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그들과 섞이기보다는 혼자 있거나 최소한의 사람만 만나면서 사는 것을 선호한다. 어릴 적부터 그랬는데 나이 들수록 이런 성향은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사람의 어떤 특성을 좀 못 견뎌 하는 편이다. 예를 들면 무리를 짓고 그 무리의 힘을 믿어서 혼자 있을 때는 하지 않을 행동들을 하는 것. 이기심, 탐욕, 그게 무엇이든 권력을 지닌 자에게 아부하고 굴종하는 태도 등등.... 인간의 이런 단점들을 일일이 나열하다가는 이 글을 다 쓰지도 못하고 지칠 것 같으니 그만 두자. 물론 드물게 아름다운 인간들도 있다. 그러나 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중 90명은 추하기 짝이 없고, 처음엔 가면을 쓰고 아름다운 척 잘 포장했던 사람도 결국에는 결정적일 때 추한 면모를 드러내고 말기 때문에 나는 인간과 섞이지 않는 편을 택하고 만다.
어릴 때도 또래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면 유독 그런 추한 꼴이 눈에 잘 들어오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친구가 거의 없는 편이었다. 조용히 구석에서 늘 책만 읽고 있으니 어른들은 애가 너무 내성적이라 큰일이라고, 몹시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나도 먹고살아야 하므로 가면을 쓰는 법을 찾았고, 사회적 가면을 쓰고는 지금까지 잘도 버티면서 이 한국이라는(이기심과 탐욕이 넘쳐나는 인간이 유독 많은)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넌 고매하느냐? 누군가 묻는다면 나 또한 이기적이고 탐욕...(적이지는 않은 것 같지만 아예 없지도 않다)도 있는 평범하고 비루한 인간일 뿐이다. 특히 대개의 인간이 그렇듯이 연애할 때 나는 세상 찌질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지금은 덜 하다고 생각).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그 비루한 면모를 서로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아니 굳이 드러내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고로 나는 그 어린 시절 자아가 조금씩 갖춰지기 시작하던 10대 때부터 주변의 아이들이 어떤 사람에게 꽂혀서 열광하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또래의 친구를 좋아한다거나, 이성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저 멀리 있는 사람들, 연예인이라거나 선생님 같은 존재에 열광하는 것, 그 감정을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어린 시절에 돌아다니던 앙케트 항목- 거기엔 늘 그런 질문이 있었다. 좋아하는 연예인, 좋아하는 작가, 좋아하는 누구누구는? 특히 나는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는 애로 주변에 알려졌던 터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시절부터 책을 추천해달라면서 어떤 작가를 좋아하느냐고 잘 묻고는 했다. 그럴 때 나는 한참 생각한다. 좋아하는 작가? 좋아한다고?! 사람을?!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그건 아닌데..... 단지 그 사람이 쓴 작품을 좋아하고 즐겨 읽는 것일 뿐인데.....
내 친구 중에는 사람 자체에 빠지는 녀석이 있다. 이 친구는 그러니까 김연아와 손열음과 김혜리 기자와 대미언 라이스를 엄청 좋아한다. 그래서 이들의 콘서트나 GV나 강연 등의 자리에는 빠짐없이 참석한다. 이 친구 때문에 김혜리 기자의 무슨... 뭐더라(기억이 안 난다)를 같이 가 본 적이 있는데 아, 이렇게도 사람을 좋아할 수 있는 것이구나 약간 객관적인 감상자가 되어 친구를 관찰하고 온 적이 있다. 그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친구의 그 열정과 에너지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떻게 사람 자체를 좋아할 수가 있지? 싶어진다. 김연아가 아이스링크 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할 때, 손열음이 강렬하게 타건을 하면서 훌륭한 연주를 들려줄 때, 대미언 라이스의 몇몇 음악에 감동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이 만들어낸 ‘예술’을 사랑할 뿐이지 그 사람 자체를 좋아하게 되는 일은 거의 없다.
