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와 거짓말 : 금기 속에 욕망이 갇힌 여자들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이현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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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군가 우리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주면 오히려 그 거울을 깨버리는 사회, 그것이 바로 모로코 사회다. (p.87)"

 

 '섹스와 거짓말' 은 읽기 어려운 책이었다. 책의 주제도 그렇고 각 장에 담긴 내용들도 하나같이 불편했다. 불편하다는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분량이 많은 것도 아닌데 가벼운 마음으로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모로코만큼은 아니겠지만, 페미니즘이란 말만 입에 올려도 공격과 비난의 시선이 날아드는 사회 분위기가 존재한다는 것이 신경쓰인다. 심정적으로 공감되는 부분이 있을지언정 그것을 표현하기는 꺼려지는 것이다. 이렇게 먼 곳에서도 발끝에 물이 닿을까 주저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호수의 한 가운데에 뛰어들어 파문을 일으키려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을까 싶었다.

 

 처음에는 불쑥 솟아오르는 모로코와 이슬람 사회에 대한 비난을 참아내기 어려웠다. 한명 한명의 증언이 더해질 때마다 더욱 스트레스가 올라가다 " 저 외국 딴따라들이 뭔데 내 나라까지 와서 우릴 가르치려 드는 거야? (p.96) " 하는 내용이 눈에 밟혀 무작정 화내지도 못했다. 우리 내부의 문화이자 문제로 고착된 것들도 외부의 지적을 받았을 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 알기 때문이다. 문화 차이의 존중은 일의 옳고 그름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인지, 그 옳고 그름의 잣대가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에 대한 구분이 필요한 것인지 생각했다. 여성의 문제이니까 함께 연대하여 소리를 내는 것이 괜찮은걸까.  

 

 책에서 모로코 여성은 9시 이후에 길에 나서면 안되고, 치마를 입거나 길에서 담배를 피우는 일만으로도 창녀 취급을 받는다. 아버지 뻘의 남자와 원치 않는 결혼을 하고, 자신을 강간한 남자와 결혼을 한다. 심지어 강간범은 처벌을 받지도 않는다. 그러다 문득 이 비슷한 일들이 과거 우리나라에도 있었던 것을 떠올린다. 미니스커트는 경범죄처벌을 받았고, 70년대 대구 고등법원에서 법정약혼, 90년대 서울 고등법원에서 양쪽부모 합의로 성폭행범과 피해자를 결혼시키려는 판결이 있었다. 담배 사례는 담배 피는 여자만 검색해도 아 싫어요 내가 싫어요 사회시선이 그래요 어쩌고 하는 내용이 수두룩하다.

 

 저 시점에서 지금까지 우리는 얼마나 멀어졌을까 생각해본다. 충분히 멀어졌을까 아니면 멀어지려 애쓰고 있을까. '섹스와 거짓말'을 읽으며 이슬람 사회에 대한 비난을 하고 싶다가도 그 자체를 비난할 수 없는 비슷한 흔적을 우리 사회에서 발견하기도 하고, 내 옆의 빈자리를 남에게 내주는 일이 공연히 탐탁지 않은 기분을 들게 만드는 것임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정도는 다르더라도 모든 사회에서 여성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으로써 존재하기 위해, 원하는대로 행동하기 위해. 발끝이 적셔지는 일이 두렵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가 고민해보게 만드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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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유인원
나이절 섀드볼트.로저 햄프슨 지음, 김명주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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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 유인원' 책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4차산업혁명을 떠올렸다. 인공지능, 로봇기술, 생명과학이 주도하는 이 차세대 산업혁명은 지금도 그렇지만 재빠르지 못한 나도 한동안 4차산업혁명과 관련된 책들을 몇권 읽어보게 될 만큼 주목받는 주제였다. 4차산업혁명은 예정된 미래이자 현실이기 때문에 기술과 이론의 원리와 구조를 이해하는 소수에 비해 중간의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쥐어진 현대 기술 발전의 산물을 이용만 하는 다수에게 미래는 존재의 위협을 느낄 수 있는 디스토피아적 뉘앙스를 보여준다. 때문에 처음 이 책을 봤을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좀 더 이해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하며 읽었다.

