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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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백을 처음 접한 것은 2011년 영화를 통해서였다. 그 왜, 책으로 읽는 것보다 영화로 보는 것이 더 빠르고 편하게 작품의 내용을 접할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을 이용하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비록 아날로그적 감성을 가진 사람이라 스스로를 여기고 싶기 때문에 그리고, 원작이 주는 깊이를 다른 것은 따라올 수 없다고 몇 번이고 입에 담았던 전력이 있는 사람이라 책으로 이 작품을 먼저 봤어야 평소의 행실에 걸맞는 일이겠지만. 그때만큼은 가벼운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화를 보면서 강렬한 화면에 끌린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책의 표지 역시 노란 해바라기의 뒷모습으로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다. 새삼 이미 알고있는 내용의 책을 다시 본다는 것은, 특히나 고백처럼 숨겨진 진실을 향해 인물들의 결말을 향해 점점 접근해가며 몰입을 고조시키는 작품은 자칫 시시한 일이 될수도 있다. 그렇지만, 영화를 본지 오래되어서 그런건지 영화의 장면은 그저 책 속의 내용에 구체성을 심어주는 스틸 컷 정도로만 여겨질 뿐 몰입이 떨어지거나 흥미가 덜 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정교한 책의 서술에 점점 더 깊이 빠질 수 있었다.

 

 백은 서술 방식이 독특하다. 주된 인물들의 독백과, 작문으로 그 내용이 이어지게 된다. 한 사람의 호흡으로 전개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다소 지루하거나 늘어질 수도 있을 법한데 딱 알맞을 만큼 읽는 이의 관심을 끌어올리고 다음 화자로 차례를 넘기는 점이 마지막 장을 향해 쉬지 않고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유코의 충격적인 고백을 통해 마나미를 희생시킨 소년 A와 B의 정체와 그들를 향한 복수의 과정까지 단숨에 첫장에서 밝혀내고 난 뒤, 다른 인물들의 시선에 놓여진 사건을 다시 묘사하고 있다. 한 가지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이 '라쇼몽'을 떠올리게 한다.

 

 술 뿐 아니라 그 소재 마저도 세간의 이목을 끌만한 것이다. 발행 당시에는 충격적인 소재란 칭호가 어울렸을 것이고,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세태를 반영한 문제작이란 말이 더 걸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법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갈수록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면모를 띄는 범죄가 발생하고 있다. 고백도 끔찍한 일이지만, 더 끔찍한 것은 현실의 문제들이란 생각이 읽는 내내 머리 속에서 따라왔다.

 

  작품이 이토록 '강렬하고 충격적'이란 수식이 잘 어울리게 된 데에는 하나같이 정상적이지 않은 태도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에서 비롯된 힘이 크다. 교사인 유코는 일견 자신의 생각이 확고하고 사리도 분명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사랑하는 딸 마나미를 잃은데에 대한 복수의 방식이 도리어 냉혹하고 교묘하기 그지없다. 읽는 동안 소년 A와 B의 행태와 작금의 현실을 떠올리며 유코의 행동에 카타르시스와 당위를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한 걸음 떨어져 유코라는 인물을 생각해보았을때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 역시 어딘가 결여되어 있음이 느껴진다.

 

 년 A는 그야말로 어린 나이의 아이가 가질만한 미숙한 동기에 똑똑한 머리가 만나 잘못된 방향으로 재능을 낭비한 것에 지나지 않다. 중요한 인물이긴 하지만 내면에서부터 풍겨나오는 악의의 깊이는 덜했다.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하거나, 애정을 갈구하는 인물의 비뚤어짐은 이미 어디선가 만나본듯한 인물과 재회한듯한 느낌을 주었다. 대신, 소년 A로부터 시작되는 도덕성 결여에 대한 문제 의식은 다른 인물들에게 까지 이어져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시선을 보여준다.

 

 년 B의 모습은 차라리 소년 A에 비하면 현대적인 가정의 모습, 그 중에서도 드러나기 어려운 병폐를 반영했다고 볼 수 있었다. 소년 B의 어머니부터 아집과 맹신으로 단단히 굳어버린 인물이 등장한다. 주변 사람들에 대한 그녀의 태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아찔한 현실성과 문제의식을 느끼게 된다. 방관자적인 태도로 일관해 온 소년 B의 아버지는 없는 인물과 다름이 없었고, 그의 누나들 역시 문제적 가정에서 도망치듯 벗어나는 방법을 택했다.

