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이 이야기 암실문고
김안나 지음, 최윤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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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뿌리가 있어요. 나한텐 분명한 뿌리가 있다고요. 이렇게 말한 뒤 나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게 되자마자 사람들은 나만보면 뿌리가 없냐는 노래를 해대기 시작했어요. 인생이 좀 꼬였다고 해서 딱히 다른 뭔가를 시도해 볼 수도 없는 애한테 뿌리를 잊고 사는 거냐는 말을 해댔다고요. 그사람들이 말하는 '뿌리 없음'이란 시장의 야채상이 나에게 건네는 곤니치와라는 말하고 같은 거예요. 나에 대한 인종 검사를 수행하려는 행동이라고요. 137"
 
 [ 1950년대 미국의 한 소도시에서 아이가 태어난다. 미혼모인 어머니는 아이가 입양되기를 바란다고 한다. 그런데 곧 병원에서 문제를 발견한다. 어머니는 백인인데 아이가 흑인 혼혈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작은 도시는 아이에 관한 소문으로 들썩인다. 아버지는 누구이며, 왜 이 어머니는 입을 열지 않는가? 출판사 소개글] '어느 아이 이야기'의 큰 줄기 중 하나인 이 사건을 지금의 시각으로 바라본 탓에 한동안 의아했다. 어차피 생모는 아이에 대한 권한을 포기했는데 아버지가 누구인지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였나? 싶었던 것이다. 출산 후 친권 의사가 없음을 밝히고 입양을 희망하면 기본적인 정보를 기록하고 생모와 분리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조사는 계속해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혀야만 할까, 캐럴은 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제대로 밝히지 않은 것일까. 흑인과 어울렸다는 불명예 때문에? 백인과 어울린 흑인이 감수해야할 위험에서 상대방을 방어하기 위해서? 
 
 소문만으로도 도시가 들썩일 정도의 일인데 실제 캐럴이 부주의하게 누군가와 가졌을 만남이 조용히 이루어졌다는 점은 의외다. 보고서를 읽다보면 코의 모양 머리결, 피부와 눈의 색, 심지어 IQ 측정값을 통틀어 대니얼이 누가봐도-가시성으로 물라토*이고, 실제로도-생물학적으로 물라토라면, 대니얼의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대한 확인이 왜 필요한지 역시 의문이 된다. 대니얼의 아버지가 어떤 인종이던 대니얼의 가시적 입양 조건은 달라지지 않는다. 혹 대니얼의 아버지가 흑인이 아니고 대니얼도 물라토가 아니게 된다면 부여받게 되는 새로운 정체성은 가시적 조건을 상쇄할 수 있는 권리증이 되는가. 마치 이 아이는 물라토의 외형조건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물라토가 아닙니다, 하는 주의문구가 적힌 꼬리표와 함께. 하지만 그 꼬리표를 위해 혹은 친부모의 확실한 신원 기록을 위해, 대니얼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한 과정은 꼬리표보다는 확실히 대니얼과 캐럴에게 악조건이 되었다.  

 솔직한 감각으로는 그 당시의 인종차별에 대해서 이게 얼마만큼이나 큰 사건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에멧 틸 사건**'이 1955년, [미시시피 버닝***]의 배경이 1960년대였었다고 하니 대니얼의 출생은 그 이상의 사건이었을지 모른다. 보고서는 집요하게 아이의 출생을 파고든다. 그 의도는 아이에게 '적합한 가정'을 찾아주기 위함에 초점이 맞춰진 선량함을 두르고 있다.
" 우리는 아이에게 맞는 입양 부모를 찾기 전에 생부에 대한 정보가 더 필요하다는 점을 할 수 있는 한 강하게 설명했다. 우리의 목표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서로에게 적합한 아이와 부모를 맺어 주는 것입니다. 최선의 경우는 입양 부모와 아이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 거죠.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자연스러워 보이는 가정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럴 경우에만 이 아이들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으니까요. 36"
 그러나 그 선량한 의도는 인종차별로 재단되어 있다. 아이의 성장에 대한 세심한 관찰, 입양처를 찾아주기 위한 물색 마저도 눈금자 아래(257) 놓여진 수치를 피할 수 없었다. 보고서를 읽으며 기대었던 선량함은 차별과 시혜의 그늘에서 종내 불유쾌함을 남겼다.  

