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빈곤을 없애는 30가지 방법
다나카 유.가시다 히데키.마에키타 미야코 엮음, 이상술 옮김 / 알마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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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와 같은 책을 읽으면 오히려 무기력함을 느끼는 이들도 많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비참한 현실을 인식하게 되니 마음은 참담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오히려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사실을 알고 나면,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렇게 작은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다지 많지 않구나 하고 실망에 빠지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 이들에게 <세계에서 빈곤을 없애는 30가지 방법>은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유익한 책이다.


이 책은 일본 NGO 활동가 16인이 눈으로 보고 겪은 세계의 빈곤 현실과 함께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인이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서 알려주는 가장 놀라운 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소비하는 행위가 사실은 제3세계(이 단어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편의상 사용하겠다) 어린이나 여성,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심지어 별생각 없이 구호물자를 보내는 행위가 오히려 그들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우리는 초콜릿을 무척 싼 가격에 아무 생각 없이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착취에 가까운 저임금 노동이 없다면 그렇게 싼 가격에 초콜릿을 마음껏 먹을 수는 없다. 새우만 해도 그렇다. 이 책에서는 일본의 예를 들고 있지만, 우리나라 대형 마트에 가보면 태국산 새우들이 무척 싼 가격에 팔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태국이나 필리핀 같은 곳에서 싸게 들어오는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태국의 새우 양식업이 왜 문제인지 방영을 한 적도 있는데, 어린이와 여성을 상대로 한 저임금 노동과 환경을 생각하지 않은 양식업이 주원인이었다. 어린이들이 새우공장에서 종일 손이 부르트도록 새우를 까고 있던 모습은 잊혀지지 않는다. 게다가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맹그로브 숲을 베고 새우 양식장을 만드는데, 새우를 빨리 키우기 위해 항생제를 무차별적으로 투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 때문에 수질오염으로 양식장이 오래가지 않을뿐더러 환경오염으로 맹그로브 숲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얻었던 주민의 생계가 위협을 받게 된다.


팜유도 문제다. 팜유는 콩기름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식물성 기름이 되었는데 컵라면, 마가린, 초콜릿, 아이스크림 등 가공식품과 화장품, 세제, 비누 등을 만드는 데 쓰인다. 팜유 생산량이 급증하는 이유는 물론 싼 가격 때문이다. 전 세계 팜유의 80%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서 생산되는데, 두 나라는 물론 저임금 노동을 담보로 한 플랜테이션 농업을 한다.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일할 수 있으니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주민들이 경제적으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열대림에서 먹을 것을 얻고, 다양한 작물을 심어 생활하던 주민들은 저임금 플랜테이션 노동자로 전락하게 될 뿐이다. 식량 자급자족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마저 기아상태에 빠진 채 선진국에 수출하기 위한 작물을 재배한다. 그런 이득은 지역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플랜테이션을 운영하는 다국적 기업에 돌아간다. 값싼 식품을 제공받는 선진국의 소비자들에게 돌아간다.


나는 그저 단순히 싼 제품을 소비한다고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누군가의 저임금 노동력 때문에 그렇게 값싼 제품을 소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 책에서는 한 가지 방법으로 무턱대고 싸다는 이유만으로 소비하지 않기를 권유한다. 소비자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 방식도 한 가지 방식이 될 수 있다. 될 수 있는 한 생산·유통 과정에서 환경과 인권을 생각하는 기업의 제품을 소비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며 노동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기업에 압력을 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공정무역상품'을 소비하자는 의견도 제시한다. 일본에서는 이런 마크를 달고 나오는 상품들이 꽤 있는 듯하다. '공정무역상품' 마크를 달고 나온 초콜릿은 그렇지 않은 상품보다 우리 돈으로 천 원가량 더 비싼 거 같은데 될 수 있다면 이런 상품을 사는 것이 좋다.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식량 자급률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 우리 지역에서 나는 농산물을 지역에서 소비하는 행위도 중요하다. 우리가 계속 값싼 농산물을 외국에서 들여오려고 한다면, 저임금 플랜테이션 노동은 끊이지 않을 것이고, 그들은 결국 자신들이 먹을 수 있는 것 대신 먹을 수 없는 농작물을 재배해 선진국 소비자와 다국적 기업만 배부르게 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육식을 하지 않고 채식 위주의 식생활을 하는 것도 세계의 빈곤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소고기를 얻고자 사람이 아닌 소를 먹이기 위해 낭비되는 곡물의 양을 이 책에서는 지적한다).


