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찬 회의론자 - 신경과학과 심리학으로 들여다본 희망의 과학
자밀 자키 지음, 정지호 옮김 / 심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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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속설 2 냉소주의는 안전하다' 모든 신뢰 행위는 사회적 도박이다. 자기 돈이나 비밀, 안녕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면 이들이 우리를 좌지우지하게 된다. 남을 신뢰하는 사람 대부분은 어느 시점에 상처를 입는다. 이런 순간이 우리 안에 차곡차곡 쌓이면 남을 믿는 모험을 할 가능성이 점점 줄어든다.'' 남을 절대 신뢰하지 않으니 냉소론자는 뭔가 잃을 게 없다.이들은 절대 이길 일도 없다. 누군가를 신뢰하지 않는 행위는 포커를 할 때 카드를 읽지도 않고 판을 접는 것과 같다. 냉소주의는 포식자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지만 신뢰가 요구되는 협력과 사랑, 공동체를 이룰 기회의 문도 닫아버린다. 우리는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은 영원히 잊지 못해도 기회의 문을 좀 더 열었다면 사귈 수 있었던 친구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일이 별로 없다. p17 "

 책을 읽으며 많이 공감한 태도였다. 상처를 받고 실패를 경험했단 이유로 기회의 문을 닫아버린 회의론자, 세상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성적인 체 했던 자신의 모습이다. 그런데 책에서처럼 스스로를 냉소적이라고 여기고, 타인은 차갑고 냉정하며 세상이 점점 더 암울하게 변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 진짜 내가 생각하는 전부였을까? 그렇다면 굳이 '희망찬 회의론자'를 읽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선함을 추구하고 타인에게 친절하며 좋은 뉴스에 관심을 가지는 이면이 있기 때문에 더이상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변화의 가능성을 보았다. 하지만 400쪽이 넘는 벽돌에 살짝 가까운 책을 천천히 읽어나가면서 보일 듯 하던 출구의 빛이 다시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비슷한 내용이 자꾸만 반복되는 것 같았고 나를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책의 내용을 떠올리며 길을 걷다 불현듯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외진 길이 있다. 한 구역 전체가 재개발 예정이 되어 있어 20분 정도 빠른 걸음으로 걸어 지나야 하는 긴 길목 전체가 빈집으로 채워진 길이다. 중간중간 다른 길로 빠져나가는 샛길은 철골과 큰 천막으로 막아두었고 빈 집의 닫힌 대문들마다 출입금지 안내문이 붙어있다. 이 외진 길은 옆동네로 가는 가장 빠른길이라 삭막하고 불안한 여건이긴 하지만 종종 이용하게 된다. 길을 지날때 대부분은 경찰차가 지나가거나 중간쯤 길 가에 세워져있는 것을 보면 대낮에도 적지 않은 횟수로 순찰을 다니는 듯 하다. 군데군데 빈집의 창문이 깨져있고 스프레이로 알 수 없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기도 한 그 길을 지나면서 악한 사람을 만날까봐 불안한 한 편, 다른 행인이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 안심이 되곤 한다. 불안함은 막연한 것이고 안심은 실재적이다. 맞은편에 나와 같이 걸음을 재촉하는 타인, 나의 존재를 흘끗 확인하고 무관심한듯 평이하게 거리를 두고 지나치는 타인의 모습에서 암묵적인 신뢰와 공감을 느꼈던 것이다. 

 이 깨달음은 사소한 것이었지만 다시 책의 앞부분에서 보았던 '10달러 투자 게임 P40'을 떠올려보니 5달러만큼 더 마음이 변해있었다.  " 이 외에 '우분투'라는 반투 개념, 즉 "사람은 다른 사람을 통해 사람이 된다"는 철학이 따라 살아가는 이가 수백만 명도 더 된다. 특히 서구 지역 밖의 사람들은 이웃과 조상, 후손과 자신들의 정체성을 공유한다. 비교해보면 호모이코노미쿠스처럼 사는 삶은 선택적이며 외롭고 비극적이다. 끝없는 탐욕은 우리 안에 고착된 본성이 아니다. 우리는 본래 이 행성의 적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 자신과 서로를 위하고 또 미래를 돌보는 것은 모두 동일한 일로 간주할 수 할 수 있다. p324 " 나도 상대방도 15달러씩의 이득을 볼 수 있는 세상에 더 가까워진 것이다. 의심했던 것을 책을 읽으며 확장하고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되는 흔치 않는 시간을 보내게 되어 즐거웠다.

