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그 옆 사람
이남희 지음 / 실천문학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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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문 위에 여자의 얼굴 하나가 보였다. 잔뜩 일그러져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입가가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나는 손을 내밀어 그 입가를 가만히 쓸어주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내 잘못은 아니었어.' 유리문 속의 그녀가 웅얼거렸다. '그래도 아빠는 싫었겠지. 공주님이 망가졌다고 느꼈겠지.' 내가 좋도록 변명해주었다. '그래도 그래선 안 됐잖아. 아빤데. 나한테 그래선 안 되었던 거야.' -  p.198 거미집 "

 

 작가에 대한 소개를 잘 못 읽으며 시작했다. 부산 출생으로 1986년에 등단했다는 작가의 이력을 1986년에 태어났다는 것으로 알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겠지만, 어쩐지 젊은 작가의 글을 읽고 싶다고 생각해 부러 고른 책이었다. 86년에 태어났더라도 이제 더는 젊은 작가가 아니지만 86년에 등단했다니. 그래서 처음 표제작인 "친구와 그 옆 사람"을 읽을 때 '이게 뭔가' 싶었다. 80에서 90년대 정도에 나왔을 법한 글들에서 자주 보이는 문체를 마주하고 당혹스러웠다. 그때서야 작가 소개를 다시 찾아보곤 잘 못 봤구나 깨달았다. 더 읽을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사실 '존나'나 '졸라'를 졸나'라고 쓰는 그 문체가 주는 괴상하고 야릇한 맛을 싫어하지는 않는지라 죽 읽어버렸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우습게도 새내기 적에 '형'이라는 호칭을 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뒤로 계속 쓴 것은 아니지만 입학을 하고 몇 달은 공식적으로 서로를 '선배'와 '형'으로 불렀다. 왜 '형'이라고 불러주는지 이래저래한 설명을 듣긴 했지만 다 까먹고 후배라고 해서 무조건 하대하지 않고 게다가 '형'이라고 불러준다는 것이 좋아서 그러려니 했던 기억이 난다. 서로서로 '형, 형' 했지만 한편으로는 얘가 나랑 사귈만한지 아닌지 열심히 재고 따졌던 속내들도. "친구와 그 옆 사람"도 '형'하고 부르지만 결국 쟤랑 잘지 말지 결혼할지 이혼할지 어쩔지에 대한 속내가 가득했다.  

 

 이어지는 "남자와 여자"나 "세 번째 여자" 까지는 "내 이름은 김삼순" 시절 즈음의 노처녀 상 정도 되려는 여자의 이야기다. 독신이거나 이혼녀인 더 이상 젊지 않은 여자가 새로운 남자를 알게 되고 그와의 관계를 발전시키려 노력한다. 혼자도 괜찮은 척 해보지만 삶은 궁핍해지고, 남자를 잡고 싶고, 급기야 재혼하려 결심하기도 하는 여자들. 은정과 정애는 마흔정도 되었으려나, 혼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그녀들의 이야기가 어쩐지 궁상맞고 초라하다. 마음먹고 썸타던 남자집에 쳐들어갔는데 '우정이나 쌓을래요?' 하는 말을 듣고 뒤통수를 맞은듯 얼타야하는 심정처럼.

 

 그려낼 수 있는 세계가 여기까지인가 싶어서 그만 읽을까 고민하는 때에 변화가 느껴졌다. "거미집"부터는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다. 그 전까지의 단편들이 시기와 때를 이야기했다면 삶과 문제를 던지기 시작한다. 어린시절 아빠의 공주님으로 색색의 젤리가 든 제과점 팥빙수를 먹던 여자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내쳐지게 된 상처와 결핍이 히스테릭하게 전개된다. 아빠는 그러면 안됐어야 했다는 독백의 씁쓸함을 혀끝에 굴려보기도 전에 "난 실은 칼칼한 여자를 좋아해" 하며 매달려오는 중늙은이의 '거저 먹지 않는' 슈가대디 제안에선 우스워지기까지 한다.

