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진,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
데이비드 바사미언.하워드 진 지음, 강주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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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나는 어른들이 쉽게 체념하는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분명, 바꿀 수 있어 보이는데도 어른들은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고는 했다. 내가 어른이 되고, 아니 지금 이 나이에 이르고 보니, 그 체념, 그 포기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 것이었다.

어젯밤만 하더라도 나는 오늘 아침엔 이재용 구속이라는, 도저히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헤드라인을 드디어 보게 되겠거니 하고 잠들었다. 꿈을 잘 꾸지 않는 내가 어젯밤에는 가방을 잃어버려서 계속 어딘가를 헤매다 깨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스마트폰으로 포털사이트에 접속한 나는 극심한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어서 한 10분인가 망연자실 누워만 있었다. 꿈속에서 잃어버린 가방이 자꾸만 떠올랐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구치소를 나오며 지은 그의 희미한 미소에서 나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절망감을 느낀다. 성 앞에 선 K처럼 무기력할 뿐이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 것이었다.......... 눈물이 나기도 한다. 너무나 분하고, 절망스러워서. 촛불 시위를 또 나가면 무엇하나 싶기도 하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데.... 다시 그냥 책이나 읽고 음악이나 듣고 영화나 보면서 세상과 나를 격리해야겠다 싶어진다...... 그러다가도 이런 나를 추스려야지, 싶어진다. 그럴 때 떠오른 한 사람 하워드 진. 그를 읽으면 이 절망감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으려나.


그의 책을 다시 들춰본다. 이 책의 원제는 “Conversations on History and Politics”로 하워드 진이 미국, 캐나다, 유럽, 남아프리카공화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영어권에 공동으로 방송되는 얼터너티브 라디오의 창립자 겸 진행자인 데이비드 버사미언과 인터뷰한 내용들을 수록했다. 내용은 ‘자본주의의 위기는 구조적인 위기다 / 지배계급의 논리에 저항해야한다 / 문화 지도자들은 대중을 이끌 수 있다 / 나는 전쟁에 반대한다 / 예술가들은 사회적 변화를 위한 역할이 있다 / 비판적 사고와 의심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 역사는 기억되어야 한다 / 국경 없는 세계를 위하여’ 등으로 역사, 정치, 사회에 관한 하워드 진의 철학과 신념을 만나보기에 더없이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터뷰 진행자인 데이비드 버사이먼은 저널리스트이자 인터뷰의 대가로 알려졌는데, 그가 하워드 진에게 던지는 질문을 보면 ‘인터뷰의 대가’라는 명성을 괜히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질문의 내용은 물론 질문을 던지는 방식 등이 무척 날카롭고 인터뷰이 못지않게 해박한 지식을 겸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살아있는 미국역사>나 <미국 민중사>와 같은 책을 먼저 읽고 이 책을 읽는다면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듯하다. 하워드 진은 미국에서도 학계의 이단자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미국 정부 및 지배계급에 거침없는 비판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단순히 말로만 쓴소리를 내뱉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 흑인(유색인), 노동자, 노숙자, 여성, 억압받는 자들 등 항상 약자 편에서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살아왔다. 그런 그의 삶의 기록이 이 책에서는 여과 없이 드러나 책을 읽다가 울컥하고 눈물이 나기도 한다.


원제와는 조금 다른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라는 한국어판 제목이 그리 생뚱맞지 않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하워드 진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길인가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하워드 진은 역사상 유례없이 빈부의 격차가 심해진 오늘날 미국 사회의 갖가지 병폐를 꼬집으며 전쟁광 부시 정부와 그들과 함께 결탁한 자본가, 민주당 공화당 양당 정치가들에게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물론 아울러 이러한 지배계급에 맞서기 위해 민중은 계속 깨어 있기를 촉구한다.


