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모잠비크 꼬마에게서 편지가 왔다. 아이는 아직 글을 몰라서 자신의 조그마한 손을 그려 보냈다. 그 자그마한 손그림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흐뭇하면서도 묘한 감동에 차올랐다. 작년에 받아본 사진에서는 아기 티가 나는 정말 어린 꼬마였는데 어제 새로 받은 사진에서는 조금 자란, 소녀 티가 나기 시작한 어린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번에 새로 받은 사진은 냉장고에 붙여놨다. 모잠비크에 사는 내 딸. '만주아마오.' 잘 자라거라!

이영학 사건('어금니 아빠'라고 부르지만 나는 왠지 이 말을 쓰기 싫다)- 이 사건이 이 사회에 던져준(또는 줄) 폐해는 심각할 것 같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안그래도 척박한 이 땅의 기부문화를 단번에 꽁꽁 얼어붙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가 사람들의 선의를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유용한 정황은 곳곳에서 엿보인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믿고 기부할 곳이 없다며 '기부' 자체에 회의를 품고 그런 모든 단체를 의심하는 형국이다. 사실 그럴 만도 하다. 이영학 사건 이전에도 국내 기부 단체에서 모금한 돈을 유용했던 전례가 실제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내가 기부한 돈이 다른 곳에 쓰일까 봐 기부 행위 자체를 아예 하지 말아야 할까? 좀더 꼼꼼히 알아보고 현명하게 기부할 방법은 없을까?

나 또한 오래 전에 이런 고민을 하다가 국내가 아닌 해외에 본부를 둔, 비종교적인 어떤 단체를 선택했다. 게다가 직접 한 아이에게 후원을 하는 형식을 선택해 좀더 책임감을 갖고 꾸준히, 정기적으로 기부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렇게 해서 이른바 제3세계에 사는 여자 어린이를 중심으로 1:1 후원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한 소녀에서 그 다음 또 다른 한 소녀. 이렇게 조금씩 넓혀나갔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그러다 내가 백수로 꽤 오랜 기간 지내면서 경제적으로 쪼들리기 시작했을 때 정기적 후원이 조금 버거워졌다. 몇 달을 고민하다가 도저히 어쩔 수가 없어서 후원을 잠시 중단해도 되겠느냐며 문의를 했다. 경제 사정이 조금 나아지면 다시, 꼭 다시 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그때 기분은 좀 처참했다. 그때 정기적으로 후원하던 아이들 얼굴이 떠올라 영 착잡했다. 이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백수를 벗어나고 사정이 나아지면서 후원을 다시 시작하며 만난 인연이 바로 어제 편지를 받은 모잠비크 소녀이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은 이 한 권의 책에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이제는 너무나도 유명해져서 설명이 필요없어진 책. 아주 오래 전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울었다. 감동적이라거나 슬퍼서가 아니라 마음이 아프고 한없는 무력감이 느껴져서 울었다고 하는 표현이 맞겠다. 책을 덮고나서도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무력감만이 느껴졌다. 어떤 책에서 사회 구성원이 심하게 무력감을 느끼는 사회는 이미 존재의 이유를 상실한 사회라고 했던 구절이 생각났다. 정말 어쩌면 이 지구는 우주상에서 존재의 이유를 상실한지 이미 오래된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들었다.

배고픔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그게 대부분 저 멀리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어린이들이라는 것쯤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가끔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봤을지도 모른다. "식품이 남아 돌아서, 썩어 버린다는데, 그걸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에 보내주면 되는 거 아닐까? 그런데도 왜 저렇게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은 것일까?" 이런 생각들. 나 역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책을 읽어보면 그게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지 알 수 있다. 그렇게 모든 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속담'이 지금 세계의 절반 인구가 굶어죽는 현실, 그것도 어린이나 여성과 같이 약한 존재들이 더욱 그런 이 현실에 딱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대국이나 다국적 기업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굶어죽는 사람들은 생각도 하지 않고(그들에게 굶어 죽는 아이들은 유엔에서나 신경 쓸 문제라고 치부된다.) 종족, 종교 갈등 등 권력을 잡기 위한 수많은 내전, 전쟁, 사막화를 불러일으키는 환경파괴 등 약한 사람들이 굶어죽게 만드는 원인은 결국 '강자'들이 계속해서 만들어 내고 있는데, 그들은 자기들의 배를 채우는데만 급급해서 그런 현실은 계속 외면한다. 더욱이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에서 조금 똑똑한 지도자가 나와 그들 나라의 자주권, 독립권을 외치며 개혁을 실시하려고 하면 미국이나 다국적 기업 등이 경제적 압박을 가하거나 암살 등을 통해 그런 씨앗 자체를 뿌리채 뽑아버린다. 계속해서 그러니 세계는 점점 몇몇 강대국의 손에 놀아나는, 그들의 배만 채우는 그런 구조가 고착화 된다. '신 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이 책을 읽을 무렵, 이미 한 아이를 후원하던 참이었다. Niger의 소녀였다. 굶어 죽는 아이들을 도울 길을 생각하다 그 방법을 실천하게 되면서 알게 된 첫 번째 아이다. 후원을 약속한 사람은 지역과 아이 성별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곰곰이 생각하다가 지역은 상관없이 '여자 아이'를 원한다고 체크했던 기억이 난다. 이 세상은 여자 아이들이 살아남기에 더(특히나 그런 지역에서는) 힘든 곳이니까. 그리하여 내가 처음으로 만난 아이가 그 아이였다. 그애의 편지와 사진이 배달되어 왔고 그 편지를 통해 그애가 사는 나라가 Niger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지구상에 그런 나라가 있는지 몰랐다. 나이지리아를 잘못 표기한 것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찾아보니 그런 나라가 있더라.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그 나라는 세계 최하위 빈국으로 영유아 사망률이 세계 2위인 그런 나라였다.