 

 겨진 소년 B에게서는 자신에 대한 무한한 긍정과 옹호, 기대 속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 되지 않을 자신에 대해 좌절하는, 하지만 자만심은 강한 소심한 인물에게 느낄 수 있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가정 환경에 비해서는 비교적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살인'이라는 사건에 휘말려 순간의 감정으로 사건을 '완성'하는 인물로 변모하는 순간이 있었지만, 생각과 행동의 반경이 다른 인물들에 비해서는 그럴 법 하다고 느껴졌다. 그 외에도 소년 A와 잠시 동조하는 듯 했으나 루나시가 곧 자신이라고 믿었던 가련한 여학생, 반장이 있었고 에고에 빠진 단순무식한 느낌의 교사 베르나르도 있었다.  

 

 

 

 쉬웠던 것은, 탄탄한 서두와 중반부에 비해 후반부 마무리가 좀 급하게 끝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광기에 휩싸인 소년 A가 폭발물을 만들고, 자신의 고백을 인터넷에 올린다. 그리고 그를 단죄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유코가 등장하게 되고 그녀의 복수가 마무리된다는 것은 치밀했던 소설의 리얼리티를 한순간 사라지게 만든다. 그렇지만 이 소설이 제시하는 문제의식은 확실히 소설의 재미와 함께 독자의 머리속으로 옮아온다.

 

 백은 읽는 이를 여러번 놀라게 만드는 작품이다. 구성도 잘 되어 있고, 작품 자체의 몰입도도 재미도 좋다. 거기에 저자 미나토 가나에의 처녀작이란 점이 한번 더 독자를 놀라게 만든다. 숨죽였던 봉오리가 한꺼번에 터지는 듯한 느낌으로, 이렇게 강렬하게 자신을 피어내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 영화도 소설도 모두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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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딩의 여덟째 날
리루이 지음, 배도임 옮김 / 도서출판 삼화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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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장마딩의 여덟째 날'을 상당히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건 나에게 있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인데, 나는 종교적인 색채가 들어갔다는 점에 대해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평을 먼저 내려두는 일이 더 잦기 때문이다. 모든 이를 이해하고 사랑하라는 종교의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의 이해와 사랑의 문제에 있어서 너무나 예민해질 수 있는 요소이기 때문에, 그런 요소로 인해 작품 외적인 부분으로 주의가 옮아가는 일이 생길까봐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특정 종교에 대한 언급이 있으면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 비종교인의 이해가 어려운 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 꺼려지기도 한다.

 

그래서 얼마간은 실망스러운 마음이 생기기도 했으나, 이 소설이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더 크고 넓은 곳에 시선을 주고 있다는 점 때문에 더욱 흥미가 생기기도 했다. 중국발 소설들을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조금 접했는데, 한권 한권 새로 읽게 될수록 괜찮은 느낌을 많이 받는 것 같다. 작년 초에 고향 하늘 아래 노란 꽃이란 책을 읽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분량이 상당했는데, 한 마을 안에서 대를 이어 일어나는 일들을 담아놓은 책이라 재미는 있었지만 읽으며 지쳤던 것 같다. 그러다 최근에 실연 33일을 읽고 장마딩의 여덟째 날까지 연이어 읽게 됐는데, 독서 목록이 매우 빈약하지만 갈수록 좋은 느낌을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역사의 흐름을 따른 시대의 변화가 개인의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체감되는지 인간의 맨얼굴을 드러내듯이 나타내었다. 새로운 문화와 기존 문화가 충돌하며 생기는 첨예한 갈등의 날섬, 서로 다른 종교에서 같은 근원을 찾아내는 통찰, 엄혹한 생의 고통에서 비롯된 치열하고 잔혹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 특히 사람의 삶을 좀 더 본능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날것으로 표현하려 했다는 점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조롱박이와 롄얼의 이야기가 순수한 아름다움을 처연히 남기고 끝난 것처럼, 남편의 아이를 갖기 위해 칼을 찬 남편의 곁으로 찾아든 장왕씨가 결국은 눈앞에서 붉은 피를 보게 된 것처럼, 진실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고 오로진 진실 하나만을 품은 채 죽어야 했던 장마딩처럼.