 대니얼의 아버지가 누구인가 혹은 어떤 인종인가에 대한 선량한 추적은 구분지어짐으로 비롯되었고, 구분하기를 위함이다. 읽는 내내 계속되었던 조앤의 시선(20/136), 대니의 거울(148), 질비아의 스케치(263)처럼 '바라보기'가 강조된 장면들이 떠오른다. 눈을 통해 얻게 되는 정보 혹은 선입견을 생각해보자. 단지 인종의 문제를 떠나, 오히려 인종에 대한 정보는 훨씬 직접적이다. 성별, 나이, 언어, 옷차림, 표정, 시선, 귀금속 같은 소지품, 손톱이나 피부, 머리결같은 것들, 심지어 생김새마저 타인을 판단하는 항목이 된다. 인종적으로 소수자 위치의 삶을 경험해보지도, 불일치하는 '뿌리'에 대한 질문과 심판도 받아보지 못한 탓에 공감할 수 없는 영역이 있어서일까, 넘어가보지 못한 한 걸음이 가로막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때문에 도리어 가시적 조건들을 확장해 인간이 어떠한 분류없이 오직 한 명의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혹은 어떤 분류는 괜찮고 또 괜찮지 않은가. 선입견과 구분짓기의 '모든' 틀에서 벗어난다면 그 끝은 획일성 외에 무엇이 남는가. 자신을 인종과 국적과 같은 틀에서 벗어나 오직 한 명의 개인으로 봐달라는 말은 오히려 자신이 '규정짓는 대로 인정받기'를 바라는 말로 들린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뿌리를 이야기할 때 외모와 내면의 분리/불일치 - 이 부분에 이르러 성정체성 문제가 떠올랐다. 
" 가끔은 내 자신이 주장하는 나와 실제 내가 다른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마치 착시 같은 존재, 늑대 가죽 속의 양, 나는 그런 변장 속에서 태어났다. ...중략... 어쨌든, 만약 내가 만들어진 환상이라면 문제가 생긴다. 내 외모가 착각이고 내 내면이 진실인가 아니면 정반대로 내 외모가 진실이고 내 영혼은 그 반대인가라는 문제 말이다. 주변 세계가 나에게 보이는 반응에서 출발하면, 즉 사람들이 내 내면과는 맞지 않는 내 외형에 먼저 반응을 보인다는 것에서 출발하면, 나의 외모가 옳고 나는 옳지 않은 것이다. 감히 생물학이 틀리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140"
이들의 주장과 갈등도 같은 부분을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규정짓는 대로 인정받기'. 하지만 주변 세계가 그 모든 불일치를 수용할 수 있는가? 수용해야만 하는가? 이 불일치로 인해 가시성이 멍에(135)가 된다면 그 멍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눈 위에 멍에를 씌운 채 후각과 촉각에 의지해(101)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남겼다.  

 대니얼이 스스로를 백인으로 여긴다해도 그의 신체에 흑인의 특성이 있음을 배제할 수 없다. 대니얼만이 아니다, 서양인에 비해 췌장 크기가 작은 동양인은 당뇨에 취약하다. 눈동자 색에 따라 빛에 대한 민감도가 다르다. 흑인은 피부암 발병율이 낮다, 같은 차이는 그저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마저도 '수치에 의존해 인간을 분류하려 드는 선입견'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엔 아쉽다. 그가 자신을 백인이 아닌 미국인으로 규정했다면 다르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지금도 일정 부분 그렇겠지만, 미국인이 곧 백인이었던 배경이었다면 왜 그가 스스로를 백인처럼 증명(명예백인 148)하려 했을지에 대한 이해가 된다. 책을 읽고 생각을 남기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간에 비해 머리속을 떠돌던 생각을 어느 하나 제대로 잡아내지 못한 것 같아 여러모로 아쉬웠다. 처음 책을 읽으며 꽤 먼 시선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스스로 느끼던 거리감에 비해 책의 무게가 깊었던 듯 하다. 암실문고의 선정은 남다르다. 
  

