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즘
브라이언 딜런 지음, 김정아 옮김 / 카라칼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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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조차도 에세이라는 장르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글들. 에세이의 재발견, 에세이스트 브라이언 딜런의 발견. 여기 실린 많은 에세이들을 다 읽어보고 싶어지지만, 특히 에밀 시오랑을 다시 읽고 싶어진다. 그리고 나도 책상에 앉아 에세이를 끼적여보고 싶어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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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8-14 01: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오! 이거 자냥오별인가요 그렇다면!!!! 산다!!!!
에밀시오랑 책 빌려드립니다.. 커피도.. 차도.. 맥주도.. 다 드릴테니 놀러오시지요

잠자냥 2023-08-14 05:12   좋아요 1 | URL
블랑카 님은 4개 주시면서 리뷰 남기셨더라고요. 그분 의견도 참조하시고요.
시오랑 책도 커피도 차도 맥주도 고양이도 집에 다 있습니다.

독서괭 2023-08-14 07:47   좋아요 3 | URL
철벽냥 ㅋㅋㅋㅋ

바람돌이 2023-08-14 08:38   좋아요 2 | URL
그냥 은오님을 주세요.

잠자냥 2023-08-14 09:22   좋아요 2 | URL
아니 저 게으른 아이를 깨워서 학교 보낼 생각을 하니 절레절레…. 이제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독서괭 2023-08-14 09:47   좋아요 2 | URL
이미 깨워서 학교보낼 생각까지 하고 있네요. 바람돌이님 말씀이 정답 ㅋㅋ

은오 2023-08-14 09:52   좋아요 3 | URL
심장폭발

잠자냥 2023-08-14 10:01   좋아요 0 | URL
아니 여러분, 그래서 싫다는 건데요….;

은오 2023-08-16 04:47   좋아요 1 | URL
아무도 잠자냥님의 해명에 좋아요를 눌러주지 않으셨다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8-16 08:44   좋아요 2 | URL
연휴라 다들 접속 안 해서 그래요.

페넬로페 2023-08-14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엔 에세이 읽어야 하는군요!!!!

잠자냥 2023-08-14 10:01   좋아요 1 | URL
가을에 읽으세요! 아직은 아직도 아니 다시 덥네요! ㅋㅋㅋㅋ
 
불쌍한 캐럴라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5
위니프리드 홀트비 지음, 정주연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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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혼의 노년 여성 주변에서 한탕해 먹으려는 사기꾼들의 사연과 캐릭터가 생생하다. “주디스 헌”과도 닮은 듯 다른 캐럴라인. 이 할머니가 내 주변 인물이었다면 나 또한 피하고 싶을 것 같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엘리너의 마지막 선택은 시대적 한계가 느껴져서 답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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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8-13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주디스헌도 그렇고 얘도 ㅠ 상종하기 싫은 인물인거죠 아이고야 ㅋㅋㅋ

잠자냥 2023-08-13 00:19   좋아요 1 | URL
얘는 70대 할머니에요! ㅋㅋㅋㅋㅋ 영국에서 비혼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당시 비혼 여성의 삶은 이렇구나….. 싶어집니다. ㅎㅎ
 
콜드브루 에티오피아 구지 함벨라 (원액) - 500ml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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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진짜 맛있어서 이벤트 같은 거 없는데도 100자평 남긴다. 최근에 귀찮고 더워서 콜드브루 이것저것 사 마셔봤는데 이게 진짜 찐 맛있다. 고소하고 진하고 달달하기까지! 신맛 많이 안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 좋아할 듯. 1리터로 여러 병 사고 싶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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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8-12 14: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티오피아인데 신맛이 별로 없군요. 저는 커피이 신맛 좋아하는데 그래서 별로 좋아하지 않을듯한 이 커피마저 한 번 사먹어봐싶게 만드는 100자평입니다. ^^

잠자냥 2023-08-12 22:02   좋아요 1 | URL
어떤 분들은 신맛이 느껴진다고도 하는데 저는 거의 못 느꼈어요. 참고로 저는 예가체프나 케냐 라인을 딱히 좋아하지 않습니다.

거리의화가 2023-08-12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소한 맛 좋아하는지라 참고하겠습니다^^

잠자냥 2023-08-12 22:03   좋아요 0 | URL
아 이 커피 고소한데 끝은 또 달아요! ㅋㅋ

은오 2023-08-13 0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콜드부르 뭐지 왜 뭔가 이상하지 10초간 고민 ㅋㅋㅋㅋ 콜드부르르르 브랑 루가 바꼈구먼요
전 산미 있는 거 좋아해서 이건 패스 ㅋㅋㅋ 이건 잠자냥님이랑 결혼하면 제가 집에 여러 병 쟁일게요!!
근데 잠자냥님 커피 취향까지 아는거.. 제법 연인같다..

잠자냥 2023-08-13 00:2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아 오타가 ㅋㅋㅋㅋㅋ 카페인 과다뷰르르르르 ㅋㅋㅋㅋㅋ 알라딘아 바로 품절 부탁해~~ ㅋㅋㅋㅋ

은오 2023-08-13 00:41   좋아요 1 | URL
결혼을 막기위해 맘에드는 커피의 품절을 바라는 잠자냥님 ㅋㅋㅋㅋㅋㅋㅋ너무해😫
 

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그들과 섞이기보다는 혼자 있거나 최소한의 사람만 만나면서 사는 것을 선호한다. 어릴 적부터 그랬는데 나이 들수록 이런 성향은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사람의 어떤 특성을 좀 못 견뎌 하는 편이다. 예를 들면 무리를 짓고 그 무리의 힘을 믿어서 혼자 있을 때는 하지 않을 행동들을 하는 것. 이기심, 탐욕, 그게 무엇이든 권력을 지닌 자에게 아부하고 굴종하는 태도 등등.... 인간의 이런 단점들을 일일이 나열하다가는 이 글을 다 쓰지도 못하고 지칠 것 같으니 그만 두자. 물론 드물게 아름다운 인간들도 있다. 그러나 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중 90명은 추하기 짝이 없고, 처음엔 가면을 쓰고 아름다운 척 잘 포장했던 사람도 결국에는 결정적일 때 추한 면모를 드러내고 말기 때문에 나는 인간과 섞이지 않는 편을 택하고 만다.

