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지식총서'는 100페이지 남짓한 작고 가볍고 얇은 두께에 하나의 주제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책이 시집 한 권 값 정도 한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장점이 많다. 물론 내용이 수박 겉핥기 식으로 허탈하게 끝나는 주제들도 있긴 하지만. 오늘 소개하려는 책 <르 몽드>나 <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는 얇은 분량 안에서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드러나 있어서 꽤 괜찮았다.

공교롭게도 두 권의 책이 모두 '프랑스 사회'와 관련한 책이었고, 또 공교롭게도 우리 사회의 그것과 비교할 만한 책들이었다. '부르르' 언론에 한번 더 분노를 느끼고, '부르르' 한국 사회의 공고화되고 갈수록 심화되는 계급화에 분노를 한 번 더 느끼면서 두 권의 책을 덮었다.

중도 좌파적 성격을 지닌 '르 몽드'지가 프랑스의 대표적인 언론으로, 세계 10대 신문으로 꼽히게 되는 그 과정들이 비교적 상세하게 적혀있는 <르 몽드>에서는 우리나라 신문이 왜 썩었는지, 왜 신문을 보면 안되는지 세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르 몽드'는 일단 우리나라의 신문 시장과 달리 철저히 독립되어 있다. 조중동 처럼 거대 재벌이나, 언론 재벌의 부속물이 아니며, 주식은 오히려 르 몽드 기자회가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신문의 중심이 기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 기자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지도 않는다. 더구나 우리나라 신문들이 광고 수입에 70% 이상 의존하는 것에 비해 '르 몽드'는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러니 거대 광고주들의 눈치를 봐야 할 이유도 없다. "특정 이데올로기 그리고 권력으로부터 독립하려면, 무엇보다도 재정적으로 독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부분에서는 울컥, 뭔가가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르 몽드'는 사진도 철저하게 배재한다. 스펙타클한 이미지가 사실을 왜곡할 우려가 꽤 많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신문을 보면, 1면은 늘 대형 사건, 사고, 혹은 아수라장인 정치판 사진으로 빵~빵~ 때려준다. 그것도 신문사들의 입맛에 맞게 조작된 이미지의 사진들이. 마치 사실인 양, 진실인 양 버젓이 걸린다. 무엇보다 감명 깊은 부분은'독립성'이다. 우리 신문들이 '중립 언론'을 표방하고 아무 소리도 못낸채, 거대 자본 세력들의 시녀 노릇하기에 바쁜 것에 비하면, 르 몽드는 '좌파', 르 피가로는 '우파'로 철저히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부럽다. "신문이 피해야 할 것은 왜곡이지 당파성이 아니다" 라는 부분에서도 일정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여본다. 인종주의나 극우 이데올로기에 대한 '르 몽드'의 분명한 독립 선언과 자기 색깔의 목소리. 이런 것들은 진실과 사실이라는 가면을 쓰고 양비론으로 모호한 입장을 취하면서 오히려 정치, 경제라는 거대 권력자들의 대변인 노릇만 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신문들과 크게 비교되는 지점이다.

신문을 끊어버린지 꽤 오래 되었다. 하지만 신문을 끊으면, 과연 내가 정보를 어디서 얻을까? 했던 고민은 완전 기우였음을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우리 신문의 제호는 르 몽드(Le Monde, 세계)이지 라 나시옹(La Nation, 국가 또는 민족)이 아닙니다." 라는 르 몽드 편집국장의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움베르토 에코의 <신문에 대하여>에서 신문이 궁극적으로 나아갈 길은, 국가나 민족 자기 안의 일이 아니라 더 넓은 세계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구절이다.