 " 우리 가족은 이 일을 시작했다. 만약 내가 아이들 앞에서 사람들 불평을 하면 다른 사람들이 한 긍정적인 일도 찾아내야 한다. 예를 들자면 공원에 널브러진 쓰레기를 가리키며 불만을 내뱉었다면 공원을 깨끗이 청소하는 많은 자원봉사자 얘기를 해야 하는 식이다. 지난주에는 혼잡한 거리에서 공사장 차량 뒤에 서는 바람에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는데 옆 차선 차량이 멈춰준 덕에 차선을 바꿀 수 있었다. 보통 이런 작은 친절은 바쁜 아침 시간에 그냥 잊어비리기 십상인데 이번에는 아이들에게 낯선 사람이 속도를 줄여 멈춰준 덕분에 서로 도움이 됐다고 설명해줬다. 이런 예는 별것 아니게 느껴질지 모르고 어쩌면 진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들은 날카로운 과학자라 어른의 말을 통해 세상이 어떤 곳인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게 친절히 협력하는 사람을 찾으면서 아이들에게 균형 잡힌 세계관을 심어주려 노력하는 와중에 나는 뭔가 색다른 사실을 발견했다. 바로 말하는 습관이 마음의 습관이 된다는 것이다. P115 "
 
  의외로 많은 생각을 하면서 긴 시간동안 치열하게 읽어나갔는데, 이 내용을 읽으면서 떠올린 것이 작년의 핵심단어 중 하나인 '럭키비키'였다. 불운한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비슷하다고 여겨졌다. 처음엔 희망과 회의론자라는 조합이 있을 수 있나 싶었는데 그 안에서 생활과 밀접한 생각과 경우를 발견해나가니 생각하려 하지 않았을 뿐 충분히 가능했다는 걸 확인했다.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책을 덮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고백하건데 아주 오랜 시간동안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가졌다고 생각하고 지내왔다. 그게 과거에는 쿨cool했고, 현재에는 칠chill해보였다. 어리숙하게 남을 믿어서 손해를 보고, 가진 것을 전부 다 투자해서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일에 도전하고 실패하는 사람들보다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는 자신이 더 낫다고 여겼다. '그것 봐' 사리에 맞게 계산을 잘해서 손해안보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보니 내가 실패라고 여겼던 것들이 전부 경험이고 자양분이었다. 그때 해봤어도 될 노력이었고 실패였다. 참 늦게 깨달았다. 아직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런 태도를 바꾸고 싶어졌다.

 '희망찬 회의론자'를 통해 과거의 자신을 보면서 미래의 자신을 그리고 싶었다. 삶과 사람의 마음에는 답이 없기 때문에 기대만큼 선명하진 않을지도 모르지만 냉소주의의 터널에서 벗어날 만큼의 빛을 가지고 있는 책이었다. 회의론자를 위한 희망의 밝기는 이 정도여야 눈이 부시거나 놀라 달아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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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는 조각난 세계를 삽니다 - 돌봄부터 자립까지, 정신질환자와 그 가족이 함께 사는 법
윤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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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당 안 되는 자폐아 데려오지 마세요" ... 키즈카페 직원, 분노의 호소 - 뉴스1 소봄이 기자 25.02.20 " 책을 다 읽고 난 다음날 무심히 인터넷 기사를 훑다가 본 기사의 제목이다. 수십개의 댓글이 달렸다. 비단 '느린 아이'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대체로 부모가 아이를 잘 보살피지 않고 방치해두는 상황에 대한 비난과 공감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소아조현병 진단을 받은 나무를 데리고 갈 곳이 마땅치 않아 이리저리 돌아다닌 가족의 이야기를 읽고 난 뒤여서 그런지 마음 한구석이 켕겼다. 


 대충 어떤 내용인지만 알고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나무씨가 초등학생 때부터 질환을 앓기 시작했다는 내용은 당황스러웠다. 조현병이란 말에 소아라는 단어가 붙을 줄은 몰랐다. 망상과 불안, 환청을 겪는 어린아이라니 덜컥 겁이나고 충격적인데 18년 전의 가족들은 어떠했을까. " 조현병은 100명 중 한 명꼴로 흔하지만, 소아조현병의 경우는 1만 명에 한 명꼴이라고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기가 막혔다. 정신병이라고?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 이 아이에게 일어나다니. 왜 이런 형벌이 이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온 것일까? 도대체 왜? 하지만 신에게 따져 묻는 것도 아이를 치료할 방법을 찾고 나서 할 일이었다. (p21) "


