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158
하인리히 뵐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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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뵐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이후로 관심을 갖게 된 작가이다. 뵐이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에서 황색언론에 의해 갈기갈기 찢긴 한 여인의 삶을 다루었다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는 가난한 부부의 삶을 이야기한다. 내가 하인리히 뵐의 작품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별다를 게 없다. 그의 문체는 건조하고 담백하면서 크게 꾸밈이 없다. 내가 좋아하는 문체! 그런 문장으로 삶의 모순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피해를 당하는 개인에 대해 나름 따뜻한 연민의 시선을 잃지 않는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의 ‘카타리나’에게도 그랬고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가난한 부부 프레드와 캐테에게도 그렇다.

작품의 배경은 2차 대전이 끝난 후의 독일이다. 프레드와 캐테는 가난한 중년 부부다. 아이들은 셋이나 있고, 캐테는 심지어 임신을 또 한 것 같아 두렵기 그지없다. 좁은 단칸방에서 복작대며 살다 보니 무엇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아이들은 집주인 눈치를 보느라 숨죽여 노는 법을 이미 터득했고, 옆방에 소리가 들릴까 부부는 마음 편히 사랑을 나눌 수조차 없다. 이와는 달리 옆방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시시때때로 섹스를 하는 바람에 캐테는 아이들이 그 소리를 들을까 전전긍긍한다. 가난에 찌들어 힘겹게 살다 보니 프레드는 자기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손찌검을 하게 되기도 하고, 결국 그렇게 사는 것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와 홀로 생활하기 시작한다.

소설은 이미 이런 상황 속에서 시작하며 프레드와 캐테의 시선이 교차하면서 전개된다. 한 번은 프레드가 그의 생활을 이야기하고, 또 한 번은 캐테가 아이들과 좁은 단칸방에서 씨름하는 자신을 이야기한다. 작품은 이런 부부의 어느 주말 48시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이틀간의 이야기 속에서 전후 독일의 피폐한 상황, 가난에 찌든 하층민의 삶,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의 위선적인 면모와 가난한 이들에게 절대로 구원이 되지 못하는 카톨릭교회의 이중적인 모습이 낱낱이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는 프레드가 아내 캐테와 함께 할 ‘지상의 온전한 그들만의 방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 돈을 빌리러 다니며 느끼는 온갖 상념이 무척 인상 깊다. 삶의 비애가 절로 느껴진다. 삶에 지치고, 꿈이 부서진 중년 남자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인생의 씁쓸한 단면에 공감이 간다. 어떤 구절구절에서는 쿵하고 울림이 인다. ‘책가방을 여는 데서 시작하여 어딘가의 사무실 의자 위에서 끝나는 죽음의 순환 속에 매여 있는 내 아이들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던 것이다.’와 같은 문장….


캐테의 시선 또한 마찬가지다. 조용하게 노는 습관이 이미 몸에 배어버린 아이들을 보며 슬퍼하고,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터덜터덜 가는 아이의 뒷모습에서 자신의 잃어버린 과거를 떠올리며 눈물짓는다. 프레드가 운 좋게 돈을 빌려 싸구려 호텔을 빌리게 되면 그를 만나러 가지만, 그렇게 가는 길 역시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이 부부는 정말로 그들이 원하는 따뜻하고 깨끗한 집 한 칸을 다시 얻게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가난한 부부의 이야기를 다루었기 때문에 이와 비슷한 소재를 다룬 여러 소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그런 작품들 가운데서도 이 작품이 전후 독일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지금까지 ‘고전’으로 칭송받으며 하인리히 뵐을 독일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올려놓게 된 이유는 ‘깊이’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게 아닐까. 갈수록 ‘가난’이 무능력과 게으름 등 개인 탓으로 돌려지고, 가난한 사람에 대한 멸시도 서슴지 않는 요즘 같은 때,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그런 시선이 과연 온당할까 하는 질문을 던져준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 작품은 현재에도 그래서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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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6-12-08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여지껏 이 책은 ‘당연하게‘ 읽은 줄 알았거든요. 근데 잠자냥 님 글을 읽어보니 무척 생소한 겁니다.
착각이었습니다. 읽지도 않고 읽은 듯한 느낌. 아... 전혜린의 같은 제목 책 때문에 그랬던 듯 합니다.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도 무척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그리고...>ㅎㅎㅎ 잽싸게 보관함에 챙겨놨습니다.

