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 미국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허먼 멜빌 외 지음, 한기욱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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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달걀이 먹고 싶어질 때가 있다. 삶은 달걀일 수도 있고, 달걀부침 일 수도 있다. 달걀 맛 자체를 음미할 수 있는 달걀 요리이면 충분하다. 요리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것. 달걀을 삶기로 한다. 일곱 개의 달걀을 냄비에 넣고 가스 불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고는 무언가 짧게 읽을만한 단편을 찾는다. 그러다 집어 든 것이 창비 세계문학 단편선 가운데 셔우드 앤더슨의 <달걀>. 달걀이 몹시 고팠는지 읽는 것조차 달걀로 선택한다.

이윽고 나는 달걀이 익을 때쯤 가스 불을 끄고 나서 탄식한다. 고작 달걀이 먹고 싶어서 달걀을 삶고 우적우적 먹기만 하는 나 자신을 한심하게 여긴다. 누군가에게 달걀은 이토록 훌륭한 이야기 소재로 쓰여 감탄할 만큼 놀라운 단편을 빚어내는데, 나란 인간은 고작 달걀 노른자를 반숙으로 잘 삶기 위해서는 몇 분이 걸리는지, 10분인지 12분인지를 가늠하느라 온 신경이 쏠려있으니 한심하지 않을 수가. 게다가 그 달걀 껍데기를 벗기고 나서 노른자가 원하는 대로 알맞게 익었음을 기뻐하며 히죽대고 있는 모습이라니.... 누군가는 달걀을 이렇게 맛깔나게 쓰고 나는 그저 맛있게 먹기만 하는구나.

<달걀>은 미국 중서부 도시 한 가난한 가족의 삶을 다룬다. 아버지는 결혼 전에는 그저 평범한 일꾼이었다. 성공이란 자신과 멀기만 한 그 어떤 개념이라 여기고 소시민적 삶을 꾸려나갈 뿐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변모시킨 것은 어머니와의 결혼이다. 어머니는 그저 평범한 삶에 만족할 수 없는 여인으로 아버지에게 ‘출세의 야망’을 끊임없이 불어넣는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성공을 꿈꾸며 양계장을 차리지만 늘 소시민적 삶을 살아온 이들이 곧잘 그러하듯, 양계장은 보기 좋게 망하고 만다. 게다가 ‘나’에게도 양계장은 삶의 이런저런 쓰라린 모습을 가르쳐 준 하나의 실패적 상징물로 남는다.

철학자들 대다수는 필시 양계장에서 자라났을 것이다. 닭에게서 너무나 많은 것을 바라다가 지독한 환멸을 느끼는 것이다. 삶의 여정을 막 시작하는 병아리들은 너무나 영리하고 기민해 보이지만 사실 그것들은 너무 끔찍할 정도로 멍청하다. 병아리는 사람과 아주 비슷해서 우리가 인생을 판단할 때 혼동을 일으키게 한다. 만약 병으로 죽지 않으면 그것들은 자신에 대한 기대가 한껏 부풀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차 바퀴 아래로 걸어 들어간다. 으스러져 죽어서 조물주한테로 돌아가는 것이다. (셔우드 앤더슨, '달걀',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미국편> - 257쪽)


그런 뒤에도 아버지는 성공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기차역 가까이에 작은 음식점을 차린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남들과 다른 유니크함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아버지는 음식점을 독특한 곳, 그리하여 또 오고 싶은 곳, 오래 머물고 싶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머리를 짜낸다. 그러나 아버지의 생각은 양계장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양계장에서는 종종 기형 병아리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 기형 병아리들이 언젠가는 쓸모 있을 거라면서 알코올에 보존한 채로 하나씩 유리병에 담아두었다. 사람들은 그로테스크한 것, 무언가 독특한 것에 끌리는 법이라며, 유리병 속 병아리들이 아버지에게 언젠가 돈벌이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거기에 아버지는 달걀로 보여줄 수 있는 온갖 마술쇼를 연구하고, 연습한다.

