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공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에리카 종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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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가장한 우울` 상태를 벗어나 진정한 자기 해방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다행스럽다. 그 깨달음이 타인(남자)과의 만남과 사랑 헤어짐을 반복하다 얻게 된 점이 조금은 아쉽지만.. 이제 자유롭게 날아가는 것에 더는 공포를 느끼지 않을 이사도라의 `비행`에 박수와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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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당일 배송 서비스.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 게 좋다. 그렇지 않은가? 택배사를 변경하고 오후 3시 이전 주문까지는 당일 배송하겠다고 퀴즈까지 내며 연일 광고하고 있지만... 글쎄. 오후 3시로 시간이 확대된 이후로 이 서비스 이용해서 만족스러운 적이 없다. 그 다음날 배송되기가 일쑤고... 알라딘 고객센터에 문의하면 택배사 물량이 많아서 배달못했다는 답변을 받았다는 이야기뿐이다.

당일 배송 서비스를 신청하지 않았더라면 책이 올 그 시간에 맞춰서 집에 꼭 있거나, 아니면 대신 택배 받을 사람을 집에 있도록 하거나 등등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번번이 책을 밤늦게까지 기다리다 허탕 맞는 심정을 아는가? 게다가 주문한 책이 그날 꼭 필요한 책이었다면 어쩔 것인가? 선물용일 수도 있고, 그날 꼭 해야만 하는 과제 또는 업무 관련 참고서일 수도 있다. 급한 책이니까 당일 배송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알라딘이여 아는가???!!

그런 책을 꼭 올 것이라고,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가 그렇지 못했을 경우의 낭패감이란! 당일 배송 신청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도서관에 가서 빌릴 수도 있었을 테고, 서점에 직접 나가서 사거나 바로드림 코너 같은 것을 이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일 배송을 신청하고 그 책이 오리라 믿고 있었기에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있다가 이런 낭패를 겪는 것이다.

어제 당일 배송 신청한 책은 아직 문자고 뭐도 없이 감감무소식이다. 백석 초판본 파본 교환 상품이 오늘 도착 예정이라고 해서, 그것과 함께 가져다 주시려나하고 어제 애써 이해하며 참았다. 그런데 조금 전에 내가 받은 것은 백석 시집뿐이다. 어제 신청한, ˝당일 배송˝하겠다던 그 책들은 여전히 아직도 감감무소식이고. 오늘은 토요일 내일은 일요일이다. 그럼 난 금요일 주문 책을 월요일에나 받는 것인가? 그 책들을 알라딘 당일 배송 서비스를 ˝믿고˝ 주문하지 않았더라면 주말에 교보에 나가서라도 사지 않았겠는가? 아니, 어제 퇴근 후에라도 교보에 가서 바로드림했겠지!

적립금 준다고 퀴즈까지 내면서 알라딘 메인 페이지에서 대대적으로 ˝당일 배송˝을 광고하고 있지만 믿음은 번번이 배신당한다. 알라딘이여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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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공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에리카 종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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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70년대는 몰라도 지금 읽기에는 그리 새롭지 않다. 당시로서는 놀라웠을 것 같지만... 지퍼 터지는 섹스 및, 여성의 성기를 자연스럽게 언급한다고 해서 그게 반드시 여성 해방을 뜻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3분의 2쯤 읽었다. 남은 부분에서 내가 기대했던 진정한 여성 해방이 부디 이루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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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그라피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2
비톨트 곰브로비치 지음, 임미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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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브로비치의 <포르노그라피아>를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나이 든 사람들이(물론 비단 나이 든 사람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혼자 있는 젊은 사람을 보면 꼭 누군가와 짝을 지어주지 못해 안달이 나는 상황, ‘짝짓기’를 그들 인생의 가장 큰 취미생활로 삼는 일은 결국 그들이 젊음을 시기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솔로’로 추정되는 남과 여가 있다, 그런 이들이 나이든 사람 눈에 포착되면 그들은 이 젊은 남자와 여자를 짝지어 줄 생각에 들뜬다. 짝을 지어줌으로써 그들을 진정한 ‘어른’의 세계, 곧 추하게 늙어갈 그 세계로 편입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짝을 만나지 못한 젊은이들은 아직 ‘미성숙한’ ‘덩치만 큰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그 젊음이 못내 부럽기도 하다. 시기심도 든다. 게다가 그렇게 둘을 짝지어 주면서 그들을 자신의 손바닥 안에서 갖고 놀고 싶은 생각도 든다. 한 사람의 운명과 또 다른 사람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경험을 만끽하고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진짜 ‘성인’이 되어 이제 추하게 늙어가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는 그들은 심하게 무료하기 때문이다. 특별한 사건도 없이 하루하루 반복되는 심심하기 짝이 없는 일상. 이 무료함을 극복하고자 그들은 짝짓기 로맨스 드라마의 연출가 겸 감독이 되고 싶은 것이다!