어릴 때도 또래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면 유독 그런 추한 꼴이 눈에 잘 들어오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친구가 거의 없는 편이었다. 조용히 구석에서 늘 책만 읽고 있으니 어른들은 애가 너무 내성적이라 큰일이라고, 몹시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나도 먹고살아야 하므로 가면을 쓰는 법을 찾았고, 사회적 가면을 쓰고는 지금까지 잘도 버티면서 이 한국이라는(이기심과 탐욕이 넘쳐나는 인간이 유독 많은)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넌 고매하느냐? 누군가 묻는다면 나 또한 이기적이고 탐욕...(적이지는 않은 것 같지만 아예 없지도 않다)도 있는 평범하고 비루한 인간일 뿐이다. 특히 대개의 인간이 그렇듯이 연애할 때 나는 세상 찌질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지금은 덜 하다고 생각).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그 비루한 면모를 서로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아니 굳이 드러내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고로 나는 그 어린 시절 자아가 조금씩 갖춰지기 시작하던 10대 때부터 주변의 아이들이 어떤 사람에게 꽂혀서 열광하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또래의 친구를 좋아한다거나, 이성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저 멀리 있는 사람들, 연예인이라거나 선생님 같은 존재에 열광하는 것, 그 감정을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어린 시절에 돌아다니던 앙케트 항목- 거기엔 늘 그런 질문이 있었다. 좋아하는 연예인, 좋아하는 작가, 좋아하는 누구누구는? 특히 나는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는 애로 주변에 알려졌던 터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시절부터 책을 추천해달라면서 어떤 작가를 좋아하느냐고 잘 묻고는 했다. 그럴 때 나는 한참 생각한다. 좋아하는 작가? 좋아한다고?! 사람을?!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그건 아닌데..... 단지 그 사람이 쓴 작품을 좋아하고 즐겨 읽는 것일 뿐인데.....

내 친구 중에는 사람 자체에 빠지는 녀석이 있다. 이 친구는 그러니까 김연아와 손열음과 김혜리 기자와 대미언 라이스를 엄청 좋아한다. 그래서 이들의 콘서트나 GV나 강연 등의 자리에는 빠짐없이 참석한다. 이 친구 때문에 김혜리 기자의 무슨... 뭐더라(기억이 안 난다)를 같이 가 본 적이 있는데 아, 이렇게도 사람을 좋아할 수 있는 것이구나 약간 객관적인 감상자가 되어 친구를 관찰하고 온 적이 있다. 그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친구의 그 열정과 에너지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떻게 사람 자체를 좋아할 수가 있지? 싶어진다. 김연아가 아이스링크 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할 때, 손열음이 강렬하게 타건을 하면서 훌륭한 연주를 들려줄 때, 대미언 라이스의 몇몇 음악에 감동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이 만들어낸 ‘예술’을 사랑할 뿐이지 그 사람 자체를 좋아하게 되는 일은 거의 없다.

하물며 작가란... 작가의 글이란. 작가를 좋아한다는 것이란. 내게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알면 알수록 싫어지는 인간이 많은 집단이 ‘작가’라고 생각해서 더 그런 것 같다. 한국 작가의 글을 잘 읽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같은 땅에 살다보니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정보들(그들의 치부까지도)을 너무 잘 알게 되고, 그런 유쾌하지 않은 인간이 쓴 글을(글은 또 얼마나 포장하기 쉬운가) 굳이 읽고 싶지 않을 때가 많다. 게다가 한국에서의 ‘작가’들은 젊을 때와 달리 늙을수록 추한 면모를 잘 드러낸다(애초에 인간이란 존재가 그런지도). 나이 들면서 망가지는 작가들을 여럿 보게 되는데 최근엔 강준만이 나의 그 리스트에 올랐다(그는 왜 살아있는 권력에는 입을 꾹 다물고 한없이 작아지기만 하는가? 마봉춘을 비판하려면 조선일보부터 비판하라. 아직도 민주당만 까고 있는가? 국힘부터 까라.) 그도 이제 그만 읽을 때로구나!

나 스스로 문화사대주의자라고 우스갯소리처럼 말하고는 하지만 멀리 떨어진 나라의, 그래서 그의 사생활이나 망가지는 순간에 대해 세세히 잘 알지 못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 편이 차라리 속편하다. 그래서 나는 작가의 전기나 사생활을 파헤친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몇 해 전 나쓰메 소세키의 아내 나쓰메 교코가 쓴 <나쓰메 소세키, 추억>이 출간되었을 때도 아 또, 뭘 이런 책까지 내고 있나 싶어졌다. 이 책을 읽지 않아도 나쓰메 소세키가 지인이나 아내와 주고받은 편지들, 또는 그의 작품을 통해서 그가 좋은 남편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친구인 마사오카 시키나 아내에게 쓴 편지를 보면 여성혐오적인 발언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 100년 전의, 동양의 작은 나라의 그저 그런 조그만 남자일 뿐이다. 그렇다고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싫어하게 되지는 않는다. 소세키라는 인간 자체를 크게 좋아한 적이 없으므로 실망하게 되지도 않는다. 그저 동료나 제자들에게는 좋은 벗이자 스승이었지만 그도 한 인간으로서는 이런 한계가 있었구나 생각할 뿐.

그런데 내 기준에는 글로 자신의 본질을 잘 포장하는 작가들이 있다. 머리가 너무 영리해서 자기의 본 모습을 잘 숨기기도 하고 포장도 잘한다고나 할까. 그런 작가들의 글을 읽으면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아서 잘 읽지 않게 된다. 장강명과 유시민이 나에겐 그런 작가이다. 영리해서 영리한 글을 쓰지만 머리로 쓴 글들이라 딱히 와 닿지 않는 그런 글- 특히 장강명은 기자 출신이라 그런지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잘 알고, 그걸 작품으로 만드는 데 탁월하다. 그래서 그는 그런 의식을 지닌 작가로 보일 수 있지만(독자들이 착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종종 그의 글에서 숨기지 못한 본질을 보게 된다. 이른바 스카이를 나오고 주류 언론사에서 오랜 세월 기자로 지내면서 갖춰진 프레임이 자기도 모르게 작동할 때가 있다. 유시민도 마찬가지이다. 불의에 맞서 싸우던 젊은 그에게도 한때 아름다웠던 시절이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그 아름다움은 포장된 아름다움이어서 본질이 자기도 모르게 적나라하게 드러난 적이 있다. “해일이 밀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는 말. 이 말이 나는 그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후로 그가 쓴 글은 포장을 잘한 가짜로 보인다.