예를 들어, 지배계급의 논리에 저항할 것, 잘못된 역사를 잊지 말고 기억해서 그와 같은 실수를 절대 되풀이하지 않도록 할 것(역사를 잊기를 바라는 것은 언제나 지배계급이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도 금세 쉽게 잊는다), 예술가와 문화지도자들의 역할이 민중에게 일깨우는 힘은 그 어떤 힘보다 막강하다. 때문에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비판적 사고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텔레비전은 몇몇 좋은 프로그램을 제외하고는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멍청하게 받아들이기에 무척 좋은 도구라고 하워드 진은 지적한다) 등등.


마지막에 수록된 ‘실망을 이겨내고’라는 하워드 진의 스펠먼 대학 졸업 축사는(그는 1956년 애틀랜타에 있는 흑인 여자 대학 스펠먼 대학에서 교수로 임용되었으나 1963년 ‘불복종’을 이유로 해고 당한다.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하고, 보수적인 학교 운영에 반발한 학생들의 시위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5년 하워드 진은 스펠먼 대학으로 돌아가 명예학위를 받았고 졸업식 축사를 했다) 이 책에서 그가 이야기하는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절망적인 현실에 놓여 있는 지금, 절대로 실망하지 말 것을 하워드 진은 당부한다. 역사는 그러한 때 지배계급에 저항하는 민중의 뜨거운 움직임에 의해 언제나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여 왔음을 지적하면서.


“물론 여러분이 현실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걸 압니다. 일자리를 구하고 결혼을 해서 자식도 낳아야겠지요. 부자가 되어 우리 사회가 성공이라 규정하는 ‘성공’을 거두기도 할 겁니다. 재산을 모으고 사회적 지위와 권위도 쌓아갈 겁니다. 하지만 ‘좋은 삶(Good Life)’은 그런 것만으로는 충족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좋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무슨 일은 하던, 교사가 되던, 사회 운동가가 되던, 사업가, 변호사, 시인, 과학자 등 무엇이 되던, 여러분의 자식, 아니 모든 아이를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여러분의 삶을 조금이라도 투자하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세대는 전쟁 종식을 강력히 요구하고, 여러분의 세대는 역사에서 아직 이뤄내지 못한 일을 해내고,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구분 짓는 국경을 지워버리길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이 사회에서 성공이라고 평가하는 그 성공에 안주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부당한 규칙에까지 순종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감춰진 용기를 마음껏 끌어내서 행동하길 바랍니다. 흑백을 넘어서 우리가 귀감으로 삼을 사람은 많습니다. 콘돌리자 라이스, 콜린 파월, 클라렌스 토마스 같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귀감으로 삼지는 마십시오. 그들은 권력자와 부자의 하수인이 됐을 뿐입니다. W.E.B 듀보이스, 마틴 루서 킹, 맬컴 엑스, 매리언 라이트 에델먼, 제임스 볼드윈, 조세핀 베이커 그리고 평화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지배집단에 도전한 훌륭한 백인을 귀감으로 삼으십시오.”


미국 국부의 상당한 부분이 군사비에 지출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모두가 안보라는 이름하에 자행되는 짓이지요. 하지만 일상적인 삶에서 국민의 안전은 도외시됩니다. 국민이 노동을 중단하고 싶은 연령에 이르렀을 때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삶이 진정한 안보입니다. 모든 국민이 비용을 걱정하지 않으면서 의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삶이 진정한 안보입니다. 우리가 일할 수 있을 때 언제라도 일자리를 가질 수 있는 삶이 진정한 안보입니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구조적인 위기다’ p.14)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 가운데는 공직에 나선 적이 없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어쩌면 당연히 그랬어야 합니다. 일단 공직에 나서면 역사적으로 덜 중요한 인물이 됩니다. 물론 지배계급의 눈에는 의사결정권을 갖는다는 점에서 더 중요한 인물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회적 변화를 유도하는 변수로서는 덜 중요해집니다. 왜냐고요? 공적에 취임하는 순간부터 부와 권력에서 비롯되는 모든 수단에 길들여지기 때문입니다. (‘문화 지도자들은 대중을 이끌 수 있다’ p.61)

대니 셰터라는 독불장군 같은 방송인이 쓴 <오랫동안 볼수록 아는 건 줄어든다 The More You Watch, The Less You Know>라는 책이었을 겁니다. 맞습니다. 정확한 지적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미국인이 텔레비전에서 정보를 얻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텔레비전은 기업과 정부의 시녀에 가깝습니다. (‘나는 전쟁에 반대한다’ p.90)

