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일곱 번의 봄여름가을겨울
이옥남 지음 / 양철북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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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일곱번의 봄여름가을겨울이라니... 그 많은 계절을 온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인 할머니의 진솔하고 소박하면서 삶이 고스란히 담긴 글들. 이런 글에는 완전히 마음을 놓아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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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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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에는 주요 인물 세 사람이 등장한다. 이 작품의 화자인 치안판사, 그와 어떤 면에서는 대척점을 이루는 졸 대령, 그리고 그들, 즉 제3국 소속 이른바 ‘문명인’들이 정복하고 관리해야 할 대상인 ‘야만인’인 눈먼 여인이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이렇게 치안판사와 눈먼 여인, 졸 대령 세 사람을 내세워서 제국주의의 허위를 통렬하게 고발한다. 나는 이 세 사람의 관점에서 이 작품을 재구성해봤다.

눈먼 여인 : 나는 아버지와 함께 난데없이 이곳에 끌려와 고문당했다. 아버지는 내 앞에서 그들에게 모진 학대를 받다 목숨을 잃었고 나 또한 고문으로 반쯤은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그날 이후로 모든 것이 흐릿하게만 보인다. 이런 상태로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내 부족들이 있는 곳으로 갈 수가 없어 나는 이렇게 동냥을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늙은 남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내게 이곳에서 동냥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자기들은 부랑자들이 시내에 떠도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고. 어딘가 살 곳이 없으면 내 부족한테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일자리를 제안한다. 청소하고 빨래를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나는 그의 집에서 채소를 다듬으며 빵을 굽고, 수프 스튜 만드는 일을 돕는다. 그런데 그는 내 다친 발의 붕대를 풀더니 발을 씻겨준다. 이상한 사람이다. 이윽고 내 몸을 씻겨준다. 그러고 나서는 물기를 닦아준 뒤 내 몸에 아몬드 오일을 발라 마사지해준다. 그는 내 몸을 문지르는 행위에서 일종의 쾌감을 느끼는 것 같다. 매일 밤 이런 일이 반복된다. 그는 나를 씻기면서 내 상처를, 내 부족의 상처를 치유한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눈은 흐릿하지만 그가 하는 행위는 다 보인다. 그는 이 지역 치안판사이다. 그는 그들이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내 부족을 비롯해 이 땅의 토착민들에게 조금은 너그러운 것 같다. 하지만 그도 이 땅을 짓밟은 사람들에 속하지 않는가? 그들은 아무 죄 없는 나의 아버지를 앗아갔다. 그의 너그러움, 나를 돕고 있다는 생각은 그들이 이 땅에서 저지른 악행을 덜어내고자 하는 자기만족일 뿐이다. 나는 여기서 굶주리지도 않고 편하게 지낸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나를 부족에게 데려다주겠다며 길을 나선다. 길은 멀고 험하다. 그럼에도 나는 가야한다. 그와 내가 헤어져야 할 순간이 왔을 때 그는 묻는다. 가고 싶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고. 그는 그렇게 제멋대로이다. 내가 왜 도대체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를 단 한순간도 사랑한 적이 없다. 나는 내 부족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가 제공한 안락한 잠자리와 음식, 이 모두는 내 아버지를 앗아간 자들의 것이다. 나는 반쯤 눈먼 사람으로 살더라도, 그들이 야만인이라 부르는 내 부족과 함께 지내다 어느 날 다시 붙잡혀 또 고문당하더라도 나는 갈 것이다. 나는 이 늙은이의 자기만족용 애완동물, 심지어 성적노리개는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치안판사: 나는 한가로운 제국 변경에서 은퇴할 날을 기다리며 소일하고 있는, 제국을 위해 봉사하는 책임감 있는 시골 치안판사이자 관리다. 늙고 쇠약한 나는 이곳에서 평화로이 말년을 누리고 싶다.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먹고 자고 만족해한다. 내가 죽으면, 신문에 석 줄 정도의 기사는 실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평소에 나는 고전을 읽고 여러 가지 수집물 목록을 작성하고, 남부 사막지대의 지도들을 추려본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아침 일찍 혼자 호숫가로 가서 영양을 사냥한다. 나는 조용한 시대에 조용한 삶을 사는 것 이상을 바란 적이 없다. 그런데 요즘 이곳은 평화가 깨졌다. 지난해부터 야만인들 사이에 불안한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는 얘기들이 수도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장사꾼들이 야만인들로부터 공격받고 약탈을 당했다고 했다. 가축 도난이 빈번해지고, 그 수법도 대담해졌단다. 통계청 관리들이 행방불명되었다가 얕은 무덤에 매장된 상태로 발견되었다고도 했다. 국경순찰대와의 충돌도 있었다고 한다. 야만인 부족들이 무장을 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 틀림없이 전쟁이 일어날 테니 제국이 사전에 예방책을 강구해야 한다고도 한다. 그런데 나는 이런 불안한 징후를 전혀 보지 못했다. 나는 경험으로 한 세대에 한 번씩은 꼭 야만인들에 대한 히스테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이 또 시작된 것이다. 그 뒤로 보안청의 제3국 경찰들, 즉 국가의 수호자들이며 폭동 전문가들이고 진실의 신봉자들이며 취조 전문가들이 처음으로 변경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파견되어 국경 너머 야만인들을 잡아들이고 잔인하게 고문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급기야 나는 어느 날 거리에서 심하게 고문당해 온몸이 상처투성이인데다가 후유증으로 눈이 먼 젊은 야만인 여자를 만난다. 야만인들처럼 그녀의 눈썹은 검고 반듯하며 머릿결은 검고 윤이 난다. 나는 그녀에게 동정심을 느낀다. 아니, 이상하게 자꾸만 끌린다. 설명하기 힘든 매혹이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집안일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녀를 집으로 데리고 와 발을 씻기고 몸을 씻긴다. 그녀의 몸은 지져지고 찢기고 칼로 베인 자국투성이이다. 나는 그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싶다. 여자는 내 침대에 누워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나는 연인처럼 행동한다. 나는 그녀의 옷을 벗기고, 그녀의 몸을 씻겨주며, 그녀를 어루만지고, 그녀 곁에서 잠든다. 날마다 그녀의 몸을 문지르는 동작의 리듬에 정신없이 빠져들고 시간 밖에 존재하는 듯한 텅 빈 황홀감을 느낀다. 하지만 똑같은 의미에서, 나는 그녀를 의자에 묶고 두들겨 팰 수도 있다. 그렇다고 덜 친밀해지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나는 그녀를 자신의 부족에게 데려다 주기로 결심한다. 이것은 나의 속죄의식일까?

