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이의 포트폴리오
커트 보니것 지음, 이영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실 난 커트 보니것 팬은 아니다. 나랑 잘 안 맞는 작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계속 읽는다. 그러다가 음반으로 치면 b-side 같은 이 책을 발견했다. 거칠고 덜 다듬어진 그의 단편들, 근데 그게 더 그다워서 오히려 좋더라? 그간 내가 보니것을 잘못 읽어왔나 싶다. 다른 작품도 다시 읽어봐야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남자 친구 있어요?” “결혼은 언제 할 거죠? 결혼하면 회사는 어떻게 할 거죠?” 이 땅에 사는 젊은 여성들 가운데 이런 질문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없을 거라고 100% 확신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곳저곳 면접을 보러 다닐 때 언제나 듣던 말 중 하나가 ‘결혼’과 관련한 질문들이었다. 스물넷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렸고, 직장을 구해야 한다는 절박감에 저런 질문의 부당함을 크게 느끼지는 못했다. 다들 그런 질문을 받는 것이려니 싶었다.

그 사이 내가 컸는지, 아니, 이 사회의 모순을 너무도 뼈저리게 보고 듣고 겪었는지, 저런 질문의 부당함에 화를 내고 분노하다가 이제는 그 분노조차 덧없이 느껴진다. 해탈의 경지랄까? 남자들 가운데 입사 면접 때 저런 질문을 받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남자들에게 결혼은 당연한 것일 테고, 결혼을 하더라도 직장을 그만두지 않는 것은 더 당연하리라. 아니 결혼하기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지 않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때문에 이 땅의 남자들 중 면접 현장에서 저런 질문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내가 아들을 안 낳은 게 참 다행이다 싶어.” 언젠가 엄마가 우리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딸만 넷인 우리 집에서 아들을 못 낳는다고 그토록 구박받고 어린 내 눈엔 거의 학대와도 같은 대접을 받았던 우리 엄마가, 다 큰 우리 앞에서 이런 고백을 털어놨을 때는 참 뜻밖이었다. “왜?” “아들을 낳았으면 나도 이상한 엄마가 됐을 거 같아. 아들, 아들 하면서 니들을 얼마나 차별했겠니? 안 그런다 해도 잘 안됐을 거야. 에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우리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리 집에는 아들이 없는 게 다행이야. 그 아들은 할머니 때문에 얼마나 개차반 왕자님이 됐을까? 상상만으로도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졌다.

“네가 아들이었어야 하는데.” 가끔 엄마는 또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가장 먼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내 동생들은 태어나지 못했겠지. 게다가 나는 또 얼마나 내게 주어진 것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처음부터 그것들은 모두 내게 주어졌어야만 하는 것들이라고 생각하면서, 내 몫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까봐, 그걸 여자들이 빼앗아 갈까봐 얼마나 전전긍긍하면서 살았을까? 이 땅의 많은 남자들이 그렇듯이..... 사실, 빼앗는 것도 아니고 빼앗기는 것은 더더욱 아닌데도 말이다.

<82년생 김지영>에는 이런 모든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요즘 이 책이 그토록 널리 읽히는 이유는 뭘까 궁금해서 읽었다. 80년대에 태어나 이제 서른을 넘긴 여자들의 보편적인 삶이 담긴 이야기겠지 싶었다. ‘김지영’이라는 아주 흔한 그 이름처럼 새롭지도 않고 색다를 것도 없는, 그런 한국 여자로서의 삶. 사실 정말로 그랬다. 그런데 그 뻔한 삶을 바라보면서, 읽어나가면서 나도 모르게 분노하고 화내고 기가 막혔다. 너무나도 기가차서 혀를 끌끌 차기도 하고, 한숨을 푹푹 쉬기도 하고, 심지어 책을 읽다가 욕까지 나왔다.

누군가가 <82년생 김지영>의 줄거리가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리라.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이 여자라면, “그냥 당신의 삶이 이 책의 줄거리.” 라고.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이 남자라면 “당신 옆 여자들의 삶이 이 책의 줄거리.”라고. 그런데 이런 말을 덧붙일 것 같다. 아마 당신은 평생 가도 모를 거라고. 그런 삶을.