권력을 쥔 사람들 우리가 모든 걸 잊기를 바랍니다. 기억하지 못해야 우리가 어제 태어난 사람처럼 기업의 지배 하에 있는 언론이나 정부가 우리에게 하는 말을 점검할 방법이 없을 테니까요. 기억, 즉 역사는 과거의 거짓말과 속임수를 적발하는 수단이며, 겉으로는 무력해 보이는 국민이 권력을 쥔 지배계급을 무찌를 수 있는 무기입니다. (‘역사는 기억되어야 한다.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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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치는 여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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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사두었던 책을 뒤늦게 읽었다. 처음 살 때는 의욕에 불탔는데 이 책은 읽기 힘든 구석이 꽤 있다. 그러다 보니 계속 미루게 되었다. 드디어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를 손에 들게 된 이유는 마찬가지로 최근에 본 영화 <피아니스트>의 영향이 꽤 크다(‘피아니스트’라는 제목을 가진 영화는 두 편이 있다. 하나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 그리고 또 하나는 오늘 이야기 할 미하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 : La Pianiste / The Piano Teacher>).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영화 <피아니스트>가 어떤 분위기일지 대충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이 영화는 굉장히 불편하고, 당혹스럽고, 폭력적이다. 그러면서도 무척 강렬하다. 그리고 미하엘 하네케 <피아니스트>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배우 ‘이자벨 위페르’는 눈부시다.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정말 매혹적이다. 끔찍한(?) 영화 <피아니스트>의 소문은 익히 들어 대충 어떠리란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영화가 그토록 당혹스러울 줄은 몰랐다. 영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멍했다. 이자벨 위페르가 연기했던 ‘에리카’ 그녀의 심리가 너무나도 궁금해서 드디어 책을 읽기로 결심했다. 영화만으로도 대충 ‘에리카’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수는 있으나 책은 영화보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기에 이 당혹스러운 작품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졌다. 영화와 책은 거의 비슷하다. 책을 읽는 내내 에리카에 ‘이자벨 위페르’를 대입해 상상했다. 정말 완벽한 조화였다.

피아노 교사인 ‘에리카’는 삼십대 중반임에도 아직 엄마와 산다. 특별하게 사귀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직장과 집을 오가는 생활이 거의 전부다. 그런데 이 모녀 관계는 좀 특이하다. 엄마는 에리카의 일상을 감시하고 조종한다. 엄마는 에리카가 어릴 때부터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에리카에게 음악 교육을 시켰고, 특별한 재능이 없는 딸인데도 천재로 치켜세우며 ‘피아니스트’를 만들고자 ‘에리카’에게 거의 모든 쾌락을 금지한다. 남자를 사귀는 것은 물론, 친구를 만나는 것조차 ‘관리’한다. 더 좋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려면 돈을 모아야 한다며 쇼핑도 금지한다. 그리고 이 모녀는 한 침대에서 잔다! 마치 부부처럼! 엄마의 지나친 억압과 구속 때문에 그 안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에리카, 그러나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구속과 억압에 길들여져 있다.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안에서 평온함을 느낀다.

이렇게 키워진 에리카는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는 온갖 행태를 한다. 그녀는 자신에게 금지된 물건을 훔친다. 그렇지 못하면 남들도 갖지 못하도록 파괴해버린다. 엄마와의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대중교통을 타고 타인에게 은밀한 폭력을 행사한다(꼬집기, 발로 짓밟기 등등). 때로는 면도칼로 자해를 한다. 그러나 그녀는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무엇보다 엘프리데 옐리네크 <피아노 치는 여자>와 미하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가 ‘외설’ 혹은 ‘음란물’ 취급을 받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에리카는 여자임에도 남자들이 가득한 포르노샵에 들러 포르노물을 즐겨본다(영화와 책에선 굉장히 충격적인 장면이 있는데 그건 차마 말 못하겠다). 뿐만 아니다. 그녀는 숲에서 사랑을 나누는 커플을 찾아 훔쳐보는 것도 즐긴다(영화에서는 자동차극장에서 섹스하는 커플을 훔쳐보는 장면으로 나옴).