* 물라토 백인과 흑인 혼혈 1세대
** 1955년 백인 여성에게 휘파람을 불었다는 이유만으로 린치를 당해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된 10대 흑인 소년 에멧 틸 이름을 딴 사건. 2020년 인종적 증오범죄에 근거한 사적 린치를 처벌하는 '에멧 틸 법'이 입법 되었다
*** 영화 [미시시피 버닝(1988)] 1964년에 일어난 흑인 인권 운동가 살해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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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와 왕국 알베르 카뮈 전집 개정판 4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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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지와 왕국'은 카뮈의 유일한 소설집이다. 총 6개의 단편이 실려있는 '적지와 왕국'의 독특한 제목은 부조리로 가득한 ‘적지’에서 자기만의 ‘왕국’을 좇는 현대인의 삶을 그린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이 제목이 가장 크게 와닿았던 두 작품이 [손님]과 [요나 혹은 작업 중인 예술가] 였다. 

 " 그는 불을 켜고 아랍인에게 식사를 갖다줬다. "자, 먹어." 아랍인은 전병 한 개를 집어 들고 부리나케 입으로 가져가다가 멈추었다. "너는?"하고 그는 말했다. "먼저 먹어. 나도 곧 먹지." 아랍인은 두툼한 입술이 약간 벌어지더니 잠시 망설였다. 이윽고 결심한 듯 전병을 덥석 깨물었다. 식사가 끝나자 아랍인은 교사를 건너다봤다. "네가 재판관이야?" "아니야. 내일까지 널 데리고 있을 거야." "왜, 그럼 나와 같이 식사하는 거지?" "배고파서." -손님 119"

 " "왜? 먹어." 
정우성 국수를 허겁지겁 먹는다. 함께 국수를 먹던 곽도원 수갑을 차고 불편하게 국수를 먹는 정우성을 본다. 
"손 줘봐." 
정우성의 수갑 한쪽을 풀어 자신의 팔에 채우는 곽도원.
"같은 편이다? 같은 편이야!" -영화 강철비 중"

 이 뒤로 이어지는 장면은 곽도원이 정우성의 팔에 남은 수갑마저 아예 풀어주는 모습이 나온다.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에는 이런 교류가 존재한다. 다뤼의 마음을 거북스럽게 했던 그 친밀감이 영화 [강철비]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자신이 가야할 길을 가는 아랍인을 바라보는 다뤼의 마음처럼, 분절된 세계의 두 사람이 연대와 고독을 보여주던 영화의 내용도 비슷한 결말로 흘러갔음은 우연일까. 

  " 그때까지 살아온 것에 비하면 사막이나 무덤 속처럼 느껴지는 이 희미한 정적, 그리고 어둠 속에서 그는 스스로의 심장이 뛰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다락에까지 이르는 소리들은 그를 향해서 나는 것이었으면서도 이제는 그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깊이 잠들어 있다가 홀로 죽는다. 아침이 되어 전화 벨소리가 텅 빈 집 안에서 영원히 귀가 먹어버린 몸뚱어리 위로 요란하고 끈질기게 울려댄다. 그는 마치 그런 사람들과 같았다. 그러나 그는 살아 있었다. -요나 혹은 작업 중인 예술가 176"

 요나는 다락으로 들어간다. 그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그를 방해하는 모든 것들에서부터 다락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요나의 화폭에 적힌 단어, 카뮈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고독 혹은 연대 어쩌면 그 둘 모두가 이 단편 안에 드러나 있다. 그리고 요나의 이야기 중 또 하나 그냥 지나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 요나의 제자들은 요나가 그린 것을, 그리고 그것을 그린 이유를 그에게 오랫동안 설명하곤 했다. 그리하여 요나는 작품 속에서 스스로 생각해도 약간 뜻밖인 여러 의도와, 자기는 담아놓은 일이 없는 많은 것들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을 빈약하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제자들 덕분에 돌연 풍부해진 자신을 발견했다. -요나 혹은 작업 중인 예술가 149"

 최승호 시인의 일화가 떠올랐다. 그는 2004년 자신의 시로 출제된 수능 모의고사 문제를 풀었다 틀린 일화로 유명한데, 그의 작품 ‘북어’ ‘아마존 수족관’ ‘대설주의보’ 등은 수능 모의고사 등에 단골로 출제 돼 왔었다. 의도주의적인 해석이 무조건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의도와 다르게 오독되거나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 쓴웃음을 짓게 하는 일이긴 하다.

