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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중록 1 ㅣ 아르테 오리지널 1
처처칭한 지음, 서미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4월
평점 :
" 그때부터였다. 서로 대립해도 좋았고, 얽히는 것도 좋았다. 그렇지만 이서백의 인생에서는 역시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가며 서로를 잊는
게 제일 좋으리라. (p.293) "
로맨스소설 같은 류의 웹소설은 더이상 읽지 않으려 했었다. 때는 2천년대 초반. 다음카페라는 인터넷의 장이 열리고 그 안에서 웹소설
광풍을 일으킨 희대의 명작들이 등장하였다. 그 이름만 들어도 지나가던 여고생들이 각자 '이강순 내가 니 별이다' '다음에 태어나면 내 누나
하지마' '은성아'를 외치며 오열하게 만들었던 작가 '귀여니'의 작품을 비롯해서 여러 '인소'들을 읽으며 폐인이 되었던 흑역사를 정리하며
개인적인 분서갱유를 치뤄낸 뒤로 그때는 인터넷 소설이었지만 지금은 웹소설이라 불리는 장르에 다시는 발들이지 않겠다고 다짐까지는 아니어도 생각은
했었던 것이다. '잠중록'을 무작정 같은 선상에 놓긴 좀 그렇지만, 어쨌든 그런 뉘앙스를 풍기기만 해도 읽지 않고 넘기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글자 뒤에 점하나씩 붙여놓기만해도 자판위의 손가락이 오그라들고 고개를 들어 모니터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던 험난했던 시절도
지나가고, 이제는 인소의 추억도 수치심을 즐기는 길티플레져의 한 종류로 받아들일만큼 성숙해진 뒤라 묻어둔 봉인을 깨고 '잠중록'을 읽기로
해본다. 웹소설이지만 괜.찮.다.구.요. 써보니까 아직 덜 괜찮은 것도 같다.
'잠중록'이 중국 소설이라 처음엔 읽기 어색하면 어떡하지 걱정을 조금 해봤다. 게다가 사극이라 당나라, 장안, *형 같은 지명, 호칭이나
시대 설정에 적응하기 어려우면 어떡하지 걱정하면서 읽다가 인소 읽기 전에는 무협 읽었던 전력을 떠올리며 나는 그럴 일이 없겠구나하고 걱정을
넣어두었다. 장르소설 취향을 꽁꽁 봉인해두었더니 내 전력이 어땠는지 진짜로 잊어버릴 뻔 했다. 다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황제의 딸'도
본방사수하면서 봤다. 비슷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진입장벽 걱정말고 소문난 잔치에 뭐 먹을 것 있나 빨리 찾아오는 것이 좋겠다. 뭐든
빨리 파는 사람이 떡밥도 많이 챙기는 법이다. 작정하고 여주인공이 남장 여자부터 시작하는 소설이니 '커피 프린스' 인생 드라마로 모셔두고
재방마다 채널 고정하는 분들도 오.시.라.구.요. 점찍는 것은 이제 그만해야겠다.
로맨스 소설인줄 알고 읽었는데 왜 나오는 것은 온통 살인사건 뿐인걸까. 여주 황재하가 영민하고 아주 예쁜 것은 아니나 눈이 맑아 시선을
사로잡는 미인인 것은 알겠고, 남주인 이서백이 비상한 기억력에 유능하고 옷도 잘 입는데다가 냉한 미남자인 것도 알겠는데 둘이 붙어서 티격태격
설레이는 것보다 고난만 가득한 여주 인생에 여기저기 살인사건만 묻어나는 것이 둘 중 하나는 김전일이고 하나는 코난인가보다 싶다. 다만 사건을
어찌 해결하는지는 설명해주기 전까지는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할 추리방법이라, 읽으면서 범인이 누군지 밝혀내기는 커녕 빨리 설명 안해주면 내가
범인이 되어버릴 것 같은 궁금증만 불러일으킨다. 시대적 배경 탓인지 의외로 동기나 자백은 현대의 그것보다는 슴슴하다. 추리 장르물 안 읽어본
사람도 이정도의 사건 묘사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추리물로는 뤼패니앵 쪽이었던 과거도 떠올랐다.
