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 육식주의를 해부한다
멜라니 조이 지음, 노순옥 옮김 / 모멘토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육식의 단점, 혹은 육류산업의 폐해를 다룬 책은 꽤 많다. <육식의 종말>과 같은 책들은 언제부터인가 찾아보기가 쉬워졌다. 육식을 주제로 한 내용은 텔레비전이나 신문 방송 등 각종 미디어에서도 종종 등장한다. 육식주의자에 반대되는 개념인 채식주의자라는 말도 언제부터인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단어가 되었고.

나 또한 이런 정보를 통해 육식의 폐단을 알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육식’을 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지만 생각만큼 쉽지는 않아서 그냥 고기 먹기를 포기하고는 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 Why We Love Dogs, Eat Pigs, and Wear Cows: An Introduction to Carnism>는 육식주의를 파헤친 책이다. 육식주의에 대한 수많은 책 중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제목이 정말 왜 그럴까? 하는 호기심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저런 질문을 누군가가 던진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개는 귀엽고 사랑스럽고 우리의 가족 혹은 친구 같지만 돼지와 소는 그렇지 않다. 애완동물이 아니다. 먹기 위해 기르는 동물이다.”라고. 그러나 이 지구상에 먹기 위해 기르기 시작한 생명이 대체 얼마나 될까? 저자는 ‘사람들은 흔히 개는 귀엽고 사랑스럽고 인간과 감정 교류를 하는 친구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돼지와 소도 그에 못지않게 영리하고 감정을 지닌 동물이며 새끼 돼지나 소는 개 못지않게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어떤 동물에 대해 떠올릴 때 사람들은 ‘스키마’에 의해 판단을 내리게 된다고 한다. ‘우리는 동물을 포함한 모든 대상에 관해 스키마를 갖고 있다(스키마란 우리의 신념과 생각, 인식, 경험을 구조화하는-그리고 역으로 그것들에 의해 형성되는-심리적 틀을 이른다). 가령 동물은 포식동물과 그 먹이가 되는 동물, 유해동물, 애완동물, 또는 식용동물 따위로 분류된다. 우리가 특정 동물을 어떻게 분류하느냐에 따라 우리와 그것의 관계- 사냥할지, 도망칠지, 박멸할지, 사랑할지, 아니면 먹을지-가 결정된다. (15쪽)’

육식을 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돼지, 소, 닭 등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쯤일까? 돼지와 닭을 애완동물로 키우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이들을 제외하고 보통의 사람들에게 그들은 결코 강아지나 고양이와 같은 존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들도 분명 살아있는 생명체다. 그런데 사람들은 들판을 뛰어다니던 돼지와 소, 혹은 닭에게서 ’고기‘가 나왔다는 것을 잘 연결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걸 연결 지어 생각하면 불편해지기 때문에 스스로 외면하거나 외면하게끔 육류산업에서 철저하게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그 연결고리, 혹은 육류산업군에 의해 방해되어 철저히 감춰진 그 연결고리를 다시 찾으라고, 찾아야만 한다고(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물론, 그 인간들에게 잡아먹히는 동물들, 그리고 그런 동물을 키워내기 위해 몸살을 앓는 지구까지 공멸한다고) 주장한다. 육식주의는 굉장히 폭력적이지만 가부장제처럼 이미 이 사회에서 주류 이데올로기로 확고히 자리 잡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이데올로기라며 그 이면을 들여다보기를 강조한다.    

내가 이 책을 꽤 괜찮게 읽은 이유는 이 책이 단지 ‘육식주의’라는 이데올로기만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육식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우리가 흔히 ‘정상’이라고 부르는 이데올로기들이 사실은 ‘다수의 신념과 행동양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계속 깨우쳐주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어보면 아, 하고 새삼 깨닫게 된다. 다음의 예문에 육식주의라는 이데올로기 대신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이데올로기- 예를 들면 가부장제, 이성애, 인종주의 등의 단어를 입력해보라. 그 이데올로기들의 허상을 깨닫게 된다.   