이 책을 읽다보니, 내가 CD 한 장, 책 한 권 또는 장난감 하나 한 달에 한 개 정도 덜 사는 돈이면 아프리카의 어떤 한 아이가 한 달 동안 먹고 배우고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별 생각없이 돈을 보냈는데, 나에겐 그냥 책 한 권 안 사면 그만인 그 돈이 그 아이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또 마음 한구석이 싸해져 왔다. 어쩌면 이렇게도 세상은 불공평할까? 이런 생각들.

내가 보낸 돈으로 학교를 갈 수도 있구나, 관념적으로 생각했지만 그 아이들에게 배움은 어쩌면 정말 사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배고픔 그 자체, 생존 그 자체와 싸우기. 그 하나만으로도 벅찬 삶이구나 싶고. 학교에서 배운다 한들 정말 자기 꿈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는 것도 드물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정말 벅찬 그런 곳에서 '배운'다는 것이 과연 얼마나 중요할까 그런 회의감도 들고. 어떤 한 아이를 몇 년 동안 후원해서 학교를 보내기보다는 더 많은 아이들의 '배고픔' 자체를 해결해주는 게 더 좋은 일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이 책은 참 쉽다. 지은이가 자기 아들에게 이야기해주는 방식으로 책을 썼기 때문에 '문제' 자체가 골치 아픈 문제이긴 하지만 읽는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그 '문제'들을 직면할 수 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계속 굶주려야만 하는지, 그리고 정말 희망은 없는 것인지. 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일찍이 정희진 선생님은 '안다는 것은 상처 받는 일'이라 했고, 이 책을 읽으면 갑갑한 현실에 나처럼 잠시 무기력해질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더욱이 이영학 사건으로 기부자체에 회의감을 갖는 '기부 포비아' 현상까지 일고 있는 요즈음, 이런 책들을 읽음으로써 '기부 포비아'라는 말이 어쩌면 이 세계의 어두운 현실을 외면하는 쉬운 변명은 아닐까, 생각하는 계기도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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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0-17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영학 사건 터지기 전에 결손아동을 위한 기부금으로 호의호식한 국내 단체가 적발된 적이 있어요. 분명히 언젠가 이런 유사한 사건이 또 일어날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기부단체들의 기부금 관리 방식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좋겠습니다.

잠자냥 2017-10-17 13:37   좋아요 0 | URL
그런 일도 있었군요... 정치인들이 과연 기부금 관리 방식 개선에 나설지 의문이지만 ㅎㅎ 제도적으로 투명한 관리를 제어하는 기능은 꼭 마련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주순애 옮김 / 이숲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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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날마다 축제>는 헤밍웨이의 에세이집으로 그가 젊은 시절 파리에서 머물던 몇 년 동안의 기록이 담겨있다. 헤밍웨이는 1921년부터 26년까지 파리에 거주하면서 글쓰기에 몰두했다. 당시 그는 젊지만 가난했고 미래는 어쨌든 불투명했다. 헤밍웨이는 자기 글에 대한 확신은 있었을지 몰라도 자신이 훗날 그렇게까지 유명한 작가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에는 헤밍웨이가 머물던 파리 곳곳의 아름다운 풍경과 제임스 조이스, 에즈라 파운드, 거트루드 스타인, 피츠제럴드 등 그가 그곳에서 만난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경마에 대한 그의 집착은 물론 그의 첫 번째 아내 해들리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존과의 일상도 생생하게 그려진다. 헤밍웨이의 어린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갖가지 사진도 실려 있는데 이런 사진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감동받은 것은 헤밍웨이가 글을 쓰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자기 자신을 다독였는지, 그리고 꾸준히 치열하게 글을 쓰며 하루를 보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헤밍웨이를 인간적으로 크게 좋아할 수는 없지만 그의 글에 대한 태도만큼은 존경스럽다. 마음에 드는 글을 쓴 후에는 자기 자신에게 맛있는 빵과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상으로 주는 모습에서는 슬며시 웃음도 난다.