졸 대령: 나의 임무는 진실을 밝히는 일이다. 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진실을 밝혀내고야 만다. 진실을 밝히려면 특정한 말투를 알아차리면 된다. 사람이 진실을 얘기할 때는 특정한 말투를 쓰는 법이다. 나는 훈련과 경험으로 그걸 알고 있다. 물론 진실을 찾기 위해서는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 그들, 그러니까 야만인들은 처음에는 거짓말을 한다. 압력이 가해지면 더 거짓말을 한다. 거기에 압력이 더 가해지면 변화가 생긴다. 그러다 압력이 더 가해지면 그때에야 진실을 말한다. 그게 진실을 알아내는 방법이다. 이 변경의 정착지는 제국을 수호하는 최전선이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철수하지 않는다. 그런데 저 늙은 치안판사는 제국 수호자로서의 임무를 저버리고 우리의 적 야만인과 내통했다. 그는 처음부터 제3국 소속 경찰에게 비협조적이었다. 수년 동안 이렇게 침체된 곳에서 게으른 토착민들의 방식에 맞춰 살다 보니 구태의연한 생각에 젖어 있고, 제국의 안보를 임시적이고 불안정한 평화와 맞바꾸려는 위태로운 생각에 빠진 하찮은 민간인관리이다. 그런 인간이 기어코 야만인 여자 하나 때문에 적과 내통한 것이다. 그러고도 그는 우리가 자신을 법정에 세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가 이곳 시민들에게 인기가 많은 게 두려워서 말이다. 하지만 천만에! 그는 혐오스럽게도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천한 무리와 어울림으로써 스스로 명예를 실추시켰다. 그래놓고도 새로운 야망을 품고 있다. 그는 자신의 원칙을 위해 개인적인 자유를 희생할 용의가 있는, ‘단 한 명의 의로운 사람’으로 이름을 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이곳 사람들에게 ‘단 한 명의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그저 광대이고 미친놈일 뿐이다. 그는 지저분하고 악취 나는 인간이다. 일 마일쯤 떨어진 곳에서도 냄새가 날 정도이다. 그는 늙은 거지같이 생겼다. 쓰레기를 주워 먹고 사는 거지. 그런데도 그는 역사의 순교자로 기록되기를 원하는 것 같다. 하지만 누가 그런 인간을 역사책에 기록해주겠는가? 국경에서 일어나는 이런 문제들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조금만 지나면 잊힐 터이고, 변경은 이후 이십 년 동안 평화로워질 것이다. 사람들은 먼 과거의 역사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치안판사 같은 인물이 극도로 혐오스럽다.

