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골동품점
범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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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밌겠다! 읽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든 생각이다. 그리고 누가 드라마나 영화로 안 만들어주려나 하는 바람이 딸려왔다. 가급적이면 드라마로. 넷플릭*가 이 책 읽어봤으면 좋겠다. 영화로는 이래저래 덜어내는 분량이 생길 것 같아 아까우니까. 옴니버스 구성이라 얼마 전에 봤던 일본 영화 '이상한 과자 가게 전천당'이 떠올랐다. 유치할 것이라 예상하고 갔다가 생각보다 몰입도 잘되고 재밌게 봤던 기억이 있다. '호랑골동품점'은 그보다 더 쌉싸름한 매력을 가지고 있어 영상화 된다면 더 다양한 연령층에게 두루 사랑받을 수 있을 것 같다. 50만이라는 흥행을 거둔 '퇴마록'을 떠올려보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도 좋겠다. 

 생각해보니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들이 얽힌 기묘한 이야기를 엮은 것들이 좀 된다. 전천당이나 퇴마록도 얘기했지만 좀 더 비슷한 분위기로는 백귀야행(이마 이치코)이나 펫숍 오브 호러스(아키노 마츠리)같은 만화책이 떠오른다. 둘 다 재밌게 본 기억이 나는 걸 보니 처음 '호랑골동품점'을 보고 한눈에 마음에 들어했던 것이 이해된다. 이런 내용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호랑골동품점'이 조금 더 괴담 분위기라 무섭다.  

 처음 책을 꺼내든 건 밤이었는데 신나게 책을 읽다가 금방 멈추고 앞으로는 낮에만 읽기로 마음 먹었다. 재밌어서 다음장으로 넘어가는 속도가 느리지 않은데도 읽다가 멈추게 되는 바람에 읽는데 조금 오래 걸렸다. 무서웠다. 특히 '3. 1977년, 체신1호 벽괘형 공중전화기'. 그 전에도 뭐가 보이고 들리는 내용이 나와서 낮에 읽어야겠다, 했는데 이때부터는 핸드폰 전화오는 것도 신경쓰일 것 같아서 낮에 사람 많은 카페같은 곳에 가서 읽어야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요즘은 다들 핸드폰 써서 공중전화 찾아보기 어렵긴하지만 길을 가다 공중전화를 보면 괜히 무서울 것 같다. 

 무섭긴한데 마냥 무섭기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자극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무게를 두었다. 그래서 읽다보면 씁쓸한 하지만 아리고 그리운 맛이 남는다. 책을 읽다가 어느날은 그리운 사람이 그리워 앓았다. 속에 묻어두었던 세 번 부르고 싶은 이름을 떠올려본다. 묻고 싶은 것은 없어도 듣고 싶은 목소리는 있어서. 거울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눈썹 대신 머리카락에라도 흰머리가 섞여있나 한 번 훑어보고는 오래된 것들을 사랑하지 말아야지, 지금이 아닌 것들은 꺼내보지 말아야지 한다. 어쩔 수 없는 부재를 그러려니 하고 살다가도 가끔은 사무친다. 그런 것들이 '호랑골동품점'에 있었다. 

 책의 맨 마지막 작가의 말에 치앙마이의 골동품점에서 언젠가 골동품점을 배경으로 글을 쓰고 싶단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낡은 것들을 보며 값이 아니라 이야기를 짐작하는 사람이 작가가 될 수 있구나 싶었다. 주변을 둘러싼 물건들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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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공격 주의보 - 출세보다 상처받지 않는 것이 목표가 된 이유
남대희 지음 / 김영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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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나온지 10년이 되어가는 영화 검사외전(2016)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선배님, 저 휘문고 95기입니다."
"어 그래? 이거 직속이네? 담임 선생님이 누구?"
"독..사..?"
"아! 그 양반 아직?"
사기꾼인 강동원이 박성웅에게 접근하기 위해 학연을 이용하는 것이다. 독설로 유명한 한 방송인은 같은 지역 출신임을 밝히는 후배 연예인들에게는 유독 너그러운 반응을 해주기로 소문 나있다. '미세공격 주의보'는 그저 재미있는 일화에 지나지 않을 이 모습들이 사실은 다른 사람에 대한 낙인과 경계가 됨을 환기시키고 있다. 
" 오랫동안 단일민족의 신화와 민족주의 속에서 살아온 한국인에게 다양성이나 다문화주의에 대한 담론은 그동안 불필요했고 따라서 진지하게 논의된 적도 없었다. 한국인은 유독 같은 고향이나 학교 출신 간 유대감이 크다. 워낙 공동체 문화에 익숙하여 뭐 하나라도 공통점이 있으면 쉽게 동질감과 소속감을 느끼고 끼리끼리 뭉쳐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p51" 