구호물자를 제대로 알고 보내는 것도 중요하다. 헌 옷이나 담요 등을 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때 사실 물자는 남아도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면 그 물자를 받은 이들이 (선진국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질이 무척 좋다) 이 상품을 돈을 주고 싼 가격에 판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지역에서 옷이나 담요 등을 생산해서 판매하던 사람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이 책에서는 내가 쓰고 입던 헌 옷, 담요를 제3세계로 보내면서 남을 돕고 있다고 뿌듯해하기 보다는 차라리 돈을 보내는 것이 낫다고 지적한다. 


재활용을 열심히 하면서 나는 환경을 생각하고 지구를 생각한다고 자기만족을 얻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선진국에서는 재활용품(폐지, 알루미늄 등)을 다시 제3세계로 싼 가격에 파는데 이것은 다시 그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종이나 알루미늄 산업 종사자들이 가격 경쟁에서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선진국에서 알루미늄 캔이 싸게 소비될 수 있는 것은 물론 동남아시아 같은 곳에서 댐과 같은 수자원을 이용, 값싼 전기료로 생산하기 때문이다. 알루미늄을 생산하면서 나오는 물질이 주변 환경을 오염시키기까지 한다. 차라리 이런 제품을 처음부터 사용하지 않는 것이 낫다.


우리가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닥칠, 혹은 우리 다음 세대에게 닥칠 위험 때문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지구 온난화 때문에 방글라데시와 같은 지역은 지금도 농사지을 땅이 계속 사라지고 있다. 우리가 무심코 타는 자동차와 무심코 켜는 에어컨이 누군가의 먹고살 땅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세계의 빈곤을 불러온 것은 선진국, 잘 사는 나라들의 이기심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는 그들을 돕겠다고 오히려 그들의 생활을 파괴하고 있다. 이런 악순환을 조금이라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올바르게 소비하는 법, 똑똑하게 소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가 싸게 사는 물건 뒤에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눈물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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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1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17-03-21 11:55   좋아요 0 | URL
네~그렇습니다. 결국 공정한 소비, 착한 소비를 하고 싶어도 늘 현실적으로는 가격에서 또 다른 문제에 부딪히더라고요. 아마 많은 소비자들이 그럴 거예요.

cyrus 2017-03-21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빈곤 포르노’ 문제가 많이 언급되더군요. 현실을 왜곡해서 빈곤을 최대한 부각하는 소수의 구호 단체 때문에 정작 해결해야 할 빈곤 국가 문제마저 무시될까 봐 염려스럽습니다.

잠자냥 2017-03-21 12:20   좋아요 0 | URL
네, 말씀하신 ‘빈곤 포르노‘를 생각하다보니 수잔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에서 ‘사진은 연민을 자아내는 것만큼 연민을 없애고 감정을 떼어낸다‘라는 구절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단순한 동정이 아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는 도움이 절실한 것 같습니다.

세실 2017-03-23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정무역 상품....자꾸 잊어버리네요.
알루미늄의 오염도 심각하군요. 자판기는 대부분 알루미늄이니....
현명한 소비를 해야겠습니다.