내가 이 작품의 화자인 치안판사 ‘나’의 이야기부터 늘어놓지 않은 까닭은 그들이 마음대로 유린하는 대상인 ‘야만인 여인’, 그녀의 심정이 어떠했을지에 초점을 두고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녀 처지에서 보자면, 제3국 소속의 그들이 오히려 야만인이 아닐까? 그녀의 부족은 ‘일 년중 대부분은 물고기를 잡고 덫을 놓으며, 가을에는 노를 저어 호수의 먼 남쪽 기슭으로 가서 지렁이를 잡아 말리고, 형편없는 갈대집을 짓고 살며,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고, 갈대 속에 숨기나’ 할 뿐이다. 그런 그들이 제국을 향한 야만인의 거창한 음모에 대해 뭘 알겠는가? 그런데 ‘문명인’들은 남의 땅에 쳐들어와 마음대로 땅을 짓밟고 존재하지도 않는 ‘야만인’을 설정하고는, 자신의 부족들이 야만인이며 때문에 약탈을 하고 방화를 하고, 강간을 하는 등 제국의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라고 한다. 그러고는 그 구실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들을 붙잡아 고문하고 잔혹하게 죽여 버린다. 그런 행동을 서슴지 않는 그들이 오히려 야만인은 아닐까?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문명인’이라며 토착민인 자신들을 말살해버려야 할 대상으로 다룬다. 그 모두가 제국의 안녕을 위해서이다.

눈먼 여인이 보기에 ‘치안판사’는 더 가관인 인물이다. 그는 선량하다. 그녀를 데려다가 상처를 치료해주고 일자리와 잠자리까지 제공한다. 그것도 모자라 밤마다 상처를 치유라도 해주려는 듯이 오일을 발라주고 그녀의 몸을 매번 쓰다듬다 잠이 든다. 이 늙은 치안판사는 대체 뭘 바라는 걸까? 그의 말처럼 ‘죄수들을 구할 수 없으니 자기 자신이라도 구하는 길’을 택한 것일까? ‘제국의 변방 오지에도 마음속에는 야만인이 아니었던 자가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다는 얘기를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그의 바람처럼 자신은 야만인이 아니었던 사람이라고 항변이라도 하고 싶은 걸까? 그는 민간인 치안판사를 위한 멋진 주택을 마다하고 군사 지휘관을 위해 마련해둔 창고와 부엌 바로 위에 위치한 어수선한 거처에 살고 있다. 망각하기 위해 틈만 있으면 잠을 잔다. 그러나 수치심을 잊기 위해 잠든다고 해서 그가 제국의 수호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나와 고문자들, 딱정벌레처럼 어두운 지하실에 앉아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고 ‘나와 졸 대령은 다르다고’ 아무리 마음속으로 외쳐도 그는 제국의 수호자이며 그 집행자 중 한 사람일뿐이다.

