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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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팬은 아니다. 그의 작품 가운데 어떤 것은 좋고, 또 어떤 것은 그렇지 못하다. 그럼에도 그가 소설가로서 살아가는 방식, 작품을 대하는 태도- 문단과 거리 두고 살기, 회사원처럼 직업적으로 꾸준히 성실히 쓰기, 몸을 단련해서 뒷받침하기 등등은 존경스럽고 본받을 만한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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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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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새로운 책이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작가 중 한 사람, 줄리언 반스. 아내의 죽음 이후 그는 죽음에 관한 생각이 깊어진 듯하다. 반스 특유의 재치 있고 위트 넘치는 표현, 그 안에 담긴 깊은 사유의 흔적을 소설이 아닌 에세이로 만날 수 있다. 궁금했던 그의 가족사를 엿볼 수 있었던 것은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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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털리 부인의 연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5
D.H. 로렌스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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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계급만 존재하는 것이니, 그것은 바로 ‘돈에 사로잡힌 돈돌이 계급’이었다. 돈돌이 사내와 돈돌이 계집. 차이가 있다면 오직, 돈이 얼마나 많이 있느냐와 돈을 얼마나 많이 바라느냐일 뿐이다. (1권 231쪽)

“어쨌든 그렇게 많이들 지껄이는데도 불구하고,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오. 젊은이들은 미칠 지경인데, 그것은 바로 쓸 돈이 없기 때문이라오. 그들의 삶은 전부 돈을 쓰는 것에 의존하고 있는데, 지금 그들에게 그 쓸 돈이 한 푼도 없는 것이오. 그게 바로 우리의 문명과 교육의 실체라오. 즉, 돈을 쓰는 것에만 완전히 의존하게끔 대중을 가르치고 길러놓는데, 그러고 나면 돈이 떨어져버리고 마는 거요.” (2권 315쪽)


위의 구절이 어떤 작품에서 나왔겠느냐고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글쎄…. 이 구절들을 보고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마도 굉장히 정치적인, 계급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그런 작품을 떠올리겠지. 그러나 놀랍게도 위 문장은 <채털리 부인의 연인>에 나온다. 게다가 로렌스의 이 작품에는 이와 비슷한 구절이 무수히 많이 등장한다. 내게 이것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그리고 위와 같은 구절만으로도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얼마나 왜곡되어 사람들에게 알려졌는지 깨달을 수 있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하반신 불구가 된 남편에게서 성적으로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남편의 하인이자 자신의 하인이기도 한 사냥터지기와 바람나 성(性)에 눈을 뜨는 한 부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니, 그런 부인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자가 육체의 쾌락에 눈을 뜨면서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나가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소설이기도 하고, 돈밖에 모르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물질 위주의 산업화 시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담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소설이기도 하다.

거의 100년 전에 쓰인 이 작품은 현대의 섹스리스 부부에 대한 비판서로 읽히기도 한다. 무엇 때문에 돈을 그토록 많이 필요로 하고,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무작정 돈벌이에 급급한, 서로에 대한 애정과 섹스는 뒷전이고 ‘경제’활동에 올인하는 섹스리스 부부. 코니와 그의 남편인 클리퍼드는 무늬만 부부인채로 살아가는 현대의 수많은 섹스리스 부부를 떠올리게 한다. 경제가 우선인 결혼제도에 얽혀 결혼생활을 유지하느라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들. 식은 애정을 붙들고 결혼을 유지하고, 그러기에 불륜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사람들. 로렌스가 말한 ‘돈돌이 사내’와 ‘돈돌이 계집’의 허위에 찬 ‘결혼생활’은 지금도 여전하다. 아니 코니와 클리퍼드가 살던 그 시절보다 더 심하다.