헤밍웨이는 매일 카페에서 글을 쓰고 그 후에는 그 글에 대해 잊기 위해 열심히 다른 책들을 읽었다. 쓰고 읽고 걷고 보고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고 사랑하고…. 파리에서 그가 보낸 시절을 요약한다면 이런 단어들로 정리할 수 있으리라. 비록 항상 허기를 느낄 만큼 가난했지만 이 에세이 속에서 헤밍웨이와 그의 첫 아내 해들리는 무척 행복해 보인다. 사람이 살려면 이렇게 살아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비록 돈에 쪼들리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자유롭게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그런 삶.

이 책을 읽다 보면 헤밍웨이뿐만 아니라 당시 파리에서 머물던 예술가들의 삶을 엿보는 기회도 주어진다. 비록 헤밍웨이의 시점으로만 바라본 그들의 삶이라 ‘공정하고 객관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 나름대로 재미있다. 또한 헤밍웨이가 읽은 책과 그 책을 쓴 작가들에 대한 그의 생각도 엿볼 수 있는데, 캐서린 맨스필드에 대한 헤밍웨이의 평가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크게 웃고 말았다. 나는 맨스필드 단편의 읽으면서 좋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왜 그녀의 단편이 그토록 높게 평가받는지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었는데, 그녀에 대한 헤밍웨이의 평을 읽으면서 묘하게 동질감이 느껴졌다. 



우리가 파리로 오기 전 토론토에서 나는 캐서린 맨스필드가 대단히 훌륭한 단편소설 작가라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실력을 갖춘 노련한 외과의처럼 간결하고 명쾌하게 글을 쓰는 체호프와 비교하면 그녀는 억지로 머리를 짜내 이야기를 꾸며 내는 겉늙은 여류 작가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 맨스필드는 알코올을 뺀 맥주와 같았기에 차라리 맹물을 마시는 편이 나았다. 반면에 체호프는 투명하다는 점만 빼면 물과는 전혀 달랐다. 그의 작품 중에는 언론 기사문 같은 글도 더러 있었지만, 놀랄 만큼 뛰어난 작품도 여럿 있었다. (128쪽)


피츠제럴드와 그의 아내 젤다에 관한 에피소드도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헤밍웨이가 기록한 피츠제럴드나 젤다에 관한 에피소드를 통해 보자면 이 부부는 상대하기 참 난감한 사람들 같다. 만약 내 주변에 피츠제럴드나 젤다 같은 사람이 있다면 난 그들을 친구로 곁에 두지는 않으리라. 그들은 항상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징징대고 칭얼대는 느낌이랄까. 피츠제럴드와 젤다가 함께 하면서 서로를 갉아먹은 이야기는 피츠제럴드의 소설 <밤은 부드러워>의 소재가 되기도 했는데 나는 이 작품도 읽는 내내 지루했다. 헤밍웨이가 유일하게 극찬한 피츠제럴드 작품이라는데 어쩐지 우정 때문에 마지못해 치켜세워줬던 건 아닐까 싶기도.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헤밍웨이는 작가적으로 자기보다는 일찌감치 인정받고 성공해있던 피츠제럴드를 부러워하기도 하고 조금은 시기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한 사람(헤밍웨이)은 상당히 마초적인 남자이고 한 사람(피츠제럴드)은 여성적이고 유약한 사람이니 이 두 사람이 친구로 함께 지내기란 애당초 좀 힘들어 보이기도 한다.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의 이런 징징대는(?) 성격을 못 견뎌한 것 같고, 어떤 면에서는 그런 징징대는 모습을 비아냥대기도 했다. 헤밍웨이 자신은 절대 그런 의도로 쓴 게 아니라고 우길지도 모르겠으나 ‘젤다의 고민’이라는 에피소드는 결정적으로 그런 의혹을 더욱 크게 한다.