 가끔씩 보게 되는 사회면 기사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가지고 있었다. '혹시 운이 없다면, 어쩌면 내 주위에도'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 대안학교에서 나무는 선생님들이 사람으로 대해줘서 좋다고 했다.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들어줘서 좋다고 했다. 그렇다면 일반학교에서는 사람으로 대해주지 않았다는 것인데, 아픈 와중에도 나무는 자신이 존중받는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알았다. 어쩌면 아프기 때문에 더 잘 알아챘을 것이다. 조현병 환자들은 인지는 엉키고 감각은 예민하다. 아프기 때문에 존중이 더 중요한데, 아이는 일반학교에서 무시와 멸시를 받았던 것이다. (p105) " 나무씨와 가족들의 이야기만으로 판단할 문제는 아니지만 불안과 사회적 조치에 대한 필요성이 더 큰 쪽이 어디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온 가족이 여러번 이사를 하고 많은 비용을 들여 아픈 나무씨를 위해 치료를 받고 환경을 바꾸며 노력해온 이야기를 읽고 있다보면 나무씨 가족은 정말 좋게 풀려나간 경우겠다는 짐작이 든다. 물론 이들의 고통과 노력이 적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조차 해볼 수 없이 힘든 시간을 버티고 있을 만 명에 한 가정, 백명 중 한 가정이 있을 것이다. 돌봄과 치료는 모두 비용과 시간, 인력이 든다. 이것들을 개인이 감당하려다 어느 한 균형이 무너져나가게 되면 그 가정은, 환자는 어떻게 될까. 다시 낮에 보았던 키즈카페와 자폐아에 대한 기사가 떠오른다. 그리고 자신이 조현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학교 생활을 했던 나무씨를 떠올린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는 이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 돌이켜보면 일을 다시 시작한 것은 나무의 치료에 큰 도움이 됐다. 일을 하지 않았다면, 매일 출근해서 집중할 일이 없었다면 우리는 나무의 병을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서로를 원망하고 탓하고 비난했을지도 모른다. 가족은 따로 또 같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때 건강한 관계가 유지된다. 특히 가족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면 더더구나 그렇다. 가족은 지나치게 뜨거운 관계이기 때문에 거리를 잘 유지해야 사랑 사이에서 길을 찾을 수 있다. 사랑과 돌봄 노동 사이에서도 길을 찾을 수 있고. (p87) "


 아픈 첫째 아이인 나무씨를 보살피는 지난 18년간의 이야기를 읽으며 때때로 나무씨의 동생에게 마음이 쓰였다. 건강한 둘째는 더 어린 나이에 어른인 부모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을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짧은 글로 그를 만났지만 엄마와 오빠가 극복의 이야기를 써가는 동안 그는 어떤 시간들을 보냈던 것일지 궁금했다. 책에 나무씨와 저자가 출연한 유튜브 내용이 나오는데 차마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는 한 편, 얼굴을 보고 더 가깝게 느끼게 된다면 마음이 더 복잡할 것만 같아 어려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이 우리 사회의 문제들과 얼마나 떨어져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남들과 다른, 배려가 필요한 사람들이 한국 사회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이 외면에서 비롯됨도 있을 것이다.  


 책을 한 권 읽었다고 갑자기 사고와 행동을 바꾸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주는 시간이었다. 행복한 결말로 끝을 장식하는 동화처럼 마음이 편한 내용을 담은 책은 아니지만 사회 성원으로 성숙해나가기 위해 읽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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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차별 - 그러나 고유한 삶들의 행성
안희경 지음 / 김영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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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선하다 내세운 내 의도, 곁에 있다고 주장한 연대선언에서 무언가를 흘렸다. 아마도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생각한 '무지'같다. 타인의 삶을 단순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상대의 생각과 감정을 헤아리는 데 골몰한다. 어리석음이다. 모른다는 것을 여태 붙들지 못하고 흘린다. 지금 허용받은 말은 사과뿐일 텐데도. (p106) "


 솔직히 이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가장 예민한 주제 중 하나인 젠더갈등과 개념 때문이었다. 처음 동성애자나 트렌스젠더의 존재를 알게 된 뒤로 무수히 많은 인정과 차별을 배웠다. 둘 중 하나만이 존재해야 할 법 하지만 그 둘은 늘 함께 따라왔다. 생각해보면 나의 인정은 차별이 가능한 위치에서 내어줄 수 있는 알량한 것이었다. 특히 트렌스젠더와 여성간의 갈등 양상을 빚는 문제들을 볼 때면 그동안 학습해왔던 인식마저 되돌리고 싶어하는 내면을 마주한다. 그럼 내 안에는 차별만이 남을까? 인정은 어디까지 해야하는 것이지? 차별과 권리, 평등과 혐오는 왜 이렇게 복잡하고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걸까? 누구도 정답지를 내어줄 수 없겠지만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도움을 받고 싶었다. 