<포르노그라피아>에 바로 그런 인물들이 나온다. ‘프레데릭’과 ‘나’(비톨트 곰브로비치)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지배하에 놓인 폴란드의 두 지식인이다. ‘나’는 어느 날 친구의 초대를 받아 프레데릭과 함께 한 시골 마을을 찾는다. 친구에게는 열여섯 살이 된 딸 ‘헤니아’가 있다. 헤니아 주변에는 그녀의 소꿉친구인 ‘카롤’이 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황량한 시골, 할 일 없이 마을 산책이나 하던 이 두 남자에게 헤니아와 카롤의 발견은 신선한 충격이다. 그들은 젊고, 싱그럽고, 아직 그들처럼 늙어, 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적으로 묘한 기운까지 뿜어져 나오는 십대 후반의 여자 아이와 남자 아이라니! 이 무료한 두 남자의 머릿속에는 슬금슬금 기묘한 상상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두 아이(라고 할 수도 없고 어른이라 할 수도 없는)를 상대로 그들만의 ‘포르노그라피아’가 시작된다.

그저 소꿉동무일 뿐이라는 덤덤한 두 아이를 상대로 ‘너희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거나, ‘너희들이 서로 짝일 것’이라는 등의 암시를 주고, 이런 이야기를 끊임없이 내뱉는다. ‘헤니아’에게는 ‘알베르트’라는 약혼자가 있다. 그러나 이 두 남자에게 ‘알베르트’는 ‘헤니아’의 짝이 결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알베르트 역시 이 두 남자들처럼 이미 늙어가고 있는, 성인 남자였기 때문이다. 싱그러운 젊음에게는 그에 걸맞은 젊음이 제격이다. 그래야 그들의 ‘포르노그라피아’가 완성된다. 이 짓궂은 두 남자들은 그래서 본격적으로 연극을 꾸미게 된다. 헤니아와 카롤 사이에 정말로 ‘무언가’가 있다는 듯 ‘연출’을 하게 되고 이를 알베르트가 교묘하게 알게 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헤니아-카롤-알베르트의 관계는 이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파멸과 타락으로. 이런 그들을 보며 만족의 웃음을 짓는 징그러운 두 남자. 이런 두 남자의 심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잘 드러난다.