그녀는 엄마가 이성 관계조차 금지하다 보니 성에 굶주린 것일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에리카는 엄마의 감시망을 교묘히 피해 몇몇 남자와 사귀어왔고 그들과 당연히 섹스를 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정상적인 관계에서는 쾌락을 느끼지 못한다. 마치 자신의 몸을 자해해도 아무런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그런 그녀에게 음악 교습소 제자 중 하나인 발터 클레머가 다가온다. 당연히 에리카와 그녀의 엄마는 클레머를 경계하고, 그 둘만의 기이하지만 평온한 일상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밀어낸다. 그러나 집요한 클레머의 구애는 드디어 성공! 에리카와 키스를 하고 그 이상을 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러나 에리카는 그 순간 이른바 ‘정상적’이라고 할 만한 반응이 아닌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그 이후에도 에리카는 클레머에게 ‘편지’를 써 ‘편지’안에 쓰인 대로 자신을 대해주길 바란다. 영화에서는 이 편지의 내용이 자세하게 나오지 않고 관객이 그저 추측할 수 있게 해줄 뿐이다. 반면 책에서는 구구절절 그 내용이 소개된다. 편지 속 에리카의 요구는 참 당황스럽다. 그녀는 클레머가 그녀를 학대해주길 바란다. 채찍을 휘둘러 구타해주길 바란다. 그런 에리카 잎에서 망연자실한 클레머. 과연 이들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아니, 이 여자 에리카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는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한다. 그녀는 실제로 아버지가 정신병원에서 일찍 생을 마감하자 엄마와 단둘이 살았고, 어릴 때부터 ‘음악가’로 성장하길 바라는 엄마로부터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어디까지가 자전적인 이야기일지는 가늠되지 않는다. 만약 이 책에 담긴 모든 내용이 ‘자전적’ 내용이라면 엘리네크 그녀는 정말 자신의 ‘상처’를 폭로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간절히 치유되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싶어진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영화도 마찬가지) 결코 정상이라고는 할 수 없는, 기이한 여자 에리카에게 한없는 연민이 느껴진다. 평생을 억압에 시달려왔고,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엄마에게 아버지의 역할(남성성의 대리)까지 강요받은 여자. 정상적인 관계를 꿈꾸면서도 이제는 그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방법을 잊어버린 여자. 그래서 가학/피학의 도착적인 성적 일탈로 억압된 상태를 벗어나고자 꿈꾸는 여자. 그 여자의 서늘한 삶이 오래도로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장면이자 영화의 엔딩장면이, 그 장면 속의 이자벨 위페르의 처절한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 <피아니스트>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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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17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리카의 자녀 교육법이 사드와 정반대입니다. 사드의 소설에 나오는 변태 백작은 딸에게 쾌락을 즐기는 것의 장점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래서 딸을 거의 감금하다시피 키우고, 결국 아버지와 딸의 비정상적인 관계가 형성되고 맙니다. 제가 언급한 사드의 소설과 옐리네크의 이 소설을 비교해보고 싶군요. ^^

잠자냥 2017-01-17 12:41   좋아요 0 | URL
어떤 관계든 비정상적인 인간 관계가 한 사람에게 불러오는 피해는 엄청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소설은 사드의 <소돔 120일> 인가요?

cyrus 2017-01-17 13:14   좋아요 1 | URL
제가 언급한 사드의 소설은 단편입니다. 제목이 ‘외제니 드 프랑발‘입니다. 《사랑의 범죄》에 수록되었습니다.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 / 모비딕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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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둔지는 조금 되었는데, 이제야 읽었다.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책을 이제야 읽다니! 이럴 수가’! 하는 마음과 ‘이제야 읽다니 참 다행이다’ 이런 마음. 앞으로 카렐 차페크의 작품을 하나씩 읽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무척 행복하달까.

