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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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랜만이다. 몇 년 만인 걸까? 실은 몰랐다. 내가 김애란의 작품을 다시, 읽게 될 줄은. 순전히 <바깥은 여름>이라는 제목 때문이었다. 바깥은 여름이라? 제목을 보는 순간 온갖 것들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안은? 밖은 여름인데 안은 여름이 아니라는 소리구나. 여름이 아니라면 겨울? 그도 아니면 여름으로 가는 봄? 그것도 아니라면, 이미 여름이 지나간 가을?

여름이다. 여름은 덥다. 덥지만 활기가 넘친다. 초록도 무성하다. 물장구치는 아이들의 꺄르르한 웃음도 볼 수 있고, 아이스크림을 신나게 먹으면서 거니는 10대 소녀도 볼 수 있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리는 고양이 울음소리조차 활기 넘친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다채롭다. 바다로 들로 산으로 여행을 떠나는 이들도 많다. 여름은 들떠있다. 여름은, 찬란하고 뜨거운, 생의 열기로 가득한 기운이 느껴진다.

겨울은, 가을은, 봄은 그렇지 않다. 겨울은 말할 것도 없고 봄은 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황량하거나 쓸쓸하다. 여름에 비하면 그렇다. ‘바깥은 여름’이라는 제목은 여름보다도 여름이 아닌 계절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이 책의 뒤표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사실 나는 처음에 ‘시차’를 ‘사치’로 읽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사치’라고 읽어도 나름의 뜻이 통했다. 안에서는 하얀 눈이 흩날리는, 또는 황량한 바람이 부는데 바깥은 온통 여름이라니, 그야말로 안에서 그 황량함을 고스란히 껴안고 사는 이들에게 여름이란 ‘사치’아닌가.

김애란의 단편집 <바깥은 여름>에는 그렇게 겨울을, 또는 봄 혹은 가을을 견디면서 살아가는 이들이 등장한다. 아이의 뜻하지 않은 죽음을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부부이거나(‘입동’), 소년의 몸으로 누구의 도움도 없이 기르던 개의 죽음을 준비하거나(‘노찬성과 에반’), 한쪽은 통과의례를 거쳐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는데 성공했지만 한쪽은 그 세계에 진입하기를 실패한, 기약 없는 청춘이거나(‘건너편’), 언어 때문에 언어와 자유마저 잃어버린, 오히려 침묵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이거나(‘침묵의 미래’), ‘더블폴트’의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이거나(‘풍경의 쓸모’), ‘엄마는 한국인이라 몰라’ 퉁명스럽게 말하는 다문화가정의 소년이거나(‘가리는 손’), 남편의 죽음을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아내이다(‘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그들 모두에게 찬란한 여름은, 틀림없이 ‘사치’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여름’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 당연히 온도 차이를 넘어선 ‘시차’를 느낄 것이다.

김애란의 작품은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 이후 정말 오랜만에 읽었다. 사실 나는 김애란의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초창기 단편집에 실린 작품들을 읽었을 때 뭐랄까, 치기어린 문장이나 묘사를 위한 묘사 같은 것들에 조금 질려버린 기억이 있다. 고시원이나 원룸, 노량진 학원가를 전전하는 청춘의 이야기에 크게 공감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참으로 오랜만에 <바깥은 여름>이라는 제목에 끌려 그의 작품을 다시 접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김애란도, 김애란의 작품 속 주인공들도 나이가 들었구나. 늙어가는구나.

