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씨 허니컷 구하기
베스 호프먼 지음, 윤미나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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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너한테 내가 필요했던 날보다 나한테 네가 필요했던 날이 훨씬 더 많았어. (71) "

 

 제목이 무슨 뜻일까 생각했었다. 씨씨 허니컷이 이름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찾는다는 것 같기도 하고 구해준다는 것 같기도 한 말이 아리송했다. 소녀와 할머니, 복숭아 같은 단어를 살펴보면서 막연히 따뜻한 이야기겠거니, 생각해봤다. 막상 책을 읽으니 씨씨의 삶이 말 그대로 구해져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엄마도 아빠도 씨씨의 보호자가 되기를 포기했을때 누가 이 소녀를 구할 수 있을까 싶을 상황에 투티 할머니가 등장한다. 그녀는 말 그대로 씨씨 허니컷을 구한다. 아무 조건 없이, 마땅히 그애가 받았어야 할 관심과 사랑으로, 완벽하게.

 

 책을 읽으면서 다른 무엇보다 씨씨가 오델 할머니와 이별하게 되는 부분이 가장 마음 아팠고, 또 그래서 좋았다. 씨씨가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의지할 수 있는 사랑을 받았고, 또 오델 할머니의 삶에도 그애가 위안이 되었다는 게 좋았다. 오델 할머니와 함께 지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이별이 있다는 것도 알게 해줘서 좋았다. 투티 할머니와 떠나면서 혹시 갑자기 또 학대를 당하거나 하면 어떡하나 걱정도 됐었는데, 그래서 끝까지 그애를 구해야만 하는 내용이 이어지면 어쩌나 싶었지만 씨씨가 만나게 된 모든 사람들이 (한두명을 빼면) 다 좋은 사람들이라 다행이었다. 

 

 배경이 되는 미국 남부에 대한 이미지는 다른 지역보다도 인종차별이 좀 더 심했던 것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올레타의 등장이 불안했다. 올레타가 씨씨에게 차갑게 대했기 때문에 앞으로 갈등이 생기게 될까 싶었다. 씨씨가 어리기 때문에 책에서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올레타가 홉스 부인과 갈등을 겪는 내용처럼 흑인 차별의 뉘앙스가 조금씩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었다. 비슷한 느낌으로는 영화 '헬프'가 떠올랐다. 60년대 미시시피를 배경으로 흑인 가정부들에 대한 내용으로 올레타와 씨씨의 모습이 영화 속 에이블린과 스키터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인종 갈등에 대한 불안은 뜻밖에도 타이비 섬 해변에서 루카스 슬레이드(250)을 만나는 것으로 터져나왔다. '우리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우리 말을 믿어주지 않을거야'. 시간을 조금 뛰어넘어 80년대 말 9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한 영화 '델마와 루이스'가 떠올랐다. 성폭행을 당할 뻔 한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남자를 죽이게 된 두 여자가 도주를 결심하는 데에는 '우리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바탕이 되었다. 주류 사회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좌절되고 피해를 입고 있는지 보여준다. 60년 전의 흑인이, 30년 전의 여성이.  

 

 다행이도 이 강도 사건은 모두가 바라는대로, 올레타의 신앙심이 더욱 두터워질만큼 잘 해결되었지만, 그 뒤로도 그녀가 계속해서 모욕 당하고 (454) 차별 당하는 삶을 사는 것은 막지 못했다. 특히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홉스 부인이 한 공공연한 인종차별을 투티 할머니가 왜 방관했는지 모르겠다. 끝내는 평소에 사이가 안좋았던 굿페퍼 부인과의 싸움으로 화끈하고 시원한 마무리를 한 것으로 매듭지었는데, 투티 할머니가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평판이 그 행동에 대한 이유가 되어주지는 못했다. '씨씨 허니컷 구하기'에서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다. 