부르디외의 저서들을 접하다보면, '구별짓기' 즉 문화적 취향, 문화의 취사 선택을 통해 자신이 어떤 계급인지, 그리고 그 문화적 취사 선택의 과정들이 '학교'라는 공간에서 어떻게 습득 되는지, 그래서 '학교'라는 공간이 한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보게 한다. 프랑스 사회는 논술과 구술 시험 등을 통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좋고 나쁜 대학의 진입 여부가 결정된다. 또 그 대학을 나오고 어떤 지식 사회로 편중되느냐에 따라 상중하 계층이 갈린다. 대부분 노동자의 자식은 노동자로, 고위 간부의 자식은 고위 간부로 다시 재생산 된다. 어찌보면 우리나라 보다 꽤 오래 심화된 교육의 불평등이다. 개인의 능력 차이라고 치부하지만, 이미 상하층 계급으로 나뉘어 어렸을 때부터 어떻게 대화하고, 생각하고, 어떤 문화적인 습득을 했느냐에 따라 기회가 주어지는 통로는 달라지는 것이다. 물론 이제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이미 서울대연고대 등을 차지하는 신입생 수에서 서울 강남권에 사는 학생들의 수가 절반을 넘어섰다는 점은 프랑스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음을 시사한다. 그들이 다시 국가 권력의 상층 핵심부를 다 차지하고, 또 다시 그들의 자식들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문화적 식견을 교육받고 또 다시 상위권 학교에 입학하고..... 계급과 계급이 반복, 재생되는 이 악순환은 그칠 줄 모른다. "현대 사회에서 학벌이 중요한 사회 문제가 되는 것은 모든 계급의 신분 상승 기회가 바로 학교의 서열제도를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은 부르디외가 왜 그토록 프랑스의 학교와 교육제도에 비판적이었는지 생각하게 한다.


부르디외의 책을 읽다보면, 나 또한 어떤 고상한, 혹은 조금은 타인과 다른 (?) 문화적 취향을 드러냄으로써 하나의 구별짓기라는 또 하나의 상징 폭력을 타인에게 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은근한 자기 반성과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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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6-01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르 몽드의 제호는 훌륭한 말입니다. 하지만, 인터넷 세계가 점점 확장되는 상황을 생각하면 낙관적으로 기대할 수 없습니다. SNS 중심의 인터넷이 부당한 사회 현상을 널리 알리고, 세계적 공감을 형성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터넷 세계에도 종이신문만큼이나 편견과 가짜 뉴스가 판을 칩니다. 인터넷으로 전달되는 뉴스가 세계를 바라보는 창(窓)이 되지만, 일부 가짜 뉴스는 타인에게 폭력과 억압을 가하기 위해 만들어진 창(槍)이 될 수 있습니다.

잠자냥 2017-06-01 14:41   좋아요 0 | URL
네, 가짜뉴스는 언제나 조심해야 할 덫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되는군요.
 
이런 사랑
필립 베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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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하고 서정적이지만 늘 강렬한 내용을 담고 있는 필립 베송. 그의 <이런 사랑>은 스물아홉 살의 남자 '루카'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된다. 늦여름의 이탈리아, 피렌체 아르노 강 다리 아래서 한 남자의 익사체가 발견된다. 그의 이름은 '루카 살리에리'- 그의 죽음으로 시작된 작품은 루카, 그의 약혼녀 안나, 그리고 또 다른 남자 레오의 독백으로 번갈아 가며 이어진다. 그리고 필립 베송의 작품답게 왜? 그들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한없이 궁금해진다.


루카, 안나, 레오의 관점에서 서술되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는 죽은 남자 루카는 이탈리아에서 꽤 명망 있는 집안의 자식이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안나'라는 아름다운 여자친구와 5년 동안 진실한 관계를 유지해왔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러나 '레오'라는 한 남자의 등장으로 루카에게 '안나'라는 여자만이 애인은 아니었다는 것도 이내 알게 된다. 잘 생긴 외모와 좋은 집안, 아름다운 여자친구 등등 부러울 것 없어 보였던 루카에게 죽을 때까지 숨겨야 했던 단 하나의 비밀이 있었다면 그것은 '레오'라는 존재였다. 레오는 기차역에서 하루하루 몸을 팔며 살아가는 남창이었던 것-


소설은 루카의 죽음으로 충격받은 그의 두 연인 안나 모란테와 레오 베르티나의 시점으로 루카가 과연 왜 죽었는지를 미스터리처럼 풀어간다. 그리고 그의 죽음 탓에 상기되는 추억을 통해 이들의 삶과 사랑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독자는 책을 읽으며 한 번은 루카가 되었다가 또 한 번은 안나가 되었다가, 때로는 레오가 되어 그들의 상실감과 고독감을 맛보게 된다.


루카는 죽어서 자신의 몸이 산산조각나는 과정을 겪으며 더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머물 수 없음을 깨닫게 되고 안타까움에 절망한다. 자신의 죽음에서 무언가를 캐내고자 분주한 형사들의 움직임에 그토록 감추고 싶었던 그의 비밀이 밝혀질까 죽어서도 두려워한다.


