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나는, 아주 예쁘게 웃었다 - 이곳이 싫어 떠난 여행에서 어디든 괜찮다고 깨달은 순간의 기록
봉현 지음 / 김영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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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2병을 중학교 2학년 때에 앓는 것도 복이라는 말을 보았다. 웃긴 말이고 웃긴 명칭이지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는 간다. '그럼에도 나는, 아주 예쁘게 웃었다'의 저자가 이십대에 한국을 떠나 독일 파리 중동 산티아고 인도 등을 머물며 앓았던 외로움과 고독을 나는 그보다 십 년 정도는 늦게 앓았다. 이제는 누구나 그런 때가 있구나, 하지만 괴로울 땐 이 마음이 왜 이런지 몰랐다. 어디에도 말하지 못하는 조용한 시간이 흘러갔던 날들이 나에게도 있었다. 이십대 때에는 사람과 사랑 사이에 취해서 빈 공간을 바라볼 줄도 몰랐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반짝이고 정신없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자신만 남았는데, 그게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고 초라해보였다. 그렇게 대단했던 것도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니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푸르를 때 빛나고 앓았어야 했던 청춘을 뒤늦게 앓았던 것 같다. 청춘이란 말 싫다(353)고 했지만 그 지난하고 치열한 걸음이 청춘일 수 밖에. 

씁쓰레한 맛을 삼키며 책을 읽었다. '만약'이란 단어를 막연히 그렸다. 그러다 " 환갑이 되면 연애하고 싶고 마흔이 되면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타고 세계여행을 하고 싶다는 김광석 아저씨의 말, 삶에서 꿈꾸는 시간이 있기 마련이니 인생에서 2년 정도는 길지 않은 세월인 것 같다고, 그 정도는 마음 놓고 놀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렇게 말하는 그의 말에 눈물이 날 만큼 위로를 받는다. p190" 는 문장에서 멈췄다. 그래, 맞다. 인생 긴데 늦은만큼 더 살면 흐름이 좀 더뎠을 뿐 그리 늦은 것도 아닐지도, 싶었다. 내가 그렇게 늦었나 참 부족했다 아쉬웠던 마음이, 언제 무엇을 하든 내가 그때 할 수 있는 만큼을 하면서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아졌다. " 시기와 나이는 중요치 않다. 누구나 자신만의 치열했던 순간과 가장 반짝이던 시절이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있는 그 한 시절은 그 누구도, 그 어떤 단어로도 단언할 수 없는 제각각의 인생이라 생각한다. p353" 

