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들 - 윌리 로니스의 사진 그리고 이야기들, 개정판 내 삶의 작은 기적
윌리 로니스 지음, 류재화 옮김 / 이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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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식이나 과장, 꾸밈이 많은 사람이 싫다. 글도 마찬가지고 사진은 더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나는 윌리 로니스의 사진을 참 좋아한다. ‘사진’하면 떠오르는 수많은 거장의 이름이 있겠지만 누구보다도 내가 좋아하는 사진작가는 윌리 로니스, 아니 그의 사진들이다. 그의 사진은 정말 꾸밈이 없다. 굉장한 기교도 없고 어떤 특별한 순간을 찍은 사진도 그다지 많지 않다.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들의 일상, 그뿐이다. 그토록 담백하고 소박할 수가 없다. 그런데 보고 있노라면 한없이 미소가 지어지고 어떤 사진은 뭉클하고 또 어떤 사진은 숭고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물씬 전해온다. 때로는 한없이 마음 아파오는 사진도 있다.

윌리 로니스의 <그날들>은 그가 찍은 사진과 그에 얽힌 에피소드가 담겨 있는 사진집이다. 윌리 로니스가 사진에 얽힌 이야기를 직접 글로 썼다하니 조금 더 궁금해진다. 예상대로였다. 그의 글은 사진처럼 정말 소박했다. 딱 그의 사진처럼 담백하다. 문장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사진에 얽힌 이야기들도 어찌 보면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런데도 그의 글과 사진을 보고 있는 내내 행복했다. 그런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면 참 괜찮은 사람일거야, 라는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었는데 글을 보니 어쩐지 정말 따뜻한 사람이구나 싶어졌다.  글도 사진처럼 무척이나 진실하다.

거장들의 사진이 대부분 그렇듯이 로니스의 사진에도 어떻게 저런 순간을 포착했을까 싶은 사진이 많다. 윌리 로니스는 사람과 그들이 거니는 거리를 좋아했으며 그 거리와 사람이 만나 발생하는 이야기의 ‘순간’에 집중했다. 어떤 이야기가 발생할 것 같은 분위기가 감지되면 그는 한없이 기다린다. 미술관에서 지루해하는 아이들의 모습이나 연인들의 은밀한 만남을 담은 사진들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그는 사진을 찍기 위해 자기 자신을 숨기지는 않지만 ‘아무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이런 그의 자세랄까, 마음가짐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진 안에 있는 인물들은 평범하고 소박하지만 일상의 한 장면 장면에서 행복하고 즐거운 이들이다.

그의 사진 속에는 아이들도 많이 등장한다. 이 책에도 아이들이 무척이나 귀여워서 ‘으음~’하는 신음소리가 절로 나는 사진들이 많다. 개구쟁이 꼬마도 있고, 떼쓰는 꼬마도 있으며, 자기들만의 놀이에 빠진 아이들도 있다.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귀엽다. 평소 그의 사진을 볼 때마다 아이들을 이렇게 사랑스러운 존재로, 아이 특유의 행동을 놓치지 않고 잘도 찍는 사람이라면 왠지 좋은 사람일 거야, 라고 막연하게 생각해왔다. 그리고 그런 막연한 기대는 ‘역시 그렇군.’하는 확신으로 돌아온다.

윌리 로니스는 아들 뱅상을 카메라에 많이 담기도 했다. 뱅상 역시 한없이 귀엽다. 평소에는 아들 사진만 많이 봤는데 이 사진집에는 아내 사진도 꽤 많다. 그는 아들뿐만 아니라 아내 역시 무척이나 사랑했던 것 같다. 그가 찍은 가족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사랑이 절로 전해져 마음이 따스해져 온다. 그러다가 급기야 나는 어떤 사진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보다가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윌리 로니스가 아내 ‘마리안’을 멀리서 찍은 1988년 작품으로 ‘공원의 노부인’이라는 사진이다. 사진 속에서 아내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그렇게 찍은 이유를 알고 나면 마음이 무척 아프다. 아내는 알츠하이머였고 그보다 먼저 죽음을 준비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사진은 그런 아내와 윌리 로니스의 이야기가 담긴 사진이라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 사진에 얽힌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46년을 함께 살았다.’


                        

                        사진은 이렇다.... 사진에 관한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은 이 책을 읽어보시라.....