개인적인 경험으로도 크게 공감했던 것은 "회사가 직원을 우습게 안다(191)"의 내용이었다. 일하던 직장에서 선임이, 또 내가 후임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굵직한 조언은 '너 아니어도 회사는 잘 돌아가'였었다. 업무 흐름에 익숙해지고 책임이 생길 때 쯤 이 일을 내가 꼭 처리해야할 것 같고, 나 아니면 수습할 사람이 없을 것 같단 생각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 일은 그 전에도 후에도 누군가가 어떻게든 진행되도록 굴려왔다. 나 아니면 안될 것 같아도 사실 다 되고 그런 의욕을 회사가 알아주지 않으니 적당히 하라는 조언이었다. 언뜻 노력하려는 다른 직원의 힘까지 빼버리는 방해같겠지만, 나중에 번아웃이 오고 상처받지 말라는 예방주사였다. " 회사가 직원 알기를 우습게 안다는 느낌이 드는 건 최악의 미세공격이다.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뭔가를 결정해 내놓을 때, 직원들이 당연히 알 권리가 있는 사안인데도 투명한 설명 없이 침묵할 때, 누가 봐도 경영 위기인데 경영진의 설명이나 비전 제시가 없을 때, 회사가 직원들에게 줬던 것을 뺏을 때, 조직이 직원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할 때, 직원들이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을 일언반구 없이 무시할 때, 회사가 수시로 주요 의사결정을 바꾸고 문제를 외면하며 고치려 들지 않을 때 직원들은 한없이 절망한다. p191"  

이직, 출산휴가 등으로 비워진 인력 공백을 충원없이 남은 인원들에게 떠넘기고, 직원 복지차원에서 배정되었던 비용을 삭감하고, 휴가 사용을 하지 못하도록 압박하고, 직원 면담을 핑계로 다른 직원에 대한 업무와 태도를 평가하도록 유도하는 일들을 겪으며 살아남은 직원들의 생존전략이나 다름 없었다. 이 과정을 못 버티고 조용히 사라진 동료들의 빈자리를 채운 신입에게 우리는 지치면 교체해버리고 마는 부품이나 다름 없으니 의욕과 노력을 보이는 대신 천천히 지치라는 냉담한 조언은 미세공격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동료 직원들끼리 미세공격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곤했다. 한참 의욕이 생기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입장에서 당신 아니어도 그 업무를 대체할 사람은 많다는 말은 상처나 다름없다. 이미 줄어든 혜택과 과중된 업무를 계약으로 들어온 사람에게 선임자들이 빼앗겨 싸운 복지는 사내 분위기만 흐리는 불만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직원들간에 보이지 않는 틈이 생기고 이는 더 많은 이탈자들을 만들었다. 공격을 받았다는 이유로 마땅히 남을 공격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것처럼 서로 공격을 주고받았다. 그리곤 사회 생활이 원래 이렇다는 말을 끌어다 핑계삼았다. 

