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카를라 3부작 1
존 르카레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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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스릴러'라는 대중적인 장르를 썼음에도 문학적으로도 뛰어난 인정을 받는 존 르카레. 이 작품은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1963년작)>와 함께 그의 양대 걸작으로 꼽힌다. 나는 존 르카레 작품 중 공교롭게도 이 두 작품만을 읽었는데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읽었을 때보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읽었을 때 더 감탄이 나왔다. ‘아, 정말 잘 쓰는구나! 대단하다!’ 이런 생각... 이 작품이 <추운 나라>보다 한 10년 뒤에 쓰인 작품인데 그래서 그런 걸까? 인간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더욱 예리해졌고, 이야기의 구조도 보다 원숙해진 느낌이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두더지’ 즉 이중간첩을 찾아내는 게 주된 내용이다. 1960년대 미국과 소련 간 냉전 상황에 각국의 스파이전은 심화되었고 영국 역시 이런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실제로 냉전시대에 영국 최고 엘리트들 중에는 소련의 첩자 역할을 한 이들이 많았고 이런 이들의 정체가 발각되어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단다). 영국 정보부 최고위직에 소련에서 심어놓은 이중간첩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은퇴한 정보부 요원 ‘조지 스마일리’는 스파이 혐의자들을 대상으로 누가 진짜 ‘두더지’인지 밝혀내는 작업을 시작한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믿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조지 스마일리의 외로운 싸움은 시작된다.

그저 단순히 두뇌게임을 하듯 그래서 누가 두더지인가를 밝혀내는 일에 모든 이야기의 초점이 맞추어졌다면 이 작품은 그저 ‘스파이 스릴러’로 끝나고 말았으리라. 그러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미덕은 단순히 이야기를 흥미롭게 하기 위한 ‘스파이 찾기 게임’에 몰두하는 게 아니라, 한 인간이 어쩌다 스파이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하여 스파이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등을 보여줌으로써 ‘이데올로기’ 앞에 선 인간 삶의 고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은퇴한 정보부 요원인 조지 스마일리의 삶도 그렇고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삶(주로 정보부와 관계있는)은 기이하게도 뒤틀려있다. 보통 사람의 눈으로만 판단하자면 남부러울 것 없는 부와 명예를 가진 이도 있고, 엘리트코스를 밟고 창창한 미래가 빛나던 이들도 많다. 그런데 그들의 현재 삶은 어떤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미국과 소련, 빛나던 대영제국, 동서갈등 등등 숱한 이데올로기가 난무하던 시절, 자신의 신념에 따라 ‘이것이 옳은 길이다’라고 선택하고 그 길을 걸어가지만 남은 건 ‘허상’뿐이다. 스파이로 살기 위해 가진 수많은 이름, 가짜 여권, 여기저기 만들어 놓은 (가짜 혹은 진짜일수도 있는) 가족, 연인…. 어느 것이 진짜 삶인지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그저 세상을 부유할 뿐이다.

조지 스마일리뿐만 아니라 그렇게도 전도유망하던 사람들이 어떤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국가’라는 혹은 ‘체제’라는 허상을 위해 개인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삶의 쓸쓸한 한 단면을 보는 듯해 어쩐지 마음이 싸해진다. 서글프기도 하고 씁쓸하다. 결국 ‘두더지’로 밝혀지는 그 사람조차도 개인의 영광을 위해 그런 선택을 했다기보다는 ‘이념’의 희생자, 자신이 믿었던 세계의 희생자라는 생각이 들어 그저 가련하고 불쌍하게 느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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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개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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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2월, 작가 로맹 가리는 배우인 아내 진 세버그를 따라 프랑스에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잠시 거주지를 옮긴다. 아내가 영화 촬영을 하는 동안 함께 지내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키우던 고양이와 개 등 여러 마리의 애완동물도 함께였다. 덩치 큰 누렁개 샌디는 미국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이 나 종적을 감추었다. 어느 암컷 개에게 홀딱 빠져서 집을 나가 버린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스앤젤레스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로맹 가리는 샌디를 걱정한다. 혹시라도 물에 빠져 죽지는 않았을까…
 
