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로봇 - 우리가 지금껏 상상하지 못한 신화 이야기
에이드리엔 메이어 지음, 안인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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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눈에 어려울 것이 분명한 '신과 로봇'을 읽고 싶었던 것은 얼마전 '바그다드 배터리'라 불리는 가설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내부를 장식한 그림과 조각들이 어떻게 제작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된 이 가설은 꽤 흥미로웠다. 피라미드 자체도 신비스러운 건축물이지만, 빛이 들어오지 않는 그 내부에서 불을 사용하여 안을 밝힌 흔적들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거울을 통한 빛 반사를 이용해서 내부를 밝혔을 것이라는 가설도 있지만, 고대인들이 어쩌면 전기를 이용한 조명을 사용했던 것은 아닐까 의심되는 그림과 비슷한 시기의 다른 지역에서도 전력을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라 추정되는 출토물이 발견되어 과거의 기술력이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발달해 있었음을 예상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신과 로봇'을 읽어보고 싶도록 만든 이 가설에 대한 내용은 책에도 나온다(317). 책 안에는 이처럼 신화 속의 사건들을 소재로 그린 그림과 생활상을 보여주는 출토물들을 통해 흥미로운 내용들을 소개한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고 각 장이 물 흐르듯 연결되어 있어 재밌게 읽힌다. 특히 역사와 과학이 신화를 만나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시선을 통해 21세기와 과거의 묘한 일치감을 느끼게 만드는 점이 매력적이다. 신화라하면 신들이 하프 연주를 즐기며 사랑 싸움을 하는 내용이라 치부했는데(...), 현대 과학기술 아래에서 스케치되고 있는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모든 요소들(노화, 생명의 연장, 오토마타, 로봇, 안드로이드, 사이보그, 불쾌한 골짜기와 복제 생명체)이 신화 안에 다양한 모습으로 담겨있음을 알게 되었다. 

 

 요즘 새로 생겼다는 '현대식 나이계산법'이란 걸 들어본 적 있는지 모르겠다. 120살까지 산다는 전제하에, 전에 비해 노화가 천천히 진행되는 요즘 세태를 반영하여 나온 계산법인데, 자신의 나이에 0.8을 곱해 나온 숫자가 현대식 나이라는 것이다. 계산해보고 나면 마음이 흡족하고 절로 미소가 지어질 것이다. 이십대가 지나고 나니 120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때에 그 절반도 안되는 약 30년 정도의 시간만 젊음을 유지하고 그 뒤부터는 오로지 노화만이 남은 인간의 삶이 참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더 오래산들 노년의 시간만이 길어질 뿐 아닌가. 때문에 '신과 로봇'에서도 수명의 연장과 유한한 젊음에 대해 다룬 내용을 인상적으로 읽었다. 특히 늙어가는 육체를 가지고 영원한 삶을 살아야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인 에오스와 티토노스(98)에 대한 내용이 그랬다.

 

 의술의 발전으로 인해, 또 앞으로 발전한 기술에 기대어 더 늘어나게 될 인간의 수명과 대조되는 신체의 유한함이 우리의 티토노스 적 미래를 예견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작년에 들었던 얘기 중 가장 마음이 안 좋았던 것이 지인이 일하는 회사에서 퇴사를 하게 된 삼십대초반의 직원 이야기였다. 글이 제대로 읽히지 않고 자꾸 업무를 깜박해서 성과가 떨어지는 걸 고민하던 그가 병원에서 청천병력같은 말을 듣게됐다.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것이다. 그 직원은 병이 진행되면 더 이상 근무하는 것이 어려워지니 치료 겸 휴식을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할 나이에 더이상의 활동이 어려워질만한 무거운 병을 얻게 된 사람의 소식을 전해들으니 영화에서나 보았던 얘기가 단순 '소재거리'가 아닌 현실임을 새삼 무겁게 느꼈다.