사진집이고 글도 많지 않아 책장은 쉽게 넘어가서 금세 마지막장에 이른다. 그런데 글도 사진도 무척이나 좋아 다시 앞으로 돌아가게 된다. 사진이 좀 더 많이 실렸으면 좋았을 텐데, 그저 아쉬울 뿐이다. 내 트위터 배경 화면은 윌리 로니스의 사진 중 하나다. 혹 그에 얽힌 이야기를 혹시 알 수 있을까 싶어 기대를 했는데 그 사진은 실리지 않아 그것도 못내 아쉽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 사진을 보며 계속 혼자만의 상상을 할 수 있어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모든 사진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나면 왠지 비밀이 깡그리 사라진 것 같아 섭섭하지 않겠는가.

요즘은 좋은 카메라도 많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무척 많다. 그런데 ‘이야기’를 상상하게끔 하는 사진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윌리 로니스의 사진은 굳이 그가 사진에 얽힌 이야기를 글로 써서 보여주지 않아도 그저 사진 한 장만으로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떠올려진다. 느낌이 있고 진심이 있다. 피사체의 마음뿐만 아니라 사진을 찍은 작가의 마음까지도 전해진다. 윌리 로니스의 <그날들>은 볼수록 마음이 뭉클해지고 행복해진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분명 그의 사진이 한층 더 좋아지리라. 그리고 윌리 로니스라는 사람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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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의미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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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 에밀 아자르를 만든 것은 결국 그의 어머니. 어머니의 위대하고도 놀라운 사랑, 흔들림 없는 믿음이 있었기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 위대한 작가, 로맹 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가 있을 수 있었다. 어머니의 그런 사랑으로 빚어진 그이기에 평생 여성성(사랑, 배려, 연민, 존중, 이해)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자 했고, 그렇기에 어떤 명성보다도 자신의 글, 작품 자체로 이해받고 평가받고, 존중받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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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
시마자키 도손 지음, 노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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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는 조금 뒤늦은 감이 있지만, 예전부터 읽어보리라 생각했던 책을 올해 첫 책으로 읽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파계>는 새해 첫 책으로 읽기에 참 괜찮았던 작품이었다. 찾아보니 나쓰메 소세키가 극찬한 작품이라고 하던데, 꼭 그래서만은 아니라 꼭 한 번은 읽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절대로 네 정체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숨겨라’ 주인공 우시마쓰에게 내려진 아버지의 계율이다. 아버지는 우시마쓰에게 ‘절대로 네 신분을 밝히지 마라. 밝히는 순간 사회로부터, 너는 영원히 밀려나게 된다.’ 한다. 우시마쓰의 아버지는 백정 출신. 그러니까 그의 집안은 대대로 백정 집안이다. 에도 시대 때부터 백정은 최하층 천민으로 여겨지며 특별지역에 거주하면서 부랑자나 거지보다 더 하등한 인종 취급을 받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신분제 폐지로 그들은 ‘신평민’이 되었지만 여전히 사회적 시선은 차디차다. 가혹할 정도다.

그렇게 살던 고향을 떠나 철저히 신분을 숨긴 채 어느 시골 학교의 교사가 된 우시마쓰. 그가 어느 날 목격한 장면은 백정 출신으로 밝혀져 여관에서 쫓겨나는 한 남자의 모습이다. 사람들은 그를 향해 거침없는 조롱은 물론, 욕설을 내뱉고, 그가 떠난 뒤 소금까지 뿌려댄다. 끔찍하다. 가혹하다. 그는 그런 장면을 본 뒤 더욱 움츠러들 수 밖에 없다. ‘숨겨라’- 아버지의 말이 귓가에 윙윙거린다.