자넨 내가 젤다 외에 다른 어떤 여자와도 성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잖나.”
“아니, 난 몰랐는걸.”
“내가 전에 얘기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닐세, 자넨 내게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네.”
“내가 자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바로 그 문제야.”
“좋아, 뭔지는 모르지만 말해봐.”
“젤다는 내가 신체 구조상 어떤 여자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면서 그게 바로 그녀가 근본적으로 내게 불만을 느끼는 이유라고 하더군. 그녀는 그게 크기의 문제라고 하더라고. 그 말을 들은 뒤로는 결코 예전처럼 느낄 수가 없어서 난 진실을 꼭 알아야겠어.” (207쪽)


그렇다! ‘젤다의 고민’이란 바로 피츠제럴드의 성기가 작다는 것이다! 피츠제럴드는 이 때문에 고민이라며 헤밍웨이에게 상담을 해오고 헤밍웨이는 화장실까지 따라가서 피츠제럴드의 ‘그것’을 직접 보고는 결코 작지 않다고 다독여준다. 그래도 불안해하는 피츠제럴드를 위해 루브르 박물관의 조각상들 크기는 다 그렇다며 안심시켜 주지만 피츠제럴드는 여전히 못미더워하고 그런 그를 결국 루브르 박물관까지 끌고 간다. 그렇게 해서 계속 피츠제럴드를 안심시켜 주지만…. 결국 이 에피소드를 통해 헤밍웨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피츠제럴드의 그것은 작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라는 게 아닐까?

헤밍웨이가 평생 자신의 남성성을 입증해보이려고 안간힘을 쓴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저 이 이야기도 한 번 웃고 넘어갔을 테지만, 글쎄….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의 남성스럽지 못한 면모(여자처럼 늘 징징대더니 알고 보니 ‘그것’도 작은 인간!)를 들춰냄으로써 교묘하게 깎아내리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어쩐지 헤밍웨이도 참 치졸하게 느껴지고, 이런 이야기를 이토록 여과 없이 만천하에 공개해도 되는 걸까 싶기도 하다. 자기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온전히 자신만의 이야기는 아니지 않은가?

이 책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해들리와 파리에서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나날을 보냈어도 결국 다른 여자에게 빠져버리는 헤밍웨이의 모습도 만날 수 있다. 헤밍웨이는 담담하고 고통스럽지만 무척이나 낭만적이게 그때의 일을 회고한다. 그러나 글쎄, 결국 아내를 곁에 두고 아내 모르게 다른 여자와 놀아난 이야기일 뿐이다(문제의 이 여자는 헤밍웨이의 두 번째 부인이 된다). 이 에피소드를 읽으면 글 잘 쓰는 사람은 자기변명도 참 멋지게 하는구나 싶어서 씁쓸해지기도 한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읽은 소감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파리는 아름답고 인간들은 찌질하달까? 그러나 결국 그 ‘파리’를 멋들어지고 생동감 있게 하는 요소 중에 이런 찌질한 인간들을 빼놓을 수 없으니 인생은 참 오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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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0-16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도 그렇고 예술가들도 모여서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면 찌질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카페에 모인 인상파 화가들이 그랬습니다. ^^

잠자냥 2017-10-16 14:05   좋아요 0 | URL
ㅎㅎ 어디 작가와 예술가만 그렇겠습니까. ㅎㅎ 인간이 모두 그렇지요. ㅎㅎㅎ

케이 2017-10-17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밍웨이가 남성성에 집착하고 여러번 언급한 것이야말로 그가 여자들에게 시원찮다는 증거라는 글을 어디선가 봤는데,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헤밍웨이는 인간적으론 정말 정안가는 인물이예요..; 10년 전에 읽은거라 잘 기억은 안나지만, 밀란쿤데라가 소설 ‘불멸‘에서 헤밍웨이를 대놓고 비꼬는데, 그 부분 읽고 굉장히 통쾌했던 기억이 납니다. ㅋㅋ

잠자냥 2017-10-17 11:56   좋아요 1 | URL
ㅎㅎ 사냥이나 복싱 같은 스포츠에 집착한 것도 그렇고.... 심리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재미난 사람일 거 같아요. 그의 마초성 때문에 저도 헤밍웨이는 그닥 좋아할 수 없는 인간이었는데, 최근에 읽은 어떤 책에서 의외로 괜찮은 면을 발견했답니다. 그 이야기는 곧 다른 리뷰에서... ^^
 
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추석 연휴에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는데, 또 다른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노벨문학상을 가즈오 이시구로가 받았다는 메세지였다. 소식을 듣고 조금 뜻밖이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 소식을 전한 친구나 나나, 실은 마음속으로는 마거릿 애트우드가 받기를 바랐고, 하루키는 절대 받지를 않길 바랐다. 그리고 둘 다 가즈오 이시구로 작품은 예전부터 좋아했던 터였다. 그래서 우리 둘 모두 나쁘지 않은 소식이라고 생각했다.