 

 괜찮은 성장소설이었다. 지나치게 말랑해서 무른 복숭아 같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씨씨가 가게 된 서배너는 미국의 남부 조지아 주의 도시로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배경이기도 한 곳이다. 50년~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와 67년도 엄마의 죽음을 기점으로 씨씨가 투티 할머니와 함께 서배너로 떠나게 된 시기(67년)도 비슷해서 영화 속의 서배너 풍경을 떠올리며 책을 읽었다. 씨씨의 극복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더 그려지지 않은 미래까지 희망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마무리되었다. 시나몬 롤과 복숭아를 떠올리며 읽을 수 있는 재미있고 감동적인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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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눈
딘 쿤츠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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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기 전에는 저자에게 신이라도 내렸던가 싶었다. 코로나 19와 유사한 배경의 바이러스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쓸 생각을 했을까. 40년만의 잭팟이 터지다니. 그리고 중국의 어느 미친 과학자가 이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우한에서 바이러스를... 하는 음모론도 떠올렸다. 세상에 그렇지 않고서야 지역까지 콕 찝어 우한일 수가 있단 말인가. 책에서는 염력도 나오고 그러니 나의 음모론도 영 허무맹랑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막상 책을 손에 들고 나니 묵직한 두께감에 이걸 언제 다 읽나 걱정이 됐다. 하루이틀 덮어둔 책을 쏘다보다가 책을 들고 읽기 시작하니, 순식간이었다. 술술 읽혀서 1/4 정도 읽었을 때까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읽었다. 많아보였던 분량이 아무것도 아니게 생각됐다. 무엇보다 재밌었다. 단지 지금의 코로나 사태를 예견한 내용이 있다는 점만으로 역주행을 할 수 있었던 책은 아니었다. 어떤 내용인지 파악하기 위한 머리싸움이 필요없이 몰입해서 읽으면 될 뿐이었다.

 

 초반에 깔리는 으스스한 내용이 공포물인가 싶을 정도로 긴장감을 주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막힌 구석 하나 없는 빠른 사건 전개를 시원시원하게 따라가면서 오는 기분 좋은 스릴만 남는다. 계속 무서우면 밤에 불을 켜고 자려고 했는데 다행이었다. 크리스티나가 악몽을 꾸는 부분들은 먼 옛날 즐겨읽었던 '퇴마록'의 한 편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심약한 이를 마음 졸이게 했던 그 유명한 책의 국내편에 '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도다 ' * 의 내용이었다. 아마 추억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다소 허무맹랑한 설정이라 여길만한 부분들은 있지만, 그래도 매력이 더 많은 책이다. 강점 중 하나는 인물이었다. 책 속의 인물들이 복잡하거나 이중적인 면 없이 선악이 잘 드러났다는 점이 평면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저 단순하게 이야기를 즐길 수 있는 재미를 준다. 각 인물들에 맞는 결말을 갖게하는 권선징악적 구조도 좋았다. 세상이 험한데 소설 속에서라도 나쁜놈은 죗값을 치뤄야 제 맛. 주인공인 크리스티나가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주체적인 여성이라는 점도 40년이 지나서도 수동적이지 않고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를 보여준다.  

 

