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소포스의 책 읽기 - 철학의 숲에서 만난 사유들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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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철학을 다루고 있는 책이 눈에 띄면 읽어봐야겠단 욕심이 생긴다. '필로소포스의 책 읽기'는 강렬한 표지가 멋있어서 읽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거대한 책장 안으로 들어서는 인간의 모습이 보는 이를 끌어들이는 표지는 어쩐지 압도된 분위기가 남일 같지 않게 보이며 두꺼운 철학책 앞에 겁먹게 만드는 부분도 있다. 등산일줄 알고 마음의 부담을 안고 시작했는데 걷다보니 둘레길 산책로였다. 낯설고 어려운 이름과 용어들을 살피고 이 산은 악산이로구나 했는데 정상으로 향하는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었달까. '필로소포스의 책 읽기'는 네가지 큰 주제를 통해 동서양 철학의 고전들과 21세기 사상가들의 저서 76권을 소개한다. 너무 깊게 들어가지 않으면서 핵심적인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담아냈다. 일단 책장을 넘겨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능숙한 인도자인 저자가 지혜와 사유의 길을 따라 독자를 철학의 숲으로 인도한다. 

책을 읽으며 몇몇 인상 깊었던 내용을 꼽아보면 2장 우주는 생각하는 거대한 뇌일까에서 만난 데이비드 무어의 후성유전학(161)은 얼마 전 읽은 리처드 도킨슨의 [불멸의 유전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불멸의 유전자]에서 뻐꾸기의 탁란을 통해 생물이 경험하는 환경이 대를 이어 반영되면서 알의 색과 무늬가 각기 다른 변화를 갖게된 사례를 전한다.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에서도 "부모의 경험이 '유전적인 방식'으로(164)" 대물림되는, 경험과 환경에 따른 영향을 주장하고 있어 흥미로웠다. 

3장 영혼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에는 '연금술(282)'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만화책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내용이 나오는 부분을 정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윌리엄 뉴먼의 저서보다 파라켈수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언급하는 인공 인간 바실리스크와 호문쿨루스의 배경(283~)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작품들이 있을 것이다. 만화도 배워야 더 재밌게 읽을 수 있다니. 어쨌든 이런 점들 때문에 만화도 인생에 도움이 된다고 본다. 

대학시절 모더니즘과 미학을 주제로 레포트를 작성한 적 있는데, 당시 문인, 예술가들의 활동이 아름다움의 추구라는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졌다는 내용이었다. 시대를 관통하기엔 빈약하고 핵심이 없는 시각이라는 평을 받았었는데 1장 동일성에도 차이에도 머무르지 마라에서 자크 랑시에르의 미학 분야를 다룬 철학서 '아이스테시스(83)'를 다루면서 다시 떠올랐다. 모더니티, 근대성이 함께 언급되면서 개화기에 느꼈을 새로움에 대한 충격과 평등과 자주를 내세운 식민지 시대의 감각이 "미학에 깃든 정치성(87)"을 드러냈음을 그때 말했더라면 좋았을텐데 싶었다. 이 노력에 A+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로나 마이너스 정도는 받았을텐데. 

" "통치자보다 상위에 있는 법은 인민의 안전이다"라고 언명함으로써 국민의 생명과 선익을 보호하는 데 통치자가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이런 노력을 다하지 못한 통치자는 인민에게 버림받을 수 있음을 논리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셈이다. 327" 
4장 영성과 개벽의 정치를 찾아서 부분은 우리나라의 지난 정국과 혼란스러운 세계 정세를 생각하며 읽게 되는 내용이었다. 앞서 인용한 홉스의 <법의 기초> 내용을 읽다보면 결국 탄핵으로 임기를 마감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보인다. 민주주의의 기본을 두번이나 실천해낸 사람들과 두번이나 탄핵되는 후보를 뽑은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는 세상이라니. 