무엇보다도 놀라웠던 점은 크리스마스이브에 둘만의 방을 찾아 헤매던 그 옛날의 주인공들이 이제 <바깥은 여름>에서는 버젓이 자기 집을 가진 이들이 된 것이다. 물론 크게 화려한 집도 아니지만 <침이 고인다>에서 방을 찾아 헤매던 청춘들이 어느덧 ‘자기 집’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고 있었다. <침이 고인다>는 '방'을 얻기 위한 20대의 남루한 투쟁기였다. 물론 그들은 어떻든 자신만의 ‘방’을 갖고 있었지만 ‘나만의 공간’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크게 부족했다. 그 ‘방’은 비가 오면 물이 콸콸 들어오는 반지하 방이기도 하고, 느닷없이  찾아온 후배에게 침범당한 작은 원룸이기도 하고, 신림동의 고시원이기도 하고, 옥탑방이기도 하고, 다 큰 남매가 한 공간에서 함께 먹고 자고 해야 하는 원룸이기도 하고, 노량진 학원가의 학사촌이기도 했다.

그랬던 주인공들이 낡고 보잘것없기는 하지만 자기만의 ‘집’을 소유하고는 20대의 삶이 아닌 30대의 삶을 살고 있었다. 아이도 낳고, 그 아이로 인해 생의 기쁨을 느끼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아이로 인해 삶의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기도 한다(‘입동’, ‘가리는 손’). 그래서 작가도, 작가가 그리는 인물들도 그때보다는 어른이 되었구나, 자라고 있구나, 그럼으로써 삶이 던져주는 무게를 조금 더 묵직하게 느끼는구나 싶어졌다. 그런 변화가 조금은 반가웠다.

어떤 작품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도 했다. 죽음을 그린 작품에서 그랬을 듯하지만, 사실 눈물은 매우 뜻밖의 작품, 뜻밖의 구절에서 흘러내렸다. 그 작품은 어른의 생활로 접어든 한 사람과 아직도 그 세계에 진입하지 못한 채 서성이면서 주변부 맴돌고 있는 또 다른 한 사람- ‘도화’와 ‘이수’ 연인의 이야기를 다룬 ‘건너편’을 읽을 때였다. 이 작품은 예전 김애란 단편에서 곧잘 볼 수 있었던 노량진 학원가를 전전하는 청춘의 삶이 조금은 남아있었다. 도화와 이수- 둘 다 그곳에서 공부하다가 한쪽은 사회 진입에 성공하고 다른 한쪽은 그렇지 못한, 미묘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작은 파문을 그렸는데,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 안에서 여러 번의 봄과 겨울을 난, 한 번도 제철을 만끽하지 못하고 시들어간 연인의 젊은 얼굴이 떠올랐다. (‘건너편’, 117쪽)' 이 구절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사실 나는 김애란의 단편에서 곧잘 볼 수 있는 삶- 그러니까 노량진 학원가를 전전한 적도 없고, 고시원이나 신림동 일대의 삶을 살아본 적도 없다. 김애란 작품에 자주 그려지는 학원 강사의 삶도, 지상의 방 한 칸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을 살아본 적도 없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청춘의 삶에 비하면 운이 좋은 편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럼에도 ‘여러 번의 봄과 겨울을 난, 한 번도 제철을 만끽하지 못하고 시들어간 젊은 얼굴’이라는 구절을 읽노라니 울컥 눈물이 치솟았다.

그것은 어쩌면 그렇게 ‘여름’다운 여름을 살아보지도 못한 채, 언젠가는 찬란한 여름 같은 삶이 오리라 여전히 꿈꾸고 있을 이들, 또는 그런 여름을 살아보지도 못한 채 어느덧 가을과 겨울로 접어들고만 이들의 삶을 내가 고스란히 이해할 수 있는, 아니 어쩌면 형태는 다를지언정 그런 삶을 나 스스로도 지나쳤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한 번도 제철을 만끽하지 못하고 시들어간 젊은 얼굴’들의 삶이, 그 쓸쓸하고 황폐한 인생이 어떠할지 이제는 너무나도 잘 아는 나이에 이르렀기 때문이리라.