 

 '너무 오랜 삶'과 '폐기 가능한' 소모품인 육체의 부조화를 극복하는 날이 올까. 이런 생각을 할 때면 인공장기와 로봇신체를 떠올리게 된다. 사람을 규정짓는 조건은 어디까지일까. 사람의 팔을 기계로 대신하면 그는 사람인가 로봇인가. 그의 심장이 인공장기로 대체되어 있다면? 일부만 대체되었다면 사람으로 인정해야 할까? 전부 대체되었더라도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있다면 사람으로 인정해도 될까? 혹은 노인의 뇌를 뇌사 판정을 받은 젊은 사람의 몸에 성공적으로 이식하였다면, 새롭게 눈을 뜬 젊은 사람은 몸의 주인 그 자신일까 혹은 노인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노인으로 인정해야 할까. 이 질문은 '고대부터 보철물을 이용해 인간의 신체 능력을 확대하거나 강화하는 행위(123)'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많은 신화와 전설들이 영생불사를 구하는 일의 어리석음(107)'을 말하지만 우리 유한한 삶과 젊음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오랜 꿈과 목표는 항상 변함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과거에는 불노불사의 존재인 신을 이야기했고, 그들에게서 불과 암브로시아를 훔쳐내기를 소망하고, 기계장치와 판도라를 만들어 낸다. 이는 유전자와 세포 연구, 인공장기와 로봇 기술로 이어진다. 간혹 SF에서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등장하며 그들의 실험을 신의 권능에 도전하는 행위로 묘사하는데, 이는 더이상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앞에 다가온 현실이 아닌가. "과거 신화에 등장하는 몇몇 기적적인 인공 생명들이 발명가들에게 도전의식과 영감을 주었던 것처럼, 현대의 SF 작품들이 미래의 과학적 발견을 예견하고 때로는 기술 혁신에 영감을 주었다(354)" 는 내용에 공감했다.   

 

 알파고의 등장은 확실히 우리를 놀라게 만들고 좌절시켰다. 인공지능이 얻을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직관과 창의성은 그 능력 앞에서 무력했다. 영화 '터미네이터'가 각인시킨 인공지능과 로봇의 공포를 아주 정적인 바둑 대회에서 실감한 것이다. 이 공공연한 충격도 우리에게 깊은 각인을 남겼지만, 밖으로 알려지지 않은 비공식 기술들이 음지에서 실험되고 있을 것임을 추측하는 것은 그리 음모론적인 상상만이 아니다. 이미 중국에서 유전자 변형 인간 배아 세포 실험을 하고 있다는 뉴스가 흘러나온지 오래다. 신의 영역까지 뻗어나간 과학을 제어할 방법을 찾지 못한 현 상황에서 신화가 들려주는 결말은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미리 보여주는 듯하다. 서로 접접이 없을 것이라 여겼던 '역사, 과학, 신화' 키워드를 인상적으로 조합한 책이었다. 이들의 조합이 시너지를 일으켜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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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하는 사람은 단순하게 공부합니다 - 게임폐인에서 의대생이 된 인생역전 공부법
이원엽 지음 / 다산에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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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에 손을 놓은지 꽤 오래됐다. 우리 어리고 젊은 날 대부분의 시간들을 학교를 다니며 공부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학생들이 흔히 갖는 소망으로 어른이 되고 싶다는 것을 꼽는 이유 중 하나에도 어른이 되면 공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어른이 되면 바라던대로 공부와 완전히 연을 끊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확실히 공부와 시험으로 점철된 그 시기에 비하면 공부의 압박은 좀 덜할 것이다. 솔직히 어른이 되면 책 한 권 안 읽어도 되고, 공부도 안해도 되긴 하지만, 대부분의 어른들 역시 자신의 발전을 위해, 직업인으로서의 삶을 위해, 심지어 현실 도피적 도구나 취미로 공부를 이어간다. 어른만 되면 책은 다 불태워버리고 공부에서 해방되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를 학생들에게는 이상한 말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어른도 공부를 하기 때문에, 그리고 스스로의 선택과 각오로 공부를 시작함에도 불구하고 쉽게도 좌절하기를 반복하기 때문에, 이 공부법 책을 봤을 때 바로 한 번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영어 공부가 그렇다. 각기 다른 수업의 첫 등록 분 교재가 다양하게 꼽힌 책장을 보며 호기롭게 구매하고 마지막 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도 없는 교재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는게 아까웠다. 혼자서라도 공부를 해야지 싶어 계획도 하고 실천해봤다. 시작만했다가 끝을 안보는 도전들이 반복되었다. 앞부분에만 공부한 흔적이 남은 책들을 보다 그럼 뒷장부터 공부해볼까 생각했다가 혹시 더 어려운 내용부터 공부하게 되는거 아닌가, 공부에도 인과관계가 있고 위아래가 있는 법인데 그럼 안되지 하고 또 앞장을 펴서 며칠 공부하다 포기한다.