세상에는 해일이 밀려와도 조개를 줍는 사람들이 있다. 드물지만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는 작가라면 해일이 밀려와도 조개를 주울 줄 알아야 하는, 조개를 주워야만 하는 사람의 심정을 알아야만 한다고, 아니 그 조개를 주울 수밖에 없는 심정에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공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글을 쓰는 사람, 글이 곧 삶인 사람, 말과 글, 삶이 일치하는 작가가 아니라면 쉽사리 인간으로서 좋아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런 작가는 드물다. 그렇지 않은가? 인간은 모순덩어리이기 때문에, 나약하기 때문에 글과 달리 삶은 비루해지기 쉽다. 그런 점에서 하워드 진은 글과 말과 삶이 일치한 드문 사람이었다. 진은 태생부터가 가진 자 편에 서기 어려웠다. 그의 부모는 유럽에서 이주한 유대인 노동자였고, 진 그 자신도 어릴 때부터 노동을 해야만 했다. 어렵사리 구한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읽으면서 문학에 빠져들었고, 자신의 경험들-평화집회에서 맞은 곤봉 세례, 전쟁에 징집당해 목격한 참혹함, 노동자조합을 설립해 일하면서 몸소 겪은 자본주의의 폐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끊임없이 노동하면서 대학에 진학하고 그러고도 늘 공부와 일을 병행해야만 하는 삶. 여러 대학을 전전하면서 강의하다가 흑인 여자 대학인 스펠만대학의 전임교수가 된 일, 흑인 차별 중심지였던 애틀랜타에서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수업을 하고, 시위와 집회에 참여하면서 결국 스펠만대학에서 해직당하는 삶.... 그 이후로도 그는 죽는 날까지 미국 정부 및 지배계급에 거침없는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단순히 말과 글로만 내뱉는 게 아니라 실제 삶에서 늘 가난한 사람, 흑인(유색인), 노동자, 노숙자, 여성, 억압받는 자 등 약자 편에서 행동했다. 그런 인생을 살아간 이가 쓴 글을 읽노라면 절로 마음이 뜨거워진다.


“물론 여러분이 현실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걸 압니다. 일자리를 구하고 결혼을 해서 자식도 낳아야겠지요. 부자가 되어 우리 사회가 성공이라 규정하는 ‘성공’을 거두기도 할 겁니다. 재산을 모으고 사회적 지위와 권위도 쌓아갈 겁니다. 하지만 ‘좋은 삶(Good Life)’은 그런 것만으로는 충족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좋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무슨 일은 하던, 교사가 되던, 사회 운동가가 되던, 사업가, 변호사, 시인, 과학자 등 무엇이 되던, 여러분의 자식, 아니 모든 아이를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여러분의 삶을 조금이라도 투자하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세대는 전쟁 종식을 강력히 요구하고, 여러분의 세대는 역사에서 아직 이뤄내지 못한 일을 해내고,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구분 짓는 국경을 지워버리길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이 사회에서 성공이라고 평가하는 그 성공에 안주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부당한 규칙에까지 순종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감춰진 용기를 마음껏 끌어내서 행동하길 바랍니다. 흑백을 넘어서 우리가 귀감으로 삼을 사람은 많습니다. 콘돌리자 라이스, 콜린 파월, 클라렌스 토마스 같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귀감으로 삼지는 마십시오. 그들은 권력자와 부자의 하수인이 됐을 뿐입니다. W.E.B 듀보이스, 마틴 루서 킹, 맬컴 엑스, 매리언 라이트 에델먼, 제임스 볼드윈, 조세핀 베이커 그리고 평화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지배집단에 도전한 훌륭한 백인을 귀감으로 삼으십시오.” (‘실망을 이겨내고’라는 하워드 진의 스펠먼대학 졸업 축사- 2005년 진은 스펠먼대학으로 돌아가 명예학위를 받았고 졸업식 축사를 했다)



삶과 글이 일치했으면 좋겠다. 글 쓰는 사람 중엔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 많다. 그런 자의식으로 무장하고서 글에서는 꼬장꼬장하게 옳지 못한 현실을 비판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 많다. 나는 그런 사람과 그런 사람이 쓴 글을, 좋아할 수가 없다. 아무리 글에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쓴 소리를 늘어놓아도 실제 자기 삶이 그렇지 못하다면 그 글은 ‘죽은 글’이나 마찬가지이다. 세상에 읽을 글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죽은 글을 읽으면서 시간을 낭비하는가! 쓰레기 언론에서 주는 상으로 등단하고 그래서 그들과 계속 엮이면서, 그들만의 문학권력을 만들고 서로 뒤를 봐주는 문인들의 글도 읽고 싶지 않다. 그런 작가들이 소설에서 아무리 현실이 어떻고 말한다 한들 그게 진심으로 다가올 리가 없다.




물론 모든 작가가 이렇게 살 수는 없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래서 내가 그나마 인간적으로 덜 싫어하는 작가들은 대개 이렇게 살아보려고 애는 써보지만 종종 실패하기도 하는 또는 크게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내지는 못하지만 그런 관점을 갖고 살아가려고 늘 애쓰는 작가들이다(최근에는 최윤필과 김승섭의 글을 꾸준히 읽는 편이다. 이들이 늙어도 망가지지만 않는다면 계속 읽을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하인리히 뵐이나 카렐 차페크도 좋아하는 편이다. 수잔 손택도 여기에 좀 가까운 유형이기는 한데, 그이의 삶은 모순이 참 많은 것 같고(일기를 괜히 읽었나 -_-? 멀리서 그냥 볼걸), 지성이나 날카로운 감각,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점, 미친 듯이 무언가 읽고 보고 쓰고 하는 에너지 등등은 본받고 싶지만 말이 많고(일기에서 본인도 인정. 얼마나 말이 많았는지 매년 일기마다 ‘말을 적게 하자’는 결심을 적었을까!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단추 달기(입에 단추 채우기)’. 게다가 씻는 것도 무척이나 싫어했다. 씻기를 결심하는 부분도 일기에 자주 그려진다. 이를 테면 이렇다. ‘매일 목욕하고 열흘에 한 번씩 머리 감기’ 헐 열흘에 한 번씩이라니!!!!) 나르시시스트적인 면모, 끊임없는 애정 갈구 등의 점에서 친구나 연애 상대로서는 피곤할 스타일 같아서 피하고 싶은 사람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안해요 언니. 또 이런 기준에서 나쓰메 소세키보다는 오에 겐자부로를 한 인간으로서 더 좋아하지만 작품으로는 아직 나쓰메 소세키의 것이 더 좋다. 이것도 참 모순이네... -_-

