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영화 재개봉이 유행이다. 얼마전에는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The Reader, 2008)>도 다시 개봉했다. 예전에 영화를 꽤 좋게 봤던 터라 이번에 한 번 더 보았다. 전에도 그랬지만 영화를 본 뒤 원작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영화에서 생략된 것, 영화와 달라진 것, 한나(케이트 윈슬렛 역)에게서 이해할
수 없었던 행동 등을 알고 싶었다. 영화에서 모호했던 한나와 미하엘(영화에서는 ‘마이클’)의 모습을 책을 통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책이 영화보다 훌륭하다, 라는 이야기도 많던데 딱히 영화가 더 낫다, 책이 더 낫다, 라고 평을 내리기엔
무리가 있을 듯하다. 책이 좀 더 잘 표현한 부분도 있고, 영화가 더 훌륭하게 재현한 부분도 있다.
영화 <더 리더>
영화의
배경이 전후 독일이라 한나가 숨기고 있는 비밀은 독일의 정치적 상황(한나는 동독이나 서독의 스파이 역할을 한 게 아닐까 이런
상상)과 맞물려 있는 것은 아닐까 추측을 했다. 그러나 영화 중반쯤 한나의 작은 비밀은 어렵지 않게 알게 된다.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 마이클과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메뉴판을 건네자 당황하는 그녀의 얼굴에서 ‘아, 이 여자는 글자를 모르는구나.’하고 눈치 챌
수 있다. 그러나 그 뒤에 밝혀질 그녀의 큰 비밀은 그때도 그저 짐작으로만 간직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나의
커다란 비밀이 밝혀지면서 한나와 마이클의 개인적인 역사에서 독일(때문에 세계 전체)의 역사로 이야기가 확장된다. 한나는 나치
친위대에서 감시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전력 때문에 전후 처리 과정에서 그녀는 재판대 위에 서게 된다. 그리고
주모자로 몰려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이 과정에서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문맹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보다 차라리 종신형을 언도
받는 것이 더 편했던 것일까, 그녀는? 한나는 그렇다 해도, 마이클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면서 그녀가 그렇게 자기를 포기하도록
방관하는가. 그녀의 선택이기 때문에 그저 존중하는 것일까? 이 둘의 선택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영화에서 갑자기
눈물이 솟구치는 장면이 있는데, 감옥에 갇힌 그녀를 위해 마이클이 책을 낭독한 테이프를 만들어 우편으로 보내고 그 테이프로 한나가
드디어 글을 깨우쳐, 마이클에게 어린아이 같은 글씨로 편지를 보낸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는 정말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졌다. 한나의 죽음 뒤에 그녀의 쓸쓸한 독방을 보며 마이클이 울음을 삼키는 장면도 그렇고. 두 사람의 긴 세월동안 이어진
사랑‘만’을 생각하면 한없이 쓸쓸하고 서글퍼져서 눈물이 흐른다.
그리고 책 <책 읽어주는 남자>영화에서
조금 모호했던 것은 한나가 정말로 마이클을 사랑했는가에 관한 것이다. 마이클의 관점으로 그려져 피상적으로만 다뤄진 한나의
진짜 성격도 궁금했다. 그러나 책 역시 미하엘(마이클)의 시선으로 그녀가 그려지고 있기에 ‘한나’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강박증을 가진 사람처럼 질서와 정돈된 상태를 좋아하고 그것이 파괴되면 참지 못하는 성격을 가진 게 아닐까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책에서는 그런 그녀의 성격이 글자를 모르는 콤플렉스 때문이라는 게 좀 더 명확해 졌을 뿐.
