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1 : 태조 - 혁명의 대업을 이루다 조선왕조실록 1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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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이라는 거대한 기록 앞에서 당연하게도 위축됐다. 먼 옛날 국사 공부를 했던 기억을 떠올려보면서 '아마 난 안될거야, 틀렸어.'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이 참 이상한게 그때 못했으면서 왠지 지금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때는 그저 막막했다지만, 이제는 머리 속으로 이래저래하면 이렇게 될 거라는 예상 지도가 훤하게 그려져서 실천도 쉬울 것이라 착각하나 보다. 나 자신은 그대로인데. 그래서 예전에는 국사가 어려웠어도 지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실록을 읽기만 하는 거니 괜찮겠지 하고 책을 잡았다. 세월이 지나면서 나도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나란 인간 참 그대로구나. 반갑다, 나 자신아. 아무리 공부하는게 아니더라도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쉽지 않다. 초심자와 호기심은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하지 말 것.

 

 1권을 읽었는데, 전 10권에 달하는 내용 중 당연하게도 이 첫권의 내용이 가장 친숙하다.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많이 알려진 세종을 제외하고, '국사 공부를 시작해볼까'라고 마음 먹었을 때 조선을 건국한 태조 부분만 공부하고 그 뒤로 흐지부지 된 경험이 축적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조선왕조실록 시리즈를 10권까지 다 읽지 못하고 포기한다면 태조만 보고 그 뒤는 역사의 소중한 한 페이지로 남겨둔 사례가 또 한 번 남겨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예감이 꽤나 강렬하다. 눈에 띄었던 점은 태조가 차지하는 분량이다. 태조가 1권의 모든 분량을 혼자 소화하는 반면 다른 왕들은 둘, 평균적으로 셋씩 뭉쳐 한 권을 이룬다. 앞으로 나올 세종의 분량이 생각보다 적다는 게 의외였다. 태조에 대해 실록에 남아있는 부분이 그만큼 많았던 것인지 조선 건국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일부러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한 것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과정을 거쳐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혁명을 일으켰는지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 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분배가 아니었을까 싶다.

 

 다만 개인적 경험으로 어린시절 정몽주에 관한 위인전은 읽고 태조에 관한 위인전은 읽지 못했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번씩 외웠다는 만인의 시조 단심가도 마음에 걸리고, 태조와 이방원, 정도전에 관한 인상이 그리 좋지 못하다.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내심 승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역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변방의 무장 이성계가 창업군주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겸손과 섬김의 리더십이 있다. 일곱 살 어린 정도전을 스승으로 삼았고, 혁명에 반대한 이색도 끝까지 우대했다."는 소개에서도 정몽주 위인전을 읽고 자란 키드가 가지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어린시절 읽었던 책에서는 정몽주가 충절과 이성의 상징이었고 이방원은 잔인한 무뢰한처럼 그러졌기 때문이다. 그 책만 그런건가. 하지만 이성계 측에 선 시선으로 자세히 적힌 글을 오랜 시간 읽다보니 과거에 느꼈던 반감이 좀 사라짐을 느꼈다. 이래서 양쪽말을 다 들어보고 판단해야 된다고 하나보다. 위인전에서 정몽주를 다뤘으면 이성계도 같이 썼어야 했다. 특히 어린 시절에 읽는 것이니 더욱 양쪽 입장을 알 수 있게.

 