 다만 꽤 마음에 들었던 시원시원한 전개는 장점이면서도 약점이었다. 안그래도 어려운 상황에 누구 한명이 말도 안되는 방해꾼 역을 해서 일을 꼬거나 하면 답답해서 하차하고 싶은 성질머리를 가졌는데, 이를테면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상황에서 안전한 쉘터에 잘 피해있는데 밖에서 누가 문 열어달랜다고 문 열어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도대체 왜 문을 열어주는가, 문 열어주면 꼭 감염자 한명이 딸려 들어와서 다 죽던데 영화도 안보나 싶은 울화가 치밀어서 그만보고 싶어지는데- 그런 전개가 없다. 다른 작품들도 이렇게 시원시원하다면 찾아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너무 시원시원하게 단 4일만에 거대비밀기관의 프로젝트를 다 파헤쳐버리는 과정이 아쉽기도 했다. 대니 없었으면 어쩔 뻔 봤는가. 모든 시작과 끝이 대니에서 대니에게로였다. 크리스티나와 엘리엇은 이용당했다!가 학계의 정설. 그리고 빠른 전개와 마무리가 어떤지 아쉬운 뒷맛을 남겼다. 이왕 분량이 400쪽을 훌쩍 넘길 것이면 500쪽이 넘든 600쪽이 돼서 두권이 되든 확실한 마무리를 보여줬어도 될텐데. 뒷심이 부족하다 느껴졌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큰 궁금함이었던 우한 폐렴에 대한 내용이야 큰 비중이 없이 흘러가듯 언급됐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로빈 쿡의 '돌연변이'라는 책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 책도 책장이 어찌 넘어가는지 모를만큼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나니 '어둠의 눈'을 재밌게 읽었다면 구해서 읽어봐도 좋겠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읽었는데 기대 이상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동안 읽어 볼 교양서로 추천해본다.

 

*바흐 칸타타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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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 내 감정의 주인이 되는 자기결정권 연습
정정엽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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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자고, 잘 먹고, 잘 쉬는 것(8)" 이 당황스러웠다. 그걸로 만족감과 편안함을 누릴 수 있다는 저자의 단언은 어쩐지 당연하고 조촐했다. 우리를 괴롭히는 자잘한 고민들이 저 당연한 것들로 해결될 수 있다고? 정색하여 굳어진 얼굴을 풀고 생각해보니 우선 끼니가 불규칙하다. 수면 패턴이 망가지는 바람에 지난 밤을 꼬박 새웠다. 덕분에 책을 한 권 읽었으니 어쩔 수 없지만, 오늘 하루종일 밤샌자에게서 때로 풍겨나오는 광기를 내뿜으며 미뤄둔 일들을 뜻밖으로 해치웠다. 그리고 이제 막 좀 쉬어보려고 하는데, 문득 지난 밤에 읽었던 책 내용이 떠올라 자리를 잡고 앉은 참이다. 무거운 머리와 뻐근한 눈, 굳은 어깨, 쓰린 속 같은 것들이 당연한 세가지를 다 무시한 자에게 찾아왔다. 피로와 카페인이 만나 쥐어짜낸 생명력이 갈수록 사위어감을 느낀다.

 

 까다로운 독자이기 때문에, 라고 하고 어디 뭐 잡을 꼬투리없나 노리고 있는 스타일이라 초반에는 회전문처럼 책에 대한 평가가 몇번이나 오갔다. 누구나 할 법한 말을 포장해놓은 책은 아닐까 색안경을 옆에 준비해두고 봤는데, 같은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차례로 서로에 대한 스트레스를 상담하기 위해 찾아왔다(44)는 내용이 있는 부분에서 너무 소재거리인데? 싶었다. 책의 정말 초반이었는데, 앞으로도 이런 식의 내용이 반복해서 나오면 이 책이랑 내 마음의 거리는 이대로 멀어지겠구나 싶었다. 들어간 문으로 돌아서서 막 나서는데, 눈에 띄는 내용들이 읽히기 시작했다.  

 

 " 바쁘게 지내면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보상으로 얻을 수 있다. 여기서의 안도감은 그 어떤 성과보다 중요하다. 이 안도감을 얻으려면 전혀 가치 없는 일이 아니라 차순위로 중요한 문제로 도망쳐야 한다. 대부분은 일이다. 이들은 마음속으로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으니까 어쨌든 괜찮을거야'라고 생각한다. (47) "

 

 상담자의 상황(아버지 병간호)과 더불어 특히 저 자기위안을 위한 도피적 행동을 인생의 위기가 올 때마다 잘 써먹었던터라 마음을 다시 잡고 책을 읽었다. 사실 책을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개인적으로는 '보상'이 되기 때문에 바로 그 순간의 자신에게 깊숙이 들어오는 내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좀 더 가치있다고 여겨지는, 남들과 같은 평범에 속하기 위한 노력을 달리 시도할 것은 아니지만 버릇처럼 '독서'를 현재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자신을 위한 도피처로 쓰고 있는 것에 대해 남들은 몰라도 나는 아는 반성을 했다. 이쯤되니 어쩐지 신뢰도는 올라갔지만 마음이 씁쓸해졌다.  