흔한 갈등이다. 개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 배울 때처럼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회 안에서 끊임없이 교류하며 역할을 갖는다. 개인은 학생이거나 직장인이면서 누군가의 가족이고, 취미 모임의 일원일 수도 있다. "차별과 미세공격은 입체적이고 다면적이기에(173)" 자신이 소속된 곳에서 부여되는 단체성이 수시로 우리를 피해자와 가해자 위치에 둔다. 누구도 무결할 수는 없다. 처음 책을 읽을 때는 내가 받은 미세공격을 떠올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남에게 어떤 시선과 잣대를 내밀어 공격을 했었는지 떠올리게 되었다. "편견을 눈치채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발견해야 한다...중략...일반 버스나 콜택시를 타면서 자신이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220)"는 내용은 확실한 의식의 전환이 된다. 책에서는 '4부 미세공격을 대하는 자세'를 통해 조직에서 어떤 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방향을 제시해주며 내용을 마무리 했는데, 책을 읽다보면 더 넓은 범위로 시선이 옮겨감을 느낀다. 

책을 다 읽은 날 곧 개봉을 앞둔 영화 '해피엔드(2024)'를 먼저 관람하게 되었다. AI 감시 카메라로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는 내용도 문제적이지만, 그보다 더 큰 파문을 불러일으킨 것은 선명하게 그어진 차별의 장면들었다. 경찰의 검문을 받을 때마다 재일한국인인 고등학생 코우는 4대를 거쳐 일본에서 살고 있지만 증명서를 소지하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집까지 임의동행하여 신분을 증명해야만 한다. 코우 뿐 아니라 일본인으로 규정되지 않은 다문화 학생들은 학교에서 마련된 자위대 강연 시간에 국가 안보를 이유로 교실에서 쫓겨나게 된다. 영화가 시작될 때 '이것은 가까운 미래의 이야기'라는 자막이 나오는데 이런 일이 실제로 트럼프 정권 아래의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휴스턴대학 한국인 조교수의 비자와 컬럼비아대 유학생들의 비자가 명확한 이유없이 연달아 취소되는 일이 발생해 충격을 주었다. 더불어 지난 4월 10일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미국사회보장청이 불법 이민자 추방과 사회보장 혜택 박탈을 위해 6천명이 넘는 생존 이민자들의 이름과 사회보장번호를 연방정부의 사망자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하는 일이 발생했다고 한다. 이쯤되면 직장 내의 미세공격 주의보 넘어 국제 사회의 확연한 위협으로 파시즘이 끓어오르고 있는 현실이다. 

"나 자신은 정말 편견 없이 사는가?(221)" 질문해야 할 때다. "스스로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하루를 마칠 때마다 다른 사람의 관점을 얼마나 존중하고 배려했는지를 돌아본다면 그만큼 편견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질 것이다." 처음엔 이런 자기 반성과 점검을 피곤하다고 생각했으나 결국엔 '피곤하다'는 핑계로 가진 것들을 휘두르려고 했던 이기심을 느꼈다. 우리는 이미 '구역'을 만들었다. 아이들이나 노인같은 특정 나이대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차별하는 구역을 만들어냈다. 거주지와 소득으로 타인을 멸칭하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피부색과 국적으로 선입견을 갖는 편견도 만들어냈다. 그것들은 학교, 상점, 회사, 동네, 지역 범위를 넓혀 국가간의 갈등으로 까지 뻗어나가고 있다. 뉴스를 볼 때면 그저 세상의 일부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생각했는데 '미세공격 주의보'를 읽으며 일부만의 문제로 비롯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미세공격 주의보' 덕분에 우리 안의 차별과 특권의식을 끊임없이 경계하고 타인을 배려하고 시민 의식과 문화를 구축해야 함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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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나는, 아주 예쁘게 웃었다 - 이곳이 싫어 떠난 여행에서 어디든 괜찮다고 깨달은 순간의 기록
봉현 지음 / 김영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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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2병을 중학교 2학년 때에 앓는 것도 복이라는 말을 보았다. 웃긴 말이고 웃긴 명칭이지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는 간다. '그럼에도 나는, 아주 예쁘게 웃었다'의 저자가 이십대에 한국을 떠나 독일 파리 중동 산티아고 인도 등을 머물며 앓았던 외로움과 고독을 나는 그보다 십 년 정도는 늦게 앓았다. 이제는 누구나 그런 때가 있구나, 하지만 괴로울 땐 이 마음이 왜 이런지 몰랐다. 어디에도 말하지 못하는 조용한 시간이 흘러갔던 날들이 나에게도 있었다. 이십대 때에는 사람과 사랑 사이에 취해서 빈 공간을 바라볼 줄도 몰랐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반짝이고 정신없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자신만 남았는데, 그게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고 초라해보였다. 그렇게 대단했던 것도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니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푸르를 때 빛나고 앓았어야 했던 청춘을 뒤늦게 앓았던 것 같다. 청춘이란 말 싫다(353)고 했지만 그 지난하고 치열한 걸음이 청춘일 수 밖에. 