그러나 모든 작가가 이렇게 삶과 글이 일치할 수는 없으므로, 이런 높은 기준만으로 작가를 평가하지는 않는다. 상처투성이 글을 남겼는데 그 상처가 자기 내부 깊숙이에서 우러나와 진실 그 자체일 수밖에 없는 작가의 글들, 그런 작가도 덜 싫어하는 편이다(좋아한다고 굳이 말하지 않는 고집). 예컨대 트루먼 카포티, 테네시 윌리엄스, 유진 오닐 같은 이들- 이 세 사람은 가족 내에서의 결핍이나 상처, 성정체성 문제(유진 오닐 제외)로 평생 고통받았고 그걸 결국 글로 승화한 인물들이다. 그렇게 피로 쓴 글들이라 그런지 울림이 크다. 그 글이 진실에 얼마나 가까운지 아닌지를 의심하지 않게 된다. 세 작가 모두 마초적이지 않다(마초의 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필립 로스, 코맥 매카시). 마초마초한 글을 쓰는 작가들이 이들을 보면 아마 질질 짠다고 싫어할지도 모르겠다. 헤밍웨이가 총을 들고 나타나 카포티에게 징징거리지 말라고 협박하는 모습이 상상된다. 그런데 나는 총을 들고 사냥에 나서는 헤밍웨이보다는 총에 맞아 죽어가는 짐승을 보며 울어버릴 것 같은 카포티의 그 나약한 점이 좋다.

그런데 뭘 이렇게 길게 쓰고 앉았지? 삶과 글이 일치한 훌륭한 인간이었거나 그렇지 못하다면 진실에 가까운 훌륭한 예술 작품을 남긴 작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만인 것을.



<미국 민중사>를 쓸 무렵의 하워드 진



어떤 것을 아는 방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피상적인 앎과 마음 깊이 진정으로 느끼는 본질적인 앎이 그것입니다. 설령 자신이 인종차별의 희생자가 아니더라도 그에 대한 본질적인 앎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만약 인종차별의 희생자라면 본질적인 앎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백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해도, 유색인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느낄 수는 있습니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할지라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바로 문학이 그 같은 일을 합니다. 사람들은 리처드 라이트가 쓴 <깜둥이 소년>이나 랠프 엘리슨의 <보이지 않는 인간>을 읽고 흑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됩니다.  (<하워드 진, 교육을 말하다> p.47~48)


질문하라. 이 사람이 뭔가 내게서 좋은 점을 끌어내는가? 아니면, 이 사람은 아름답고 선하고, 귀한가? (수잔 손택, <다시 태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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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8-11 21:52   좋아요 2 | URL
네, 책나무님!
장강명 작가의 작품 읽어볼께요.
시대를 외면하지 않고 고민하는 모습이면 저도 좋아할 것 같습니다.
저는 인간 유시민도 좋아하고
작가 유시민도 좋아하는 편입니다^^

청아 2023-08-11 19: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읽으면서 그의 실천하는 삶에 가슴 떨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워드 진의 책을 여러 권
사두었어요. 수전 손택 일기에 그런 것까지 있을 줄이야... 어제 유시민이 KBS에 대해 쓴 칼럼 읽고 좋았는데 ㅋㅋㅋㅋ
잠자냥님 말씀처럼 큰 기대 안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죠!

잠자냥 2023-08-11 22:48   좋아요 2 | URL
<달리는 기차> 진짜 가슴 뜨거워지는 책이죠. 오랜만에 다시 읽고 싶어집니다.

손택의 일기는 진짜 일기입니다. 아들인 데이비드 리프거 편집하기는 했는데 아들이 읽으면서도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싶을 정도로 솔직. ㅎㅎ

다다 2023-08-11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잠자냥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인격을 온전히 판단할 수 있을까, 전 좀 회의적입니다. 사람은 처지와 위치에 따라 말과 행동이 달라지기도 하고, 글과 삶이 일치하기란 어려우며, 개인 인격과 사회적 인격이 다르기도 한 동물이라고 봅니다. 그 차이가 아주 큰 경우나 무슨 범죄가 아니라면 그 모순과 어긋남이야말로 삶 그 자체라고 보는 편입니다. 난 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지?를 너무 깊이 골똘하게 파고들면 분열증이 찾아오며 ‘아빌리파이‘를 먹어야 될 수도 있습니다. 무슨 하자있는 삶이라기보다 그냥 자연스런 삶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지요.

20대 초반 영향을 많이 받은 ‘강준만 키드‘로 마흔 중반인 현재까지 계속 강준만 책 읽기를 해 온 입장에서 보면, 강준만 선생님이 저랑은 정치적 입장도 다르고 가끔 너무 한 글도 쓴다고 생각하지만 합리적 계몽주의자이자 독립적 언론 연구자로서의 위치와 직업적 윤리를 위해 거의 수도자적 생활을 자처하며 생산해 내는 괴랄같은 다작과 (심지어!)고른 품질(?)에 대해선 여전히 경외감을 느낍니다. 훗날 강준만의 책들은 그 자체로 훌륭한 사료가 되지 않을까 여깁니다. 문재인 정부를 경유하면서 발간된 강준만 선생님 저작과 mbc 관련 책에 대해선 잠자냥님과 판단이 조금 다릅니다. 말을 하는 사람은 죄가 없으니, 듣는 사람이 경계로 삼으면 된다는 자세로 선생님 책을 계속 볼까 합니다.

유시민 선생님 또한 출판하신 책을 거의 다 읽었는데, 제 입장에선 무엇보다 잘 읽히고 재밌었어요. 지식소매상 혹은 큐레이터로서 여러가지 장점과 필력이 있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것일테구요. 그런데, 정치인 유시민을 말하자면....할 말이 많지만 오랜 속담으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유시민을 좋아하지 않는데 필요한 건 ‘기억력‘ 뿐이다˝. 그런데 누구도 미워하진 않습니다. 삶을 노여워하는 대신 맛있는 떡이나 먹자는 주의라서요.

