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랜만이다. 몇 년 만인 걸까? 실은 몰랐다. 내가 김애란의 작품을 다시, 읽게 될 줄은. 순전히 <바깥은
여름>이라는 제목 때문이었다. 바깥은 여름이라? 제목을 보는 순간 온갖 것들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안은? 밖은 여름인데 안은
여름이 아니라는 소리구나. 여름이 아니라면 겨울? 그도 아니면 여름으로 가는 봄? 그것도 아니라면, 이미 여름이 지나간 가을?
여름이다.
여름은 덥다. 덥지만 활기가 넘친다. 초록도 무성하다. 물장구치는 아이들의 꺄르르한 웃음도 볼 수 있고, 아이스크림을 신나게
먹으면서 거니는 10대 소녀도 볼 수 있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리는 고양이 울음소리조차 활기 넘친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다채롭다. 바다로 들로 산으로 여행을 떠나는 이들도 많다. 여름은 들떠있다. 여름은, 찬란하고 뜨거운, 생의 열기로 가득한 기운이
느껴진다.
겨울은, 가을은, 봄은 그렇지 않다. 겨울은 말할 것도 없고 봄은 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황량하거나
쓸쓸하다. 여름에 비하면 그렇다. ‘바깥은 여름’이라는 제목은 여름보다도 여름이 아닌 계절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이 책의
뒤표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사실 나는
처음에 ‘시차’를 ‘사치’로 읽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사치’라고 읽어도 나름의 뜻이 통했다. 안에서는 하얀 눈이 흩날리는, 또는
황량한 바람이 부는데 바깥은 온통 여름이라니, 그야말로 안에서 그 황량함을 고스란히 껴안고 사는 이들에게 여름이란
‘사치’아닌가.
김애란의 단편집 <바깥은 여름>에는 그렇게 겨울을, 또는 봄 혹은 가을을 견디면서 살아가는
이들이 등장한다. 아이의 뜻하지 않은 죽음을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부부이거나(‘입동’), 소년의 몸으로 누구의 도움도 없이
기르던 개의 죽음을 준비하거나(‘노찬성과 에반’), 한쪽은 통과의례를 거쳐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는데 성공했지만 한쪽은 그 세계에
진입하기를 실패한, 기약 없는 청춘이거나(‘건너편’), 언어 때문에 언어와 자유마저 잃어버린, 오히려 침묵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이거나(‘침묵의 미래’), ‘더블폴트’의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이거나(‘풍경의 쓸모’), ‘엄마는 한국인이라 몰라’ 퉁명스럽게
말하는 다문화가정의 소년이거나(‘가리는 손’), 남편의 죽음을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아내이다(‘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그들
모두에게 찬란한 여름은, 틀림없이 ‘사치’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여름’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 당연히 온도 차이를 넘어선
‘시차’를 느낄 것이다.
김애란의 작품은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 이후 정말 오랜만에
읽었다. 사실 나는 김애란의 작품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초창기 단편집에 실린 작품들을 읽었을 때 뭐랄까, 치기어린 문장이나
묘사를 위한 묘사 같은 것들에 조금 질려버린 기억이 있다. 고시원이나 원룸, 노량진 학원가를 전전하는 청춘의 이야기에 크게
공감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참으로 오랜만에 <바깥은 여름>이라는 제목에 끌려 그의 작품을 다시 접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김애란도, 김애란의 작품 속 주인공들도 나이가 들었구나. 늙어가는구나.
무엇보다도 놀라웠던 점은
크리스마스이브에 둘만의 방을 찾아 헤매던 그 옛날의 주인공들이 이제 <바깥은 여름>에서는 버젓이 자기 집을 가진 이들이
된 것이다. 물론 크게 화려한 집도 아니지만 <침이 고인다>에서 방을 찾아 헤매던 청춘들이 어느덧 ‘자기 집’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고 있었다. <침이 고인다>는 '방'을 얻기 위한 20대의 남루한 투쟁기였다. 물론 그들은 어떻든
자신만의 ‘방’을 갖고 있었지만 ‘나만의 공간’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크게 부족했다. 그 ‘방’은 비가 오면 물이 콸콸 들어오는
반지하 방이기도 하고, 느닷없이 찾아온 후배에게 침범당한 작은 원룸이기도 하고, 신림동의 고시원이기도 하고, 옥탑방이기도
하고, 다 큰 남매가 한 공간에서 함께 먹고 자고 해야 하는 원룸이기도 하고, 노량진 학원가의 학사촌이기도 했다.