‘지영’씨는 태어나지 않는다, 다만 만들어질 뿐. 책을 다 읽었을 때, 긴 한숨과 함께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이었다. 보부아르가 말했던가. ‘여자는 태어나지 않는다. 다만 만들어질 뿐’이라고. 82년생 김지영은 태어나기는 했지만 태어난 게 아니라, 82년생 김지영, 그러니까 한국 여성 '김지영'으로 서서히 만들어진다. <82년생 김지영>은 그런 과정의 추적과도 같다. 그리고 그 생생한 과정의 기록이 오늘날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또다른 ‘지영’씨들의 전폭적인 공감을 얻은 게 아닐까.

여자 ‘김지영’은 먼저 집안에서부터 만들어진다. 다섯 살 터울 남동생을 둔 지영은 아들, 아들 하는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자연스레 ‘여자’이자 ‘딸’로서의 위치를 부여받는다. 그런데도 그것이 워낙 뿌리 깊고 은밀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불합리하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한다. ‘동생이 특별대우를 받는다거나 그래서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원래 그랬으니까. 가끔 뭔가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지만 누나니까 양보하는 거고, 성별이 같은 언니와 물건을 공유하는 거라고 자발적으로 상황을 합리화하는 데에 익숙’하다. 더군다나 ‘누나들이 샘도 없고, 동생을 잘 봐준다고 항상 칭찬했는데, 자꾸 칭찬을 받으니까 정말 샘을 낼 수도 없어’진다.(25~26쪽) ‘원래 그랬으니까. 누나니까’에 길들여지는 것이다.

여자 ‘김지영’ 만들기는 학교에서 더 심화된다. 밥을 먹는 것도 남자 아이들이 먼저이고, 반장은 늘 남자가 해야만 한다. 더더군다나 김지영 씨는 못된 남자 짝꿍이 그토록 괴롭혀서 고통스러워 죽겠는데 선생님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는 여자한테 더 못되게 굴고, 괴롭히고 그래.” (41쪽) 하-아-아-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는 아직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어떤 남자들은 정말이지 여자를 괴롭히는 게 좋아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서는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 버릇을 못 고친다. 스토커짓도 모자라서 여자 친구 또는 아내를 폭력적으로 괴롭히다가 죽이기까지 한다. 이렇게 단지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온갖 불평등한 모순을 겪으면서 소녀들은, ‘아이들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남자에 대한 환멸과 두려움을 가슴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아’ 간다.(65쪽)

그렇게 자라서 대학을 가고 사회인이 되지만 ‘여자’만들기는 더욱 공고화될 뿐 좀처럼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대학 동아리에서도 여자들은 그저 '있어주기'만 하면 고마운 화분 같은 존재일 뿐이다. 그 화분은 결코 회장이나 우두머리는 될 수 없다. 더군다나 그 화분은 때로는 누군가가 씹다버린 ‘껌’이 되기도 한다. 똑똑해서도 안 되고 잘나서도 안 된다. 그러면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니까. 제아무리 똑똑하고 잘나도 좋은 자리는 언제나 남자들의 몫이다. 심지어 김지영 씨처럼 일 잘하는 여자들에게 까다로운 클라이언트를 맡긴 것도 그녀들을 믿어서가 아니다. ‘오래 남아 할 일이 많은 남자들에게 굳이 힘들고 진 빠지는 일을 시키지 않은 것’일 뿐이다. 그런 커리어마저도 출산과 육아와 함께 날아가 버리고, 그녀는 어느덧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이들의 눈에는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는 한가로운 맘충'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김지영 씨는 얼굴이 붉어져 황급히 그 자리를 뜬다. 

누가 이렇게 김지영 씨를 ‘인간’이 아닌 ‘여자’, 김지영 씨로 만들어 간 것일까? 단지 성별이 다른 남자들만의 잘못일까? 지영의 할머니도 엄마도 모두 여자다. 지영을 가르쳤던 선생님 중에도 틀림없이 여 선생님이 있었을 것이다. ‘여자’로서의 역할을 내면화하는 데는 남자뿐만이 아니라 스스로 이 사회의 모순을 뼈저리게 겪고 자랐을 또 다른 ‘지영 씨’들이 크게 한몫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82년생 김지영>은 읽을수록 답답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하필이면 김지영 씨는 딸을 낳는다. 그 딸은 김지영 씨와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지영의 남편과 지영을 상담했던 의사를 보면 그리 희망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지영의 남편도, 지영의 담당 의사도 그녀를 보면서 이 땅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의 어려움을, 고통을 조금은 이해하는 듯하지만, 어쩐지 그 이해는 그저 멀찍이서 보는 방관자의 태도와도 같다. 그러니까 지영의 남편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겠다는 아내에게 ‘그 일이 정말 네가 하고 싶은 일’이냐고 묻는 것이다.