잠자냥 2023-08-11 22:56   좋아요 3 | URL
네 저도 그들의 인격을 판단한 것은 아니고요, 작가라면 최소한 너무 변질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아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강준만에 대해서는 저 또한 20대 때부터 무수히 많은 책을 읽어왔고요, 그런 만큼 그의 요즘 행보가 좀 실망스럽기는 합니다. 유시민에 대해선 강준만 만큼의 기대도 애정도 없었기에 더 신랄한 감정이 드는 것 같고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저의 개인적 느낌, 감상일 뿐이니 다다 님은 계속 그대로 본인의 관점과 생각대로 판단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다만 저는 말을 하는 사람이 죄가 없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특히 그 말에 권위가 실리는 사람이라면 더 그렇지 않을까요?

다다 2023-08-11 23:13   좋아요 1 | URL
네, 그렇구 말구요. 말에 권위가 실리는 사람이면 더 조심해야지요. ^^ 변명을 하자면, 전 비판적으로 계속 읽고 싶다는 ‘태도‘를 표현한 말이었는데...에구구...

잠자냥 2023-08-11 23:29   좋아요 2 | URL
강준만에 대한 이 비난은 섭섭함의 표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진보를 자처하는 학자들은 진보에게만(민주당이 진보라고 저는 생각지 않습니다만, 국힘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 더 비판적이고 더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대는가. 윤석열 정부나 작금의 국힘당, 지금까지의 조선일보에 대해 더 할말이 많을 텐데 말입니다…..

바람돌이 2023-08-11 2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하워드 진 선생님의 글을 만나니 또 가슴이 먹먹.
오늘 잠자냥님 이 글 너무 좋네요. 작가에 대한 평가야 어차피 개개인의 영역이고 우리가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사실은 거의 일치합니다만.... ㅎㅎ) 그럼에도 인간의 훌륭함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돼요.
하워드 진 같은 분은 드물죠. 역사는 그런 분을 위인이라고 부릅니다. ㅎㅎ

잠자냥 2023-08-11 23:00   좋아요 2 | URL
저도 이 글 쓰면서 인용한 하워드 진의 말을 다시 읽으니 울컥하면서 ㅎㅎ 제 요즘 삶도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인간의 훌륭함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본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은오 2023-08-11 23: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진짜 인간혐오자라는게 이런 글 읽을때마다 와닿음.... 저는 첨엔 잠자냥님이 인간 싫어! 하실때 그냥 좀 싫어하시는가보다- 하고 말았는데 볼수록 찐이닼ㅋㅋㅋㅋㅋㅋ 어릴때 또래 아이들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셨다니 되게 성숙하셨군요.. 적어도 중고딩때까지 전 아무생각 없었던 것 같은데.. 친구분 보고 사람 자체를 좋아하는걸 신기하게 여기셨던것도 좀 신기하고.. 아무튼 전 이런 잠자냥님도 좋고 ㅋㅋㅋㅋㅋㅋ 이제 인간좋아 잠자냥님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인간싫어 잠자냥님이라서 제가 더 좋아하는걸지도 모르겠네요 결론은 좋아합니다 ㅋㅋㅋ
목표: 인간 싫어하는 잠자냥님이 좋아하는 인간 되기

잠자냥 2023-08-11 23:40   좋아요 2 | URL
제가 욕심 많은 인간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요,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욕심이 많더라고요… 남 괴롭히는 것도 좀 싫어하고 무리 지으면 그 힘 믿고 까부는 것도 싫어하는데 아이들의 세계란 많이 그렇습니다…. 미성숙하니 여과 장치도 없어서 더 적나라했던 것 같고… 내 친구는 지금도 신기해요. 웨스 앤더슨에 꽂혀서 이젠 거의 모든 굿즈를 쓸어담고 있음(요즘 주는 웨스 앤더슨 문진도 이미 한 달 전에 예약 주문) ㅋㅋㅋㅋㅋ

호시우행 2023-08-11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쓰기는 삶이죠.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신 적은 있나요? 그래야 진정한 이땅 이 나라와 다른 나라가 비교될 수 잇답니다.

2023-08-12 2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건수하 2023-08-15 0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글쓰기와 삶이 꼭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래서 잠자냥님의 생각이 바뀌어 글을 더 쓰시면 좋겠네요) 아무래도 글과 삶, 혹은 글과 글에서 다른 성향이 느껴진다면 그 작가는 좀 멀리하게 되더군요. 유시민도 그 발언 이후 좀 멀리하게 되었고 (그런데 유시민은 자기 삶만이 아니라 그냥 모든 걸 다 잘 포장하는, 말을 참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장강명은 소설에서는 고발하는데 주요 일간지 칼럼을 보면 같은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 일을 맡을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겠지만) 그리고 김훈은 글은 좋은데 영 보수 꼴통스럽고... 강준만도 그런 느낌. 그 시대엔 그 말들이 괜찮았지만 이제 아니라는 느낌.

그러다보니 요즘은 여성 작가들의 책만 주로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압박을 스스로 느낄 때까지 이 편향을 즐기려고요.

잠자냥 2023-08-15 06:18   좋아요 1 | URL
꼭 글쓰기와 삶을 일치시킬 자신이 없어서는 아니고…. 제가 자기검열이 좀 심해서 아 난 소설은 안 되겠구나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장강명은 소설과 칼럼에서 느낀 지점이 수하 님하고 똑같은 것 같아요..