 

 실패의 역사로 점철된 지난 시간을 반성하게 될 만큼 저자의 성공기는 대단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성공한 공부법보다는 재수시절의 양치기 공부법이 더 대단하게 여겨졌다.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인데, 밥 먹는 시간과 비용을 아끼기 위해 하루에 두유 4팩만을 먹으며 15시간씩 공부했다고 한다. 이정도 노력과 각오면 뭐든 됐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공부법은 재수 실패라는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 이 시간들이 결국 나중에 '생각 공부법'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밑바탕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긴 하지만, 어쨌든 들인 시간과 고생에 비하면 공부의 목표였던 대입을 이루기에는 부족함이 있는 방법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무조건 많이 읽거나 풀어보는 공부법에서 벗어나 제대로 이해하기, 스스로 해석하기 방법을 도입하여 눈에 띄는 발전을 이루었음을 소개한다.

 

 아주 독창적인 내용은 아니지만, 공감대를 이룰 수 있는 자신의 경험을 솔직히 드러내어 자신의 공부법을 소개하고 있는 내용은 학생들에게 도전 의식을 불러 일으킬만한 자극제가 되어 줄 것 같다. 공부를 한다고 해봤지만 하루에 15시간씩 식사나 휴식도 제대로 하지 않고 해본적은 없기 때문에 두유선생이라는 별명을 갖게 한 일화는 신기하고 재밌었다. 먼 옛날에도 고등학교 삼학년 혹은 수능 365일을 남기고 핸드폰도 해지하고 머리를 다 밀어버리고 공부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런 결기는 넘볼 수도 생각해보지도 못한 소극적 수험생출신이라 이런 일화들은 매번 새롭고 놀랍다. 도전해본 적 없어서 이 공부법에 대한 장단을 다 받아들일수는 없는데, 이런 노력이 잘 맞아 성공한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저자가 제시한 '생각 공부법'은 전에 경험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확실히 괜찮은 방법이라 공감도 하고 확신을 갖고 동의할 수 있었다. 이 방식 역시 오답노트 같은 방식으로 이미 널리 알려져있지만,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이라 조건만 된다면 반드시 효과를 볼 것이다. 이 공부법은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주는 방식으로도 연습할 수 있는데, 학교 다닐 때 시험 성적 때문에 공부할 때는 영 외워지지 않던 문법 개념들이 무조건 문법강의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예시도 들고 질문도 받을 수 있을만큼 학습이 됐던 경험이 있다. 간혹 친구들이 물어보는 문제를 풀이법과 함께 설명해주는 공부 잘하는 친구에게 '공부 방해하고 시간 뺏어서 미안하다'고 감사와 사과를 전하면 '설명해주면서 나도 공부에 도움이 됐다'고 답할 때가 있는데, 그 말이 진실이었음을 깨달았다.

 

 저자가 강조한 것도 무조건 문제를 많이 풀어보는 것이 아니라, 틀리거나 모르는 게 나오면 왜, 어떤 내용을 모르는지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점검하는 태도였다. 이렇게 공부하고 난 뒤에 남에게 설명해주는 과정을 거치면 이해한 내용의 정리와 복습까지 되니, 공부를 할 때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상황을 설정해서 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솔직히 책에서 다룬 내용이 수능 공부이기 때문에 가장 관심있는 회화와 연결된 공부법과는 연결이 어려울 것 같지만, 공부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이 되는 내용이라 재밌게 읽었다. 공부하다 지치거나 여름 방학이라는 함정에 빠져 자꾸만 놀고 싶은 마음이 드는 학생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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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이 1
서이레 지음, 나몬 그림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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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이는 여성국극단이라는 낯선 소재를 통해 여성들로 구성된 무대위의 세계가 필요했던 시대를 그린다. 이는 곧 현재의 우리들에게 여성의 성장과 경쟁을 다룬 서사도 보는 이의 마음을 달구는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함께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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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해주려는데 왜 자꾸 웃음이 나올까 - 남의 불행에 느끼는 은밀한 기쁨 샤덴프로이데
티파니 와트 스미스 지음, 이영아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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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동안 큰 인기를 끌었던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들이 막을 내렸다. 수십년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었던 프로그램들이 더이상 안 먹히게 된 이유가 뭘까. 공중파에서 보여줄 수 있는 개그 형식에 점차 한계가 생겼다는 점이 가장 컸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을 때리거나, 외모를 비하하며 웃음을 유도하거나, 인종과 국가적 갈등을 초래할 수 있는 요소, 성별 차이를 담은 내용들을 담은 '개그'를 더이상 웃음거리로 삼아선 안된다. 위험천만한 사고 영상들에 방청객의 웃음소리를 덧입힌 '아메리카 퍼니스트 홈 비디오(41)'식의 영상을 보며 웃던 시대, 사람이 다쳤거나 죽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그걸 보고 웃느냐는 지적이 나오는 시대를 모두 겪고 있다. '샤덴프로이데'에 대해 읽으면서 사라진 코미디 프로그램들을 떠올렸다. 과거 우리가 웃었던 상황과 대사들을, 그리고 이제 더이상 웃을 수 없는 현시대를. 우리의 샤덴 프로이데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정말 '남의 불행에 느끼는 은밀한 기쁨'은 정상일까?