 책을 읽으면서 그런 나의 계기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깨달았다. 젠더와 그에 수반된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문제들은 한국인인 내가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소수자로 겪은 유일한 경험이었던 것이다. '인간차별'은 그보다 더 넓고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 이 다양함이 책을 읽는 동안 약간의 두서없음으로 다가와 어렵기도 했다. 좀 더 각각의 흐름을 엮어 부드럽게 이어냈다면 좋았을텐데 아쉬웠다. 제각각이지만 저마다의 삶에서 겪은 부당함, 의문, 분노, 체념, 수치같은 것들을 딛고 삶의 방향성을 잡기 위해 어디에 가치관을 두었는지, 무엇을 받아들이기로 했는지 지켜보고 있자면 순수한 감탄이 나온다. 

 

 글로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 대해서 책을 읽는 내내 나의 시선은 유하다. 여러 구절에 표시를 해두면서 이런 관점은 새롭고,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깨닫고, 긍정적으로 호응한다. 책을 읽고 있는 동안은 언뜻 차별을 반대하는 성숙한 의식을 가진 사람인 것 같다. 그가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이 있지만 이목구비, 피부색, 옷차림, 언어 같은 것들이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기 때문이다. 명절 연휴에 지하철을 타고 번화한 상점가가 많은 지역에 간 적이 있다. 한국인들이 명절을 쇠는 동안 순수한 연휴를 갖게 된 많은 외국인노동자들이 외출을 나왔고 그 안에서 약간의 불편함과 불안감을 느꼈다. 여기가 한국인데도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은 것 같다는 게 주된 이유였던 것 같다. 책을 읽는 나와 지하철을 탄 나는 같은 사람이다. 


 오랫동안 살던 동네에서 이사를 하고도 긴 시간이 지났다. 지금은 옛동네에 가도 많은 것들이 달라져 골목에 어떤 가게가 있는지 이웃에 누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른다. 그런데 '사는 곳'을 배경으로 꿈을 꿀 때면 항상 전에 살던 동네의 집이 나오곤한다. " '사는 곳'이 주는 결속력이랄까? 노래 <고향의 봄>이 '나의 태어난 고향은'이 아니라 '나의 살던 고향은'으로 시작하는 이유도, 관계가 사는 곳과 살아온 시간에 뿌리 박히는 힘을 알아차려서인 것 같다. (p47)" 자라온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옮겨온 지역에서 지내다보면 고향에 대한 나의 인식도 변하게될까? 책을 읽으며 멀리서 바라보듯 혹은 무언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을 더듬어 찾고 있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이민자, 외국인, 다문화가정에서만 느낄 수 있을 것 같던 저자의 말을 조금은 알 것도 같은 순간이었다.


 사실 좀 더 분석적인 내용을 기대하기도 했고, 어지러운 흐름이 아쉽기도 했던 탓에 에필로그의 제목으로 '코끼리의 실체'가 나왔을때 의도와는 다르겠지만 내가 책을 읽으며 느꼈던 것과 비슷하단 생각을 했다. 모자이크의 조각들로 어떤 그림을 볼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것일까. 1교실 2교사 이상 체제(p194) 교복(p61)같은 문제들에 있어서 가끔 멈추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는 사람을 중심으로 두는 시선에 배워가며 읽었다. " 생각과 문화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거부감을 표현하는 순간 자칫 혐오의 경계에 들어설 수 있다. 알아차리지 않고 흘려보낸 감정으로 차별주의자에 갇힐 수 있다. 상냥함에 물들고 싶다. 그럴 나이다. (p35) " 상냥함에 물들고 싶은 그러나 자신안의 차별주의적 틀에서 벗어나기 힘든 이들에게 가볍게 권해보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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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2025.상반기 - 제51권 1호
한국문학사 편집부 지음 / 한국문학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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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도 노벨문학상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담겨 있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트라우마, 먼 이국의 궁중파티(p10)같은 표현은 얼떨떨했다. 정말 큰 성과이고 기쁨이긴 한데 이 정도로 생각했다고? 싶었다. 타인의 성과를 등에 업고 쿨한 척 하려는 건 아니지만 우린 이제 수상작을 원서로 읽는 사람들이니 좀 더 칠(chill)해져도 되잖아요. 약간 미심쩍은 눈으로 읽어나가다 특집으로 실린 좌담에서 인상적인 사진(p174)을 발견하고 웃음과 함께 마음이 좀 풀어져나갔다.