육류에 관한 방대한 신화들이 있지만 그 모두는 내가 ‘정당화의 3N’이라고 부르는 것과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 즉, 육류를 먹는 일은 ‘정상이며(normal), 자연스럽고(natural), 필요하다(necessary)’는 것이다. 3N은 아프리카인들의 노예화에서부터 나치스의 유대인 대학살에 이르는 모든 착취적인 시스템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돼 왔다. 한 이데올로기가 전성기에 있을 때는 이런 신화들이 면밀하게 검토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시스템이 마침내 붕괴하면 그 3N이 말도 안 되는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예컨대 미국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으면서 내세운 이유를 생각해 보라. 남성만 투표를 하는 것은 ‘선조들이 정해 놓은 일’이며, 여자들이 투표를 하게 되면 ‘국가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히고, ‘재앙과 파멸이 온 나라를 덮칠’ 거라고 하지 않았는가. (132쪽)


육식이 결코 건강에 이롭지 않다는 이기적인 생각에서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를 인간의 필요에 의해 길러서 결국 ‘먹는다’는 일의 끔찍함, 혹은 폭력적인 면을 생각해보면 당장 육식을 끊어야 함이 옳다. 그러나 한국에서 살면서 육식주의자를 포기하고 채식주의자로 살기란 참 쉬운 길은 아니다. 회사를 다닌다면 더 그렇다. 사람들과 함께 먹는(먹어야만 하는) 점심 식사와 회식자리에서 메뉴를 살펴보면 더 갑갑해진다. 나는 언젠가 고기 좀 멀리했다고 채식주의자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채식주의자로 살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이 책은 육식주의에서 벗어나기를 거듭 강조한다. “동물들이 앞으로도 계속 고통받고 죽어 가리라는 걸 나는 안다. 하지만 그게 ‘나’ 때문은 아니도록 해야 한다.”(197쪽)며. 그게 ‘나’ 때문은 아니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 가슴에 오래 남는다.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가 먼저 고기를 찾아먹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러나 이런 결심을 할 때마다 내 마음을 심하게 뒤흔드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치킨!! ㅠ_ㅠ 치킨을 어떻게 끊어;; 치킨과 맥주를! 닭을 한 번 애완용으로 길러볼까…. ㅠ_ㅠ
 

우리는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생활방식이 보편적 가치를 반영한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또는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다수의 신념과 행동양식에 지나지 않는다. (38쪽)

이데올로기가 확고히 자리 잡았을 때는 눈에 보이지 않게 마련이다. 그 한 예가 가부장제다…. 육식주의도 마찬가지다. (39쪽)

어떤 면에서, 채식주의가 육식주의보다 먼저 이름을 얻은 것은 당연하다. 주류에서 벗어난 이데올로기들은 알아보기가 더 쉬우니까. 그러나 육식주의보다 채식주의에 먼저 이름이 붙은 데는 보다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확고히 들어선 이데올로기가 그 상태를 유지하는 주된 방법은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남아 있는 주된 방법은 이름 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면 의문이나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으므로. (40쪽)

어느 수준에서는 우리도 진실을 알고 있다. 식육 생산이 깔끔하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사업이라는 것을 안다. 다만, 그게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싶지 않다. 고기가 동물에게서 나오는 줄은 알지만 동물이 고기가 되기까지의 단계들에 대해서는 짚어 보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동물을 먹으면서 그 행위가 선택의 결과라는 사실조차 생각하려 들지 않는 수가 많다. 이처럼 우리가 어느 수준에서는 불편한 진실을 의식하지만 동시에 다른 수준에서는 의식을 못하는 일이 가능할 뿐 아니라 불가피하도록 조직되어 있는 게 바로 폭력적 이데올로기다. ‘알지 못하면서 아는’ 이 같은 현상은 모든 폭력적 이데올로기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육식주의의 요체다. (95~96쪽)

대규모의 폭력 앞에서 우리는 불가피하게 희생자 아니면 가해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주디스 허먼은 모든 방관자는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한쪽 편을 들 수밖에 없으며, 도덕적 중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자 유대인 대학살의 생존자인 엘리 위젤(Elie Wiesel)은 이렇게 지적한다. “중립은 압제자를 돕지 절대로 희생자를 돕지 않는다. 침묵은 괴롭히는 자에게 용기를 주지 결코 괴롭힘을 당하는 자에게 용기를 주지 않는다.” (206~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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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최종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지루해서 고전은 못 읽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물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절망>에는 몇 번쯤 ‘뭐야? 이거 왜 이래? 계속 읽어야 하나?’ 싶은 순간이 있다.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읽은 사람이라면 주인공 ‘험버트’의 끊임없는 수다와 말장난을 기억하리라. <절망>의 주인공 ‘게르만 카를로비치’는 명백히 <롤리타>의 ‘험버트’와 닮았다.