잠자냥 2017-03-23 15:0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이런 책 읽는 바로 그 순간에는 머릿속으로 온갖 결심을 다 하는데, 정작 시간이 흐르면 무뎌지고, 그러다 책 읽으면 다시 마음 다잡고 그러다 또 무뎌지고를 반복합니다. 하하.. 습관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호르두발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카렐 차페크 지음, 권재일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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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환영받지 못하는 한 남자, 호르두발의 외롭고 처연한 이야기인가 싶은데... 뜻하지 않은 반전을 맞이한다. 그 뒤 2~3부에서는 차페크 특유의 건조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과연 진실이란 무엇인가를 추적한다. 인간에 대한 연민이 담긴 마지막 문장은 심금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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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호퍼, <맹신자들>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불복하는 일부 박사모 집단을 보면 차라리 그들이 돈을 받고 움직이는 것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돈을 받지도 않았는데 정말 자발적으로 여전히 그렇게 광신자들처럼 행동한다면 오히려 더 문제가 아닐까 싶다. 저들의 그 광신적인, 맹목적인 눈먼 애정이랄까, 빗나간 사랑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에릭 호퍼의 <맹신자들>이 떠오른다. 


이 책의 부제는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으로 광신적인 종교주의자, 나치즘 신봉자, 극도의 마르크스주의자, 파시즘 등등 ‘광신’적이고 맹목적인 대중 운동에 가담하게 되는 인간들의 심리에 대한 에릭 호퍼의 탁월한 견해가 돋보인다. 호퍼는 샌프란시스코 부두 노동자로 일하던 1951년 이 책을 출간했다고 하는데 이 책은 나치즘과 2차 세계대전 후 황폐해진 유럽 상황과 맞물리면서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평생 떠돌이 노동자로 살아온 에릭 호퍼. 그는 방대한 독서를 통한 독학으로 뛰어난 사상가의 반열에 올랐다.

<맹신자들>은 그런 호퍼의 탁월한 시각을 모았다. 그의 주장에 따르자면 인간은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좌절하고 개인적인 일에서 가치를 찾지 못할 때 맹신자가 되기 쉽다. 나치즘에 맹목적으로 투신한 사람, 종교에 광신적으로 빠지는 사람, 파시즘에 깊이 개입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현실에서 깊이 좌절했으며 자기 자신에 대해 가치를 못 느끼는 이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 기독교가 크게 부흥하는 이유 중 하나도 이런 게 아닐까. 어디에서도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는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그럼으로써 서서히 광신적 신도의 길로 들어서는…. 종교뿐만 아니라 국가나 정당 등 어떤 집단에 광적으로 빠지는 인간들의 공통점이 이 책에는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사람은 자신의 우월함을 뒷받침할 근거가 빈약할수록 자신의 국가나 종교, 인종 혹은 자기가 지지하는 대의가 우월하다고 주장하기 쉽다.’ ‘사람은 자기 일이 신경 쓸 가치가 있을 때라야 신경 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무의미한 자기 일은 팽개쳐두고서 남의 일에 신경 쓰게 마련이다. 남의 일에 신경 쓰는 것은 험담하거나 꼬치꼬치 캐묻거나 참견하는 형태로 나타나며, 또한 공동체나 국가, 인종 문제에 대한 열띤 관심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기 문제는 회피하면서 이웃의 어깨에 매달리든 목을 조르려고 덤벼들든 하는 것이다.’ 등등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구절들이 여기저기서 빛난다.




토마스 베른하르트, <몰락하는 자>
<몰락하는 자>는 두 가지 이유에서 눈길을 끌었다. 우선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작품이라는 점, 그리고 두 번째는 ‘글렌 굴드’라는 실존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나중에 읽어보려고 적어두기는 했는데 클래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부쩍 더 이 작품에 호기심이 생겼다. <몰락하는 자>는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등장한다고 해서 출간 당시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그렇다면 굴드가 주인공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 작품에는 화자인 ‘나’와 그의 오랜 친구 ‘베르트하이머’ 그리고 ‘글렌 굴드’가 나온다.