" 주위에는 외로움을 많이 타면서도 이미 너무 많은 상처를 입어, 자신이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투성이였다. 우리는 함께 있는 듯했지만, 헤어지고 나면 허전함에 잠 못 들어 했다. p9" 처음 책을 펼쳤을 때부터 떠오르는 노래가 있었다. '우리는 서로가 외로운 사람들 어쩌다 어렵게 만나면 헤어지기 싫어 혼자 있기 싫어서 우린 사랑을 하네 거리를 거닐고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얘기들을 나누다가 집에 돌아와 혼자 있으면 밀려오는 외로운 파도 (외로운 사람들/이정선)' 책을 읽을 때마다 오래된 노래를 종종 듣곤 했다. 가사를 곱씹다가, 책장 어딘가를 더듬어 헤매다가 한참 시간을 보냈다. " 나만 외로운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외롭게 삶을 살고 있었다. 사랑하며 살아야 했다. 외로움도 슬픔도 견뎌내야 했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p246" 외롭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 그조차도 할 수 없어서 그냥 나도 너도 그렇겠구나, 언젠가 만나는 날 그만큼 더 반가워하고 사랑해야지 하며 보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나이를 먹을수록 밝고 가벼운 것들만 보고 싶어졌다. 안그래도 사는게 갈수록 무겁고 어려우니 기분을 전환할 수 있는 것들이 필요했다. 결말이 슬픈 것들은 손에 대지도 않으려 했는데, '그럼에도 나는, 아주 예쁘게 웃었다'의 어조도 그리 밝지 않아서 읽는 동안 가라앉고 있는가 싶었다. 그런데 그게 생각만큼 나쁘지 않았다. 계절이 봄으로 가는 동안 수런했던 마음을 가지런히 빗어내리는 시간이 되어주었다. 게다가 결말도 긍정적이었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거야(베르세르크)' 처럼 시작했다가 행복은 내 안에 있는거야, 하는 동화 파랑새 같은 따뜻함으로 매듭지어졌다. 이 과정을 함께하는 여정 동안 소박하면서 섬세한 그림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더욱 기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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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자의 숲속 일기 - 메릴랜드 숲에서 만난 열두 달 식물 이야기
신혜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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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쇄살식마인 나는 식물을 키우는 것에서 손을 떼기로 마음 먹었다. 마음은 사실 수년전에 먹었지만 그 와중에도 식물을 주겠다는 사람이나, 버려질 위기에 처한 식물을 데려오는 등 몇번의 연이 있어서 들였으나 작년 봄 즈음해서 꽤 오래 간신히 살려두었던 식물들과도 작별하고 정말 이제 더는 집안에 살아있는 식물은 없다. 길가다 보는 예쁜 꽃들만 예쁘다,하고 즐길 뿐이다. 그런데 지난주부터 마일로 작가의 '크레이지 가드너'를 보기 시작했다. 식덕인 마일로 작가의 '크레이지 가드너'를 보면 식물은 꺾어도 의지는 꺾이지 않는 애정과 노력이 보인다. 더불어 '식물학자의 숲속 일기'도 읽기 시작했다. 저자가 그려낸 섬세하고 아름다운 식물들을 보고 있자면 매혹된다. 갑자기 식물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책 안에서는 나는 종종 당황스러웠다. 나에겐 지나치게 감성적인 시선이 어색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분명 어딘가 상처받고 치유를 위해 애쓰는 저자의 모습이 느껴지는데 그게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선 전해진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일년간 외국의 연구소에 머물면서 지독한 향수에 고생했던 얘기도 감정적 교류와 유대를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구나 싶었다. 가장 멀게 다가왔던 것은 눈 내린 풍경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 부분이었다. " 도시에 살 때 사람들이 눈 덮인 풍경이 깨끗하고 아름답다고 얘기하면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그건 비겁한 풍경이라 생각했다. 지저분하고 아름답지 못한 것이 눈 밑에 그대로 있으니 그건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두껍게 쌓인 눈을 뚫고 뾰족뾰족 튀어나와 있는 풀잎들을 발견했을 땐 '거봐, 어떤 건 절대 덮을 수 없어'라는 생각이 더해졌다. p23" 세상의 모든 것을 그대로 감싸 더 고요하고 아름답다고 여기는 편이라 사람들은 정말 다 다른 생각을 품고 사는구나 싶었다. 다른 사람들은 눈 덮인 풍경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비슷한 시선으로 " 지금 이 순간에도 원예품종은 개발되고 있다. 우리가 꽃 가게에서 마주치는 난초 대부분이 그렇다. 난초뿐만이 아니라 판매되는 대다수 꽃이 그렇다. 그래서 나는 꽃집에서 꽃을 사서 그리길 꺼린다. 원예품종은 야생식물을 연구하고 기록하는 식물학자에게 식물종이라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야생난초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계속 개발되는 품종과 사람들의 열렬한 난초 사랑의 본질이 무엇일까 생각한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꽃을 사랑하며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 p45" 는 문장을 발견했다. 처음엔 그런 구분에 지나치게 엄격하거나 좀 냉정한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문득 얼마 전 길을 걷다 구경한 펫샵이 생각났다. 판매를 위해 개량되고 강제로 교배되어 더 귀엽고 유행하는 어린 개체를 만들어내는 시장이 거기에 존재하고 있었다. 동물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은 이 산업에 반대한다. 태어난 어린 동물들도, 개발되어 피어난 원예품종들도 아무 잘못이 없이 참 보기 좋고 귀하지만 그 과정과 목적에서 본질을 찾게 되는 것은 저자도 그 자체를 정말 사랑하기 때문이구나 이해되었다. 

 이해가 되니 조금씩 이야기가 전달됐다. 살구를 좋아한다(105)는 공통점도 발견하고, 추수감사절 칠면조 요리를 맘에 들어하는 점(196), 인간과 다른 생물 사이의 권력 불균형에 대한 시선(193)도 비슷했다. 처음 어렴풋이 짐작했던 내면의 괴로움은 계절이 다 한 인연들을 정리하면서 비롯된 것(206)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 헤어져야 함을 잘 알면서도 그것을 붙잡고 있는 건 나의 욕심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상대방이 가진 무언가를 놓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존중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상대방을 탓하기 쉽지만 사실 그가 나를 사랑할 이유는 없다. 사랑했지만 이제는 사랑하지 않을 수 있고 처음부터 사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가 무심하다고 느껴 상처받고 있을 때 그는 내게 상처를 주는지조차 모를 수 있다. 그런 만남이라면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헤어져야 한다. 건강한 만남도 소중하지만 건강한 헤어짐도 소중하다. p208" 이런 맺음에 이르기까지 속안에 가득 찬 것들을 덜어내 비우고 정리하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먹먹했다.  