음식점을 찾은 손님들에게 아버지는 그 그로테스크한 볼거리와 서투르기 짝이 없는 달걀 쇼를 선보인다. 그러나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그러하듯 아버지의 달걀 쇼도, 반드시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던 기이한 볼거리도 모두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씩 어긋나고 만다. 성공이 그리 쉽다면 삶이 어려울 이들이 얼마나 되랴....

달걀은 흔히 구할 수 있고 가격 또한 그리 비싸지 않다. 가장 싼 달걀부터 비싼 달걀까지 선택의 폭도 넓다. 물론 가장 싼 달걀조차 구할 수 없는 이들도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다. 그럼에도 어떤 음식보다 쉽게 누구나 구해서 매우 간단한 요리부터 썩 훌륭한 요리까지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친근하고 익숙한 존재가 달걀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칫 깨어지기 쉬운 연약하디 연약한 존재가 달걀이기도 하다. 달걀은 사는 순간부터 조심해야 한다. 요리하기 전까지도 깨어질까 봐 보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요리하는 순간, 달걀을 깨뜨리는 그 순간에도 혹여 껍질이라도 들어가랴 싶어 조심해야 한다. 고작 삶은 달걀 하나, 달걀프라이 하나를 만들더라도 노른자의 익힘 정도를 어느 쯤으로 할지 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먹기는 먹되 원하던 요리가 아닌 그냥 평범한 달걀 요리가 되고 만다. 한 번 깨어진 달걀은 돌이킬 수도 없다. 마치 ‘삶’처럼 말이다. 그렇게 ‘삶’보다 ‘달걀’이 승리하고 마는 순간이 훨씬 더 많은 것이다. 마치 <달걀> 속 아버지의 ‘달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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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앙드레 드 리쇼 지음, 이재형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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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하고도 통찰력 있는 인간 심리 묘사, 아름답고도 눈에 보일 듯한 풍경 묘사.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인간의 성적 본능 및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에 대한 치밀하고도 뜨거운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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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 뜨는 여자
파스칼 레네 지음, 이재형 옮김 / 부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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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단 한 번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슬플까? 심지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한다면? 파스칼 레네의 <레이스 뜨는 여자>에 바로 그런 여자가 등장한다. 그녀의 이름은 ‘뽐므’- 자신을 낳은 어머니에게도, 친구에게도,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남자에게도 뽐므는 단 한 순간도 뽐므 그 자체로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다가설 때 처음에는 그 사람의 어떤 이미지를 보고 접근하게 된다. 그 또는 그녀의 실체는 뒤로한 채 순전히 그 상대방의 이미지에 반해 다가선다. 그리고는 자신이 느낀 이미지의 정체를 밝히고자 온갖 노력을 하게 된다. 저 사람의 본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 실체에 다다르기 위해 보통은 ‘대화’와 같은 방법들을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상상 속 이미지와 그 사람이 일치한다면 호감은 더욱 증폭하여 사랑으로 발전하게 되기도 하고 그와 반대로 상상과는 달리 추악한 실체를 만나게 되면 등을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더욱 사랑을 하게 되든, 등을 돌리든 그 모든 결과는 그 또는 그녀를 알고자 노력한 끝에 다다른 결론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하지도 않은 채 타인을 영원히 나의 시선으로만 바라보다 ‘그 혹은 그녀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등을 돌린다면 그 타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울 것인가. 게다가 한때는 나의 연인이라 부르던 사람이 그렇게 등을 돌린다면.

레이스 뜨는 여자 ‘뽐므’의 사랑이 그렇다. 태어난 환경도 자라온 환경도 비루한 그녀는 제대로 자신을 표현하는 법을 몰랐다. 아니 배운 적이 없다고 해야 하나?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그녀의 집안은 늘 적막하고. 하나뿐인 가족인 ‘엄마’마저도 그녀와 대화하는 시간은 거의 드물다. 그런 그녀가 내면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 서투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저 자신의 욕망을 먹는 것으로 치환하여 유난히 단 것에 집착하는 행동을 보일 뿐이다.

