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의 사생활 - 우리는 모두, 단어 속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제임스 W. 페니베이커 지음, 김아영 옮김 / 사이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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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는 '우리'라는 단어에 숨어있는 놀라운 비밀! 우리가 무심코 쓰는 단어들이 나에 대해, 나의 인간 관계와 심리상태에 대해 이토록 많은 것을 말해 준다니! 흥미로운 내용이 무척 많고 글쓰기와 연관해서도 많은 것을 알려준다. 연설문이나 시나리오, 문학 텍스트를 분석한 내용들이 인상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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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은총의 일격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1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지음, 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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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조금은 어려운 이름의 이 작가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나 또한 이 작품을 쓴 사람으로 그녀를 기억한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은 어쩐지 선뜻 구미가 당기지는 않아서 여태까지 그녀의 작품을 읽은 적은 없다. 최근에 출간된 <알렉시 / 은총의 일격>으로 드디어 유르스나르의 작품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리 얇지 않은 두께에 실린 두 편의 이야기는 가볍게 도전해볼 마음이 들게 했다. 책을 받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어허라? 나는 점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책을 살 때 어떤 내용인지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는데, 일단 작가의 머리말을 읽으면서 아, 이런 내용이었어? 하고 살짝 놀랐다. 전혀 뜻밖의 내용이랄까. 그러고 나서 읽기 시작하니 그 서술법에 또 한 번 놀란다. 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는 ‘알렉시’의 머리말에 앙드레 지드의 <코리동>을 언급한다.

‘알렉시 혹은 공허한 투쟁에 관하여’는 1929년에 출간되었다. 문학과 관습에서 그때까지 금지의 낙인이 찍혀 있던 한 주제가 수 세기 이래 처음으로 온전히 글로 표현되었던 시기이다…. 예전에는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이 주제가 오늘날 문학에서 많이 다루어지고, 의도적으로 이용되기까지 하면서, 완전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의 권리를 획득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이라 해서 알렉시의 내밀한 문제가 예전보다 덜 고통스럽고 덜 비밀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의 이 머리말을 읽고 대충 감이 잡히는가? 그렇다. ‘알렉시 혹은 공허한 투쟁에 관하여’는 어느 동성애자의 고백이다. 그것도 완전히 내밀한 고백. 알렉시는 아내 모니크에게 편지를 쓴다. 이 편지로 그는 아내에게 이제까지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성적 취향이나 그로 인해 괴로웠고 고통 받았던 삶을 조용하지만 담담히 고백해간다. 한 가지 매우 특이한 점은 이 소설에는 단 한번도 ‘동성애’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는 동성을 사랑했다는 단어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독자는 그의 고백을 읽어나가면서 알렉시의 내밀한 삶을 고스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편지는 상당히 매혹적이다. 독자는 알렉시의 아내 모니크의 입장에서 그의 편지를 읽게 된다. 누군가 내가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이 이토록 진솔하고도 절절한 편지를 써 보낸다면 그가 하는 고백이 어떤 내용이든 무척 마음 아플 것 같다. 하물며 함께 살았던 아내라면 자신의 성적 취향의 자유를 찾아 떠나야겠다는 남편의 편지를 받고 그 마음이 어떨까. 그저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까? 알렉시의 편지를 읽노라면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이 섬세하고 나약한 영혼이 숨막힐 듯 경직된 사회에서 얼마나 자기 자신을 숨기고 사느라 고달팠을까 안타깝기도 하고 한없이 연민이 들 것 같다. 알렉시가 그려낸 모니크라면 분명 그런 심성을 지녔을 듯하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는 왜 단 한 번도 이 작품에서 ‘동성애’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쓰지 않았을까? 그저 에둘러서 ‘본능’이니 ‘기질’이니 ‘성향’ 또는 ‘과오’ ‘죄’ ‘악덕’ ‘위반’과 같은 단어들로 동성애를, 알렉시의 성적 취향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이토록 불명확한 서술 방식 때문에 자칫 이 남자가 정말 남자를 사랑했다는 소리인가? 진짜 동성애자란 말인가 아닌가? 아니면 다른 이야기를 빗대어 표현하는 걸까? 독자조차 헷갈리기도 한다. 아마도 그 어떤 이유로도 그 금기의 사랑을 직접 말할 수 없음을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머리말에서 유르스나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변을 주의 깊게 바라보기만 해도 알렉시와 모니크의 비극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육체적 욕망의 현실이 금지들로 가로막혀 있는 한 앞으로도 이어질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금지들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것은 언어의 금지일 것이다. 언어 속의 장애물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멀리하거나 큰 거부감 없이 교묘히 피해 가지만, 양심적인 사람들과 순수한 사람들은 어김없이 그 장애물에 걸려든다.’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적절한 언어가 없음을, 언어조차 금지되어 있음을, 그들의 언어가 아닌 이성애자들의 언어로 그들의 사랑을 이야기하면 결국 장애물 또는 덫에 걸리고 마는 것임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지.

