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에 대하여 - 다니자키 준이치로 산문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고운기 옮김 / 눌와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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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자키 준이치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 3학년 때였나? 전공 외 교양 수업으로 ‘일본근대문학’을 수강한 적이 있는데, 그 수업 시간에 처음 그를 알게 되었다. 이 수업 시간에는 일본 문학사에서 아무래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들의 단편을 읽어보고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 읽었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은 ‘후미코의 발(富美子の足)’이었다. 그때 정말 이 단편을 읽고 나서의 충격이란!

제목을 보니 무언가 느껴지는 것이 있는가? 어쩐지 여성의 발에 집착하는 중년 ‘오덕후’의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는가? 만약 그런 상상을 했다면 제대로 집었다. 이 단편은 어린 첩의 발에  집착하는 노인의 이야기인데 여자의 몸에 대한 묘사하며 일종의 성도착이라고 할 수 있는 발 페티시즘에 걸린 노인의 모습이 충격적으로 그려진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우스꽝스럽기도.

그때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을 읽고 논하면서 나왔던 이야기들이란 ‘탐미주의’ ‘유미주의’ ‘악마주의’ 이런 단어들이었고,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실제로 ‘후미코의 발’ 외에 이런 성향의 작품들로 널리 이름을 알렸다. 일본에서는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였지만 그보다 먼저 노벨문학상 후보에 심심찮게 오르락내리락했던 이가 바로 다니자키 준이치로다.

‘후미코의 발’에서 느낀 변태 이미지가 컸던지 그 뒤 오래도록 그의 작품은 선뜻 다시 읽어보게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어느 날엔가 그의 작품을 읽기 시작해서는 나도 모르게 새 책이 번역되어 나오기를 바라고 있더라. 아무튼 이 책 <그늘에 대하여>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산문집이다. 예전에 <음예공간예찬>이라는 제목으로 한 번 출판되었던 적이 있다. 이 책에서는 ‘그늘’이라고 번역한 ‘음예’란 ‘그늘인 듯한데 그늘도 아니고, 그림자인 듯한데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름한 모습’으로 우리말로는 선뜻 풀이하기 쉽지 않은 듯하다.

‘그늘에 대하여’는 일본의 다다미 방이나 건축문화에 스며 있는 보일 듯 말 듯한 ‘그늘’ ‘그림자’ 이미지에 대한 예찬인데 딱히 ‘건축문화’하나로만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 일본의 전통 연극, 교토나 나라의 사원들의 변화, 전등이 가져다주는 득과 실, 서양 종이와 동양 종이의 효용성 등 서구 문물과 대비되는 동양(일본)의 정서적인 ‘그늘’에 대한 찬미, 일본의 전통에 대한 찬미로 볼 수 있다.

‘그늘에 대하여’가 첫 장을 이루고 있으나 이 책에는 ‘게으름을 말한다’ ‘연애와 색정’ ‘손님을 싫어함’ ‘여행’ ‘뒷간’과 같은 수필이 담겨 있다. 가장 먼저 읽었던 것은 아무래도 ‘연애와 색정’- 이 수필을 읽고 다니자키 준이치로에 대한 변태 이미지가 더 굳어지는 것은 아닐까 심히 염려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생각보다는 싱거웠다. ‘색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부분이 있는데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대놓고 드러내기 보다는 감출수록 색기가 드러난다는 그런 주장이랄까.

‘손님을 싫어함’이라는 수필에서는 자기에게도 고양이 꼬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언급한다.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대화를 하는 중 자기도 모르게 상대방 이야기를 듣다가 자기만의 생각으로 곧잘 빠졌다. 때문에 제 때 대꾸하지 못해 손님에게 불성실하게 대화에 참여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고는 한다. 해서 자기에게 고양이처럼 꼬리가 있다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서 ‘내가 너 이야기를 듣고는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는 부분에서는 피식 웃음이 났다(나도 고양이 꼬리 좀 주슈~). 남들이 다 가는 명소와는 정반대의 여행지로 떠나고 그렇게 해서 발견한 자기만 아는 최고의 여행지를 수필에서조차 끝내 밝히지 않는 괴팍함을 드러내는 ‘여행’이라는 수필도 꽤 공감이 갔다.

다만 불편한 것은 아무래도 여성이나 여체에 대한 묘사 등이 권위주의적인 남자의 시선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어 씁쓸하기도 하고, ‘하이고~ 웃기고 있네!’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 서양에 비해 동양(즉 일본)의 우월함을 계속 강조하는 태도도 껄끄럽다. 같은 동양을 이야기할 때도 중국 등 다른 나라에 대한 비하는 물론 일본의 상대적 우월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 ‘어쭈, 자화자찬은 참…’하며 혀를 차게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별것 아닌 소재 속에서 뛰어난 묘사와 관찰을 통해 그토록 세심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나는 작가만의 꼴통 기질이랄까 괴팍함을 발견하는 부분도 꽤 재미있었다.