이미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열혈 독자층을 거느린 카렐 차페크. 그러나 나처럼 그가 낯설었던 이들에게 소개하자면, 차페크는 카프카, 쿤데라와 함께 체코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란다. 그런데 내가 왜 생소했지? 싶었는데, 아하 ‘SF 및 환상소설의 거장’으로 꼽힌단다. 평상시 SF나 환상소설 분야에 크게 관심이 없던 내가 그의 이름이 낯설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작가를 평생 모르고 살았다면 정말 후회할 뻔했다. 차페크는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와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이 두 권의 책, 즉 <주머니 이야기 (Pocket Tales)>로 미스터리를 철학적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찬사까지 받고 있단다. 정말 그럴까? 괜한 치켜세움이 아닐까 이런 의심도 들었다.

<오른쪽>에 실린 첫 작품 <발자국>을 읽은 순간, 그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이 한 단편만으로 카렐 차페크의 모든 작품을 찾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오른쪽 주머니>와 함께 <왼쪽 주머니>도 사두었는데, 다른 책도 더 궁금해서 검색해본 결과 열린책들에서 나온 <도룡뇽과의 전쟁> <곤충 극장>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부랴부랴 읽던 책을 일단 접고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도룡뇽과의 전쟁>도 빌려왔다. 이놈의 책 욕심! 그밖에 다른 작품들도 몇 권 더 번역되어 있고 카렐 차페크 평전도 나와있더라. 작품을 모두 읽은 뒤에는 그의 평전도 읽어 볼 생각이다. 올해는 아마 카렐 차페크와 함께하는 한 해가 되려나?

여하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발자국>은 어찌 보면 참 단순한 스토리다. 눈 내린 밤 ‘리브카’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하얀 눈을 밟으며 기분 좋게 집으로 향하던 그는 눈 위 몇 개의 발자국을 보며 이건 누구 발자국일까, 어떤 남자의 발자국인가, 어떤 여자의 발자국인가 홀로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걷는다. 그런데 순간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만다. 길 한 가운데서 이제까지 죽 이어지던 발자국이 돌연 사라지고 만 것이다. 앞으로 나아간 흔적도 없고, 그렇다고 자기가 온 길을 다시 발자국을 밟고 뒷걸음질 쳐서 간 흔적도 없다. 리브카는 이 발자국의 주인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고민 고민하던 끝에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바르토세크 반장을 부르기에 이른다.

길 한복판에서 사라진 발자국을 보며 리브카와 바르토세크는 한참 설전을 벌인다. 리브카는 완전한 미스터리라고 주장하고, 바르토세크 반장은 이런 일은 미스터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 둘의 대화에서 차페크의 ‘미스터리’에 대한 관점을 엿볼 수 있는데, 그 시선이 무척 흥미롭다.

 “하지만, 반장님” 리브카가 힘없이 말했다. “최소한의 설명이라도 해주셔야 하는 게 아닙니까.... 이건 정말 미스터리한 일입니다.....”
 “그렇긴 합니다.” 반장이 신중하게 동의를 표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미스터리한 일이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사실 모든 집, 모든 가정이 다 미스터리입니다. 여기 오는 도중에도 저기 있는 작은 집에서 어떤 여자가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미스터리는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반장은 리브카에게 이런 말도 덧붙인다.

 “...... 정말로 우리는 이 세상의 일에 무지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분명히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법과 질서는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정의는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경찰도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거리를 오가는 모든 사람은 미스터리입니다. 잡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물건을 훔치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잡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왜 신문들은 ‘시체 발견 미스터리’ 같은 제목들을 뽑아대는 걸까요? 시체에 무슨 미스터리가 있습니까? 우린 시체를 발견하면 이런저런 검사들을 한 뒤 사진을 찍고 해부를 합니다. (.....) 모든 범죄는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적어도 동기 같은 것은 알 수 있죠. 하지만 애완 고양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건 미스터리입니다. 가정부의 꿈 혹은 아내가 창밖을 내다보면서 떠올리는 생각, 이것들도 미스터리합니다. 범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게 미스터리인 셈이죠. 범죄란 엄격하고 상세하게 정의가 내려진 현실의 한 단면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범죄사건이 미스터리라고 생각하지만, 바르토세크 반장은 범죄는 오히려 명료하다고 이야기한다. ‘모든 집, 모든 가정이 다 미스터리’라는 이야기, ‘애완 고양이의 생각’이 미스터리라고 하는 이야기에서 나는 이 작가를 앞으로 꽤 좋아하겠는구나 싶어졌다. 몇 장 더 넘겨서 또 다른 단편 <푸른 국화>를 읽고 난 뒤에는 카렐 차페크를 사랑하게 될 것 같은 심정까지 들었다.