이 작품은 코니의 남편 클리퍼드와 코니의 연인 멜러즈를 통해 두 세계를 끊임없이 대비해 보여준다. 클리퍼드로 상징되는 정신적, 물질적인 삶과 멜러즈로 상징되는 육체적, 인간적인 삶의 이분법적인 대비. 물질사회, 산업사회의 비인간성에 스스로 저항해 숲속에서 은둔자의 삶을 사는 사냥터지기 멜러즈와 이런 멜러즈를 사랑하게 되는 코니의 모습은 로렌스가 주장하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삶을 의미한다.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고 열정적인 애정을 나누는 삶이 인간으로서 살아야 하는 삶이라고. 이런 작가의 생각이 멜러즈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드러나고, 종종 지나치리만큼 이분법적인 도식과 명확한 주제의식이 오히려 단점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외설’에 초점이 맞춰졌고, 여전히 그렇게 인식되어 진다는 점은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물론 나 또한 그런 인식의 틀에 갇혀 그저 야한, 페미니즘 소설로만 알고 있었다면 무척 억울했을 뻔한 작품이다. 늦게라도 로렌스의 작품을 제대로 알게 되어 다행스럽기도 하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작가의 지나친 계도의식(?)이 들어있어 로렌스의 다른 작품에 비해 작품성은 좀 떨어지는 게 아닐까 추측하면서 <무지개> 같은 다른 작품도 더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길게 읽기 싫은 사람을 위한 한 줄 메모 : "이 소설은 외설이 아니었다!! 사회경제 비판서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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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이었던 남자 - 악몽 펭귄클래식 76
G. K. 체스터튼 지음, 김성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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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버트 키스 체스터턴의 <목요일이었던 남자 The Man Who Was Thursday : A Nightmare>, 나는 이 책이 제목과 표지 등을 보고 매력적이라 느껴져서 읽게 되었는데,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다른 책을 읽다 말고 이 책을 집어 들었는데 결국 끝까지 읽고 말았다.


이 책의 표지 뒷면에는 체스터턴을 에드거 앨런 포나 아서 코난 도일과 함께 가장 재미있는 추리소설의 작가라고 언급하고 있다. 보르헤스는 체스터턴을 일컬어 ‘에드커 앨런 포보다 더 훌륭한 추리 소설 작가’라고 말하기도 했단다. <목요일이었던 남자>를 손에서 놓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이 작품이 추리 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저 단순한 추리 소설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목요일이었던 남자>는 정치적이고 철학적이고 종교적이다. 정치적, 철학적, 종교적이라는 언급 때문에 머리가 아플 거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술술 읽힌다. 그런데 그 술술 읽히는 문장들을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상당히 골치가 아파진다. 체스터턴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가 어떤 생각을 지녔던 인물인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다분히 종교적인 사람이었다는 생각은 든다. 사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도 <브라운 신부> 시리즈라고 한다.

추리 소설의 내용을 밝히는 것은 스포일러가 되니 자세히 언급하지는 못하지만 주인공은 우연히 무정부주의자 조직의 음모를 파헤치는 역할을 맡게 되고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각종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주인공이 대항해서 싸우는 조직이 '무정부주의자 조직‘이라는 점에서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갈등하게 된다. 과연 이 책에서 다루는 것처럼 무정부의자가 악(惡)인가, 끊임없이 반문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으로 번역되는 무정부주의를 굳이 아나키즘과 똑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는 없지만 모든 정치적 조직, 규율, 권위를 거부하고 국가권력기관의 강제적인 수단을 해체함으로써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무정부주의와 아나키즘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나는 비폭력 아나키즘을 신봉한다. 국가나 정부, 제도가 오히려 사람의 삶을 속박하고 인간은 어쩌면 그런 제도들이 없을 때 더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사회의 근간을 뿌리째 흔드는 무정부주의자들을 적으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 쉽게 동의할 수가 없었다.