하물며 작가란... 작가의 글이란. 작가를 좋아한다는 것이란. 내게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알면 알수록 싫어지는 인간이 많은 집단이 ‘작가’라고 생각해서 더 그런 것 같다. 한국 작가의 글을 잘 읽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같은 땅에 살다보니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정보들(그들의 치부까지도)을 너무 잘 알게 되고, 그런 유쾌하지 않은 인간이 쓴 글을(글은 또 얼마나 포장하기 쉬운가) 굳이 읽고 싶지 않을 때가 많다. 게다가 한국에서의 ‘작가’들은 젊을 때와 달리 늙을수록 추한 면모를 잘 드러낸다(애초에 인간이란 존재가 그런지도). 나이 들면서 망가지는 작가들을 여럿 보게 되는데 최근엔 강준만이 나의 그 리스트에 올랐다(그는 왜 살아있는 권력에는 입을 꾹 다물고 한없이 작아지기만 하는가? 마봉춘을 비판하려면 조선일보부터 비판하라. 아직도 민주당만 까고 있는가? 국힘부터 까라.) 그도 이제 그만 읽을 때로구나!
나 스스로 문화사대주의자라고 우스갯소리처럼 말하고는 하지만 멀리 떨어진 나라의, 그래서 그의 사생활이나 망가지는 순간에 대해 세세히 잘 알지 못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 편이 차라리 속편하다. 그래서 나는 작가의 전기나 사생활을 파헤친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몇 해 전 나쓰메 소세키의 아내 나쓰메 교코가 쓴 <나쓰메 소세키, 추억>이 출간되었을 때도 아 또, 뭘 이런 책까지 내고 있나 싶어졌다. 이 책을 읽지 않아도 나쓰메 소세키가 지인이나 아내와 주고받은 편지들, 또는 그의 작품을 통해서 그가 좋은 남편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친구인 마사오카 시키나 아내에게 쓴 편지를 보면 여성혐오적인 발언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 100년 전의, 동양의 작은 나라의 그저 그런 조그만 남자일 뿐이다. 그렇다고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싫어하게 되지는 않는다. 소세키라는 인간 자체를 크게 좋아한 적이 없으므로 실망하게 되지도 않는다. 그저 동료나 제자들에게는 좋은 벗이자 스승이었지만 그도 한 인간으로서는 이런 한계가 있었구나 생각할 뿐.
그런데 내 기준에는 글로 자신의 본질을 잘 포장하는 작가들이 있다. 머리가 너무 영리해서 자기의 본 모습을 잘 숨기기도 하고 포장도 잘한다고나 할까. 그런 작가들의 글을 읽으면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아서 잘 읽지 않게 된다. 장강명과 유시민이 나에겐 그런 작가이다. 영리해서 영리한 글을 쓰지만 머리로 쓴 글들이라 딱히 와 닿지 않는 그런 글- 특히 장강명은 기자 출신이라 그런지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잘 알고, 그걸 작품으로 만드는 데 탁월하다. 그래서 그는 그런 의식을 지닌 작가로 보일 수 있지만(독자들이 착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종종 그의 글에서 숨기지 못한 본질을 보게 된다. 이른바 스카이를 나오고 주류 언론사에서 오랜 세월 기자로 지내면서 갖춰진 프레임이 자기도 모르게 작동할 때가 있다. 유시민도 마찬가지이다. 불의에 맞서 싸우던 젊은 그에게도 한때 아름다웠던 시절이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그 아름다움은 포장된 아름다움이어서 본질이 자기도 모르게 적나라하게 드러난 적이 있다. “해일이 밀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는 말. 이 말이 나는 그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후로 그가 쓴 글은 포장을 잘한 가짜로 보인다.