 

각자 자신이 가진 베이스에서 이 소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여지를, 궁금함으로 남겨두는 책을 또 만나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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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나온 암탉 애니 코믹스 세트 - 전3권 마당을 나온 암탉 애니 코믹스
애니메이션 제작 : 명필름 오돌또기, 사계절출판사 편집부 엮음, 원작동화 황선미 / 사계절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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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자는 이런 표현을 쓸 것이다. '진흙속에 묻힌 진주를 발견한 기분이다!'하고. 좀 더 현실적으로 와 닿는 표현은, '조개를 먹다 그 안에서 진주를 발견한 기분이다!'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당을 나온 암탉]을 처음 읽었을 때, 바로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약 십년쯤 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서점에서 시간을 때울 요량으로 [마당을 나온 암탉]이라는 제목의 책을 집어 들었다. 제목을 보고서 외국 작가의 소설일거라고 생각했었다. 그건 정확히 기억난다. 그런데 주인공의 이름을 보고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다시 표지를 살펴보니, 한국 작가의 작품이어서 의외였었다. 무지한 독자가 황선미 작가의 이름을 알게 된 첫 순간이었다.

 

 흥미위주로 한두쪽 읽다가 이 책의 내용에 빠져들어가 버렸다. 한동안 서가에 서서 읽다가 결국 이 책을 사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읽던 책의 값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와 그 날 밤 정신없이 책을 읽었다. 한번 읽기 시작하니 이 책에서 손을 뗄 수 없도록 만드는 흡입력이 있었다.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눈물도 조금 흘렸던 것 같다. 책을 읽고 나니, 우연히 발견한 숨은 보석을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고 오직 나만 알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었다.

 

 하지만, 좋은 작품은 그 빛을 스스로 드러내기 마련으로 [마당을 나온 암탉]은 감동과 재미를 주는 작품으로 어른과 아이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기에 이른다. 원작의 거칠지만 정감가는 삽화들을 보다가 화려한 색감과 깔끔한 캐릭터로 변신한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보려니 영 낯선 느낌이 있었다. 차라리 원작의 그림을 좀 더 살렸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아이들이 보기에는 새로 태어난 애니메이션 형식이 더 좋았을 것도 같다. 그리고 만화책으로 다시 나온 책을 살펴보니 캐릭터들에게도 슬슬 정감이 가기 시작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이 만화로 다시 나오게 되어 좋은 점 중 하나는, 아이들이 이 책을 더 많이 읽을 것이란 기대를 낳는 것이다. 서가에 있는 책 중 아이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것은 만화로 되어 있는 지식책 시리즈들이다. 지식책들도 그 안에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에 만화로라도 읽는 것이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지만 웃음과 감동 등 감정의 여러가지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마당을 나온 암탉]을 만화로라도 아이들이 선택하여 읽는다면 평소에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과는 다른 것들을 느낄 수 있어 더 좋을 것이라 생각됐다.

 

 또, 다양한 연령층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는데, 원작이 다소 긴 분량의 문학작품으로 되어 있어 아이들이 쉽게 선택하여 읽기 부담스러운 면이 있었다면 만화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접근이 더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총 3권으로 나뉘어져 나왔는데, 길지 않은 분량으로 정리 된 내용이 그림과 함께 담겨져 바로바로 읽기에 쉽고 더욱 재미있게 볼 수 있게 되었다. 평소 책을 잘 읽지 않는 사람도 만화책은 좋아하는 경우가 있으니 더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원작이 주는 깊이감이 상대적으로 덜 느껴진다는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작품의 행간을, 문장과 문장 사이를, 잠시 멈추어 머리속으로 그리는 인물들의 마음과 행동을 가슴으로 한 번 더 새기는 시간이 없이 주어진 장면과 대사만으로 짧은 시간 안에 완독하게 되기 때문에 생기는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라 여겨진다. 만화로 된 지식책에만 관심을 갖는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책이다. 만화로 된 [마당을 나온 암탉]을 먼저 만나게 해주고, 그 뒤에 원작품으로도 책을 읽게 해준다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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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유령
가스통 르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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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his is not a lovesong, 이건 사랑 노래가 아니야...