그랬던
주인공들이 낡고 보잘것없기는 하지만 자기만의 ‘집’을 소유하고는 20대의 삶이 아닌 30대의 삶을 살고 있었다. 아이도 낳고, 그
아이로 인해 생의 기쁨을 느끼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아이로 인해 삶의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기도 한다(‘입동’, ‘가리는
손’). 그래서 작가도, 작가가 그리는 인물들도 그때보다는 어른이 되었구나, 자라고 있구나, 그럼으로써 삶이 던져주는 무게를 조금
더 묵직하게 느끼는구나 싶어졌다. 그런 변화가 조금은 반가웠다.
어떤 작품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도 했다.
죽음을 그린 작품에서 그랬을 듯하지만, 사실 눈물은 매우 뜻밖의 작품, 뜻밖의 구절에서 흘러내렸다. 그 작품은 어른의 생활로
접어든 한 사람과 아직도 그 세계에 진입하지 못한 채 서성이면서 주변부 맴돌고 있는 또 다른 한 사람- ‘도화’와 ‘이수’ 연인의
이야기를 다룬 ‘건너편’을 읽을 때였다. 이 작품은 예전 김애란 단편에서 곧잘 볼 수 있었던 노량진 학원가를 전전하는 청춘의
삶이 조금은 남아있었다. 도화와 이수- 둘 다 그곳에서 공부하다가 한쪽은 사회 진입에 성공하고 다른 한쪽은 그렇지 못한, 미묘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작은 파문을 그렸는데,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 안에서 여러 번의 봄과 겨울을 난, 한 번도 제철을 만끽하지 못하고 시들어간 연인의 젊은 얼굴이 떠올랐다. (‘건너편’, 117쪽)' 이 구절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사실
나는 김애란의 단편에서 곧잘 볼 수 있는 삶- 그러니까 노량진 학원가를 전전한 적도 없고, 고시원이나 신림동 일대의 삶을 살아본
적도 없다. 김애란 작품에 자주 그려지는 학원 강사의 삶도, 지상의 방 한 칸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을 살아본 적도 없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청춘의 삶에 비하면 운이 좋은 편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럼에도 ‘여러 번의 봄과 겨울을 난, 한 번도 제철을
만끽하지 못하고 시들어간 젊은 얼굴’이라는 구절을 읽노라니 울컥 눈물이 치솟았다.
그것은 어쩌면 그렇게 ‘여름’다운
여름을 살아보지도 못한 채, 언젠가는 찬란한 여름 같은 삶이 오리라 여전히 꿈꾸고 있을 이들, 또는 그런 여름을 살아보지도 못한
채 어느덧 가을과 겨울로 접어들고만 이들의 삶을 내가 고스란히 이해할 수 있는, 아니 어쩌면 형태는 다를지언정 그런 삶을 나
스스로도 지나쳤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한 번도 제철을 만끽하지 못하고 시들어간 젊은 얼굴’들의 삶이, 그 쓸쓸하고
황폐한 인생이 어떠할지 이제는 너무나도 잘 아는 나이에 이르렀기 때문이리라.
<바깥은 여름>에서는 섣불리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찬란한 여름이 오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단편집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한번쯤은 인생의
여름이 찾아올까? 글쎄, 영원히 여름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얀 눈이 흩날리는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그 상처를
끌어안고 인생을 헤쳐 나가는 이들의 진솔한 삶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그들은 계속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므로. 그런
이들의 삶을 바라보고 헤아릴 줄 아는 작가의 시선에서 나는 ‘여름의 찬란함’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