이 기나긴 편지의 마지막 또한 무척 진솔하게, 그렇기에 가슴 아프게 끝맺는다. ‘당신을 떠나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토록 오랫동안 곁에 있었던 것에 대해서, 당신에게 사죄하리다.’라고. 알렉시 그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 자신의 도덕과의 화해가 부디 성공할 수 있기를 어쩐지 바라게 된다. 이토록 조심스러우면서도 기품을 잃지 않는 편지라면 그것을 읽는 그 누구라도 그의 투쟁이 ‘공허한 투쟁’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라게 되리라.

또 다른 작품 ‘은총의 일격’도 성격이 비슷하다. 이 작품은 에릭과 콘라드, 소피 세 젊은이의 이야기이자,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삼각관계를 말한다. ‘은총의 일격’에도 ‘동성애’라는 단어는 마찬가지로 등장하지 않는다. 에릭이 콘라드에게 빠져있고 그를 몹시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 또한 명확하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도 그 감정은 뚜렷하게 표현되지 않는다. 그러나 에릭은 자신만을 바라보는 소피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 콘라드의 누이인 소피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그것이 콘라드를 닮은 그녀이기에, 콘라드의 일부분인 그녀이기에 그러한 것이지 그녀를 여자로서, 또는 연인으로서 사랑하기란 불가능하다. 소피는 자신을 아끼는 것 같으면서도 이성으로서, 연인으로서 받아들이지 않는 에릭의 모호한 태도 때문에 희망고문을 당하면서 애를 태운다. 그리고 이 어긋난 사랑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그래서 이 작품을 다 읽었을 즈음에도 ‘알렉시’를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슴이 무척 시리다.

<알렉시 / 은총의 일격> 두 작품을 읽고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에게 홀딱 반해버린 나는 집에 있던 창비 세계문학단편선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프랑스편>에서 그녀의 단편 ‘어떻게 왕부는 구원받았는가’를 찾아 읽었다. 그리고 이 세 작품만으로 확신이 섰다. 대단한 작가구나! 이 작가를 이제야 읽다니! 하는 심정. 세 작품 모두 고혹적이다. 문장의 깊이나 어조도 우아할 뿐만 아니라 무척 지적이고 서정적이다. 감정을 절제한 서정시를 읽고 있는 기분이랄까.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도 사두었다. 그녀의 모든 작품을 다 읽어보고 싶다. 너무 늦게 만났지만,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올해의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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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클레어 2019-11-24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아하는 책이라서 이번에 독서 모임을 이 책으로 준비했습니다. 리뷰가 많지 않아서 찾아보던 중 잠자냥님 리뷰를 보고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책 외에도 <백년보다 긴 하루>라던지 찾는 책마다 잠자냥님 리뷰가 보여서 블로그가 궁금해서 들어왔습니다. 저는 네이버에서 활동을 하긴 하지만 자주 들러서 좋은 책에 대한 정보 얻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잠자냥 2019-11-24 22:57   좋아요 0 | URL
이 책 정말 아름답죠!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가득한 책 만나기 쉽지 않아서 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제 리뷰가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_^
 