문득 ‘후미코의 발’도 읽고 싶어져서, 생각난 김에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후미코의 발'을 다시 읽었다. '후미코의 발'은 고려원에서 나왔던 <일본대표단편선> 제1권에 수록되어 있다. 지금 돌아보니 이 일본대표단편선 시리즈에는 꽤 괜찮은 단편이 많이 실려있어서 뒤늦게 1권 외에 더 사두려고 찾아보니 아쉽게도 절판되었더라.


아무튼, '후미코의 발'은 예전에는 충격적(?)이었는데, 어제는 좀 많이 웃겼다. 키득키득. 특히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는 미친 듯이 웃었다.

발뒤꿈치의 곡선을 살며시, 그러나 머리 속이 타버릴 정도로 뚫어지게 탐닉했습니다. 밑에 어떤 뼈가 있으며, 거기에 어떤 식으로 살이 감싸고 있기에 저리도 부드럽고 원만하며 윤기 도는 뒤꿈치가 되었을까요? 후미코는 태어나서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 이 뒤꿈치로 다다미와 이불 외에 그 어떤 딱딱한 것도 밟아 본 적이 없었겠지요? 저는 한 남자로 태어나 살기보다는, 이렇듯 아름다운 뒤꿈치가 되어 후미코의 발 뒤에 붙을 수 있다면 그쪽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후미코의 발뒤꿈치에 밟히는 다다미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저의 생명과 후미코의 발뒤꿈치 중 이 세상에서 어느쪽이 더 존귀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일언지하에 후자 쪽이 존귀하다고 대답할 겁니다. 후미코의 뒤꿈치를 위해서라면 저는 기꺼이 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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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아이
필립 베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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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84년 10월, 며칠 동안 실종되었던 4살 된 남자 아이가 익사체로 발견된다. 이 아이의 이름은 ‘그레고리’다. 이 아이는 어떻게 실종이 되었고 어떻게 익사체로 발견된 것일까? 소설은 아이의 죽음으로부터 과거를 거슬러 올라간다. 이 아이의 부모인 피에르와 발레리가 10대에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그레고리를 임신하고 낳고 기르며 행복에 빠졌다가 그 행복이 무너지는 순간을 3인칭의 화자가 무척 담담하게 서술한다. 가끔은 그레고리의 엄마인 발레리의 독백이 따르기도 한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이 책을 읽으면서 크게 든 몇 가지 생각 중 하나는 ‘지구’라는 곳에 기생하는 ‘인간’이라는 종족은 얼마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가였다. 그레고리의 부모인 피에르와 발레리는 그들이 속한 사회 구성원들과 달랐다. 그들은 10대에 만나 사랑에 빠졌고, 폐쇄적이고 침울하고 희망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가난을 벗어나려고 노력했고, 자신의 아이에게는 좋은 환경을 물려주고자 애썼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속한 세계의 사람들과 달리 너무도 서로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들은 시기를 받는다. 이웃의, 일가친척의 질투와 시기 미움을 받는다. ‘저것들은 뭔데 우리처럼 살지 않는 거지? 뭐가 잘났다고 저렇게 고고한 척을 하는 거지? 어떻게 어린 나이에 저렇게 돈을 벌 수 있지?’ 시기와 질투, 미움이 그들의 삶을 서서히 파괴하기 시작한다.
 
저속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사회
그레고리가 실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익사체로 발견되었을 때 사람들은 아이를 잃은 부모의 슬픔을 달래기보다는 과연 누가, 무슨 이유로 그레고리를 죽였을까 궁금해 하기 바쁘다. 언론도 이 사건의 진범이 빨리 잡히지 않기를 바란다. 미스터리가 계속 되길 바랄 뿐이다. 피에르와 발레리의 행복을 시기하던 사람들이 모두 용의선상에 오르고 한 명씩 취조를 받을 때마다 언론은 신이 난다. 사람들의 저속한 호기심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 인간들은 이렇게 생겨먹었다. 도로에서 사고를 목격하면 우리는 길가 한 옆으로 서행한다. 순간적으로, 희생자들을 구조하려는 생각보다는(구조는 늘 이런 상황에 대비해 훈련된 사람들이 하게 마련이다), 그들의 참상을 구경하려는 생각을 먼저 하고, 도로 위나 깨진 유리들 사이, 혹은 우그러진 차체를 따라 흐르는 피가 눈에 띄기를 바란다. 익히 알려져 있듯 매스미디어는 우리의 병적인 호기심과 불행하게 끝나는 이야기에 대한 취미와 극적 사건에 대한 편향을 충족시키는 데 골몰한다.’ (필립 베송, ‘10월의 아이’, 124쪽~125쪽)