 

 책에는 다양한 갈래의 샤덴프로이데 경험이 등장한다. 외국인이 쓴 책이기 때문에 몇몇 예시들은 좀 낯설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우리도 한번쯤은 다 느껴봤을만한 사례들이다. 이를테면 길에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넘어진 사람 때문에 슬며시 나온 웃음, 개인 SNS 비공개계정에 올릴 글을 공개된 계정에 잘못 올려 검색어 1위를 차지한 연예인의 실수, 끔찍한 사건 사고의 현장 사진을 기사에 실은 기레기를 욕하면서도 클릭하게 되는 일, 열심히 노력한 친구가 성적이 낮게 나와 속상해하고 있을때 잘나온 내 성적표를 떠올리는 것. 부정하려 해봐도 샤덴프로이데의 순간들은 일상적이고, 치졸하며, 잔인한데다, 추악하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무엇보다 공감한 것이 자신이 경험한 샤덴프로이데를 공유한 사람들이 "자신이 인정한 모든 샤덴프로이데가 조금 꺼림칙하게 느껴진다(135)"고 인정하고 심지어는 이 대화를 둘만의 비밀로 붙이자고 했다는 사실이다. 문득 그 순간 누군가와 진정으로 친해지는 방법 중 하나로 드러내기 어려운 비밀을 공유하는 것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샤덴프로이데의 존재 의의에 어쩌면 부도덕함을 즐기는 속된 마음과 타인과 이를 공유했을때 나누게 되는 친밀함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긍정을 공감한 사람들보다 같은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부정을 공감한 사람들이 더 끈끈하게 친해지는 법이다. 저자와 대화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를 나누는 것을 숨기고 싶어하지만, 비밀스러운 즐거움을 인정하고 공유했다는 것만으로도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낸 듯한 태도를 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타인 앞에서 내가 느끼는 샤덴프로이데를 부정은 해도 인정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주변인들이 나에게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기 때문에, 때로 그런 악한 마음이 들면 '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지?'하고 죄책감이 생겼었다. 그동안은 주변인의 선의를 고맙게 생각하고 자신의 이중적인 모습을 자책했는데, 문득 혹시 내가 그것을 숨기듯이 타인들도 열심히 숨기고 있었던걸까 의심이 들었다. 내 마음의 불편함을 좀 덜어보려고 읽었는데 오히려 그동안 믿어왔던 주변 사람들에 대해 의심이 더해져서 찝찝해졌다. 그래서 더욱 주변의 타인들에게 이를 당연한 본성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적용하고 싶지 않다.