 생각보다 읽기 쉬웠다. 여름밤은 덥고, 잠이 쉽게 오지 않아 마실 것 하나를 만들어 한참을 아무 생각없이 몰두할 수 있었다. 여름방학 동안 할일이 없다면 조선왕조실록을 읽어봐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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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친절한 문학 교과서 작품 읽기 : 고대 가요.향가.고려 가요 편 이토록 친절한 문학 교과서 작품 읽기
하태준 지음 / 다산에듀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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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과서에 수록된 문학 작품들을 읽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생각해본다. 생각보다 가깝다. 애들 가르치면서 읽어봤다. 읽기만 했나, 외우고 분석하고 수업도 하고 문제도 내고 학교 다닐 때보다 더 열심히 팠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읽은 것이 아니었다. 읽지 않고, 외우고 분석하고 수업도 하고 문제도 냈던 거다. 그래서 언제 읽었더라 하고 내면이 진실된 반응을 먼저 한 것이다. 학생 때는 그렇다. 작품을 읽지만 읽는다기 보다는 해체한다. 교과서에 나온 지침대로 이 단어에는 이 의미가, 이 부분에는 이 기능이 있다는 것을 외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책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매력적인 터치의 삽화가, 친절한 설명이, 함께 넣어 놓은 핵심 정리가, 문학 작품을 공부하지 않고 읽도록 해줄 수 있을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교과서'란 단어가 들어갔기 때문에 문학 작품으로서 작품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두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아쉽지만, 생각해보면 교과서에 나온 작품들을 좀 더 쉽게 마스터하기 위한 기능적인 부분을 뺄 수 없음에 공감도 된다. 다만 삽화들이 주는 안정적 분위기와 작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좀 더 천천히, 풍요로운 감상으로 작품을 읽어볼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책이 참 괜찮아서 아쉬웠던 점이다. 딱히 문학 교과서 작품 읽기라고 제목이 붙여져 있지 않았다면 오히려 시리즈 별로 챙겨두기 더 좋았을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이 삽화가 가볍지 않고 전체적으로 색감이며 분위기가 좋다. 지금은 고대 가요, 향가, 고려 가요 편으로 나왔지만 좀 더 친숙한 현대시나 소설 쪽으로 넘어온다면 책 읽고 모으기 좋아하는 어른들의 눈에도 들 것 같다. 하지만 제목에 문학 교과서 작품 읽기로 되어 있다면 매력적인 책임에도 중학생 조카 읽어보게 권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책 내용은 마음에 들지마는. 그리고 이 지점에서 또 하나의 의문점이 고개를 든다. 과연 이 책을 실용적 측면에서 고전 문학을 '그림으로 마스터하'기 위해 읽는 중고생이 있는가.

 

 물론 있기는 할 것이다. 공부하랬더니 책상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한참을 있기에 뭐하나 보면 교과서가 아닌 책을 읽고 있던 과거의 나와 같은 학생. 공부는 뭐 그냥 그래도 책 읽는건 했던 유형이라면 "엄마 이거 문학 공부하는 책이야!" 하면서 하기 싫은 공부는 안해도 책은 읽을테니. 그렇지만 그런 타입은 대개 이런 풀이 없이도 대부분의 고전 문학 작품을 -시험 위주의 교과서 해석 방식으로- 이미 이해한다. 이 책을 읽는다면 그저 재미로 읽을 뿐. 다만 이런 친절한 그림으로 고전 문학을 마스터해야 하는 유형의 아이들은, 또 딱히 이런 자상한 책에 관심이 없고 그나마 한문제라도 더 맞히려면 핵심만 달달 외우는 공부법이 실용적이다. 책은 참 좋은데 과연 주요 독자층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올지 의문이 든다. 안그래도 공부하느라 바쁜 우리의 10대가 과연 책을 얼마나 읽을 수 있겠는가! 

 