 

 연이어 " 내 마음에 '타인을 재본다'라는 생각이 조금도 없다면 이처럼 해석되지 않을뿐더러 이 같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53)" 는 내용에서 누군가가 싫어질 때면 항상 떠올리는 생각 '누군가가 싫은 것은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을 연상했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어디선가 주워듣고 이 말이 와닿는 면이 있어 남이 싫거나 험담하고 싶어지면 자제하려고 늘 떠올리는 말이다.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숨기고 싶은 욕망, 생각이 타인에게서 보일 때 그를 미워하고 싫어하게 된다는 생각인데 책에서도 비슷한 맥락을 얘기하고 있어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책을 읽어나갔다.

 

 이어지는 감정에 대한 내용은 대체로 평이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감정은 모두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내용이 주요한데, 화를 내는 것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이 머물렀다. 부당하거나 불합리한 일을 인터넷에 올려 공유하는 일이 흔하다. 사람들은 함께 공감해주고 공유자가 처한 상황이나 맞선 상대방에게 제대로 사이다같은 결말을 내기를 조언하고 응원해준다. 책에서 나온 상담자도 화를 내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는데, 개인적 경험으로는 화냈던 일이 그때는 속시원해도 지나고보면 오히려 찜찜하게 남아있는 일이 더 많아 부정적 감정 표출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가장 관심이 갔던 부분은 "사랑받을 자격(164)"에 대한 것이다. 대체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에는 아무런 의심없이 상대에게 호감을 가졌던 것에 비해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고 하면 왜 이 사람은 나를 좋아하게 된 것일까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더 잘나고 완벽한 사람이 많은데 나의 무엇을 보고, 왜 하필 나를 좋아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나 자신에게만 가진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할 때 상대방의 완벽함을 보고 좋아한 적은 없으면서, 반대로 나는 완벽하지 않다는 이유로 호감의 대상이 된 사실을 어색하게 느낀 것이다.

 

 자신이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이런 생각이 정서적 안정감을 잃어버린 탓에 생겨난게 맞는가 궁금해졌다. 정말 책에서 말하는대로 타인과 안정적인 애착관계를 형성한 경험이 적었던가, 근데 다들 저런 생각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다만 정서적 안정감을 형성하기 위해서 기본적인 욕구를 채워야 한다(168)고 조언한 부분이 맨 처음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는 것'을 하나도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정말 정서적 안정감이 잘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할말이 없겠다 싶었다. 신체와 정신의 건강을 위해 잘 먹고, 잘 자고, 잘 쉽시다.

 

 마지막으로는 관계에 대한 내용도 괜찮게 읽었는데, 프로 단절러의 삶을 살아온 탓에 이제는 관계를 끊지 않고 이어나가기 위한 노력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참이라 잘 끊는 법에 대해서는 더는 참고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끊지 않아도 관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알아서 끊겨나가는 것이라는 걸 한참 끊고 다닐 때는 몰랐다. 앞으로 생각이 또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생각에는 끊기보다 맺고 이어나가는 것이 훨씬 더 어렵고 성숙한 인간관계 모델인 것 같으니, 미니멀라이프라든지 나 자신에게 집중 같은 모토를 가지고 싹 다 끊고 정리해버리는 일은 하지 않길 추천한다. 결국엔 미니멀해지고, 코로나시대의 생활상이 자신에게 집중할 수 밖에 없는 환경도 만들어줄 것이다. 