<푸른 국화>는 매우 희귀한 꽃인 ‘푸른 국화’를 찾아 헤맨 한 남자의 이야기다. 남자는 어느 왕자의 집에서 정원사로 일했다. 왕자는 네덜란드에서만 1만 7천종에 이르는 화초를 수집해 올만큼 대단한 화초 수집가였다. 어느 날 남자가 길을 걷노라니, 그 마을에서 클라라로 불리는 정신이 조금 모자란 소녀가 달려와서 그를 껴안으며 꽃다발을 건넸다. 그 꽃다발 속에는 푸른 국화 한 송이가 함께 있었다. 처음 보는 그야말로 정말 푸른 국화였다. 이 희귀한 꽃을 주인인 왕자에게 남자는 가져갔고, 왕자는 수집욕에 불타올라 클라라를 불러오게 해서는 푸른 국화를 함께 찾아다닌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그 뒤로 이 소녀는 때때로 푸른 국화를 꺾어왔고, 왕자와 정원사는 한층 더 혈안이 되어서 꽃을 찾아다닌다. 마을 사람들에게 현상금까지 붙여서는 푸른 국화를 찾아오게 한다. 그러나 그마저도 헛수고로 그친다. 그럼에도 클라라는 어디선가 푸른 국화를 꺾어왔다. 사람을 붙여서 온종일 감시해도 헛일이었다. 소녀는 저녁 무렵이면 홀연 사라져서 푸른 국화를 갖고 오곤 했다. 급기야 왕자는 그녀를 감옥 안에 가두어버리고 만다. 단지 소녀가 푸른 국화를 모조리 꺾지 못하게 하려는 생각에서 말이다.

“나는 사람이 곤궁에 빠지거나 좌절을 겪으면 심술을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해. 살다 보면 그 정도쯤은 저절로 알게 되거든....” 왕자의 횡포를 보다 못한 정원사는 결국 왕자에게 쏘아붙이고는 기차역으로 향한다. 그 마을을 영영 떠난 것이다. 기차가 출발한 순간, 푸른 국화를 다시 볼 수 없음에 어쩐지 서글퍼져 엉엉 울던 그는 창밖을 보다가 철도변에 무언가 푸른 물체를 보게 된다. 다급해진 그는 기차를 급정거 시키고 그 푸른 물체를 찾아 미친 듯이 달려간다. 그리고 발견한다. 푸른 국화 밭을. 그곳은 철도변이라 통행금지 표지판이 있었다.

 

“자, 이제는 눈치 챘을 거야. 바로 보행 금지 표지판이 비밀의 열쇠였던 거야. 그것 때문에 아무도 철로를 건너 국화를 찾을 수가 없었던 거야.........  바로 그거야. 오직 바보 클라라만이 거기에 갈 수 있었던 거야. 그녀는 제정신이 아닌데다가 글도 읽지 못하니까.”



그는 집으로 가져온 푸른 국화에 클라라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정성껏 돌본다. 나는 이 이야기가 무척 아름다웠다. 정신이 모자란, 바보 소녀만이 ‘보행 금지’라는, 그러니까 ‘금기’의 영역을 깨버렸기에 그토록 찾아 헤맨 보물 같은 ‘푸른 국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짧고 단순한데도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정원사가 푸른 국화 밭에서 그런 깨달음을 얻고 기뻐 웃었을 장면이나, 클라라가 ‘금기’를 깨고(아니 그녀에겐 어쩌면 금기란 없을지도 모른다) 푸른 국화 밭에서 마치 광년이(?)처럼 웃는 장면을 상상하니 무척 아름답다.