그런 뽐므에게 사랑을 느끼며 다가오는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에므리’. ‘뽐므’와는 달리 상류계급 출신에 배울 만큼 배운 남자다. 그런 에므리가 뽐므의 어떤 면에 끌린 것일까? 먹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건강하게 통통히 살이 오른 뽐므의 젊음? 신선함? 순수하다고 여겨지는 무심한 듯한 표정? 어쨌든 에므리는 그녀에게 반하고, 다가서고, 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동거에 들어간다. 그러나 함께 살수록 뽐므는 에므리가 생각했던 이미지와 어쩐지 다른 여자 같다는 느낌이 계속 든다. 신선하고 신비롭게 보였던 그녀의 ‘침묵’이 이제는 ‘답답함’으로 느껴진다.

에므리는 점점 그녀의 실체를 알 수가 없다(당연하지! 그들이 함께 사는 장면을 보면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대화’). 이 소설 속의 두 주인공 ‘뽐므’와 ‘에므리’는 단 한 번도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뽐므와 에므리 뿐만이 아니다. 뽐므의 엄마도, 뽐므의 친구 마릴렌도 그녀들의 남자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런 관계는 그녀들의 남자뿐만 아니라 그녀들이 뽐므와 함께 하는 방식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서로 단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피상적으로 그, 혹은 그녀의 겉모습만 훑다가 서로 멀어져 간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비교된 한 영화가 있다. <비포 선라이즈>- 그 영화는 처음 만난 여자(셀린느)와 남자(제시)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마치 누가 누가 더 수다스러운가 내기를 하듯 삶과 사랑 예술에 대한 대화가 끝없이 오고 간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사랑에 빠지고, 9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도 서로를 잊지 못하는 그런 사이가 된다. 그들은 여행지에서 만나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에므리와 뽐므가 함께했던 긴 시간보다도 더 많은 대화를 나눈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사랑에 빠지고 9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도 서로를 잊지 못한다는 설정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그렇게 에므리에게 버림받다시피 이유도 모른 채 팽개쳐진 뽐므는 결국 서서히 망가진다. 그토록 음식을 좋아하던 그녀는 이제 음식을 거부한다. 거식증에 걸린 채 정신병원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이젠 그나마 그녀가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할 수 있던 하나의 방식, 음식을 먹는 행위조차도 그만두게 된 것이다. 만약 에므리가 뽐므를 진정으로 알고자 하는 노력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그들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안타깝기 그지없다. 물론 그것이 꼭 ‘비포 선라이즈’의 제시와 셀린느처럼 수다스러운 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말이 서툴고, 자신을 표현하는데 서툴러 침묵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뽐므를 마음으로 이해하고, 그녀의 방식으로 다가서는 노력을 기울였다면 어땠을까.

레이스를 뜨고 있는 사람을 보면 쉴 새 없이 반복되는 동작과 달리 그 사람의 머릿속에는(반복되는 동작을 하고 있으니까)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속을 누가 알겠는가, 반복되는 그 동작처럼 끊임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에므리는 뽐므를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레이스를 뜨고 있는 여자’처럼 생각했던 것은 아닐지. 사랑을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대상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사랑을 말하는 것처럼 쉽지 않다.

끝으로 계급이 다른 두 남녀가 만나 사랑하다 헤어지는 어찌보면 한없이 통속적인 이 이야기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매혹되었던 까닭은 아마도 파스칼 레네의 독특한 서술방식 때문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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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갈증
미시마 유키오 지음, 송태욱 옮김 / 서커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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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마르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셔야 한다. 그래서 마신 물이 소금물이라면, 소금기가 가득한 바닷물이라면 갈증은 더 심해질 뿐이다. 미시마 유키오의 <사랑의 갈증>의 주인공 에쓰코는 그런 ‘갈증’을 언제나 느끼며 사는 여자다. 그것도 ‘사랑’의 갈증을 언제나 느끼며 사는 여인. 그러나 에쓰코를 보면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굳이 어떤 뚜렷한 행동도 하지 않는다. 목마른 사람이 물조차 찾지 않으니, 그 갈증이 해소될 리가 있을까. 그나마 가끔 목마름을 해소하려고 해보지만 오히려 그녀는 소금물을 마신 사람처럼 되어버린다.