 책을 읽다보니 나무는 잘 죽지 않아 나무를 죽이는 방법을 소개(64)하기도 한다는데, 지난 산불로 그렇게 잘 죽지 않을 나무들이 너무나 많이 불에 타버렸음이 생각나 더욱 안타까웠다. 사실 그 전부터 차를 타고 다른 지역을 다녀올 때 산에 죽은 나무들이 눈에 띌 때가 전보다 늘어난 것 같아 환경 문제 때문일까 혼자 염려했었다. 얼마 전 '아름답고 위태로운 천년의 거인들'이라는 나무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도로 확장이나 재건축 등을 이유로 가로수들을 다 베어버려 아쉬웠단 얘기를 한 적도 있었다. 잘 죽지 않아 죽이는 것 조차 오래 시간을 들여야 하는 자연 환경이 결국은 사람 때문에 이렇게 쉽게 파괴되는 것이 씁쓸했다. 제왕나비를 위해 감자 몇 알 대신 밀크위드의 덤불을 남겨두는 것처럼(183) 위태로운 자연을 위해 우리의 욕심에서 항상 뭔가를 더 남기고 비워두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식물학자의 숲속 일기' 덕분에 요즘처럼 벚꽃이 만개하여 잔바람에도 빗방울에도 금방 떨어져내리는 꽃잎이 너무 성급한 것 같아 아쉬울 때면, '화려한 꽃잎들이 떨어져 꽃이 모두 사라진 듯 보이지만 나무엔 어린 열매들이 남겨져 있다고. p60' 떠올릴 수 있어서 기쁘다. 책의 내용만큼이나 그림이 예뻐서 볼 때마다 시선을 사로잡았는데 그림이 더 많았어도 좋았겠다. 사실 그림과 짧은 이야기를 엮은 컬러링북을 내셔도 좋을 것 같단 사심이 생겼다. 청초한 표지도 참 마음에 들어서 더는 식물을 들여 생명을 죽이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탓에 심심해진 책장에 화분 대신 책의 표지가 잘 보이도록 놓아두기로 했다. 저자가 식물학자이면서 그림을 그리고 또 이렇듯 섬세하고 다정한 마음으로 주변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어서 책을 읽는 시간 동안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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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폴라 일지
김금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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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폴라 일지'를 두고 두 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하나는 진짜 남극에 갔다고? 다른 하나는 작가 김금희가 맞나? 다소 싱거운 이 질문의 답은 둘 다 맞다. 였다. 그럼에도 의문을 가졌던 것은 뭔가 쉽게 연상하기 어려운 조합이었기 때문이다. 펭귄이나 북극곰, 고래, 끝없는 눈과 빙산 혹은 오로라 같은 이미지로만 알고 있는 극지방에 대한 로망이 나에게도 있었다. 알고보니 남극과 북극으로 나뉜 모든 로망의 혼합이었지만 그래도 세종기지의 대원을 모집하는 글을 몇번이고 훔쳐보며 이런저런 궁리를 해보기도 했다. 가진 재주라곤 평범하기 뿐이라 유일한 방법은 조리 분야 지원 뿐이었는데 자격증과 경력이 요구되는 높은 난이도에 좌절됐다. 그런데 그런 남극엘 갔다니 대단하고 부러웠다.

 처음 한동안은 이 모든 준비과정과 낯선 세상에서 맞이한 어색함, 20년차 월동대장에게 남극생활 2일차에 조언을 건네는 등의 실수들 마저 자랑처럼 느껴졌다. 이런 점들이 어려웠어 하고 말할 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원하던 곳에 도달했다는 작가의 기쁨이 숨겨지지 않고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2인1조로 다닐 것, 비펭귄인간 하며 지칭하는 말들도 뉴요커의 'the city' 발언처럼 어쩐지 그들만의 호칭처럼 여겨졌다. 질투에 사로잡힌 사람의 마음을 녹인 것은 중간 부분이 자꾸 벌어지길레 펼쳐보니 들어있던 엽서였다. 펭귄은 귀여웠고, 그 뒤로 일렁이는 바다의 빛은 조금 쓸쓸했는데 책 안의 긴 이야기들보다 엽서에 담긴 짧은 글귀 안에서 이 경험을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전해졌다.