‘젊은 그 무엇, 어른들은 짐작할 수 없는 그것……. 그건 아마도 일종의 절제, 어떤 도덕심, 두 사람이 지키고자 하는 어떤 법칙, 금지였다. 그러므로 프레데릭의 생각은 분명 옳았다. 두 사람은 알베르트를 함께 짓밟고 그의 몸 위에서 뒹굴면서부터 이런 모든 구속들을 거침없이 벗어던지게 될 것이다. 그들이 알베르트에게 보여주고자 연인이 되는 순간…….그들은 진짜 연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 나이가 너무 들어버린 우리에게는 이것이 그들에게 색정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니 그들을 이 죄악으로 밀어 넣어야 한다! 그들이 우리와 더불어 죄악에 몸을 담그게 되면, 그때는 기대할 수 있다. 우리와 그들이 뒤섞이게 되리라고. 그들과 우리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그들과 우리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치를 나는 이해했다. 또한 이 죄악으로 인해 그들이 추악해지는 게 아니라는 걸, 그들의 젊음, 그 싱싱함은, 비록 죄의 빛깔을 띠게 될 지라도, 우리의 시든 손에 이끌려 타락으로 인도될지라도, 그리하여 우리와 뒤섞여 혼탁해질지라도, 그 죄악으로 인해 오히려 더욱 풍요하고 충만해지리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아무렴! 나는 알고 있었다! 온순하게 말 잘 듣는, 그저 귀엽기 만한 젊음 따위가 무슨 재미가 있는가! 중요한 건 그런 젊음을 재료로 또 다른 젊음, 우리 어른들과 비극적으로 얽힌 젊음을 제조해 내는 일이었다.' (비톨트 곰브로비치, <포르노그라피아>, 민음사, 187쪽)


'우리의 난잡함, 추잡함에 있어서는 개도, 말도 이만큼 따라올 수 없었다. 아! 아! 서른이 넘으면 인간들은 흉하게 시들어간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들, 젊은이들로부터 나온다.'(같은 책, 278쪽) 이렇게 소설 속의 ‘나’(비톨트 곰브로비치)는 프레데릭과 함께 성숙함, 늙음, 성인이 되어버린 것을 추하게 여기며, 젊음을 부러워하고 시기한다. 그러나 다시 소유할 수 없는 그 젊음이기에 어차피 갖지 못할 것이라면, 망쳐버리자는, 똑같이 타락의 세계로 끌어들이자는, 생각을 품고 그리하여 그들이 빨리 ‘성숙’ 혹은 ‘늙어’버리기를 욕망한다.

물론 이 작품에서 헤니아와 카롤 역시 그저 순수한 젊음으로 그려지지만은 않는다. 그들 또한 어른의 세계로 편입하고 싶어 하고, 자신들을 향한 이 두 남자의 관심을 은근히 즐긴다. 어쩌면 그렇기에 프레데릭과 곰브로비치가 원하는 방향대로 ‘연극’이 흘러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포르노그라피아> 속 프레데릭과 곰브로비치의 망령은 현실 세계에도 고스란히 존재한다. 현실의 프레데릭과 곰브로비치는 그들처럼 그렇게 추하게 늙어가고, 똑같이 추한 늙음의 세계로 미성숙한 젊은이들을 끌어들인다. ‘짝짓기’라는 형태로 계속 계속……. 이런 추한 욕망 자체가 바로 ‘포르노그라피아’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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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 현암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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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소설이지만 그저 픽션은 아니다. <소멸>의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와 철학자로 유명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파울 비트겐슈타인’과의 12년간의 우정의 기록이다.

<소멸>의 토마스 베른하르트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의 느낌도 대충은 감잡을 수 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이 작품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조국인 오스트리아를 혐오하고, 비정신적인 세계에 역겨움을 토로한다. 물질적인 것, 속물적인 것, 인간의 허위의식 등 그에게 역겨운 그 모든 것에 쓴 소리를 해대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소멸>에 비해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드는 것은 순전히 ‘파울 비트겐슈타인’ 그 때문이다. 아니 파울과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우정’ 때문이다.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에서는 내로라하는 가문인 비트겐슈타인가(家) 출신이다. 물론 그의 삼촌인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또한 그렇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가문에서는 내놓은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 모두 그 명망 있는 가문, 재벌 가문과는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조카와 삼촌 모두 자신의 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물질적인 세계와는 결별한 삶을 살았고 오로지 ‘정신적’인 세계에 계속 탐닉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 가문에서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나 조카인 파울 비트겐슈타인, 이 두 사람을 모두 ‘미친놈’ 취급을 했다. 비트켄슈타인이 철학자로서 그 이름을 떨쳐도 가문에서 돌아오는 소리는 비아냥거림과 멸시뿐이었다고 한다. 철학자로 유명해진 삼촌에게도 이럴진대, 조카인 파울, 토마스 베른하르트와 우정을 쌓았던 그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향한 그들의 경멸은 오죽했을까. 삼촌 못지않은 천재성을 지녔던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안타깝게도 정신병이 발병해 35세 이후로는 늘 정신병원을 들락날락 했기 때문이다.

