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기질
유진 오닐 지음, 백승진 옮김 / 지앤유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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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과거에 사는 아버지, 이미 시들대로 시들어버린 사랑 속을 헤매는 어머니, 언젠가는 상류 사회의 일원이 되리라는 야망을 지닌 딸 등등 인물 모두가 저마다 환상에 빠져 살고 있다. 그 환상이 산산이 깨져버릴 때, 인간에게는 무엇이 남는가를 한 가족의 모습을 통해 극명하게 보여준다. 역시 유진 오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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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콜하스 창비세계문학 14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황종민 옮김 / 창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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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처럼 몰아치는 이야기와 질주하듯 내달리는 박진감 넘치는 문장. 이 한 권으로 클라이스트에게 완전히 반했다. 대표작 ‘미하엘 콜하스’는 물론 기존의 질서나 도덕, 종교, 가부장의 권위에 맞서는 독특한 여성들이 등장하는 다른 단편들도 무척 매력적이다. 그는 정녕 시대를 앞서간 작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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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에서의 삶과 죽음 - 셰르파, 히말라야 원정대, 두 문화의 조우
셰리 B. 오트너 지음, 노상미 옮김 / 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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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산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한때는 ‘어차피 내려올 것을 왜 힘들여 올라가나’ 생각하기도 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산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말한다(물론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는 한다). 산 정상에 올랐을 때의 남다른 성취감이나 뿌듯함을 말하는 이도 있고, 산에서 느끼는 고양된 마음과 심신이 정화되는 듯한 경험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한편,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인도나 티베트, 네팔 같은 곳을 다녀오거나 그러기를 꿈꾸며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주로 ‘영적인 구원’ 같은 것들-을 운운한다. 나는 이런 지역, 그러니까 네팔이나 티베트, 인도 같은 곳을 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안락하고 깨끗한 여행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인도 갠지스 강을 간다고, 네팔이나 티베트를 다녀온다고 내 영혼에 뭔가 기적적인 변화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기대를 품는 것 또한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이 아닌가 하는 비판적인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사람들의 태도에는 이런 모든 것들이 깃들어 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 에베레스트, 세계의 지붕이자 하늘의 이마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지구에서 ‘가장 높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간의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인간의 두 발로 ‘정복’하고자 하는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 더욱이 이곳은 네팔과 티베트(중국) 국경에 자리하고 있어 많은 서구인들이 영적인 구원을 꿈꾸며 떠나는 장소가 되었다. 쉽사리 등반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남성성을 과시하는 경쟁’의 장이 되기도 했다. <에베레스트에서의 삶과 죽음>은 등반가들이 어떤 동기로 에베레스트를 오르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인종과 계급, 종교, 젠더 차원에서 다룬다. 기존의 히말라야 관련 책들이 주로 등반에 성공한 서구 등반가들의 관점에서 쓰였다면, 이 책은 등반가의 보이지 않는 조력자(그러나 이들이 없으면 거의 등반은 성공하지 못할 만큼 중요한 존재)인 ‘셰르파’에 주목하여 그들 또한 나름의 복잡한 인생과 의도가 있음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산이라든가 등반에 관심이 없던 나였기에 ‘셰르파’는 단순히 히말라야에 오르는 사람들을 돕는 현지 가이드나 포터쯤으로 생각했다. 물론 셰르파들은 그런 역할을 한다, 다만 셰르파란 네팔 북동쪽 에베레스트 대산괴 주변의 산과 계곡에 사는 ‘소수민족’ 자체를 지칭한다. 이들은 애초부터 고산지역에서 나고 자랐기에 뛰어난 적응력으로 히말라야 원정대에게 엄청난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어떤 등반가도 셰르파의 도움 없이 정상에 오른 경우는 없기 때문에 셰르파는 히말라야 등반에 필수적인 존재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보이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서구 원정대나 일본 또는 우리나라 원정대가 히말라야 등반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그들 위주로 구성된 원정대’의 모습이 대서특필될 뿐이지 함께 등반한 셰르파가 언급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실제로는 앞서 말했듯, 셰르파 없이 히말라야 등반은 여전히 불가능하다. 산소통만큼 중요한 존재라고나 할까. 셰르파들은 높은 보수, 개인적인 출세 가능성 등을 이유로 등반에 참여하면서, 물품 운반, 요리와 청소, 루트 개설 등을 담당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셰르파들이 ‘높은 보수’, 즉 돈 때문에 등반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초창기 서구 원정대는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히말라야에 오르는 데 드는 비용은 어마어마하다. 네팔 당국에 지불해야 하는 돈을 비롯해서 원정대를 꾸리고 셰르파를 고용하는 등의 비용까지 헤아리면 최고 9만 달러에 달하는 비용이 들어간다고 한다(이 책에서는 1996년 등반대의 경우 에베레스트산 정상까지 전문가의 안내를 받는 대가로 각자 6만 5천 달러 정도 지불했다고). 이렇게 많은 돈을 지불할 경제적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히말라야 등반은 애초부터 계급과 인종 문제를 포함할 수밖에 없었다. 1910년부터 시작된 국제 등반가의 대다수는 비교적 교육 수준이 높고 부유한 중상류층 출신들이었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여전해서 비단 서구 원정대만이 아니라 아시아 원정대도 일본 및 한국 등 히말라야에 ‘입장’할만한 경제력을 갖춘 이들로 구성된다(이 엄청난 비용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은 모금 활동을 벌이거나 스폰서를 등에 업는다). 한쪽에서는 돈을 들여서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등반에 몸을 던지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그들을 도우면서 돈을 버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돈을 들여서 목숨까지 걸고 에베레스트에 오는 ‘사히브’(힌두어로 ‘보스’나 ‘주인'을 뜻함. 등반가를 지칭)들을 셰르파는 신기하게 생각했다. 1976년 미국 200주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릭 리지웨이(Rick Ridgeway)와 셰르파의 대화를 보면 극명하게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니마, 셰르파들은 원정대 일을 좋아하나, 아니면 구할 수만 있다면 다른 일을 더 좋아하나?”
“아, 셰르파가 돈이 있다면 집에서 마누라와 자식들이랑 있겠죠. 원정대 일은 매우 위험해요. 하지만 그 덕분에 돈을 많이 받으니까요.”
“니마, 등반이 그렇게 위험하다면 우리는 왜 하고 싶어 할까?”
“저야 모르지요. 아시겠지만 셰르파들도 그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아마 당신네는 돈이 너무 많아 어찌 써야 할지 모르는 게 아닐까요…….”
“하지만 휴가를, 그리고 많은 돈을 써가면서 몹시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하는 게 이상해 보이지 않나?”
니마는 웃었다. “글쎄요. 정 우리 생각을 알고 싶다면야, 우리는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신네들은 좋아하는 것 같더군요.” (<에베레스트의 삶과 죽음>, 257쪽)