제국이 이 야만인의 땅에 들어와 100년 넘는 세월동안 이 땅을 마음대로 유린했기에 치안판사 같은 이들은 그곳에서 삶을 누릴 수 있던 것이다. 치안판사 그 자신도 말하지 않는가? 이곳에서 마음대로 인생을 살았다고. 마음대로 여자들을 취하면서 무제한적인 자유를 누리지 않았는가? 야만인의 땅에서 그곳 여자들을 자기 변덕에 맞춰 아내, 첩, 딸, 노예 혹은 그 모든 것을 아우른 존재, 혹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 수 있지 않았던가. 때문에 그가 아무리 졸 대령을 비롯한 제국의 수호자들이 야만인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놓고 토착민들을 가혹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며 고통받았다하더라도, 토착민들이 ‘게으르고 부도덕하며 더럽고 어리석다는 주민들의 편견을 굳히는 모습’을 보는 게 괴로웠다하더라도, ‘문명이 야만인들이 가진 미덕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든다면, 그 문명에 반대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말하더라도 그의 그런 모습은 연민을 불러일으키기 보다는 쓰디쓴 냉소를 머금게 한다. 위선자여, 당신도 결국 한통속이 아닌가 하고 소리치고 싶어진다. 제국의 정책 집행 방식에 대한 그의 분노는 과연 ‘변경에서 편안한 말년을 방해받지 않으려는 노인의 투정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일까?’(88쪽)

때문에 그가 눈먼 여인을 부족에게 데려다 주겠다면서 길을 나서는 모습조차도 졸 대령의 말처럼 ‘단 한 명의 의로운 사람’이자 ‘순교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만 읽힌다. 그는 출발하기 전에 그 지역 총독에게 이렇게 쓴다. “본인은 제3국의 공격적 행동으로 인해 생긴 상처를 다독거리고, 이전에 존재했던 상호간의 선의를 회복하기 위해 야만인들을 잠시 방문하고자 합니다.” 이 얼마나 안일한 생각인가! 단지 눈먼 여인을 부족에게 돌려보낸다고, 그들의 상처가 아물며 서로 간의 선의가 회복될까? 그가 눈먼 여인과 헤어지는 순간에 하는 말은 그래서 더 어처구니가 없다. 그는 그녀가 자신과 함께 도시로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그녀 스스로 선택해서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그는 그녀에게 뭘 기대한 걸까? 사랑이라도? 치안판사의 말에 단호하게 싫다고,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여인의 대답은 매우 통쾌하다. 아무리 치안판사가 먹을 것과 일자리와 잠자리를 제공할지언정, 그들, 그러니까 야만인들이 바라는 것은 땅을 되찾고 전에 하던 대로, 자신들의 가축을 몰고 초지에서 자유롭게 이동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치안판사는 때때로 야만인들이 들고 일어나 제국에게 본때를 보여 그들을 존중하는 법을 가르쳤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제국은 이곳이 자신들 소유이고, 제국의 일부이며, 자신들의 전진기지이자, 정착지이고, 중앙시장이라고 생각하지만, 야만인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아직도 제국의 문명인들을 잠시 머무는 방문객으로 생각하고 있다고도 말한다. 또 졸 대령으로 대표할 수 있는 제3국의 수호자들에게 이렇게 외치기도 한다. “당신이 적이란 말이야! 당신이 전쟁을 했고, 당신이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순교자들을 만들어줬소. 역사가 내 말을 증명해줄 거요!”라고. 그러나 그의 이러한 외침은 어쩐지 공허하다. 이 모두는 그 또한 제국의 수호자 중 한 사람이며 검은 안경 뒤로 표정을 가린 졸 대령과 달리 조금 선한 얼굴을 가진 제국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편안한 시절에 제국이 스스로에게 얘기하는 거짓말이고, 대령은 거친 바람이 불며 세상이 험악해질 때 제국이 얘기하는 진실이다. 제국의 통치술의 양면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 223쪽)


치안판사는 역사의 바깥에서 살고 싶었다고 말한다. 제국이 백성들에게 강요하는, 아니 사라져버린 백성들에게조차 강요하는 역사의 바깥에 살고 싶었다고. 그 스스로는 야만인들에게 제국의 역사를 강요하는 걸 원치 않았다고도 항변한다. 뒤늦게 그는 ‘저토록 부드럽고 꽃 같은 아이들에게, 그녀뿐만이 아니라 다른 아이에게도, 내 몸을 밀착시키며 무슨 짓을 했던 걸까? 나는 천하고 퇴화하는 인간들 속에 있었어야 했다. 그곳이 내가 속한 곳이다.’ (161쪽)라고 깨달을지언정, 그 깨달음과 회환은 역시 너무나도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줄곧 야만인 여인을 상처받고 손상된 몸을 가진 불구자로 본 반면, 그녀는 자신의 불완전한 몸에 익숙해져, 자신을 더 이상 불구라고 느끼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가 줄곧 그녀에게 눈이 멀었다고 말해도, 그녀는 자기는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치안판사는 야만인들이 눈이 멀고, 불구가 된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야만 제국의 수호자로서, 온정적인 얼굴로 그들을 보듬어줘야 할 구실이 필요해지니까. 그러나 ‘야만인’들은 불완전한 몸에도 불구라고 느끼지 않는다, 흐릿할지언정 모든 것을 본다. ‘문명인’들의 ‘야만적’인 행위를 보고, 또 본다. 과연 누가 진정한 ‘야만인’인지,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묻고 또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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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3-29 1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리뷰는 책 다 읽고 읽을께용~즐거운 금요일 되십시오!