김지영 씨의 담당 의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수학 영재였으며 뛰어난 의사였던 자신의 아내가 아이 때문에 집안에 눌러 앉아 그저 초등학교 수학문제를 푸는 데 재미를 붙인 모습을 보며 불만을 품는다. 아내는 지금 자기 뜻대로 되는 게 오직 수학문제 밖에 없는데도 그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자기 아내가 초등 수학문제 풀이 정도가 아닌, ‘잘하는 일, 좋아하는 일, 그게 꼭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을 하길 바란다. 지영 씨와 자기의 아내가 그런 일을 다시는 찾을 수 없다는 현실을 절대 모르는 것이다. 지영 씨와 자신의 아내가 진정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기를 바란다면서도, 출산으로 회사를 그만두는 직원 대신 후임으로 미혼 여성을 뽑겠다는 그. 그런 그들이 이 사회에 계속 존재할 터인데, 과연 지영 씨와 그의 아내가 다시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을까? 여자가 아닌, 엄마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자기 존재를 찾을 수 있을까?

사람들은 문학을, 소설을 왜 읽을까? 문학을 읽음으로써 공감과 위로를 받기도 하고 잘 몰랐던 사실이나 진실을 깨닫기도 한다. 사회 모순을 담고 그런 사회를 고발하는 이야기들을 읽음으로써 어떤 변화의 바람과 작은 희망을 기대하기도 한다. <82년생 김지영>은 문학이 줄 수 있는 이런 여러 가지 것들 가운데 ‘공감’ 부분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리라. 그런데 그 공감은 어쩐지 쓸쓸하다. 그런 공감을 도무지 느낄 수 없는 사회라면 어떨까? 마치 김지영 씨의 이야기가 화석처럼 되어 아주 먼 옛날이야기가 되어, 와, 어쩜! 이런 시절도 있었나봐! 완전 드라마 같은 이야기 아니야? 이게 말이 돼? 말도 안 돼. 비현실적이야.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회- 그런 사회에서는 모든 여자들이 82년생 김지영 씨의 이야기가 자기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부디, 언젠가는 그런 사회가 오기를 바란다. 62년생 김지영 씨도 72년생 김지영 씨도 82년생 김지영 씨도 92년생 김지영 씨도 02년생 김지영 씨도 12년생 김지영 씨도 그 모두가 이건 내 이야기야! 하고 공감하지 않을, 그런 사회- <82년생 김지영> 이 책이 전하는 뼈아픈 진실, 그 불평부당한 모순을 더 많은 이들이 읽고 느끼고 깨닫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책을 출발점으로 삼아,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길 바라본다. 82년생 김지영 씨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사회가 오긴 올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7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QUARTZ 2017-09-06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편이 벌어다준 돈으로 한가롭게 커피마시는 사람 = 맘충?

잠자냥 2017-09-06 09:32   좋아요 1 | URL
<82년생 김지영> 이 작품 속에서 그렇게 나옵니다. 제 표현이 아니고요. ^^ (충격적이죠? 정확히 말하자면 김지영 씨가 아이를 데리고 나가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직장인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저런 이야기를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QUARTZ 2017-09-06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제가 오해했네요 죄송합니다. 리뷰를 재밌게 잘 읽고 있었는 데 불편한 표현이 있어서 댓글 달았습니다. 저 표현 때문에 읽고싶었던 마음이 사라졌었거든요.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ㅎ 감사합니다

잠자냥 2017-09-06 13:02   좋아요 0 | URL
네, 아닙니다. 제가 인용을 확실히 구분하지 않고 오해되게 쓴 부분도 있네요. 하마터면 제 글 때문에 이 책을 못 읽어보실 뻔했군요! 큰일 날 뻔 했습니다. 오해될 것 같은 부분은 좀 수정해야겠네요- (수정했습니다. ^^;;;;)

조현우 2019-08-12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로써 책을 무척 재밌게 읽었었습니다. 시간가는줄 모르고 봐었고 저희 어머니의 삶이 오버랩되어 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들을 잘 정리해주셨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책 속의 답답한 에필로그보다도요. 다만 소설, 문학으로 볼때와 현실을 너무 깊이 연관시키시는것 같아 안타깝네요. 이미 사회가 깊게 연관시켜놓기도 하였지만..
다만 본문의 쓰신 말 중 남자들은 평생가도 모른다는 말이 조금 속상하게 느껴져 댓글을 달아봅니다. 물론 잘모르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모르겠지만, 알아가고자 노력하는 한국의 남자 중 한명입니다. 잠자냥님의 말씀대로라면 남자들의 삶 역시 아마 여성들은 평생가도 모를 수 있을거라고도 생각이 됩니다.. 그만큼 삶의 모습과 환경이 다르기도 했다는 것일테지요.
단정짓기보단 서로를 공감해주고 배려할 수 있는 사회가 오길 기대해봅니다..^^ 좋은 내용 잘 읽고 가요..^^