  이 이야기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페라의 유령]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가, 추악한 외모를 가진 불우한 사나이 - '오페라의 유령' , 팬텀과 아름다운 프리마돈나 크리스틴의 사랑이야기라는 생각이지요. 하지만, 이 이야기에 대해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단순한 사랑이야기가 아닌, 두 사람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에서 사랑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남녀 간의 사랑으로 온전한 형태를 띈다기 보다 더 짙은 혹은 복잡한 여러 감정의 고리가 얽혀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고로, 이것은 사랑 이야기이면서도 사랑이야기가 아니게 되지요. 팬텀과 크리스틴, 오페라와 영화, 책으로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어떤 빛깔을 띄고 있을까요? 격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와, 복잡한 마음의 흐름을 음울하면서 섬뜩한 비밀을 지닌 오페라 하우스를 배경으로 펼쳐놓았습니다. 오페라 하우스를 둘러싼 괴소문의 진실에 대해 기꺼이 안내자가 되어준 이 책을 통해 그 안으로 한걸음 들어섰습니다.

 

#2. It must have been love, 그건 분명 사랑이었어...

  '오페라의 유령', 팬텀.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일까요? 크리스틴의 '음악의 천사'이자 오페라 하우스를 뒤흔드는 무서운 소문의 주인공인 그는 에릭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입니다. 팬텀을 떠올리면 사회가 만들어낸 희생물이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그는 추한 외모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가족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성장하여, 일찍이 집을 떠나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살았습니다.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는 자신을 먼저 경험하게 되고, 타인과 마음을 나누어보지 못한 채 유령처럼 생활하게 됩니다. 크리스틴과 음악적 교류를 통한 깊은 교감을 나누며 그녀의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거친 행동을 저지르거나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미숙한 태도를 보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그가 타인과 관계를 형성하는데 있어 얼마나 서투른지 와 닿는데요, 교류를 통해 성숙해지는 감정조절과 타인에 대한 배려가 주변인들로부터 배척당한 어린 시절 이후로 전혀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다재다능한 재능을 지닌 남성이라도 추한 외모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그로인해 제대로 된 사랑이나 마음씀씀이 한번 받아본 적 없는 사막 같은 삶을 살아온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 사랑을 하는 법을 몰랐던 불우한 사람이었습니다. 크리스틴을 사랑하게 되면서 그는 광기어린 맹목성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로인해 목숨을 잃는 사람도 생겨났지요. 그가 보이는 격정적이고 강렬한 소유욕이 그의 감정을 사랑보다 혼탁한 빛깔의 것으로 집착의 그림자를 드리우지만, 크리스틴을 향한 마음은 집착과 욕망, 고통이 뒤섞인. 하지만 분명한 사랑이라는 감정이었습니다. 그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갈 길을 잃어버린 외사랑 이었습니다.

  그런 에릭의 모습을 보면, 두 가지 사회 현상이 떠오릅니다. 외모의 좋고 나쁨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외모지상주의와 어린 시절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감정적인 학대를 받아온 아이가 어떻게 사회와 어울리지 못하고 스스로를 고립시켜 나가는가에 대한 문제이지요.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이야기에서 바로 지금 이 시점까지도 점점 더 부피를 키워온 고질적인 문제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 또한 흥미롭습니다. 물론 안타까운 마음도 함께 들지요. 바로 그런 안타까운 마음이 크리스틴으로 하여금 그를 동정하도록 만든 요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독자들 역시 우리의 가련한 주인공의 심정에 공감하고, 그의 이야기를 이토록 많이 오래도록 사랑하게 되었겠지요.

 

#3. too good to be true, 당신은 믿어지지 않은 정도로 좋은 사람...

  크리스틴은 팬텀을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보내준 '음악의 천사'로 여깁니다. 모두가 그녀의 이야기를 허무맹랑한 것으로 여긴다 할지라도 그녀는 그에 대한 믿음이 강했습니다. 무대의 중심에 서지 못한 무명의 프리마돈나인 그녀를 빛나는 조명 아래로 이끈 사람, 그녀에게 가슴으로 전달되는 음악과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전달해주기 위해 그 어떤 행동도 서슴지 않는 조력자. 모두에게 냉혹하고 잔인한 사람이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그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준다면, 흔들리지 않은 여자의 마음이 있을까요? 팬텀이 그녀에게만은 좋은 사람이었던 것이 분명하지요. 하지만 팬텀은 그녀에게 좋은 사람, 그 이상의 존재는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는 엇갈리고 실패된 사랑을 따라 절정으로 치닫게 됩니다.