암튼 오늘 아침에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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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교사들
안 세르 지음, 길경선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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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교사라는 직업은 생각해 보면 참 특별한 느낌이 든다. 과외선생도 아니고 누군가의 집안에 머물면서 함께 생활하고 아이들을 가르친다니, 일과 사생활이 분리되지 않은 셈이니 스트레스가 많을 것 같다. 그럼에도 18~19세기의 문학작품들을 보면 가정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여성들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그 무렵 여성 작가들이 쓴,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문학작품에서 가정교사라는 직업은 흔하다. 그들은 대개 배움은 있으나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해 자존심에 상처를 받거나 굴욕감을 느끼면서도 이 직업을 선택한다. 그러고 나서 실제로 생활하면서 온갖 차별과 멸시를 감내한다. 그즈음 문학작품의 이런 묘사들을 읽다 보면, 당시 여성 가정교사들이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일도 흔하지 않았을까 싶어진다. 물론 그 가정의 남자 주인과 (때로는 여자 주인과) 자발적으로 로맨스+성적 관계를 맺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최근 읽은 <가정교사들>은 이런 면에서 조금 남다르다. 아니 많이 특이하다. 지금까지 익숙했던 가정교사의 이미지-가난한 집안 출신의, 비혼의 나이 든 처녀, 자신을 이 답답한 집구석에서 구출해줄 멋진 남성과의 로맨스를 꿈꾸지만 이룰 가능성은 딱히 없어 보이는, 그래서 욕구불만에 쌓인-를 완벽하게 뒤엎는다. 섹스, 그러니까 성애적 관계가 존재하기는 하는데, 그 관계는 집 안이 아니라 집 밖에서 이루어진다. 그것도 이 가정교사들이 주도적으로, 능동적으로 이끈다. 이게 가능하다고? 이런 사실을 알면 그 가정교사들을 고용한 이가 당장 그 행실을 문제 삼아 해고하지 않을까 싶은데 이 소설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고용주인 오스퇴르 부부는 그들의 섹슈얼리티를 인정하고 묵인한다, 부부 중 남편, 그러니까 집안의 가장인 오스퇴르는 자신이 고용한 가정교사들의 성생활을 물론 알고 있다. 그는 가장이므로 자기 집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는 의무과 권리에 충실하다. 자신이 고용한 세 명의 젊은 여성 가정교사 엘레오노르, 로라, 이네스의 일탈(?)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오히려 북돋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때문에 오스퇴르, 그도 이 성생활에 참여하고 있을까 싶은데 딱히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가정교사들은 저마다 남편, 약혼자, 연인 등등 주위에서 인정하는 관계 안에 놓여 있고, 그 관계를 오스퇴르가 낭만적인 관점에서 권장하는 것인가 싶은데 그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가정교사들의 섹스 라이프를 적극 권장한다고? 참으로 기묘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집에서 매일 사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사냥감이 부족하다. 저 남자는 몸이 꽉 잡힌 채로 핥아지고 깨물리고 잡아먹힐 것이다. 모든 것을 내어주고 난 그는 녹초가 될 것이고, 그제야 그들은 그를 놓아줄 것이다. 그는 마치 갓난아기처럼 초원의 야생 풀숲에 발가벗은 채로 누워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창가에서 낯선 남자가 찾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그토록 길고 절망적이던 겨울의 밤들을 추억하게 되리라. (<가정교사들>, 30쪽)



울타리로 막힌 정원에 둘러싸여 세상과 단절된 커다란 저택 안에서 어린 소년들을 가르치는 세 가정교사들. 엘레오노르, 로라, 이네스의 주요 일과는 사실, 저택 앞을 지나가는 낯선 남자를 기다리다가 자신들의 성적 욕망을 채우는 것이다. 평소에도 남자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즐기는 그들, 남자는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화 주제이다. 순진한 이들은 이 세 여성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들이 지금껏 가정교사로서의 생활에만 충실하느라 남자는 전혀 알지 못하고, 수줍음 때문에 정원의 철책 뒤에서 남자를 훔쳐보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착각. 그녀들은 날이 저물어 어둠이 깔리면 마치 거대한 죽은 나비들처럼 정원의 철문에 바짝 달라붙어 지나가는 남자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유혹해 정원으로 끌어들여 온갖 쾌락을 맛본다.

그들은 지금까지 ‘낯선 남자들’을 여럿 경험했다. 그것도 셋이 함께. 그들은 낯선 남자들이 다가올 때 크나큰 기쁨을 느낀다. 때때로 그것은 그들의 가장 큰 기쁨이기도 하다. ‘남자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다가와, 절대 대놓고 드러나지 않는 유혹의 은밀한 경고를 받았을 때, 그들은 절대 권력’(41쪽)을 갖게 된다. 남자를 꼼짝달싹 못하게 ‘소비’하고 나면, 그러니까 남자를 ‘정복’하고 나면 그들은 공허해진다. 그러나 이런 소소한(?) 즐거움마저 없었더라면, 세 사람 사이의 화합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절망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 욕망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는 늘 낯선 남자들만이 오갈 뿐인가 싶은데 “그들은 순진하지 않다.” 엘레오노르는 톰과 6년 동안 동거했고, 로라는 일곱 번의 연애 경험이 있으며, 이네스는 아기가 있다.

아니 뭐라고?! 충격적인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오랜 기간 동거했던 파트너가 있고, 일곱 번의 연애 경험이 있으며, 아기도 있는 젊은 여성이 가정교사로 일하는 정원에서 낯선 남자들을 유혹해 벌이는 쾌락의 파티라니. 게다가 그걸 알면서도 묵인하거나 오히려 부추기는 집주인들…. 이게 가능하다고? 정말? 에이 소설이니까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왜 안 돼? 싶어지기도 한다. 사실 이 작품은 시공간이 모호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우화나 동화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럼에도 작가는 확실하게 기존의 관념을 뒤엎는다. 이 정원에서 여자들은 자기 욕망에 완벽하게 충실하다.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는 파트너는 필요 없다. 낯선 남자가 그들에게는 자극적인 향락의 대상이다. 그들은 낯선 이를 보면서 침을 흘린다. “머리카락은 짙은 금빛이 되며, 살결은 더 먹음직스러워지고, 목소리는 더 매력적이게 된다.”(57쪽) 그들은 남자를 ‘소비’하고 ‘정복’한다. 낯선 남자를 ‘사냥’하러 간다. 또 그들은 ‘그물을 꺼내어 그를 잡으러 가두러 간다.’(29쪽) 소비/정복/사냥(헌팅)/잡아 가두다/먹음직스럽다 등등의 언어는 지금껏 남자가 여자에게 플러팅하거나 구애에 성공해서 섹스까지 이르렀을 때 주로 사용하던 표현들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왜 여자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가? 여자도 마찬가지로 먹음직스러운 남자를 사냥하고 잡아 가둬서 마음껏 소비하고 정복하고 차버릴 수 있다. 이 가정교사들은 그렇게 욕망에 충실하다.

