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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 김현진 연작소설
김현진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6월
평점 :
" 볼트, 너트, 전선과 드라이버가 얽힌 세계에서 그의 시간은 평온하게 흘러갔다. 그러다가 윤정화를 만나게 되었다. 윤정화는 지금까지 김병권이 알고 있던 세계의 생명체 중 가장 복잡한 존재였다. 그를 가장 매혹시키는 점이 그 점이었고,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점 역시 그 점이었다. 김병권으로서는 윤정화를 구성하고 있는 볼트와 너트, 전선과 동력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부품들이 망가지지 않도록 김병권은 윤정화를 가장 섬세한 전자기기를 다루듯 조심해서 다루어왔다. (109) "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을 가장 처음 연 것은 " 나 유부인 거, 정말 몰랐어? 대충 눈치 챈 거 아니었어? 자기가 워낙 쿨하길래, 나는 아는 줄만 알았는데.(85) " 이 뚝배기를 깨버릴 문구였다. 사실 저 문구와 제목을 함께 봤을 때는 어떤 팜파탈같은 여자가 할 법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책을 읽으니 저말을 묵묵히 듣고 있는 건 여자쪽이었다. 정말 몰랐을까 하며 읽었는데 마침 또 온 인터넷에 여자친구 몰래 다른 여자와 결혼식을 한 남자에 대한 글이 올라왔다. 작정하고 속이는 놈과 옆에서 '의리'지키며 침묵하는 놈들 사이에서는 피해자가 당해낼 수가 없겠다. 각종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두고 '소설'이라고 하지만 현실은 소설보다 더하다.
무엇보다 에필로그와 작가의 말이 가장 강렬했다. 그 앞으로 죽 늘어선 단편들은 이 마지막을 위한 빌드 업이었다,고 해도 좋겠다. 가끔 시청자에게 사연 받아서 연애문제를 재연하는 프로그램을 볼 때면 아, 저기에 글 써서 보낼 시간에 그냥 헤어지면 될 것을. 하고 생각하곤 하는데,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에 담긴 얘기들은 그보다는 좀 덜 답답하고 좀 더 궁상맞다. 요즘 나오는 사연들은 앉아있던 패널들도 벌떡 일어서게 할만큼 기발하고 다양하게 분통터지던데, 책은 적어도 10년 정도 전의 감각이라 된장녀, 김치녀(혐오표현주의)같은 가난한 사랑노래 형식들만 조심하면 된다. 거기에 요즘 다양성을 이유로 필수로 끼워넣는 넷플감성이 없어서 더욱 아날로그적 전개로 느껴진다.
클리셰들을 잔뜩 쏟아부어 놓았는데, 그때마다 웃겨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바바리맨을 만났을때 오히려 패기있게 나가면 변태쪽에서 기겁하고 도망친다는 썰(184)이나, 실수로 옆집 문을 열어 들어갔는데 침대 위에 옆집 사람이 헐벗은 채로 잠들어 있다(162)는 골자로 골방 문학계의 대표적 도입부가 나올 때면 입 밖으로 터져나오는 실수를 막을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단편'부장님 죄송해요'는 친구랑 나누는 대화 부분도 일명 싼티가 작렬하는 내용이라 항마력 끌어모아 버티며 읽는다. 저 두 단편이 특히나 길티플레져로 꼽힐만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착한 남자 김병권이 보인 태세전환도 재밌게 봤다.
" 김은정은 빽 소리쳤다. "야, 나 아줌마 아니거든? 어디다 대고 아줌마래?" 남자는 움찔했다. "그러면...... 아가씨는 집에 가세요." (133)"
솔직하자면 조금 조악한 듯도 했다. '82년생 김지영'이 파격적이었던 것은, 대문자로 아로새겨져 이리저리 조리돌림 당하고 돌팔매를 맞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 등장했기 때문이리라. 그 뒤로 나오게 된다면 같은 이야기를 같은 방식으로 해서는 안된다. 그 이상의 방식과 그 이후의 현실-그게 넷플감성이라면 더 별로겠지만-을 갖춰서 나와야 한다.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은 재밌긴 했지만, 되풀이되는 했던 말과 언제쯤을 말하고 있는거지 싶은 지나감이 느껴졌다. 우리가 '이거 정말 진짜'같은 현실반영을 원하긴 하지만, 통속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근근히 등장하는 '된장녀'같은 말들은 이미 죽은 말이다. 커피 한 잔 마음대로 사마실 수 없도록 여성을 압박하던 그 낙인같은 말이 한물 간 유행어로 치부되는 것이 한심스럽긴 하지만, 이제 사어가 됐을만큼 세상이 변하긴 했다. 스타벅스 커피 한 잔 쯤은 마셔도 거품물고 사망에 이르지 않는 것이란 사실이 남성 세계에도 충분히 전파된 지금, 신간 700원 구간 300원하는 만화 대여점이나(28), 데이트 통장(152), W호텔의 운우지정(173), 캐러멜모카 프라푸치노(27)나 칵테일 몇 잔에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여자에 대한 서술은 낯설다. 방정리하다 구석에서 찾아낸 예전 물건들보는 느낌처럼 낯설다. 만화 대여점들이 대부분 사라져 찾아보기 힘든 것처럼, 책속의 배경들도 그렇다.
재밌게 읽긴 했지만 다소 아쉬운 면면들이 눈에 밟혔다. 오랜 침묵 끝에 나온 글들이 그만큼의 세월을 담은 것인지, 지금에 국한 된 것이 아닌 시대적 여성의 삶을 폭 넓게 담으려 했던 것인지 생각해본다. 덧붙여 그동안 광장을 가득 채워왔던 시위들에 대해 냉소적인 시선이 보였다. 민주투사가 된 기분을 맛봤다거나, 소개팅 자리에서 오갈 법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냉소를 넘어선 듯도 했다. 세상엔 여러 사람, 여러 생각이 있으니까. 읽으면서는 여자들이 좀 더 똑똑하게 생각하고 행동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다 읽고 난 뒤에 생각해보니 사람들이 적당히 똑똑하고 또 적당히 착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든다.
65쪽 상 8 그 애도 했을 걸?" -> " 생략
138 상 6 / 143 상 1 흐름이? 맞지 않음
189쪽 하 7 이 아저씨가 누구보고 미친 여자래! -> 미친 여자란 말이 전에 없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