도 다시 찾아와 시신을 만지고 끌어안는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링컨은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묘지를 떠난다. 윌리는 아버지의 약속 때문에 떠날 수 없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윌리는 차츰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를 보다 못한 죽은 영혼들은 어떻게 해서든 소년을 빨리 저세상으로 보내려 한다. 하지만 윌리는 아버지를 기다리겠다며 고집을 꺾지 않는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죽은 자들의 목소리를 합해 링컨의 발길을 돌리는 일이다.

이 작품은 이렇게 죽은 자들의 입을 통해 지난날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면서 삶과 죽음의 문제, 죽은 자들이 산 자들에게 미치는 영향, 산 자들이 죽은 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보게 한다. 이승에서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던 존재들- 그래서 외롭지 않았고, 헤매지 않았으며 변덕스럽지도 않았고, 저마다 그 나름의 방식으로 지혜로웠던 이들. 그들이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은 고통받는다. 그들을 사랑했던 이들은 ‘침대에 앉아 손으로 머리를 감쌌고, 탁자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짐승 같은 소리를 낸다’. 바로 이런 기억, ‘사랑 받았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사람들은 우리를 기억하며 웃음을 지을’ 거라는 그 기억 때문에 죽은 이들은 바르도에서 잠시나마 마음이 밝아진다고 말한다. 링컨처럼 죽은 아들의 묘지를 찾아와 시신을 끌어안고 흐느끼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때로 죽은 이를 기억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 죽은 자들은 쉽사리 살아있던 세상을 놓지 못한다.

한편, 대통령 링컨도 또 다른 의미의 바르도에 머물고 있다.  이 냉혹한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도 바르도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잠겨 있을 틈도 없이, 남북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들이 속출하면서, ‘희생이 무엇인지 거의 알지 못하던 나라는 우유부단한 전쟁 관리자’인 링컨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대통령은 천치다. 허영심 많고, 허약하고, 철없고, 위선적이고, 사교성이 없는데다, 선출된 인물 가운데 가장 허약한 사람이다. 게다가 아주 열등한 유형의 인품을 가진 사람이며, 위기를 감당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비난이 연일 쏟아진다. 링컨은 거의 미쳤다 싶을 정도로 야심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어린 윌리의 죽음도 그의 방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난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이쯤이면 어린 윌리 링컨이 머무는 곳이 진짜 바르도인지, 링컨 대통령이 숨 쉬는 이 세계, 전쟁으로 수많은 목숨이 연일 저 세상으로 떠나는 이곳이 진짜 바르도인지 의문이 들게 된다. 때문에 <바르도의 링컨>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바르도의 링컨>을 독창적인 작품으로 빚어내는 데 큰 역할을 한, 죽은 자들의 목소리를 나열하는 방식은 이 작품을 조금 읽어나가다 보면 그다지 새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데, 그 까닭은  오래전에 윌리엄 포크너가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에서 그와 비슷한 형태로 여러 화자를 등장시킨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의 여러 화자는 단 한 번 등장하는 죽은 자 ‘애디’를 제외하고는 모두 살아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40여명의 죽은 이들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바르도의 링컨>과 15여 명의 산 자들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이 두 작품 은 모두 전형적인 소설 형식을 벗어나, 독특한 방식으로 죽음과 삶을 다룬다. 그리고 그 수많은 목소리들은 저마다 개성으로 넘치는데, 산 자나 죽은 자나 하나 같이 그들 나름의 애도를 드러내며 서서히 삶에서 멀어지거나, 반면에 생을 더 단단히 붙드는 방식으로 삶을 예찬한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의 ‘죽어 누워 있’는 사람은 시골 아낙 ‘애디 번드런’이다. 그녀의 아들 캐시, 주얼, 달, 바더만, 그리고 딸인 듀이 델, 남편 앤스의 독백이 번갈아 이어진다. 때때로 그들의 이웃인 코라, 툴, 의사 피바디 등의 화자가 끼어들기도 한다. 이 작품은 이런 형식으로 애디의 죽음이 가져온 일상의 파문을 전하면서 삶과 죽음, 선과 악, 운명과 욕망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애디의 가족들은 참 이상하다. 이런 집구석이 다 있을까 싶다. 어머니가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도 주얼과 달은 3달러 버는 일에 혈안이 되어 먼 곳으로 일하러 떠나고, 맏아들 캐시는 어머니의 관을 짜는 일에만 정신을 쏟을 뿐이다. 잡은 물고기에만 집착하는 게 막내는 어린 소년이라 그렇다 치자, 하나뿐인 딸은 죽어가는 엄마에게 부채질해 주며 옆에 서 있다가 누군가 엄마에게 말을 걸고 기분을 돋아주려 하면 무뚝뚝하게 중간에서 끊어 버리기 일쑤이다. 사실, 이 딸에게는 말 못할 고민이 있는데 뱃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생명을 어떻게 낙태해야 할까 그 생각뿐이다. 그리고 이 비밀을 알고 있는 둘째 아들 달은 사사건건 듀이 델을 비아냥거린다.