이들은 오래전 대학에서 함께 피아노 공부를 했던 사이로 그때 처음 인연을 맺었다. 작품은 ‘나’에게 베르트하이머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시작된다. ‘나’는 베르트하이머의 자살 이유를 밝히고자 그가 죽기 전 머물렀던 별장과 근처 여관을 찾아간다. ‘나’는 이런 저런 이유를 추측해보다가 베르트하이머가 글렌 굴드 때문에 자살했으리라 짐작하게 된다. 베르트하이머는 우연히 굴드가 연주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고 자신은 도저히 그와 같은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피아노 대가로서의 꿈을 접는다. 그때부터 서서히 ‘몰락하는 자’가 되어버린 그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베르트하이머는 영원히 2인자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몰락하는 자>를 통해 굴드로 대변되는 완벽한 예술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한없이 나약해지며 좌절할 수 있는지 베르트하이머라는 인물로 극명하게 보여준다. 줄거리만 보면 꽤 흥미 있어(?) 보이지만 읽기 수월하지는 않다. 전형적인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였기 때문에 이야기가 매끄럽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베른하르트 특유의 길고 거친 독설을 견디기 힘들 수도 있다. 물론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나름의 통쾌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한편 작품에 그려진 굴드의 모습은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사실이리라 짐작하다가는 굴드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얻을 소지도 있어 보인다.

사람을 바라볼 때 우리 눈에는 병신밖에 안 보여, 라고 언젠가 글렌이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전부 병신이야. 병신 아닌 사람이 없어. 오래 바라볼수록 더 병신으로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평소에 그 사람이 얼마나 병신인가를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세상은 병신 투성이야. 거리에 나가면 병신들만 만나게 된다고. 집에 누구를 초대하면 병신을 맞이하는 셈이야., 라던 글렌의 말이 떠올랐다. (34쪽)



조르주 페렉, <W 또는 유년의 기억>
이 작품은 시간이 지난 후 더 기억에 남는다. 실험적인 글쓰기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 조르주 페렉은 <W 또는 유년의 기억>에서는 또 다른 글쓰기 형태를 시도했다. 한 작품 안에서 두 개의 이야기를 나란히 전개한 것이다. 하나는 조르주 페렉의 자전적 이야기로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그의 ‘유년에 대한 기억’이다. 또 다른 하나는 ‘W'라는 가상의 섬에서 일어나는 일로 이 두 개의 이야기는 한 챕터씩 교차되면서 진행된다.

초반에는 대체 두 가지 이야기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하고 도저히 감이 안 잡힌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 될수록 ‘아아...’하다가 마지막에는 쿵, 하고 뒤통수를 때린다. 이 두 가지의 전혀 다른 이야기가 전하는 바는 크다. 인간은 광적으로 전쟁(혹은 남을 짓밟는 경쟁을 통한 승리)을 좋아하는 종족이며 그러한 잔인한 전쟁으로 인해 유년의 기억(추억)은 온전하게 보존될 수 없다는 진실. W섬의 이야기가 마지막에 ‘유년의 기억’과 병치되면서 그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진다. 다음에는 두 개의 이야기를 번갈아 가면서 읽지 말고 ‘유년의 기억’과 ‘W' 섬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씩 쭉 읽어서 비교해봐야겠다.




미셸 우엘벡, <지도와 영토>

우엘벡의 작품은 읽고 나면 항상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어떤 작품은 쓰레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나는 왜 이 사람 작품을 계속 읽는 것일까? <지도와 영토>가 번역되어 나왔을 때도 솔깃했다. 게다가 이 작품은 우엘벡에게 2010년에 공쿠르 상을 안겨주기도 했으니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도와 영토>는 그의 전작에 비하면 폭력적이거나 노골적인 성묘사도 없고 등장인물들도 참 착해진(?) 편이다. 우엘벡에 대해 비난을 일삼던 평론가들도 이 작품에 대해서만은 찬사를 늘어놓았다던가. 그럼에도 역시 책장을 덮고 나면 뭔가 그 ‘개운하지 않은 뒷맛’은 여전히 남는다. 조금 덜하기는 하지만....