잠자냥 2019-08-12 15:42   좋아요 1 | URL
소설이나 문학은 현실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82년생 김지영>은 그런 점이 극명하기 때문에 현재 동시대 여성들의 공감을 많이 얻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처럼 가부장제가 극명한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공감을 얻고 있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남자들의 삶 역시 여자들이 다 알기란 한계가 있겠지요. 바로 그래서 저는 문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상상력을 통해 자기가 경험하지 않은 세계의 공백을 메꿀 수 있으니까요. 암튼 조현우 님 같은 분들이 더 많아지기를 빌어봅니다~
 
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을수록 답답하고, 화가 나고, 분노하다 절망하게 된다. 김지영 씨의 딸은 김지영 씨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음을 '확신'할 수 있기에 이 책은 분노와 절망감을 안겨준다. 그 분노와 절망감을 이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살아가는 남자들은 끝끝내 알 수 없으리라. 하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싱글 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조동섭 옮김 / 창비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랫동안 파트너로 지낸 연인을 잃은 한 중년 남자의 하루, 그 단 하루를 따라가면서 만남과 이별, 삶과 죽음, 고독과 상실, 남겨진 이의 쓸쓸함 등 삶의 온갖 단면을 그려냈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스스로 가장 아끼는 작품으로 꼽았다던데, 나도 그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히로시마 내 사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9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를 보고난 뒤 이 책을 다시, 제대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운 좋게도 이 책이 나오고 얼마 뒤 알랭 레네 감독의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도 볼 수 있게 되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이 영화를 몇 회 상영해주었기 때문이다.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놓친 영화들 가운데 꼭 스크린으로 만나보고 싶은, 아니 그래야만 하는 영화들이 있다. 그런 영화들은 몇 년이고 기다린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그 영화는 스크린에서 못 만날 수도 있다. 그렇다 한들 어쩔 수 없다. 그게 그 영화와 나의 운명일 테니까.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도 그런 영화 중 하나였다. 너무나도 유명한 이 작품. 영화 좀 본다 하는 사람이라면 익히 보고도 남았을 만한 고전 영화 중 하나. 그런데 나는 이 영화를 이제까지 아끼고 아꼈다. 스크린에서 보게 될 날이 있을 거야! 그때까지 기다릴 거야! 하면서. 그리고 그 기다림은 마침내 찾아왔고, 그토록 오랜 세월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원작 시나리오와 함께 영화가 동시에 2017년 여름에 내게 찾아왔다. 영화는 사실 8월 15일을 즈음해서 그럴 만한 의미가 있는 작품이기에 특별전을 상영했을 것이다. ‘히로시마’니까.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을 먼저 읽었다. 아주 오래 전 뒤라스의 거의 자전적인 이야기 <연인>을 읽었을 때처럼 또 한 번 놀랐다. 뒤라스의 글쓰기 재능은 어디까지인가? 이 여자의 대범함, 이 여자의 솔직함, 이 여자의 상처를, 고통을, 그저 상처가 아닌 작품으로 승화하는 능력. 이 여자의 통찰력, 그리고 이 여자의 상상력. 여러 의미에서 놀랐다.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의 놀라움은 <연인>을 읽었을 때와는 또 조금 달랐다. 시나리오를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히로시마, 전쟁, 원자폭탄 이야기를 이렇게도 전할 수 있구나. 아름다운데도 그 참혹함은 생생하게 전해진다. 그 힘은 대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글로만 먼저 읽었을 때도 이 짧고 건조한 시나리오에서 통렬한 아픔을 느꼈다. <히로시마 내 사랑> 속의 ‘그녀’- 그녀의 이야기가 한 꺼풀씩 벗겨질 때마다 충격으로 전율하고 마음이 몹시 아파왔다. 그런 ‘그녀’가 이 세상에 어디 한두 명일까? 그러다가 ‘그녀’의 비밀, 베일이 완전히 벗겨지는 순간 너무나도 가슴이 아파서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뒤라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은 건조한 문체와 뚝뚝 끊어지는 대화, 절대로 친절하지 않은 이야기 전개 속에서도 읽는 이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히로시마의 그 유명한 버섯구름이 피어오르고 남자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당신은 히로시마에서 아무것도 보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그러자 그녀는 말한다. ‘난 전부 다 봤어요. 전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남자와 전부 다 봤다고 말하는 여자. 그런데 남자는 일본인이고 여자는 서양, 정확히는 프랑스 여인이다. 그녀는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지던 날, 히로시마는커녕, 일본에 있지 않았다. 남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일본인임에도 그 또한 히로시마를 직접 겪지는 않았다. 그때 그는 다른 곳, 그러니까 ‘전쟁터’에 나가 있던 터였다.