복잡한 국내 상황 뿐만 아니라 트럼프의 자국 내 시위대 주방위군 투입 진압이나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의 전쟁 상황, 미중 무역 갈등 등의 소식을 통해 "전쟁은 합리적 인간의 계산적 정치 행위가 아니라 모방적 인간의 가속적 경쟁 행위다. 짝패 관계의 경쟁과 모방의 동역학은 둘의 대결이 끝장을 볼 때까지 계속된다. (363)"는 전쟁론을 인상깊게 보았다. 더불어 지라르의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이 부정 당하고 합리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오늘 날, 오히려 그 이름으로 인해 치러진 타인의 희생이 얼마나 길고 무거운지 또한 오직 소수와 일부의 이익을 위해 지금까지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저자를 어디서 봤나 했더니 '생각의 요새'였다. 23년 '생각의 요새' 출간 때도 읽어보겠다고 신나게 달려들었던 무모한 추억이 있었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교양인과 저자 고명섭이 이끄는 이 철학의 숲 앞에서 홀려 책을 손에 들기를 반복한다. 이것이 다만 영원회귀적 행동에서 머무르지 않고 반복 사이에서 아주 조금의 차이가 쌓이는 유의미한 경험으로 남길바라며 읽었다. 조금 세속적으로 말하자면 대학교 인문 철학 교양 수업에 정말 넓고, 사람에 따라서는 깊게도 쓸 수 있을 유용한 내용을 담고 있다. 더불어 요즘의 사회현상이나 국제정세와도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으니 이 책 한 권을 여름방학 동안 읽어둔다면 교양 마스터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한번쯤-가능하면 여러번- 읽어본다면 분명 책의 가치를 실감할 것이다. 철학에 관심이 있는데 뭘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들면 '필로소포스의 책 읽기'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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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지음, 야나 렌조바 그림,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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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에서 신체 부상은 고통스럽다고 지각된다. 어떤 행동에 고통이 뒤따르면, 그 행동을 되풀이할 확률은 줄어든다. 그것은 우리가 처벌을 정의하는 방식일 뿐 아니라, 다윈주의적 의미에서 고통이 무엇을 위해 있는지도 설명한다. 부상은 종종 죽음, 따라서 번식 실패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신경계는 신체 부상을 고통스럽다고 정의한다. 207"

 해가 높이 떠올랐다. 그림자마저 짧아진 길에 서서 들어갈 곳을 찾는다. 어제 날이 흐려서였을까 좁은 화단과 붙은 도보 위로 말라버린 작은 지렁이들이 보인다. 어떤 것들은 언뜻 나뭇가지처럼 보인다. 횡단보도를 앞둔 삼거리 코너에서 아직은 죽지 않은, 그러나 고통스럽게 햇볕 아래에 꿈틀거리고 있는 지렁이를 발견한다. 15센치는 되어보인다. 근처에 떨어진 진짜 나뭇가지를 하나 찾는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나뭇가지가 닿을때마다 더 몸부림치는 지렁이를 들어올려 화단 풀숲에 던져 옮긴다. 지렁이와 나 사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은 알지 못한다. 저 지렁이는 살 수 있을까. 

 뜨겁게 달궈지고 있는 길 위에 느닷없이 놓여진 지렁이를 발견하고 문득 읽고 있던 '불멸의 유전자'를 떠올렸다. 지렁이에게 새겨진 "유전적 예측*"에 분명 햇빛은 피하고 습기와 양질의 토양을 좇으라는 본능이 담겨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어떤 변수가 생겼던 것이기에 수많은 지렁이들이 본능에 반한 움직임을 보였을까. 길 위에서 만나고 싶지 않은 이 환형동물의 오늘, 펠림프세스트+에 죽음 직전 다가온 나뭇가지와 초고속 이동에 대해서도 기록될 것인가.