우엘벡은 <지도와 영토>에서도 전작들처럼 ‘소비’와 ‘물질’로만 구성되어 있는 서구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한다. 오늘날 서구에서 예술작품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지, 그리고 그 예술작품은 또 어떻게 사람들에게 ‘소비’되고 ‘평가’되는지 보여준다. 모든 것은 결국 ‘돈’이다. 서구에서 인간은 이제 생식으로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한다. ‘서구사회에서 인간을 규정짓는 것은 생식의 소임이 아닌, 무엇보다도 생산과정 속에서 점하는 위치(189쪽)’다. 그 안에서 인간은 한없이 고독한 존재로 서서히 늙고 병들어 죽어갈 뿐이다. <지도와 영토>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꼼꼼하고 세세하게 묘사한다. 때문에 어떻게 보면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의 2000년대 버전으로도 보인다. <사물들>에서 그려지던 사회와 비교해보면 <지도와 영토> 속 현대 사회는 물질적으로 비교할 수 없이 더 풍요로워졌지만 그때보다 인간은 한층 더 빈곤해진 느낌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이 작품을 읽었을 때는 ‘오오오오!’ 감탄하고 ‘어서 이 감동을 글로 남겨야지!’했는데 시간이 좀 지나니 그때의 감동의 살짝 희미해졌다. 어릴 때 <노인과 바다>를 읽었을 때는 이렇게 좋은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어요’. 왜 고전은 나이 들어서 다시 읽어야 하는지 <노인과 바다>를 읽으며 새삼 또 깨달았다. 하긴 세상물정 모르는 10대 때, 바다에서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는 노인의 이야기가 절절하게 와 닿을 리가 있겠는가. 그저 그냥 그러려니 추측할 뿐이지.

물론 지금도 노인의 심정을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거대한 물고기를 드디어 낚고 그 물고기를 지키고자 바다 위에서 벌이는 노인의 사투를 보고 있노라면 삶에 대한 인간의 강인한 의지가 느껴져 나도 모르게 숙연해진다.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야.”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 거야.”(96쪽)라는 문장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함께 실린 단편 <킬리만자로의 눈>과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고 행복한 생애>,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도 무척 좋았다. 헤밍웨이 작품을 읽노라면 어떤 면에서 참 마초 같고 그가 작품 속에서 여자를 그리는 방식은 불편하고(어이없기도 하고) 동의할 수 없지만, 그래도 작품이 좋은 건 어쩔 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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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14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릭 호퍼의 책은 죄지은 민간인을 끝까지 옹호하는 세력들을 이해하고 비판하기 위해서 읽어야 할 책이군요. 잠자냥님이 인용한 문장을 보자마자 이 책 읽고 싶어졌어요. ^^

잠자냥 2017-03-14 15:51   좋아요 0 | URL
네 지금의 그 맹신자들의 사태와 견주어 읽으면 이 책이 더 흥미롭게 다가오리라 확신합니다. ㅎ cyrus 님의 명리뷰 기대하겠습니다.

cyrus 2017-03-14 18:50   좋아요 0 | URL
제 글은 명리뷰 수준이 아닙니다. 그냥 책을 보면서 느낀 걸 정리하고, 자랑하고,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인정하고, 수정할 뿐입니다. ^^

munsun09 2017-03-14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며칠 전부터 맹신자들이 계속 생각나서 오늘 드디어 읽기 시작했는데! 신기하고 반갑습니다.

잠자냥 2017-03-14 15:52   좋아요 0 | URL
하하 그러셨군요! ㅎㅎ 요즘의 사태와 비교해가면서 읽으면 더 쏙쏙 들어오리라 생각됩니다!
 
어둠 속의 웃음소리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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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버트‘의 탄생을 알리는 작품. 눈먼 사랑으로 마침내 파국을 맞이하는 중년남 알비누스의 비극을 소름끼치도록 생생하게 그렸다. 롤리타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는 마르고타와 연인 렉스 캐릭터도 불쾌할 만큼 생동감 넘친다. 어둠 속의 웃음소리란 바로 그 어리석은 욕망을 조롱하는 소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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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인간 - 제155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석희 옮김 / 살림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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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가벼운 내용이려니 했는데 뜻밖에도 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통찰이 나름 빛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지구라는 편의점 안에서 쓸모 있는 상품, 또는 부품으로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지 못한 인간에게는 호통치고 야단치고 그것도 안 될 땐 배제(폐기)해 버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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