주인공 ‘게르만’은 어떤 면에서는 나르시시즘에 빠진 듯 보이기도 하고, 끊임없는 말장난을 늘어놓고 언어유희를 즐긴다. 그런 그의 모습에 읽는 이는 지칠 수도 있다. 그러나 <롤리타>에서의 험버트(아니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의 수다가 그리 싫지 않았던(혹은 참을 만했던) 사람이라면 <절망>의 주인공 ‘게르만’이 펼쳐놓는 이야기에도 큰 거부감은 들지 않을 것이다.

‘험버트’와 닮은 <절망>의 주인공 ‘게르만’의 이야기는 오히려 더 흥미진진하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한 편의 ‘스릴러’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소개한 문구 중에 ‘폭로해서는 안 되는 아름다운 미스터리 플롯’이라는 구절이 있던데, 정말 그렇다. 만약 이 작품을 읽으려고 마음먹은 사람이 있다면 줄거리와 상관있는 그 어떤 내용도 읽지 않기를 바란다.

작품의 서두는 정도는 괜찮지만, 중반 이후는 절대로! 스포일러를 모두 피해야 한다. 그나마 어떤 작품인지 잠깐 소개하자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색다르다고 해야 할까?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던 사업가 게르만 카를로비치- 그는 어느 날 출장 중에 교외를 거닐다 풀밭에 잠들어 있던 한 부랑자를 보고 흠칫 놀란다. 부랑자 펠릭스- 그는 게르만과 놀랍도록 완벽하게 닮았기 때문이다. 게르만의 분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자신과 이토록 닮은, ‘분신’ 펠릭스를 우연히 만나게 된 게르만의 머릿속에는 놀라운 생각이 자리 잡게 되는데….

이 작품을 읽으며 두 번쯤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험버트’를 쏙 빼닮은 ‘게르만’의 수다와 자아도취적인 태도 때문에…. 그러나 중반 이후부터는 놀랍도록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그리고 책을 덮을 즈음에는 게르만의 수다가 단순한 ‘수다’가 아니었구나 싶어 감탄했다. 문학의 아름다움과 이야기를 읽는 즐거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작품은 그리 흔하지 않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절망>은 그 흔치 않은 작품에 속한다. 참 매혹적인 스릴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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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이 책을 보며..... 어떤 출판사 버전으로 읽어볼까 고민하다가....

(민음사 버전은 번역이 엄청 이상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음)....


응? 열린책들 버전 보고 식겁했다. 응??????

이 책의 어디가 틀렸을까요? 너무 쉬운가?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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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6-04-06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정말 미치는군요.

잠자냥 2016-04-06 11:46   좋아요 0 | URL
열린책들이 가끔 이렇게 책등(만은 아니겠지만 특히 책등 ㅋㅋ)에서 실수를 많이 하더군요. 디자이너가 그냥 다른 책에서 따다쓰기 한 것 같은데... ㅋㅋ 교정 보는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암튼 이 사진을 열린책들에 보내기는 했었는데,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몇 쇄를 찍을 책은 아닐 거 같아서 다시 수정해서 내놨을지 모르겠네요. 그렇다 하더라도 전국 도서관에 있는 이 책은 아마 다 저럴 확률이 높겠지요.... 음.

Falstaff 2016-04-06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열린책들. 그 출판사 좋아하시는 분 생각보다 엄청 많더라고요.
이 귀신 나오는 헨리 제임스보다 더한 세계문학 시리즈가 있으니, 진정 안타깝게 내가 무지 좋아하는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입니다. 그거 읽다보면 심장병 도지고 뇌경색 바로 직전까지 갈 정도로 무지막지한 교정 교열의 야만을 저지르고 맙니다. 껍데기는 지극히 정상이지만 속 내용이 그렇습니다.
<서부전선....> 이후로는 다른 출판사하고 겹치면 절대 열린책들 번역은 구입하지 않게 됐습죠. ㅜㅜ

잠자냥 2016-04-06 13:37   좋아요 0 | URL
네, 그 쓰신 글 봤습니다. ㅎㅎ 아주 오래 전에 읽고 다시 읽고 싶어서 하마터면 그 책 살뻔 했는데 안 사길 잘했다 생각했습니다. ㅎㅎ 열린책들은 저도 다른 출판사에서 나오지 않는 시리즈(E.M. 포스터 전집이나 예전 줄리언 반스 책, 볼라뇨 시리즈, 매그레 시리즈 등등)가 아니면 잘 안사게 되더군요.