표지만 보면 삼류 로맨스 소설이 연상된다. 그런데 이 소설은 내가 지금까지 읽은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 중 단연 최고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물론 그의 작품을 그렇게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보면 유치해 보이기까지 하는 책 표지는 책을 읽고 나면, ‘아…’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꿈꾸는 듯한, 목이 마른 듯한 여자의 표정, 안개 속에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뿌연 여자의 실루엣. 표지의 여자는 분명 ‘에쓰코’ 그녀일 것이다.

에쓰코는 젊은 미망인이다. 도시의 부유한 가정 출신인 그녀는 료스케를 만나 결혼을 하고 행복한 삶을 꿈꾸지만, 그런 삶은 그녀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남편이 죽고 시아버지인 야키치 스기모토가 사는 집으로 들어간다. 야키치는 은퇴한 회사 사장으로 현재는 한적한 교외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그 집에는 야키치의 장남  겐스케 부부, 전쟁 포로로 아직 귀환하지 못한 셋째 아들 유스케의 아내와 아이들이 살고 있다. 에쓰코는 야키치의 둘째 아들이었던 남편 료스케의 죽음 이후, 시댁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스기모토 일가에는 이런 가족 구성 외에 일꾼인 사부로와 하녀 미요가 함께 산다.

그런데 이 집의 분위기는 참으로 기묘하다. 도시에서 살던 젊은 여자가 남편이 죽었다고 시댁으로 들어와 산다는 것부터가 조금 이해하기 힘든 선택인데, 에쓰코는 시아버지인 야키치 스기모토의 ‘애인’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에쓰코는 시아버지와 한방을 쓰고 시아버지인 야키치의 손길을 밤마다 받는다. 그런 손길에 별다른 저항도 없고 그렇다고 별다른 감정도 없다. 그녀 입장에서 보자면 시댁으로 들어올 때부터 어쩐지 일어날 일이었고 그렇게 되어있던 일일 뿐이다.

그렇다고 이 둘의 기묘한 관계에 대해 뭐라 한마디 하는 가족도 없다. 룸펜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 장남은 장남대로 또 그의 부인은 부인대로 ‘아버지도 아버지이지만, 에쓰코 그 여자가 더 대단’하다며 구경꾼처럼 그 둘의 관계를 지켜볼 뿐이다. 가족 구성원은 물론 일꾼인 사부로와 미요마저 에쓰코와 야키치의 관계를 이미 예전부터 그래왔던 사람들처럼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주인공인 에쓰코, 그녀의 갈증은 어디서 기원할까? 그녀의 사랑은 한 번도 제대로 채워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죽은 남편은 그녀를 제대로 사랑한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상처만을 남겨주었다. 그리고 지금 밤마다 에쓰코의 육체를 탐하는 시아버지 야키치는 애당초 에쓰코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대상이 전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하다 보니 어느새 사랑이라는 게 생기더라’는 이야기 전개도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에쓰코의 시선은, 욕망은 이 집의 일꾼 사부로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부로와 에쓰코의 관계는 어떻게 전개될까 궁금해진다. 시아버지의 감시를 벗어나 사부로와 밀회를 즐기는 에쓰코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독특한 것은 그런 통속성을 벗어난다는 데 있다. 사실 지금까지의 이야기만 보면 지극히 통속적인 내용인데, 그 통속성의 한껍질을 더 벗기면 그다지 통속적이지 않다는 데 이 작품의 매력이 있다. 에쓰코가 사부로를 욕망한다는 것을 이 집안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야키치 역시 자신이 탐하는 며느리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은 에쓰코 그녀가 사랑하는 ‘사부로’ 뿐이다.

에쓰코가 사랑하는 걸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하는 ‘사부로’- 이 둔감한 남자 때문에 에쓰코의 욕망은 또 채워지지 않는다. 갈증은 계속 남을 뿐이다. 에쓰코는 사부로를, 그런 에쓰코를 또 야키치는 ‘갖고 싶어’하고 이런 서로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이 작품을 지배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존재하지만, 그 누구도 충분히 서로 사랑을 나누지는 못하기에 <사랑의 갈증>은 서걱서걱하고 메마르다. 촉촉한 감정의 교류는 없고 욕망과 질투, 가학적인 괴롭힘, 그로 인한 상처들이 곳곳에서 베어져 나온다.

