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 - 시간을 초월해 나를 만나다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고주영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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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책 읽기를 게을리했던 것은 아니다. 아닌데, 읽고 나서 쓰기를 게을리했던 것 뿐. 쓰고보니 또 아닌데, 게을리했던 것도 맞다. 작년 이맘때쯤, 나는 책을 읽고 손으로 직접, 그 책에 대한 간단한 글을 적기로 마음먹었다. 할일이 없기도 했었고, 뭔가를 직접 남기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올해에 이르니, 어떤가. 읽고 읽은 것을 한동안 방치해두는 일이 잦아졌다. 쓰기를 게을리하게 된 것. 좋아하는 것이 줄어들고, 하는 일이 적어지는 것이 부쩍 눈에 띄기 시작했다. 시간과 사람에 대한 이 소설을 읽고나면 뭔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봤다. 전에 컬러풀이었나, 하는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자살을 시도했던 사람의 삶을 대신 산다는 내용의 책이었는데, 삶을 산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보도록 만드는 소설이었다. 정말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이라 기억이 잘 안난다. 하지만, 리셋을 두고, 그런 책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면 읽었다.

 

영, 못마땅한 소설은 아니었지만, 마음에 드는 소설도 아니었다. 시종일관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야기의 주된 배경이 그 시절이었으니까. 현재의 내가 과거의 어떤 일을 들려주듯이 표현하고 있는데, 흔히 말하는 액자식 구성에 시점이 변하는 부분도 있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꼬이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인물 구성이 간단한 편은 아니다. 인물 A가 있다면 그가 환생을 하게 되어 a로 다시 독자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환생'이라는 동화같은 이야기를 너무나 당연한 현실이라는 듯이 표현하는 점도 디테일함이나 독자를 설득시키는 힘이 부족해서 읽다보면 좀 뜨악하단 느낌을 받는다. 소설 전반에 흐르는 감정선이 꽤 로맨틱하게 흐르지 않았다면 읽기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꽤 부유한 집안의 소년, 소녀들이 전쟁이 시작되기 전과 전쟁이 일어난 이후에 어떻게 생활하고 있었는지 나타낸 부분은 재미있었다. 일상을 잘 담아냈으니까. 그런데 천황을 위해서라면 당장 이 자리에서 죽어도 좋다'는 등의 표현이 있는 부분은, 글쎄 묘한 느낌을 준다. 후에는 전쟁을 치르면서 상처받았을 조선인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는 부분도 나오지만 전체적으로는 일본의 정신'이라 칭하는 것의 색이 좀 더 짙게 나타난 것 같다. 어찌됐든, 읽기에 껄끄러운 내용들이 빈번히 등장하는 반면, 좀 더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감정선에 대해서는 서로가 교차하는 순간이 너무나도 짧게- 하지만 운명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아쉽고.. 그 찰나가 주는 감미로움에 빠지게 만든다. 마치 영화 러브레터를 떠올리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흡족한 편은 아니었지만, 독특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었다.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는 다른 편들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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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두 문학과지성 시인선 342
오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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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두 시집을 선택한 이유는, 사실 별거 없다. 내 시집 선택 기준은 지나치리만큼 간소하고, 또 어떤 의미로는 난해할 정도로 복잡하다. 우선, 제목을 기준으로 선택한다. 제목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지, 그리고 이 어리석은 독자가 얼마나 어리석은 방법으로 읽을 책을 선택하는지 잘 드러나는 방법이다. 그리고 잠깐, 작품들을 살펴본다. 자세히까지는 아니고 어떤 분위기로 쓰여졌는지 확인해서 마음에 들면 집으로 가져오고,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들면 다시 서가로 돌려놓는다. 그 두번째 선별 과정은 특정한 기준이 없이 그때그때 달라지기 때문에 난해할 정도로 복잡하다 할 수 있겠다. 두두 시집은, 제목이 주는 특별하면서도 단순한 어감이 재미있어서, 그리고 시집 안의 시편들이 짧고 간결한 점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두두 시집의 제목을 보고 느낀 것들을 생각해보면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시집 두두의 제목인 두두는 두두시도 물물전진이라는 말에서 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뜻은 모든 존재 하나하나가 도이며,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 진리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심오한 뜻을 가졌다. 아마 이 말을 알았더라면 어감을 재미있게 생각했다니,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 같다. 두두 시집을 읽으면서 실험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실험적이라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 되기 어려운데, 어떠냐면, 전체적으로 시가 굉장히 짧다. 단순히 짧다기 보다는 짧은 글귀들 사이로 기나긴 내용의 의미를 정제해놓은 함축적인 느낌이 든다. 그런데 그 안에서 서사가 느껴지고, 넘치는 느낌이 전해진다.