그런데 그들은 이제 수년이 흐른 뒤에 히로시마에서 이렇게 만났다. 그리고 그들의 육체- 건조한 육체는 서로 뒤엉켜있다. 뒤라스의 시나리오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한창 사랑을 나누는 중이거나 죽음에 가까운 고통에 사로잡혀 있는 몸, 처음에는 재 가루, 이슬, 원자폭탄으로 인한 죽음의 너울로 뒤덮였다가 그 다음에는 정사 후 땀으로 뒤덮인 몸이 보인다.’  뒤라스의 말대로 ‘지리적으로, 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인종적으로 등등 최대한 거리가 먼 두 사람에게 히로시마는 에로티시즘, 사랑, 불행의 보편적인 소재들이 가차 없는 조명 아래 모습을 드러내는 공통의 장소’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윽고 여자의 입에서 히로시마 말고도 또 다른 도시의 이름이 등장한다. ‘느베르’- 프랑스 루아르 강 근처의 한 작은 마을. 그녀는 그곳 출신이다. 히로시마와 느베르. 일본 남자와 프랑스 여자. 그 둘이 만났다. 그래서?

원자폭탄이 떨어진 뒤 한참 세월이 흐른 히로시마. 그녀는 평화를 기리는 영화를 찍기 위해 히로시마에 온 프랑스 여배우다. 그녀는 왜, 히로시마에, 히로시마라 부르는 그 남자에게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그것은 모두 그녀가 온 곳 ‘느베르’와 관련이 있다. 느베르와 히로시마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녀에게서 ‘느베르’를 읽지 못한다면, 읽어내지 못한다면 히로시마도, 그녀도, 그리고 느베르도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녀는 ‘느베르’에서의 기억 때문에 자신이 히로시마를 보지 못했어도 전/부 다 봤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그 남자를 히로시마라 부르며 짧은 순간이지만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었다.

뒤라스의 이 매혹적인 원작을 읽은 뒤 마침내 레네의 영화를 만났다. 뒤라스가 너무나 친절할 정도로 모든 장면과 인물 묘사까지 세세하게 그렸기에 레네의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은 텍스트를 스크린에 매우 충실하게, 그러나 그 나름의 또 다른 독창성을 담아내어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원자폭탄과 전쟁의 폐허, 인간의 광기를 다루는 것 같으면서도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하는 듯하고, 짧지만 강렬한 어느 남녀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 같으면서도 전쟁의 참혹함을 이야기하는 듯한, 이 강렬하고도 묘한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이 빼어나게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그러나 또 다른 의미로는 그래서 아프고 고통스러운 <히로시마 내 사랑>은 뒤라스의 시나리오도 레네의 영화도 무엇이 더 좋고 덜 좋고를 논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하나의 작품을 이룬다.

<히로시마 내 사랑>은 전쟁의 고통과 참혹함을 이야기한다고 상투적으로 말하지는 않겠다. 그토록 닳고 닳은 표현으로 이 작품을 말하기에는 뒤라스의 시나리오가, 그리고 레네의 영화가 너무나도 아름답고 훌륭하기 때문이다. 그저 히로시마와 느베르, 그와 그녀, 또는 나와 당신의 일상이 전쟁으로 어떻게 일그러지고 또 그것이 제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이 지구의 수많은 그 또는 그녀들의 삶이 어떤 형태로든 이어져 하나의 버섯구름이 어떻게 개개의 인간에서 비구름이 되어 내리는지 조용히 전해줄 뿐이라고. 느베르가 히로시마를 불렀듯이 느베르가 히로시마를 기억하여 고통스러워하듯이, 그러나 망각 속으로 히로시마가 서서히 사라지듯이 인간은 또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를 담담히 전해줄 뿐이라고.




그녀는 '느베르' 그는 '히로시마'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 장면 중 하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