 '불멸의 유전자'는 흥미롭지만 정말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책의 두께만큼이나 많은 분량도 분량이지만, 정보들을 읽어내는 일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생물에게서 발견되는 연결이 그 모든 인과가 진심으로 즐겁고 흥미로운 사람이 펴낸 책은 일반인에게 비슷한 흥미와 약간의 당황스러움도 전달한다. 고슴도치, 참돌고래, 가비알, 익티오사우루스, 작은개미핥기, 큰개미핥기, 천산갑, 아르마딜로, 가시두더지(106-110)에 이르기까지 머리뼈골격을 비교해보게 되리라 예상치 못했다. 물론 날다람쥐 친구들은(137) 귀여웠다. 

 읽는동안 사람에게서는 어떤 진화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혁신**'이 각기 다른 나라에서 독자적으로 나타났듯이(125) 근래 각기 다른 나라에서 나타나는 갈등과 반목의 세계정세가 인류의 유전자에 새겨진 또다른 반복의 흔적이 아닐까. 비록 우리가 지난 두번의 세계적인 전쟁 이후 얻어진 교훈과 그 사이 더 발전했다고 믿은 문명과 교양에도 불구하고 세번째 세계적인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예상치 못했더라도 말이다.  

 또 하나는 하렘을 가지고 있는 일부 동물들의 비대칭(329)을 살펴보면서 시작되었다. 많은 수의 수컷들이 짝을 이루지 못하고 일부 선택된 수컷만이 자신의 유전자를 남길 수 있다는 내용에서 현대사회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음을 떠올렸다. 심지어 이 현상의 바탕은 앞에서 언급한 갈등 양상과 '계획 경제 유전***'의 일부 선택 방식을 여성에게 적용하는 것에서 그 영향을 미쳤다. 이 은밀한 반복이 어쩌면 재생산의 단절을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미래와 인류에 대해 생각하면 회의적이지만, '불멸의 유전자'를 읽으며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우리의 유전자들은 다음 세대에 무엇을 남기기 위한 선택을 하고 있을까,였다. 어쩌면 생존과 유전자의 전달에는 인간이 지닌 인지 관점에서의 납득 여부보다 뻐꾸기(317-325) 새끼의 벌어진 입에도 먹이를 떨구도록 프로그래밍 된 새의 경우가 더 유리할지도 모른다. 저자에게 더 많은 시간이 주어졌다면 오늘날 이 '불멸성'에 대해 다른 관점을 제시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흥미로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충실한 시간이었다. 

 *"알에서 깨어날 때 이 도마뱀은 태양에 바짝 달궈진 모래와 돌의 세계에 있을 것이라는 유전적 예측을 하고 있었다. 그 유전적 예측에 어긋난다면 예를 들어 길을 잃어서 사막에서 골프장으로 들어간다면 지나가던 맹금류가 곧바로 낚아챌 것이다. 또는 세계 자체가 바뀌어서 그 유전적 예측이 틀렸음이 드러날 때에도 같은 운명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다. 모든 유용한 예측은 적어도 통계적인 의미에서 미래가 과거와 거의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18"

**마찬가지로 인상적인 점은 한 동물이 유연관계가 없는 다른 동물을 세세한 부분까지 닮는다는 것이다. 양쪽이 같은 생활 방식으로 수렴되었기 때문이다. 매트 리들리는 [혁신에 대한 모든 것]에서 인류의 가장 위대한 혁신 중에는 각기 다른 나라의 창안자들이 서로가 한 일을 모른 채 독자적으로 중복해서 해낸 사례가 많다는 것을 보여 준다.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도 마찬가지다. 125 

***사려 깊은 계획 경제가 다윈주의적 수단을 통해서 출현하려면, 성비를 제어하는 유전자들의 자연 선택을 거쳐야 할 것이다. 불가능하지는 않다. 어떤 유전자가 수컷이 생산하는 X 정자 대 Y 정자의 수를 편향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어떤 수컷 태아를 선택적으로 유산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갓 태어난 수컷 새끼들을 굶겨 죽이고 선호하는 소수만을 키우도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개의치 말자. 그냥 이 가상의 유전자를 계획 경제 유전자라고 하자. 흔히 생각하는 하향식 체계다. 332