안나는 5년 동안이나 성실하고 섬세하고 다정했던 남자친구의 죽음 앞에 망연자실해하고 자살일지도 모른다는 주변의 이야기에 왜 자신과 행복하지 못했을까 괴로워한다. 게다가 부검 후 보이는 루카 부모님의 석연치 않은 행동,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형사들의 태도. 루카의 집에서 발견한 낯선 남자의 이름 등등 5년 동안 자신이 믿어왔던 그 모든 관계가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더욱 망가져 간다.


레오는 하루하루 살아가기 위해 거리에서 만난 남자들과 의미 없는 만남을 이어가던 중 유일하게 진짜 삶과 이어줄 연인 루카를 만나지만 어느 날 그의 죽음과 맞닥뜨린다. 장례식장조차 갈 수 없다. 그는 철저하게 존재하지 않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형사들의 집요한 추궁으로 그는 사랑하는 연인을 살인한 장본인으로 몰리기까지 한다.


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루카, 안나, 레오 세 인물 모두 무척 고독했으리라는 짐작을 해본다. 평생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루카나, 정말로 진실한 관계라고 믿었던 5년간의 사랑이 배신으로 돌아온 안나나, 유일한 사랑이자, 세상과 이어주는 끈이었던 루카를 잃어버린 레오나 모두 고독하고 또 고독할 것이다. 쓸쓸하고 건조한 주인공들의 독백을 통해 이 고독함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마지막에야 밝혀지는 루카의 죽음에 관한 비밀까지- 이 작품은 흡인력 있게 단숨에 읽힌다. 어찌 보면 상투적인 삼각관계 같은 내용이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 작품이 ‘사랑’보다는 인간이 살면서 느끼는 고독과 상실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엄밀히 말한다면 고통은 육체의 이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루카의 몸이 지독하게 그립다 해도, 루카의 육체는 나를 자주 허전하게 했으므로 육체의 부재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이제 짝을 잃었다는,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존재가 되었다는 엄연한 현실과 관련이 있다. 나는 존재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는 둘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혼자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전의 둘이라는 복수에서 단수가 되는 법을 모른다. - 안나



내가 평온함을 맛볼 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사랑이라는 단어를 말하게 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몰랐었다. 루카와 함께, 이 모든 것이 가능했다. - 레오


사람들은 그림의 이면에 접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평소에 그들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던 매력적이고 이상적인 청년, 그들을 흡족하게 해주던 감탄스럽고 눈부신 청년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증스럽다고 외치고, 배신이라고 소리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단 한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은 한순간도 떠올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 불러일으키는 수치심과 불쾌감을 초월하고 받아들인다면, 그다지 기분 상할 일은 없다. - 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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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 어느 계단의 이야기 - 희곡 대산세계문학총서 9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 지음, 김보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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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님 가운데 장님, 그러나 진정 눈을 뜬 자에 대한 희곡 ‘타오르는 어둠속에서‘, 한 다세대 주택 계단을 배경으로 인간의 삶과 덧없음, 그 비애를 그린 ‘어느 계단의 이야기‘- 단 두 편의 희곡이지만 매우 강렬하다. 대단한 작품이다. 심지어 작가의 초창기 작품이라니! 다른 희곡도 꼭 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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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근처에 작은 공원이 하나 있다. 공원이라고 해봤자 큰 빌라 한 채가 들어설 정도의 아주 조그마한 곳이다. 그런데도 나름 나무도 우거졌으며 사람들이 쉴 수 있는 벤치도 있고, 비도 피하고 그늘도 만들어주는 작은 정자도 하나 있다. 운동 기구도 몇 개 있어서 마음만 먹는다면 근처 주민들은 헬스클럽에 가지 않아도 될 정도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공원이다. 그런데 이 보잘것없는 공원이 내 눈에 띈 이유는 순전히 고양이 때문이다. 이사 오고 나서부터 이 공원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이곳은 녀석들 천국인지 여러 마리가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도서관을 오가는 사람들 가운데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공원 녀석들을 꽤 챙겨주고 있었다.