 예전에 외국에서는 문학 시간에 단기간에 최대한 많은 작품을 가장 효율적으로 분석하여 외우는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듣고 놀랐다. 학기를 통틀어 여러 작품 중 한 권의 책을 선정하여 모두 함께 읽고 대화를 나누며 공부한단다. 토론도 하고 에세이도 쓰고. 우리가 손들어 정답을 외칠때 걔들은 의견과 감상을 말한댄다. 힘들겠지만 우리도 그런 수업시간이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친절한 작품집도 더 많이 읽히겠지. 어른이지만 그래도 삽화와 함께 찬찬히 읽어봐도 좋겠다. 학생 때 읽었던 것과는 다른 마음으로 다른 감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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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로니아공화국
김대현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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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하기로는 장편을 읽은 게 오랜만이었다. 사실 한동안 뭔가를 읽지 않았다. 한동안이라고 해도 한달이나 이주 정도 되려나. 날이 점점 더워져서,는 핑계이고 스마트폰 중독 때문이다. 급기야 최근들어서 말하다 단어가 도통 떠오르질 않아 "그게 뭐였더라?"만 댓번 하고마는 일이 생겼다. 이러다 영영 장편은 못 읽게 되는거 아닌가 싶은 불안에 잠길 때 '나의 아로니아 공화국'을 만났다. 의식적으로 피해왔던 장편에 400쪽 정도 되는 분량이 두려웠다. 스마트폰만 주구장창 보다가 뇌가 망가져버리면 어떻게 된다던데 어떻게 된다더라? 스마트폰 하다가 본 내용이라 많은 정보를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요지의 내용의 글이었는데 정확한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맙소사. 내가 만약 아로니아 공화국에 한자리 차지한다면 스마트폰 사용 제한을 강력하게 주장하겠다. 이거 정말 심각한 문제네.

 

 어쨌든 나의 중독 고백은 이쯤하고, '나의 아로니아 공화국'으로 돌아가본다. 우선 다행이도 꽤 짧은 시간에 완독할 수 있었다. 읽는 중간에 일상이 끼어들어 공간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한번 잡으면 백여쪽의 분량은 훅 읽을 수 있을 재미가 충분했다. 처음에 유명한 사람들이 써놓은 추천사를 보고 이게 뭔 내용이래 재미없을 것 같아 싶었다. 원래대로라면 스포일러 밟을까봐 그냥 넘겼겠지만, 이 마음조차 조금이라도 분량을 줄여 읽으려는 수작인가 싶어 '어머, 이것도 스마트폰 중 증세 아니야?'하고 마음속 경각심을 떠올려 읽기로 했다. 굳이 읽고 시작한 것 치고는 읽기 전에 별 도움 안되는데 읽고 난 다음에 다시 보니 좀 낫다. 발상이 좀 엉뚱해서 과정을 보고 난 뒤에야 확실한 느낌이 오게 된 것이다.

 

 장편 못 버틸까봐 염려했던 중독자의 걱정을 씻어준 것은 고마운데, 사실 어딘지 모르게 꿈꿈하다. 이 꿈꿈함은 첫째로 재밌게 느꼈던 문체에서 온다. 얼마 전에 읽었던 성석제의 단편집에서 봤던 혹은 박민규, 김중혁의 소설들을 떠올리게 한다. 읽으면서 아는데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이 문체는 상황과 인물들을 세세하면서도 집요하게 설명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지명, 사건, 인물들과 허구를 넘나들며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실제감을 준다. 사건이 이어지며 어디까지나 유머와 위트를 잃지 않고 내용이 전개된다. 이래저래 썼지만 사실 뭔가 병맛을 느끼게 하는 재미가 있다. 이게 가장 깔끔한 설명이 되리라. 그리고 이러한 특징이 재밌긴 하지만 또 이런 스타일인가, 싶은 생각도 들게 한다. 물론 내용에 깊이 빠져들기 전인 초반에 했던 생각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림 일대를 삥뜯고 다니던 김강현의 미약한 시작을 낄낄 거리다 끝내 아로니아 공화국의 대통령 로아 킴이 된 건국신화를 따라가다 보면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그럴싸하게 믿게 되는 거다. 

 

 다른 하나의 꿈꿈함은 젠더적 문제인데 좀 긴가민가 하다. 한번 더 읽어야 정체가 밝혀질 것 같다. 워낙 예민한 문제니 말을 아끼고 싶은 이유도 있다. 330쪽에 있는 아로니아 시민 선발 조건이 슬슬 떠오른다. 장마철이니 꿈꿈함은 어쩔 수 없지 하고 그런 것들은 차치하고 보면 이 소설은 꽤 재밌다. 나름 왜 써야 했는가에 대한 의식도 담겨있고, 읽고 난 다음까지 확실히 "재밌게 읽으셨다면 다들 좋아요 한번씩 눌러주세요" 하고 광고하는 것처럼 '한일공동개발구역 JDZ' 상기시켜주는 마무리까지 한다. 시키는대로 좀 찾아봤는데 "제발 관심 좀 가져주세요" 라는 말과 함께 안그래도 더운 여름 열불나는 상황이 줄줄이 딸려나와 분노하게 됐다. (왜 일본이 싫고 한국 정부가 무능한가)의 전형적인 예시가 아닐까. 게다가 '7광구'라는 영화는 또 뭔지...말을 줄입니다... 