 

 사실 주변 사람들의 마음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면 오히려 내 마음이 더 괴로워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이를테면 방금 일어난 나의 사소한 불행, 아끼던 테이블 매트가 책상과 벽사이의 좁은 틈에 빠져 꺼낼 수가 없게 된 것,을 하소연 할 곳이 없어지질 않겠는가. 이 작은 불행을 보고 즉각적으로 혹시 '헐, 어떡해ㅋ'하고 생각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20여분간의 난투끝에 책상 다리판이 조금 휘고 나는 녹초가 된 채 테이블 매트를 꺼냈음을 밝혀둔다. 그리고 더는 기운이 남아있지 않아 잠시 리뷰쓰기를 접어두었다 다시 이어쓴다. 어찌되었든 이런 일-사소한 불행-이 생기면 어디든지 얘기하고 위로받거나 털어넘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샤덴프로이데 못지 않은 본능같다. 인터넷에는 카펫 위에 엎은 라면, 떨어뜨려 깨진 고가 전자기기의 액정, 부주의로 분쇄기에 갈아버린 현금 사진 같은 불행의 공유처럼, 멘탈의 붕괴가 오는 불행의 순간들을 누군가에게 알리려는 사람들이 흔적이 가득하다. 나의 불행을 공유/전시하려는 본능과, 타인의 불행을 기쁨/위안 삼으려는 본능. 사람의 마음 안에서 이 두 본능이 공존하며 교묘하게 작용하도록 되어 있다니 마음이 복잡하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철저히 악한 마음과 하찮은 도덕성의 확실한 징후(15)"를 가지고 있다. 타인의 실패에 안심하기도 하고, 나의 상황과 비교하여 위로 삼기도 한다. 때로 우스꽝스럽게 넘어지는 사고 장면을 보면 걱정에 앞서 웃기도 한다. 웃음은 참으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면, 걱정은 웃음을 참고 건네야 하는 것을 보면 본성이 악한 곳에 기울어져 있는가 싶다. 어린아이들의 반응에 대한 실험(45)에서도 나오지만, 아주 아기일때부터 아이의 주의를 돌리기위해 보호자가 큰소리를 내며 부딪혀 넘어지는 시늉 혹은 맞아서 우는 시늉을 하면 아이는 울고 있다가도 멈추고 이를 바라보며 웃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비록 이것이 아기의 것처럼 악의없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해도, 성장하며 학습하고 관계를 맺으며 지내온 사람이라면 이 자연스러움을 억제해야 함도 옳은 것 같다. 내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 해서도 안된다는 간단한 원칙, 다른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내 입장으로 생각해본다면 이를 어떻게 해야할지 답이 나올 것이다. 샤덴프로이데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그래도 우리 착하게 살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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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 김현진 연작소설
김현진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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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볼트, 너트, 전선과 드라이버가 얽힌 세계에서 그의 시간은 평온하게 흘러갔다. 그러다가 윤정화를 만나게 되었다. 윤정화는 지금까지 김병권이 알고 있던 세계의 생명체 중 가장 복잡한 존재였다. 그를 가장 매혹시키는 점이 그 점이었고,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점 역시 그 점이었다. 김병권으로서는 윤정화를 구성하고 있는 볼트와 너트, 전선과 동력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부품들이 망가지지 않도록 김병권은 윤정화를 가장 섬세한 전자기기를 다루듯 조심해서 다루어왔다. (109) "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을 가장 처음 연 것은 " 나 유부인 거, 정말 몰랐어? 대충 눈치 챈 거 아니었어? 자기가 워낙 쿨하길래, 나는 아는 줄만 알았는데.(85) " 이 뚝배기를 깨버릴 문구였다. 사실 저 문구와 제목을 함께 봤을 때는 어떤 팜파탈같은 여자가 할 법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책을 읽으니 저말을 묵묵히 듣고 있는 건 여자쪽이었다. 정말 몰랐을까 하며 읽었는데 마침 또 온 인터넷에 여자친구 몰래 다른 여자와 결혼식을 한 남자에 대한 글이 올라왔다. 작정하고 속이는 놈과 옆에서 '의리'지키며 침묵하는 놈들 사이에서는 피해자가 당해낼 수가 없겠다. 각종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두고 '소설'이라고 하지만 현실은 소설보다 더하다.

 

 무엇보다 에필로그와 작가의 말이 가장 강렬했다. 그 앞으로 죽 늘어선 단편들은 이 마지막을 위한 빌드 업이었다,고 해도 좋겠다. 가끔 시청자에게 사연 받아서 연애문제를 재연하는 프로그램을 볼 때면 아, 저기에 글 써서 보낼 시간에 그냥 헤어지면 될 것을. 하고 생각하곤 하는데,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에 담긴 얘기들은 그보다는 좀 덜 답답하고 좀 더 궁상맞다. 요즘 나오는 사연들은 앉아있던 패널들도 벌떡 일어서게 할만큼 기발하고 다양하게 분통터지던데, 책은 적어도 10년 정도 전의 감각이라 된장녀, 김치녀(혐오표현주의)같은 가난한 사랑노래 형식들만 조심하면 된다. 거기에 요즘 다양성을 이유로 필수로 끼워넣는 넷플감성이 없어서 더욱 아날로그적 전개로 느껴진다.