샌디는 진흙을 잔뜩 뒤집어 써 초콜릿 색 개가 된 채 집에 돌아왔다. 그가 샌디를 보고 반가워할 새도 잠시. 샌디 옆에는 또 다른 개 한 마리가 꼬리를 치며 로맹 가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회색 빛 셰퍼드였다. 똑똑하고 강한 인상을 풍기는 녀석은 혈통 좋은 개에게서는 보기 드물게 목걸이를 하지 않았다. 샌디를 집 안으로 들여보낸 후에도 셰퍼드는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샌디 조차 뭐랄까 ‘이 친구를 집으로 좀 초대하고 싶은데요.’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로맹 가리는 그 셰퍼드를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보호하기로 한다. 폭우 속에서 샌디를 구해준 녀석이 이 셰퍼드가 아닐까 그는 짐작한다. 로맹 가리는 이 개에게 ‘바트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그와 ‘바트카’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된다.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로스앤젤레스 집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바트카는 무시무시한 외모를 갖고 있음에도 성격은 매우 온순해서 그 집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과 잘 어울렸고 사람들 또한 이내 이 개와 잘 지내게 되었다. 로맹 가리의 친구들 사이에서 바트카는 인기가 좋았다. 온순하고 충직하고 똑똑하고 상냥하며 사람들에게 애교도 부릴 줄 아는 덩치 큰 셰퍼드 바트카-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글을 쓰고 있던 로맹 가리의 귀에 바트카의 성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단 한 번도 이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던 그는 놀라 문제의 현장으로 달려갔다. 제대로 훈련된 경비견의 폭발음은 대단했다. 누군가 침입자가 있는가? 놀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수영장을 청소하러 일꾼이었다. 바트카는 몹시 흥분하여 그 일꾼을 향해 미친 듯이 짖어댔다. 개는 입에 거품까지 물고, 문에 달려들었고 이런 모습을 본 수영장 청소부는 겁에 질려 얼어버렸다. 온순한 샌디 조차 낑낑대며 침대 밑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로맹 가리는 짐승의 살인적인 폭력성을 마주하고 잠시 절망한다. 바트카는 그가 말려도 기를 쓰고 그 일꾼을 향해 돌진하려고 애를 썼다. 수영장 청소부는 그날 일을 하지 못한 채 돌아갔다. 이튿날, 웨스턴유니언 직원이 전보를 가져왔을 때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오후에 로맹 가리 친구들이 집에 들렀을 때 바트카는 전과 다름없이 사람들과 상냥하게 잘 지내는 게 아닌가. 그때 로맹 가리는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의 친구들은 모두 백인이라는 점, 그리고 수영장 청소부와 웨스턴유니언 직원은 둘 다 흑인이었다는 사실을…. 그의 이 의심은 바트카가 급기야 슈퍼마켓 배달꾼의 목을 물 뻔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명확해진다. 그 배달꾼 역시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로맹 가리는 개를 데리고 그가 잘 알고 지내던 동물 조련사가 있는 ‘노아의 목장’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바트카는 흑인을 공격하도록 특별히 훈련 받은 개였다. 이른바 ‘흰 개’였다. 남부에서 온 개. 그곳에서는 경찰이 흑인을 체포하는 걸 돕도록 훈련한 개들을 ‘흰 개’라고 불렀다. 바트카가 바로 그런 개였다.
 
예전에는 달아난 노예들을 뒤쫓기 위해, 그리고 현재는 시위자들을 쫓기 위해 훈련 된 ‘흰 개’- 조련사 ‘잭’은 바트카는 나이가 일곱 살이나 되어 다시 훈련시키기 어렵다며 답은 안락사뿐이라는 조언을 할 뿐이다. 한 번 더 깊게 절망하는 로맹 가리. 그런 그에게 이 동물원의 또 다른 조련사인 ‘키스’가 다가온다. 흑인 조련사인 그는 바트카를 자신이 ‘교정’하겠다며 발 벗고 나선다. 로맹 가리는 반신반의하며 그에게 바트카를 맡기게 된다. 과연 ‘바트카’가 흑인 조련사의 손길에서 ‘흑인’만 물도록 훈련된 습성을 고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로맹 가리의 자전적 소설이다. 진 세버그도 그렇고 배경이나 사건 등이 모두 실화다. ‘흑인’만 물도록 훈련된 개 ‘바트카’의 이야기면서도 그 개와 끊임없이 자신을 동일시하며 미국의(혹은 전 세계의) 흑백 인종차별 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로맹 가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톱 배우라는 후광을 얻고 흑인들을 위해 인권 운동을 하지만 실상은 진정성을 의심받은 채 그들에게 이용당하기만 하는 아내 진 세버그와의 갈등과 그녀에 대한 연민도 이 작품에는 고스란히 드러난다.