 

 책은 호미닌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존재하는 호모 사피엔스가 "외부의 물건을 능숙하게 다룸으로써 지구 전체를 변모시키"고, "우리 자신이 살아가는 생활 환경 전체를 변화시켰(19)"음을 시작으로 왜 우리가 '디지털 유인원'으로 이름 붙여졌는지 설명한다. 다른 유인원들과 달리 나머지 네 손가락들과 마주보도록 진화한 인간의 엄지손가락을 통해 수만년전부터 도구의 사용이 인간의 발달에 영향을 끼쳤음을 자연스럽게 연결 짓는다.(23) 인간이 사용해온 그 '도구'는 주변에서 얻어진 주먹도끼(117)에서 시작하여 엄지손가락 기술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핸드폰까지 연결된다. 이를 통해 손안에 놓여진 도구의 종류만 다를 뿐 그 근본은 여전히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임을 자연스럽게 연상하게 된다. "도시 혹은 시골의 환경, 그녀가 하는 일의 사회적 목적, 하루중의 이런저런 사건에서 그녀가 느끼는 인간적인 감정은 옛날과 매우 비슷하다. 디지털 기술은 새롭지만, 유인원은 옛날 그대로다(319)"

 

 초반의 몇장에서는 기술의 발전이 인간 사회의 시대적 흐름에서 어떤 식으로 진행되어 왔는지를 서술하는 한편, 인간으로부터 만들어진 기술이 다시 어떤 식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주어 변화시켰는지를 말한다. 털이 적은 몸이 불을 사용하는데 어떤 이점을 주었는지, 추위를 막기 위해 어떤 식으로 군집했는지, 외부에서 소화 단계를 거치고 들어온 음식물이 위를 작게 만들고 에너지를 어디에 더 집중하도록 만들어 주었는지, 뇌의 크기가 어떤식으로 변화하였는지를 동원하여 인간이라는 종이 다른 동물들을 제치고 어떻게 가장 큰 발전을 할 수 있었는지 과거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해준다. 개인적으로는 위의 부분들이 어렵지만 꼭 필요한 통과 지점이었는데, 책을 찍어낸 종이에 수면제 성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인쇄소에 확인을 해봐야되나 싶을만큼 읽기 더뎠던 부분이기도 했다.

 

 5장의 내용으로 들어서면서부터는 인공지능과 로봇기술, 생명과학에 관련된 주제들이 하나씩 등장하기 때문에 좀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벌써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무인상점들을 비롯하여 노동의 상당부분을 인간 대신 로봇이 대체하게 될 근미래에 이로 인한 부작용을 해결할 방법으로 언급된 '로봇세'와 이 노동경쟁에서 진 인간에게 어떻게 소득을 보장해 줄 것인지에 관해 어떤 의견을 보여줄까 궁금했었다. 이미 로봇에 인격을 부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유럽의 실제적 사례가 있기 때문에 탈노동 생존보장의 한 방안으로 가볍게 생각했었는데, 로봇세는 비유적 표현(328)일뿐 제안이 될 수 없음을 짚어낸 부분을 읽으며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받았다.

 

 또 재미있었던 부분은 8장, 데이터와 관련된 내용들이었는데 "서양 세계 전역에서 범죄율이 떨어지고 있는 한 가지 이유(319)"가 될 수 있는 디지털 시대의 현 상황이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파놉티콘의 형상을 띄고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전부터 중국의 텐왕(AI를 이용한 폐쇄회로 감시시스템) 프로젝트에 대한 자료를 볼 때마다 부정적으로 생각했었는데, 우리의 생활도 강도에 차이가 있을 뿐 같은 시스템안에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더불어 기록되어 사라지지 않는 데이터들이 어떤식으로 관리되어야 할지 '거대한 짐승'들이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는 개인들의 정보를 어떤 식으로 규제하고, 데이터로 인해 발생하는 이윤을 어떻게 분배하여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과거 미래사회를 떠올릴 때 그 명암을 상상할 뿐이었다면 지금은 그 갈림길에 서 있는 존재가 되었다. 로봇의 노동에 세금을 부과함과 동시에 인간다움의 규정을 넘어 인간 자체에 대한 규정을 내려야하고, 기차역의 전등을 켜고 끄는 일로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새로이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어떤 미래가 주어질까 이 책을 통해 조금은 답을 찾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들도 있었지만 뒤로 갈수록 새로운 디지털 통화로 언급된 비트코인(360)이나 무선 샤워기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하는 와이파이(454) 부분 같이, 지금 우리가 접하고 고민해왔던 익숙하고 현실적인 문제들을 다룬 내용들이 많아 흥미를 잃지 않고 끝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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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중록 1 아르테 오리지널 1
처처칭한 지음, 서미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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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때부터였다. 서로 대립해도 좋았고, 얽히는 것도 좋았다. 그렇지만 이서백의 인생에서는 역시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가며 서로를 잊는 게 제일 좋으리라. (p.293) "