이 차이는 사히브나 멤사히브(여성 사히브들을 지칭)로 구성된 서구 원정대와 셰르파 사이에 권력 및 계급 차이를 비롯해 문화차이까지 유발한다. 초창기 등반가들이(현재도 물론) 셰르파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이 존재했다. 1920~30년대 서구의 등반가들은 그 무렵 천박한 물질주의에 결여된 ‘영성을 구현’한다는 생각으로 산에 올랐고, 이들은 금욕주의, 신비주의, 도덕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때문에 셰르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산에 오른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셰르파들은 그들의 ‘영성적인 고급 스포츠 게임’의 훌륭한 조력자로서 존재해야만 했다. ‘근대가 천박하고 물질주의적이라면 등반은 숭고하고 초월적’이며, ‘근대가 시끄럽고 산만하다면 등반은 평화롭고 성찰적’이다. 또한 ‘근대가 편하고 지루하다면 등반은 어렵고 도전적이며 스릴이’ 있다. 에베레스트의 ‘거기’는 근대의 ‘여기’와 대조되는 지점이었고, 서구 등반가들에게 반근대를 상징하는 히말라야와 ‘거기’에 있는 셰르파들은 에베레스트와 마찬가지로 때 묻지 않은 자연, 순수한 자연, 그렇기 때문에 물질과는 거리가 먼 존재가 되어야만 했다. 때문에 서구 등반가들은 셰르파를 ‘아이들처럼 걱정 근심이 없다’ 라던가 ‘극동의 외딴 곳에 살고 있는 이 맨발의 천사들’로 표현하며 그들을 순진무구한 존재로 타자화했다.