 작품이 읽힌다는 것은 읽는 사람과 만나 새로운 시각을 통해 저마다의 생각으로 의미를 낳는 과정이라 생각했는데, 문득 그 안의 의도 역시 전달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특히 이렇게 긴밀한 연결이 폭 넓은 이해와 사유를 거치길 필요로 하는 글에서는 더욱 그렇다. '적지와 왕국'의 후기를 적고 있는 동안에도 일방적인 의미 붙이기나 마찬가지의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하니 씁쓸하기도 하다.

 좋은 기회를 통해 알베르 카뮈의 '적지와 왕국'의 개정판을 먼저 만나볼 수 있었다. 출판사 책세상에서 카뮈의 전집을 개정판으로 출간하며 [시지프 신화]와 [반항하는 인간]의 북펀딩을 진행하고 있다. 국내 알베르 카뮈의 최고 권위자인 김화영 교수가 그 전권의 번역을 맡아 전세계 유일 한 명의 번역자가 번역한 판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특별하고 매력적이다. 11일이 마감인 펀딩은 이미 400% 가까운 금액을 달성할 정도로 관심을 끌고 있으니 서둘러 확인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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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주의 인사 소설, 향
장은진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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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면서 책을 정리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에 대해 생각했다. 인생의 일부를 정리한다는 의미일까. 필요 없는 것들을 버리고 잊어서 새출발을 하겠다는 뜻일까. 무슨 일이 있으면, 어떤 마음이 생기면 필요한 게 아무것도 없는 인생이 될까. 39" 

 헤어진 전 연인이 내 집 현관문 비밀번호를 기억하고 들어왔었다는 시작은 불쾌함을 주었다. 훔쳐간 것은 없고 도리어 놔두고 간 것이 있었다고 해도 불쾌감은 여전했다. 헤어진 지 일 년이나 지났다니, 게다가 떠넘기듯 줘버린 것도 아니고 '부탁'한다니 언제고 되돌려받을테니 보관해달란 것일까. 무단침입으로 신고를 당해도 모자를 판에. 자유의 보장을 부르짖던 세주는 타인의 권리나 의사같은 건 발뒤꿈치로도 안 볼 자유도 포함해두었나 싶었다. 거기에 더해 이른바 '엑기스'인 책(18)을 두고 갔다고 " 나랑 다시 잘해보고 싶다는 뭐 그런 뜻일 수도 있을까. 21" 생각하는 동하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해시태그를 붙여 'ㅁ'으로 시작하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을때는 그래서 너희 둘이 사귀었었구나,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 뭐하냐너희들' 그래, 비밀번호 안바꿀때 알아봤다. 불만스럽고 의심스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세주가 없는 시간이 지나갔다. 

 세주없는 세주의 시간들 속을 동하는 천천히 거닌다. 밑줄 그은 책을 보며 누군가를 알아가는 일은 도서관에서 마주치면 화가 나겠지만 혹시,싶은 전 연인의 흔적이라면 다른 의미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왜일까 이유와 의미를 찾는 공백에서 동하는 자신 기억 속의 세주를 채운다. 누군가가 남긴 것들을 찬찬히 살피며 시간을 들여본 적이 있었나 생각해보니 딱히 떠오르는 사람도 물건도 없었다. 흔적은 커녕 대상마저도 그렇게나 열심히 들여다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나 자신도 그렇게 들여다보지 못했다. 거울 앞에서 주름이나 기미를 찾아보았던 것 말고는. 다 헤아리기도 어려운 많은 것들에 둘러싸여 지내면서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 왜 가지고 있는지 정리할수도 설명할수도 없었다. 미니멀한 삶의 방식이 유행할 때도 따를 수 없었던 버리고 줄이기를 냉장고에 담겨 입양된 세주의 책들을 보며 가늠해본다. 안되겠다. 