 그 뒤로는 괜한 부러움은 접어두고 그저 흥미롭게 읽어나갔다. 작가는 낯을 가리고 스몰토크를 어려워한다고 몇번이나 강조했지만 나였다면 아마 이렇게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만큼 적극적이었다. 식생팀에 참여하거나 '안'을 따라 옆새우 채취를 나서는 등 MBTI가 E세요? 싶은 활발함이었다. "드디어 결심하셨군요!"(111) 고장난 벽시계의 건전지를 갈아끼우듯 눈앞에 놓인 일을 어찌나 씩씩하게 해내던지 이런 행동력이 있었기 때문에 남극까지 갈 수 있었구나 싶어졌다. 힘이 들어 어떤 사람들은 굳이 가지 않는다는 까마득한 산을 올라 보기도하고 보기 어렵다던 고래까지 보고 온 작가가 자신의 전부인 문학*(p255)을 주제로 한 북토크를 도전해보지 않고 돌아온 것은 조금 아쉬웠다. *문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토록 강렬하고 열정적인 답이라니.   

 책을 다 읽은 건 집이 남극처럼 추운날이었다. 한동안 조금씩 천천히 남극의 이야기를 읽어오다 갑자기 현실로 내쳐진 듯한 끝맺음이 어떨떨했다. 사태를 삶아 썰어넣은 국물에 마른 찬밥과 가래떡을 살짝 말려 직접 썰어두었던 떡국떡을 몇 줌 넣어 떡국도 국밥도 아닌 것을 끓여 훌훌 먹고는 책의 마지막 몇 장을 읽다가 얼마 있지 않아 몸이 굳고 어깨가 아파와 전기장판 안으로 도망쳤다. 현실의 차가움에 굳어 있다가 '완전한 사육'처럼 느껴졌다는 저녁 6시의 어린이 목소리를 떠올렸다. "벌써 저녁 시간이 되었어요. 하는 일 멈추고 식사하러 오세요. 밥은 먹고 지내요" (71) 낭랑한 목소리에 어딘지 위화감이 드는 어조 때문에 나는 그게 '오징어게임'의 안내방송처럼 생각됐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다정한 안부처럼 느껴졌다. 어떤 일이 있든 '밥은 먹고 지내요'

 책 안에는 온통 머나먼 곳의 이야기로 가득한데 지역번호가 032로 되어 있어서일까 특별함은 금새 사위어버리고 말았다. 오히려 비일상 가운데 에필로그로 짧게 정리된 일상이 더욱 강렬하게 남았다. 꿈은 나를 나아가게 하지만 언제고 나를 가장 강하게 땅에 붙들어두는 것은 주변의 모든 현실들이다. 그래서 '나의 폴라 일지'가 더 인상깊게 다가왔다. 남극에서 마주한 자연과 경이 같은 것이 아니라 생활과 가족이 삶의 어떤 순간에, 심지어 그토록 바라왔던 꿈같은 때에도 배제되지 않은 채 얽혀 인생이란 것의 의미를 곱씹게 해주는 것 같아서. 지구의 모든 펭귄과 비펭귄인간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추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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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한 시선 - 13개국 31개 도시 여행에서 만난 일상의 장면들
이지은 지음 / 꾸미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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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고, 나도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책 때문은 아니고 전부터 계획된 일정이 있었다. 여행이 이미 정해진 시간에 갑작스럽게 책이 끼어들었다. 책을 가져가도 될까 망설인 것이 무색하게 손바닥만한 그보다 조금 작고 더 얇아 가방의 어느 주머니 하나에 넣어도 괜찮을 크기의 책이 도착했다. 예전에는 가끔 여행가방에 책을 몇 권 챙겨가곤 했는데 책이 상하는게 싫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낭만은 사라졌다. 그렇지만 우리 '오늘처럼 현실이 싫었던 날은, 낭만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 세사르 바예호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

어느새 중년인의 시간을 걷고 있는 나는 서울의 풍경을 떠올릴 때 남산타워와 63빌딩 그리고 지하철 2호선과 4호선을 꼽는다. 책에서는 'N서울타워(p11)'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아직 외우지 못한 낯선 이름을 마주할 때면 어색해지곤 한다. 차를 타고 서울 어딘가를 지나다 멀리서도 보이는 롯데타워를 보면서 미세먼지를 가늠할 때도 있지만 그 풍경은 어딘가 신기할 뿐, 내가 여기에 있다는 실존 증명같은 안심이 되어주진 않는다. 저자도 같은 지점을 짚고 있어 매우 공감했다. 책은 짧지만 내 안에 넘쳐나는 것들이 있었다. 감성적인 사진과 글귀가 판에 박힌듯한 인상을 주었는데 오히려 빠져들었다. 좋았다.