초기 사히브들은 셰르파들이 주로 자신들에 대한 충성심에서 등반의 위험을 기꺼이 감수한다고 믿었던 반면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사히브들은 셰르파들도 자신들처럼 낭만적이고 모험적인 등반 욕구를 가져서 등반을 하는 거라고 믿었다. 이들은 모두 돈에 대한 셰르파의 관심을 최소화하거나 셰르파에게 돈이 가질 수 있는 의미를 의문시했다. 그들과 달리 셰르파에게 돈이 중요한 의미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아무도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 (<에베레스트의 삶과 죽음>, 250쪽)

셰르파가 등반 관련 일에 뛰어든 주된 이유가 그 일이 지불하는 돈과 그 돈이 수반하는 물질적 만족, 의존관계로부터의 자유, 보다 넓고 보다 국제적인 세계에의 참여 때문이라는 점이 금세 분명해졌다(...) 대부분의 사히브와 셰르파에게 공통되게 돈은 안전, 자유, 평안, 지위, 권력, 너그러움 등을 의미한다. 아마 역사적으로 가장 큰 차이는, 그리고 현 논의와 가장 밀접한 차이는 많은 셰르파에게 돈이 자유라는 근대성을 사는 수단으로서 대체로 긍정적인 의미를 지녔던 반면, 보다 낭만적인 혹은 보다 반근대적인 많은 사히브에게 돈은 양가적이기는 하지만 타락한 근대성의 일부라는 부정적 의미를 지녔다는 점이다.(<에베레스트의 삶과 죽음>, 252~255쪽)


여성 등반가들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1970년대까지 히말라야 등반은 압도적으로 남성의 스포츠였다. 거의 배타적으로 셰르파들과 부유한 선진국 남자들만 참여했다. 그런데 1970년대에 와서야 페미니즘 운동의 등장으로 상당수 여성들이 등반이라는 스포츠에 발을 들였고, 셰르파 여자들, 즉 ‘셰르파니’가 등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성의 등장에 남성 등반가들의 반응은 반대하고 적의를 품고 위기의식을 느끼는 등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저자는 이 스포츠가 지닌 남성적인 성격을 감안할 때 히말라야 등반에 참여한 여자라면 어떤 의미에서는 ‘급진적 젠더’라고 말한다. 등반에 참여한 여자들 대부분은 전형적인 남성의 세계에서 여성에 대한 장벽을 부수는 일에 어떤 형태로든 의식이나 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혼성 원정대의 유일한 여자로 등반을 하는 사례도 있으며, 여성들로만 구성된 폴란드 K2 원정대도 있었다. 이들은 성차별주의와 가부장주의에 맞섰다. ‘삶의 다른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등반에서도 남자들은 장악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저항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다. 그리하여 많은 여자들이 혼성 원정대에 반대했고, 등반에서 리더십과 독립성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예 남자와 등반하지 않는 것뿐이라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최초의 미국 여성 스테이시 앨리슨(Stacy Allison)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는 남성 친구, 남성 교사, 남성 등반 동료가 있었다. 우리는 남성들과 등반을 피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함께한 등반은 그들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이전에는 남성들만 올랐던 곳을 등반하는 우리의 힘이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들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서구 여성 산악인이 등장하면서 히말라야 등반에는 성적 모험, 성적 정화, 금욕주의라는 복잡한 역학이 만들어졌고 사히브와 셰르파 두 남성 집단의 만남에 영향을 주는 새로운 욕망관을 빚어내기도 했으며 ‘가부장적 위계’는 서구 남성 등반가나 셰르파 남성 모두가 공유한 권력 질서였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또한 이런 사례들을 통해 여성 등반가들이 혼성 원정대에서 저항하고자 했던 대상은 성적 파트너, 연인, 혹은 남편으로서의 남자들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으로 ‘가부장’ 스타일의 남자들, ‘아버지’로서의 남자들, 여자들은 장악하려 하고 어린애처럼 느끼게 만들려 하는 남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히말라야에는 수많은 시체들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원정대는 물론 셰르파와 포터 등 가리지 않고 많은 이들이 히말라야에서 목숨을 잃는다. 눈 폭풍에 휩쓸리기도 하고 고산병으로 죽기도 하며, 잠깐 졸다가 그대로 동사하기도 한다. 죽음을 맞이한 순간은 어쨌든 위험 상황이므로 죽은 동료를 그냥 둔 채로 남은 사람이라도 살아 돌아와야 한다. 나중에 시체를 수습하는 일 또한 위험하며 많은 비용이 든다. 그래서 히말라야에는 아직도 수습되지 않은 시체들이 산을 오르는 등반가들을 맞이한다. 그런데도 가장 높은 곳에 오르려는 인간의 욕망은 멈추지 않는다. 위험한 활동에 돈을 지불하고 참여하는 ‘모험 여행’의 폭발적 증가와 여피족의 출현과 함께 등반은 더 이상 서구 부르주아 ‘근대’ 문화 내의 반문화적인 흐름의 일부가 아니라 지배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에베레스트는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 아닌, 다양한 국적의 아시아 등반대와 여행자가 참여하는 거대한 관광지가 되었다. 저자는 셰르파를 폄하하고, 종속시키고, 착취하는 일부 기업형 등반대의 급증으로 에베레스트의 질서가 심하게 훼손되고 있음을 우려한다. 어떤 이들은 산에 사람이 꾀기 시작하면서 에베레스트는 변질됐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에베레스트는 언제나 ‘거기’에, 산으로 우뚝 서 있었을 뿐이다. 사히브나 멤사히브나 셰르파나 산에 오르는 인간의 동기와 욕망, 그들 사이의 관계가 ‘산’을 변하게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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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다른 책으로 건너가는 길을 마련해준다. 최근 읽은 <미하엘 콜하스>도 바로 그 ‘어떤 책’이 내준 길을 통해 만났다. <미하엘 콜하스>는 몇 해 전에 영화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으로 개봉한 적이 있다. 그 무렵에는 영화는 물론 원작인 이 책도 그다지 흥미가 당기지 않았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한 남자의 뻔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쥐뿔도 모르면서 말이다. 클라이스트의 <미하엘 콜하스>를 읽지 않고 죽는다면 얼마나 아까울까! 이제라도 읽었으니, 참 다행이다. 이 고마움을 그 어떤 ‘책’에게, 그 책의 저자에게 진심으로 전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쯤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그 ‘어떤’ 책이 무엇인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루돌프 폰 예링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 바로 그 책이다.