씁쓰레한 맛을 삼키며 책을 읽었다. '만약'이란 단어를 막연히 그렸다. 그러다 " 환갑이 되면 연애하고 싶고 마흔이 되면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타고 세계여행을 하고 싶다는 김광석 아저씨의 말, 삶에서 꿈꾸는 시간이 있기 마련이니 인생에서 2년 정도는 길지 않은 세월인 것 같다고, 그 정도는 마음 놓고 놀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렇게 말하는 그의 말에 눈물이 날 만큼 위로를 받는다. p190" 는 문장에서 멈췄다. 그래, 맞다. 인생 긴데 늦은만큼 더 살면 흐름이 좀 더뎠을 뿐 그리 늦은 것도 아닐지도, 싶었다. 내가 그렇게 늦었나 참 부족했다 아쉬웠던 마음이, 언제 무엇을 하든 내가 그때 할 수 있는 만큼을 하면서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아졌다. " 시기와 나이는 중요치 않다. 누구나 자신만의 치열했던 순간과 가장 반짝이던 시절이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있는 그 한 시절은 그 누구도, 그 어떤 단어로도 단언할 수 없는 제각각의 인생이라 생각한다. p353" 

" 주위에는 외로움을 많이 타면서도 이미 너무 많은 상처를 입어, 자신이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투성이였다. 우리는 함께 있는 듯했지만, 헤어지고 나면 허전함에 잠 못 들어 했다. p9" 처음 책을 펼쳤을 때부터 떠오르는 노래가 있었다. '우리는 서로가 외로운 사람들 어쩌다 어렵게 만나면 헤어지기 싫어 혼자 있기 싫어서 우린 사랑을 하네 거리를 거닐고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얘기들을 나누다가 집에 돌아와 혼자 있으면 밀려오는 외로운 파도 (외로운 사람들/이정선)' 책을 읽을 때마다 오래된 노래를 종종 듣곤 했다. 가사를 곱씹다가, 책장 어딘가를 더듬어 헤매다가 한참 시간을 보냈다. " 나만 외로운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외롭게 삶을 살고 있었다. 사랑하며 살아야 했다. 외로움도 슬픔도 견뎌내야 했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p246" 외롭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 그조차도 할 수 없어서 그냥 나도 너도 그렇겠구나, 언젠가 만나는 날 그만큼 더 반가워하고 사랑해야지 하며 보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나이를 먹을수록 밝고 가벼운 것들만 보고 싶어졌다. 안그래도 사는게 갈수록 무겁고 어려우니 기분을 전환할 수 있는 것들이 필요했다. 결말이 슬픈 것들은 손에 대지도 않으려 했는데, '그럼에도 나는, 아주 예쁘게 웃었다'의 어조도 그리 밝지 않아서 읽는 동안 가라앉고 있는가 싶었다. 그런데 그게 생각만큼 나쁘지 않았다. 계절이 봄으로 가는 동안 수런했던 마음을 가지런히 빗어내리는 시간이 되어주었다. 게다가 결말도 긍정적이었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거야(베르세르크)' 처럼 시작했다가 행복은 내 안에 있는거야, 하는 동화 파랑새 같은 따뜻함으로 매듭지어졌다. 이 과정을 함께하는 여정 동안 소박하면서 섬세한 그림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더욱 기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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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자의 숲속 일기 - 메릴랜드 숲에서 만난 열두 달 식물 이야기