프랑스에서는 68혁명이 일어났으며, 미국에서는 베트남 반전 시위가 한창이었고, 마틴 루터 킹이 암살되면서 인종 갈등이 고조된 극도의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그 혼란을 바라보는 로맹 가리의 시선은 거침없다. 이런 혼란의 시기를 통해 로맹 가리가 고발(?)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흑백 갈등만은 아니다. 백인을 향한 흑인의 분노, 증오, 폭력에 대항하기위해 자행되는 또 다른 폭력, 인권운동을 한다면서 사리사욕을 채우는 지식인들의 이중성, 백인의 죄의식을 이용해 돈을 뜯어내려는 흑인, 죄의식 때문에 무조건 흑인을 옹호하는 백인, 핍박 받은 세월에 대한 보상인지 흑인의 모든 폭력 행위를 영웅적 행위로 간주하는 흑인 등등 이성과 양심, 도덕을 잃어버린 인간들의 ‘개짓거리’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바트카’는 그런 인간의 ‘개짓거리’가 만들어낸 가련한 희생물이다. 무엇이 잘못된 일인지도 모른 채 ‘흑인’만 물도록 훈련 받은 그 개는 흑인을 물 때 마다 백인 주인에게 달려와 칭찬 받기를 바라며 해맑게 웃는다. 살랑살랑 꼬리를 친다. 이런 개의 모습을 보고 가슴 아프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럼에도 ‘바트카’는 인간의 ‘개짓거리’에 또 한 번 희생당한다. 이 작품의 결말은 정말 충격적이다, 인간만큼 잔인한 동물이 또 있을까 싶어 참담한 심정이 절로 든다. 인간의 뿌리 깊은 ‘증오’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인종 갈등은 물론 이 세계의 모든 차별이 사라질 수는 없으리라는 절망감까지 든다.
 
그럼에도 로맹 가리는 희망을 놓지 못한다. 인간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못한다. ‘짐승을 사랑한다는 건 꽤나 끔찍한 일이다. 개 안에서 인간을 본 사람은 인간 안에서 개를 보고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272쪽)’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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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6-02-02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미니크 보나가 쓴 『로맹가리』를 읽으면서 아내 진 세버그와의 이야기뿐 아니라 그가 쓴 거의 모든 작품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아주 자세히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흰 개>도 그 중 한 작품이었지요. 이렇게 리뷰를 통해 그 작품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접하고 보니 나중에 언젠가는 이 작품을 꼭 한번 읽고 싶군요. 마지막 문단을 보니 문득 카프카의 <소송> 말미에 주인공 요제프 K가 ˝개 같군!˝하고 말했던 장면도 슬쩍 떠오르고요...