<권리를 위한 투쟁>에서 예링은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려는 개인과 사회의 자각을 이끌어내면서 힘주어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의 권리를 위해 끝까지 싸운 인물로 ‘미하엘 콜하스’를 예로 든다. 예링은 <미하엘 콜하스>를 이렇게 말한다.


클라이스트가 자기 이름과 같은 제목의 소설 속에서 매우 감명 깊고 진지하게 묘사해놓은 인물, (...) 미하엘 콜하스는 다르다. 가장 비열한 방법으로 멸시당한 자기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취한 후, 그리고 잔악한 내각이 재판이 그에게 법적 구제 방법을 폐쇄하고 사법을 최고의 대변인인 영주에 이르기까지 공공연하게 불법의 편에 가담시킨 후에 자신에게 가해진 모욕 때문에 끝없이 비통한 감정으로 가득 차 “인간으로서 짓밟히기보다 차라리 개가 되겠다”고 말하고, 이어서 “내게서 법률의 보호를 거부하는 자는 나를 황야의 야만인들에게 내쫓는 자이며, 스스로를 보호할 몽둥이를 내 손에 쥐어주는 자다”라면서 결심을 굳게 다졌다. 그는 부패한 재판관의 손에서 더렵혀진 칼을 빼앗은 다음 그것을 휘둘러 온 나라를 공포와 경악에 떨게 했고, 부패한 국가 제도를 무너뜨렸으며, 왕위에 있는 군주로 하여금 전율하게 했다. 그러나 그를 격분시킨 것은 거친 복수의 감정이 아니다. 그는 “하늘과 땅과 바다로 하여금 이리 떼들과 맞서게 하기 위해 온 천지에 폭동의 나팔을 불고 싶다”면서 침해된 법 감정 때문에 전 인류를 향해 전쟁을 선언한 카를 무어와 같은 강도나 살인자가 아니다. 그를 움직인 것은 바로 윤리적인 이념, 즉 “자기가 받은 침해를 배상받고 장래의 침해로부터 동포를 지키기 위해 모든 힘을 바쳐야 할 의무를 이 세상에 지고 있다”는 이념이다. 그는 이 이념을 위해 모든 것, 즉 가족의 행복과 명예와 재산과 신체와 생명을 희생한다. 그리고 아무런 목표도 없이 파괴적으로 싸우지 않고, 오직 죄과가 있는 자와 그의 동조자만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권리를 회복할 만한 전망이 보일 때는 자진하여 무기를 버렸다. (...) 사람들은 흔히 “순교자가 흘린 피는 헛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말은 미하엘 콜하스의 경우에는 진실하다고 판명되었다. 또한 경고성을 띤 그의 모습은 그가 받았던 이러한 권리의 억압을 불가능하게 하기 위해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남아 작용했다. (루돌프 폰 예링, <권리를 위한 투쟁>)