"위험한 범죄자들은 교육받은 자들이죠. 우리는 오늘날 가장 위험한 범죄자는 철저히 무법적인 현대 철학자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도둑이나 중혼자들이 근본적으로는 도덕적이에요. 그들은 동정의 여지가 있죠. 인간의 근본적인 이상은 수용하는데, 단지 잘못 추구할 뿐이니까요. 도둑들은 재산을 존중합니다. 그걸 너무 존중한 나머지 자기 손안에 넣고 싶어 할 뿐이죠. 하지만 철학자들은 재산을 증오해서 개인의 소유라는 생각 자체를 파괴하려고 해요. 중혼자들은 결혼을 존중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의식적이고 격식을 차리는 중혼의 형식을 따르지 않겠죠. 하지만 철학자들은 결혼 자체를 경멸합니다. 또, 살인자들은 인간의 생명을 존중합니다. 단지 자신들보다 덜 중요해 보이는 생명을 희생시킴으로써 생명의 더 큰 충만함을 맛보려는 것뿐이죠. 그런데 철학자들은 생명 그 자체를 증오해서,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자기 생명까지도 증오합니다." (54~55쪽)


이 작품에서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이다. 국가를 지속하는 법이나 제도 등을 해체하고 개인의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내세우는 이들이 잘못된 것일까? 물론 체스터턴은 앞서 언급했듯 종교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종교마저 거부하려는 그들이 썩 달갑게 보이지는 않았으리란 추측도 든다. 나 또한 무정부주의자들이 폭력적으로 사회 전복을 꿈꾸는 것은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사유재산이나 국가, 종교, 법 등 권위주의적인 관습, 제도, 권력이 인간을 오히려 타락하게 하고,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정부주의자’들에게 심정적으로 동조하게 된다.

오히려 무정부주의자 조직을 해체하려는 주인공의 생각과 노력이 좀 순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체스터턴이나 이 책의 주인공이 보자면 나 역시도 그들이 주적으로 삼고 없애야 할,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썩은 사상을 지닌 사람일 텐데…. 글쎄 무엇이 선(善)이고 악(惡)인지 쉽게 판가름하기 어렵다. 책을 읽다 보면 결국 체스터턴이 생각했던 무정부주의자와 내가 생각하는 아나키스트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존재한다는 느낌도 든다. 체스터턴은 ‘무정부주의=무질서 혹은 혼란상태’로 보았고 그는 기존의 사회 질서와 전통적인 가치가 무너지고 있던 당시 사회에서 인간의 오만함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우주적인 질서의 회복을 꿈꾸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책의 중반쯤 넘어가면 추리소설을 즐겨 읽는 사람이라면 대충 ‘어떤’ 짐작들을 할 수 있으리라. 이 작품의 결말은 전반부에 비해 좀 싱거운 느낌도 들고, ‘흠, 뭐야 결국 이렇게 끝나는 거야?’ 싶기도 한데. 그럼에도 흥미진진하다. 끝으로 이 책 서두에는 <목요일이었던 남자에 관하여>라는 1935년 <런던 뉴스>에서 이 작품에 대해 다룬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책을 재미있게 읽으려는 분은 이 서문은 읽지 않고 시작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스포일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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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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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데라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보다는 <농담>이 훨씬 낫지 않나 싶다. 게다가 <농담>이 그의 첫 작품이라는데 놀라움은 더욱 크다. 첫 작품으로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니 부럽고 대단하다. 글쓰기는 노력하면 된다지만 작가적인 재능도 실은 타고 나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농담>은 농담이 전혀 용납되지 않던 시대의 이야기다. 공산주의 시절 체코에서 주인공 루드빅은 말 한마디 잘못해서 회색분자로 찍혀 심한 인생의 굴곡을 겪게 된다. 가벼운 말장난, 혹은 젊음의 치기어린 행동이 전혀 용납되지 않는 경직된 공산주의 시대의 체코, 어떤 강요된 주의(ism)에 희생당하는 개인의 인생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 보면 루드빅은 애초에 그런 농담을 하지 않았어도 그래서 당에서 축출되지 않았더라도 열렬한 공산주의자로 살지는 않았으리란 생각이 든다.

그렇게 살기에 그는 처음부터 너무나도 짙은 ‘회색형’ 인간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상에도 깊이 빠져들 만한 인간 유형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런 인간임에도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공산당원이 되었고 열렬하게 그 사상을 전파하던 시절도 있었다. 어디 루드빅만 그러할까, 사람들에겐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시기가 있다. 어떤 사상이나 사물, 현상, 사람에 빠져 버리는 시기. 이것은 우정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빠져버린 순간을 돌이켜보면 어이없을 정도로 별다른 계기가 아닐 때가 많다.