  가면에 가려진 팬텀의 추한 외모를 보고 놀란 크리스틴은 그를 두려워하는 한편으로 동정하기에 이릅니다. 추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사랑을 갈구하며 언젠가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해줄 것이라 믿는 순수함을 보게 되지요. 그리고 그 순수함 안에 숨겨진 잔혹함까지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팬텀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결국 그녀의 사랑 역시 팬텀 자신의 사랑에 방해가 된다면 제거해야 할 대상 위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녀에게 라울의 목숨을 담보로 사랑을 갈구하는 팬텀, 결국 크리스틴은 사랑하는 이를 살리기 위해 팬텀의 요구대로 그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기에 이릅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한 그녀의 결정에 팬텀은 감동과 절망을 느끼며 라울을 풀어주고 그들 앞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녀 앞에서, 사랑 앞에서 그는 좋은 사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비탄 속에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순수한 사랑의 그림자를, 사랑을 모르는 채 살았던 팬텀에게서 느끼게 되는 대목이자, 가장 처연하고 아름다운 장면이었습니다. 희극보다 비극이 더 강렬한 빛을 남기며 우리의 가슴에 그 존재를 각인하고야 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삶에 있어 고통은 그 발자취를 너무도 진하게 남기기 때문에 누군가 그 길을 함께 걷고 있다는 자욱의 발견이 소중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4. time to say goodbye, 막이 내리고...

  모두의 영혼을 사로잡을 정도로 강렬했던 오페라는 끝이 나고 무대의 막이 내려갑니다. 우리는 책의 마지막 장에 다다랐습니다. 책을 다 읽기 전 마치 커튼콜을 하듯 읽는 동안 책장 안에서 열심히 한 편의 이야기를 들려준 인물들을 되새깁니다. 새로운 세계를 만난 기분이 듭니다. 책을 통한 환상적이면서 고풍스러웠던 파리 오페라 하우스로의 여행, 멋진 일이지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라도 음미하듯 한 글자 한 글자 다시 새겨 읽게 되어 더 풍부한 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밤, 깊은 어둠 아래 이제는 쓸쓸한 흔적이 되어버린 이야기의 불을 밝혀보시지 않겠습니까? 당신을 인도해줄 음악의 천사가 당도했습니다. 그를 따라 이야기의 지하 세계로 떠나는 것도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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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줘서 고마워요 - 사랑PD가 만난 뜨거운 가슴으로 삶을 껴안은 사람들
유해진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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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을 자극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듯한 책일 것 같았다. 제목부터, 그런 느낌이 들었다. 쿨함을 미덕으로 생각하고 생활하는 요즘 사람처럼 그런 책은 읽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쿨하지 못하게시리. 그런데 개나리빛 표지에 마음을 주고 책을 들고 길을 나섰다. 그리고 굉장히 후회했다. 집 밖에서 이 책을 읽겠다니. 그거야말로 쿨하지 못한 결정이었다. 문구 그대로 이 책은 읽는 이의 마음을 적시는 감동을 전해주기 때문에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책을 읽어야만 했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 감동하는 모습은 쿨하지 못하다. 표정을 숨길 수 없을 정도라면 집에서 읽어야지.

 

첫 이야기부터 가슴이 저릿한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나는 [휴먼다큐 사랑]의 '안녕 아빠' 편을 봤었다. 그리고 책 내용 한 구절 한 구절 읽을 때마다 그 다큐 프로그램에서 봤던 내용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재생되는 바람에 그때 느꼈던 깊은 슬픔과 안타까움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열심히 막아야 했다. 거기에 개인적인 경험까지 함께 물밀듯 밀려오는 바람에 이 책을 읽는 것을 한동안 중단했다. 분명 따뜻한 사랑이 담긴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슬픔들은 너무나 커서 일견 고통스러운 느낌을 주기도 한다.

 

사실 잘 몰랐는데, 나는 이 책을 펴낸 유해진 피디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을 꽤 많이 봤었던 것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그가 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보는 이의 가슴을 감동시키는 힘을 가진 것으로 여러 매체에서 소개되었던 까닭에 챙겨본 적은 없었어도 여러 방향으로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풀빵 엄마를 보면서도 언젠가 이 사연을 봤었던 기억이 떠오르고, 너는 내 운명에서도 들었던 기억이 떠오르고, W 라는 프로그램은 꽤 좋아해서 즐겨봤던 기억도 났다. 다만 그 모두가 그의 족적이었음은 몰랐던 것이었다.

 

삶의 의미에 대해, 주위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웃에 대해, 그리고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든 계기가 된 책이었다. 그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과 함께 이 책을 접하게 된다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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