 

 아직 마음과 금전의 벽을 다 내려놓지는 못한 탓에 언젠가 여유가 되면 심리정신에 대한 상담을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만 좀 해봤다.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해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건 좋을까 나쁠까 궁금해졌다. 예상보다 생각할 것이 많게 읽었다. 불신의 깍지를 끼우고 시작했음에도 재밌게 읽었으니 이래저래 마음이 어지럽다거나 남는 시간이 많아 생각도 많아졌다면 기회를 빌어 한번 읽어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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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입자들
정혁용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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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대를 많이 했다. 띠지에 써 있는 문구가 심상찮아 보였기 때문에 어떤 내용일지 궁금했었다. 막상 읽어보니 나름대로 재미있기는 한데 어딘가 부족하고 어딘가 과잉됐다 해야할까, 아 조금 아쉽구나 싶었다. 세계문학상 최종심 후보작이라고 되어 있어서 19년도에 어떤 책이 대상을 받았는지 찾아봤는데, 10편의 후보작들 중에서 침입자들이라는 제목을 찾을 수가 없어서 어리둥절한 참이다. 원래 제목은 달랐던가. 300쪽 조금 넘는 분량인데 금방 읽힌다. 평소에 책을 잘 안 읽는 편이라도 쉽게 읽을 것 같다. 장편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2시간 정도면 읽을 수 있을 정도고 장르소설 느낌이 좀 난다. 자발적 격리에 들어간 책임감있는 성인들이 한가할 때 읽기에 좋겠다.

 

 책에서 아재느낌이 물씬 났다. 영화 '이퀄라이저'를 감명깊게 본 아저씨가 꿈궈볼만한 내용이랄까. 읽기 전에는 평범한 택배 기사가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동네를 배정 받아 택배를 배달하며 벌어지는 의도치 않은 사건들이란 느낌의 평범한 코믹스릴러나 드라마를 생각했는데, 택배 기사가 너무 능력치 몰빵 작가의 최애캐라 개인적으로는 아쉬웠다. 읽고보니 "택배가 도착하는 순간, 인생이 뒤틀리기 시작했다!"는 띠지의 문구가 좀 불만스러웠다. 행운동 사람들 인생은 택배 오기 전에도 뒤틀려 있었던 거 같은데, 낚인거 아닌가. '이미 뒤틀린 인생, 택배가 끼얹어졌다'고 해도 될만하다.

 

 작가가 사랑한 주인공을 나도 사랑하지는 못했다. 약간 촌스러운 감성이라고 해얄까, C*감성영화 느낌이랄까, 소설이 당년정 배경음악과 함께 석양으로 사라지는 사나이의 뒷모습으로 마무리되는 느낌이다. 주인공 일명 행운동 내지는 K는 말도 없고 웬만한 일에는 별 내색하지 않고 무심한 듯한데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 의문의 사나이로 그려진다. 아는 것도 많고 적당히 유머러스하고 묵묵한, 그러나 할말은 할 줄 알고 필요하다면 주먹도 쓸 수 있으나 자제할 줄 아는 미덕을 가졌다. 보고 있자면 마치 '택배기사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이나 '전생했더니 행운동 택배기사였던 건에 대하여*'같은 제목을 달고 있어야 할 것 같은 먼치킨 주인공이 등장하는 웹소설같아 오히려 아쉬웠다. 멋지라고 만들어 놓은 주인공인데 안 멋져서.

 

 가장 큰 장점인 핑퐁처럼 오가는 대화도 가끔 웃기긴하지만 천재 경제학 교수보다 더 젠체하는 듯한 어조가 부담스러웠다. 바쁘다며 '양 떼(146)'어쩌고 하는 핑계를 대는 것도 현실에서 시전하면 마이클처럼 보일 것이다. 행운동 사람들이 죄 수상했기에 칼잽이 K씨를 받아들이고 심지어 마음에 들어한 것이지 실제로 누가 저런 식의 화법을 구사한다면 '아 왜 저래'싶을 느낌이었다. 소설인 것을 감안해도 말투가 지나치게 극적이라 항마력 채워가며 읽었다. "양갱을 잘못 먹은 탓이에요(181)" 하고 대답하는 부분에서 절정을 이뤘다. 주인공에게 매력을 느끼고 침입자들 재밌게 읽었다면, 유머는 조금 부족하겠지만 이퀄라이저 꼭 보길 추천한다. 주인공 설정이 같다. 침입자들은 뭐랄까, 한국판 이퀄라이저 같다.