문제는 이들을 고용한 집주인들의 반응이다. 이들은 왜 알면서도 묵인할까? 이 작품에서 오스퇴르는 가정교사들을 감시하고 지켜보고 통제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인물이다. 그들에게 관음의 시선을 보내는 첫 번째 남자이기도 하다. 오스퇴르는 이 가정교사들이 처음 정원으로 들어서던 날 감탄으로 전율한다. 그에게 ‘삶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기쁨으로 두 손을 비비면서 거실에서 펄쩍펄쩍 뛰었’(47~48쪽)을 정도이다. 그는 왜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일까? 그에게 그녀들은 ‘기억과 욕망을 한가득 안고’ 들어오는 존재이다. 그 ‘기억’이란 자신이 욕망으로 들끓던 시절의 기억이리라. 그는 가정교사들을 보면서 “그들의 꿈에 걸려 있는 낯선 남자들, 앞으로 태어날 그들의 아이들, 앞으로 찾아올 그들의 사랑, 끝없이 이어지는 그들의 선조들”을 상상하면서 기뻐한다. 그러니까 오랜 결혼 생활로 권태에 빠진 이 가부장에게 타인의 욕망을 엿보고 그 욕망의 결실들을 자신이 통제하는 것은 엄청난 즐거움이다. 오스퇴르는 집의 ‘중심’에서 시계처럼 감시하는 것을 자신의 가장 큰 의무로 여기고 집안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편 오스퇴르 부인은 가정교사들에게 알맞은 짝을 찾아서 그들을 결혼시키는 게 큰 목표이다. 결혼으로 ‘가정교사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고, 머리를 정돈하고, 표정을 고치고, 몸을 바꾸고, 그들을 자제시키고 유순하게 만들어서,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으리라는 희망’(85쪽)을 버리지 못한다. 이 오스퇴르 부부는 결혼하여 가정을 일구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지만 이미 그 삶은 권태로워서 타인의 로맨스와 욕망을 지켜보거나 통제하면서 존재 이유를 찾을 수밖에 없는 가부장제 작동방식의 은유로 읽힌다.

그러나 오스퇴르 부부로 상징되는 가부장제는 개인의 욕망이 이미 거세되었거나 소멸해 버렸기에 권태롭기 짝이 없다. 사회에서 권장하는 이른바 정상적인 짝을 만나서 로맨스에 빠져버리면 그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출산과 양육이라는 제도화된 코스일 뿐이다. 이 코스는 대부분의 평범한 이들이 가는 과정이므로 그들은 또 다시 권태에 빠질 뿐이다. 그래서 가정교사들이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려 낯선 남자가 온전히 자신들의 것이기를, 자신들에게 속하기를 강렬하게 원하면서 ‘사랑’에 빠져버리자 오스퇴르 부부는 맥이 풀리고 만다. 가정교사들의 욕망은 자연 상태에서 날것 그대로여야 하거늘! 사랑에 빠진 가정교사들은 대담함을 잃어버리고 유순해진다. 이런 그녀들을 오스퇴르 부부는 알아보지 못할 정도이다. 그녀들과 사랑을 나눈 낯선 남자의 입장도 마찬가지이다. 애초에 그가 사랑했던 것은 단호하고 냉정한 가정교사들이이다. 그러나 사랑에 빠져 잠옷 바람으로 발코니에 서서 한숨을 내쉬거나 달콤한 말들을 속삭이며 그를 맞이하는 가정교사들은 이제 매력을 잃어버린다. 그는 그들을 자신이 사랑하던 모습으로 되돌리고자 애쓴다. 그녀들에게 다시 권력을 쥐어주고 싶다. 그러나 이미 욕망이 거세된 이 관계에서 욕망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것이 가능할까?

이런 모습들을 지켜보노라면 이성애 로맨스와 그 로맨스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가부장제 사회가 실은 여성 또는 인간의 욕망은 거세되거나 어느 시점에 소멸한 채 기능적으로만 작동하고 있을 뿐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러한 세계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낯선 남자를 욕망할 때 생기에 넘친다. 그런 그녀들을 지켜보는 이들도 마찬가지이다(이 작품에서는 오스퇴르 외에도 또 한 사람의 지켜보는 눈이 있다. 그는 늙은 남자로, 그 눈-망원경-은 더 적나라하게 그녀들을 훔쳐본다). 그들이 낯선 이와 정원(자연)에서 정사를 벌일 때 지켜보는 눈들도 더 생생히 빛난다. 관음하는 그들도 삶의 환희에 차오른다. 그런데 그녀들이 사랑에 빠지고 심지어 그중 한 사람이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자 이 모든 뜨거움들-욕망은 찬물을 끼얹듯이 소멸하고 만다. 심지어 관음의 시선을 알고 흥분하던(때로는 그 시선을 더 도발하던) 그녀들조차도 지켜보는 시선이 사라지자 욕망이 시들해진다. 자신들의 욕망조차 남성의 관음의 시선에 익숙해진 여성들의 은유로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관음의 시선에 끊임없이 자신을 노출하면서 존재의 이유를 찾는 현대인. 그리하여 그 시선이 사라질 때는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조차 시들해지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을 만나는 사람들은 그들을 이해하기가 다소 어렵다. 이 세계에서 그들은 톰과 10년을 함께 살았고, 아이 두셋을 낳았으며, 집 한 채를 갖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그들은 마흔 살, 쉰 살, 아마도 여든 살까지 살았다. 가정교사들 각자는 가볍고 빛이 나는 거대한 가방처럼 부풀어진 꿈의 다발로 이루어졌다. (61쪽)



결혼이라는 제도가 인정하는 관계로 맺어져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내고, 아이들을 낳고 집을 마련하고 마흔 쉰 예순 여든 그렇게 늙어가는 인생. 그러나 어느 순간 욕망은 소멸하거나 거세되어 오직 권태만 남는 삶. 애초에 이 삶에서 낭만적인 사랑을 지속하기란 불가능할 뿐임을 이 작품은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권태에 젖은 그들이 더 생기 넘치는 집을 찾아 나선들 “그곳에서도 누군가는 오스퇴르 씨의 역할을 할 것이고, 다른 이도 마찬가지다. 노인의 역할도, 낯선 남자들의 역할도, 구혼자들의 역할도 마찬가지”일 뿐이다. “어디를 가든 똑같은 철문이, 똑같은 정원이, 똑같은 세계가 똑같은 실들로 짜여 있을 것이다.”(86쪽) 이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전복할 수 있지만 정작 그 욕망이 펼쳐지는 이 세계는 영원히 닫혀 있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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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8-08 10: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 이 리뷰의 특히나 마지막 단락을 읽다보니 아침 출근길에 읽은 실비아 페데리치의 이 말이 떠오릅니다.