개를 키우는 이야기 / 여치 / 급히 고소합니다 루켓유어셀프 1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욱 옮김 / 책읽는고양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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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키우는 이야기‘는 큭큭 웃다가 뒤에 좀 뭉클하고 ‘여치‘는 다자이 오사무 특유의 섬세한 여성 화자 시점으로 읽을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인간의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생각해 보게 한다. 이 또한 다자이 문학 특유의 감성이다.‘급히 고소합니다‘는 ‘유다의 고백‘으로 많이 소개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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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동화에는 '수명'이라고 사람 목숨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여러 번 읽어봐도 그저 단순한 동화라고 생각하기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물론, 그림동화 가운데 그런 이야기들이 한두 가지는 아니지만.

이야기 내용은 이렇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들고 온갖 짐승들 수명을 정해주던 때의 일이다. 나귀가 먼저 와서 자신은 얼마나 사는지 물었더니 하느님은 30년을 말씀하셨다. 나귀는 너무 길다고 투덜댔다. 사람들의 부려먹음을 받으며 온갖 고생을 다하는데 그저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늘 손찌검과 발길질뿐이라는 말이었다. 나귀는 그러니 제발 그 긴 시간을 줄여달라고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나귀의 목숨에서 18년을 줄여 준다. 곧이어 개가 찾아왔다. 개의 수명도 30년을 말하자, 개 또한 30년은 너무 길다고 아우성친다. 이렇게 매일 뛰어다니는데, 자기 다리는 그토록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마음대로 짖지도 못하는데, 물어뜯을 이빨마저 없어지면 그저 구석에 처박혀 그 긴 시간을 보내야 한다니,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니 수명을 줄여달라고 말한다. 하느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개에게서 12년을 줄여준다. 그 뒤 원숭이가 찾아왔다. 원숭이에게도 30년의 수명을 주신다 하니 놀랍게도 원숭이 또한 지나치게 길다고 투덜댄다. 사람들 앞에서 익살이나 부리니 삶이 즐거울 것 같지만, 사실 익살 뒤에는 아주 큰 슬픔이 감추어져 있다며, 30년 동안 어릿광대 노릇을 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다. 이에 하느님은 또 수긍하시고 원숭이에게서 10년을 줄여주신다.

드디어 사람이 하느님 앞에 나타나 자기 수명을 정해달라고 한다. 하느님은 사람에게도 30년을 말하신다. 그랬더니 사람은 너무 짧다고 울부짖었다. "집을 지어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심어둔 나무에 꽃이 피고 열매가 달려 이제야 겨우 어떻게 즐기면서 살아갈까 생각하는 참인데 벌써 죽어야 한다니!" 너무 한다는 말이었다. 하느님은 그 또한 수긍하시며 나귀의 18년을 더 주겠다고 하니, 사람은 그것으로도 충분치 않다고 한다. 그러자 하느님은 개의 12년을 더 얹어준다. 그러나 사람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한다. 곧 하느님은 최후의 수단으로 원숭이의 10년마저 사람에게 더 얹어 주었다. "그렇지만 더는 안 돼"라는 말과 함께. 사람은 하는 수 없이 70년의 수명을 받고 돌아갔지만, 그의 얼굴은 불만으로 가득했다.

이 동화의 끝은 이렇다.

이렇게 해서 사람은 70년을 살게 된 것이다. 처음 30년은 가장 처음 주어진 사람의 시간이라 매우 빠르게 지나간다. 이때는 건강한 몸으로 명랑하고 즐겁게 일하며 삶의 기쁨을 느낀다. 그다음 나귀의 18년이 이어지는데, 이때는 늘 무거운 짐들을 잇달아 등에 짊어져야만 한다. 곡식을 나르고 다른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 하지만, 그 충성스런 고생의 대가로 얻는 것이라고는 손찌검과 발길질뿐이다. 그 뒤 이어지는 개의 12년은 물어뜯을 이빨도 없이 구석에 앉아 끙끙거리며 보내게 된다. 이 기간이 지나면 원숭이의 10년을 살다 삶을 마감하게 되는데, 바보 멍청이가 되어 얼빠진 짓이나 저지르다가 아이들 놀림감이 되고 만다.