 동하와 세주가 연인으로 함께 한 6개월의 시간은 서로의 차이만 보였는데, 세주가 남긴 책과 화분으로 시작된 시간은 왜 서로가 달랐었는지를 헤아려 볼 수 있는 거리가 생겼다. 세주가 자신의 삶에서 언제든 한 번은 떠나야 했던 것처럼, 서로를 바라볼 수 있으려면 그만큼의 거리도 필요했었다는 듯이 서로가 없는 자리에서 밑줄과 사진, 시계나 케익을 통해 상대방을 바라보고 어긋났던 순간들을 이해한다. 처음엔 그런 둘의 모습이 꼴사나웠는데 세주의 집들이를 통해 그들이 함께한 시간동안 주고받은 것이 '다름'만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비밀번호를 알고 있어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서, 헤어진 사이인 것을 신경쓰지 않아서 라는 이유를 붙여도 왜 '엑기스'를 남기고 간 것이 동하였는지, 헤어진지 일년만인 상대의 무단침입에도 비밀번호를 왜 바꾸지 않고 '의미'를 찾았는지. 짜장면 냄새로 기억될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이해하고 스스로의 상처를 조금 더 돌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것 같아 결국엔 두 사람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책을 덮을 수 있었다.   

 " 그러나 막상 그 끝에 도착해 몇 달 살아보니 떠나왔나 싶을 정도로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세주는 늘 세계의 끝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떠나지 않았다면 자신이 머무는 곳이 끝이란 걸 몰랐을 테니 언제든 한 번은 떠나야 했다. 그러니 찾아 떠났던 그 험한 길과 시간이 전혀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많은 걸 잃고, 그것도 모자라 일부러 버리고도 후회하지 않는 건 그 때문이었다. 61" 

 쇼펜하우어는 불행은 우리가 외부에 의지하기 때문에 발생하며 진정한 행복은 스스로의 내면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외부의 조건은 불안정하며 불완전하다. 어떤 경우엔 그 의지처 자체를 잃게 되는 일도 생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오래도록 상실에 잠겨 있던 세주는 세계의 끝에서 외부가 아닌 내면을 향해 살아가야 함을 깨닫는다. 우리는 때로 낯선 여행지에서 자신만의 파랑새를 발견하기를 기대하며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우리가 찾던 것들, 채워야할 빈 공간이 생겨난 곳은 여행지가 아니라 떠나온 곳이다. 여행을 통해 다른 무언가로 채워 대체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잃어버린 것'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잃어버린 장소뿐이라는 사실을 파랑새와 세계의 끝을 통해 다시금 깨닫는다. 

 요즘은 사랑보다 이별이 더 쉽고, 누군가를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보다 구분짓고 단절하는 일이 더 빈번하다. 세주와 동하도 그렇게 헤어졌다. 하지만 각자의 방향으로 향하는 마지막 헤어짐에서 둘 사이에 남은 것은 단절이 아닌 이해였다. 'ㅁ'을 주고받을 때는 남들 다 보는데에서 이러지말고 갠톡을 하던 dm을 보내던 둘이서 하세요, 싶었는데 마지막이 되고 나니 'ㅁ'이 갑자기 내 앞에도 놓여진 듯 했다. 어떤 'ㅁ'을 남겨야할까, 어떤 '마음'을 남겨야할까. '세주의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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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책세상 세계문학 13
메리 셸리 지음, 정회성 옮김 / 책세상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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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조주여, 
제가 간청했습니까, 진흙을 빚어 저를 인간으로 만들어달라고?
제가 애원했습니까, 어둠에서 저를 끌어내달라고?
- 존 밀턴, [실낙원] p7 " 

 처음 도입부를 보고 불현듯 기시감을 느꼈다. 워낙 유명한 문구라 전에도 본 기억이 있다. 하지만 지금 이 문구를 앞에 두고 보니 전과 다르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요즘 종종 볼 수 있는 파괴적이고 굴절된 말이었다. '낳음당했다' 반출생주의라 칭해지는 기록적인 출생율 저하의 시대에 가난 혐오가 더해져 '돈이 없으면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방송에서는 성인 진행자가 어린 출연자들에게 부유하지만 화목하지 못한 가정 환경과 가난하지만 화목한 가정 환경 중 어떤 조건을 고르겠냐고 묻고 그 대답을 그대로 송출한다. 물질적 조건을 앞세우는 것에 부끄러움이 없어지고 물질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 사회가 되더니, 남과 비교하여 유복하지 못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나게 했다는 이유로 '낳음당했다'는 말을 쓴다고 한다. 경제적 요인으로 시작된 '낳음당했다'는 혐오표현은 개인이 가진 신체, 정신적 문제들이 더해져 확산된다. 그리고 이 정서는 넓고 얉게 퍼져나가 사회의 복지와 구조가 기성세대나 혹은 어느 한 성별에게만 유리하게 조성되어 피해를 보는 세대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일부 집단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다시 '프랑켄슈타인'에서 마주한다.   