이런 구절을 읽었는데 어찌 <미하엘 콜하스>가 궁금해지지 않겠는가. 그래서 읽게 된 <미하엘 콜하스>는 첫 장부터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클라이스트의 고풍스러우면서도 힘찬 문체가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100쪽을 조금 넘는 분량으로 중편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 <미하엘 콜하스>는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단순하다. 16세기 중엽 작센의 한 마을에 사는 미하엘 콜하스라는 말장수가 어느 날 부당하게 지주귀족 계급인 융커에게 보기 좋게 살찐 말 두 마리를 빼앗긴다. 콜하스는 융커의 횡포에 맞서 법원에 탄원함으로써 이를 바로잡으려 하지만 세도가인 융커는 이미 곳곳에 손을 써둔 상태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과정에서 아내마저 목숨을 잃자 크게 절망한 그는 더 이상 법의 힘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정의를 세우고 자신의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고자 폭도가 되어 무리를 이끌고 융커의 성으로 향한다. 콜하스는 과연 그의 뜻대로 융커를 법의 심판을 받게 하고, 빼앗긴 말을 되찾을 수 있을까.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사이사이에 일어나는 여러 크고 작은 사건들이 반전처럼 얽히고설켜서 무척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융커를 비롯한 지배계급의 암묵적인 연합과 그에 따른 온갖 만행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분노가 끓어올라, 스스로 복수를 꿈꾸며 봉기에 나선 미하엘 콜하스가 승리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훈장의 아들로 태어나 누구보다 올곧았던 사람, 서른 살까지만 해도 선량한 백성의 귀감으로 삼을 만했던 사람, 이웃 가운데 운 나쁘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이가 없었을 정도로 모범적이고 정의롭던 미하엘 콜하스는 ‘정의감이 지나쳐’ 도적이자 살인자가 된다. 그러나 그를 이렇게 벼랑으로 내몬 것은 그의 불타는 정의감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법체계, 뒤틀린 사회 구조에 있음을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도 남을 것이다.

콜하스는 단지 말 두 마리가 아까워서 소송을 시작한 게 아니었다. 그의 말처럼 ‘개 두 마리였다 할지라도 똑같이 괴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법이 정의를 위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는 ‘세상을 살면서 잘 담금질된’ 그의 영혼을 파괴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그는 ‘착실한 가장으로서 집안을 이끄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목적’을 찾아 분연히 일어섰다. ‘내 권리를 지켜주려 하지 않는 나라에 머무르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에 재산을 처분하고 자기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스스로 폭도가 된다. 때문에 그가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곳곳에 붙인 격문에는 “더 나은 세상 질서를 세우기 위한 자신의 투쟁에 합세”하라는 구절과 함께 자신을 “하느님께만 순종할 뿐 제국과 세계에서 해방된 자유인”이라고 일컬은 문장이 포함된 것이다.