세상에는 해일이 밀려와도 조개를 줍는 사람들이 있다. 드물지만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는 작가라면 해일이 밀려와도 조개를 주울 줄 알아야 하는, 조개를 주워야만 하는 사람의 심정을 알아야만 한다고, 아니 그 조개를 주울 수밖에 없는 심정에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공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글을 쓰는 사람, 글이 곧 삶인 사람, 말과 글, 삶이 일치하는 작가가 아니라면 쉽사리 인간으로서 좋아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런 작가는 드물다. 그렇지 않은가? 인간은 모순덩어리이기 때문에, 나약하기 때문에 글과 달리 삶은 비루해지기 쉽다. 그런 점에서 하워드 진은 글과 말과 삶이 일치한 드문 사람이었다. 진은 태생부터가 가진 자 편에 서기 어려웠다. 그의 부모는 유럽에서 이주한 유대인 노동자였고, 진 그 자신도 어릴 때부터 노동을 해야만 했다. 어렵사리 구한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읽으면서 문학에 빠져들었고, 자신의 경험들-평화집회에서 맞은 곤봉 세례, 전쟁에 징집당해 목격한 참혹함, 노동자조합을 설립해 일하면서 몸소 겪은 자본주의의 폐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끊임없이 노동하면서 대학에 진학하고 그러고도 늘 공부와 일을 병행해야만 하는 삶. 여러 대학을 전전하면서 강의하다가 흑인 여자 대학인 스펠만대학의 전임교수가 된 일, 흑인 차별 중심지였던 애틀랜타에서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수업을 하고, 시위와 집회에 참여하면서 결국 스펠만대학에서 해직당하는 삶.... 그 이후로도 그는 죽는 날까지 미국 정부 및 지배계급에 거침없는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단순히 말과 글로만 내뱉는 게 아니라 실제 삶에서 늘 가난한 사람, 흑인(유색인), 노동자, 노숙자, 여성, 억압받는 자 등 약자 편에서 행동했다. 그런 인생을 살아간 이가 쓴 글을 읽노라면 절로 마음이 뜨거워진다.
“물론 여러분이 현실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걸 압니다. 일자리를 구하고 결혼을 해서 자식도 낳아야겠지요. 부자가 되어 우리 사회가 성공이라 규정하는 ‘성공’을 거두기도 할 겁니다. 재산을 모으고 사회적 지위와 권위도 쌓아갈 겁니다. 하지만 ‘좋은 삶(Good Life)’은 그런 것만으로는 충족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좋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무슨 일은 하던, 교사가 되던, 사회 운동가가 되던, 사업가, 변호사, 시인, 과학자 등 무엇이 되던, 여러분의 자식, 아니 모든 아이를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여러분의 삶을 조금이라도 투자하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세대는 전쟁 종식을 강력히 요구하고, 여러분의 세대는 역사에서 아직 이뤄내지 못한 일을 해내고,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구분 짓는 국경을 지워버리길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이 사회에서 성공이라고 평가하는 그 성공에 안주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부당한 규칙에까지 순종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감춰진 용기를 마음껏 끌어내서 행동하길 바랍니다. 흑백을 넘어서 우리가 귀감으로 삼을 사람은 많습니다. 콘돌리자 라이스, 콜린 파월, 클라렌스 토마스 같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귀감으로 삼지는 마십시오. 그들은 권력자와 부자의 하수인이 됐을 뿐입니다. W.E.B 듀보이스, 마틴 루서 킹, 맬컴 엑스, 매리언 라이트 에델먼, 제임스 볼드윈, 조세핀 베이커 그리고 평화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지배집단에 도전한 훌륭한 백인을 귀감으로 삼으십시오.” (‘실망을 이겨내고’라는 하워드 진의 스펠먼대학 졸업 축사- 2005년 진은 스펠먼대학으로 돌아가 명예학위를 받았고 졸업식 축사를 했다)
삶과 글이 일치했으면 좋겠다. 글 쓰는 사람 중엔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 많다. 그런 자의식으로 무장하고서 글에서는 꼬장꼬장하게 옳지 못한 현실을 비판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 많다. 나는 그런 사람과 그런 사람이 쓴 글을, 좋아할 수가 없다. 아무리 글에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쓴 소리를 늘어놓아도 실제 자기 삶이 그렇지 못하다면 그 글은 ‘죽은 글’이나 마찬가지이다. 세상에 읽을 글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죽은 글을 읽으면서 시간을 낭비하는가! 쓰레기 언론에서 주는 상으로 등단하고 그래서 그들과 계속 엮이면서, 그들만의 문학권력을 만들고 서로 뒤를 봐주는 문인들의 글도 읽고 싶지 않다. 그런 작가들이 소설에서 아무리 현실이 어떻고 말한다 한들 그게 진심으로 다가올 리가 없다.