<바깥은 여름>에서는 섣불리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찬란한 여름이 오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단편집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한번쯤은 인생의 여름이 찾아올까? 글쎄, 영원히 여름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얀 눈이 흩날리는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그 상처를 끌어안고 인생을 헤쳐 나가는 이들의 진솔한 삶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그들은 계속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므로. 그런 이들의 삶을 바라보고 헤아릴 줄 아는 작가의 시선에서 나는 ‘여름의 찬란함’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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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7-20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김애란 작가의 책은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어느 모임에서 마주할 기회가 있었는데 읽어본 적
이 없어서 그냥 멀뚱멀뚱하게 쳐다만 본 기억이
나네요.

이번 책은 한 번 읽어 보고 싶네요 상찬이 많아서요.

잠자냥 2017-07-20 10:57   좋아요 0 | URL
김애란의 초기 작품은 그 명성이나 인기에 비해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제가 한국 현대 문학을 썩 좋아하지 않는 까닭도 있습니다만. 하하...) 이번 단편집은 작가가 내공이 좀 쌓였구나 싶더군요. ㅎㅎ

cyrus 2017-07-20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이 짠해지는 느낌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한국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감정은 정말 오랜만에 느꼈습니다. ^^

잠자냥 2017-07-20 13:5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여러번 울컥했습니다. ㅎㅎ

2017-07-21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21 1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8-04 1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대회 3등 되신 거 축하드립니다. ^^

잠자냥 2017-08-04 21:58   좋아요 0 | URL
아... 모르고 있었는데 이런 좋은 소식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르세니예프의 인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3
이반 부닌 지음, 이항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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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읽어봤어?” 단편을 좋아하는 나에게 언젠가 J가 어떤 책을 건넸다. 러시아 단편 소설을 묶은 <아름답고 광포한 이 세상에서>라는 책이었다. 제목부터 아름다웠다. 책을 훑어보니 몇몇 작품은 이미 읽어본 작품들이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J는 콕 집어서 ‘추운 가을’이라는 작품을 읽어 보았느냐고 한 번 더 물었다. 이반 부닌. 처음 들어보는 작가였다. ‘아니’라고 말하니, ‘꼭 읽어봐’ 한다.

그때는 바로 읽지 않았던 것 같다.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 그 작품이 문득 떠올라 책장을 넘겼다. 그 단편을 다 읽었을 무렵, 가슴에서 무언가 쿵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헤어지게 된 연인의 이야기로 매우 짧은 단편이었지만 완벽했다. 체호프를 좋아하던 내게 이반 부닌이라는 이름은 그 작품 하나로 각인되었다. 체호프보다 서정적이잖아? 그랬다. 체호프와 비슷하면서도 체호프에게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었던 낭만과 아름다움이 부닌의 작품에는 있었다. 그 뒤 기회가 닿는 대로 이반 부닌의 작품을 모았다. 하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 그의 작품을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출간된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은 그런 목마름을 채워주고도 남는 작품이다. 물론 이반 부닌은 단편만으로도 문학이 줄 수 있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아니 어쩌면 단편이기에 더 아름답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아르세니예프의 인생> 또한 그러할까? 반신반의 하면서 책장을 넘겼다. 몇 쪽 읽지도 않았지만 이미 내 마음에서는 ‘아름답다’는 단어가 몇 번이나 맴돌았다. 부닌의 문장은 시(詩)와 같다. 그의 문장에는 어릴 시절의 향수가 담겼고 잃어버린 유년 시절의 그윽한 추억이 담겨있다. 볕에 잘 말린 포근한 이불 속에서 뒹굴 거리던 다락방이 떠오르기도 하고, 또 때로는 비오는 날 촉촉이 젖은 나뭇가지들을 창밖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아름다운 문장들로 부닌은 한 청년의 이야기를 그려간다. 그의 이름은 아르세니예프- 몰락한 귀족 집안에서 나고 자라 문학을 사랑하고 글을 쓰며 살고 싶어 하는 ‘문학청년’이다. 그의 일생이 어린 시절부터 유년 시절, 십대를 거쳐 청년에 이르기까지 조용하고 담담하게 펼쳐진다. 특별하게 큰 사건이나 어떤 극적 전개가 그려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 러시아 몰락한 귀족 집안의, 문학을 꿈꾸는 한 청년의 삶이 왜 이토록 멀리 떨어진 시대를 살고 있는 나에게도 큰 울림을 주는 것일까.