 '프랑켄슈타인'을 보면서 소설의 내용 그 자체에 빠져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갖은 미사여구 속에서도 점점 짙어지는 갈등과 긴장감에 몰입하기도 하고, 괴물이자 악마로 불린 빅토르의 창조물이 처한 처지에 동정이 일었다. 특히 2권의 2장에서 마침내 빅토르와 창조물이 서로 마주하여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창조자에게 버림받고 세상에 상처 입었음에도 여전히 '선의와 동정을 갈구하는(137)' 창조물의 태도에 '유창한 말솜씨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298)'던 빅토르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깊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이전에 마음이 여렸던 때라면 괴물이라 불리는 추한 외모의 창조물의 고독과 괴로움에 더 초점을 맞춰 깊이 공감하고 동정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읽어갈수록 그의 면면에서 어쩐지 지금 우리 사회의 병폐들이 보임을 외면할 수 없었다. 책을 읽고 있던 어느 주말,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그것이 알고 싶다 1442회 소년의 시간 - 사천 크리스마스 살인 미스터리 편) 보는 순간 읽는 내내 찜찜했던 요인들이 하나씩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그 티비 프로그램을 통해 창조물이 처음 '보호자들(168)'이라 부르던 오두막 사람들에 대한 동경, 오랫동안 지속된 일방적인 관계 맺음과 망상, 스토킹이나 다름 없는 행위가 현실에서 좌절되었을 상황이 연상되었다. "보호자들이 떠남으로써 나와 세상을 이어주던 유일한 연결 고리는 끊어져버렸다. 주체할 수 없는 복수심과 증오심이 내 가슴에 가득 메웠다.(193)" 그리고 이 굴절된 관계 맺기에 대한 욕망과 좌절의 분노는 소설에서는 그들이 남기고 간 오두막의 파괴로 표출되고, 현실에서는 망상의 대상에 대한 보복 살해 후 자해-그러나 결코 자살로 이어지지 않는-로 드러난다. 그리고 괴물/악마는 여전히 살아서 또 다른 비논리적 권리를 욕망한다. "나는 인간의 탈을 쓴 다른 존재에게서 받으려고 헛되이 애썼다가 아무것도 받지 못한 정의를 당신에게서 얻어내기로 결심했다.(195)" 애써서 노력하면 받을 수 있는 정의로 표현되는 것, 현실의 범인은 심신미약과 어린 나이의 청년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미래 등을 이유로 감형과 사회로의 재편입을, 소설 속의 창조물이 빅토르에게 요구하고자 하는 것은 '아내' 또 다른 여성 창조물이다. 

 창조물이 빅토르에게 요구한 것이 아내라는 점은 재미있다. 처음 창조자나 낯선 이들, 보호자들과 관계 맺기를 갈구했음을 떠올려 빅토르에게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달라고 요구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는 더 나아가 자신을 위한 아내를 만들어달라고 한다. 심지어 그 때하는 말마저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 "세상의 어떤 남자든 가슴에 품을 아내가 있고, 심지어 짐승도 저마다 짝이 있는데 왜 나만 혼자여야 한단 말인가?"(239)" 남자에게 아내가 반드시 주어지는 필수요소가 아님도, 심지어 그 짐승들조차 수많은 수컷들은 짝을 이룰 기회를 얻지 못함도 고려하지 않는다. 그동안 만난 모든 이들에게 외면 당했음에도 자신에게 주어질 여성에게서 외면 당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채다. 처음 창조물의 요구에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이기심으로 그를 승낙했던 빅토르는 이내 이성을 차린다. 창조물이 '요구한 여성 창조물'은 '아직 아무런 약속을 하지 않았(235)'음을 깨닫는다. 그녀에게도 사고 능력이 있고, 남성 창조물과 빅토르 사이의 계약에 책임이 없으며, 그녀가 무엇을 열망하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여성에게도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여기서 현실의 결혼문제가 끌려나온다. 남성들이 사회와 여성에게 불만을 품은 지점이 맞물린다. 성비불균형과 결혼기피현상, 성별 갈등이 심화되어 결혼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현 상황에서 창조물과 비슷한 몇 가지 문제적 태도를 보인다. 여성들의 결혼에 대한 인식과 태도 변화를 맹비난하여 성별 갈등의 심화를 초래하거나, 사회에 이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내놓고 자신들을 구제하기 위한 도움(여성 교육, 사회 진출 제한, 조혼 장려 등의 극단적 방안을 주장하기도 한다)을 줘야 한다고 요구한다. 실제로 이와 비슷한 의도를 가진 정부의 대책 방안*이 공개되어 논란이 된 적도 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해결 방안이 될 수 없다. 여성이 환경과 조건에 떠밀리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로 결혼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인식은 빅토르가 여성 창조물을 남성 창조물에게 만들어주기 전 깨어난 '이성'으로, 아직 책 안에서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보다 경제적으로 낮은 처지에 있는 상대자를 찾아 '금전적 보상을 댓가'로 결혼 상대자를 구매해오게 변질된다. 하지만 빅토르의 예상대로 그들이 찾은 결혼 상대자들 중 일부는 '여자가 떠나면 어떻게 될까?(236)'는 질문에 대한 답을 보여준다. 