그런 그에게도 숨길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이노코 렌타로’- 자신이 백정 출신임을 당당히 밝히고도 무시할 수 없는 지식인, 사상가의 반열에 오른 그. 우시마쓰는 위험을 무릅쓰고(그의 책을 읽음으로써 누군가 자신을 백정 출신으로 의심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 그의 저작이라면 빠짐없이 찾아 읽고, 그를 숭배한다. 우시마쓰에게 렌타로는 어쩌면 정신적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렌타로는 자신의 정체를 떳떳이 밝히고는 자유롭게, 당당히 사회의 차별이나 냉대에 맞서며 살아간다. 렌타로를 존경하는 마음이 커갈수록 우시마쓰의 갈등과 번뇌는 깊어만 간다. 숨겨야 하는 삶, 그렇기에 두려움과 공포로 점철된 삶. 자신과 같은 백정 출신이기에 렌타로에게만은 자기 정체를 밝혀볼까 고민하지만 번번히 망설이다 끝나고 만다.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는 이렇게 자기의 정체성(신분)을 숨기고 살아가야만 하는 한 젊은이의 고뇌와 방황을 담백하면서도 사실적으로 그린다. 육체적 아버지의 ‘계율’과 정신적 아버지가 보여주는 당당한 삶의 모습에서 그가 진실된 자기 삶,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은 무척이나 감동적이다.

어찌보면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한가지쯤 타인에게 절대로 밝히고 싶지 않은 작은 비밀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밝혀지면 사회적으로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맛보며 나락으로 떨어지고야 말 그런 비밀 하나쯤. 우시마쓰에겐 그것이 바로 ‘신분’이었다. 아무리 신분제가 폐지되었다지만, 여전히 사회 최하층 출신이자 상종 못할 인종 취급을 받는 백정.

<파계>가 흥미로운 점은 그의 정체성이 ‘백정 출신’이라는 신분이 아닌 다른 어떤 것, 예를 들면 ‘게이’라는 성적 취향을 숨기고 사는 어떤 한 개인의 이야기로 읽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커밍아웃하지 못해서 언젠가 타인에 의해 자기 정체가 탄로날까 봐 두려워 전전긍긍하고 사는 삶, 잠 못 이루는 삶. 그런 벽장 속에 갇힌 어느 게이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의 정신적 지주인 ‘렌타로’에게만은 커밍아웃하고 싶으나 그마저 번번히 실패하고야 마는 소심하고 약하디 약한 어느 가엾은 인간.

마침내 그는 어떤 일을 계기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야 만다. ‘파계’- 육체적 아버지의 ‘계율’을 깨드린 것이다. 진실을 밝힘으로써 거짓된 삶을 버리고 참된 삶으로 나아가고자 한 걸음 내딛는 것이다. 그가 가르치던 학생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진실을 밝히는 순간은 그래서 감동적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알게 된 뒤, 그를 아끼던 이들이 여전히 변함 없을 때, 그 또한 훈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시마쓰 또한 어쩌면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색안경 끼고 바라본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은, 어렵지만 어느 순간 진실을 따름으로써, 조금 더 스스로 강해지는 때가 오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진실 앞에서 그를 둘러싼 이들이 진짜 ‘그’의 사람이라면 변함없이 그를 지지하고 믿어주리라는 것을 <파계>는 담담하지만 묵직하게, 감동적으로 그린다.

어떤 이유로든 온전한 자신을(또는 자신의 비밀을) 감추고 살아가는 이 세상의 수많은 ‘우시마쓰 ‘들에게 한 번쯤은 자기를 믿고, 또는 자기 주위 사람을 믿고 ‘계율’을 깨뜨려 보는 일도 괜찮을지 모른다는 어떤 작은 희망을 <파계>는 보여준다. 비록 아버지가 바랐던, 그리고 한때는 우시마쓰 그 또한 바랐던 사회적 명예와 부, 명성 같은 것을 모두 잃었지만, 허울뿐인 거짓된 삶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우시마쓰에게 작은 응원을 보내며 책을 덮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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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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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부코스키의 <우체국>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작품은 허구이며 아무에게도 바치지 않는다.’ 아무에게도 바치지 않는다! 이 문장은 어쩌면 찰스 부코스키 작품의 모든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보통의 작가들은 책 서문에서 자신에게 특별했던 사람을 언급하며 이 작품을 누구누구에게 바친다... 와 같은 문장을 쓰기 마련이다. 물론 이런 서문을 쓰지 않는 작가들도 많지만, ‘서문’을 통해 어떤 비장함 혹은 경건한 분위기를 잡는 작가들도 꽤 있다.