그 소식을 듣고 또 하나 떠오른 것은 민음사가 이번에 입 좀 찢어지겠네 하는 생각이었다. 민음사는 모던클래식 시리즈로 일찍부터 가즈오 이시구로 작품을 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리즈를 통해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 중 가장 처음으로 <나를 보내지 마>를 읽었고 그 다음에는 <녹턴>을 읽었다. 두 작품 모두 괜찮았기에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남아 있는 나날>을 세 번째로 읽은 기억이 난다. '기억이 난다'라고 말하는 까닭은 사실 이 작품들을 읽은 지 꽤 되었기 때문이다. 다 읽고 난 뒤, 나는 이 작품을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 일에 반기를 들고 싶어졌다. 그 뒤로 그의 다른 작품들도 읽었는데 가즈오 이시구로 작품은 편차가 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작품은 꽤 좋지만(<나를 보내지 마>), 어떤 작품은 썩 좋지 않고(<위로 받지 못한 사람들>, <우리가 고아였을 때>), 또 어떤 작품은 과대평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과대평가 된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이 <남아 있는 나날>이다.  


<남아 있는 나날>은 이런 종류의 소설을 영화화하는데 탁월한 재주를 가진 제임스 아이보리의 동명 영화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나는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그 영화에서 주인공 ‘스티븐스’ 역을 맡은 안소니 홉킨스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스티븐스’는 집사다. 영국에서는 누구나 알아주는 귀족집안 달링턴가의 충실한 심복이자 집사이며 그는 그러한 자신의 위치에 크나큰 자부심을 지녔다. 그러나 그 달링턴가도 어느덧 쇠망하고 미국인 갑부인 페러데이에게 달링턴 홀과 스티븐스는 넘겨졌다. 페러데이는 한 번도 달링턴 홀을 떠난 적이 없는 스티븐스에게 잠깐 동안의 여행을 권유한다. 고심 끝에 스티븐스는 일주일간의 여행을 떠나고 그 여행길에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그 회고 속에 1920~30년대의 유럽 사회와 달링턴 홀, 그리고 스티븐스의 과거가 잔잔하게 교차하며 이야기는 흐른다.
 
언젠가 로베르트 발저의 <벤야벤타 하인학교>를 읽으며 ‘하인’을 양성하는 학교라는 소재도 그렇지만 스스로 ‘하인’이 되겠다고 학교를 찾은 주인공 보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남아 있는 나날>의 집사 ‘스티븐스’를 보고 있노라면 어떤 면에서는 <벤야멘타 하인학교> 속의 인물을 만났을 때의 당혹감이 느껴진다. 오히려 당혹감은 더 크다고 할까? 어쩔 수 없이 ‘계급적’ 위치 때문에 ‘집사’라는 직업을 가질 수는 있을지언정, 과연 인간이 그런 자신에게 자부심을 느낄 수가 있을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물론 스티븐스는 자신의 의무를 그 어떤 순간에도 놓지 않았던 ‘프로페셔널’한 집사로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큰 듯하지만…. 글쎄 스티븐스의 삶을 지켜보는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어쩐지 그의 자부심은 오히려 끊임없는 ‘자기변명’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토록 ‘위대한 집사’로 살아가고자 아버지의 임종도 외면할 수밖에 없었고 사랑하는 사람도 놓칠 수밖에 없던 사람이라니! 얼마나 답답하고 한심한가! 그러면서도 ‘나는 집사로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고 그것은 최선이었다.’며 계속 되뇌는 모습은 끝끝내 비겁해 보일 뿐이다. 게다가 그토록 위대하게 우러러본 그의 주인 ‘달링턴 경’은 또 어떤 사람인가. 달링턴 경이 지시한 일이기 때문에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묵묵히’ 행동하는 스티븐스는 도저히 인간적으로 좋아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소설을 읽을 때는 어떤 한 사람이고 등장인물에게 몰입이 돼야 하는데 스티븐스는 이런 점에서 공감하기 어려운 주인공이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런 답답한 인물을 통해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가치’를 독자에게 전하고 싶었겠지만…. 그의 서정적인 문체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딱히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내가 주인공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닐까 싶다.
 
스티븐스는 여행에서의 회상을 통해 자기 인생의 어떤 부분은 많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겠지만 그가 ‘남아 있는 나날’에서 얼마나 크게 다른 삶을 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가 여전히 달링턴 홀에서 새로운 주인 ‘페러데이’를 위해 또 다른 봉사를 열심히 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잘못된 부분을 깨달았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까? 그것만으로도 스티븐스의 인생이 헛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기엔 그의 인생이 너무 많이 지나갔고 상대적으로 남아 있는 나날은 참 짧아 보인다. 조금 더 일찍 깨달았다면….