용의자 중 한 사람이 범인으로 구속되자 언론은 미스터리가 끝난 것에 아쉬워한다. 그러다 범인이 아니라는 증언으로 풀려나자 다시 신이 난다. 사건은 계속 되고 이제 이 저속한 인간의 호기심은 아이의 엄마를 범인으로 단정하고 그녀를 향한 마녀사냥을 시작한다.  
 
그럼에도 ‘사랑’이 있어서 살아갈 수 있는….
그레고리의 엄마 발레리가 증거 부재로 친자살해의 누명을 벗기까지 8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발레리에게만 이런 불행이 찾아온 것은 아니다. 그녀의 남편 피에르는 더 가혹한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둘은 굳건했다. 그 모든 험난한 세월을 함께 보낸 뒤 발레리가 혼자 쏟아내는 독백은 그래서 무척이나 감동적이다.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이 이야기가 사랑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단지 죽은 아이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은, 피에르와 내가 그 모든 세월을 무너지지 않고 함께 이겨냈다는 것이다.(같은 책, 221쪽)’라는 발레리의 독백을 읽는 순간 눈물이 떨어졌다. 사람들은 흔히 부부가 아이를 잃으면 함께 지낼 수 없고 헤어질 수밖에 없다고, 그것이 서로를 위한 최선이라고 말을 한다. 그리고 마치 그것이 진실이라도 되는 듯 실제로 그 길을 따르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이 소설 속의 발레리와 피에르는 변치 않는 사랑으로 살아남아 그 모든 불행을 이겨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모든 이야기가 ‘실화’라는 사실이다. 1984년부터 프랑스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일명 ‘그레고리 사건’- 이 사건의 진범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 2001년 공소국이 사건 종결을 선언했다. 그러나 발레리와 피에르는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아직도 끝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이 이야기가 사랑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단지 죽은 아이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은, 피에르와 내가 그 모든 세월을 무너지지 않고 함께 이겨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이야기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옥살이를 할 때조차 떨어지지 않고 늘 꼭 붙어있던 부부뿐이다. 눈이 시리도록 그것만 보인다. 사람들은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그들이 보지 못한 것을 설명할 방도가 없다. 당신들은 지진을 견디고 살아남은 부부를 알고 있는가?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을 알 기회도 거의 없이 매우 이른 나이에 결혼했고, 아주 일찍부터 고통을 겪었다. 아직 젊은 나이였으나 각자 다른 길을 걸어가 새 삶을 꾸리고 싶어 했을 법도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남았다. 서로가 없는 삶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우리는 뗄 수 없는 사이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교회에서 식을 올리던 날 아침에 맹세했던 것처럼,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필립 베송, ‘10월의 아이’, 221쪽~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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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열린책들 세계문학 10
프란츠 카프카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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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때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독후감을 냈다. 선생님이 물었다. "너 정말 이 작품이 이해가 되니?" 이 선생님은 내가 이상의 <날개>를 읽고 독후감을 냈을 때도 똑같은 질문을 했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참 어렸구나, 뭘 몰라도 한참 몰랐구나 싶어진다. '이해가 간다.'고 생각했던 것은 어쩌면 나의 바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해했을 수도 있다. 그때 내가 가진 앎의 수준, 경험의 수준 등 그 폭 안에서 아주 좁게.


카프카의 <변신>을 최근에 읽고 그 시절에는 절대로 알 수 없던 의미를 발견한다. 예전에는 절대로 '이렇게' 읽히지는 않았다. '이렇게'란 어떤 의미인가? 오늘의 나에게 <변신>은 노동에 관한 이야기, 평생 노동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서글픈 투쟁기로 읽힌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잠에서 깨어보니 한 마리 거대한 벌레로 변신해 있다. 출근을 해야 하는데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고 일어나기도 어렵다. 째깍째깍 출근 시간은 다가온다. 방문 밖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이 재촉한다. '그레고르야 어서 일어나 출근해야지'- 그레고르 역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출근을 하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잘릴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아버지가 진 빚이며 생활비 감당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생각에 벌써 숨이 턱턱 막혀온다.