 창조물은 사랑받고 선택받지 못함을 대상 뿐 아니라 사회를 향한 공격으로 표출한다. 그것도 애초에 본인이 인정을 갈구했던 대상 창조자인 빅토르가 아닌 그 주변인들을 공격함으로써 대상을 압박하고 자신이 원하는대로 행동하도록 조종하려 한다. 사귀던 사람이 관계를 정리하려고 할 때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가족까지 해치겠다고 협박하는 범죄의 패턴과 닮아있다. 빅토르의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창조물은 계속해서 강조한다. 처음부터 나는 나쁜 존재가 아니었다, 누군가 나를 받아주고 기댈 사람만 있다면 나쁜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나쁘게 대하는 사람들이 더 나쁘다며 자신의 악한 행동에 대한 원인을 외부로 돌리기 바쁘다. "세상에 있는 수 없이 많은 사람 중에 나를 불쌍히 여기거나 도와줄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 몰인정한 사람들을 무턱대로 호의적으로 보아야 할까? 말도 안 된다! 나는 그 순간 인간이란 종족, 특히 나를 만들어내 도저히 참기 힘든 고통의 구렁텅이로 처박은 그자와의 끝없는 전쟁을 선포했다.(191)" 

 그리고 창조물과 빅토르 사이의 관계는 현대사회에서 다시금 되살아나 피해를 입고 있는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의 구도를 가진다. 창조물은 빅토르의 존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너에 대한 나의 지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계속 살아 있어라. 그러면 내 권능은 완벽해질 것이다. 나를 따라와라. 나는 끝없이 펼쳐진 북극의 얼음 바다로 갈 테니까. 나는 거기에서도 아무렇지 않지만 너는 추위에 고통을 받을 것이다.(293)" 빅토르가 자신을 쫓고 있다는 사실, 빅토르의 목표가 자신이 되었다는 사실에 창조물이 생의 의미를 두는 것은 점차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캥거루족을 연상시킨다. 단순 거주지를 독립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장기 불황에 일자리를 얻지 못한 지난 세대가 7~80대 부모의 연금에 기대 4~50대가 될 때까지 근로소득없이 살아가는 일본의 '패러사이트 싱글' 문제*와 닮아있다. 부모가 죽고 나면 소득원이 사라져 남은 자녀의 생계 수단이 끊기게 된다는 점이 빅토르의 죽음 이후 창조물도 생의 의지를 잃고 사라져버린다는 결말 마저 닮았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프랑켄슈타인'이 이런 식으로 읽히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처음 '프랑켄슈타인'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서평을 남기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전에 어린이용으로 각색된 내용으로 접했을 때는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했던 작품이고, 나중에 어떤 내용인지 줄거리를 알았을 때도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었다. 창조물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라 창조자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괴물 혹은 이것저것 이어붙여 만들어진 것을 비유적으로 지칭할때 여전히 프랑켄슈타인이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완역본으로 다 읽고 나니 그 전과는 다른 감상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작품이 가지고 있는 재미는 물론이고 나름의 생각을 덧붙여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2017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제13차 인구포럼의 저출산대책 일부 내용이 드러나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여성의 하향선택결혼을 유도하기 위한 문화적 콘텐츠 개발이 이루어져야 함. 이는 단순한 홍보가 아닌 대중에게 무해한 음모수준으로 은밀히 진행될 필요가 있음' 