카렐 차페크의 나머지 단편들도 거의 이렇게 ‘미스터리’ 속에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다가 어느 순간 깊은 감동을, 또 때로는 큰 웃음을 준다. 그 기본 정서는 인간에 대한 따스한 연민,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이 불쌍한 존재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 등이 담겨 있어서 훈훈한 마음이 들고는 한다.

<시인>에서는 정말 말 그대로 빵 터졌다. 뺑소니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목격자는 어느 시인이다. 시인은 뺑소니 사건에 사소한 것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차량 번호판 따위는 볼 생각도 없었다. 세부적인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던 시인. 답답한 경찰들은 그렇다면 전체적인 분위기라도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하고, 시인은 한참 고민하더니 그때 그 사건을 목격한 뒤 집으로 돌아가 쓴 시가 있다며, 어떤 단서가 있을 거라면서 그 시를 경찰에게 읽어준다.

 

 어둠 속 빌딩들의 행진, 하나둘 멈춰 서네
 여명은 만돌린을 연주하고
 소녀야, 너는 왜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가
 120마력의 속도로 세상 끝으로 달려가는
 혹은 싱가포르를 향하여
 저 나는 듯이 달려가는 차를 세워라
 우리의 위대한 사랑이 먼지 속에 뒹굴고 있네
 꺾어진 한 떨기 꽃과 같은 소녀
 백조의 목과 여인의 가슴, 북과 심벌즈
 나는 왜 이리 구슬피 우는가.


아, 정말 시인들이란! 이 시를 읽는데 웃다가 눈물 나는 줄 알았다. 카렐 차페크의 이야기들은 단순히 흥미진진하고 웃기는 데 끝나지 않는다. 짧은 이야기임에도 사람과 인생에 대한 통찰력이 남다르다. 그리고 그 기본은 인간에 대한 연민이다.

수많은 죄를 짓고 저승에 온 범죄자에게 신(神)은 직접 재판을 하지 않고 똑같은 인간 재판관들에게 재판을 맡긴다. 범죄자는 왜 신이 직접 재판하지 않고 자신과 같은 사람이 재판을 하느냐고 따져 묻는다. 거기에 신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재판관이 모든 것을 안다면..... 그야말로 완벽하게 모든 것을 안다면 말일세, 그는 재판을 할 수가 없네. 모든 사정을 이해하면 무척이나 가슴이 아프다네. 그러니 어떻게 재판을 할 수 있겠나? 자네를 재판하려면 오직 자네 범죄에 대해서만 알아야 하네.” (<최후의 심판>, 234쪽)



모든 것을 알면 어떤 범죄자에게도 연민이 들어 제대로 재판할 수 없다는 신의 말. 그 심정이 어쩌면 카렐 차페크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란 정말 어쩔 수 없는 존재들’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런 인간을 불쌍하고 가엾게 바라본 카렐 차페크. 그의 작품은 문학이 줄 수 있는 모든 기쁨을 담고 있다고 이 단 한 권의 책을 읽고 섣불리 장담한다. 그를 이제야 알게 되어서 안타깝다. 그러나, 그를 지금, 알게 되어서 행복하다.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를 읽기 위해 글을 이만 마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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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 / 모비딕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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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 차페크! 그를 이제야 알다니! 안타깝다. 그러나 그를 이제라도 알게되어 기쁘다! 미스터리에 관한 놀라운 생각.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에 웃기고 울리고 훈훈한 감동. 그 기본은 ‘어쩔 수 없는 인간‘들에 대한 따뜻한 연민이다. 그의 모든 작품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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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3
피에르 드리외라로셸 지음, 이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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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말의 <도깨비불>을 본 뒤 이 책을 다시 읽으니 알랭의 심리가 한결 이해된다. 성적불능, 사랑불능, 소통불능인 알랭. 제도와 물질만능주의 부르주아의 삶을 조롱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그 물질에 기대산다. 그런 모순 속에 삶의 불능을 겪은 그가 최후에 내린 선택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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