 

 결핍에 대해 나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하필 책을 읽은 날 낮에 천변을 좀 걸어지났다. 우한폐렴 탓에 초등학교 개학이 미뤄진 덕분에 한 5학년 쯤 됐을까싶은 남자애들 다섯이 천변에서 놀고 있었다. 그중 넷은 자전거를 탔는데 하나만 킥보드를 탔다. 정작 애들은 별 생각없이 놀았을지 몰라도, 그게 그렇게 마음에 걸려 보기 곤혹스러웠었다. 자전거 탄 네 명의 속도가 훨씬 더 빠르기 때문에 그애들과 함께 이동하기 위해 킥보드 소년이 아닌 척 더 열심히 한쪽 발을 굴러야만 하는 모습이 그랬다. 나도 자전거 갖고 싶다고 생각했을텐데, 친구들이 속도를 맞춰주는 배려가 때로는 미안했을텐데, 속도를 더 내보려고 발 구르는 것이 힘들텐데 하는 어두운 생각만 밀려왔다. 그 모습을 보며 같이 걷던 동행에게 불쑥 십대시절 내가 별스럽지 않게 겪었던 결핍에 대해 얘길 꺼내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책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왔던 것이다.  

 

 큰 줄기를 잇고 있는 사람들말고 단편적으로 나오는 에피소드들이 더 마음에 들었는데, 오히려 그런 에피소드들로만 내용을 연결한다면 연재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게꾼 아버지 이야기나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택배 기사 같은 내용은 어디서 본 듯해도 소재로 삼았구나 싶은데, '코카인'이나 대기업, 경찰서로 연결된 내용들은 너무 간 설정처럼 느껴졌었다. 어쨌든, 고독한 아저씨 히어로물을 원한다면 만족스럽게 읽을 것 같다. 히어로라고 봐도 될지 모르겠지만 소소한 구원도 구원이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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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하, 나의 엄마들 (양장)
이금이 지음 / 창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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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는 동안 마음이 아파서 고단했다. 100년 전이라는 배경과 구수한 사투리가 초반의 몰입을 조금 방해했다. 한동안 가벼운 것들만 읽으려 고집했던 탓이다. 언제는 깊고 어두운 이야기라면 골라서 읽고 싶었는데, 사는게 복잡하고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가볍고 밝은 것만 찾게 되었다. 금방 그만둘 수 있고, 어디서부터 시작해도 어렵지 않은 글들을 소비했다. 핑계가 좋았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을 읽는게 더딘 것도 일제강점기에 홀어머니가 삼남매를 바듯이 먹여 살리는 형편, 그중에서도 맏딸에게 지워진 의무와 책임같은 것들이 오롯이 느껴지는 시작이 답답해서 였다. 한 며칠, 초반의 몇장을 읽다가 밀어두었다가 다시 집어들기만 했다. 초저녁에 잠이 들었다 12시가 넘어서 문득 잠이 깬 밤이었다. 다시 잠은 오지 않고 책을 읽다 잠들어야지, 하고 '알로하, 나의 엄마들'을 손에 들었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는 이른 새벽이었다.