+펠림프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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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영감에 관하여 - 천천히 사유할 때 얻는 진정한 통찰의 기쁨
머리나 밴줄렌 지음, 박효은 옮김 / 다산초당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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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책을 읽으려고 자리를 잡고 앉아서 쉴 새 없이 딴 짓을 하는 자신을 보며 성인 ADHD가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집중력이 없고 산만하다니. 오히려 어렸을 때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이게 다 핸드폰 때문이다. 내가 보내는 한가로운 시간은 아무 의미도 없이 지나가버리는 것 같은데, '집중과 몰입의 시간(55)'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겠다. 아르키메데스가 욕조에서 "유레카"를 외칠 수 있었던 것은 답을 찾기 위해 몰입해온 잠깐의 '빈틈'에서 생각의 전환이 발생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책의 시작에 앞서 게으름과 산만함, 걷는 시간과 여유, 재충전과 환기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건 당신들의 이름 옆에 붙는 수식-교수, 소설가, 시인, 크리에이터 등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가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나약한 생각으로 책 안의 모든 내용을 신포도 보듯이 할 수는 없다. 책에서도 " 어떤 이들은 '유익한 산만함'은 한가한 철학자들이 꿈꾸는 허상이며, 권리가 아닌 특권에 불과하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자크 랑시에르는 '유익한 산만함'을 오직 '소수 특권층'의 전유물이라 여기는 회의론자들의 주장에 강력한 반증을 제시했다. 131"고 나와 같은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한다. 그리고 이 살짝 비뚤어진 시선이 책을 읽어나가며 점차 풀려짐을 느낄 수 있었다. 

 초반 다윈이 말하는 과도한 몰입에 따른 '쾌감상실증(33)'이란 것을 최근 읽은 "프랑켄슈타인"에서도 보았다. 빅토르가 생명을 창조하는 연구에 몰입한 나머지 주변사람들도 챙기지 못하고 감정이 둔화되는 부분이 나온다. " 하지만 나는 꽃이 피거나 나뭇잎이 우거진 광경을 보지 못했다. 예전에는 그런 풍경을 보고 기쁨을 느끼곤 했는데, 이제는 홀린 듯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었다.(69. 프랑켄슈타인, 책세상) " 절망감에 매몰된듯한 빅토르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는데 외골수적인 집중력이 우울감과 고립감을 주었다는 다윈의 사례를 통해 다시금 인물을 한층 더 이해하게 되었다. 

 현대의 우리 역시 원인은 다르지만 증상은 비슷한 중독을 가지고 있다. 2배속과 15~30초 정도의 짧고 직관적인 콘텐츠들을 통해 느끼는 자극에 익숙해져 긴 호흡으로 복합적인 감상을 스스로 이끌어내야 하는 콘텐츠들은 외면 받고 있다. '뇌의 스위치(39)'를 끄지 못하고 계속해서 핸드폰을 통해 이리저리 어플을 뒤적이는 일에 여가를 소모하고 있는 것이다. 수전 손택은 이를 핸드폰에 몰입하는 '주의력 과잉 장애'라 진단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콘텐츠의 시간이 길어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집중력 부족과 끈기없음이 더 두드러진다 여긴다. 이 주의력 결핍 장애는 느긋한 사색을 방해하는 지나친 흥분 상태(40)에 빠지게 만들 뿐이다. 

 가장 매력적으로 느꼈던 것은 책의 중간중간 짧게는 한쪽, 혹은 과감히 양쪽의 모든 면을 들여 실어둔 흑백 사진이었다. 처음 나는 이 사진들이 그리 맥락에 맞지 않아 흐름을 끊고 전체적인 분위기와도 어울리지 않다고 여겼다. 세번째 사진과 마주했을때 쯤 의도적으로 사진이 끼어들어와 집중을 깨고 정적이고 흐릿한 공간을 잠시간 바라보며 머리를 비우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느꼈다. 책을 읽으며 나에겐 집중이 부족하다고 여겼는데 사진이 등장할 때마다 어느 순간 몰입을 방해받고 있단 불편함을 느낀 것이다. 이 작은 장치로 몰입 사이에 틈을 만든 점이 흥미로웠다. 