이건 뭐 장르물의 총집합 선물셋트가 아닌가. 이 중에 니 마음에 드는 코드 하나쯤은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사람이 진짜 돈 벌려고 작정을
한건지 책안에 시대물, 남장여자, 추리, 로맨스까지 죄다 들여놓았다. 대기업의 경계없는 사업 확장으로 소비자가 오예하는 상황이 '잠중록'
안에서도 펼쳐진다. 아이스크림도 31가지 중에 골라먹는 마당에 책 한 권 안에서 장르파는 사람들이 죄다 빠져 읽을만한 탄탄한 줄기를 가지고서,
본인 분야 골라먹는 재미까지 얻을 수 있는 이야기가 나온다니. 안그래도 글자라면 전단지에 인쇄해놓은 오탈자도 챙겨읽는 활자 매니아들에게 환영받을
수 밖에 없는 책이었다. 웹소설 안보겠다 피해왔지만 확실히 재미있고 몰입도 높은 책이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다소 고전적인 로맨스 부분의 기본
설정이 좀 아쉽지만 아는 맛이 더 무섭다고 고전적인 설정만큼 치명적인 매력도 없으니까.
1권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정작 황재하가 처한 상황을 풀 실마리의 끝에도 다가가지 않은 채 이야기가 끝나버렸다. 주인공들의
만남과 주변에 얽힌 문제부터 풀어나가면서 아직 제대로 된 내용이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로맨스 또한 마찬가지의 상황이다. 그저 가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느껴지는 생소한 감정을 조금씩 의식하는 단계일 뿐이다. 때문에 이서백에 비해 신분도 낮고 상황도 좋지 않은 황재하는 발로 채이고 돈도
없고 쫄쫄 굶어가며 열심히 굴려지고 있다. 둘 사이가 아직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황재하를 홀대하는 이서백이 나중에 얼마나 바뀌게 될지 기대하며
보는 재미도 있다. 자고로 로맨스 소설의 남자주인공은 후회도 좀 하고 나중에 되서야 쩔쩔매는 맛이 있어야 하니까. 지금은 다소 느려서 답답하다고
생각되지만 앞으로의 흐름이 기대된다.
또 하나 '잠중록'이 가진 매력은 황재하의 인물 설정이다. 짐이 되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고 능력까지 좋은 여자주인공이다. 돈이 없으면
돈이 없어서 못살겠다 할 말도 하고, 똑똑한 탓에 처세도 잘 해낸다. 남자주인공의 도움으로 요행히 곤경에서 구해지는 타입이 아니라 스스로
기어나오는 틈에 지옥에 빠진 남자주인공도 같이 건져올릴만한 능력있는 인물이라 마음에 들었다. 바보같이 엉뚱한 행동으로 읽는 사람을 대리 수치심에
빠지게 하는 일도 없다. 다만 황재하가 활약하는 동안 이서백의 비중이 적고, 때때로 소꿉친구인 우선을 애틋하게 떠올리는 일이 있어 남자주인공의
존재가 아직은 희미하다는 점이 신경쓰인다. 하지만 이 점도 남은 3권의 분량이 전개되면서 기대해볼만한 흐름일 것 같다. 거기에 한 권에
500쪽에 달하는 분량이니 남은 이야기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다만 아쉬운 점은 지금 내손에 1권밖에 없다는 것. 자고로 먹을 때와 읽을 때는 흐름 끊기면 안된다는게 강같은 진리인 것을 책은 전
4권으로 되어 있는데 내 손안에는 1권밖에 없고, 3권과 4권은 물려 출.간.예.정.이니 두루미 초대해놓고 접시에 스프 깔아주는 것 같은 이
감질남은 거의 고문도구와 다름없다. 월화드라마 중독되면 주말도 빨리 지나가서 월요일 되길 바라는 성격의 사람들은 나머지 분량 출간 기다리다
눈에 핏발서고 혼자 앓다앓다 오히려 탈덕을 감행할지도 모르니 조심하길. 이럴 줄 모르고 그냥 읽은 나는 내 현생을 망치러 온 나의 웹소설,
절차밟아 고소들어갑니다. 나와 같은 성미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경고하는데 하나씩 하나씩 사뒀다가 4권까지 나오면 한꺼번에 읽기를 추천한다.
스포일러 조심하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