한편 이 작품은 철저히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그리스도교의 문제점을 폭로하기도 한다. 콜하스를 지지하는 백성들이 많아지자 거침업이 타오르는 불길을 막고자 콜하스를 설득하기 위해 목사인 마르틴 루터가 나선다. 그런데 그는 철저히 지배계급이자 권력을 가진 자의 편이다. 루터는 ‘하나님’ 운운하며 세상에서 얻은 지위와 권위로 콜하스를 타일러 그를 ‘인간 사회질서의 틀 안’으로 다시 끌어들이고자 한다. 이런 루터의 말을 듣노라면 독자는 또 한 번 분노하게 된다. 루터는 콜하스를 ‘눈먼 격정에 미친 듯 사로잡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불의에 흠뻑 물들었다’ 말하며 그가 ‘거짓과 간악함에 가득 찬 주장으로 사람들을 기만’하며 그가 휘두르는 칼은 도적질과 살인의 칼이라고 말한다. 또한 콜하스는 ‘역적에 지나지 않을 뿐, 정의로운 하느님의 전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에게 ‘하느님을 생각해서라도 융커를 용서하고 여위고 들피진 말이라도 돌려받는 게 낫지 않느냐’면서 ‘그 말에 올라타고 콜하젠브뤼크로 돌아와 마구간에서 살찌우는 게 더 좋지 않겠느냐’고 회유한다. 애초부터 루터는 콜하스가 하찮은 재산 소송 때문에 봉기했다고 인식하는 처지이니, 그가 정의를 위해 칼을 들었음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콜하스를 설득하는 루터의 말을 듣다 보면 어떤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수긍이 가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구절 말이다. “융커 폰 트롱카를 네 멋대로 판결하여 습격할 권리를 누가 너에게 주었느냐? 융커를 성에서 찾지 못했다고, 융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사회를 불과 칼로 송두리째 징벌할 권한을 누가 너에게 주었느냐?” 이 문장을 읽을 때는 한 영화가 떠오르기도 했다. 유괴범을 납치해 피해자들이 스스로 복수하는 <친절한 금자씨>의 한 장면. 피해자의 유족들은 잔혹한 방법으로 유괴범에게 복수한다. 비단 영화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잔혹한 범죄가 일어나고, 그 판결이 범죄에 비해 지나치게 가볍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사법부가 송두리째 썩었다면서 분노한다. 날이 갈수록 사법권에 대한 불신이 깊어가고 있다. 심지어 오늘은 판결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대법원장 차량에 화염병을 투척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모두가 이렇게 하나같이 법을 믿지 못하고, 판결에 불만을 품고 스스로 칼과 불을 들고 일어선다면 사회가 아수라장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럼에도 <미하엘 콜하스>의 경우에는 독자들이 그의 분노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다. 그가 ‘판결’에 불만을 품고, 법집행을 따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애초에 융커와 똑같이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기본 ‘권리’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때문에 콜하스는 자신을 ‘인간 사회에서 추방당했’다고 인식한다. 만일 그가 ‘인간 사회에서 추방당한 게 아니라면, 자신이 지금 인간 사회와 벌이고 있는 전쟁은 악행’이라고 말한다. 이에 루터는 그런 콜하스의 생각은 터무니없는 망상이라며, ‘국가가 존재하는데, 누가 무엇을 하든 국가에서 추방되는 일이 어디 있단 말이냐?’고 되묻는다. 이때 콜하스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마디를 루터에게 던진다. 아마도 이 작품의 핵심 문장이 아닐까(이 문장은 예링의 <권리를 위한 투쟁>에서도 인용되었다).



제가 말하는 추방당한 자란, 콜하스는 종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했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자를 뜻합니다! 저는 그 보호를 받아야만 평화롭게 사업을 번창시킬 수 있습니다. 그 보호를 믿었기에 모은 재산을 다 들고 이 사회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런 보호를 해주지 않는 것은 저를 황야의 야수들에게 쫓아내는 것입니다. 저 자신을 지키라고 제 손에 몽둥이를 쥐어주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미하엘 콜하스>, 56쪽)


너무나도 정의로운 미하엘 콜하스. 자신의 권리를 되찾고자 분연히 일어선 그는 무척 많은 것을 잃는다. 소중한 아내도 잃고 행복했던 그 소박한 삶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가 없다. 그는 애초에 눈 한번 질끈 감고 세상은 어차피 그런 것이라면서 쓰린 속을 아내와 달래면서 소시민으로 평범하게 살았어야 했을까? 그렇다면 정말로 말 두 마리를 잃어버린 것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콜하스는 이 작품의 화자가 말하듯이 ‘자신의 손으로 부당함을 바로잡기 위해 성급히 나섰기’ 때문에 파멸로 치닫는다. 그가 권리를 잃고도 아무렇지 않았다면, 세상은 원래 그렇다고 체념하고 말았다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일어섰다. 오직 정의 때문에. 그리고 그 정의는 자기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눈 감으면 귀족들은 계속 다른 백성들에게도 그럴 것이었기에…. 이 점에서 미하엘 콜하스의 위대함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세상에는 미미하더라도 언제나 이런 콜하스들이 존재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권리를 위한 투쟁>과 <미하엘 콜하스>는 이렇게 인간의 정의와 권리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를 마련해준다. 고전의 힘, 문학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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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8-11-27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교 1학년때 전공 교양과목에서 <권리를 위한 투쟁>을 처음 알게 되었네요. 간만에 이 책 제목을 보니 반가운데... 옮겨주신 글을 읽어보니 기억이 1도 안납니다. ㅎㅎㅎㅎ;;;;;;
영화를 보고 저도 원작을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여짓껏 못 읽었는데 더 늦기 전에 도전해봐야겠어요! ^^