 " 그런데 인류학적 관점에 따른 산만함에 대한 설명이 아무리 설득력이 있다고 해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이 주의력 결핍을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는 마당에 과도한 집중을 비판한 흄의 주장을 지지하거나 산만함을 옹호할 수 있을까? 112" '창조적 영감에 관하여'를 읽으며 반복해서 해온 행동이 있다. 다리떨기다. 긴 시간동안 다리떨기는 산만함과 복나감을 이유로 핍박 받아온 행동양식이다. 하지만 지금, 다리떨기에 대해 밝혀진 진실은 어떠한가? 스트레스 감소, 운동 효과 심지어 집중력에도 도움이 된다는 갖은 장점이 드러났다. 단점은 보기에 안좋다는 것 뿐. 다리떨기와 흄, 집중과 산만함에 대한 고정관념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가 되었다.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책이다. 언뜻 진부한 내용을 담고 있을 것 같지만 왜 '게으름에 보내는 찬사'라는 문제적 강의명을 달고 등장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됐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시간을 이렇게 써도 괜찮을까 염려되거나, 주의력 결핍 장애인가 걱정되거나, 어린시절부터 부모님 손에 이끌려 바둑이나 서예학원을 등록한 이력이 있거나, 지금 다리를 떨고 있다면 혹은 집중력이 좋은 편이라 한번 몰입하면 주변 상황이나 소리가 차단된다는 사람이라면 '창조적 영감에 관하여'를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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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운 보수 의로운 진보 - 최강 형제가 들려주는 최소한의 정치 교양
최강욱.최강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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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모르는 내용에 대해 읽는다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고민을 좀 했다. 잘 모르기 때문에 읽어야한다는 당연한 말로 읽을 결심을 굳혔다. 스스로로 인하여 우리나라 교육과정의 문제점들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 철학과 정치, 경제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과 이해 부족이다. 요즘 뉴스를 보면서는 이에 더불어 전인교육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함께 체감하는 중이기도 하다. 수험용 교육에만 집중한 결과가 좋은 성적순대로 돈을 잘 버는 직업을 갖고 물질만능주의와 엘리트의식이 심어진 성인을 배출해놓은 우리사회의 모습이다. 물질과 직업을 얻어내는 것이 아닌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의식을 심어주는 교육이 필요했다. 지금껏 세 분야에 대해 잘 모르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수십년 전 교육의 부재로 떠넘겨서야 무엇하겠느냐마는 그랬다면 좋았을텐데,와 이렇게 된다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우리나라에 보수는 없다는 말에 눈이 뜨였던 적이 있다. 우리나라 보수는 보수가 아니라 자기 이익에 더 관심이 많은 친일에 가깝다는 평이었다. 스스로에 대해서는 진보가 살짝 섞인 중도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는 보수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려진 판단이었다. 누군가는 저 말에 인상을 찌푸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바로 저 말이 그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로운 보수 의로운 진보'를 읽게 만든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보수는 대체 어때야할까? 보수가 이로울 수 있나? 다른 나라와 우리나라의 보수는 왜 다른 행보를 보일까? 특정 당을 보수로 볼 수 있을까? 알고 나면 욕을 덜하게 될까? 더하게 될까? 진보의 목소리가 대변하는 가치들은 의로운 것이 맞을까? 이런 문들에 대한 정리를 위해 책을 읽었다. 