공원을 지날 때 보면 샌드위치, 김밥, 참치 캔, 소시지, 우유 등등 사람들이 놓고 간 음식들이 언제나 보였다. 물론 그중에는 고양이 사료도 있고, 물도 누군가가 꼬박꼬박 챙겨주는 것 같았다. 나도 가끔은 고양이 사료를 놓기도 하고, 벤치에서 식빵 자자세로 앉아 있는 녀석들을 보게 되면 캔 하나를 따서 주기도 했다. 때는 가을이라 녀석들이 지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겨울이 찾아오자 걱정이 되었다. 이 추위를 어찌 견딜까. 그런데 놀랄만한 일이 생겼다. 수풀 사이사이에 누군가가 네모난 스티로폼 상자에 녀석들이 들어갈 만한 작은 구멍을 뚫어서는 놓고 간 것이다. 밥이라도 주러 가면 비척비척 녀석들이 그 구멍에서 나오는 걸 보니, 아주 따뜻하지는 못해도 지낼만 한 것 같았다.

지난 가을, 내가 녀석들을 처음 봤을 때는 흰 양말 신은 검은 고양이 둘. 치즈 냥이, 삼색이, 잿빛 꼬마 냥이, 턱시도 냥이 두 마리 이렇게 일곱 마리가 늘 보였다. 그런데 겨울이 지나면서 녀석들이 드문드문 보이더니, 그중에 치즈 녀석과 잿빛 꼬마는 요즘 아예 보이지 않는다. 꼬마는 내가 좀 예뻐했던 녀석이라 어찌된 일일까 더 걱정이 된다. 부디 조금 더 살만한 곳에서 자리 잡았기를 바란다.

요즘에는 턱시도 냥이 두 마리 중 우리집 고양이 닮은 녀석과 삼색이 이렇게 둘이 거의 안방마님처럼 늘 식빵을 굽고 있다. 이 녀석들 가운데 턱시도 녀석은 사람을 참 잘 따른다. 내가 만져줘도 그릉그릉대고, 밥을 주면 밥보다도 사람이 좋은지 그 옆에 가만히 앉아 있곤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녀석은 나만 예뻐하는 게 아니었다.

어느 날 집에 오는 길에 보니, 웬 여자가 녀석을 부둥켜안고는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또 어느 날은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통통한 여자 아이가 '돼지야~' 하면서 녀석을 끌어안고 있는 게 아닌가. 한번은 밤늦게 밥을 주러 갔더니 녀석이 보이지 않아서 벤치 근처에 놓고 가려고 했는데, 웬걸, 벤치에 앉아 있던 한 여자 품에서 녀석이 야옹하면서 밥을 보고 달려오는 게 아닌가. 지난번에 녀석을 안고 있던 사람과는 또 다른 사람이었다.

내가 퇴근 후 집에 올 때쯤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늘 그 공원 벤치에서 밥을 먹는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저녁을 먹으러 내려온 듯하다. 딱히 많은 돈은 쓰지 못하고 편의점 도시락을 녀석하고 나눠먹는 것 같다. 그 남자가 밥을 먹을 때면 늘 그 옆에는 고 녀석이 식빵을 구우면서 앉아 있곤 한다. 남자가 자기가 먹는 음식을 주기도 하는데, 녀석은 밥을 먹기 보단 멀뚱멀뚱 그를 바라본다.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그동안 녀석을 끌어안고 있는 사람들을 본 게 족히 네다섯은 된다. 초등학교 아이부터 20대로 보이는 긴 머리 여자, 안경 쓴 단발머리 여자, 30대는 훌쩍 넘은 듯한 여자 등등. 도시락을 먹으며 녀석에게 말을 거는 남자도 두 셋은 봤다. 어느 중년 남자도 밥을 허겁지겁 먹으면서도 허허 웃으면서 녀석에게 뭐라 말을 걸고 있었다......

출근 할 때도 녀석은 벤치에 앉아 식빵자세로 느긋히 앉아 있다. 내가 부르면 멀리서 눈을 지그시 감는다. 꼬질꼬질하고 썩 예쁜 고양이는 아니다. 유치원 가는 꼬마들이 녀석을 보고는 “엄마 저기 고양이 응가해요. 응가! 혼내주세요.” 소리 지르기도 한다. 그래도 녀석은 지그시 앉아 햇살을 즐긴다.