*2019년 일본 도쿄에서는 이로 인해 존속 살인이 일어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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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 붕괴
해도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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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마리의 시선이 유진의 얼굴을 향했다. 유진은 긴 이야기를 하는 편이 아니었다. 지금의 유진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마리는 알 수 있었다. 항상 유진이 먼저 다가오기를, 원해서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순간 마리는 기대와  함께 긴장과 두려움도 느꼈다. 무언가가 달랐다. 일상 속에서 많은 말을 주고받는 것과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많은 말을 주고받는 건 분명 다르니까. 그래도 마리는 좋았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변화하면서 깊어진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경험 속에서 배운 것이었다. 158" 

 간만에 읽어보는 소설집이라 부담없이 손에 들었다가 정신을 잃을 뻔 했다. 정신을 잃었던 것은 라미(검은 절벽)였지만 우주 공간과 행성 왕복선, 다이버전스, '1G로 가속을 하는 상황에선 중력과 관성이 정확히 같은 역할을 하니까(26)' 같은 말들 속에서 기억이 끊긴 라미보다 더 상황 파악이 안되는 것은 나였다. 갑자기 책을 놔두고 영화 그래비티(2013)라도 복습하고 와야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됐다. 계속해서 읽다보니 단어들 사이에서 상황과 관계가 읽히고 그 뒤로는 재미가 느껴졌다. 그래서 감상 정리가 끝나고 나면 그래비티를 봐야겠다고 마음 먹은 중이다. 

 '진공 붕괴'가 마음에 든 이유 중 하나는 자연스럽게 만약을 생각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주변 사람들도 지칠만큼 만약을 물어보기 좋아하는 편인데 나에게 새로운 만약을 던져준다. 만약 나라면 티나, 교수, 러브조이, 혜나 중 누구를 믿을까? 만약 나라면 유토피아에 남을 것인가 기생선으로 떠날 것인가? 누군가의 기억을 이식 받은 사람은 기억의 주인과 같은 사람일까 다른 사람일까? 시간을 되돌린다면 이전의 나와 되돌아간 나는 같은 사람일까? 그 밖에도 읽는 이의 눈에 들어올 수 많은 만약들이 있다. 어떤 만약은 우리의 상상일 뿐일 것 같고 어떤 만약은 꽤 가까워진 것처럼 보인다. 과학의 틀을 가져왔지만 만약들에는 인간이 있다. 

 평소 선택하는 주제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는데, 읽다보니 재밌게 봤던 영화들이 떠올랐다. 콘택트(1997), 컨택트(2017)같은 작품도 좋아했고, 인터스텔라(2014)도 재밌게 봤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7)나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꽤 유명한 어바웃 타임(2013), 최근 개봉한 첫번째 키스(2025), 죽음이 반복된다는 점이 닮은 엣지 오브 투모로우(2014), 책에서도 작품들의 모티브로 나오는 사랑의 블랙홀(1993)도 빼놓을 순 없다. 다 좋아하는 내용들이었다. SF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 말할 것이 없겠지만 장르에 낯선 독자라도 저런 영화들을 흥미롭게 봤다면 익숙한 재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진공 붕괴'를 소개하자니 묘하고 안타깝다. 재밌다. 재미있기는 한데 세세한 설명이 나오는 부분은 흐린 눈을 하고 읽어나가서 어떻게 재밌는지 알려줄 수가 없어서 안타깝다. 실험이나 복잡한 배경지식, 우주를 배경으로 한 장면들을 상상하는데 한계가 있어 넷0릭스에서 기0한 이야기 같은 것처럼 시리즈로 만들어주면 안되나? 읽는 것보다 보는 게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은데,하고 바라게 된다. 실제로 영상화 계약이 진행되었다가 코로나를 지나며 무산된 작품도 있다고 하는데 언젠가 영상물로도 만나게 되면 반가울 것 같다. 나중에 00의 원작소설!로 찾아읽게되기 전에 먼저 읽어두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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