 책은 쉽게 쓰여져 있다. 평등과 복지의 내용 중 나태씨(178)와 성실씨(185)처럼 흔히 생각하는 의견 차이의 예시를 들어 이해하기 쉽게 소개한다. 더불어 책은 흥미롭게 쓰여져 있다. LGBTQ에 대한 입장은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220)을 소개하며 흥미를 유도해 재미있는 사족으로 마무리한다. 이 밖에도 낙태와 사형, 빈곤층의 보수성 등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현상들을 다뤄 궁금했던 부분을 채워준다. 평소에도 의문으로 여겼던 "빈자는 왜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256)"의 내용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중산층 이하의 인구수가 더 많아서 당연히 복지를 늘리는 정당후보를 지지하는 파이가 클 것 같지만, 복지를 '퍼주기'로 표현하며 애국심, 경쟁과 경제발전을 내세우는 쪽의 지지율이 어떤 상황에서도 굳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의아했었는데 이런 부분을 다뤄서 흥미롭게 읽었다. 다만 중립만을 호소하는 사람들보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 백 번 천 번 낫다는 부분에선 좀 지나치다 싶었다. 

 대선을 앞두고 우편함에 속속들이 선거공보물이 도착하고 있다. 중요한 시기이니만큼 서로의 입장 차이가 생길만한 예민한 주제이지만, 대선과 그에 관련된 내용이 화두에 오를 것이다. 투표를 통해 권리를 행사해야 함은 물론이고, 어떤 후보에게 투표를 할 것이고 왜 지지하고 있는지 정리된 태도로 입장을 말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정치 교양'으로 도움이 되어줄만한 책이다.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많은 배려가 담긴 책이니 읽어본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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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희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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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와 나란히 누운 어느 날 밤, 때때로 혼자일때 떠올리는 바보같은 생각 같은 걸 두서없이 이야기하다 누가 먼저 갈지는 모르지만 먼저 죽은 사람 유품 중에 남들 모르게 처분해야할 것이 있느냔 질문이 나왔다. 외장하드는 너도 열어볼 생각하지 말고 불태워 줘. 일기장 태워, 아니 그냥 둬도 돼. 지인 중에 누구는 부르지도 마. 누구 알렸는데도 안오면 어떡할까, 계좌라도 보낼까. 하는 대화가 가장 최근의 '죽은 다음'에 대한 논의였다. 책에서 강조했듯이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지만, 앞선 실없는 대화에서 느껴지듯이 그것이 나에게 오리라고는 크게 생각치 않고 살아간다. 그래서 '죽은 다음'을 읽기로 마음 먹는 것은 약간의 고민이 필요했다. 이 내용에 흥미를 느낄 수 있을까? 혹은 겁먹지 않을 수 있을까? 소설 같은 이야기 속의 죽음이 아닌 현실 속의 죽음과 장례를 다루고 있는 내용이라는 점이 막연한 두려움을 주었다. 터부시 되는 행동을 한 것 마냥 어색히 책 표지를 바라보다 띠지에 적힌 소개글(죽음과 장례에 관한 혁신적이고 탁월한 시선이 벼려낸 사유와 기록 - 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에 홀려 궁금함을 이기지 못해 읽기 시작했다.

 '죽은 다음'은 장례를 치르는 과정을 훑어가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느낀 것은 건강검진 센터에서 주는 표를 따라 시력, 채혈, 내시경 같이 정해진 과정을 하나씩 통과해나가는 과정을 떠올리게 했다. 상황과 감정적인 문제를 제외하고 보면 그 둘은 내가 모르는 절차를 전문가들의 지시에 따라 이리저리 퀘스트를 깨듯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 닮아 있었다. 책을 읽기 전에는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떠오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책을 읽고 나니 생각이 비워지고 멍해졌다. 수면내시경을 마지막으로 검진을 끝내고 난 뒤와 비슷한 느낌, 경험이 부족하고 미숙하여 알지 못했던 장례 문화와 절차를 단기간에 속성으로 단단히 채워 넣어 벼락치기로 쪽지시험을 준비한 기분이 들었다. 책을 읽기 전에는 그저 죽음과 그 이후의 정리 과정을 담은 휴먼드라마 같은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읽고보니 장례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담은 생활 정보라 해얄지, 기사를 쓰기 위해 직접 몸을 던지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모 기자의 '체헐리즘'이 떠오르는 현실감 넘치는 취재 내용을 만나게 되었다. 보내는 것과 정리하는 것, 장례의 현실과 실전을 담아 새로웠다. 