잠자냥 2016-12-08 16:58   좋아요 0 | URL
네, 제목은 아마 국내에 전혜린 때문에 많이 알려졌겠지만 실제로 이 책 읽어보신 분은 많지 않을 것 같아요. <어릿광대>보다 저는 이 작품이 더 좋더라고요. ㅎㅎ
 
바다와 독약 창비세계문학 28
엔도 슈사쿠 지음, 박유미 옮김 / 창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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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포로에게 자행된 생체실험. 실제 사건을 다루며 엔도 슈사쿠는 집요하게 묻는다. 타인이 보지 않을 때, 사회로부터 질책받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서도 인간의 양심은 온전히 작동할 수 있을까? 단순한 폭로가 아니라 생체실험에 가담한 인물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좇는 구성이 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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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마음 대산세계문학총서 129
하비에르 마리아스 지음, 김상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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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이야기들, 도무지 이 이야기는 대체 지금 왜 하는 거지 싶은 소재들이 뒤로 갈수록 퍼즐처럼 맞춰진다. 그러다 한순간 쾅! 하나의 완벽한 구조를 이루며 주제를 전한다. 한 이불 덮고 자더라도 등돌리면 완전한 타인인 부부, 연인 또는 모든 인간관계의 덧없음 혹은 그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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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 책이 집에 몇 권이나 생긴 것인지 원....
이 도쿠리와 잔 때문에 도저히 안 살 수가 없었다.
암튼 이렇게 나쓰메 소세키 전집을 완성하는구나.

날씨도 살짝 추워지니 소세키 작품 하나씩 다시 읽기도 딱 좋은 계절이다.저 도쿠리와 잔에 따뜻한 정종 담아 마시며 소세키 전집 중 아무거나 펼쳐들고 아무 구절이나 읽으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을 텐데......

음 시절이 하 수상하여 그 마저도 사치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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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6-10-28 2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머머!! 여기도 도꾸리와잔에 혹하신 분이 계셨군요.... 호호호
잠자냥 님은 그래도 `마음`으로 깔맞춤이군요 ^^

잠자냥 2016-10-28 21:54   좋아요 1 | URL
ㅋㅋ 예 이게 진작 나왔으면 더 좋았을 걸 그랬죠. 한 두 권은 똑같은 걸 더 샀네요. ㅋ 사케 잔 하나는 명암으로 받았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마음으로 맞춘 것도 나쁘지 않네요. ㅎㅎ
 
다정 문학과지성 시인선 468
배용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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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는 이 쓰레기도 회수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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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0-27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패기 될 시집입니다..ㄷㄷㄷ이 배신감을 어떻게 위로 받을 수 있을까요 ㅠㅠ

잠자냥 2016-10-27 12:34   좋아요 1 | URL
어디선가 이 시집 제목을 <욕정>으로 바꾸라던 댓글을 보고 쓴 웃음을 지었습니다.

아주 예전에는 저도 문지시집 꽤 많이 사모았는데, 최근에는 최승자 시인 시집 나왔을 때만 사게 되더군요...... 그게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느끼게 될 줄이야.... 에효.....

cyrus 2016-10-27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국내 문단에 관심을 주지 않아서 모르는 것도 있지만, 생소한 이름의 시인들이 불미스러운 문제를 일으켜서 이름이 알려지는 것 같습니다.

잠자냥 2016-10-27 15:14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저도 요즘 시인들은 잘 모르는데 이런 사건들로 인해 알게 되는군요. 제 서재에 이런 책이 올라오는 것조차 끔찍하고 꺼려집니다만, 혹시라도 잘 모르는 독자들이 이런 쓰레기를 읽게 되는 일이 없길 바라는 마음에 올려보았습니다. 이런 사건들로 저는 더 한국현대문학에서 멀어질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