그러나 부코스키는 ‘아무에게도 바치지 않는다’며 작품을 시작한다. <우체국>을 읽다 보니  누군가에게 이 작품을 바쳤다면(?) 어쩐지 그 사람이 머쓱했을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에 경건함, 비장함, 숭고함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문장 빼어난가? 그렇지도 않다. 이야기가 특출한가? 그렇지도 않다. 주인공이 매력적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찰스 부코스키의 분신이라 볼 수 있는 ‘헨리 치나스키’!  찌질해도 이렇게 찌질할 수가 없다. 술과 여자(정확히는 여자와의 섹스)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 더 바랄 것이 없을 이 남자는 세상의 잣대로만 보자면 ‘루저 중의 루저’, ‘쓰레기 중의 쓰레기’다.

<우체국>은 이 찌질한 남자 ‘헨리 치나스키’가 어쩔 수 없이 우체국에서 일한 10여 년 동안의 기록이다. “자기, 그건 초등학생 같은 생각이야. 어떤 바보 멍청이라도 구걸하면 일은 얻을 수 있어. 일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거지.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을 요령 있다고 하지. 나는 요령 있는 훌륭한 백수가 되고 싶어.” (77쪽)라고 말하는 치나스키는 일하지 않고 사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같이 사는 여자들의 요구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우체국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치나스키는 일터에서 생지옥을 경험한다. 

<우체국>은 부코스키가 ‘이 작품은 허구’라고 말했지만 허구이기는커녕 자전적 소설이나 마찬가지다. 찰스 부코스키가 우체국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부코스키는 30~40대 시절 10여 년간 우체국에서 집배원으로 일했다. 우체국 시절 간간이 단편을 발표했던 그에게 출판사 측이 ‘글쓰기에 전념하면 매달 100달러를 주겠다.’고 제안을 했고 부코스키는 ‘우체국에서 미쳐 가느니 작가가 돼 굶기로 결심했다’며 전업 작가로 돌아섰다고 한다(이렇게 매력적인 제안을 받은 걸 보면 작가적인 소질은 다분했나보다).

부코스키의 그 미쳐버릴 것 같은 경험이 <우체국>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치나스키는 우체국에서 10년 넘게 일하면서 서서히 망가져간다. 물론 사회적 잣대로 보기에 그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사람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우체국은 아예 그의 영혼을 갉아먹는다. 우체국에서 헨리 치나스키는 인간이 아닌 노동하는 기계일 뿐이며, 하루 종일 감시받다 언제든지 버림받을 존재다. 노동이 과연 신성한가? <우체국>은 비합리적이고 비인간적인 조직 생활을 비판하고(더 나아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노동의 쓸모없음을 고발한다. 우체국이라는 획일적이고 위계질서로 짓눌린 공간을 통해 부코스키는 노동하는 인간, 노예처럼 사는 인간의 삶을 비웃는다.

부코스키의 분신인 ‘헨리 치나스키’는 술꾼에 호색한이고 도박꾼이며 끊임없이 놀기 좋아하는 방탕아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보면 그 방탕아의 삶이 오히려 노동에 짓눌린 인간들의 삶보다 한결 행복해 보인다. 어떤 부분에서는 낄낄낄 웃음이 터지기도 하고 또 어떤 구절에서는 앗, 하는 울림이 전해지기도 한다. 물론 부코스키가 여자를 묘사하는 방식과 쉴새없이(?) 쏟아지는 비속어 등등은 읽고 있으면 조금 불쾌하기도 하지만 한 번쯤은 읽어볼만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거 봐. 당신 촌 출신이잖아. 나는 직장을 쉰 개, 아니 백 개는 넘게 거쳤어. 한 군데서 오래 버틴 적이 없다고. 내말은 말이지. 미국 전역 사무실에는 일종의 놀이가 있다는 거야. 사람들이 지겹거든.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러니까 사무실에서 로맨스 놀이를 하는 거지. 대부분 시간 죽이는 것 말고는 별 의미가 없어. 가끔은 부수적으로 한두 번 붙어먹기도 하지. 하지만 그때도 볼링이나 텔레비전, 신년 파티처럼 되는 대로 여가를 즐기는 식이야. 그게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상처받지 않을 거야. 내 말 알겠어?” (106~107쪽)

“염병, 그런 데서 일하는 사람들은 남이 인생을 즐기며 사는 꼴을 못 봐. 그렇지 않아? 항상 쳇바퀴에 묶여 일하길 바란다니까.” (119쪽)