 어찌보면 의미보다 절차가 더 강조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책은 그런 뒤바뀜이 반드시 본질의 훼손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 또한 충분히 짚어준다. " 소비자가 된 사별자가 그 순간에 해야 하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다. 울음과 회한 가득한 장례식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사별자가 해야 하는 일이 상품 선택과 문상객 맞이뿐이라는 것도 쉽게 수긍되진 않는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생산품(노동)에서만 소외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애에서 소외되고 있다. 나는 내 죽음에서 소외되고 싶지 않았다. p233" 장례식장에서 슬픔에 빠진 상주를 매번 판단의 순간으로 불러내고, 수많은 빈객들을 맞아야만 하는 상황들은 '우아하지 못할지도(81)' 모르지만 감정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도록 누군가를 깨우고 환기시키는 장치가 되어줄 수는 있겠다. 

 전에 여성이 상주가 되어 장례를 치르는 것의 어려움을 토로한 글을 본 적이 있다. 누군가는 이런 문제에서까지 남녀를 엮어내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자주 겪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전혀 생각지 못했던 '남성' 중심의 문화가 장례에 존재하고 있었다. 내 가족의 장례에 여성이란 이유로 책임과 결정의 권한에서 매번 밀려난다는 생생한 경험담을 읽으며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상을 치르는 와중에 낯설고 경황없이 절차를 잘 모르니 원래 이런 것인가보다 하고 넘긴 것들이 고정관념(가부장제-정상가족 규범이 지배하는 사회 p289)의 틀에서 의심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책에서도 이와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한두장 넘어갈만 하면 여성이 장례와 관련된 직종에서 일을 하며 겪는 고충과 여성이 상을 당해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겪을 어려움이 나온다. " 여자 장례지도사를 찾기도 어렵고, 여자 장례지도사가 되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여자가 무슨"이라는 말부터 들었다. 가릴 것 없이 누구나 만류했다. 68", " 여성이 상주를 획득하는 과정도 경합이지만, 이후 장례식장에서 '상주의 자리'를 올곧이 지키는 것은 투쟁에 가까운 일이다. 장례식장에서 여성 상주를 맡은 이들의 경험을 분석한 오지민은 이들이 "순수한 상주"로 인정받지 못한 경험을 따라간다. 207 " 그래도 요즘은 전보다는 인식이 나아졌다, 달라지고 있다는 말이 붙지만 관례라는 형식 아래 뿌리박힌 차별과 허례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을 것이다. 

 " 당신의 장례는 어떠하길 바라나요? 언제가 됐든 장례인들과의 대화는 이 질문으로 맺었다. 인생의 마지막에 품는 기대와 바람, 그건 장래 희망을 묻는 일과 비슷했다. 바라는 대로 이뤄질지는 모르는 일. 돌아보면 좀 허망한 그런 희망. 타인의 '장례 희망'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따스하면서도 바스락거렸다. 277" '장례 희망'이란 말을 책을 읽으며 처음 봤지만 금방 원래 알던 표현처럼 익숙하게 이해되었다. 살면서 미래를 꿈꾸고 준비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 미래에 반드시 포함된 죽음도 계획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장래 희망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많은 것처럼, 장례 역시 망자가 품은 희망이 산 사람들의 몫으로 매듭지어지면서 뜻대로만은 되지 않는 점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장례 희망이란 표현이 잘 들어맞는다. 책을 읽고 난 뒤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더니, 지금에 와서야 자신이 보인다. 내가 언젠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을 덮어두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아직도 굳이 덮어둔 것을 펼쳐보고 싶지 않은 기분이지만 '유한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인지하고 나면, 오늘이 아닌 내일을 생각하느라 하지 못한 일이 떠오른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생각하느라 지금껏 하지 못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195)'는 말처럼 어떤 죽음이 될 것인가를 통해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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