신혜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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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쇄살식마인 나는 식물을 키우는 것에서 손을 떼기로 마음 먹었다. 마음은 사실 수년전에 먹었지만 그 와중에도 식물을 주겠다는 사람이나, 버려질 위기에 처한 식물을 데려오는 등 몇번의 연이 있어서 들였으나 작년 봄 즈음해서 꽤 오래 간신히 살려두었던 식물들과도 작별하고 정말 이제 더는 집안에 살아있는 식물은 없다. 길가다 보는 예쁜 꽃들만 예쁘다,하고 즐길 뿐이다. 그런데 지난주부터 마일로 작가의 '크레이지 가드너'를 보기 시작했다. 식덕인 마일로 작가의 '크레이지 가드너'를 보면 식물은 꺾어도 의지는 꺾이지 않는 애정과 노력이 보인다. 더불어 '식물학자의 숲속 일기'도 읽기 시작했다. 저자가 그려낸 섬세하고 아름다운 식물들을 보고 있자면 매혹된다. 갑자기 식물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책 안에서는 나는 종종 당황스러웠다. 나에겐 지나치게 감성적인 시선이 어색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분명 어딘가 상처받고 치유를 위해 애쓰는 저자의 모습이 느껴지는데 그게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선 전해진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일년간 외국의 연구소에 머물면서 지독한 향수에 고생했던 얘기도 감정적 교류와 유대를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구나 싶었다. 가장 멀게 다가왔던 것은 눈 내린 풍경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 부분이었다. " 도시에 살 때 사람들이 눈 덮인 풍경이 깨끗하고 아름답다고 얘기하면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그건 비겁한 풍경이라 생각했다. 지저분하고 아름답지 못한 것이 눈 밑에 그대로 있으니 그건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두껍게 쌓인 눈을 뚫고 뾰족뾰족 튀어나와 있는 풀잎들을 발견했을 땐 '거봐, 어떤 건 절대 덮을 수 없어'라는 생각이 더해졌다. p23" 세상의 모든 것을 그대로 감싸 더 고요하고 아름답다고 여기는 편이라 사람들은 정말 다 다른 생각을 품고 사는구나 싶었다. 다른 사람들은 눈 덮인 풍경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비슷한 시선으로 " 지금 이 순간에도 원예품종은 개발되고 있다. 우리가 꽃 가게에서 마주치는 난초 대부분이 그렇다. 난초뿐만이 아니라 판매되는 대다수 꽃이 그렇다. 그래서 나는 꽃집에서 꽃을 사서 그리길 꺼린다. 원예품종은 야생식물을 연구하고 기록하는 식물학자에게 식물종이라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야생난초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계속 개발되는 품종과 사람들의 열렬한 난초 사랑의 본질이 무엇일까 생각한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꽃을 사랑하며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 p45" 는 문장을 발견했다. 처음엔 그런 구분에 지나치게 엄격하거나 좀 냉정한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문득 얼마 전 길을 걷다 구경한 펫샵이 생각났다. 판매를 위해 개량되고 강제로 교배되어 더 귀엽고 유행하는 어린 개체를 만들어내는 시장이 거기에 존재하고 있었다. 동물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은 이 산업에 반대한다. 태어난 어린 동물들도, 개발되어 피어난 원예품종들도 아무 잘못이 없이 참 보기 좋고 귀하지만 그 과정과 목적에서 본질을 찾게 되는 것은 저자도 그 자체를 정말 사랑하기 때문이구나 이해되었다. 