 

 놀라운 흡입력이었다. 어깨가 아파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책의 절반쯤 읽었고, 그 뒤로는 재미있어서 끝까지 읽어버렸다. 버들, 홍주, 송화의 삶이 마음 아프면서도 살다보면 좋은 날도 오겠지 바라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사진만 보고 외국에 있는 신랑과 결혼을 하러 가는 '사진 신부'들의 여정을 순진하게도 같은 마음으로 바라봤다. "삼 년 절은 오이지맨키로 쪼글쪼글한(78)" 신랑이 기다리고 있는 포와는 농장에서 일하다 채찍으로 맞은 상처 흉터가 남은 이주노동자들의 팍팍한 터전이었다. 그제서야 나무에 옷과 신발이 걸려있고 돈을 쓸어담는다는 부산 아지매의 말이 거짓말이었지, 하고 고개를 주억였다. 버들뿐 아니라 홍주, 송화가 마음먹고 떠나온만큼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랐었다.

 

 여자의 삶에서 남자는 무엇일까. 세 소녀가 시집가겠다며 하와이로 떠나 겪은 일들을 보며 더 잘살고 싶어서 떠나왔는데도 마음처럼 살아지지 않는 현실이 갑갑하고, 남편의 존재가 그녀들에게 짐만 더 얹어주는 것 같아 원망스러웠다. 울며 결혼을 거부하고 싶어하는 손녀뻘의 소녀들을 데려다 결국 아들 낳은 첩으로 삼으려는 홍주의 남편과 술마시고 폭력을 휘두른 송화의 남편은 끔찍했고, 나라를 위해 일한다고 집안은 돌보지 않고 떠나버린 버들의 남편은 뭐라 비난하기 어려워 괴로웠다. 남편이 부재할 때 뭉친 세 사람의 삶은 오히려 남편이 있을 때보다 더 나았다. 서로가 서로를 보듬고 열심히도 살았는데, 한편으로는 남편의 빈자리가 그들에게 계속해서 상처로 남아있는 것이 쓸쓸했다. 상처받고 괴로우면서도 사람에게 정을 주고, 사람에게 의지하며, 사람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니.

 

 순순히 소녀에서 엄마로 성숙해져가는 세 여자들의 이야기를 읽다가 진주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분위기가 달라진다. 옳은 결말이라는 것은 없겠지만 아름답기만한 끝맺음은 아니었어서 마지막까지 쌉싸름하게 읽었다. 결국은 그렇게 되었구나, 좀 더 좋은날이 많았어도 좋았을텐데 싶었다. 400쪽에 가까운 분량이지만 전개된 내용에 비해 너무 갑자기 결말이 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특히 송화의 이야기가 버들이나 홍주에 비해 적어서 아쉽기도 했다. 송화라는 인물이 가진 사연도 깊어 그녀에게 대한 이야기가 더 나왔어야 덜 채워진 채 서둘러 끝맺었다는 느낌을 받지 않고, 진주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헛헛한 마음이 덜하지 않았을까 싶다. 3시간을 넘게 읽었으면서도 마지막에 더 읽을 내용이 없어 아쉽다는 생각이 들다니, 좋은 책이었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멕시코의 유카탄을 배경으로 한 김영하의 '검은꽃'이 떠올랐다. 에네켄 선인장 농장으로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은 적 있었다. 그리고 일년 정도 지나지 않아 유카탄 반도의 무지개학교를 방문했다. 검은꽃을 읽을 때에는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스콜이 쏟아지는 변덕스러운 날씨를 뚫고 찾아간 무지개학교는 한산했다. 먼길을 온 우리 일행에 대한 환영은 따뜻했고, 아직도 남아있는 지난 세월의 흔적이 마음에 걸려 나는 위로도 응원도 변변한 말 한마디 전하지 못한채 기약없을 다음을 나누고 인사를 드렸던 기억이난다. 그게 십년도 지난 일이다. 여유롭고 느긋한 곳답게 아마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겠지. 문득 언젠가 하와이도 가보게 될 것 같단 생각을 했다. 검은꽃을 읽고 생각지못하게 유카탄에 갔던 것처럼. 개인적으로 인상깊은 것은 검은꽃이지만, 알로하 나의 엄마들을 더 재밌게 읽었다. 둘 중 하나만 읽어봤다면 꼭 다른 한 책도 읽어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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