 

 책 한 권 재밌게 읽어놓고 뒤늦게 찾아오는 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다, 작가의 인품에 새삼 놀랐다. 이 얼마나 평화적인 '한일공동개발구역 JDZ'에 대한 관심 유발과 문제 제기인가. 인터넷을 도배하는 워리어가 되지 않고 어디까지나 유머와 희망을 잃지 않는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읽히다니. 여기, 저기를 향한 답답한 마음을 욕지거리로 승화하여 표출하지도 않고. 다만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는다면 좋겠다. 내가 그랬다고 해서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한일공동개발구역 JDZ'에 대한 문제에 정말 무지했고 무관심했다가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흥하게 된다면 더 많은 관심이 모여 방안을 촉구할 수 있는 힘이 되지 않을까. '나의 아로니아 공화국'을 통해 뜻밖에 문학이 가진 기능과 힘을 엿봤다. 괜찮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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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고 작은
알베르틴 그림, 제르마노 쥘로 글, 정혜경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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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무엇보다도 삽화를 찬찬히 살펴봐야 한다. 이러저러한 색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솜씨로 세밀하게 그려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이어진 선들과 둥글고 따뜻한 표정의 면면을 넘기다보면 무감했던 눈길을 사로잡는 온도를 느끼게 한다. 아이에게 전하려는 말을 천천히 남기면서 아주 작고 작았던 존재가 점점 자라나는 과정을 무한한 애정으로 바라보는 눈길이 따스하다. 그러면서도 지나치지 않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아마 수다스럽지 않은, 절제된 단어로만 나열된 문장이 주는 균형일 것이다.

 

 이 조용한 여백에서 오는 아름답지만 천천한 시간의 흐름이 서로의 존재와 유대를 반전시킬때 우리는 이 책에서 모성만이 아닌 삶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의 삶이 어떻게 시작되어 멸하게 되는가를 지극히 단순하고 또 아름답게 표현해냈다. 처음 그저 그림책일뿐 일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감상이 확장되어 여운을 느낄 수 있는 무게감을 준다. 문장이 모호하다는 점도 생각에 넓은 여지를 준다. 읽기에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책이니 어느 때고 만나게 된다면 사양않고 꼭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변화해가는 삽화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쩐지 묘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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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그 옆 사람
이남희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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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문 위에 여자의 얼굴 하나가 보였다. 잔뜩 일그러져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입가가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나는 손을 내밀어 그 입가를 가만히 쓸어주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내 잘못은 아니었어.' 유리문 속의 그녀가 웅얼거렸다. '그래도 아빠는 싫었겠지. 공주님이 망가졌다고 느꼈겠지.' 내가 좋도록 변명해주었다. '그래도 그래선 안 됐잖아. 아빤데. 나한테 그래선 안 되었던 거야.' -  p.198 거미집 "

 

