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는 사회과부도와 지리부도 보는 걸 좋아했다. 지구본을 들여다보며 어떤 나라가 어디에 붙어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좋아했다. 사회과부도를 보며 특히 좋아했던 일은 각 나라의 국기와 수도를 외우는 거였다. 지도 보는 게 정말 재미있었다. 혼자 퀴즈를 내고 혼자 푸는 놀이를 즐겨했다. 예를 들면 ‘캐나다의 수도는? 오타와! 딩동댕’ 이런 식. 이런 취향 때문이었는지 세계사나 세계지리 같은 과목을 중 고등학생 때 꽤 좋아했다. 그러나 고등학생이 되면서 수능에 세계사나 세계지리 문제는 고작 몇 문제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업 시간은 확 줄어들었다.
비단 대학입학 시험에 나오는 비중이 적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나라에서 세계사나 세계지리 를 홀대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한국에게 있어 세계란 곧 미국, 아니면 일본, 더 확장한다면 중국이나 북한 정도인 듯하다. 텔레비전 뉴스를 봐도 그렇고 신문의 국제란을 봐도 그렇고, ‘세계’에 대한 대한민국의 관심은 참으로 미미하다. 오로지 국가나 민족뿐이다. 그렇게도 글로벌을 부르짖는데, 우리에게 세계란 고작 미국 아니면 일본이다. 대미, 대일 의존도가 높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과연 이런 현상이 옳을까?
전에 읽었던 르 몽드 관련 책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우리 신문의 제호는 르 몽드(Le Monde, 세계)이지 라 나시옹(La Nation, 국가 또는 민족)이 아닙니다.’ 라는. 한편으로는 신문이나 언론, 방송이 궁극적으로 나아갈 길은 국가나 민족 자기 안의 일이 아니라 더 넓은 세계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국제관계 전문시사지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Le Monde diplomatique)의 ‘르몽드 세계사’는 세계 = 미국, 일본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반면 세계에 대한 갖가지 정보를 쉽게 구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던 사람에게 꼭 필요한 책이 아닌가 싶다.
이 시리즈는 일단 무척 재미있고, 흥미롭다. 각 주제에 대한 설명은 간결하면서도 심층적이다. 무엇보다 지도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지도를 표현하는 아이디어도 반짝반짝 빛난다. 어떤 사안에 대해 설명한 것의 부록 느낌으로 지도가 실려 있는 것이 아니라, 지도 그 자체가 이미 독자에게 많은 이야기를 한다. 다루고 있는 이슈도 지금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의 모든 핵심적인 일을 총망라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환경, 세계화, 신자유주의의 문제점, 기아와 부채에 시달리는 남반구 대륙들의 문제점, 물질적인 면에서는 풍요롭지만 어떤 면에서는 붕괴되고 있는 서구 사회의 문제점, 경제적인 성장을 부쩍 이뤘지만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한 아시아의 국가들, 그리고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들의 이야기까지.
특히 한국의 위치가 지금 어떤지 가늠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이 책을 보면서 나는 한국은 여전히 국제 사회에서 주요 분쟁 지역에 속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고, 대부분의 국가에서 대인 지뢰 생산을 중단했는데도, 한반도에서는 남한이나 북한이나 여전히 대인지뢰가 생산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으며, 수도권에서는 물을 펑펑 쓰는데 알고 보면 한국은 전 지구적으로 물 스트레스 국가에 속한다는 사실도 또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여전히, 대미 의존도가 얼마나 높은지 깨달으면서 굴욕적인 감정이 들기도 했다. 거의 뭐 친미국가로 표기되어 있는 지도를 보니 뭐랄까... 정말 주권이 없는 국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소말리아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로 소말리아 인근 해협에는 해적이 날뛰고 있어도 속수무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말리아 위쪽으로 독립을 했으나 아직 국가로 인정받지 못한 ‘소말릴란드’가 존재한다는 것 알게 되었고(소말릴란드 뭔가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나라 같다;). 캐나다는 원주민인 이누이트에게 땅을 많이 되돌려 주어 국제사회의 모범이 되고 있고, 실제로 오스트레일리아처럼 원주민과 함께 하는 나라들이 속속 캐나다의 사례를 본 받으려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는 감동을 받기도 했다. 분쟁 지역의 원인을 보면, ‘인간의 탐욕(권력에 대한 욕심, 천연 자원에 대한 욕심, 땅에 대한 욕심)’ 때문인 경우가 허다한데 인간이 이렇게 욕심을 조금 줄이면 ‘모두가 평화로운’ 상태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볼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
이 책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는 책값이 좀 부담스러워서 도서관 같은 곳에서 빌려 읽을까 싶었는데, 두고두고 보면 좋을 것 같아 책을 샀다. 잘 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이렇게 개괄적으로 읽고 난 뒤 책꽂이에 꽂아두고 궁금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찾아보기에도 딱 좋은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은 1권에서 끝난 게 아니라 계속해서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다. 물론 난 그 책들도 하나씩 사들여놨다. 그리고 흥미롭게 읽은 뒤, 필요할 때마다 또 꺼내보곤 한다. 아무리 출판 불황이라고 해도, 좋은 책, 잘 만들어진 책은 결국 빛나기 마련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