나는 그 공원에 자리 잡은 고양이들이 참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아서 그나마 다른 길냥이들보다는 견디기 쉬우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두운 밤이나 해질 무렵 벤치에 앉아 녀석을 끌어안고 있는 사람들을 보자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돼지야, 돼지야 녀석을 부르며 말을 건네는 어쩐지 외로워 보이는 초등학생도, 공원에 앉아 차디찬 편의점 도시락을 먹는 청년도, 녀석을 무릎에 놓고 그 따뜻한 체온을 느끼던 단발머리 아가씨도. 어쩌면 녀석으로 인해 하루 중 가장 따뜻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공원의 그 녀석이 사람들을 살게 하는 것이다........



문득, 고양이를 좋아하는 작가들이 떠오른다. 지금 선뜻 생각나는 이들로 헤밍웨이와 찰스 부코스키가 있다. 찰스 부코스키는 좀 뜻밖이었는데, <고양이에 대하여>를 읽노라면 그가 얼마나 고양이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고양이에 대하여>는 고양이에 대한 헌사이자, 고양이를 키우며 힐링 받는 찰스 부코스키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고양이를 키우거나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부코스키의 이야기에 절로 고개를 끄덕끄덕, 공감하게 될 것이다. 고양이를 찬양하는 우스꽝스러운 시도 있고, 집사로서의 삶을 담담히 묘사한 에세이도 있다. 무엇보다 인상 깊은 것은 부코스키가 고양이를 안아들고 행복해하는 표정이다. 나는 결단코 그의 다른 사진에서 이런 웃음이랄까, 온화한, 행복한 미소를 본 적이 없다. 고양이는 정말로 그런 힘이 있다. 부코스키는 고양이의 그 치유의 힘을 알았기에 그토록 곁에 많은 녀석들을 두고 있지 않았을까? 아, 물론 헤밍웨이도.




고양이를 안고 흐뭇해하는 찰스 부코스키 -<고양이에 대하여>에서 발췌


'동물들은 영감을 준다. 거짓말을 하는 법을 모르니까. 걔들은 자연의 힘이다. 텔레비전은 5분만 봐도 메스껍다. 하지만 고양이는 몇 시간 동안이나 바라볼 수 있다. 은총과 영광밖에 보이지 않는다. 본연 그대로의 훌륭한 생명.' -찰스 부코스키, <고양이에 대하여> 중






부코스키가 그린 고양이 그림 ㅋㅋㅋㅋㅋ - <고양이에 대하여>에서 발췌



이것들,
하는 짓이라고는 뛰어다니고, 먹고, 자고, 똥싸고
싸우는 것밖에 없었지만
어떨 때는 얌전히 앉아서
나를 쳐다봐
그 눈으로
내가 이제껏 본 어떤 인간이 눈보다 훨씬 아름다운
눈으로.
착한 애들이야. 

 - '너를 위한 자연 시' 중-


고양이에게 가장 좋은 점은
기분이 나쁠 때, 몹시도 나쁠 때----
고양이를 한 번 쳐다보면
걔들이 그러듯이 열을 확 시킬 수 있다는 것
그건 무슨 어려움이 있어도
지켜나가야 할 교훈. 그리고
고양이 다섯 마리를 보면
다섯 배 낫지.

슈퍼마켓에서 참치 통조림을 수십 개 사야 한다고 해도
상관이 없어. 그건 건드릴 수 없는
위엄을 위한 연료이니까---- 근사하고
매끄러운
좋아의 에너지
특히 모든 게 너무 과하다 싶을 때,
인간에게
일어나는 사건에 관해
이렇게 너무 많은 생각이 들 때.

-'딱 좋군' 중-


나는 차로를 올라갔다. 고양이들이 여기저기 퍼져서 똥을 싸고 있었다. 다음 생에서는 고양이가 되고 싶군. 하루에 스무 시간을 자고 가만 앉아 밥을 기디라고, 엉덩이만 핥으면서 빈둥대고. 인간은 너무 비참하고 화만 내고 외골수라서. (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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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5-24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고양이처럼 빈둥거리면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죠. 동물을 괴롭히는 악질적인 사람만 없다면요. ^^;;

잠자냥 2017-05-24 14:37   좋아요 0 | URL
좋은 집사를 만나서 빈둥거리면서 사는 것이죠! 하하하하.
 
이반 일리치의 죽음 창비세계문학 7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강은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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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저럭 성공한 삶을 살아온 한 남자의 죽음. 그 죽음을 접하는 그의 가족, 친지, 동료들의 온갖 반응. 이반 일리치 그 자신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린다. 그럼으로써 죽음과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빼어난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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