 작가에 대한 소개를 잘 못 읽으며 시작했다. 부산 출생으로 1986년에 등단했다는 작가의 이력을 1986년에 태어났다는 것으로 알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겠지만, 어쩐지 젊은 작가의 글을 읽고 싶다고 생각해 부러 고른 책이었다. 86년에 태어났더라도 이제 더는 젊은 작가가 아니지만 86년에 등단했다니. 그래서 처음 표제작인 "친구와 그 옆 사람"을 읽을 때 '이게 뭔가' 싶었다. 80에서 90년대 정도에 나왔을 법한 글들에서 자주 보이는 문체를 마주하고 당혹스러웠다. 그때서야 작가 소개를 다시 찾아보곤 잘 못 봤구나 깨달았다. 더 읽을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사실 '존나'나 '졸라'를 졸나'라고 쓰는 그 문체가 주는 괴상하고 야릇한 맛을 싫어하지는 않는지라 죽 읽어버렸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우습게도 새내기 적에 '형'이라는 호칭을 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뒤로 계속 쓴 것은 아니지만 입학을 하고 몇 달은 공식적으로 서로를 '선배'와 '형'으로 불렀다. 왜 '형'이라고 불러주는지 이래저래한 설명을 듣긴 했지만 다 까먹고 후배라고 해서 무조건 하대하지 않고 게다가 '형'이라고 불러준다는 것이 좋아서 그러려니 했던 기억이 난다. 서로서로 '형, 형' 했지만 한편으로는 얘가 나랑 사귈만한지 아닌지 열심히 재고 따졌던 속내들도. "친구와 그 옆 사람"도 '형'하고 부르지만 결국 쟤랑 잘지 말지 결혼할지 이혼할지 어쩔지에 대한 속내가 가득했다.  

 

 이어지는 "남자와 여자"나 "세 번째 여자" 까지는 "내 이름은 김삼순" 시절 즈음의 노처녀 상 정도 되려는 여자의 이야기다. 독신이거나 이혼녀인 더 이상 젊지 않은 여자가 새로운 남자를 알게 되고 그와의 관계를 발전시키려 노력한다. 혼자도 괜찮은 척 해보지만 삶은 궁핍해지고, 남자를 잡고 싶고, 급기야 재혼하려 결심하기도 하는 여자들. 은정과 정애는 마흔정도 되었으려나, 혼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그녀들의 이야기가 어쩐지 궁상맞고 초라하다. 마음먹고 썸타던 남자집에 쳐들어갔는데 '우정이나 쌓을래요?' 하는 말을 듣고 뒤통수를 맞은듯 얼타야하는 심정처럼.

 

 그려낼 수 있는 세계가 여기까지인가 싶어서 그만 읽을까 고민하는 때에 변화가 느껴졌다. "거미집"부터는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다. 그 전까지의 단편들이 시기와 때를 이야기했다면 삶과 문제를 던지기 시작한다. 어린시절 아빠의 공주님으로 색색의 젤리가 든 제과점 팥빙수를 먹던 여자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내쳐지게 된 상처와 결핍이 히스테릭하게 전개된다. 아빠는 그러면 안됐어야 했다는 독백의 씁쓸함을 혀끝에 굴려보기도 전에 "난 실은 칼칼한 여자를 좋아해" 하며 매달려오는 중늙은이의 '거저 먹지 않는' 슈가대디 제안에선 우스워지기까지 한다.

 

 가정폭력에 대한 문제를 담고 있는 "어두운 층계 위" 나 "빛의 제국" 으로 들어가면 확실히 문체까지 다르다. 폭력에 대한 결말도 앞과 뒤의 단편에서 차이가 난다. 밖에 드러나서 좋을 것 없다던지 밖에서는 호인이지만 집에 오면 폭군이 되는 가장과 같은 전형적인 형태에서, 주위 사람들의 신고로 아동학대 혐의로 경찰에 연행되어 가는 '형식이 엄마'의 모습은 달라진 시대 분위기도 보여준다. 어디선가는 뉘앙스만 풍기던 동성애에 관한 내용도 단편 "낯선 이들의 집"에서는 확연해진다.

 

 장기간에 걸쳐 엮어낸 소설집인지 처음 시작부터 뒤로 이어질수록 문체가 달라지는 모습이 눈에 띄도록 두드러졌다. 그래서 읽기를 잘했구나 싶었다. 처음엔 그저 예스러운 문체가 재밌어서 가볍게 읽었는데, 뒤로 갈수록 단편의 중심이 더 영글어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작가 자신의 변화가 글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하나로 묶인 소설집 안에서 작가의 변화를 이토록 눈에 띄게 느끼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다음 단편으로 넘어갈수록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 궁금해졌다. 이 책을 읽는다면 그 점에도 함께 주목해본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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