 

 가정폭력에 대한 문제를 담고 있는 "어두운 층계 위" 나 "빛의 제국" 으로 들어가면 확실히 문체까지 다르다. 폭력에 대한 결말도 앞과 뒤의 단편에서 차이가 난다. 밖에 드러나서 좋을 것 없다던지 밖에서는 호인이지만 집에 오면 폭군이 되는 가장과 같은 전형적인 형태에서, 주위 사람들의 신고로 아동학대 혐의로 경찰에 연행되어 가는 '형식이 엄마'의 모습은 달라진 시대 분위기도 보여준다. 어디선가는 뉘앙스만 풍기던 동성애에 관한 내용도 단편 "낯선 이들의 집"에서는 확연해진다.

 

 장기간에 걸쳐 엮어낸 소설집인지 처음 시작부터 뒤로 이어질수록 문체가 달라지는 모습이 눈에 띄도록 두드러졌다. 그래서 읽기를 잘했구나 싶었다. 처음엔 그저 예스러운 문체가 재밌어서 가볍게 읽었는데, 뒤로 갈수록 단편의 중심이 더 영글어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작가 자신의 변화가 글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하나로 묶인 소설집 안에서 작가의 변화를 이토록 눈에 띄게 느끼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다음 단편으로 넘어갈수록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 궁금해졌다. 이 책을 읽는다면 그 점에도 함께 주목해본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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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이름은
조남주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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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 이름은" 안의 내용들은 읽기에 좋다. 긴 호흡의 글에 점점 기력도 딸리고 집중력도 떨어지는 140자 시대에 - 아, 요즘은 280자라나? - 맞춰 한 다섯장 정도의 분량이면 하나의 꼭지가 끝난다. 군더더기 없이 짧은 대부분의 내용들이 뉴스에서 봤던 굵직한 사건들도 포함하고 있어 익숙한 배경지식도 제공한다. 소설집을 채운 거의 30개 가까이 되는 '그녀'들의 이야기는 마치 대형 기획사 아이돌 뽑아내듯 "이 중에 네 삶 비출만한 내용은 하나 있겠지" 하며 꾸려낸 보편다양(?!)한 여성의 삶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요즘은 여성의 ㅇ만 느껴져도 반사적인 거부감이 드는 사람들도 있고, 그냥 사는게 이런 건 줄 알았는데 '빨간약 먹고 진실을 봤다'는 사람들도 있어서 이 여성에 관한 책이 누구에게든 편하게 읽힐만한 내용은 아닐거란 생각이 든다.  

 

 아마 책을 읽었다고 하면 별 관심없이 그랬구나 할 사람도 있고, 나도 읽었다고 눈을 빛낼 사람도 있고, 표정이 굳어 얼버무릴 사람도 있고, 호기심과 경멸을 섞어 너도 ㅁㄱ이야 물을 사람도 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댓글로 욕을 쏟아낼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염려스러워 밖에서는 굳이 이 책을 읽지 않았다. 책 안의 대부분 내용은 공감하면서도 그것을 이유로 난데없는 악의의 대상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마치 금서를 읽은 것 같다. 그렇게 좋아하던 여자 아이돌이 책표지를 찍어 SNS에 올렸다는 이유로 굳즈를 불태우는데, 아무 상관도 없던 나같은 사람이 어쩌다 눈에 걸리면 한마디 던지기는 얼마나 더 쉬울까 하고. 이런 '멀리 나간' 생각도 웃기지만 중년의 연예인들이 업소에서 자신의 평이 얼마나 좋은지 매너를 자랑하던 티비 프로그램의 한 장면을 떠올리면 그 말은 또 그렇게 쉬운지 그것도 우습다.  