물론 모든 작가가 이렇게 살 수는 없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래서 내가 그나마 인간적으로 덜 싫어하는 작가들은 대개 이렇게 살아보려고 애는 써보지만 종종 실패하기도 하는 또는 크게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내지는 못하지만 그런 관점을 갖고 살아가려고 늘 애쓰는 작가들이다(최근에는 최윤필과 김승섭의 글을 꾸준히 읽는 편이다. 이들이 늙어도 망가지지만 않는다면 계속 읽을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하인리히 뵐이나 카렐 차페크도 좋아하는 편이다. 수잔 손택도 여기에 좀 가까운 유형이기는 한데, 그이의 삶은 모순이 참 많은 것 같고(일기를 괜히 읽었나 -_-? 멀리서 그냥 볼걸), 지성이나 날카로운 감각,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점, 미친 듯이 무언가 읽고 보고 쓰고 하는 에너지 등등은 본받고 싶지만 말이 많고(일기에서 본인도 인정. 얼마나 말이 많았는지 매년 일기마다 ‘말을 적게 하자’는 결심을 적었을까!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단추 달기(입에 단추 채우기)’. 게다가 씻는 것도 무척이나 싫어했다. 씻기를 결심하는 부분도 일기에 자주 그려진다. 이를 테면 이렇다. ‘매일 목욕하고 열흘에 한 번씩 머리 감기’ 헐 열흘에 한 번씩이라니!!!!) 나르시시스트적인 면모, 끊임없는 애정 갈구 등의 점에서 친구나 연애 상대로서는 피곤할 스타일 같아서 피하고 싶은 사람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안해요 언니. 또 이런 기준에서 나쓰메 소세키보다는 오에 겐자부로를 한 인간으로서 더 좋아하지만 작품으로는 아직 나쓰메 소세키의 것이 더 좋다. 이것도 참 모순이네... -_-
그러나 모든 작가가 이렇게 삶과 글이 일치할 수는 없으므로, 이런 높은 기준만으로 작가를 평가하지는 않는다. 상처투성이 글을 남겼는데 그 상처가 자기 내부 깊숙이에서 우러나와 진실 그 자체일 수밖에 없는 작가의 글들, 그런 작가도 덜 싫어하는 편이다(좋아한다고 굳이 말하지 않는 고집). 예컨대 트루먼 카포티, 테네시 윌리엄스, 유진 오닐 같은 이들- 이 세 사람은 가족 내에서의 결핍이나 상처, 성정체성 문제(유진 오닐 제외)로 평생 고통받았고 그걸 결국 글로 승화한 인물들이다. 그렇게 피로 쓴 글들이라 그런지 울림이 크다. 그 글이 진실에 얼마나 가까운지 아닌지를 의심하지 않게 된다. 세 작가 모두 마초적이지 않다(마초의 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필립 로스, 코맥 매카시). 마초마초한 글을 쓰는 작가들이 이들을 보면 아마 질질 짠다고 싫어할지도 모르겠다. 헤밍웨이가 총을 들고 나타나 카포티에게 징징거리지 말라고 협박하는 모습이 상상된다. 그런데 나는 총을 들고 사냥에 나서는 헤밍웨이보다는 총에 맞아 죽어가는 짐승을 보며 울어버릴 것 같은 카포티의 그 나약한 점이 좋다.
그런데 뭘 이렇게 길게 쓰고 앉았지? 삶과 글이 일치한 훌륭한 인간이었거나 그렇지 못하다면 진실에 가까운 훌륭한 예술 작품을 남긴 작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만인 것을.

<미국 민중사>를 쓸 무렵의 하워드 진
어떤 것을 아는 방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피상적인 앎과 마음 깊이 진정으로 느끼는 본질적인 앎이 그것입니다. 설령 자신이 인종차별의 희생자가 아니더라도 그에 대한 본질적인 앎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만약 인종차별의 희생자라면 본질적인 앎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백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해도, 유색인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느낄 수는 있습니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할지라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바로 문학이 그 같은 일을 합니다. 사람들은 리처드 라이트가 쓴 <깜둥이 소년>이나 랠프 엘리슨의 <보이지 않는 인간>을 읽고 흑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됩니다. (<하워드 진, 교육을 말하다> p.47~48)
질문하라. 이 사람이 뭔가 내게서 좋은 점을 끌어내는가? 아니면, 이 사람은 아름답고 선하고, 귀한가? (수잔 손택, <다시 태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