인생을 살면서 사람들은 적어도 한두 번쯤은 후회를 하기 마련이다. 그때 그랬다면 어땠을까? 내가 이렇게 살지 않고 그렇게 살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쓸데없는 가정, 혹은 후회. 무언가 일이 좀 잘 안 풀릴 때 인간은 특히 그렇다. 요즘의 내가 딱 그렇다. ‘잘 못 살아온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불쑥불쑥 자주 찾아온다. 스티븐스와는 정반대의 고민이다. 스티븐스처럼 오히려 ‘일’에 ‘프로페셔널’한 사람으로 살아왔다면 어땠을까 하는 그런 후회. 정답은 잘 모르겠지만 스티븐스와 비교하면 적어도 나는 그처럼 ‘허망한 일’, ‘허상’ 때문에 진짜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살지는 않았다는 위안은 든다. 순간순간 행복하고 즐거웠기 때문에 그 ‘순간’을 놓쳤다는 이유로 후회스럽지는 않다. 그런데도 왜 ‘잘 못 살아온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은 계속 드는 걸까. 내 ‘지나온 날’은 그런데 내 ‘남아 있는 나날’은 어떻게 살아야할까. 조금 더 일찍 깨달을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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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10-13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가지 오류를 집어내자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은 스티븐슨이 아니라 스티븐스
랍니다.

제임스 아이보리의 영화는 잘 만든 것 같습니다.

소설이 (조금) 과대평가된 것 같다는 부분에 공감합니다.
아무래도 맨부커상 수상의 광휘 때문이 아닐까요.

잠자냥 2017-10-13 11:50   좋아요 0 | URL
하하하. 감사합니다. 줄기차게도 스티븐*슨*이라고 해놨네요. ㅎㅎ 수정해야겠습니다.
영화가 원작보더 더 유명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마 영화덕을 톡톡히 본 원작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고요. ㅎㅎ

- 2021-07-04 2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얽ㅋㅋㅋㅋ 저만 별 세갠줄 알았는데 여기 별 세개 또 있는데 잠자냥님ㅋㅋㅋ 그쵸? 스티븐스 할ㅈㅐ여… 앞으로의 나날은 일이 전부인 삶이 아니기를..

잠자냥 2021-07-04 23:50   좋아요 1 | URL
으윽 저 이 작품 별로 안 좋아해요. 스티븐스 노예 근성 어쩔….;
 














“질툰가 봐. 바보같이. 고양이를 너무 예뻐한다고 질투를 하다니.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어. 미친 거지.” (다니자키 준이치로,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 44쪽)

말도 안 돼. 인간이 한낱 동물을 두고 질투를 하다니,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사실 인간은 그 동물을 상대로 질투를 한다.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도 질투를 한다. 샘을 낸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당신은 아마 강아지든 고양이든 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강아지나 고양이의 질투, 아니 샘을 내는 행동은 인간의 그것에 비해 단순하고 순수하다. 자기와 같은 종(강아지든 고양이든 때로는 그 둘을 포함하는 포유류든)을 향한 질투라면 왜 자신의 주인이(또는 집사가) 다른 녀석을 더 예뻐하는 걸까? 왜 다른 녀석의 간식이 더 맛나 보일까? 왜 나보다 다른 녀석이랑 더 잘 놀아주는 것 같을까? 등등. 만일 질투의 대상이 자신과 다른 종, 즉 인간이라면 뭐랄까 그 인간들 틈바구니에 끼어들어서 ‘아앙 나도 예뻐해 줘.’ 정도에 그친다.