애디의 남편인 앤스는 말하기조차 부끄럽다. 그는 아내가 죽어가고 있는데도 오직 돈 아낄 궁리뿐이다. 임종에 가까운 아내를 보기 위해 의사가 왕진 왔을 때도 그는 치료비를 부담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자기 자신은 이빨도 제대로 없는 처지라고 불평하면서 형편이 나아지면 의치를 해 넣고, 하느님이 주신 맛난 음식이나 마음껏 먹으려고 했다고 투덜거린다. 앤스의 이런 인색함은 이웃들은 물론 왕진을 온 의사조차 극히 잘 알고 있다. 의사는 이렇게 말한다. ‘폭풍우가 휘몰아치는데 의사가 필요한 사람은 매우 불우하고 가망이 없는 경우라는 것을 난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의사가 필요하다고 느낀 사람이 앤스라면 더더욱, 이미 가망 없이 늦어졌을 것이 뻔하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인 애디가 죽자 앤스는 말한다. “하느님의 뜻이지, 난 이제 새 이빨을 해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이웃 코라는 애디가 죽는 편이 차라리 낫다고까지 생각한다. 코라의 남편인 툴도 “어디로 갔든지, 앤스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축복이지.”하고 말한다. 그런데 죽은 애디의 장례는 제대로 치러지지도 못한다. 삼일 동안 관 속에 누워 있다가, 사흘 째 되는 날 3달러를 벌기 위해 일을 떠났던 달과 주얼이 돌아와 관을 마차에 싣는다. 이미 한참 늦은 셈인데도 이 기묘한 가족은 애디의 소원이었다면서 애디의 고향인 제퍼슨까지 40마일을 더 걸어가서 묻어주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죽은 지 며칠이나 된 고인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일은 다른 게 아니라 빨리 땅속에 묻어주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만사 되는 대로 내버려 두는 사람이 다른 사람 고생시킬 일은 꼭 하려’고 작심이라도 한 듯이 앤스는 완강하게 고집을 부린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애디의 관을 마차에 실고 40마일의 여정을 떠나는 가족들. 이들은 제퍼슨으로 가는 여정도 순탄하지는 않다. 강을 건너다 여울에 휩쓸려 마차가 물에 잠기고 관을 잃어버릴 위기에 놓인다. 이때 캐시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다리를 크게 다친다. 그런데 이 순간에도 앤스는 치료비가 아까워 부러진 다리를 고정한다는 명목으로 시멘트를 사다 바를 뿐이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마차에다, 집에서 짜 만든 관, 그 위에 누워 있는 다리 부러진 남자, 그리고 앞자리에 앉은 아버지와 작은 소년’ 악취를 내뿜기 시작한 애디의 시체 등등 이 기묘한 일행을 보며 사람들은 그들이 마을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모두 산산조각 나버리지 않을까 공포에 질려 바라본다. 마치 역병이 마을로 들어오기라도 한 듯 모두가 꺼린다. 차라리 빨리 묻어주면 좋을 텐데 40마일의 여정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대체 왜?

이 작품에서는 단 한 번 등장하는 애디의 독백은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의 많은 비밀을 감추고 있다. 앤스가 그렇게 고집하는 40마일의 여정은 알고 보면 애디의 소심한(?) 복수임을 알게 된다. 황폐하기만 했던, 행복하지 않았던 결혼 생활과 앤스에 대한 증오를 죽은 다음 그런 식으로 보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40마일의 여정을 지켜보면서 애디 또한 여전히 ‘바르도’에 머물러 있겠구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족들이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도 않고, 시체가 담긴 관을 끌고 40마일을 걸어가는 내내 그녀는 진짜 안식을 찾지 못한 채 ‘바르도’를 떠돌겠구나 싶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 기묘하고 비정상적이며 하나같이 이기적이기만 한 앤스네 가족이, 애디의 시신을 이끌고 40마일을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은 그들 나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 기이한 애도 방식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투박하기 짝이 없는 그들 나름의 서투른 사랑의 표현이 아닐까 싶어졌다.

가는 길 내내 저마다 자신의 고민과 상념에 빠지고 갖고 싶은 물건, 먹고 싶은 음식에 집착하는 자식들과 남편- 그래서 마누라를 묻기 위한 삽조차 빌려 쓰는 인색한이지만 그들은 결국 40마일을 터덜터덜 가는 내내 애디와 함께한다. 부패로 악취가 나기 시작하는데도 쉽게 땅에 묻지 못하고 망자의 약속을 지켜주겠다는 일념 아래 고집을 피운다. 죽은 애디의 진심이 자기 삶을 황폐하게 만든 앤스에 대한 보복이었을지언정,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고집 부리는 이 어리석고 못나고 이기적인 인간 앤스는 자기 나름의 애도 방식 고집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이 작품 마지막에 보여주는 앤스의 충격적인(!) 그 행태 또한 살아남은 이들의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는 ‘삶’, 그 자체를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에 충실한 나머지 가족들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이다. 죽은 이를 그렇게 보내고 욕망에 충실한 삶은 이어진다.


난 어릴 적, 죽음을 단순히 몸의 변화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난 죽음을 마음의 변화로 이해한다. 즉 사별을 견디어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 말이다. 허무주의자들은 죽음을 끝이라고 하고, 근본주의자들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상 죽음이란, 가족 또는 세 들었던 사람이 집이나 마을을 떠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53쪽)

우리를 불러, ‘저 바깥’은 전과 다름없다고 우리를 안심시켜줬거든요. 즉 먹고, 사랑하고, 싸우고, 낳고, 마시고, 투덜거리고, 모든 것이 여전히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바르도의 링컨>, 324쪽)


그러므로 위와 같은 구절들은 이 두 작품의 공통된 생각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이란 가족 또는 세 들었던 사람이 집이나 마을을 떠나는 것이라고, 그래서 그들을 나름대로 애도하고 떠나보내지만, 때때로 기억으로 그들을 다시 불러와 이기적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줄지언정, 그럼으로써 죽은 이들을 안심시켜 준다는 것.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의 40마일의 여정과 그 지리멸렬한 여행의 끝은 삶과 죽음의 이 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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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3-11 16: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읽고 싶은 책이 쌓입니다, 잠자냥님.
잠자냥 님의 글, 참 좋아요.

잠자냥 2019-03-11 17:18   좋아요 0 | URL
알라딘 서재 돌아다니면 읽고 싶은 책이 쌓이고 또 쌓이죠? ㅎㅎ
다락방 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