생의 절반 이상을 살았던 옛 집 근처에 갈 때면 매번 바뀌는 풍경에 섭섭했다. 내가 이십 대 중반이 될 때까지 낡아만 가던 오랜 풍경이 어느날부터 갑자기 한뭉텅이씩 지워지고 새로 채워져갔다. 이십년이 넘게 늘 같은 풍경을 봐오면서 평생 그 동네가 변하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갈 때마다 조금씩 달라져 매번 졸업하는 기분으로 먹먹했다. 한때는 그 안에서 모든 것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는 것이 무거웠는데 내가 도망치듯 떠난 자리에서 그대로 있을거라 생각했던 것들이 사라지는 걸 보며 시간이 멈춘 것 같았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단 생각을 한다. 어쩔 수 없이 사진을 찍으며 '사라지지마'하고.

" 여행의 순간, 셔터를 누른 이유가 있었겠지요. (p106) "
어떤 시간은 그 순간을 사진으로 남길지 혹은 그저 눈으로 바라볼 것인지 갈등하게 만든다. 그 위화감은 한강으로 불꽃놀이를 보러갔을때 솟아났다. 불꽃을 찍으려는 핸드폰 카메라에 수많은 사람들의 화면이 담겼다. 불꽃은 눈 앞에서 터지고 있는데 시선은 핸드폰 화면에 두고 있다니.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그대로 다 담아내지 못하는 렌즈를 통해 순간을 만끽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었다. 그래서 한동안 그냥 지금은 찍지말자, 생각했었다. 왜 과거형이 되었냐면 이제는 사진을 남기지 않는 순간들은 금새 잊혀진다. 찍어야 기록이 되고 기록은 추억이 되는 중년의 시간 덕분이다. 이제는 다시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사진을 찍고싶을만큼 달콤한 시간들이 그렇게 남겨지는 이유도 있어야 하니까.

책을 읽으며 그 너머에 있는 저자와 좀 더 뭔가를 나누고 싶단 생각을 했다. 당신이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사람 사는 것이 다 비슷하네요, 요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순간을 기록하는지 안부를 묻고 싶었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뭘 해도 아까운 비일상의 시간을 독서로 보내며 한껏 쉬어가려 했는데 책을 읽는 건 순식간이었다. 기록을 남기며 어떤 부분이 좋았더라 다시 뒤적이는 시간이 그 배로 길어졌다. 그때 읽은 것과 지금 읽은 것 또한 '느껴지는 정취가 사뭇 달랐다'. 일상에 여백이 필요한 순간 가볍게 들어 읽기 좋겠다. 생각이 많은 일상에 어울리는 책이었다.

" 같은 장소에 와도
누군가와 함께인지, 혼자 걷는지에 따라
보이는 정취가 사뭇 달라진다. (p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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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여름에게 에세이&
최지은 지음 / 창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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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게 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이토록 지독한 여름은 다 무엇일까요. 줄곧 그 여름을 나 혼자 묻어두고, 꺼내보고, 또 한겹 덮어두는 동안, 이 무서운 이야기는 저에게 그냥 사랑이었습니다. (p18)"


 조금 성급할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낮의 뜨거운 햇볕은 이미 여름이었다. 최지은 작가의 에세이 '우리의 여름에게' 표지를 보면서 마냥 싱그러운 여름을 떠올렸다. 이를테면 수박, 수영장, 아이스크림, 친구들, 매미의 울음소리 같은 것들을. 까마귀처럼 반짝이는 것들을 좋아하는 탓에 나뭇잎에 조금씩 박혀 빛나는 표지의 홀로그램을 일부러 이리저리 돌려보며 표지만 며칠을 봤다. 바람이 시원하고 커피가 맛있는 날, 좋아하는 간식을 옆에 두고 마치 피서처럼 읽어야지 마음을 먹었었다. 