파울이 정신병으로 병원을 들락거릴 때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폐병으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한 사람은 정신병, 한 사람은 폐병- 정신과 몸에 ‘병’을 앓으며 더욱 친근한 우정을 나누게 된 두 사람. 미치광이와 폐병환자가 어쩌다 친구가 되었을까? 그들의 우정은 한 음악회에서 우연히 시작되었다. 파울은 클래식 음악(특히 오페라)에 엄청난 애정을 지녔고 그로 인해 상당한 식견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렇게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그들의 우정은 시작되었다.

음악, 철학, 정치, 예술 등 온갖 정신적인 대화를 나누며, 비정신적인 세계에 똑같은 혐오감을 표현하며 그들의 우정은 깊어진다. 조국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낼 때도 사람들의 무지와 허영, 물질에 대한 집착을 비판할 때도 그들은 한 목소리였고 뜻을 함께 했다. 파울 비트겐슈타인과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12년간의 우정의 기록을 읽다 보면 그들은 이 세상에서 ‘병’을 앓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나 싶어진다.

두 사람은 물질적인 것이 최선으로 여겨지는, 비정신적인 이 세계를 살아가기엔, 익숙해지기엔 너무나 예민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 예민함이 한 사람에게는 정신병으로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폐병으로 드러난 게 아닐까. 파울이 먼저 죽고 베른하르트는 끝내 그의 무덤을 찾아가지 않았다. 베른하르트에게 파울의 죽음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었기 때문은 아닐까. 이 염증 나는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정신적인 세계를 뜨겁게 추구했던 파울은 미치광이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런 그의 죽음은 육체의 소멸이기는 하지만 정신은 여전히 살아 숨쉬기에, 진정한 죽음은 아니었던 게 아닐까. 이 세상에서 정말 죽은 사람들, 살아 있지만 무덤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정신적인 삶’을 포기한 채 좀비처럼 먹고 싸고 자고 물질의 구축에만 온 생애를 보내는 이들이 아닐까.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는 ‘파울 비트겐슈타인’과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삶을 만나 볼 수 있어 색다른 경험이었지만 무엇보다도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또 다른 면목을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소멸>을 읽었을 때 나는 이 작가는 바늘로 찔러도 피한방울 나오지 않을 만큼 독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오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에게도 ‘인간’에 대한 애정은 있었다. 파울에 대한 애정이나 그가 이 책에서 언급한 또 다른 사람, ‘나의 삶의 사람’이라고 부르던 그녀를 향한 무한한 애정과 신뢰가 느껴졌다.

주변을 돌아보면 사람들은 너무나도 쓸데없는 만남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의미 없는 인간관계를 맺고, 그 인간관계가 자신의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인맥이 어쩌고 하면서) 착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관계 맺은 인간들이 과연 자신의 정신적인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따져본다면 지금 당장 잘라버려도 하등 문제될 것이 없는 관계들이 부지기수다. 베른하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생애에 정말 어떤 의미를 준 사람을 우리는 다섯 손가락만으로도 다 셀 수 있으며, 우리가 솔직하다면 이런 사람을 셀 때 단 하나의 손가락도 필요하지 않을 텐데도 다섯 손가락을 다 써야 한다고 믿는 우리의 파렴치함에 나는 저항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현암사, 110쪽)

폐병 환자였던 베른하르트와 미치광이 파울 비트켄슈타인의 결코 길지 않았던 우정의 기록은 이 험난한 세상을 견디기 위해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조용히 깨닫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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