잠자냥 2018-11-27 17:05   좋아요 0 | URL
아휴~ 대학교 1학년 때 읽은 구절(그것도 전공 교양과목으로 알게 된 책 구절을)을 어떻게 기억해요. ㅎㅎ 전 그 시절 읽은 책을 기억하는 것조차 어려운걸요. ㅎㅎㅎㅎ
저는 영화는 아직 보지 못했는데, 이제 영화를 한 번 봐야겠습니다.
그나저나 설해목 님 바뀐 프로필 사진 속 책들이 어마어마합니다!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문지 스펙트럼
오에 겐자부로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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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관련하여 이달에 들려온 소식 중 ‘문지스펙트럼’이 새 옷을 입고 다시 선보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가장 반가웠다. 오래전부터 이 시리즈를 무척 좋아했다. 작고 가벼운 판형에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 그러면서도 목록을 보면 읽을 만한 작품이 무척 많은, 알찬 시리즈라고나 할까. 작품 목록이 문학에만 한정되었던 것도 아니어서 더 좋았다. 예를 들면 <록 음악의 아홉 가지 갈래들> 또는 <재즈를 찾아서> 같은 책들이 있던 이 시리즈. 이번에 새로운 모습으로 몇 권 먼저 나왔는데, 그중 단연코 눈에 띈 책은 오에 겐자부로의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이다. 이 작품은 원래 문지스펙트럼 시리즈에 속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이렇게 이 시리즈로, 예쁘게 옷을 갈아입고 나왔으니 어찌 궁금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오에 겐자부로인데 말이다.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라는 제목만 봤을 때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처음에 나는 제목만 보고는 오에의 ‘기묘한 아르바이트’라는 단편을 떠올렸다. 이 작품은 개를 도살하는 아르바이트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도 뭐랄까 싹을 뽑거나 짐승을 쏘아 죽이는 아르바이트에 관한 내용인가?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 어쨌든 이 제목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 꽤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책을 받아들고 몇 장 넘기니, 예상과는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이들이 나온다. 이제 막 10대에 접어들었거나 한참 눈부시게 그 시절을 누릴 열여섯 열일곱 즈음의 소년들. 그런데 이 아이들은 그 아름다운 청춘을 박탈당한 것 같다. 소년들의 인솔자도, 아이들이 인솔자에 이끌려 도착한 어느 마을에서도 그들을 바라보는 눈길이 곱지 않다. 경멸과 조롱, 혐오 가득한 눈길이랄까. 알고 보니 이 아이들은 모두 감화원 출신이다.

가족에게까지 버림받다시피 한 그들은 산골 외진마을에 떠맡겨진다. 이곳에서 보호감찰을 받으며 ‘노동’을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형편없는 음식과 잠자리, 마을 사람들의 냉대 속에 그들에게 첫 번째 일이 주어진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일하러 가는 길에 죽은 고양이나 개와 같은 동물 사체가 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별일 아니겠거니 생각하며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 앞에서 당혹해한다. 그곳에는 개와 고양이는 물론 토끼, 소, 돼지 등 죽은 동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이 마을 대장장이는 아이들에게 그걸 몽땅 파묻으라고 한다. 절대 손으로 만지지 말라는 말과 함께. 아이들은 영리했다. 곧 사태를 파악한다. 전염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염병으로 사람까지 죽어나가기 시작하자 마을 사람들은 소년들에게 어떤 정보도 주지 않은 채, 전염병을 피해 마을을 봉쇄한 채, 그들끼리만 야반도주 한다.