잠자냥 2019-03-29 11:46   좋아요 1 | URL
넵! 그럼요~ 책 읽고 읽으셔야지 제맛이지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목나무 2019-03-29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책을 읽어야지 이 리뷰가 얼마나 재밌는지 제대로 알 것 같아요! ^^
잠자냥님~~ 행복한 주말 보내셔요. ^^

잠자냥 2019-03-29 14:05   좋아요 1 | URL
네! 책은 꼭 읽어보세요~ ㅎㅎ 주말 잘 보내시고요.

vertigo 2019-05-03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같은 책을 읽었는데 이해도가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요? 저는 이 책이 모호하고 어렵게 느껴지더라고요. 잠자냥님 리뷰 읽으면서 이 책에 대한 갈피를 어느 정도 잡을 수 있었어요. 부끄럽게도. 저는 책을 읽어도 등장인물에 대한 감정만 느껴질 뿐, 전체적인 감상은 이해(정리)하기 힘들더군요. 아직 독서력이 많이 부족한가봐요.ㅠㅠ 그래서 잠자냥님 리뷰 많이 참고하고 있어요. ㅎㅎ

잠자냥 2019-05-03 09:44   좋아요 0 | URL
책 읽고 감상하는 일에 정답은 없지요. ㅎㅎ 그래도 제 글이 이해하시는 데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이에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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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니의 회화는 쉽고 편하다. 그러면서도 매우 독창적이고 개성 넘친다. 색채감은 또 어떤가. 가히 황홀할 지경이다. 게다가 매번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그 호크니의 작품을 만나기 위해 서울 시립미술관을 지난 토요일에 찾았다. 토요일이라 조금 걱정하기는 했지만 전시 초반이니 조금 괜찮지 않을까 싶었는데 웬걸, 오후 4시 무렵, 매표소에는 이미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안내원이 말한다. 표를 사고도 대기표를 받아 기다려야 하는데, 전시장에 들어가기까지 1시간 30분은 걸린단다. 순간 갈등했다. ‘사람 머리통만 보다가 가는 건 아닐까, 다음에 올까?’ 하지만 다음에 와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4시 20분쯤 표를 사고, 결국 입장한 시간은 5시 50분이었다. 1시간 30분은 족히 기다린 셈이다. 그러고도 줄을 서서 봐야할 지경이니, 조금 짜증이 난다.