아마도 아르세니예프 그의 삶이, 그가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우리 모두가 삶을 바라보는 태도이자 삶에서 느낄 수 있는 이러저러한 보편적인 느낌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가난하지만 가족의 사랑이 평범하게(그리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존재하는 집안에서 자연을 벗삼아 자유롭게 자라나고, 조금은 괴롭고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학교생활을 어쩔 수 없이 시작하고, 서서히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언인지 깨달아 그것에 몸담게 되는 삶. 물론 그런 가운데 가족이나 주위의 비난이 있기도 하고, 또 때로는 조용한 지지가 따라오기도 한다.

물에 젖은 잡초를 헤치며 채소밭으로 달려가 무를 뽑아서 짙푸른 진흙이 묻어 있는 무 꼬랑지를 탐욕스럽게 깨물던 순간, 그런 순간은 내 인생에서 드물었다..... (27쪽)

“넌 나이가 들면 어딘가에 취직해서 일을 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갖게 되겠지. 또 조금씩 저축해서 집을 살 거야.” 갑자기 나는 미래의 온갖 공포와 비속함을 너무나 생생하게 느끼고 울음을 터뜨렸다..... (63쪽)

그렇게 그는 자라고 성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인생의 비밀- ‘나는 나의 삶이나 다른 이들의 삶이 낮과 밤, 일과 휴식, 만남과 대화, 이따금 사건이라 불리는 기쁨과 불쾌함의 교차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삶이란 인상, 장면과 형상들의 무질서한 축적이고, 이 가운데 가장 하찮은 것들만이 우리 마음속에 남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235쪽)’을 깨달아 간다.

그 또한 사랑이라고 부르기는 애매한 열정에 휩싸이기도 하고, 순간적인 정열에 매혹당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운명처럼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리카.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의 제5권 제목을 ‘리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을 만큼 ‘리카’는 이 작품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왜냐하면 아르세니예프는, 리카를 사랑함으로써 인생의 뼈아픈 진실을 더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 모든 사람은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까봐 늘 두려워한다! (21쪽)’는 그러한 진실....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을 읽노라면 인생의 아름다운 한때, 찬란했던 한때가 언젠가는 사라지고, 그 순간이 소멸해서 기억 속으로 차츰 퇴색해 갈 것을 모두가 알기에, 그 찬란한 한때를 마주하고 있는 순간에도 어쩐지 슬픔이 밀려온다. '진흙 묻은 무 꼬랑지를 탐욕스럽게 먹던 시절'은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다시없을 아름다운 한때임을 이 작품을 읽는 독자는 알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떨리는 첫 만남도, 또 오해로 인한 고통스러운 다툼도 그 순간은 그저 삶을 이루는 한 부분이겠거니 생각하겠지만, 지나고 나면 영원히 다시 올 수 없는, 그렇기에 더없이 아름다운 한때임을 이 책을 읽는 우리는 안다. 그래서 왠지 부닌이 그려내는 이 사소한, 보잘것없어 보이는 한 청년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가슴으로 절절히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아, 내 인생도, 내 삶도 그러하지 않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까봐, 사랑하는 그 모든 것들을 잃게 될까봐 두려워하면서 사는 삶이지만, 그렇기에 그 순간을 충실히 보내야 한다고. ‘세상과 인생에 대한 사랑,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아름다움에 대한 달콤한 사랑이 안겨준 지극한 부드러움과 고통을 느끼면서(176쪽)’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우리 삶에 ‘리카’로 부를 수 있는 그 모든 순간은 오직 그때만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작품은 이반 부닌 그 자신으로 볼 수 있는 ‘아르세니예프’ 한 문학청년의 삶을 그리고 있기에 어떤 면에서는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스토너의 삶은 줄곧 황량한 고독으로 이어지다 마침내 문학 속으로 침잠했다고 한다면 아르세니예프의 삶은 그와는 조금 다르다. 그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만 같은 그런 평범한 순간들을 살며 문학을, 글을 쓰는 자신을 만들어 나간다. 그리고 그 순간은 평범했지만 촘촘히 아름다운 한때로 이어져 있다. 또한 다시 오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슬프도록 아름답다. 아마도 그러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이반 부닌의 서정성 짙은 문체가 큰 몫을 했으리라. 부닌은 그의 작품이 주는 울림과 깊은 감동에 비해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는 너무 조금 알려졌다. 더 많은 이들이 그의 아름다운 작품을 만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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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8 1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18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18 1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18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케이 2017-11-30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안녕하세요. 이상하게 회사가 갑자기 너무 바빠지는 바람에 알라딘 블로그도 버려두고 이러고 있네요. 처음 시작할 때는 밀리지 말고 쓰리라 결심했는데... ㅜㅜ
잠자냥님이 이 책에 대해 쓰신 걸 보고 예전부터 읽고 싶었는데 드디어 어제 다 읽었어요. 정말 아름답고 아름답고 또 아름다운... 소설이었어요. 좋은 소설 소개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잠자냥 2017-11-30 13:06   좋아요 0 | URL
네~ 요즘 글이 안 보여서 바쁘신가 했어요. ㅎㅎ 이 책 정말 아름답죠! 두고두고 읽어도 좋을 그런 책이었어요. 쌀쌀한 날씨 감기 조심하시고요...
 
