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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무죄 세계의 사랑법 - 범죄 너머에서 발견한 인간에 대한 낙관
정명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7월
평점 :
" 공소장의 세계에서 범죄사실의 다정한 도입부가 끝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없다. 관계에서 비롯되는 범죄들의 끝은 주로 관계의 파멸로 마무리된다. 그래서 첫 문장의 관계가 돈독할수록, 범죄는 잔혹하고 애잔하다. 17"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 범죄수사와 관련된 내용을 담은 것들은 항상 인기가 많다. 어떤 사건에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경각심도 가지게 하며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며 사회 안전망에 대한 신뢰를 쌓고 죄를 지은 사람은 댓가를 치른다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한다. 무엇보다 매체에서 접하는 사건들은 자극적이다. '유무죄 세계의 사랑법'에도 그런 요소들이 담겨있다. 거기에 인간미와 삶에 대한 사유를 한꼬집 더 첨가한 시선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알고싶다] [용감한 형사들] [궁금한 이야기] [사건반장] 같은 프로그램을 자주 챙겨보는 사람이라면 텔레비전을 왜 보나, '유무죄 세계의 사랑법' 읽으면 되는데.
저자의 의도가 어느 부분에 더 중심이 맞춰져 있든, 읽으면서 솔직히 좀 웃겼다. [싸움의 기술 54] 같은 편에서 왜 남자들은 싸울 때 웃통을 벗는가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이 이루어지거나, 주민등록이 3으로 시작하는 피고인의 사건에 운을 떼면서 뒷자리 아니고 앞자리다. 42"하고 강조하는 부분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진짜 이상하고 상식에 맞지 않아 웃기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이런 사람들을 실제로 마주하면 웃기는 것을 넘어 공포스럽겠지만. 웃음이 지나는 길에는 눈물도 같이 흐른다. 얼마의 돈을 횡령했는가는 답하지 않아도 두부 만드는 과정은 설명하는 피의자(76)를 만나고, 우연히 이끌린 한 사건을 외면하거나 덮지 않고 10년을 고스란히 쏟아부어 마주한 선배 검사의 '쌩고생담'(129)을 소개한다. 웃다가 놀라다 바쁘게 읽다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따뜻해진다.
" 공판검사는 세상의 끝으로 밀려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맞은편에 서 있다. 거기에서 항변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본다. 세상의 질서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다고 기소된 사람들의 자백하거나 후회하거나 항변하거나 회피하는 얼굴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층층의 지층 속에서 지구의 역사를 읽는 지질학자처럼 인간의 사랑과 욕망과 감정의 역사들을 읽는다. 120"
1부의 내용이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2부는 좀 더 감성적인 터치가 들어간다. 1부에서 느꼈던 자극이 줄어들어 좀 심심해지나 싶을 때 '덜 녹아든 소금 입자가 팍 터지는 슈팅스타 볶음밥(179)'처럼 진솔한 삶의 매력이 마음에 울림을 준다. 3부는 저자의 삶에서 주변으로 시선이 이동한다. 읽다보면 상주에는 다 이렇게 사람 마음을 들었다놓는 '심쿵요정(233)'들만 있나 싶어 상주에 가보고 싶어진다. 10월 말이면 요양원에 누워있던 노인마저 동원되어 곶감 만드는 일에 진심(242)이 되고, 사건 이름 마저도 어떻게 '노루궁뎅이버섯 사기 사건(253)'인, 상주 홍보나 다름없는 내용을 읽다보면 언젠가 중앙시장에 가서 남천식당 우거지국밥을 먹으리라, 후식으로는 징검다리를 건너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겠노라고 특별히 밑줄을 그어두게 된다. 해외여행 너무 먼데 상주엘 가야지, 가서 긴 천을 따라 걸으며 곶감 맛을 봐야지 다짐해본다.
검사라는 직업이라고 하면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천하무적으로 사건을 해결하거나 악의 세력과 결탁하여 타락하는 뭔가 보통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장화를 새로 사면 전문가인 엄마의 평을 기다리기는 애송이 구매자(278)이기도 하고, '암흑 같은 상사(163)' 때문에 할말은 많지만 하지 않기도 하는, 후배 앞에서 '비주류(168)'라서 쪽팔리기도 한, 춤에 너무 진심(197)이라 읽는 사람이 어쩐지 민망해지는, 회식 자리에서 술 따르느냐 마느냐로 무려 2부에 걸친 고민(그 시절, 우리가 술잔에 담았던 것들1,2)을 하는 어디서 본 것 같은 비슷한 시간을 보내는구나 싶기도 했다. 다만 하나 궁금한 것은 저자에게 고등어란 무엇인가. 고등어 삼촌(61)부터 진술을 고등어 뒤집듯(102)할 때, 고등어 대신 문어가 등장했어야 더 맞지 않겠는가. 그랬더라면 문어론이 존재론적 반론에 부딪쳤던 과거(151)도 위로가 되었을텐데 싶었다!
" 인간의 법정이 내어줄 수 있는 답은 유죄 아니면 무죄이지만, 그것으로는 다 담지 못하는 거대한 생이 있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자주 좌절한다. 122"
날이 더워 차가운 물을 틀어두고 얼굴을 닦다 잠시 멈췄다. 수도의 방향을 가장 차가운 방향으로 돌려둔 것이 무색하게 물은 차갑다기 보다 시원했다. 겨울에 틀어두었던 차가운 물을 떠올려보면 너무도 다르다. 같은 물을 계절에 따라 다르게 느끼는 것인지, 어떤 차가움은 주체에 따라 다르게 여겨지는 것인지. 마침 읽고 있던 '유무죄 세계의 사랑법'을 생각했다. 어떤 사건도 이 물처럼 상황이나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도 있을 것이고, 차가우리라 예상했던 물이 그렇지 못했던 것처럼 생각과는 다를 수도 있을테다. 이 차가움을 내 예상보다 더하거나 덜하다고 속단하거나 불평하지 않는 사람으로 계절을 보내야겠단 생각을 했다. 내 나름의 사랑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