이 긴 기다림, 넘치는 인파, 그래서 조금 곤두섰던 신경도 드디어, 전시장에 입장해 첫 번째로 나를 맞이하는 호크니의<환영적 양식으로 그린 차(茶) 그림>를 보는 순간 슬며시 풀어진다. 호크니가 이토록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바로 이런 작품들 때문이지 하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어쩐지 그 많은 인파도 용서(?)가 될 것 같다. 1시간 10여분 동안 작품을 둘러봐야 하니 마음이 조급했다. 가까스로 모든 방들을 돌아다니며 작품을 감상하고 나오니 정확히 7시, 마감 시간이다. 전시장 구성 순서는 호크니 전을 앞두고 읽었던 <데이비드 호크니 -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현대미술의 거장>의 구성과 거의 비슷하다. 1950년대 초부터 2017년까지의 회화, 드로잉, 판화를 선보이며 작가의 시기별 작품 특성을 살펴보고자 했으므로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시장에서 인기 있는 구간은 아무래도 호크니가 로스앤젤레스 산타모니카 인근에 거주하면서 그 도시들을 그리기 시작한 ‘로스앤젤레스’ 시기가 아닐까 한다. 이 섹션에서는 그 유명한 <더 큰 첨벙> 을 비롯, 날씨 연작 시리즈 중 <비>를 만날 수 있다. 조금 더 발걸음을 옮기면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클라크 부부와 퍼시>가 눈에 들어온다. 전시를 앞두고 읽은 <데이비드 호크니>에 따르면 이 작품은 서 있는 여자와 앉아 있는 남자의 구도 등이 전통적인 성역할을 벗어났으며 부부의 시선이나 몸짓을 보면 둘 사이가 그리 원만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실제로 눈앞에 펼쳐진 대형 크기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니 그러한 느낌이 한층 더 잘 전달된다. 이윽고 호크니가 자신의 부모를 그린 작품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그의 절친 <셀리아>도 만날 수 있다. 한편 <카바피의 시 14편을 위한 삽화> 시리즈를 통해서는 이국적인 건축물과 분위기를 배경으로 두 남성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의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셀리아>와 <카바피> 시리즈는 기존의 미술 작품과는 매우 다른 시선이 느껴진다. <데이비드 호크니>에 따르면 ‘호크니는 이전의 미술에서처럼 남성을 공격성과 힘의 상징이 아닌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묘사하여 미술에서 남성을 다루는 방식에 이미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 바 있다.’ 마찬가지로 ‘셀리아를 그린 호크니의 그림은 이성애자 남성 미술가의 작품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성적 대상이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그녀에 대한 자신의 반응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화가들과 다른 시선으로 남성과 여성을 묘사한 호크니에게 마음속으로 조용히 박수를 보내면서 다른 전시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1980년대에 들어선 호크니 작품을 보면 스타일과 매체 면에서 큰 변화가 왔음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이 무렵 사진, 연극 무대 디자인, 중국의 두루마리 회화 등을 연구하면서 3차원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2차원 평면에 어떻게 재현하는가 하는 문제에 집중한다. 호크니는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혁신적이고 모험적인 접근 방식으로 2차원 평면에 다채로운 그림을 그려가며 작품을 통해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준 것으로 유명하다. 이  전시관에서는 바로 그런 호크니의 ‘보는 방식’에 마음껏 공감할 수 있다. 호크니는 ‘본다는 행위’를 긍정적으로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사물을 살피는 데 더 관심이 있’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오랫동안 바라보기 그리고 열심히 바라보기는 호크니의 삶과 예술에서 핵심적인 행위이고, 또한 그의 가장 큰 두 가지 기쁨’이다. (<다시, 그림이다>, 27쪽)


1990년으로 접어든 호크니는 카메라가 세상을 동질화하고 능동적으로 보는 행위를 퇴화시킨다고 결론 내리고 세계를 묘사할 수 있는 실험적인 방식들을 계속해서 모색한다. <다시, 그림이다>에서 호크니는 사진은 우리 모두가 매우 따분하고 비슷한 방식으로 보게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카메라는 기하학적으로 대상을 보지만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부분적으로는 기하학적으로 보지만 또한 매우 심리적으로 보기’도 한다. ‘내가 저 벽에 걸린 요하네스 브람스의 사진을 본다면, 그 순간 브람스는 문보다 훨씬 더 크게 보일 겁니다. 그러므로 세계를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측정하는 것은 사실이 될 수 없습니다.’ (<다시, 그림이다>, 52~53쪽)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계가 사진처럼 보인다고 여긴다. 호크니는 ‘사진이 놓치고 있는 약간의 차이 때문에 사진이 세계로부터 크게 빗나간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 지점이 호크니가 찾고 있었던 것이다. 호크니는 사진을 그대로 옮기지 않고 발상의 원천으로 활용한다. 직접 관찰한 바에 바탕을 두면서 장면을 재구성했다. 그렇게 그의 작품은 회화, 판화, 드로잉에서 사진 등 다양한 장르와 더불어 이제는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면서 폭넓은 범주로 나아간다. 21세기에 제작된 그랜드 캐니언 풍경화와 고향 요크셔로 돌아가 제작한 거대 규모의 요크셔 풍경화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또는 새로운 포스트 사진 시대를 위한 야외에서 그린 회화> 등은 호크니가 보는 세상이 여전히 새롭고 신비로운 곳임을 자연스레 알려준다.