<사랑의 갈증>은 1950년 미시마 유키오가 무려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발표한 작품이라고 한다.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던 것은 에쓰코의 심리 상태를 묘사하는 방식 때문이었다. 미시마 유키오는 분명 남자인데도 혹시 그 안에 여자가 존재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놀랍도록 섬세하게 젊은 미망인의 감정을 그리고 있다. 백발이 성성한 늙은 시아버지와 동거하면서 한편으로는 젊은 일꾼을 탐하는, 그래서 도덕적 잣대로 보면 손가락질 받아 마땅한 이 여자, 에쓰코를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은 미시마 유키오의 놀라운 글 솜씨 때문이리라.

읽는 동안 서걱서걱 모래 밭 위를 걸어가는 기분이 드는 작품, 읽고 나면 나도 모르게 목이 말라오는 <사랑의 갈증>은 무척이나 매력적인 작품이다. 흔히 미시마 유키오를 탐미주의자라고 한다. 이 작품에서 미시마 유키오가 탐미했던 것은 인간의 욕망이 아닌가 싶다. 여기 저기 문장에 밑줄을 그어지고 싶어지는 작품. 그런 문장들을 다시 음미하며 읽다 보면 미시마 유키오는 그의 정치적 성향이나 살아간 인생 내력을 떠나 작가로서는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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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책을 읽는가 -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독서를 위하여
샤를 단치 지음, 임명주 옮김 / 이루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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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책 읽는 친구, 아니 책을 ‘많이’ 읽는 친구를 만나면 반가웠다. 또래에 비해 내가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대강 짐작으로 나보다 많이 읽는 친구, 혹은 나보다 폭넓게 독서하는 친구를 만나는 일만큼 기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사실 돌아보면 딱히 그런 기쁨을 맛본 적은 드물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기준을 살짝 낮춰서, 조금이라도 책을 좋아하는 기색이 보이는 친구라면 다른 아이들보다 마음속으로 좀 더 후한 점수를 주고는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앙케트’라는 게 유행했다. 적게는 30문항에서 많게는 100문항까지 질문이 있고 그걸 아이들이 돌려가면서 답을 하는 놀이였다. 이 앙케트는 반에서 반을 돌아다녔고, 아이들은 자신이 좋아하거나 관심 있는 아이의 답변은 조금 더 관심을 기울여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앙케트도 누군가 그렇게 읽어 주길 바라면서 정성스레 쓰고는 했다. 나 또한 그런 아이들 중 하나였다.

앙케트에는 항상 빠지지 않는 질문이 있었다. ‘좋아하는 책은?’ 또는 ‘감명 깊게 읽은 책은?’ 혹은 더 나아가 ‘좋아하는 작가는?’ 등등과 같은 질문, 또 다른 하나는 ‘좋아하는 음악은?’처럼 음악과 관련한 문항. 다른 건 몰라도 나는 이 질문들만큼은 모든 앙케트의, 모든 아이들 것을 관심 있게 보았다. 혹시라도, 어떤 대단한 발견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대는 늘 어긋났다. 책에 관한 질문은 보통 그 나이에 나올 수 있는 평범한 대답들로 채워지기 마련이었다. 간혹 음악에 대한 질문이라면 당시 유행하던 팝이나 가요 리스트가 빼곡한 가운데 간혹 록음악을 쓴 답변이 보여서 ‘오호? 얘가 이런 음악을 듣는구나.’ 하면서 조금 다른 발견을 했던 기억은 있지만 아쉽게도 책에 관해서 그런 짜릿한 기억은 없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책 때문에 사람에게 처음 ‘앗!’하는 전율이 받았다. 몹시도 무더웠던 여름, 야간자율학습을 기다리던 그 저녁에 한 친구가 1분단 맨 뒷자리에 앉아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시집을 읽고 있었다. ‘문지 시집!’이었다. 내 눈은 번쩍 뜨여 책의 제목을 찾았다. 놀랍게도 ‘황지우!’였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읽고 있던 그 친구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그때까지는 그다지 말을 섞어본 적도 없는 아이였는데, ‘너 황지우 시집 읽는구나?’하면서 쪽지를 내가 먼저 보냈던 것 같다.