 

 

나무와 햇볕

 

 

산뽕나무 잎 위에 알몸의 햇볕이

가득하게 눕네

그 몸 너무 환하고 부드러워

곁에 있던 새가 비껴 앉네

 

 

 

새와 날개

 

 

가지에 걸려 있는 자기 그림자

주섬주섬 걷어내 몸에 붙이고

새 한 마리 날아가네

날개 없는 그림자 땅에 끌리네

 

 

나무와 허공

 

 

잎이 가지를 떠난다 하늘이

그 자리를 허공에 맡긴다

 

 

 

무엇과 무엇이라는 두 대상을 두고 쓰여진 시가 많다. 일상적인 모습을 시로 표현했으면서도 그 교차점이 일상적이지 않은, 시인만의 눈을 거친 표현으로 다시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떤 부분이 어떻다고 짚어말하기 어려운데, 새와 날개를 두고 보면, 날아가는 날아가는 새의 그림자가 땅 위에 나타난 것을 땅에 끌리어간다는 표현으로 나타낸 점이 내게는 특별하게 다가왔다. 연이어 옮겨놓은 세편의 시들은 다 그러한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들이었다. 내가 보고 있는 페이지의 뒷편을 시인이 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겨울 a

 

 

콩새가 산수유나무 밑을 뒤지고

오목눈이들이 무리 지어 언덕에서 풀씨를 뒤질 때

 

 

식탁 위의 감자튀김(올리브유에 튀긴)

내가 뒤지는

 

 

이 시는 개인적인 경험이 떠오르기 때문에, 재미있다고 느껴져서 옮겨놓았다. 오목눈이들이, 콩새가 먹이를 찾는 모습을 시인에게로 또, 나에게까지 확대되어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시였다. 식탁 위의 감자튀김을 뒤지는 행위를 일상적이게 느끼도록 하면서 더 넓은 범위의 행동으로 확장시켜놓은 것도 같았다. 올리브유에 튀겼다는 디테일까지도 재미있었고. 시인의 유고 시집이었다고 한다. 뒤늦은 부음을 들은 셈이다.

 

 

** 두두시도 물물전진

모든 존재 하나하나가 도이며,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 진리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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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문학과지성 시인선 359
송찬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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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올해의 시작을 알리게 될 시집으로 송찬호 시인의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을 골랐다. 지인들이 알았다면, 아마 취향이 마음껏 드러나는 선택이라 고개를 저었을 것 같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한껏 담아 제목으로 먼저 고르고 서가에서 살짝 살펴본 내용이 또 나쁘지 않아 정했다. 참, 마음에 든다. 어떤 공간의 어떤 시간의 어떤 느낌인지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제목이, 제목을 떠올리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도록 만든다. 그러니까, 내가 고양이를 좋아해서 특히 더 그런건 아니고, 시집에 실려있는 시들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좋다.

 

송찬호 시인의 시집은 처음 읽는데 부드러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앞으로 시인의 다른 시집을 찾는다면 또 읽게 될 것 같다. 가장 먼저 전문을 소개하는 시는 표제작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이다. 가장 마음에 드는 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나름의 정경이 눈에 그려지는 좋은 시였다. 읽는 이에게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는 시.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입안의 비린내를 헹궈내고

달이 솟아오르는 창가

그의 옆에 앉는다

 

이미 궁기는 감춰두었건만

손을 핥고

연신 등을 부벼대는

이 마음의 비린내를 어쩐다?

 

나는 처마 끝 달의 찬장을 열고

맑게 씻은

접시 하나 꺼낸다

 

오늘 저녁엔 내어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여기 이 희고 둥근 것이나 핥아보렴

 

 

 

찔레꽃

 

 

그해 봄 결혼식 날 아침 네가 집을 떠나면서 나보고 찔레나무 숲에 가보라 하였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한쪽 눈썹을 밀면서 그 눈썹 자리에 초승달이 돋을 때쯤이면 너를 잊을 수 있겠다 장담하였던 것인데,

 

읍내 예식장이 떠들썩했겠다 신부도 기쁜 눈물 흘렸겠다 나는 기어이 찔레나무 숲으로 달려가 덤불 아래 엎어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 너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인데 차마 다 읽지는 못하였다

 

세월은 흘렀다 타관을 떠돌기 어언 이십수 년, 삶이 그렇데 징 소리 한 번에 화들짝 놀라 엉겁결에 무대에 뛰어오르는 거, 어쩌다 고향 뒷산 그 옛 찔레나무 앞에 섰을 때 덤불 아래 그 흰빛 사기 희미한데