영화는
자칫 한나가 그저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리고 책을 읽어주는 사람이 필요해서 마이클을 이용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법하다. 이런 의문은 책을 읽으면서 그들이 정말 사랑했음을 알게 된다. 영화에서는 그들이 정말 사랑했음을 나타내주는,
아니 한나가 마이클을 정말 사랑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정보를 생략했던데, 일부러 그런 것인지 이 장면은 들어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에서 사면을 앞둔 한나가 느닷없이 자살을 하는데, 그 과정이 설득력이 좀
떨어졌다는 점이다. 마이클이 차갑게 대해서? 세상에 적응하는 것이 두려워서? 홀로코스트의 대리인으로 살았던 자신의 과거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그저 추측할 뿐이었는데, 책에서는 이 점이 더 명확해졌다. 이것도 어떻게 좀 설명을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게다가 영화에서 마이클이 딸을 데리고 한나의 무덤을 찾는 엔딩은 사족 같기도 하고, 느닷없어 낯간지럽기도 했는데 책의 엔딩을
따랐다면 더 여운이 남았을 듯하다.
책을 읽어주다 / 사워를 하다 / 사랑을 하다 영화나 책이나 가장 중요한 행위는 한나와 미하엘이 책을 읽어주고, 샤워를 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문맹인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는 미하엘은 그녀에게 이제까지는 전혀 보지 못했던, 알면서도 알지 못했던 세계를 일깨워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책에서는 특히 한나가 직접 글을 읽을 줄 알게 되면서 홀로코스트를 다룬 책과 자료를 구해서 읽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글을 알기 전
한나는 홀로코스트를 ‘알았지만’ 제대로 알지 못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미하엘을 통해 드디어 세상의 진실과 맞닿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하엘이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는 행위는 그들이 진실로 통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고, 한나가 세계의 진실을
알게 되는 중요한 길이기도 하다. 그런 세계를 알게 해준 사람이 미하엘이므로 나이가 아무리 어릴지언정 한나가 그를 사랑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한나는 무척 청결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샤워하는 것도 자주 등장하고, 제복을 입은 모습도
자주 등장한다. 미하엘을 깨끗하게 씻겨주는 모습도 자주 나온다. 마치 무언가 더럽혀진 것을 씻어내듯 강박적으로 씻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녀가 그렇게 씻어버리고자 했던 것은 어쩌면 자신의 씻을 수 없는 과거는 아니었을까. 의식처럼 행해졌던 책 읽기,
샤워, 그리고 사랑의 순서를 기억한다면. 그들에게 샤워는 단순히 씻는 행동으로만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15세
소년과 36살의 여성이 사랑을 나누는 행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단순히 성적인 욕망을 채우는 관계? 흔히 사랑을 나누는 것을
‘관계를 맺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한나는 홀로코스트를 직접 체험한 세대이며, 어떤 의미로는 그 피해자이자, 주동자이다.
그러나 미하엘은 독일 전후에 태어난 세대이다.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그 둘이 ‘관계’를 맺었다. 성적으로 맺어진 관계이지만,
단순히 성적인 의미만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윗세대가 저지른 일을 아랫세대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어떤 의미로는 윗세대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어야(한나에게 책 읽기를 통해 세상의 진실을 알게 해준 것처럼)하고, 이해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용서와 화해
이렇게 본다면, 미하엘이 한나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한나를 외면했던 자신의 배반을 괴로워하는 모습은 ‘홀로코스트’ 세대를 용서해야 한다는 ‘옹호’로 읽힐 수도 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는 실제로 홀로코스트 주동 세력에 대해 옹호의 입장을 내비친다고 비판받기도 했다. 그러나 거대한 역사
속에서 한 개인은, 특히 한나처럼 아무것도 아닌 개인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생각해 본다면 그런 세력에 대해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한나가 감옥에서 읽은 책 목록에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있던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영화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히틀러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 때문에 ‘관료적
의무’를 ‘기계적’으로 충실히 수행했던 아이히만의 모습을 보면서 한나도 어느 정도는 공감을 하지는 않았을까. ‘그게 나의
일이었는데, 어쩔 수 있었겠느냐’며 말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도덕적으로 해서는 안 될 죄를 짓고 ‘단지 나는 나의 일을 했을
뿐이다.’라고 말하고 때문에 용서를 해야 한다면 세상에 죄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나처럼 무지로 인해,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게 죄라는 것도 모른 채 죄를 지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책 읽어주는 남자>는 이렇게 묵직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에 영화와 책 그
어느 것도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