요즘 아이들은 대입 수능 문학 시험 때문에 황지우 시를 배우기도 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수능이 실시 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시험에 ‘황지우’가 나올 일은 제로에 가까웠다. 때문에 그 저녁에 황지우 시집을 읽고 있다는 사실은 거의 자발적인 읽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때부터 그 친구와 편지를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 알고 보니 이 친구는 예상대로 역시나 꽤 많은 문학 작품과 시를 읽어왔었고, 황지우는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었단다. 그때 그 아이는 당시 국어국문학으로 나름 유명한 모 대학을 가고 싶어했고, 결국 고3 말미에 그 꿈을 이루었다.

편지로 주고 받은 내용은 주로 책 이야기였다. 서로 뒤질세라 이 작가 저 작가, 이 작품 저 작품 소개하기 바빴던 것 같다. 대학 진학 이후 서로 편지 왕래가 흐지부지 되면서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 친구와 책 이야기를 했던 그 순간들은 굉장히 즐겁고 흐뭇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요즘도 황지우 시를 보면 그 친구가 자동적으로 떠오른다.

사회에 나와서도 책을 좋아하고, 꾸준히 읽는 사람들을 보면(특히 읽는 책 목록이 내가 보기에 매력적일 수록) 전에는 없던 호감이 생기기도 하고, 때로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 특히 그 사람이 사랑해 마지 않는 대상이 소위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전혀 쓸모 없다는 ‘문학’일 경우에는 더 그렇다. 물론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가 훌륭한 인물이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더 괴팍하고 고약한 성미를 가진 나르시시스트일 가능성이 더 많다. 그럼에도 나는 책을 든 그 손을 보면 황지우 시집을 들고 있던 그 친구를 봤을 때의 그 느낌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샤를 단치의 <왜 책을 읽는가>를 서점에서 발견했을 때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아닌, 책이라는 물건인데도 그런 기분에 휩싸였다. 열아홉 그때, 황지우 시집을 읽던 그 친구에게 불쑥 말을 걸어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던 것처럼, 이 책을 보는 순간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런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도 되는데…..’하다가도 ‘아니야 내용이 너무 궁금해! 도서관에 들어올 때까지 언제 기다려?’ 이런 갈팡질팡 속에 결국은 사버린 책. 그리고 집에 와서 허겁지겁 읽은 이 책.

이 책을 읽다 보니 바로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황지우 시집 때문에 친해진 친구. 책 이야기로 수다 떠느라 무척이나 즐거웠던 그 친구 말이다. 저자 샤를 단치는 나이도, 국가도 나와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저 먼 나라의 사람인데 단지 책에 미쳤다는(분명 나보다도 훨씬 미친) 점 때문에 어쩐지 이야기가 통하는 기분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과 밤새 책 이야기만 한 뿌듯한 기분이랄까.

어릴 때부터 독서광이었기 때문에 작가가 된 그는 책에 미친 사람들의 심리를 그 누구보다 잘 안다. 뿐만 아니라 광적인 독서가 사람에게 주는 피폐함까지도. 그럼에도 독서를 멈출 수 없는 사람들의 어쩌면 병적인 그 심리까지도. 샤를 단치는 자신이 독서광이기 때문에 무턱대고 독서하는 사람들을 예찬하지도 않는다. 독서광들의 뒤틀리고 괴팍한 모습까지도 가차없이 꼬집는데 그 내용이 무척 공감되면서 낄낄대고 웃지 않을 수가 없다.