 

예나 지금이나 찔레꽃은 하얬어라 벙어리처럼 하얬어라 눈썹도 없는 것이 꼭 눈썹도 없는 것이 찔레 나무 덤불 아래에서 오월의 뱀이 울고 있다

 

 

마치 한 편의 사랑이야기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고보니, 요즘 읽은 몇 편의 소설들이 이런 분위기를 띄고 있었던 것 같다. 스티븐 킹의 신작 11/22/63에서도 이런 애조를 띄는 사랑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었고, -원했던 것은 좀 더 드라이하고 스릴이 넘치는 서스펜스였지만 - 일본 소설이었던 리턴이라는 소설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그 두 소설 모두 재미있게 읽었으니 찔레꽃과 비슷한 느낌의 사랑 이야기를 소설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읽어도 좋겠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스티븐 킹의 소설이 더 좋았다. 리턴은 2차 대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정서상 맞지 않는 내용도 있었다.

 

다른 시를 보면,

 

 

코스모스의 [이제 가까스로 궁티의 한때를 벗어났다 생각되는

인생의 오후, 돌아보면 젊은 날은 아름답다]

 

 

라는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이 구절에 머물렀을때, 나는 다른 시는 모르겠고, 이 구절만큼은 나의 친구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인생의 오후라는 지점까지도 아직, 다다르지 않은 것 같지만 우리에게도 그런 날은 분명 올테고 그때 돌아보는 젊은 날이 지금이 되겠다. 지금, 지금. 지금이 비록 아름답게 여겨지지 않을지 몰라도 시간이 흐른 뒤에 지금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시에서 인생을 만난다는 것, 그래서 마음이 울린다는 것,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페이지를 접어놓았다. 물론, 마음으로.

 

 

초원의 빛

 

 

그때가 유월이었던가요

당신이 나를 슬쩍 밀었던가요

그래서 풀밭에 덜렁 누웠던 것인데

초록이 나를 때렸죠

등짝에 찰싹, 초록 풀물이 들었죠

 

나는 왠지 모를 눈물이 핑 돌아

벌떡 일어나, 그 너른

풀밭은 마구 달렸죠

초록 신발이 벗겨지는 것도 몰랐죠

숨은 가쁘고 바람에 멀는 헝클어졌죠

나는 그때, 거의, 사랑에 붙잡힐 뻔했죠

 

언덕에서 느릅나무는 이 모든 걸 보고 있었죠

한낮의 열기 속에서

초록은 꽁지 짧은 새들을 때렸죠

키 작은 제비꽃들도 때렸죠

더 짙고 아득한 곳으로 질주하는

한줄기 어떤 청춘의 빛이 있었죠

 

 

이 시를 읽으면서 동백꽃을 떠올렸다. 당신이 나를 슬쩍 밀어 풀밭에 덜렁 누웠던 것인데, 초록이 나를 때렸다는 표현이, 무엇엔가 떠밀린 것처럼 동백꽃밭 속으로 넘어진, 그 알싸한 향기에 취하게 되었던 그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이야기와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때, 거의, 사랑에 붙잡힐 뻔했'다는 구절만 봐도 얼마나 마음에 와 닿는지. 동백꽃을 떠올리게 된 것도 그렇지만, 바로 그 구절 때문에라도 이 시를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것으로 꼽아 놓았다. 사랑에 빠진다는 표현을 흔히 쓰지만, 어쩌면 우리는 도망쳐야 하는 그것에 붙잡혔기 때문에 늘 사랑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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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열 삽화집 - 익숙한 그 집 앞
유희열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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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열, 이름도 어쩐지 외설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이 남자는 언제부터인가 무한대의 호감으로 2-30대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원래부터 그의 음악은 늘 사랑을 받아오기도 했으나, 이제는 그라는 인물 자체가 사람의 마음에 긍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진다. 그런 희열옹에게 마치 숨겨두진 않았으나 숨겨둔 것만 같이 느껴지는, 삽화집이 있다고 하니 읽어보지 않고는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노래처럼, 라디오처럼, 방송되고 있는 늦은 밤의 음악 프로처럼 느껴지는 책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과거형이 되었다.

 

99년 세기말적인 감성과 그보다 훨씬 더 전위적이고 해체적인 그림솜씨로 이루어진 삽화집을 나는 두 손에 쥐고 희열옹의 지금보다는 훨씬 더 순수했을, 약 십여년 전의 과거와 마주했다. 그는 아마도 뿌듯한 한편 떠오르면 새벽에 쓴 편지를 다음날 아침에 다시 읽어보는 수줍음을 이 책에게서 동시에 느끼지 않을까. 더하면 자려고 누웠다 이불을 걷어찰 하이킥을 할지도 모를 일이고.