 문예지를 읽으면 즐거운 것이 다양한 글을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맛있는 한 그릇도 만족스럽지만 아무래도 뷔페를 가서 이것저것 먹어보는 재미 또한 크지 않겠나. 평소 내가 선택하지 못할 법한 주제, 작가, 분야에 대한 글들을 보고 있자면 이전에 해본 적 없던 생각들을 떠올리게 된다. 사실 나는 '김미옥 현상'이라는 말을 처음 봤는데 해당 SNS를 안해서인지 책을 잘 읽지 않아서인지 모르겠다. 다만 좌담이 굉장히 수다스럽게 이어져서 즐겁게 읽었다. 전에 이 느낌을 어디서 받은 적 있는데 싶더니만 조교할 때 교수실에서 안듣는 척 듣던 교수님들 대화 같았다. 


 백가흠의 '술의 가을'은 1부터 5까지 읽는 동안 꽤 즐거웠다. 특히 좌익수를 보던 시절의 이야기는 읽는 것만으로도 입꼬리는 올라가도 눈꼬리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표정을 만들어냈다. 이런 것은 너무 생생해도 좋지 않다. 15번 꼭지까지 이어지는 글은 술의 가을인지 술이 술술인지 모르게 뒤로 갈수록 작가가 진짜 취했나 싶이 온통 새우에 술 마신 이야기가 이어져 웃기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술을 마시다 자주 기억이 끊기면 뇌에 좋지 않다고 하니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애초에 음주에 직격인 간부터 전반적으로 건강에 좋지 않겠지만. 


 또 하나 재밌었던 꼭지는 '지금 우리 문화는'에서 한국 영화계의 현실을 다룬 내용이었다. 비슷한 말이지만 영화계에서 힘들다는 말은 너무 오랫동안 나와서 이제는 좀 힘들다고 하기 전에 왜 힘든지 개선하려는 변화를 보여야 하는 때가 아닌가 싶다. 논란있는 배우들 돌려쓰기, 감이 다 죽은 것 같은 시나리오, ott서비스 탓, 상영관 내부 청결, 업계 종사자도 영화관을 안가면서 도와달라 호소하는 행태들은 늘 말이 나오는데 개봉작들을 보면 절반은 이게 맞나 싶어진다. 관객들도 영화관 가서 영화보고 싶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를 만들면 사실 다들 간다.


 그런데 힘든건 영화산업만큼이나 출판도 마찬가지일테니 갑자기 함께 슬퍼진다. 그저 게으른 독자일 뿐이지만 저쪽에서 불이 났다길래 구경갔더니 우리집도 타고 있더라 같은 느낌이 든다. 영화는 대중문화이지만 독서는 그보다 더 파이가 적지 않은가. 요즘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문득 책을 읽는 사람을 보면 잠시 구경한다. 흔치 않은 풍경이 된 셈이다. 물론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로 서점에 줄을 서고 책이 동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부족하다. 한줌단이 열배 백배는 더 늘어났으면 한다. 책을 읽읍시다랑 기적의 도서관 좀 다시 부활해주길. 


 평소 소설과 시 위주로 관심을 가지고 읽었다면 이번엔 다른 주제들이 더 인상깊게 남아 즐겁게 읽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어 내용이 좀 벗어나긴 했지만 그래서 더 좋은 내용들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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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폴라 일지
김금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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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폴라 일지'를 두고 두 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하나는 진짜 남극에 갔다고? 다른 하나는 작가 김금희가 맞나? 다소 싱거운 이 질문의 답은 둘 다 맞다. 였다. 그럼에도 의문을 가졌던 것은 뭔가 쉽게 연상하기 어려운 조합이었기 때문이다. 펭귄이나 북극곰, 고래, 끝없는 눈과 빙산 혹은 오로라 같은 이미지로만 알고 있는 극지방에 대한 로망이 나에게도 있었다. 알고보니 남극과 북극으로 나뉜 모든 로망의 혼합이었지만 그래도 세종기지의 대원을 모집하는 글을 몇번이고 훔쳐보며 이런저런 궁리를 해보기도 했다. 가진 재주라곤 평범하기 뿐이라 유일한 방법은 조리 분야 지원 뿐이었는데 자격증과 경력이 요구되는 높은 난이도에 좌절됐다. 그런데 그런 남극엘 갔다니 대단하고 부러웠다.