2017-12-07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7 1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olcat329 2023-03-17 2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헉! 입니다.

잠자냥 2023-03-17 23:5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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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두고두고 오래 기억에 남는다.‘기억’혹은‘추억’에 관한 단편이 실린 책으로 단편 하나 하나가 어떻게 보면 존 치버와 레이먼드 카버를 적절하게 섞은 듯하다. 요즘 단편집 가운데 이 책 만큼 마음을 울린 책은 없다. 지금까지 두 번 읽었지만, 앞으로 세 번, 네 번 읽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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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卍).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무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춘미.이호철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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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일본의 유미주의, 탐미주의 작가로 유명하다(또 다른 유미주의 작가인 미시마 유키오도 그에게 존경을 표할 정도). 여체에 대한 탐미, 사디즘, 마조히즘, 페티쉬 등 인간의 변태(?)성욕에 대한 집착 등으로 독특한 작품 세계를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만(卍)>과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이 두 작품 또한 그런 작가의 문학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먼저<만(卍)>을 살펴보자. 얽혀있는 저 한자 모양처럼 이 작품은 남녀 네 명의 얽히고설킨 관계가 주를 이룬다. 동성애, 마조히즘, 사디즘 등 에로티시즘의 결정체라는 평을 받은 작품이라는데, '에로티시즘의 결정체'라는 말에는 딱히 공감하기 어려웠지만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서로 속고 속이는 인간의 기만적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 사뭇 충격적이다. 뭐랄까, 인간은 어차피 이런 족속이지,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눈으로 또 확인하니 뼈저리게 씁쓸하다.


스포일러를 제외한 내용은 간단하다. 고지식하고 답답한 남편을 둔 유부녀 소노코는 취미 생활로 동양화를 배우러 다니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육체와 미모를 가진 미쓰코를 만나 한눈에 호감을 느낀다.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면서도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던 소노코에게 기회는 우연히 주어진다. 단 한마디도 나누지 못했던 미쓰코와 소노코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그 소문을 계기로 실제로 그 둘은 가까워지게 된 것이다. 소노코는 미쓰코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면서 점점 그녀에게 빠져들어 가고 남편을 속여 가며 대담한 이중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자기만을 사랑하다고 믿었던 미쓰코에게 또 다른 사람이 존재하는 게 아닌가! 그의 등장으로 이들의 관계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만(卍)>에서 미쓰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육체에 반해 노예처럼 그녀에게 복종한다. 미쓰코 역시 그런 이들의 숭배를 받으며 점점 이기적이고 포악해져간다. 전형적인 팜므파탈이다. 이들의 관계를 통해 타인에게 절대적인 숭배를 받고자하는 인간의 허영과 욕망은 물론 아름다운 대상을 숭배하며 굴종하는 인간의 노예근성 등을 폭로한다. 무엇보다도 미쓰코를 자기만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인간의 집착과 소유욕을 통해 사랑하는 대상을 사랑한다기보다 결국 사랑을 하고 있는 상태(열정)에 빠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는 일본의 고전 문학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80에 가까운 노인이 20대의 아름다운 부인을 얻어 그녀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며 행복에 빠져 사는 이야기로 이 작품에도 역시나 아름다운 여자에 매혹당하고 그녀에게 집착하는 각양각색의 남자들이 등장한다. 또한 이토록 아름다운 미모의 소유자를 어머니로 둔 한 소년의 시선을 통해 인생의 무상함이나 세속적 욕망의 덧없음을 전달하기도 한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는 내용도 재미있지만 고전적이면서도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분위기나 문장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일본 에도시대부터 이어져온 ‘호색문학’의 전통을 근대문학에 자연스럽게 접목시키며 그만의 에로틱한 탐미주의 문학으로 피워낸 것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단순히 여체 숭배에 집착한 초기 작품에 비해 후기로 갈수록 일본의 고전적인 세계를 배경으로 에로티시즘과 전통미를 탁월하게 결합했다고 하는데,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가 바로 그런 작품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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