 

 4만명이 넘는 여성이 여성 스스로를 위하여 거리로 나서게까지 된 지금, 되돌아보니 몰카가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문제제기되고 분노할만한 일이었던가 생경하다. 그동안 얼마나 많았는데. 포털에 길거리를 검색하면 길에서 몰래 촬영한 여성의 신체 이미지가 뜨고, 연관으로 미니스커트라는 말이 따라붙는데도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나. 더 말하자면 "그녀 이름은" 안에 담긴 내용 정도의 고단하고 모욕적이고 불안한 삶의 경험들은 날 것으로 말하자면 더 많고 더 더럽다. 몰래 찍힌 리벤지 포르노가 공개되어 기자회견을 열어 사죄하던 사람도 있었다. 그때 우리-대중-는 무엇에 대한 사과를 받았을까. 그 영상은 무슨 이름으로 불리며 퍼져나갔었나. 그럼에도 고작 이 책 한 권의 내용에 공감했다고 표하는 것만으로도 프레임이 씌워진다.

 

 저자 조남주의 이력을 훑으며, 새로 나왔다는 "그녀 이름은" 이라는 제목의 소설집을 읽으며 여러 생각이 오갔다. 거의 마지막 책장을 넘기면서 불쑥하고 '대체 왜 자꾸 이런 글들을 쓰는거야!' 라는 짜증스런 답답함이 올라왔다. 그간의 행보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하고, 불만을 표하고, 심지어 분노하고, 결국엔 뭐라더라 비슷한 제목의 책을 내려고 함으로 반박하기까지 했다. 시달리기도 시달렸을텐데 왜 멈추지 않는 것일까. 이 계속되는 행보에도 또 어디에 이렇게 마르지 않는 소재와 공감이 달려나올까. 누구는 비겁하기 때문에 카페나 지하철에서 책 한 권 읽는데도 별 생각을 다 하는데도. 시달리면서, 욕먹고, 조롱당하고, 지치면서도 목소리를 내기 주저하지 않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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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는 엄마
신현림 지음 / 놀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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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생각보다 길지 않다. 함께하는 시간도 유한하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사실을 절절히 깨닫는다. 추억을 함께한 때만이 서로를 기억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살아가려면 제대로 사랑하는 법밖엔 없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추억을 쌓으려면, 혈육일지라도 관계를 단단히 재정립할 시간이 필요하다. 좋은 관계는 서로 배우면서 성장한다. 그럴 때 인생은 더 깊고 숭고해진다. p.7 _ 프롤로그 "

 

 신현림의 '시 읽는 엄마'를 읽으며 정신없이 회전문을 빙글빙글 돌아나오는 기분을 맛봤다.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는, 그 책에 대한 전체적인 호불호를 가늠하게 되는 편이다. 일주일에 한두권은 시집을 읽어보기로 노력하고 있는 와중에 시와 얽혀진, 그것도 오랜만에 읽게 되는 에세이를 마주하게 되어 내심 시도 읽고 편독하는 장르인 에세이도 읽게 되니 일석이조구나 계산했다. 다만 그것이 꼭 마음에 든다는 법은 없었다. 에세이는 개인의 내밀한 체험이나 생각이 녹아있기 때문에 사건에 대한 세대적으로나 관점적인 차이가 두드러지게 와닿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그랬다.

 

 " 살다 보면 가족이나 친구, 지인과 의견 충돌을 피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런 의견 차이를 다툼으로 끝내는 관계를 보면 서로를 더 이해하면 친해질 수 있는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다들 자존심이 철근같이 세다. 시간이 지나면 그 자존심도 양파 껍질처럼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깨지는 원인을 잠잠히 들여다보면, 거의가 말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p.63 _ 지금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 "

 

 주로 딸과의 관계, 어머니와 자신의 관계에 집중하는 내용이지만 그 안에서 인간관계에 대한 폭 넓고 깊이 있는 내용들도 발견한다. 의견 충돌로 인한 것이 아니더라도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관계를 더 쉽게 끊어버리게 된다. '나이먹으면 친구 사귀기도 힘들다' 는 말이 왜 생겨났는지 느껴진다. 세월에 따라 어느 정도 정립된 세계와 패턴이 타인으로 인해 유연해지기 힘든 것이다. 때문에 내가 남을 끊기도 하지만 남이 나를 끊어내는 경우도 있다. 개인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생각이 많은 시기에 읽었던 터라 인상깊었던 부분이었다.