 이해가 되니 조금씩 이야기가 전달됐다. 살구를 좋아한다(105)는 공통점도 발견하고, 추수감사절 칠면조 요리를 맘에 들어하는 점(196), 인간과 다른 생물 사이의 권력 불균형에 대한 시선(193)도 비슷했다. 처음 어렴풋이 짐작했던 내면의 괴로움은 계절이 다 한 인연들을 정리하면서 비롯된 것(206)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 헤어져야 함을 잘 알면서도 그것을 붙잡고 있는 건 나의 욕심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상대방이 가진 무언가를 놓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존중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상대방을 탓하기 쉽지만 사실 그가 나를 사랑할 이유는 없다. 사랑했지만 이제는 사랑하지 않을 수 있고 처음부터 사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가 무심하다고 느껴 상처받고 있을 때 그는 내게 상처를 주는지조차 모를 수 있다. 그런 만남이라면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헤어져야 한다. 건강한 만남도 소중하지만 건강한 헤어짐도 소중하다. p208" 이런 맺음에 이르기까지 속안에 가득 찬 것들을 덜어내 비우고 정리하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먹먹했다.  

 책을 읽다보니 나무는 잘 죽지 않아 나무를 죽이는 방법을 소개(64)하기도 한다는데, 지난 산불로 그렇게 잘 죽지 않을 나무들이 너무나 많이 불에 타버렸음이 생각나 더욱 안타까웠다. 사실 그 전부터 차를 타고 다른 지역을 다녀올 때 산에 죽은 나무들이 눈에 띌 때가 전보다 늘어난 것 같아 환경 문제 때문일까 혼자 염려했었다. 얼마 전 '아름답고 위태로운 천년의 거인들'이라는 나무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도로 확장이나 재건축 등을 이유로 가로수들을 다 베어버려 아쉬웠단 얘기를 한 적도 있었다. 잘 죽지 않아 죽이는 것 조차 오래 시간을 들여야 하는 자연 환경이 결국은 사람 때문에 이렇게 쉽게 파괴되는 것이 씁쓸했다. 제왕나비를 위해 감자 몇 알 대신 밀크위드의 덤불을 남겨두는 것처럼(183) 위태로운 자연을 위해 우리의 욕심에서 항상 뭔가를 더 남기고 비워두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식물학자의 숲속 일기' 덕분에 요즘처럼 벚꽃이 만개하여 잔바람에도 빗방울에도 금방 떨어져내리는 꽃잎이 너무 성급한 것 같아 아쉬울 때면, '화려한 꽃잎들이 떨어져 꽃이 모두 사라진 듯 보이지만 나무엔 어린 열매들이 남겨져 있다고. p60' 떠올릴 수 있어서 기쁘다. 책의 내용만큼이나 그림이 예뻐서 볼 때마다 시선을 사로잡았는데 그림이 더 많았어도 좋았겠다. 사실 그림과 짧은 이야기를 엮은 컬러링북을 내셔도 좋을 것 같단 사심이 생겼다. 청초한 표지도 참 마음에 들어서 더는 식물을 들여 생명을 죽이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탓에 심심해진 책장에 화분 대신 책의 표지가 잘 보이도록 놓아두기로 했다. 저자가 식물학자이면서 그림을 그리고 또 이렇듯 섬세하고 다정한 마음으로 주변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어서 책을 읽는 시간 동안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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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유 없이 불안할까 교양 100그램 5
하지현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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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도,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속으로 당당히도 난 별로 불안감을 느끼거나 그런 것 때문에 불편하지 않은데 공감을 할 수 있을까 염려했다. 일상은 대체로 무난하게 지나가는 것 같고 때때로 느끼는 압박은 약속시간에 늦을지도 모른다거나 요즘 살이 좀 찐 것 같다는 사소하고 고만고만한 것들이다. 그런데 책에서 '불안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위험한 사람(p17)'이라고 예를 들어 8차선 도로를 그냥 건너는 것과 같다고 하자마자 내가 그동안 가졌던 불안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불안이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뿐, 내게도 불안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중요한 일정이 있다고 생각되는 날 전날에는 잠을 못잔다. 잘자고 좋은 상태로 다음날 일정을 소화해야 된다는 생각에 자야한다는 압박감이 들고, 그럼 잠이 잘 오지 않고, 잠이 안온다는 압박감에 다음날 내 상태에 영향이 미칠 것을 걱정하고, 결국 초조해져서 더 잠이 안오는 것이다. 장시간 산에 오르거나, 고속버스 같은 대중 교통을 이용해야 하거나, 기대되는 영화를 보러갈 때도 화장실이 가고 싶어지면 어쩌지? 걱정하는 것도 일상의 사소한 불안들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 저자가 가장 기본으로 생각하는 '잘 먹고 잘 자는 생활리듬(p77)'이 깨지는 불안상태였던 것이다. 왜 나는 불안의 이름조차 몰랐던 것일까. 