잠자냥 2016-02-02 09:21   좋아요 1 | URL
네, 저는 말씀하신 『로맹가리』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꼭 한 번 읽어보고 싶군요. `마음산책`에서 나오는 이 로맹가리 시리즈에 괜찮은 작품이 꽤 있는 듯합니다. 물론 살짝 실망스러운 작품도 있었지만..... <흰 개>는 괜찮은 작품에 속한 느낌이었습니다. 카프카의 <소송>과 연관지어 말씀하신 부분 재미있네요.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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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부모들이 먼저 읽어야 할 책. 그러고나서 여자 남자 모두 읽어야할 책. '남자와 여자는 태어나지 않는다. 다만 만들어진다.' 쉽고 재치있으면서도 핵심만 콕 찝어 여성의 권리, 더 나아가 양성평등을 이야기한다. "난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라고 말하는 여자들은 특히 꼭 더 읽어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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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지혜정원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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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걱서걱 거칠고 투박한듯한 건조한 문체. 짧디 짧은 엽서 같은 이야기.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진솔하면서도 묵직하다. 아무튼, 삶은 그러니까 아픈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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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온화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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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작가로 더 유명한 슈테판 츠바이크의 문학 작품을 처음 읽은 것은 문학동네 버전의 <체스 이야기, 낯선 여인의 편지>를 통해서이다. 중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두 개의 이야기는 무척 흥미진진했고, 이 작가의 이름을 순식간에 ‘구할 수 있는 작품이라면 다 읽어볼 것’이라는 문장과 동일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유일한 장편이라는 <연민 Ungeduld des Herzens (1939)>을 읽게 되었는데…. 탄성이 나올 뿐이다. 이 작품은 정말 어마어마하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와 친구였다는데, 그래서 그런 걸까? 인간의 심리 분석에 이토록 탁월할 수가 있을까 싶어진다. <체스 이야기, 낯선 여인의 편지>처럼 비교적 짧은 분량의 작품에서도 내기에 집착하는 사람, 애정에 집착하는 사람의 심리를 놀랍도록 묘사했던 그는 장편 <연민>에서는 끔찍할 정도로 섬세하게 인간의 심리를 그리고 있다. 현미경으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본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빌어먹을 연민은 양면이 모두 날카로운 칼입니다. 그걸 잘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은 연민에서 손을, 아니 마음을 놓아야 합니다. 연민은 모르핀과 같습니다. 처음에만 환자를 위한 위로이고 치료제이며 약이 되지요. 그러나 이걸 정확하게 조제할 줄 모르고, 적당한 시기에 멈출 줄 모르면 독약이 되고 맙니다. 처음에 한두 번 맞으면 통증을 진정시키고 마비시켜 기분을 좋게 만들죠. 그러나 육체나 영혼이나 우리의 기관은 불행하게도 놀라운 적응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경이 더 많은 양의 모르핀을 원하듯 감정도 점점 더 많은 연민을 원하게 되고 결국에는 당신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됩니다….. 우리는 연민을 제대로 관리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관심보다도 더 나쁜 해를 끼치게 됩니다.” (222~223쪽)

이 책의 표지에는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 연민’이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이 문장으로 책을 읽는 사람들은 대충 어떤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내용이 펼쳐질 수도 있고 혹은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빼곡한 글씨로 장장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이 작품은 지루할 틈이 없이 숨막히게 여러 가지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작품을 읽기 전 심농의 추리 소설을 읽었는데, 그 작품보다(무려 추리 소설보다!) <연민>은 훨씬 더 긴박감이 느껴지고 흥미진진했다. 400페이지의 책을 단 이틀 만에 읽어버렸다. 뒤에 펼쳐질 이야기들이 너무나도 궁금해서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있어 동정심이나 연민과 같은 감정은 꼭 갖추고 있어야만 할, 굉장히 좋은 감정, 종종 한 사람의 ‘인간성’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앞선 문장처럼 ‘연민’을 잘 관리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 이 작품은 처절하게 보여준다. 누군가에게 연민을 느끼고 동정을 베풀며, 그런 자신의 모습에서 ‘훌륭한 면’을 발견하고 스스로 감동받고 감탄하고 행복해지는 인간. 그 연민에 기대고 의지하는 사람을 보며 마치 ‘신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기도 하는 인간. 타인의 눈에 비칠 자신의 ‘좋은 모습’을 상상하며 허영에 차는 인간. 그러나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부담스러워 도망치고 싶어지는 인간, 그러면서도 우유부단함 때문에 도망치지 못하는 인간. 이런 인간의 모습이 <연민>에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자신이 시작한 ‘감정’에 어느 정도까지 책임을 져야 할까? 하는 묵직한 질문도 남는다. 연민이든 동정이든 사랑이든 어떤 감정의 신호를 또 다른 타인을 향해 보냈다면, 그 감정은 이제 순순히 ‘나만의 것’으로 남지 않는다. 이럴 경우 어디까지 그 감정의 신호를 보낸 일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일까? 쉽게 답을 내릴 수가 없다. 주인공의 행동에 ‘이제 그만!’하고 소리를 치다가도 ‘나라면?’하는 생각을 해보면 나 역시 쉽게 벗어날 수 없었으리란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연민에 찬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 동정을 베푼다는 것…. 시작은 쉽지만 끝까지 쉬운 일이 아니다. ‘책임’의 문제가 남기 때문이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자살하지 않고 더 많은 장편을 남겼다면 어땠을까, 싶은 안타까움이 남는다. 사람 마음을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고 싶은 이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츠바이크의 작품은 엄청나게 흥미진진하다.

나는 이 세상에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은 악이나 야만적 행위 때문이 아니라 거의 언제나 우유부단함 때문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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