 세상에, 첫 이야기를 다 읽기도 전에 책을 덮어버렸다. 이 이야기를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할머니와 함께 자란 아이' 경력 때문인지 나는 할머니가 들어간 모든 것들에 조금씩 약하다. 게다가 요즘은 중년에 접어든 나이 때문인지 전보다 감정의 폭이 들쑥날쑥 눈물도 많아졌다. 다시 책을 펼쳐 읽으려니 마음이 괴로워 고통스러워 화가 났다. 졸리다며 방으로 들어가 누워있다가 그냥 잠이나 자버렸다. 그러고도 한동안 악몽을 꿨다. 내가 가지고 있던 죄책감, 부채, 의심, 불안, 불만, 두려움같은 것들이 혼재되어 있는 꿈이었다. 그것들이 결국 내 안에 있다는 것에 깨고나서도 괴로운 꿈이었다.


 " 망가질까봐 다가갈 수 없는 사랑은 하고 싶지 않다. 망가지는 게 꼭 나쁜 건 아니라는 걸 알 것 같기 때문이다. 무엇을 망가뜨리고, 무엇을 수선하고, 무엇을 다시 세우고, 무엇을 멀리 치워두어야 하는지 이제 겨우 알 것 같기 때문이다. (p75)"


 복잡한 속마음을 그대로 아는 것처럼 느리게 집어든 책에서 눈에 띈 문장이다. 내가 나에게 매몰되어 있던 동안 피하고 덮어두기에 급급했던 '타인과의 거리감'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이렇게 성숙하고 유연한 대처를 할 수 있을까, 망가지는 게 꼭 나쁜 것은 아닐 수 있을까. 관계가 망가지고 나면 사람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여러 생각이 들면서도 나는 언제쯤 망가져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될까 기대가 되기도 했다. 


 잘 고르고 고른 글들로 솔직하게 쓴 에세이인데 읽는 나에게 준비가 필요했던 책이다. 무섭고 잔인한 이야기보다 애틋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가 더 보기 어렵다. 가끔 인터넷에서 귀여운 캐릭터가 나오는 만화인줄 알고 봤다가 순식간에 마음이 무거워졌던 만화가 있다. '틴틴팅클'이라는 캐릭터들이 나오는 만화인데, '우리의 여름에게'를 읽으면서 인물의 배경이 같지는 않지만 할머니와 애틋한 '콩물이'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틴틴이나 팅클이의 이야기보다 콩물이의 이야기가 더 많이 기억에 남는데, 같은 시선으로 '우리의 여름에게'를 읽은 사람들에게도 추천해주고 싶다. 


 조금은 가볍게 나의 여름을 하나 덧붙여 이야기하자면, " 당신의 여름 과일이 궁금합니다 (p113)" 를 통해서 떠오른 일이다. 오이를 싫어하지는 않는데 오이맛이 나는 과일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달거나 맛이 진하지 않은 과일 종류들이라고 해야될까. 참외나 수박, 토마토 같은 것들을 오래도록 먹지 않았는데 이들이 주로 여름을 대표하기 때문에 오래도록 나에겐 여름 과일이 없었다. 여름에 남의 집에 초대를 받거나 모임 자리에 갔을 때 과일을 대접해온다면 늘 눈치를 보게 됐었다.


 그동안 편식이 심한 사람, 신기한 사람, 철이 덜 든 사람 보듯한 시선과 이건 진짜 맛있으니까 한번만 먹어보라고 억지로 권하는 사람들을 애써 차단하느라 여름과 과일이 더 싫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건강을 위해 일부러 토마토를 먹는 연습을 해오면서 작년엔 수박도 연습을 시작해 이제 토마토와 수박을 먹는데 성공했다. 남들이 보면 그것도 연습이 필요한가 싶을 이야기지만 싫어하는 것을 먹을 수 있도록 노력해서 얻어낸 성과라 매번 뿌듯하고 먹을때마다 새롭다. 그리고 여름이 조금 더 즐거워졌다. 이해의 폭이 늘어나 세상이 조금 더 넓어진 기분이다.


 제멋대로 내 삶을 이어붙여가며 책을 읽은 탓에 " 글쓰기는 나의 이야기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수신될 수 있다는 걸 새삼스럽게 배우는 일이기도 했다. 내가 무엇을 놓친 것일까,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긴 산책을 이어가야 했다. 첫 시집을 읽은 몇몇 독자들의 리뷰를 읽으며 마음이 쿵, 내려앉을 때도 있었다. (p167)" 는 부분을 읽으며 제풀에 찔리기도 했다. 처음 읽으면서 마음이 어지러웠다고 했던 말들이 저자의 마음을 쿵, 내려앉히지 않길 바라면서 올해의 뜨거운 여름은 선명하고 싱그럽게 지나보내길 바라는 마음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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