‘사랑이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결정적 계기들이 언제나 극적인 사건들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며, 처음에는 전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던 상황들이 그런 계기가 되는 수가 종종 있는 법이다. (129쪽)’처럼 어떤 사상, 사람에 빠져버리는 순간은 특별하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빠져버린 뒤에 사람들은 그 사상이나 사람을 특별한 것처럼 만드는 작업을 하게 된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들을 잘 한다. 나는 사랑이 자기 자신의 전설을 만들어낸다거나 그 시작을 나중에 신비화시키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100쪽)’처럼-

루드빅이 공산주의에 매료 되었던 순간을 돌이켜 보자. 그는 아버지 없는 집안에서 자랐고 그의 재능을 탐냈던 친척의 지원을 받아 생활한다. 하지만 그 집안의 부르주아적인 분위기에 반발감을 느끼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공산주의에 매료된다. 커다란 계기가 있는 게 아니었다. 루드빅만 그렇지 않다. 이 작품 속 개개인들이 어떤 사람에게 반해서 그 또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거나 혹은 어떤 사상에 빠지는 순간은 모두 하나 같이 특별하지 않다.

그렇게 시작된 사랑이나 신념이 특별하다고 끊임없이 재포장하면서 이들의 인생은 굴곡을 겪게 된다. 나에게 좋으니까 상대에게도 좋다고 생각하는 신념(이념), 사랑(애정) 등이 상대에게는 그렇지 않기에 인생이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 좋은 것이 타인에게도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깨달았다고 여기더라도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농담>은 보여준다(루치에의 비밀을 알게 된 후에도 여전히 루치에의 상황을 자기 좋을대로 해석하는 루드빅의 모습을 보며 어쩌면 인간은 영원히 서로 소통 불가능한 존재가 아닐까 싶어진다). 사람과 주의(ism) 사이에서도 진정한 소통은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진정한 소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루드빅은 자신이 믿었던 신념에 배반당하고 야로슬라브는 전통적 가치를 지키려고 애쓰다 상처받는다(그리고 또 어떤 의미로든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그 전통적인 가치 때문에 상처를 준다). 코스트카는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닮은꼴 때문에 사회주의에 경도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회색분자 취급을 받게 된다. 헬레나와 루치에는 사랑한다고 믿었거나 자신을 아낀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무참히 상처를 받는다.

‘이 지상에서 하느님께 속한 모든 것은 동시에 악마에게도 속할 수 있다. 사랑의 행위를 하고 있는 연인들의 동작까지도. (324쪽)’ 라는 구절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유형의 신념이나 주의, 행동, 사랑, 애정 등등 인간이 만들어 내는 모든 문화적 산물과 감정의 씨앗들은 때로는 선(善)이 될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악(惡)이 될 수도 있음을 <농담>은 보여준다.

그렇기에 ‘사랑하기 때문에’라고 강요된 행동이나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타인에게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사랑하고 따랐던 신념이, 사람이 우리를 배반하고 그래서 우리가 상처받는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 상처는 우리 내부에서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소통능력은 인간이 자신이 우월하다고 여기는 것만큼 뛰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소통하는 법을 모르는 한 인간은 영원히 고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를 외롭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친구이므로. (227~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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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6-06-10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쿤데라 가운데 <불멸>을 제일 재미나게 읽었습지요.
원래 잡것이라 <농담>에서도 여배우 있잖아요. 그 여자가 약 먹고 벌어지는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군요. ㅋㅋㅋㅋㅋ

잠자냥 2016-06-10 16:18   좋아요 0 | URL
네~ <불멸>도 재미나고, 말씀하신 그 장면도 무척 생생, 흥미롭지요. 그렇게 생생하게 인상적으로 쓸 수 있다니 참 쿤데라는 쿤데라입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