아르세니예프의 인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3
이반 부닌 지음, 이항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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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아름답고, 아름다운 책. 아무리 아름다운 책이라도 언젠가는 마지막 장을 덮어야 함을 알듯이, 우리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들도 늘 끝이 있음을. 그러기에 삶이란 어딘가 슬픈 빛을 띄고 있음을 이 책은 전한다. 부닌이 써내려간 아주 길고도 찬란하게 아름다운 한편의 서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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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DADDY 2023-03-16 16: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한한 인생이고 끝이 있기에 삶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올해 핀 꽃은 작년에 핀 꽃도 아니고 내년에 필 꽃은 올해 핀 꽃이 아니기에 순간순간의 기억이 소중한 것이겠죠. 그 기억들이 모여져 음악이 된다면, 그림이 된다면, 글이 된다면 나라는 개체의 끝이 오더라도 그 기억은 오랫동안 남을 것이기에 그런 기억을 많이 남기시는 잠자냥님이 부러워요. ^^

잠자냥 2023-03-16 17:26   좋아요 1 | URL
댁 님도 ㅋㅋㅋ 쭉쭉 쓰세요!

DYDADDY 2023-03-16 17:58   좋아요 1 | URL
아직 자기혐오와 허무주의의 중력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보니 chatGPT처럼 공허하거나 관념적인 글을 쓰게 되더군요. 그래도 여기서 다른 분들이 쓰시는 글을 읽으며 추진력을 얻어 조금씩 나아가고 있어요. 항상 주체적이고 몸으로 쓰는 글을 올려주셔서 고마워요. ^^
 
아우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9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송상기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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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늙음과 젊음,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 또는 영원히 욕망한다는 것. 그 모든 것에 대한 한편의 기품 있는 우화. 짧지만 두고두고 곱씹게 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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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시선 - 메타젠더로 본 세상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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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다름을 사유할 수 있기를, 약자의 시선으로 이 세상 모든 관념을 뒤집어 볼 수 있기를 깨우치게 해주는 그녀의 글들. 이 책을 통해 또 한번 각인해본다. "모든 인식의 시작은 '다름'이다. 인간은 타인과의 차이를 통해서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으며, 앎은 그 과정 자체다."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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