출근 시간은 이미 넘어가고, 그레고르 회사에서 사람이 찾아온다. 그레고르 방문 밖에서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며, 거듭 그를 재촉한다. 이렇게 불성실한 사람인지 몰랐다며 그를 힐난한다. 불성실? 그레고르는 몇 년간 회사에 다니면서 아프다고 결근한 적조차 없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하루의 지각사태로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회사원이 되어 비난을 듣는다. 가족들도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분노로 일그러진다. 그레고르의 여동생은 드디어 울음보를 터뜨린다. 그레고르는 항변하지만 그 소리는 이미 사람의 소리가 아니다. 이 흉측한 소리에 놀라던 그들은 드디어 그레고르의 방문을 강제로 연다. 그리고는 다들 경악!


벌레로 변신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진 그레고르는 그때부터 가족의 짐이 된다. 훌륭한 아들이자 오빠였던 그는 어쩌면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 되어, 가족들에게 애완동물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다. 이제까지 그가 훌륭한 아들, 좋은 오빠일 수 있던 것은 그가 경제적으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벌레가 되어서도 출근 걱정을 하던 그레고르 잠자는 점차, 벌레인 자신에게 익숙해져 간다. 방을 슬슬 기어다니며 나름대로 소일거리도 한다. 여동생이 켜는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황홀한 기분을 맛보기도 한다. 그가 아직 인간이라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인간이었을 때보다 더욱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장면이다. 회사 일에 치여 살던 그가 언제 이렇게 음악에 심취할 수 있는 시간이나 있었단 말인가?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 잠자가 짐스러웠던 가족들은 드디어 그를 포기하기로 한다. 여동생은 '우리는 저것에서 벗어나야 해요.'라고 말한다. 이런 가족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나? 그레고르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 조용히 숨을 거둔다. 잠자가 죽은 뒤 가족들의 모습은 그로테스크하다. 오랜만에 야외나들이를 가고, 나들이에서 그레고르 아버지는 딸의 홍조 띤 뺨을 바라보며 어느덧 그녀가 성숙한 여인이 되어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노동하지 않아 더는 쓸모없어진 그레고르는 그들의 소원대로 죽었지만, 그에게 기생해서 살아왔던 여동생의 육체는 한껏 만개한다.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진 가족의 모습은 희망차기까지 하다.


일하지 않으면 벌레만도 못한가? 아니면 벌레가 되어 일할 수 없어서 벌레만도 못한가? 경제적 가치가 없으면 가족으로 인정되지도 않는 그레고르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은 그 어디도 없다. 그의 작은 방조차 가족들이 '창고'로 쓰기 시작했다. 그러니 그저 숨죽여 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밖에- 카프카의 <변신>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노동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는 가련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1915년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는 죽음으로 사라졌지만, 오늘의 현대인에게서 또 다른 그레고르의 모습을 본다.


한 20년 뒤에 이 작품을 다시 읽는다면 그때는 그레고르 잠자에게서 어떤 면을 새로이 보게 될까? 고전의 힘이란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읽을 때마다 다른 발견과 함께 예전에는 몰랐던 울림을 주는 데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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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테 안경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조 바사니 지음, 김희정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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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받던 의사에서 한 순간 가십 거리로 전락하고 마는 중년 남자, 이웃과 가족의 따스한 보살핌 아래 미래가 찬란했던 한 젊은이, 그 또한 영원한 국외자가 되고 만다. 한 사람은 동성애자이기에 또 다른 사람은 유대인이기에. 이 영원한 이방인들의 애잔하면서도 쓸쓸한 우정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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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스트리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2
V.S. 나이폴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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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을 읽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문학작품에서 더 큰 것을 알게 되거나 깨닫게 되는 일은 종종 있다. 아니, 확연하게 인지하지 못할 뿐 무수히 많은 것들이 몸과 마음에 새겨질 것이다. 그 어떤 역사책이나 사회과학 책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사실을, 진실을 만나게 되는 순간도 있고,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문학이라는 형식으로 만났기에 새롭게 다가오기도 하고 더 진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V.S. 나이폴의 <미겔 스트리트>를 읽으면서 그런 경험을 하게 되었다. 책에 소개 되어 있는 저자의 사진을 보면 저자는 인도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물론 그 약력을 읽었기에 그가 인도인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약력을 읽지 않아도 사진 속 작가의 얼굴을 보면 이른바 ‘동남아시아인’의 모습이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갸우뚱하게 된다. ‘트리니다드 토바고? 여기에 인도인이?’ 아니, 이 섬은 대체 어떤 곳이기에 인도인과 흑인이 전체 인구 구성의 절반씩을 차지할까? 대체 이 섬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베네수엘라와 가까운, 카리브해에 위치한 ‘트리니다드 토바고’라는 나라에 관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이 작품을 읽다 보면 ‘포트오브스페인’이라는 지명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은 적도 있으려니 추측을 한다. 공용어가 영어인걸 보니, 영국의 지배도 받은 적 있을 테고, 미군이 자주 등장하는 걸 보니 미국도 이곳에 적을 둔 적이 있는 듯싶다. 한마디로 남아메리카에 있는 대부분 나라가 그렇듯 이곳 역시 꽤나 험난한 역사의 질곡을 겪은 듯하다.

