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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이 이야기 ㅣ 암실문고
김안나 지음, 최윤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6월
평점 :
" 나는 뿌리가 있어요. 나한텐 분명한 뿌리가 있다고요. 이렇게 말한 뒤 나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게 되자마자 사람들은 나만보면 뿌리가 없냐는 노래를 해대기 시작했어요. 인생이 좀 꼬였다고 해서 딱히 다른 뭔가를 시도해 볼 수도 없는 애한테 뿌리를 잊고 사는 거냐는 말을 해댔다고요. 그사람들이 말하는 '뿌리 없음'이란 시장의 야채상이 나에게 건네는 곤니치와라는 말하고 같은 거예요. 나에 대한 인종 검사를 수행하려는 행동이라고요. 137"
[ 1950년대 미국의 한 소도시에서 아이가 태어난다. 미혼모인 어머니는 아이가 입양되기를 바란다고 한다. 그런데 곧 병원에서 문제를 발견한다. 어머니는 백인인데 아이가 흑인 혼혈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작은 도시는 아이에 관한 소문으로 들썩인다. 아버지는 누구이며, 왜 이 어머니는 입을 열지 않는가? 출판사 소개글] '어느 아이 이야기'의 큰 줄기 중 하나인 이 사건을 지금의 시각으로 바라본 탓에 한동안 의아했다. 어차피 생모는 아이에 대한 권한을 포기했는데 아버지가 누구인지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였나? 싶었던 것이다. 출산 후 친권 의사가 없음을 밝히고 입양을 희망하면 기본적인 정보를 기록하고 생모와 분리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조사는 계속해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혀야만 할까, 캐럴은 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제대로 밝히지 않은 것일까. 흑인과 어울렸다는 불명예 때문에? 백인과 어울린 흑인이 감수해야할 위험에서 상대방을 방어하기 위해서?
소문만으로도 도시가 들썩일 정도의 일인데 실제 캐럴이 부주의하게 누군가와 가졌을 만남이 조용히 이루어졌다는 점은 의외다. 보고서를 읽다보면 코의 모양 머리결, 피부와 눈의 색, 심지어 IQ 측정값을 통틀어 대니얼이 누가봐도-가시성으로 물라토*이고, 실제로도-생물학적으로 물라토라면, 대니얼의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대한 확인이 왜 필요한지 역시 의문이 된다. 대니얼의 아버지가 어떤 인종이던 대니얼의 가시적 입양 조건은 달라지지 않는다. 혹 대니얼의 아버지가 흑인이 아니고 대니얼도 물라토가 아니게 된다면 부여받게 되는 새로운 정체성은 가시적 조건을 상쇄할 수 있는 권리증이 되는가. 마치 이 아이는 물라토의 외형조건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물라토가 아닙니다, 하는 주의문구가 적힌 꼬리표와 함께. 하지만 그 꼬리표를 위해 혹은 친부모의 확실한 신원 기록을 위해, 대니얼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한 과정은 꼬리표보다는 확실히 대니얼과 캐럴에게 악조건이 되었다.
솔직한 감각으로는 그 당시의 인종차별에 대해서 이게 얼마만큼이나 큰 사건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에멧 틸 사건**'이 1955년, [미시시피 버닝***]의 배경이 1960년대였었다고 하니 대니얼의 출생은 그 이상의 사건이었을지 모른다. 보고서는 집요하게 아이의 출생을 파고든다. 그 의도는 아이에게 '적합한 가정'을 찾아주기 위함에 초점이 맞춰진 선량함을 두르고 있다.
" 우리는 아이에게 맞는 입양 부모를 찾기 전에 생부에 대한 정보가 더 필요하다는 점을 할 수 있는 한 강하게 설명했다. 우리의 목표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서로에게 적합한 아이와 부모를 맺어 주는 것입니다. 최선의 경우는 입양 부모와 아이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 거죠.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자연스러워 보이는 가정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럴 경우에만 이 아이들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으니까요. 36"
그러나 그 선량한 의도는 인종차별로 재단되어 있다. 아이의 성장에 대한 세심한 관찰, 입양처를 찾아주기 위한 물색 마저도 눈금자 아래(257) 놓여진 수치를 피할 수 없었다. 보고서를 읽으며 기대었던 선량함은 차별과 시혜의 그늘에서 종내 불유쾌함을 남겼다.