 

90년대 감성이 눅진하게 녹아든 이 삽화집에는 상당히 솔직한 이야기가 담겨있으면서 더불어 그가 보여주는 단편적인 모습, 그의 일부만이 보여지지고 있다.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 같으면서도 지극히도 절제된 일부만을 받아들일 밖에 도리가 없는 절단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책 한 권으로 어떤 사람에 대해 전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면 좀 더 알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보다도 더 적은 부분만을 보여준 것 같아 약간은 섭섭하달까. 별점을 주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지만, 희열옹이라 드리는 별이 하나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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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43
이윤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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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집은, -이라고 하지만 매일 읽는 것은 아니고 그저 오늘 읽었던 시집은- 이윤학 시인의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이다. 역시, 제목에 한번 잠깐 살핀 시집 안의 내용에 두번 짧은 심의를 거쳐 손 안에 들어온 책이다.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언어 사용의 감각적임은 어느 부분에서 어떤 부분까지 가능한 것일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같은 표현을 살짝 바꿔놓은 작은 움직임에도 전혀 다른 것으로 되어버리는 말의- 혹은 글의, '아 다르고 어 다른' 사용법을 시집 안에서 단단히 느낄 수 있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는 표제작인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였다. 나는 뭐든지 주인공 격인 인물을 좋아하는 히로인 타입이었지. 그래서 늘 표제작이 마음에 드는 축에 드는건지, 아니면 역시 좋은 시여서 표제작이 되었던 것인지 잘 구분을 못하겠다. 어쩌면 누구나 듣고 아, 이 노래 괜찮네. 하고 생각하는 보편적 기호를 반영하는 노래가 있듯이, 내가 꼽는 시들이 다 그런 보편적 기호 아래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래는 시의 전문이다.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

 

 

오른손 검지 손톱 밑 살점이 조금 뜯겼다.

 

손톱깎이가 살점을 물어뜯은 자리

분홍 피가 스며들었다.

 

처음엔 찔끔하고

조금 있으니 뜨끔거렸다.

 

한참 동안,

욱신거렸다.

 

누군가 뒤늦게 떠난 모양이었다.

 

벌써 떠난 줄 알았던 누군가

뜯긴 살점을 통해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아주 작은 위성 안테나가 생긴 모양이었다.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었다.

 

 

그 뒤로 마음에 들었던 것은 '황혼의 아스팔트' 중 일부 [아는 사람들 해마다 줄어든다/ 아는 사람 없는 세상을 살지 모른다]는 부분이었다. 작년부터 올해 겨울까지 두번의 장례를 치렀다. 십년 전만해도 대문밖을 나가면 익숙한 어르신들 고개숙여 인사드리기 바빴는데, 해가 지나면서 시나브로 인사할 일이 없어졌다. 장례를 치르면서 이렇게 점점 다들 돌아가시는 구나 혼자 생각했었는데 시인의 시를 보면서 섬뜩한 익숙함을 느꼈다. 나이들어 홀로 남겨진 세상을 적막해서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하는.

 

 

아직은 버찌가 연분홍일 때

 

 

조약돌을 더듬는 시냇물이 흘러갔지.

 

유채꽃밭은 목욕탕에서 방금 나온

젖은 머릿결 샴푸 냄새를 흘렸지.

 

내 마음 샴푸 냄새로 후끈 달았지.

 

더는 길이 나오지 않는 길을 걸었지.

 

피아노를 치는 너의

가느다란 손가락

솜털 끄트머리를

나는 바람으로 매만졌지.

 

 

이 시는 그냥, 느낌이 좋아서 꼽아놓았다. 곧 다가올 봄이 먼저 기다려지는 느낌.

 

 

시집을 읽으면서는 거의 꼭꼭 마음에 들었던 시들을 꼽아놓곤 하는데, 글쎄 어떤 시집은 몇 편이나 전문을 꼽기도 하지만 이윤학 시인의 시집에서는 다수의 편이 꼽히는 것은 아니었다. 근데 또 시집을 읽고 난 뒤에 느낌이 어땠는가 돌이켜 생각해보면 썩 마음에 들었다는 생각이 들어 요상했다. 이거다! 하고 꼽히는 시는 많지 않았을지 몰라도 전체적으로는 마음에 드는 시들이 많았겠지 하고 혼자 납득한다.

 

즐겁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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