 

 로맨스소설 같은 류의 웹소설은 더이상 읽지 않으려 했었다. 때는 2천년대 초반. 다음카페라는 인터넷의 장이 열리고 그 안에서 웹소설 광풍을 일으킨 희대의 명작들이 등장하였다. 그 이름만 들어도 지나가던 여고생들이 각자 '이강순 내가 니 별이다' '다음에 태어나면 내 누나 하지마' '은성아'를 외치며 오열하게 만들었던 작가 '귀여니'의 작품을 비롯해서 여러 '인소'들을 읽으며 폐인이 되었던 흑역사를 정리하며 개인적인 분서갱유를 치뤄낸 뒤로 그때는 인터넷 소설이었지만 지금은 웹소설이라 불리는 장르에 다시는 발들이지 않겠다고 다짐까지는 아니어도 생각은 했었던 것이다. '잠중록'을 무작정 같은 선상에 놓긴 좀 그렇지만, 어쨌든 그런 뉘앙스를 풍기기만 해도 읽지 않고 넘기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글자 뒤에 점하나씩 붙여놓기만해도 자판위의 손가락이 오그라들고 고개를 들어 모니터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던 험난했던 시절도 지나가고, 이제는 인소의 추억도 수치심을 즐기는 길티플레져의 한 종류로 받아들일만큼 성숙해진 뒤라 묻어둔 봉인을 깨고 '잠중록'을 읽기로 해본다. 웹소설이지만 괜.찮.다.구.요. 써보니까 아직 덜 괜찮은 것도 같다.

 

 '잠중록'이 중국 소설이라 처음엔 읽기 어색하면 어떡하지 걱정을 조금 해봤다. 게다가 사극이라 당나라, 장안, *형 같은 지명, 호칭이나 시대 설정에 적응하기 어려우면 어떡하지 걱정하면서 읽다가 인소 읽기 전에는 무협 읽었던 전력을 떠올리며 나는 그럴 일이 없겠구나하고 걱정을 넣어두었다. 장르소설 취향을 꽁꽁 봉인해두었더니 내 전력이 어땠는지 진짜로 잊어버릴 뻔 했다. 다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황제의 딸'도 본방사수하면서 봤다. 비슷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진입장벽 걱정말고 소문난 잔치에 뭐 먹을 것 있나 빨리 찾아오는 것이 좋겠다. 뭐든 빨리 파는 사람이 떡밥도 많이 챙기는 법이다. 작정하고 여주인공이 남장 여자부터 시작하는 소설이니 '커피 프린스' 인생 드라마로 모셔두고 재방마다 채널 고정하는 분들도 오.시.라.구.요. 점찍는 것은 이제 그만해야겠다.

 

 로맨스 소설인줄 알고 읽었는데 왜 나오는 것은 온통 살인사건 뿐인걸까. 여주 황재하가 영민하고 아주 예쁜 것은 아니나 눈이 맑아 시선을 사로잡는 미인인 것은 알겠고, 남주인 이서백이 비상한 기억력에 유능하고 옷도 잘 입는데다가 냉한 미남자인 것도 알겠는데 둘이 붙어서 티격태격 설레이는 것보다 고난만 가득한 여주 인생에 여기저기 살인사건만 묻어나는 것이 둘 중 하나는 김전일이고 하나는 코난인가보다 싶다. 다만 사건을 어찌 해결하는지는 설명해주기 전까지는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할 추리방법이라, 읽으면서 범인이 누군지 밝혀내기는 커녕 빨리 설명 안해주면 내가 범인이 되어버릴 것 같은 궁금증만 불러일으킨다. 시대적 배경 탓인지 의외로 동기나 자백은 현대의 그것보다는 슴슴하다. 추리 장르물 안 읽어본 사람도 이정도의 사건 묘사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추리물로는 뤼패니앵 쪽이었던 과거도 떠올랐다.