예상대로다. 트리니다드는 17세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섬인데 처음에는 스페인과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그때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수입했고, 19세기부터 인도에서 이주 정착민을 받아들여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때문에 전체 인구의 절반은 인도인, 절반은 흑인이 차지하는 기이한 인구 구성을 이루고 있다. 196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 트리니다드 섬과 토바고 섬 두 개를 엮어 트리니다드 토바고 공화국으로 불리고 있고 토바고 섬 주민은 흑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의 제목인 ‘미겔 스트리트’는 나이폴이 태어나 살던 동네로 트리니다드의 수도인 포트오브스페인에서 하층민이 모여 살던 슬럼가 이름이다. 이곳은 대부분 주민이 인도계였으며 종종 흑인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과 사이가 좋지는 않다. 미겔 스트리트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작품의 주된 내용이다. 나이폴 그 자신으로 보아도 무방한 어린 소년의 눈을 통해 이곳 주민의 생생한 삶이 전달된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이 작품의 느낌은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혹은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를 읽을 때와 비슷하다. 어린 소년의 눈을 통해 바라본 하층민들의 가난하고 힘겨운 삶…. 그런 것들. 그런데 한 가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이 거리에 희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

총 17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지막 장을 제외하고 16개 장은 모두 ‘보가트’ ‘조지와 핑크 하우스’ ‘꽃불 전문가’ ‘기계의 천재’ ‘해트’ 등등 미겔 스트리트 주민을 개별적으로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다. 소년이 관찰한 마을 주민들의 모습은 무기력하고 도덕관념도 희박하고 삶에 대한 애착도 크지 않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그냥 하루하루 버틸 뿐이다. 이런 이야기이니 무척 암담할 것이라고 생각되겠지만 놀랍게도 작품은 꽤 유머러스하다. 이 유머러스함은 생생한 캐릭터와 함께 더 빛이 난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바라보면 웃기는 웃는데 가슴 한 구석이 싸해진다. 이런 곳이라면 이렇게 살 수 밖에 없겠구나 싶어진다.

오랜 식민 통치를 받다 보니 무언가 자발적으로 삶을 살아갈 의지를 아주 오래 전에 잃어버린 사람들. 독특한 인구 구성 비율 때문에 민족적 의식도 희박하고 전통은커녕 정체성 또한 희박한 사람들. 무언가 해보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마는 사람들. 때문에 이제는 아예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 재능을 실현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혹시라도 재능을 살려보았자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이 책에 등장한 인물 중 공부를 해서 영국으로 장학생이 되어 가겠다고 큰 꿈을 가졌던 소년 ‘엘리아스’가 번번이 시험에 낙방하고 ‘결국 돈도 빽도 없어서 영국에 갈 수 없었다.’며 자조하는 모습은 트리니다드의 꽉 막힌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의 장점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장점은 앞서 말했듯 어쩌면 전혀 모르고 살았을 세계에 대해 그 어떤 역사책보다도 생생하게 증언을 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런 공간을 ‘제3세계’라 부르며 식민 통치나 침략, 노예 약탈 등을 자행하고 심지어 그런 행위를 정당화하기까지 한 서구에게 고발에 가까운 기록을 꺼내 보이면서도 유머러스함과 따스한 시선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 어떤 백 마디 선전선동보다도 그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의 이런 생생한 기록이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으리라. 

마지막 장인 ‘내가 미겔 스트리트를 떠나게 된 경위’에서 나이폴은 해외 유학 장학금을 받고 영국으로 떠나게 된 이야기를 꺼낸다. 나이폴의 어머니는 그에게 이 질식할 것 같은, 무덤과 같은 곳을 하루 빨리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당부한다. 영국에 온 나이폴은 트리니다드로 다시 끌려가는 '악몽'을 몇 년간이나 꾸었고 . 어머니 당부대로  실제로 다시는 그곳에 발을 딛지 않았다고 한다(훗날 일 때문에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다는데, 그때도 체류기간은 무척 짧았다고).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곳에 대한 향수랄까, 회한이랄까 이런 심정으로 늘그막에는 한번쯤 찾고 싶어 하던데, 그에게 트리니다드는 결코 그런 공간이 될 수조차 없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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