대니얼의 아버지가 누구인가 혹은 어떤 인종인가에 대한 선량한 추적은 구분지어짐으로 비롯되었고, 구분하기를 위함이다. 읽는 내내 계속되었던 조앤의 시선(20/136), 대니의 거울(148), 질비아의 스케치(263)처럼 '바라보기'가 강조된 장면들이 떠오른다. 눈을 통해 얻게 되는 정보 혹은 선입견을 생각해보자. 단지 인종의 문제를 떠나, 오히려 인종에 대한 정보는 훨씬 직접적이다. 성별, 나이, 언어, 옷차림, 표정, 시선, 귀금속 같은 소지품, 손톱이나 피부, 머리결같은 것들, 심지어 생김새마저 타인을 판단하는 항목이 된다. 인종적으로 소수자 위치의 삶을 경험해보지도, 불일치하는 '뿌리'에 대한 질문과 심판도 받아보지 못한 탓에 공감할 수 없는 영역이 있어서일까, 넘어가보지 못한 한 걸음이 가로막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때문에 도리어 가시적 조건들을 확장해 인간이 어떠한 분류없이 오직 한 명의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혹은 어떤 분류는 괜찮고 또 괜찮지 않은가. 선입견과 구분짓기의 '모든' 틀에서 벗어난다면 그 끝은 획일성 외에 무엇이 남는가. 자신을 인종과 국적과 같은 틀에서 벗어나 오직 한 명의 개인으로 봐달라는 말은 오히려 자신이 '규정짓는 대로 인정받기'를 바라는 말로 들린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뿌리를 이야기할 때 외모와 내면의 분리/불일치 - 이 부분에 이르러 성정체성 문제가 떠올랐다.
" 가끔은 내 자신이 주장하는 나와 실제 내가 다른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마치 착시 같은 존재, 늑대 가죽 속의 양, 나는 그런 변장 속에서 태어났다. ...중략... 어쨌든, 만약 내가 만들어진 환상이라면 문제가 생긴다. 내 외모가 착각이고 내 내면이 진실인가 아니면 정반대로 내 외모가 진실이고 내 영혼은 그 반대인가라는 문제 말이다. 주변 세계가 나에게 보이는 반응에서 출발하면, 즉 사람들이 내 내면과는 맞지 않는 내 외형에 먼저 반응을 보인다는 것에서 출발하면, 나의 외모가 옳고 나는 옳지 않은 것이다. 감히 생물학이 틀리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140"
이들의 주장과 갈등도 같은 부분을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규정짓는 대로 인정받기'. 하지만 주변 세계가 그 모든 불일치를 수용할 수 있는가? 수용해야만 하는가? 이 불일치로 인해 가시성이 멍에(135)가 된다면 그 멍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눈 위에 멍에를 씌운 채 후각과 촉각에 의지해(101)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남겼다.
대니얼이 스스로를 백인으로 여긴다해도 그의 신체에 흑인의 특성이 있음을 배제할 수 없다. 대니얼만이 아니다, 서양인에 비해 췌장 크기가 작은 동양인은 당뇨에 취약하다. 눈동자 색에 따라 빛에 대한 민감도가 다르다. 흑인은 피부암 발병율이 낮다, 같은 차이는 그저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마저도 '수치에 의존해 인간을 분류하려 드는 선입견'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엔 아쉽다. 그가 자신을 백인이 아닌 미국인으로 규정했다면 다르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지금도 일정 부분 그렇겠지만, 미국인이 곧 백인이었던 배경이었다면 왜 그가 스스로를 백인처럼 증명(명예백인 148)하려 했을지에 대한 이해가 된다. 책을 읽고 생각을 남기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간에 비해 머리속을 떠돌던 생각을 어느 하나 제대로 잡아내지 못한 것 같아 여러모로 아쉬웠다. 처음 책을 읽으며 꽤 먼 시선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스스로 느끼던 거리감에 비해 책의 무게가 깊었던 듯 하다. 암실문고의 선정은 남다르다.
* 물라토 백인과 흑인 혼혈 1세대
** 1955년 백인 여성에게 휘파람을 불었다는 이유만으로 린치를 당해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된 10대 흑인 소년 에멧 틸 이름을 딴 사건. 2020년 인종적 증오범죄에 근거한 사적 린치를 처벌하는 '에멧 틸 법'이 입법 되었다
*** 영화 [미시시피 버닝(1988)] 1964년에 일어난 흑인 인권 운동가 살해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