 

 이건 뭐 장르물의 총집합 선물셋트가 아닌가. 이 중에 니 마음에 드는 코드 하나쯤은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사람이 진짜 돈 벌려고 작정을 한건지 책안에 시대물, 남장여자, 추리, 로맨스까지 죄다 들여놓았다. 대기업의 경계없는 사업 확장으로 소비자가 오예하는 상황이 '잠중록' 안에서도 펼쳐진다. 아이스크림도 31가지 중에 골라먹는 마당에 책 한 권 안에서 장르파는 사람들이 죄다 빠져 읽을만한 탄탄한 줄기를 가지고서, 본인 분야 골라먹는 재미까지 얻을 수 있는 이야기가 나온다니. 안그래도 글자라면 전단지에 인쇄해놓은 오탈자도 챙겨읽는 활자 매니아들에게 환영받을 수 밖에 없는 책이었다. 웹소설 안보겠다 피해왔지만 확실히 재미있고 몰입도 높은 책이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다소 고전적인 로맨스 부분의 기본 설정이 좀 아쉽지만 아는 맛이 더 무섭다고 고전적인 설정만큼 치명적인 매력도 없으니까.  

 

 1권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정작 황재하가 처한 상황을 풀 실마리의 끝에도 다가가지 않은 채 이야기가 끝나버렸다. 주인공들의 만남과 주변에 얽힌 문제부터 풀어나가면서 아직 제대로 된 내용이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로맨스 또한 마찬가지의 상황이다. 그저 가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느껴지는 생소한 감정을 조금씩 의식하는 단계일 뿐이다. 때문에 이서백에 비해 신분도 낮고 상황도 좋지 않은 황재하는 발로 채이고 돈도 없고 쫄쫄 굶어가며 열심히 굴려지고 있다. 둘 사이가 아직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황재하를 홀대하는 이서백이 나중에 얼마나 바뀌게 될지 기대하며 보는 재미도 있다. 자고로 로맨스 소설의 남자주인공은 후회도 좀 하고 나중에 되서야 쩔쩔매는 맛이 있어야 하니까. 지금은 다소 느려서 답답하다고 생각되지만 앞으로의 흐름이 기대된다.  

 

 또 하나 '잠중록'이 가진 매력은 황재하의 인물 설정이다. 짐이 되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고 능력까지 좋은 여자주인공이다. 돈이 없으면 돈이 없어서 못살겠다 할 말도 하고, 똑똑한 탓에 처세도 잘 해낸다. 남자주인공의 도움으로 요행히 곤경에서 구해지는 타입이 아니라 스스로 기어나오는 틈에 지옥에 빠진 남자주인공도 같이 건져올릴만한 능력있는 인물이라 마음에 들었다. 바보같이 엉뚱한 행동으로 읽는 사람을 대리 수치심에 빠지게 하는 일도 없다. 다만 황재하가 활약하는 동안 이서백의 비중이 적고, 때때로 소꿉친구인 우선을 애틋하게 떠올리는 일이 있어 남자주인공의 존재가 아직은 희미하다는 점이 신경쓰인다. 하지만 이 점도 남은 3권의 분량이 전개되면서 기대해볼만한 흐름일 것 같다. 거기에 한 권에 500쪽에 달하는 분량이니 남은 이야기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다만 아쉬운 점은 지금 내손에 1권밖에 없다는 것. 자고로 먹을 때와 읽을 때는 흐름 끊기면 안된다는게 강같은 진리인 것을 책은 전 4권으로 되어 있는데 내 손안에는 1권밖에 없고, 3권과 4권은 물려 출.간.예.정.이니 두루미 초대해놓고 접시에 스프 깔아주는 것 같은 이 감질남은 거의 고문도구와 다름없다. 월화드라마 중독되면 주말도 빨리 지나가서 월요일 되길 바라는 성격의 사람들은 나머지 분량 출간 기다리다 눈에 핏발서고 혼자 앓다앓다 오히려 탈덕을 감행할지도 모르니 조심하길. 이럴 줄 모르고 그냥 읽은 나는 내 현생을 망치러 온 나의 웹소설, 절차밟아 고소들어갑니다. 나와 같은 성미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경고하는데 하나씩 하나씩 사뒀다가 4권까지 나오면 한꺼번에 읽기를 추천한다. 스포일러 조심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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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은 순례길이다 - 지친 영혼의 위로, 대성당에서 대성당까지
김희곤 지음 / 오브제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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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과 인간의 믿음으로 쌓아올린 고딕 대성당의 아치의 정점에는 어김없이 키스톤이 박혀 있다. 키스톤이 박혀 있지 않다면 하늘을 찌르는 대성당의 무게는 지탱할 수 없다. 우리 삶의 정점에도 어김없이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절대 사랑의 키스톤이 박혀 있음을 돌의 신전은 엄숙하게 말했다. 대성당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한 에너지는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시키고,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도록 끊임없이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던 절대 사랑이었다. 인간이 대성당을 지었지만 대성당이 인간을 성장시켜주었음을 산티아고 순레길의 건축이 사랑의 온기로 증명해주었다. (p.333) "