이에 비해 인간의 질투는 때로는 무시무시하다. 겉으로는 한낱 동물에 인간인 내가 질투를 할쏘냐? 싶지만 그 속마음은 지옥이 따로 없다. 무엇보다 자신이 다른 인간도 아닌 ‘동물’이라는 미미한 존재에 질투라는 감정을 느낀다는 것에 분노한다. 아니 내 경쟁 상대가 강아지라니! 아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보다 왠지 저놈의 고양이를 더 아끼고 예뻐하고 사랑하다니! 어쩐지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순진무구한 고양이의 가느다란 눈이, 강아지의 동그란 눈이 더 얄미워 보인다. 보통, 인간은 동물보다는 머리가 좋은 까닭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이 순수하고 연약한 존재를 이용하기도 한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를 비롯해 시도니 가브리엘 꼴레드의 <암고양이>에는 바로 이런 유치하지만 솔직한, ‘고양이’를 향해 질투에 불타오르는 인간의 모습이 그려진다. 두 작품이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고양이 한 마리를 사이에 두고 한 남자와 두 여자 사이에 벌어지는 기묘한 삼각관계를 다루고 있으며 <암고양이>는 연인 사이에 끼어든(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남자와 고양이 사이에 끼어든 여자가 맞을 것 같다) 고양이라는 존재를 두고 벌어지는 질투와 인간의 광기를 그린다.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 집사의 신분으로 이 두 작품은 좀 더 흥미롭게 읽혔다.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는 장편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중편에 가까운 짧은 소설이다. 늘 여자의 몸에 대한 찬미와 극한의 에로티시즘을 보여주는 다니자키 준이치로 작품 치고는 꽤 건전(?)하고 담백하며 아기자기한 편이다. 검색 사이트에서 다니자키 준이치로 사진을 찾아보면 고양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실제로 그는 고양이를 무척 사랑하는 애묘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에서는 고양이 묘사가 꽤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고양이가 어떤 자리를 좋아하고 어떤 습성을 지녔는지, 그리고 어떤 행동이 사랑스러운지 참으로 잘 표현하고 있어서 아,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정말 고양이를 오래 키워봤구나 싶어진다. 아래와 같은 묘사에서는 키득키득 웃음도 나온다. 아니, 이거 완전 우리 고양이들 이야기잖아!

리리가 현관이든 방문이든 창호지문이든 미닫이문이기만 하면 사람처럼 열 줄 아는 것을 보고 쇼조는 이렇게 똑똑한 고양이는 드물다나 뭐라나 극성이었다. 그렇지만 이 한심한 짐승은 문을 열 줄만 알지 닫을 줄은 몰라서 추울 때 들락거리고 나면 일일이 닫아야 했다. (54쪽)


이 작품에서도 다니자키 준이치로 특유의 탐미적인 시선은 엿보인다. 물론 다른 작품에 비하면 매우 담백한 수준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이 찬탄과 탐미의 대상은 여성인 ‘후쿠코’나 ‘시나코’가 아닌 고양이 ‘리리’이다.

짐승이 어떻게 저런 애정 어린 눈길을 할까…. 그때 쇼조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어두운 벽장 안에서 번쩍이는 그 눈은 이제 장난꾸러기 새끼고양이가 아닌,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교태와 요염함과 애수를 띠고 있는 여인의 눈처럼 보였다. 쇼조는 여자가 아이 낳는 것을 본 적은 없었지만 만일 그 여인이 젊고 예쁘다면 틀림없이 이처럼 원망하듯 애절한 눈빛으로 남편을 부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68쪽)


고양이에 대한 이런 묘사로만 그친다면 어찌 다니자키 준이치로이겠는가. 그는 ‘리리’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두고 벌어지는 ‘쇼조’와 ‘시나코’, ‘후쿠코’의 갈등을 미묘하고도 생생하게 그린다. 고양이 키우는 일에는 열심이지만 어쩐지 그 밖의 일은 젬병인 쇼조. 그는 현재 후처인 후쿠코와 함께 ‘리리’를 키우며 잘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전처인 시나코가 후쿠코에게 편지를 보낸다. 다른 건 다 필요 없으니 키우던 고양이 ‘리리’만 보내달라는 것이다. 쇼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존재인 리리를 이용해 전남편의 마음을 다시 붙잡아보려는 속셈이 깔려있다. 쇼조는 어쩌면 후쿠코보다 ‘리리’를 더 아끼고 사랑할지 모른다면서 은근히 후쿠코의 신경을 건드리는 시나코. 시나코의 작전은 과연 성공할지, 쇼조는 시나코와 후쿠코 또는 ‘리리’ 사이에서 어떤 존재를 최후에 선택할 지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인간들의 이런 복잡한 감정싸움에는 아랑곳없이 유유자적 느긋하게 자기 본연의 삶을 즐기는 ‘리리’가 어쩐지 최후의 승자 같은 느낌이 들어 슬며시 웃음이 나기도 한다.

시도니 가브리엘 꼴레뜨의 <암고양이>는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에 비하면 더 강렬하고 파괴적이며 어떤 면에서는 섬뜩하기도 하다. 관능적인 면에서도 어쩌면 이 작품만큼은 꼴레뜨가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앞선다.