그들을 늘 감시하고, 윽박지르고, 폭력을 쓰던 어른들이 사라졌다! 마을은 이제 아이들만의 세상이다. 해방감을 느낄 만도 한데, 소년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왜 아니겠는가. 전염병이 도는 마을에 그들만 남겨진, 아니 버려졌는데 말이다. 마을을 벗어나 달아날 궁리도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 아이들을 도망치지 못하게 저 멀리에 총을 든 감시자를 남겨둔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천덕꾸러기였기 때문에 생명력도 강한 소년들은 이내 절망이나 당혹감에서 벗어나 자기들만의 삶의 터전을 꾸린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어른들이 사라진 마을은 오히려 평화롭다. 폭력이 사라지고, 돌봄과 배려, 믿음을 바탕으로 우정과 애정이 자연스럽게 소년들 사이에서 싹튼다. 아이들은 채소죽을 만들어 나눠먹고, 새 사냥에 나서기도 하며, 포획한 새들을 함께 구워먹으면서 축제를 벌이기도 한다. 눈이 내리는 날에는 스케이트장을 만들어 그들만의 왕국에서 아이들답게 즐거이 놀 줄도 안다. 그리고 이곳에서 생애 첫사랑을 만나기도 한다. 이런 장면들을 읽다 보면 이 아이들이 어른들이 떠난 이 마을에서 자기들만의 순수한 왕국을 만들고, 누구 하나 전염병에 걸리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기를 나도 모르게 바라게 된다. 그 바람은 과연 이루어질까.

작품을 읽어나가다 보면 소년들 가운데 감화원에 갈 정도로 죄질이 나쁜 아이는 없음을 알게 된다.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를 비롯해 그의 동생은 말할 것도 없고, ‘미나미’ 또한 그렇다. 그들 대부분은 ‘대수롭잖은 악행을 저지’르거나 ‘그중에 비행소년이 될 경향을 지녔다고 판정되었을 뿐’이다. 전쟁 뒤 ‘거리에서 미치광이 어른들이 광분하고 있던 그 시대’에, ‘온몸의 피부가 매끌매끌하고 밤색으로 빛나는 솜털밖에 없는’ 이들은 오히려 때 묻지 않은 순수함마저 느껴진다. 아무리 감화원 출신 아이들이라고는 하지만 전염병이 돈다는 사실조차 감춘 채 자신들만의 안위를 생각하면서 야반도주해버린 어른들이 더 끔찍하고 ‘감화’해야 할 대상은 아닐까? 어른들의 비열함과 만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을 읽을 이들을 위해 그 내용을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그들의 온갖 만행을 지켜보노라면 분노에 치를 떨게 되고 이 소년들이, ‘나’가 끝까지 그들에게 지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라게 된다. ‘새싹’이 절대 뽑히지 않기를, 어른들이 쏘는 무자비한 화살에 이 ‘어린 짐승’들이 부디 한 사람도 상처입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외딴 마을에 아이들만 남겨졌다는 점에서 얼핏 이 작품은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파리대왕>이 그랬듯이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또한 많은 것을 시사한다. 어른과 아이의 대립만이 아니라 안과 밖, 약자와 강자, 갇힌 자와 감시하는 자, 순수와 기만, 부당한 권력에 대한 비판과 저항 등 읽는 내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흥미진진하다. 소년들이 어디론가 떠나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마을의 비밀이 벗겨지는 장면까지는 미스터리를 읽는 듯하다가, 소년들만 남겨진 뒤에 그려지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한편의 성장 소설과도 같다. 그리고 그 뒤에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오에 겐자부로 특유의 사회비판 소설을 읽는 것 같아, 완벽한 독서의 즐거움을 전한다. 오에 겐자부로가 스물세 살에 발표한 첫 장편이자, 그 자신이 가장 ‘행복한 작품’이었다고 밝히는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나 또한 그의 작품 중, 이 책을 가장 좋아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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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8-11-23 15: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시리즈 좋아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새로 옷을 갈아입고 나온 걸 보니 더 마음에 드는 시리즈로 자리매김했네요. ^^
현대문학 단편선에서 읽은 오에의 초기 작품들은 정말 마음에 쏙 들었는데.. 저 작품도 읽어보고 싶네요.~

잠자냥 2018-11-23 16:05   좋아요 0 | URL
네 새로 나온 시리즈도 요즘 같은 날씨에 코트 주머니에 쏙 넣고 다니기 좋더라고요! 표지는 더 예뻐진 것 같고요. ㅎㅎ 이 작품 정말 재미나요. 꼭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