“바다 좀 봐.” 나는 말했다. “저기서 철썩이며 올라왔다 내려가는 것 좀 봐. 그 밑에는 물고기들, 불쌍한 물고기들이 서로 싸우고 서로 잡아먹지. 우리도 그 물고기들과 같아. 단지 뭍에 있다는 것만이 다를 뿐. 발을 잘못 디디면 끝장이야. 챔피언이 되는 게 좋지.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 알아 두는 게 좋다고.” (176쪽)

나는 조이스가 길렀던 빌어먹을 잉꼬들과 다를 게 없었다. 새장 안에 갇혀 살다가 문이 열리자 날아올랐던 것이다. 마치 천국으로 쏘아 올린 총알처럼. 그런데 빠져나간들 천국일까? (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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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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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만으로도 이 사람의 작품은 앞으로 늘 찾아 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작가가 있다. 제임스 설터도 나에게는 그런 이 중 하나다. 단편 모음집인 <어젯밤> 이후 나는 그의 작품이 남김없이 국내에 소개되기를 바랐고, 그렇게 나올 때마다 흥분과 기대, 고마운 마음으로 읽어댔다. 이제까지 마음산책에서 총 4권이 소개되었던가? 두 번째로 소개되었던 <가벼운 나날>은 <어젯밤>과 달리 장편으로 짜임새나 분량, 내용을 보면 금세 읽을 수 있는 그런 작품인데 생각보다 오래 읽었다.


그 이유는 당신이, 직접 보면 알리라. 그럼에도 그냥 간단히 그 이유를 말해 보자면 바로 설터가 빚어내는 ‘문장’ 때문이다. 인물이나 배경, 공간, 사물을 묘사하는 방식. 사람의 심리를 설명하는 방식 등을 읽고 또 읽게 된다.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구절들이 이 작품에는 빼곡하다. 물론 이렇게 문장에 주목하면서 읽는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수도 있다. 


평소 문장에 관심이 많거나 소설이나 드라마 대본, 영화 시나리오 등을 쓰고 싶어 하는 작가 지망생이나 혹은 이미 작가이거나 등등 대체로 글 쓰는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아닌 이상 이렇게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면서 책을 읽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제임스 설터는 대중들 보다는 작가나 평론가들 사이에서 더 자주 회자되는 작가로 보인다.


이 작품만 하더라도 여러 작가들이 칭송해 마지않았다. 나 역시도 문장이나 묘사하는 방식 등에 관심이 많아 그의 문장 여러 부분에 찬탄을 하며, 밑줄을 그어 가면서 읽었다. ‘아,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하지?’ 싶은 구절이 ‘너/무/나/도’ 많았다. 특히 설터는 인물을 그리는 방식이 뛰어나다. 특별하지 않은 단어, 별 것 아닌 특징을 잡아서 나열했을 뿐인데 그 짧은 문장 안에 한 인물의 개성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문장들.

그녀는 입이 컸다. 여배우의 입이었다. 사람을 흥분시키는, 환한 웃음을 짓는. 겨드랑이에 얼룩이 있었고 입에선 민트 향이 났다. 그녀는 천성이 사치스러웠다. 충동적으로 물건을 샀다. 벤델 백화점에 가기를 친구 집 드나들듯이 하면서 한 번에 대여섯 벌씩 드레스를 샀고, 탈의실에 들어갈 때는 커튼을 꼼꼼하게 닫지도 않아서 그녀가 옷 벗는 모습이, 가느다란 팔과 몸통, 그리고 비키니 팬티가 보였다. 그렇다. 그녀는 바닥을 닦고 빨랫감을 모은다. 그녀는 스물여덟이다. 꿈이 아직 몸을 떠나지 않았을, 몸을 장식해 줄 나이다. (30쪽, ‘네드라’를 설명하는 부분)

그는 유태인이었다. 가장 우아하고 가장 로맨틱한 유태인. 얼굴에는 권태로움이 서렸고, 이지적인 분위기는 모두가 부러워했고, 머리카락은 건조했다. 옷은 야릇하게 낡은 느낌을 주었다. 그러니까 지나치게 신경 쓰지 않은 매무새였는데, 이를테면 단추가 하나 떨어졌거나 소매 끝이 더럽거나 했고, 그의 입에서는 몸이 안 좋아진 삼촌의 입에서 나는 종류의 약간 나쁜 냄새가 났다. 그는 키가 작았다. 손은 부드러웠고, 금전 감각은 없었다. 전혀 없다시피 해서, 그 방면에서는 알비노 환자나 마찬가지였다. 일종의 기형. 돈 없는 유태인은 이빨 없는 개와 같다. (38쪽, ‘비리’를 설명하는 부분)