 

 클리셰들을 잔뜩 쏟아부어 놓았는데, 그때마다 웃겨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바바리맨을 만났을때 오히려 패기있게 나가면 변태쪽에서 기겁하고 도망친다는 썰(184)이나, 실수로 옆집 문을 열어 들어갔는데 침대 위에 옆집 사람이 헐벗은 채로 잠들어 있다(162)는 골자로 골방 문학계의 대표적 도입부가 나올 때면 입 밖으로 터져나오는 실수를 막을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단편'부장님 죄송해요'는 친구랑 나누는 대화 부분도 일명 싼티가 작렬하는 내용이라 항마력 끌어모아 버티며 읽는다. 저 두 단편이 특히나 길티플레져로 꼽힐만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착한 남자 김병권이 보인 태세전환도 재밌게 봤다.

 

 " 김은정은 빽 소리쳤다. "야, 나 아줌마 아니거든? 어디다 대고 아줌마래?" 남자는 움찔했다. "그러면...... 아가씨는 집에 가세요." (133)"

 

 솔직하자면 조금 조악한 듯도 했다. '82년생 김지영'이 파격적이었던 것은, 대문자로 아로새겨져 이리저리 조리돌림 당하고 돌팔매를 맞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 등장했기 때문이리라. 그 뒤로 나오게 된다면 같은 이야기를 같은 방식으로 해서는 안된다. 그 이상의 방식과 그 이후의 현실-그게 넷플감성이라면 더 별로겠지만-을 갖춰서 나와야 한다.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은 재밌긴 했지만, 되풀이되는 했던 말과 언제쯤을 말하고 있는거지 싶은 지나감이 느껴졌다. 우리가 '이거 정말 진짜'같은 현실반영을 원하긴 하지만, 통속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근근히 등장하는 '된장녀'같은 말들은 이미 죽은 말이다. 커피 한 잔 마음대로 사마실 수 없도록 여성을 압박하던 그 낙인같은 말이 한물 간 유행어로 치부되는 것이 한심스럽긴 하지만, 이제 사어가 됐을만큼 세상이 변하긴 했다. 스타벅스 커피 한 잔 쯤은 마셔도 거품물고 사망에 이르지 않는 것이란 사실이 남성 세계에도 충분히 전파된 지금, 신간 700원 구간 300원하는 만화 대여점이나(28), 데이트 통장(152), W호텔의 운우지정(173), 캐러멜모카 프라푸치노(27)나 칵테일 몇 잔에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여자에 대한 서술은 낯설다. 방정리하다 구석에서 찾아낸 예전 물건들보는 느낌처럼 낯설다. 만화 대여점들이 대부분 사라져 찾아보기 힘든 것처럼, 책속의 배경들도 그렇다. 

 

 재밌게 읽긴 했지만 다소 아쉬운 면면들이 눈에 밟혔다. 오랜 침묵 끝에 나온 글들이 그만큼의 세월을 담은 것인지, 지금에 국한 된 것이 아닌 시대적 여성의 삶을 폭 넓게 담으려 했던 것인지 생각해본다. 덧붙여 그동안 광장을 가득 채워왔던 시위들에 대해 냉소적인 시선이 보였다. 민주투사가 된 기분을 맛봤다거나, 소개팅 자리에서 오갈 법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냉소를 넘어선 듯도 했다. 세상엔 여러 사람, 여러 생각이 있으니까. 읽으면서는 여자들이 좀 더 똑똑하게 생각하고 행동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다 읽고 난 뒤에 생각해보니 사람들이 적당히 똑똑하고 또 적당히 착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든다. 

 

65쪽 상 8 그 애도 했을 걸?" -> " 생략

138 상 6 / 143 상 1 흐름이? 맞지 않음 

189쪽 하 7 이 아저씨가 누구보고 미친 여자래! -> 미친 여자란 말이 전에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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