 

 산티아고 순례길. 십여년 전 쯤 어디선가 선물로 받은 책에서 만난 이름이었다. 그 책을 읽기 전까지는 세상에 그런 곳이 존재한다는 것을 몰랐다. 알고 났더니 언젠가 꼭 한번 떠나고 싶은 장소가 되었다. 걷고 걷는 일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면서도 그 길 위에서 걷는 일이 언젠가 삶의 한 순간에서 꼭 있어야만 할 것처럼 바라게 되었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 때로는 잊은듯이 지내다가 때로는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여행 프로그램에서 무심결에 마주치기도 하며 지내왔다. 그곳에 가고싶다는, 아직 이루지 못했지만 잘 간직하고 있는 소망탓에 '스페인은 순례길이다'를 보자마자 끌린듯이 읽어보게 되었다. 저자가 순례길 위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했다.

 

 '스페인은 순례길이다'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다른 책들과는 조금 다르다. 순례길을 걷는 천천한 이동의 면면을 보여주고 있지만 흔히 곁들여지는 개인적인 사색이나 감성은 없다. 건축물에서 건축물로 옮겨지는 시선을 통해 우리가 그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전달해준다. 그동안 읽었던 책들에서는 물집잡힌 발 때문에 고생하는 일, 걷다가 만난 사람들, 자신 내면의 고민과 생각들이 길 위에 펼쳐져있었다면, 이 책에서는 오로지 건축물 뿐이다. 어떤 양식으로 지어졌는지, 무슨 장식을 눈여겨보면 좋을지, 건축 배경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모른다면 지나치기 쉬운 성당, 수도원, 궁, 알베르게 등의 아름다움을 잘 설명해놓았다. 

 

 책에는 얼마 전 화재로 피해를 입은 노트르담 대성당(31)에 대한 내용도 나와있다. 문득 생생한 성당의 외관을 담아낸 사진과 스케치를 마주하게 되니 새삼스러운 충격이 전해졌다. 우리가 우리 앞에 놓인 운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채 그저 현실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눈앞에 들이밀어진 느낌이었다. 거기다 문득 반가운 건물의 외관을 만나게 되는데, '스페인 하숙' 프로그램의 촬영지인 스페인 레온 주의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가 나온다. 책에서는 몇장의 사진 뿐이지만 몇번이나 텔레비전으로 본 탓에 방송에서 보여준 산골마을의 전경이 그려지며 가본 적 없는 곳에 대한 반가움과 친밀함이 솟아난다. 다른 독자들도 그러하리라. 

 

 건축물들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인상적인 설명도 좋지만, 또다른 매력은 정성들여 찍은 사진(김희곤, 카리타, 윤기병, 손진)과 거칠면서 섬세한 스케치에 있다. 어찌나 멋지고 아름답게 찍어낸 사진을 골라 담았는지,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천천히 사진과 스케치만을 다시 넘겨보았다. 푸른 하늘과 흰구름을 배경으로 한 오래된 건축물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낯선 바람이 느껴지는 듯한 현장감이 든다. 무엇인가 자신이 깊게 매료되고 연구한 분야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충실한가. 같은 공간 안에서도 더 많은 의미를 찾아 해석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저자가 대단하고 부러웠다. 언젠가 나도 순례길을 떠나게 된다면 이 책을 분철하여 가지고 가야지 생각했다.