“내가 당신들 둘을 봤어!” 그녀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아침마다, 당신이 저쪽 작은 벤치에서 밤을 보낼 때… 해뜨기 전, 당신네 모습을 봤어, 단둘이….” 그녀는 떨리는 팔을 뻗어 테라스를 가리켰다. “둘이 함께 앉아서… 당신네들은 내가 말을 해도 듣지도 못했지! 그렇게 서로 뺨을 맞대고 앉아서…” (시도니 가브리엘 꼴레드, <암고양이>, 147쪽)


위 인용문은 연인이 다른 사람과 외도하는 장면을 목격한 게 아니다. 여기서 ‘그녀’가 말하는 ‘당신네’들이란 ‘남편’과 고양이 ‘사아’이다. ‘사아’의 주인 알랭과 결혼한 까미유는 알랭을 온전히 그녀 자신이 소유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알랭이 그토록 사랑하는 존재는 다름 아닌 몹시 아름다운 암고양이 ‘사아’이다. 결혼과 함께 ‘사아’가 둘 사이에서 사라지는 듯했지만 알랭은 고양이를 포기하지 못하고 까미유와 새로 꾸린 가정으로 ‘사아’를 데리고 오고 만다. 까미유의 불타는 질투는 거침없이 타오르고, 그 질투는 광기로 치닫는다.

“어떤 고양이라도 자기가 저놈을 사랑하는 만큼은 사랑하지 않을 테니까.” “맞는 말이야.” 알랭은 계산된 솔직함을 보였다. “그 어떤 여자도.” 까미유는 흥분하여 말을 이어갔다. “자기는 그 어떤 여자도 저 암고양이만큼은 사랑하지 못할 거야.” “맞는 말이야.” 알랭이 대답했다. (146쪽)



처음 이 작품을 읽을 때는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으로서 까미유의 지나친 질투(그러니까 어쩌면 그저 동물일 ‘고양이’를 향한)가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내 고양이들을 사랑하는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고양이를 광적으로 질투하고 그 고양이가 사라지길 바라고, 심지어 괴롭히기까지 한다면 그 사람을 과연 전처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아마 알랭도 그럴 거야. 이렇게 심정적으로 알랭에게 조금 더 기울어져서 이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어딘가 또 불편한 마음이 든다.

알랭은 정말 까미유를 사랑하는 걸까? 단지 결혼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때문에 질투하는 그녀를 나쁜 여자로 몰아가면서 자신이 결혼에서의 어떤 우월한 지위, 그 관계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갖기를 바란 것은 아닐까? 알랭은 ‘사아’를 한없이 순수한, 그러므로 영혼의 사랑을 받아 마땅한 존재로 설정해놓고 그 대척점에 ‘까미유’를 놓았다. 때문에 그토록 순수한 존재인 고양이를 질투하는 까미유는 이상하고 괴물 같은, 나쁜 여자이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도 계속해서 유년의 삶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알랭의 태도는 과연 바람직할까? <암고양이>는 이렇듯 ‘질투’라는 큰 흐름 속에 결혼제도가 갖는 모순과 또 그 제도가 빚어내는 가부장제의 모순을 그려냄으로써 <고양이와 쇼조와 두 여자>와는 또 다른 재미와 함께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냥이 녀석들이 자꾸만 다가와서 의자 아래서 야옹야옹 울거나 컴퓨터 모니터에 부비부비하면서 자꾸만 훼방을 놓는다. 이 녀석들은 내가 책상에 앉아서 뭐만 하려고하면 이 모양이다. 컴퓨터에 질투를 하는 걸까? ‘집사야! 이 네모난 뜨거운 거 이제 그만 집어치우고 나랑 놀자!’하면서 말이다. 아무튼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고양이 관련 사진집이나 에세이, 만화책들이 다양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런 가운데 고양이를 소재로 삼은 문학 작품들은 또 다른 관점에서 좀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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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0-12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졸라의 《테레즈 라캥》, 포의 《검은 고양이》에 공통으로 나오는 죄 지은 사람들은 고양이를 싫어해요. 죄책감에 시달리니까 고양이 눈이 자신을 노려본다고 착각해요.

잠자냥 2017-10-12 14:57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 고양이를 직접 키워보니 녀석들의 그 신비로운 눈이 뭐랄까 정말 인간의 마음을 모두 꿰뚫어 보는 느낌이랍니다. ㅎㅎ
 
그것 세트 - 전3권
스티븐 킹 지음, 정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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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담꾼이자 이야기꾼이 틀림없는 스티븐 킹. 손가락에 입이 달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 특히 3권에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빼어난 서술에서는 탄복하고 말았다. 그런데 내가 킹 담당 편집자라면 한 400쪽은 덜어내자고 했을 듯. 물론 그점이 그의 장점이겠지만... 영화도 꽤 잘만들었음을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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