 

 저자가 딸을 낳으며 느끼게 되는 모성과 관련된 부분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라 그런지, 혹 '케빈에 대하여'나 '다섯째 아이'를 강렬하게 본 탓인지 좀 어색했다. 혼자 속으로 과연 모성이 모두에게 다 주어지는 것일까! 아이를 혼자 감당하기까지의 여건이 저자에게도 이리 어려운데 다른 처지의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할까! 애초에 선택도 못하지만! 등등의 궁시렁을 삼켰다. 저자가 전달하는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뱃속에서 느껴지는 생명의 소중함, 삶의 지탱이 되는 자식의 의미, 여자의 삶에 의지가 되는 딸의 존재 등등의 내용은 공익광고 같은 장점의 극대화와 정보 전달의 깔끔함이 느껴진다. 마치 아이 계획이 없다는 사람에게 '낳아봐, 니 자식 낳으면 생각이 달라질걸?' 이라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 느껴지는 난감함이랄까.

 

 거기에 책의 마무리는 우리나라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전통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란다며 끝을 맺는다. 갑작스럽게 애국심이 등장하며 마무리 된 탓에 이렇게 끝난 것이 맞나 의아했다. 출산장려와 모성애, 모국어와 전통문화로 이어지는 애국심까지 진짜 요즘 시기에 사회가 원하는 공익광고의 내용인가 싶은 것이다. 물론 딸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쓴 내용이라면 이렇게 건-전할 수 있다고 이해됐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인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삶을 날 것으로 보고 싶었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나와는 감성이 좀 다른가보네, 하고 읽다가도 어떤 부분은 '그래 우리 삶에는 이런 결이 있었지, 서로 무늬는 달라도 삶을 살면서 같은 결을 나이테처럼 쌓아가고 있구나' 싶어지기도 했다. 그런 부분들이 반복되면서 이 책 괜찮네 혹은 나랑은 좀 안 맞는 부분이 있네 하는 마음이 정신없이 회전문처럼 오갔다. 하지만 읽고 난 뒤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어쩌면 시간이 더 지나고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나면 지금은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들에 대해 더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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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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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이 책을 읽었던가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이 책이 어떤 내용인지는 또 잘 알고 있다. 이 책이라기 보다는 표제작이 되는 단편 '첫사랑'의 내용을. 문득 그 내용을 떠올리다가 도서관에 들린 김에 빌려왔다. 한동안 다른 책도 좀 읽고, 딴 짓도 하고, 게으름도 피워보고 하다 반납기한이 다 되어서야 가방에 책을 넣고 광화문으로 나왔다. 서울 시내의 카페는 어디든 붐비는 법이라 눈치 안보고 책 읽기 쉽지 않다. 하지만 최근 눈에 띈 카페 한 곳은 때로 시끄럽고 연령층이 다소 높아도 다른 곳에 비해 한산한 편이라 그리로 들어가 베이글을 뜯어먹으며, 낄낄대며 책을 읽었다.

 

 비록 '첫사랑'을 보며 읽기 시작했지만, 맨 마지막에 최종 보스로 등장하는 그것까지 가기 전에 만나게 되는 다른 단편들도 재밌다. 읽다보니 '조동관 약전'이 가장 완벽한 단편이 아니었나 싶다. 똥깐이의 전설적 패악은 유쾌하고 쓸쓸한 결말은 아련하다. 꼭 읽어보길. 소설집 첫사랑 속의 단편들은 하나같이 독특한 인물들을 내세우고 있다. 그 인물들은 무식하거나, 본 데 없는 깡패고, 좀스럽거나 심약한 소시민이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미숙한 소년이기도 했다. 이 인물들이 유머러스한 작가의 어조와 버무려져 각각의 매력과 재미를 뽐낸다.