호크니는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는 것’(<다시 그림이다>, 164쪽)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려 지인들에게 보내곤 한다. 아이폰으로는 어둠 속에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좋아하는 이 어린아이 같은 화가. 그에게 새로운 기술은 흥분제와 같다. 사실 아이폰을 드로잉 수단으로 생각한 화가가 얼마나 될까? 그러나 이 노화가는 즐겁게 새로운 매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비단 이런 모습이 처음은 아니다. 호크니는 1980년대에는 복사기를, 그 후에는 팩스를 사용했다. 화가의 작업실보다 사무실에 더 적합해 보이는 이 기계들로 그는 판화를 제작했다. ‘엄밀함과 엄숙, 웅대한 의도를 소중하게 여기는 시대에 호크니는 그의 작품이 가볍다는 비판을 자초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데이비드 호크니>, 154쪽) 이렇게 새롭고 혁신적인 것을 거부하지 않고, 또 두려워하지도 않는 그의 열린 태도가 이토록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비결이 아닐까.

호크니는 새로운 매체 실험을 멈추지 않고 있다. 세상을 보고 재현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작품으로 끌어들여서 여전히 그의 작품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다.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 이번 전시에서는 비록 그의 아이폰 드로잉을 만날 수 없었고 내가 좋아하는 몇몇 작품들- 이를테면 <멀홀랜드 드라이브 : 작업실 가는 길>, <니콜스캐니언>,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와 돈 배처디>, <미술가의 초상화(두 사람이 있는 수영장)> 등을 볼 수 없어 아쉽긴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전시를 사람이 없는 평일 오전쯤(과연 그렇다고 사람이 없을지 의문이지만) 다시 한 번 꼭 보고 싶다. 그리고 내가 이 전시에서 만나지 못한 작품들도 언젠가는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호크니: 나는 욕심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돈에 대해서는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돈은 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흥미진진한 삶에 대해서는 욕심을 냅니다. 나는 삶이 항상 신나기를 바라고 실제로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물웅덩이에 떨어지는 빗방울에서도 재미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지요. 나는 쓰러지는 날까지 신나는 삶을 살 작정입니다. (<다시 그림이다>, 101쪽)

전시관을 나올 때 이 책의 이 구절이 떠올랐다. 호크니라면 틀림없이 쓰러지는 날까지 신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무나 얼굴, 해돋이를 보는 데에서 얻는 소박한 기쁨을 어떻게 하면 최대한 즐길 수 있을지 평생 고민하고 연구한 화가, 그의 작품들이 지금 여기 이 땅에 있다.




전시관을 나오니 해가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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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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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어디인지 모호한 공간, 실체도 존재는 더더욱 알 수 없는 ‘야만인‘- 그들이 올 것이라고, 그들이 폭력을 일으킬 것이라고, 보이지 않는 공포를 조장하며 제국을 통치하는 제국주의자들과 그 부역자들의 비겁한 모습을 통해 제국주의자들의 허위를 통렬하게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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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림이다 - 데이비드 호크니와의 대화 현대미술가 시리즈
마틴 게이퍼드 지음, 주은정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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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크니 전시를 앞두고 읽은 이 책, 그의 생각과 그림에 대해 한결 더 이해하게 된다. 카메라를 비롯해 아이폰과 아이패드 등 새로운 기계를 이용해서 그림 그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그야말로 호기심 넘치고 여전히 왕성한 이 화가- 아침마다 나도 그의 아이폰 드로잉을 받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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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3-22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집에 오래전부터 있는 이 책을 이제는 읽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마침 어제 전시회 할인 마지막 날이라길래 예매해 두었어요. 흐흣

잠자냥 2019-03-22 10:52   좋아요 0 | URL
앗! 어제가 전시회 할인 마지막 날이었단 말입니까! 흐흑... 놓쳤네요. 하지만 제값 주고 봐도 아깝지 않을 거예요- 전시회 전에 이 책 꼭 읽으세요~ 틀림없이 호크니 그림이 더 다정하게 다가올 거예요- 저는 일단 내일 전시를 =33

다락방 2019-03-22 10:56   좋아요 0 | URL
저도 어제 트윗 통해 밤 11시 넘어 알아서 자기 전에 부랴부랴 했어요. 네, 꼭 다 읽고 보러갈게요. 빠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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