“난 수영을 좋아한다. 좋아하지만 짜증난다. 짜증이 나면서도 좋아한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대상 앞에서 완전히 무릎을 꿇기를 원한다. 거짓말을 좋아하는 본성 때문이다. (194쪽)”

샤를 단치는 좋아하는 작가임에도 어떤 부분에서는 짜증이 나기도 한다면서 위와 같은 이야기를 꺼낸다. 위 구절을 읽으면서 엄청나게 공감했다. 좋아하면서도 짜증이 나는 그 심리를 이 사람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좋아하면서도 짜증이 날 수 있다는 걸 보통,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좋아하는데 어떻게 짜증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하다. 하지만 좋아하는데도 그 대상에 어떤 부분에서는 짜증이 날 수 있다! 이 구절을 읽을 때는 책을 좋아하는 친구와 수다를 떨다가 서로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어서 박수 치며 호들갑을 떨면서 낄낄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가끔 나는 어릴 때부터 괜히 책을 많이 읽어서 인생을 피곤하게 산다고, 책에 빠져 살아왔던 인생을 후회하기도 했다. 요즘도 종종 한다. 책을 많이 읽지 않았다면, 세상에서 도피한 채, 책으로만 파묻히지 않았다면 인생이 좀 더 평범하게, 쉽게 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책에 대한 애정을 끊지 못한다. 샤를 단치의 <왜 책을 읽는가>는 이런 사람들에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책을 읽을 수 밖에 없지 않겠소?’하며 작은 위안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책은 결코 삶과 대립하지 않는다. 진지하고 난폭하지 않은 삶, 경박하지 않고 견고한 삶, 자긍심은 있되 자만하지 않는 삶, 최소한의 긍지와 소심함과 침묵과 후퇴로 어우러진 그런 삶이다. 그리고 책은 실용주의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초연히 사유의 편에 선다.
독서는 그 어느 것에도 봉사하지 않는다. 그래서 독서가 위대한 것이다. (257쪽)


왜 책을 읽는가? 내게 독서란 걷는 일과 같다. (11쪽)

문학은 실용성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유일한 글쓰기 형태이다. (13쪽)

독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우리 내면의 은밀한 것들을 드러낸다. 추잡한 것, 소중한 것, 혹은 약한 것들까지. 아무 말 없이 문장 속에 온몸을 파묻고 책과 단 둘이 마주하게 되면, 내 안의 정직하지 못하고 거친 모습, 화내기 좋아하는 바보 같은 모습들은 감쪽같이 사라져버린다. (22쪽)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이기심에서 비롯되지만, 결국 독자가 얻게 되는 것은 이타심이다….. 펼쳐지지 않은 책은 존재할 뿐 살아 있지 않다. (39쪽)

처음엔 등장인물을 사랑하고, 이어서 작가를 사랑하게 되며, 결국엔 문학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44쪽)

우리는 흔히 책을 읽는 사람들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책을 읽는 바보들도 없지 않다. (52쪽)

그러나 독서하는 동안엔 오직 책과 독자 단 둘뿐이다. 때때로 독서는 이 둘의 고독한 전쟁이기도 하다. (56쪽)

독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되는 심각한 행위다. 심지어 나는 책을 읽는 이유가 스스로를 고립시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103쪽)

작가가 될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독서에 대해 타는 목마름이 있기 마련이다. 이는 어쩌면 사랑에 대한 탐욕과도 비슷하다. 방실방실 웃는 귀여운 아가가 가짜 허기에 사로잡혀 먹을 것에 집착하는 모습 같은 것이다. (217쪽)

유년기에 광적으로 독서를 많이 하는 사람은 필경 작가가 될 운명이다. 만일 그 꿈이 실현되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 위대한 독자가 작가의 꿈을 접은 것이다. 그는 결국 꿈은 잊어버리고 계속해서 독서광으로 남을 것이다. 그가 슬퍼하지만 않는다면 이 또한 아름다운 일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작가가 되지 못해 씁쓸해하는 위대한 독자들보다는 자신의 글이 읽히지 않아 슬퍼하는 고만고만한 작가들이 훨씬 많다. (217쪽)

나는 대중 앞에서 내 책이 낭독되는 것을 주저한다. 내게 문학이란 소리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침묵과 침묵 아닌 것 사이에 놓여 있는 하나의 사건이다. 다 읽은 책은 웅변적인 침묵으로, 읽는 중에 있는 책은 너그러운 침묵으로 존재한다. 특히 시가 그렇다. (227쪽)

대담이란 마치 테니스와 같아서 응대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 품질도 좋아지는 법이다. (2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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