 

"마찬가지로 서울의 수산 시장에서 펄펄 뛰는 생선을 회로 쳐서 먹는다고 해도 그건 부산 바닷가의 회에 비할 때 회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부산까지 갈 수가 없는 경우 먹기는 먹되 "이건 회도 아이다"라는 말을 꼭 붙여야 한다는 게 장택근의 주장이다." p132 _ 2인실

 

 거기에 '강알리 등킨 도나쓰'로 이어지는 붓싼 싸나이 드립의 문학적 버젼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정성스럽게 싸놓기도 싸놓은 인터넷 똥글을 읽으며 자괴감을 느끼는 대신 '여가시간엔 책을 읽어요'라며 표지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릴 만한 허영도 채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성석제의 이름을 드높인 전설의 단편, 표제작이자 모든 부녀자들의 바이블. '첫사랑'을 수록하고 있으니 과연 주목해볼만 한 소설집이다. 그리고 알만한 사람은 알테니 책 표지 사진을 찍어 올리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고.

 

 "나는 빈 빵 상자를 앞에 두고 멍하니 서 있었다. "빵 도로 놔, 새끼들아." 언제 네가 다가왔는지 아이들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아이들은 순식간에 반쯤 뜯어먹은 빵까지 전부 다 상자에 내려놓았다. 나는 그냥 가려고 했다. 그런데 네가 나를 불렀다. "너, 거기서 다섯 개 집어." 나는 무시했다. 나는 네가 싫었다. 네가 자꾸 나한테 접근해오는 게 싫었다. "나는 빵 안 먹어." " p223 _ 첫사랑

 

 이 첫사랑 물은 묘하게도 남*남의 구도다. 이 장면을 이성애로 옮겨온다면 "느 집엔 이거 없지?"하고 감자를- 요즘은 값이 너무 올라서 금자라고 불리우는 그것을 들이미는 소설을 연상시킨다. 이루어질 수도 있겠지만, 금기시되는 감정이라는 기본 바탕 때문에 이 첫사랑 물은 좀 더 흥미로운 요소가 추가된다. 뒷세계?가 아닌 곳에서 다루어졌다는 점에서도. 그렇더래도 첫사랑 물의 핵심인 미묘한 기류와 다가가고 싶은 마음, 서툴음을 낯간지럽게 담아냈기 때문에 재미도 충분하다. 이런 어설픈 풋사랑을 해본 적도 없는데 - 그럴만한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쨌든, 왜 이런 코드들로 하여금 체험해본 적도 없는 가상의 향수마저 불러온다.

 

 웃기고 쉽게 읽히면서도 전체적으로 '남성적인 서술'이라는 부분들에 눈길이 머무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다. 남*남 구도의 연애물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둘 사이의 도구로 끼인 혹은 도피/부정을 위한 여자의 존재이다. 최근 개봉했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보면서 느꼈던 수단으로서의 여자의 역할이 '첫사랑' 안에서도 빵집 처녀의 역할로 등장한다. 게다가 대부분의 단편들 안에서 '유랑'의 벙어리 여자 외에는 비중을 차지하는 여성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와중에 김치녀와 스시녀에 대한 비교까지 빠지지 않고 담아낸 것 또한 절묘하다. 어쩌면 이런 것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재미있으니 꼭 읽어보라고 추천해주지는 못할 만한 이유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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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졌다
디제이 아오이 지음, 김윤경 옮김 / 놀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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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이런 종류의 글들이 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읽기에는 편한데 심적으로는 자꾸 속엣말이 불쑥 올라오곤 한다. 한두해 살다보니 책에 나오는 상황이나 감정들을 제법 겪어도 봤다. 그랬더니, 저자가 전하는 자신 스스로의 진정을 다한 조언이나 위로가 절대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남을 위로해준 적도 없으면서 이 친절한 응답을 두고, '아니, 그건 아니지'하고 고개부터 가로젓고 보는 것이다. 사실, 한때는 이 다정한 위로에 마음이 기울었던 적도 있다. 생각하기에 거의 시초가 될 법한 '그 남자 그 여자' 라는 책이 아직도 책장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랬던 나는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며 읽었다. 내 고집이 생길만큼 때가 탄 것인지, 쉽게 흔들리지 않을만큼 단단해진 것인지 모르겠다.