그의 아내는 젊음의 막바지에 있었다. 그녀는 밤새 밖에 내놓은, 아름다운 만찬과 같았다. 화려했지만 손님은 돌아가고 없었다. 걸을 때 얼굴의 살이 떨리기 시작한 나이였다. (94쪽)

그녀 삶의 모든 것은 하다가 만 상태였다. 답장을 안 쓴 편지들, 마루에 흩어져 있는 고지서들, 밤새 밖에 놓아둔 버터. (143쪽)

 
비단 인물에 대한 묘사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통찰이 빛나는 문장도 여기저기서 보인다. 그렇기에 작가들이 그의 문장에 그토록 감탄하는 것은 아닐까. 글, 즉 문장에 대한 감탄의 읽기- 조금은 특수한 읽기 방식이 아닌, 조금 더 보편타당한 읽기 방식으로 살펴봐도 <가벼운 나날>은 무척 빼어나다.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삶이 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신의 삶 그리고 다른 하나의 삶. 문제가 있는 건 이 다른 삶이고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도 바로 이 삶이다.’ 작품의 서문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아!’하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작품은 바로 그, 남들에게는 감춰져 있는, 보이지 않는 삶의 이면을 보여준다. ‘비리’와 ‘네드라’ 부부. 그들은 예쁜 두 딸이 있고 교외에 사는 남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중산층 부부다.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문화적 수준은 물론 교양도 쳐지지 않는다. 그들이 사는 교외의 이 평온한 집으로 때때로 찾아오는 또 다른 중산층 커플들이 있으며 그들과의 관계도 원만하고 풍요롭다. 겉으로 보기엔 한없이 잘 어울리는 이상적인 커플이다.

그러나 언제나 삶이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듯 그들의 삶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면 ‘균열’이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어찌 보면 이것은 회복하기 불가능한 성질의 심각한 균열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상적인 부부’의 역할 또는 연기를 오랜 세월 꾸준하게 해 나간다. 삶이 그들에게 주는 역할이 바로 그것이므로.

그런 역할 속에 아이들은 자라나고 주변에서 때로 누군가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렇게 세월은, 시간은 흘러간다. ‘네드라’는 ‘비리’에게 이렇게 묻기도 한다. “진실하게 살면서 행복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충실하지만 불행한 사람보다 낫지 않아? 그렇지 않아?” (274쪽) 이 질문은 작품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같기도 하다.

어떻게 사는 삶이 정말로 제대로 사는 것인지 생각하게끔 하지만 답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중요한 깨달음 중 하나는 꿈꾼 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325쪽)’ 처럼 꿈꾼 대로 삶이 흐르지 않는다는 아프지만, 진실인 깨달음이다. 때문에 ‘네드라’와 ‘비리’ 이 부부의 삶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이 먼, 과거의 어떤 부부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나의 삶에 대한 질문 같기도 하여 때로는 서걱서걱 모래를 씹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꿈꾼 대로 살 수 없기에 그 안에서 그래도 하나쯤 열망하는 것, 열망하는 대상을 얻기 위해 때로는 사투를 벌이고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윤리나 도덕을 거스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만약 그렇게 얻은 것들조차 시간이 지나 희미해지고 빛이 바래진다면…. 다른 반짝이지 않는 것들과 똑같이 빛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런 사실을 또 다시 깨닫게 된다면 그때는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우리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을 산다. 아이들은 자라고 어른들은 늙어 가고 그리하여 죽음을 맞이하고…. 시간은 그렇게 순환하며 인생은 흘러간다. 우리의 ‘가벼운 나날’들은 그렇게 흘러가서 ‘하나의 삶’이 된다. 그 삶은 어느 순간 빛이 바래지더라도 ‘삶’ 자체로써 의미가 있음을 <가벼운 나날>에서는 조용히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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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kuru 2016-02-27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어보니 꼭 읽고 싶어집니다.
다음에 서면 중고서점에 책이 나오지 않나 살펴봐야 되겠어요!

잠자냥 2016-02-29 11:33   좋아요 0 | URL
네, 기회된다면 꼭 한 번 읽어보세요. 즐거운 독서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