 

 다만 왜 표지와 함께 둘러진 띠지의 앞부분에 저자보다 방송국 작가의 이름이 더 크게 붙여져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방송의 인기 때문일지는 몰라도 언뜻 비슷한 제목으로 다른 사람이 낸 책이라고 잘못 생각했다. 방영하고 있는 인기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작가가 시기를 맞추어 낸 책이라고 생각했다가 표지를 한 번 더 뜯어보고 아니구나 했다. 오히려 띠지의 앞과 뒤의 내용이 바뀌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전쟁과 종교의 역사라고 생각했던 길을 '절대 사랑'으로 쌓아올려진 '사랑의 건축'으로 바라보았다는 애정가득한 저자의 시선으로 잘 마무리 된 점이 좋았다. 다소 건조하게 느껴졌던 시선이 상쇄되었다. 진짜로 떠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언젠가에 대한 소망을 품고 한번쯤 읽어둔다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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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온 - 두뇌 스트레칭 감성 일러스트북
상하이 탱고 지음 / 오브제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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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림온"은 이질적인 책이다. 우선 처음 책을 만졌을 때 느껴지는 촉감이 생각과는 달라서 '우와'하는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책에 기대해본 적 없는 독특한 촉감. 반사되지 않는 까만 표지에 숨겨진 의외의 촉감이 좋아서 몇번이나 만져보다 책을 가지고 외출하기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괜히 표지가 상해 이 완벽한 촉감이 깨질까봐 걱정됐다. 거기에 상하이 탱고라는 저자의 이름, 두뇌 스트레칭 감성 일러스트북이라는 알 수 없는 수식도 '이 책 뭐지?'싶은 궁금증을 자극했다.

 

 책은 아무런 말없이 오직 그림으로 보여준다. 종이가 가득차도록 설명을 달아놓은 것도, 다채로운 색감도 없이 그저 간결한 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은 분명한 '스토리'를 들려준다. 창 밖의 달밤을 바라보는 고양이가 만들어내는 단어나(15), 고래택시 (166), 사랑이 꿰어진 화살을 꼬치구이 굽듯이 잘 굽고 있는 천사의 모습(258)같은 소소한 웃음이 묻어나는 요란하지 않은 그림들을 천천히 바라보고 있자면 자신도 모르게 환상적인 상상의 세계로 초대되는 듯하다.

 

 그림에 대한 이런 재주도, 아이디어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번뜩이는 빛을 품은 재주도 없어 보는 동안 부러운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특히나 단순한 선으로 힘을 빼고 그려낸 듯한 장면이 어렵지 않게 정확한 메세지로 전달되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같은 이야기를 내가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설명하려고 했을때 어떤 식으로 구성할 수 있을까 떠올리니 작가의 센스가 더욱 탁월하게 느껴졌다. 겉부터 속까지 재미있는 이 책을 한권쯤 소장해본다면 좋을 것 같다. 

 

 이 책은 작가가 2010년부터 그린 1600여점의 그림 중에서 꿈과 관련된 작품을 추려 담아낸 것이다. 처음에는 약간의 위트를 담은 일러스트집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꿈의 세계를 재구성'해내어 독자에게 다가가는 책이라고 하니 웃으며 가볍게 넘겼던 책장을 다시 살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떠올리는, 혹은 실제로 경험한 꿈의 세계는 어떤가 생각해보고 비교해보니 저자가 갖고 있는 유연하고 다정한 세계가 더 인상깊게 다가왔다.

 

 어릴적부터 '꼬마 니콜라'를 읽으며 접했던 장자크 상페의 그림들을 좋아해서 전시도 다녀왔었던 적이 있는데, '드림온'을 보며 비슷한 호감을 느꼈다. 상페의 삽화에 매력을 느꼈거나, 이런 느낌의 작품들이 전달해주는 메세지를 좋아한다면 꼭 책을 찾아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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