책을 읽으면서 소름끼치게 내 이야기야! 라고 공감한 것이 '집에 손님이 오신다(p30)'였다. "예를 들어 집에 손님이 오신다 그러면 불고기 굽고 있는 반찬 차려서 대접하자 이럴 수도 있는데, 손님이 뭘 좋아할지 몰라서 고기도 차리고 회도 차리고 반찬도 열개쯤 새로 해서 놓는 거예요. 그러면 준비하다 지쳐버리고 다시는 손님 부르지 말아야지 싶어지죠." 이걸 과잉 반응으로 인한 불안이라고 하는데 정말 집에 누가 오는게 싫은 이유가 청소하다 지쳐서인 나로써는 내 몸이 100의 스트레스를 겪는다는 이 상황에 진심으로 공감했다. 책에서도 MBTI에 대한 얘기(p38)가 나오긴 하지만 그동안 내향적인 면이 있어서 그런가 생각했던 손님싫어 현상에 다른 이유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동안 타인과 어울림에 있어 두드러지는 내향적인 면이나 짜증을 느낄 때면 죄의식이 생기곤 했는데 '기분이 태도가 되지 말자'는 말을 마음속에 새기고 태도를 바꾸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이 단순히 내가 덜 된 사람이라서만이 아니라 " 내 몸이 '너 오늘 여기까지야' 하고 나에게 보내는 위험 신호 p43"였다고 생각하니 불편한 마음이 좀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보면 예민하고 짜증 많은 사람인 것 같은데 어느 정도는 맞지만 그런 면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기도 하다는 걸 함께 밝혀둔다. 책에서도 " 성격 문제와 같이 고치기 어려운 것으로 생긴 불안이라고 보지 말자는 것입니다. 불안은 지금 내 상태에 대해서 내 몸과 마음이 신호를 보내는 것일 뿐입니다. p74" 라니 성격보단 체력 문제인 것으로. 

나이에 따라 불안의 양상이 달라진다는 것도 인상적인데 중년기에 겪을 불안에 대한 영화배우 안성기 씨의 이야기(p60)가 공감됐다. 늘 주연만 맡아서 들어오던 배역이 어느 순간 조역으로 달라지면서 처음엔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비슷하게도 최근 영화 '서브스턴스'를 보고 그동안 나이듦에 대해 느꼈던 압박과 불안이 떠올랐었다. 여성은 젊고 날씬하고 예뻐야만 한다는 강박을 꿰뚫는 영화인데, 거울 앞에 서서 화장을 덧칠하다 지우는 데미 무어의 모습에서 강렬한 공포와 슬픔을 느꼈다. 인생의 주연에서 조연으로 젊음에서 나이듦으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자신을 받아들이기 시작해야 하는 요즘이라 이 불안을 '올 게 왔다(p64)'고 인정하고 성숙해질 수 있을지 책을 붙잡고도 한동안 심란했다.   

이 한 권의 책으로 모든 불안에서 완벽하게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다. 저자도 불안은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정상범위 안에서 잘 관리하는 것(p8)'이라 표현한다. '난 왜 이유 없이 불안할까'를 통해 내 안의 불안을 인지하고, 조금 낮은 기준으로 불안의 원인을 바라보는 계기를 만들었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불안이 다른 것처럼 책을 통해 다른 것들을 얻어가게 될 것이다. 교양 100시리즈는 처음 접하는데 말미에 필사를 할 수 있는 부분도 있어 더 마음에 들었다. 짧지만 알찬 도움을 챙기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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