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알라딘 중고서점에 책을 팔러 갔다. 이사 오기 전 세 박스. 판다고 팔았는데도 이사 오고 나서 책을 정리하다 보니 또
팔아야 할 책들이 눈에 띄었다. 그렇게 책을 몇 권 챙겨들고 알라딘에 갔다. 4권 팔았더니 만 원짜리 한 장을 준다. 팔아도 별
미련 없을 책들이었지만 손에 쥔 돈을 보고는 멈칫. 잠시 후회한다. 그냥 갖고 있을 걸 그랬나.
책이 짐스러워
웬만하면 사지 말자고 했지만 나의 눈은 어느덧 중고서점에 꽂힌 책을 훑어보고 있다. 마치 보물을 발견하리라는 듯. 게걸스럽게
책장을 탐했다. 아니나 다를까 침이 꼴깍 넘어가는 책이 몇 권 눈에 띈다. 하지만 사실 그런 책들은 알고 보면 거의 내가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거나 이미 갖고 있는 책들이었다. 그런데도 욕심이 나는 것이다.
처음 눈에 들어온 책은 창비세계문학단편 전집이었다.
모두 50%할인된 가격이었고 책도 거의 새 책이나 다름없었다. 아까웠다. 나는 이미 갖고 있는데도 왠지 아까워서 발만 동동
굴렀다. 또 사두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아서라.... 스스로 꾸짖으며 돌아섰다. 또 다른 책은 <롤리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으로 나온, 김진준 번역본이었다. 나는 민음사에서 나왔던 책으로 이미 읽었는데, 이 번역이 꽤 괜찮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그런지 이 판본으로 꼭 한 번 다시 읽어보고 싶었다. 반값인데 살까, 말까, 아니야 도서관에 있잖아. 손에
넣었다 들었다를 반복했다. 결국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로 하고는 돌아섰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니 어쩐지 계속 생각난다. 집사재에서
나왔던 레이먼드 카버 단편집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도
보는 순간 두근두근했다. 가격은 2천 4백 원. 예전에 읽었고 문학동네에서 나온 버전으로 카버 단편집은 모두 갖고 있으면서도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냥 살까.... 하다가 결국 이 책도 내려놓고 왔다. 하지만 집에 오니 또 아른아른.
그런데
이날, 나는 이렇게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결국 두 권을 손에 들고 왔다. 두 권 모두 이미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책들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반값에 팔리고 있는 걸 보니 도저히 그냥 올 수가 없었다. 수잔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과 강유원
<인문고전강의>였다. 두 권 모두 새 책이나 다름없다. 얼마 전에 출판된 강유원의 <철학고전강의>를 사뒀던
터라 드디어 강유원의 철학, 역사, 인문 고전강의 시리즈 세 권을 나란히 꽂아두고 보니 흐뭇하기 그지없다. 이 소장욕을 어찌할
것인가! 두고 온 책들이 안타깝다. 눈에 아른거린다. 집이 넓고 이사를 다니지 않아도 된다면 나는 얼마나 책을 더
사들일까.....

강유원 시리즈 완성! ㅋ <은유로서의 질병>도 꼭 사고 싶었었다.
갖고
싶은 책을 이런저런 이유로 사지 못하고 돌아서는 마음은 안타깝기 짝이없다. 그런데 이렇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단순히 갖지
못해서가 아니라, 눈앞에서 무수히 많은 책이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한다면 그 심정은 어떨까? 날마다 자기 앞에서 분서갱유가
일어난다면?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 바로 그런 인물이 나온다. 주인공 한탸는 삼십오 년째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하고 있다. 지하실에서 늘 맥주를 마시며 무려 삼십오년 째 폐지를, 정확히는 폐지가 된 온갖 책들을 압축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 책들은 대부분 사회주의 논리에 어긋나는, 금서가 된 책들이다.
그러나 그 폐지더미 속에서 단어와
문장,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아름다움에 빠져버린 그는 온갖 책들을 읽어가며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아간다. 도저히
압축기로 집어넣을 수 없는 책들은 몰래 갖고 나와 따로 추려서 꾸러미를 만들기도 한다. 그의 집은 그런 책꾸러미로 그득 차고
넘친다. 쥐가 들끓고 눅눅하고 어두운 지하실. 너무도 열악하고 또 너무나도 한없이 고독하기만한 그 작업장이 그에겐 세상 어느
곳보다도 아늑하며 위안을 주는 천국이다. 바로 책과 함께, 그 책들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이런저런 작가들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런 '시끄러운 고독'을 사랑하리라.
130쪽
분량의 짧은 작품이지만,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 주는 울림은 크고 길다. 책을 미치도록 사랑하고 그 안에서 위로와
구원을 받은 한탸가 바로, 자기 손으로 그 책들을 파괴해야만 하는 직업을 가졌다는 아이러니. 그러한 틈에서도 단어와 문장이
빚어내는 숭고하고도 아름다운 세계를 알아보고 그 세계에 취한 인간. 그 아름다운 언어가 만들어낸 문학과 철학, 사상에 담뿍
빠져버린 고독하고 외로운 한 인간. 그의 고독과 실존을 이 작품 또한 무척 아름다운 언어로 그리고 있다.
은퇴하면 그
압축기를 사서 자기 집에서 계속, 삼십오 년째 해오던 일을 이어가리라 마음먹을 정도로 그 일을 사랑하던 한탸. 그러던 그에게
새로운 기계, 새로운 노동 형태의 출현은 가히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더는 이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더는 읽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 한탸가 내린 최후의 결정은, 가장 사랑하는 것을 잃어버려야만 하는 인간, 또는 자신의 정신세계를 더는
지켜나갈 수 없는 인간이 내릴 수 있는 어쩌면 가장 숭고한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조금은
뜻밖이었다. 후보자와 수상자 명단을 보며 왠지 조금은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요즈음 세계적인 문학상은 명성과 부로
이어진다. 아니, 이미 명성과 부를 쌓은 작가들이 또 그런 상을 받음으로써 한결 더 그 부와 명성을 쌓는 구조가 되었다. 아무것도
부러울 것 없을 듯한, 이미 모든 것을 갖추고 있을 듯한 그런 후보자들과 수상자 사이에서 문득, 한탸, 그리고 그 인물을 창조한
흐라발이 떠올랐다.
흐라발은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자신의 삶과 작품 전체를 상징하는, 그가 쓴 책들
가운데 가장 사랑하는 책이라고 했다. 한탸가 만약 삼십오 년째 폐지를 압축하고 그 안에서 온갖 책을 읽으면서 직접 글까지 썼다면
아마도 너무도 아름다운 작품을 쓰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어쩐지 한탸와 비슷한 삶을 살았을 법한 보후밀 흐라발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절대 고독과 고생스러운 삶 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텍스트의 꽃이 널리 인정받기를 바라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 그런 꽃이 피어나고 있으리라.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다시 여러 번 읽어 볼 작품이다. 흐라발의 다른 작품들도 더 많이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