독일어 원문은 아니고, 영어판은 이렇다


So man lives seventy years. The first thirty are his human years, which are soon gone, then is he healthy, merry, works with pleasure, and is glad of his life. Then follow the ass's eighteen years, when one burden after another is laid on him, he has to carry the corn which feeds others, and blows and kicks are the reward of his faithful services. Then comes the dog's twelve years, when he lies in the corner, and growls and has no longer any teeth to bite with, and when this time is over the monkey's ten years form the end.  Then man is weak-headed and foolish, does silly things, and becomes the jest of children.


사람의 수명이 처음 정해진 것처럼 30년이었다면 어땠을까? 이미 나는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하면 홀가분한 것도 조금은 있지만 참으로 짧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동화 속, 사람 말처럼 30년은 이런저런 준비를 하면서 보낸 시간이 아닌가. 그렇다고 서른이 넘어 본격적으로 즐겁게 사느냐 싶은데, 실제 인생은 그렇지 않다. 나귀의 18년이 얹어졌듯이 이래저래 먹고 살기 위해 힘겹게 살아가야만 한다. 그렇다고 나귀의 18년처럼 꼬박 18년을 일할 수 있는가 하면, 오늘날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도 않다. 18년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빨 빠진 늙은 개처럼 한쪽 구석으로 내몰리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사람은 이빨 빠진 늙은 개와 놀림거리가 되는 원숭이로서의 세월에 그런 대접을 받지 않으려고 나귀의 18년 기간 동안 지나치게 아등바등 살아간다. 돈이라도 억척같이 모아놓으면 개나 원숭이 대접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스스로에게 마구 채찍을 휘두른다. 하지만 알다시피 사람의 인생은 결국 어느 순간 한쪽 구석으로 물러나야만 한다. 그런 시기가 왔을 때 와르르 무너지지 않으려면 나귀의 18년 동안 일을 하면서도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늘 가다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때가 오더라도 그것이 인생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평소 자기 삶과 내면을 돌아보는 습관이 배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저 나귀의 18년 동안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정신없이 일하는 것에만 몰두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년의 삶이 주어졌을 때 ‘내가 이제껏 무얼 하고 살았지? 내 인생은 뭐지?’ 단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나 또한 나귀의 삶을 살고 있다. 딱히 앞날을 크게 준비하는 것도 아닌데, 가끔 그저 멍하니 뭘 하고 사는지 모를 정도로 넋을 놓아버릴 때가 있다. 나귀의 18년 가운데 앞으로 또 얼마나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도 확실히 알 수 없다. 나도 더 나이 들어 늙었을 때 한쪽 구석에 내몰리더라도, 남들이야 나를 어떻게 보든 나 자신이 스스로를 이빨 빠진 개나 원숭이처럼 여기지 않도록 오늘 하루도 스스로를 잘 가다듬어야 할 텐데. 어쩌면 매일 일하고 아무 생각 없이 잠드는 것보다 그렇게 가다듬고 돌아보는 삶이 더 어려운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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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은총의 일격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1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지음, 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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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편만으로도 완전히 마음을 빼앗는 작가와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이 바로 그렇다! 별 기대 없이 펼쳐 들었다가 전율! 홀딱 반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문학이라니! 읽는 내내 황홀하다. 문장 하나하나를 새겨두고 싶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내가 왜 그의 작품을 이제야 읽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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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sun09 2017-05-04 1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떤 내용인지 저도 궁금해서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잠자냥 2017-05-04 12:08   좋아요 0 | URL
네~ 기대에 부응했으면 좋겠네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