˝여성이 악마에게 돈이 없다고 가난하다고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 악마가 나타나는 전형적 방식입니다. 그러면 악마는 나의 노예가 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계약이 이뤄집니다. 악마가 돈을 좀 주고 그 대가로 여성의 몸에 노예라는 표시를 새깁니다.… 제가 언제나 흥미롭게 생각한 것은 악마와 마녀의 관계가 오늘날의 결혼관계의 고전적인 관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불태우지 못한 마녀들의 후손이다 中 에서

완전히 다른 얘긴데요, 가정교사 와 집주인의 성적인 관계에 대해서 말이지요, 그 아주 오래전에 본 영화였는데 지금 제목이 생각이 안나네요. 그런데 말하면 아마 잠자냥 님은 아시겠지. 그러니까 그냥 얘기해볼게요. 남자주인공이 아마 섹스 중독 이었던 것 같고요, 집에 왔는데 어린 딸의 가정교사(였나 베이비시터였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터가 아이 아빠가 오니 집에 돌아가기 전에 샤워를 했어요. 아이의 아버지는 소파에서 강제로 이 시터를 강간하려는 걸로 기억하는데요, 밑에서 시터가 몸부림치고 소리를내자 아이가 무언가로 아빠의 등을 찌릅니다. ˝우리 선생님 아프게 하지마!˝ 라고 하면서요. 그래서 아빠는 섹스중독 치료를 받으러 다닙니다. 잠자냥 님의 이 리뷰에서는 주인집 남자와는 성적인 관계가 나오지 않는 것 같지만, 어쩐지 그 영화 생각이 났어요. 잠자냥 님, 제목 아시죠? ㅎㅎ

단발머리 2023-08-08 11:17   좋아요 2 | URL
잠자냥님 지금 급 당황 ㅋㅋㅋㅋ 몰라서 검색하고 계십니다. 기다리세요 ㅎㅎ

책읽는나무 2023-08-08 11:50   좋아요 1 | URL
요즘 잠자냥 님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는 문구를 두 번이나 댓글에서 읽었는데...설마....또?ㅋㅋㅋ

잠자냥 2023-08-08 11:58   좋아요 3 | URL
에엥? 모르는데요? 제가 섹중독자 이야기는 별로 흥미가 없어서...? ㅋㅋㅋㅋ
근데 뭐지 검색해보고 싶다...... 검색해보니 본 거 아닐까.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08-08 12:50   좋아요 0 | URL
되게 유명한 영화거든요? 저 퍼뜩 <무릎과 무릎 사이> 였나 싶어 검색하니 이건 한국 영화네요? <당신의 다리 사이>였나 검색해보니 여기엔 제가 말한 장면에 대한 언급은 없고 … 당신의 다리 사이, 이것 같은데 맞는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 여름에 봐야겠네요. 흠흠.

잠자냥 2023-08-08 13:30   좋아요 0 | URL
<당신의 다리 사이>는 저도 본 거 같은데... 으음.

단발머리 2023-08-08 11: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임신하고 출산하기 전에도 뜨거운 욕망이 단번에 사그라드는 경험에 대해 저는 좀 더 고찰을 해보고 싶습니다. 낭만적 사랑의 유통기한,은 대체, 얼마나 짧은 것인가,에 대해서요^^

잠자냥 2023-08-08 11:59   좋아요 2 | URL
사랑의 유통기한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인간은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을 사랑한다는 게 불가능한 존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요. 사랑이라고 포장하지만... 결국은 그냥 육욕이고 친밀감의 표현이고 뭐 그런 거 아닌가.....-_-;;

은오 2023-08-09 02:55   좋아요 1 | URL
대상이 나 자신인가? X
육욕인가? X
영혼만을 사랑하는가? X
친밀감의 표현인가? X
모든걸 알고싶은가? O
사랑인가? O

잠자냥 2023-08-09 09:54   좋아요 1 | URL
모든 걸 알고 싶은 건 지식욕인데... 세상에 읽을 책도 많은데 .... 안 자니?

은오 2023-08-09 10:17   좋아요 1 | URL
잠이 안오네요?! 잠자냥님 때문인가??

잠자냥 2023-08-09 10:24   좋아요 0 | URL
스마트폰으로 격렬한 영상을 봤거나 카페인 과다입니다.
자기 전 흡연도 수면방해에 한몫합니다.

은오 2023-08-09 10:25   좋아요 1 | URL
스마트폰으로 잠자냥님을 만나긴 했는데......

책읽는나무 2023-08-08 1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욕망을 드러내고 사는 삶이 옳은 것인가?
욕망을 다스리고 사는 삶이 옳은 것인가?
권태도 다스리기 나름인 것인가?
물음표가 많이 생기는 소설이로군요!

잠자냥 2023-08-08 11:59   좋아요 2 | URL
읽고 나서도 아리까리한 소설입니다.
읽는 사람에 따라서 또 많은 해석의 여지가 달라질 것 같고요.

은오 2023-08-09 02: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헐 ㅋㅋㅋㅋㅋㅋ 이거 이런 내용이었군요.
먹음직스러운 남자 찾는거 그거 극악의 난이도인데.. 저 집 앞엔 먹음직스러운 놈들이 많이 지나다녔나보네....

잠자냥 2023-08-09 09:55   좋아요 1 | URL
극악의 난이도 ㅋㅋㅋㅋㅋ 묘사를 보면 딱히 먹음직스럽지도 않은데 잘도 먹더이다......-_-

2023-08-09 0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09 0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목련 2023-08-09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에서 낭만적인 사랑을 지속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걸 늦게 알게 된 슬픔!
일찍 알아도 슬픈 건 매한가지일까 싶기도 하고요 ㅎ

잠자냥 2023-08-09 11:49   좋아요 0 | URL
일찍 아는 게 좀 더 슬플 거 같기는 해요. 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08-09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되게 신기한 소설이네요?? 다락방님 글에서 ‘남자 잡아먹는 소설‘이라고 봤는데 진짜 잡아먹고 있.. ㅋㅋㅋㅋ 근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소설이 설득력이 있는 건지 잠자냥님이 설득력이 있는 건지.

잠자냥 2023-08-09 16:53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네 아주 그냥 와구와구 잡아먹습디다.
약간 동화 같기도 하고 우화 같기도 하고 암튼 그런 작품이에요~

coolcat329 2023-08-09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 설정이 기이한 게 쉬운 소설 같지가 않네요. 독서토론 책으로 좋을 거 같아요. 기능적으로만 작동하는 결혼제도 저도 종종 생각해보는데 이 책 그 점을 다루고 있네요.

잠자냥 2023-08-09 23:18   좋아요 0 | URL
네 작품은 짧은데 상징적인 부분이 많아서 여러 사람하고 생각을 나누면 재미 있을 거 같아요. 이 글에서 제가 쓰지는 않았지만 소년들하고의 관계도 해석의 여지가 많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