 

 "그 사람을 좋아하는 자신이 싫다면 그건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뜻일 겁니다. 이때 너무 가까운 채로 그대로 있다보면 자기혐오에 빠져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게 될 거예요.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거리까지 떨어져봐요. 타인으로서의 거리까지 떨어지지 않고서는 자신을 긍정할 수 없다면, 곧 이별인거죠. - p17 이별의 완벽한 타이밍"

 

 거의 첫부분의 내용이다. 가장 첫번째 꼭지부터 생각에 생각이 꼬리물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사이여도 결국 서로 다른 우주를 가진 타인이고, 거리가 너무 가까워지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타인의 거리에서 머물러야하고, 머무를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 거리까지 떨어져서야 자신이 완성된다면/긍정한다면 이별이라니, '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졌다'지만 너무 극단적 처방이 아닌가! 사실 남의 사랑문제에 있어 가장 쉬운 조언 중 하나가 "헤어져"일 것이다. 인터넷 고민 게시판에 올라오는 "헤어져" 소리가 절로 나오는 일들도 나 자신의 감정과 버무려지면 "그래도..." "하지만..." 하는 생각들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자기 자신에게도 때로 환멸이 나는 마당에 남을 사랑하는 일이 오죽하랴.

 

 이어지는 "아무 짓도 안 할 테니 걱정 마!(p19)" 를 너무 믿지 말라는 조언이나, 콘돔 안쓰려는 남친에 대한 고민, 헤어지고 나면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같은 개인의 성향 갈리는 문제들, 한때 유행했던 사랑의 유통기한 - 나때는 2년이었는데 여기엔 3년으로 나오는 그것에 대한 내용, 책에서는 '이별괴물'이라 표현한 안전이별에 관한 내용, 헤어졌는데 계속 눈물이 나요/힘들어요/돌아올까요 와 같은 질문 등등을 보면 이 책의 주 독자층이 십대에서 많게는 이십대 초반 정도까지 되리라 생각된다. 상대방이 이런 말을 할 때는 그냥 과감히 헤어져라 하는 조언도 있으니 그런 부분은 유용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 모든 사랑에 대한 크고 작은 고민과 조언들이 전부 여자들을 향하고 있다는 점은 안타깝다. '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질만한 조언이 실질적으로 나오지 않았던 점도 그렇다.

 

 책을 읽기 전에 띄지 뒷면에 있는 체크리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혈액형이나 별자리를 믿는 것처럼, 일곱개의 항목에 어느 것 하나 어긋나지 않는 자신을 꼽아보면서 이 책이 궁금해졌었다. 같은 음식을 자주 먹으면, 마음에 드는 음악을 질릴 때까지 반복해서 들으면, 계획 없이 돈을 쓰면, 일을 미루다 막바지에 이르러 간신히 하면, 귀찮아, 졸려, 지겨워 라는 말을 자주 하면, 편한 사람에게 거칠게 말하면, 낯가림이 있으면 대체 무엇이 문제길래 '나만의 자리'를 찾아야 할 때일까! 난 원래 그런 사람으로 지내왔는데! 물론 씀씀이나 생활태도 같은 것들은 고쳐야 할 필요가 있지만, 저 항목들이 죽어가는 연애세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궁금해서 읽어보고 싶었다. 책 안에 답이 없었다는게 함정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 책을 어떻게 느꼈을지 궁금해진다. 내가 너무 메마른 것은 아닌지 염려도 된다. 사랑에 무덤덤해지고, 혼자가 힘들지도 않은 나이에 너무 빨리 이른 것은 아닌지. 오히려 그게 더 쓸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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