 처음 한동안은 이 모든 준비과정과 낯선 세상에서 맞이한 어색함, 20년차 월동대장에게 남극생활 2일차에 조언을 건네는 등의 실수들 마저 자랑처럼 느껴졌다. 이런 점들이 어려웠어 하고 말할 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원하던 곳에 도달했다는 작가의 기쁨이 숨겨지지 않고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2인1조로 다닐 것, 비펭귄인간 하며 지칭하는 말들도 뉴요커의 'the city' 발언처럼 어쩐지 그들만의 호칭처럼 여겨졌다. 질투에 사로잡힌 사람의 마음을 녹인 것은 중간 부분이 자꾸 벌어지길레 펼쳐보니 들어있던 엽서였다. 펭귄은 귀여웠고, 그 뒤로 일렁이는 바다의 빛은 조금 쓸쓸했는데 책 안의 긴 이야기들보다 엽서에 담긴 짧은 글귀 안에서 이 경험을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전해졌다.

 그 뒤로는 괜한 부러움은 접어두고 그저 흥미롭게 읽어나갔다. 작가는 낯을 가리고 스몰토크를 어려워한다고 몇번이나 강조했지만 나였다면 아마 이렇게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만큼 적극적이었다. 식생팀에 참여하거나 '안'을 따라 옆새우 채취를 나서는 등 MBTI가 E세요? 싶은 활발함이었다. "드디어 결심하셨군요!"(111) 고장난 벽시계의 건전지를 갈아끼우듯 눈앞에 놓인 일을 어찌나 씩씩하게 해내던지 이런 행동력이 있었기 때문에 남극까지 갈 수 있었구나 싶어졌다. 힘이 들어 어떤 사람들은 굳이 가지 않는다는 까마득한 산을 올라 보기도하고 보기 어렵다던 고래까지 보고 온 작가가 자신의 전부인 문학*(p255)을 주제로 한 북토크를 도전해보지 않고 돌아온 것은 조금 아쉬웠다. *문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토록 강렬하고 열정적인 답이라니.   

 책을 다 읽은 건 집이 남극처럼 추운날이었다. 한동안 조금씩 천천히 남극의 이야기를 읽어오다 갑자기 현실로 내쳐진 듯한 끝맺음이 어떨떨했다. 사태를 삶아 썰어넣은 국물에 마른 찬밥과 가래떡을 살짝 말려 직접 썰어두었던 떡국떡을 몇 줌 넣어 떡국도 국밥도 아닌 것을 끓여 훌훌 먹고는 책의 마지막 몇 장을 읽다가 얼마 있지 않아 몸이 굳고 어깨가 아파와 전기장판 안으로 도망쳤다. 현실의 차가움에 굳어 있다가 '완전한 사육'처럼 느껴졌다는 저녁 6시의 어린이 목소리를 떠올렸다. "벌써 저녁 시간이 되었어요. 하는 일 멈추고 식사하러 오세요. 밥은 먹고 지내요" (71) 낭랑한 목소리에 어딘지 위화감이 드는 어조 때문에 나는 그게 '오징어게임'의 안내방송처럼 생각됐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다정한 안부처럼 느껴졌다. 어떤 일이 있든 '밥은 먹고 지내요'

 책 안에는 온통 머나먼 곳의 이야기로 가득한데 지역번호가 032로 되어 있어서일까 특별함은 금새 사위어버리고 말았다. 오히려 비일상 가운데 에필로그로 짧게 정리된 일상이 더욱 강렬하게 남았다. 꿈은 나를 나아가게 하지만 언제고 나를 가장 강하게 땅에 붙들어두는 것은 주변의 모든 현실들이다. 그래서 '나의 폴라 일지'가 더 인상깊게 다가왔다. 남극에서 마주한 자연과 경이 같은 것이 아니라 생활과 가족이 삶의 어떤 순간에, 심지어 그토록 바라왔던 꿈같은 때에도 배제되지 않은 채 얽혀 인생이란 것의 의미를 곱씹게 해주는 것 같아서. 지구의 모든 펭귄과 비펭귄인간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추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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