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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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가끔 슬픔은 정신적인 것이고 갈망은 육체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는 상처고 다른 하나는 절단된 팔이나 다리, 꺾인 줄기에 달린 시든 꽃잎이다. 사랑하는 대상에게서 바짝 붙어서 성장하다보면 결국에는 한 뿌리를 공유하게 된다. 우리는 상실을 논하고 치유하고 시간을 두고 기다릴 수는 있지만 생물학적인 특성상 특정한 윈칙에 맞춰서 살아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가운데가 부러진 식물은 치유가 되지 않는다. 그냥 죽는다. (p.193)"

 

 "베어타운"을 읽는 동안 어느 날은 눈이 왔다. 바람이 세차게 분 날도 있었다. 볕이 잘 들지 않는 집 안은 손톱을 파랗게 만들게 추웠다. 봄은 바깥에 있었고, 집 안은 아직 겨울이었다. 발끝에서 지겹도록 머무는 냉기를 느끼며 베어타운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프레드릭 배크만이 보여주는 세계는 처음이었다. 이름이 낯선 것은 아니지만, 전에 만났던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보니 떠오르지 않았다. 과연, 이 새로운 세계를, 베어타운을 좋아할 수 있을까. 가만히 책을 잡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여정의 두께를 가늠해보며, 약간은 염려하며 그보다 더 조금 기대를 품고 읽어나갔다.

 

 작은 도시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천천히 소개받으며 베어타운이 주는 첫인상을 가늠해봤다. 모든 것을 오로지 하키를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의 이분법으로 나뉘는 도시에 질려갈 때 쯤 길게 늘어진 실마리를 찾아냈다. 실마리를 잡고 난 뒤부터는 쇠락해가는 도시와 이를 일으켜낼 운동 경기, 열광하는 사람들과 성장하는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가 급격히 걷혀나갔다. 그 자리에 드러난 것은 무겁고도 깊었다. 다소 생소한 하키 팀의 성공담을 감명깊게 볼 수 있을까 염려했던 일이 사라지자, 그저 이 이야기가 그냥 하키 팀의 성공담이었길 바라게 되었다.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소년들의 어깨에 마을의 활로가 걸린 것처럼 구는 사람들의 행태가 경멸스럽고, 선수들이 쓰는 떡친다는 표현이 불쑥 등장할 때마다 불편함이 느껴졌다. 하키도, 선수들도 돈벌이를 위한 도구처럼 다뤄지고 있었다. 선수들은 마을에 불러올 돈이 되고, 승리를 위해서 잘못된 행동들이 묵과된다. 마치 재능있는 선수의 특권 같지만, 재주를 부리는 서커스 곰에게 주는 먹이 보상과 다름이 없다. 팀의 결속력을 위한다는 말로 포장한 강요된 남성성은 기민한 영혼에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그 속에서 보보라는 인물의 성장은 거의 유일한 위안이고 웃음이 된다.

 

 청소년팀이 우승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고 온 마을이 그것에 집중할 때 '마야의 사건'이 터져나온다. 팀에서 가장 유능한 선수 케빈에게 준결승 승리 축하 파티에서 페테르의 딸 마야가 성폭행을 당한다. '케빈에서 초대를 받아 어른들이 없는 빈 집에서 열린 파티에 가서 술을 마시고 즐겼기 때문에' 절망적인 순간에 어린 소녀를 도와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그녀 스스로도 강제로 뜯겨나가는 블라우스 단추를 바라보며 앞으로 자신에게 주어질 질문들이 무얼지 헤아린다. 슬프게도 그것은 "술을 마셨는가? 어떤 관계였는가? 제대로 저항했는가?" 따위의 익숙하고 어리석으며 모욕적인 질문들이다.

 

 이 사건은 베어타운을 작은 충격에 빠뜨리고 충격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독자를 뒤흔든다. 깊숙히 베어타운 안으로 몰입해 나가다가도 문득, 성폭력에 대한 고발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시점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우리 사회의 모습이 담겨있기 때문에. 이보다 더 믿기 어려운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베어타운에서 성폭행 사건을 다루는 방식을 보며 문학의 방식으로 페미니즘을 말한다면 바로 이런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주 쉽게는 왜 방금 전까지 당신과 웃으며 술을 마시고 키스를 했던 여자가 "싫다"고 하면 더 이상의 어떤 행위도 허락치 않는 것이 되는지에 대해서도.

 

 현실이 절망적인데에 비해 "베어타운"은 희망적으로 끝을 맺었다. 마야가 케빈에게 복수를 할 것인가 궁금했던 것보다, 상처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할까봐 걱정하며 읽은 것치고는 희망찬 결말이었다. 이 이상의 소설적 허용은 줄 수 없다는 듯이 모든 인물들이 변화하고, 상황이 반전되는 사이다같은 결말이 그려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소설 속 소녀는 무릎을 꿇지 않았고, 그녀의 곁에는 가족과 친구와 진실을 보는 지지자들이 남았다. 책장을 넘기느라 차가워진 손끝을 말아쥐고 서서히 "베어타운"을 걸어나오며 이 소설이 꽤 트렌디했음을 느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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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욕의 기술 - 추락하는 의지를 상승시키는 심리 스프링
제이슨 워맥.조디 워맥 지음, 김현수 옮김 / 다산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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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떤 이유로,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당신은 아직 행동하지 못하고 있다. -p.31"

 

 신발장에 넣어져있는 새 운동화를 떠올려본다. 까만색의 가벼운 운동화는 반년 전 쯤 산 운동시설 용이다. 아직 운동시설 회원권을 끊지 않은 탓에 운동화는 거리를 걸어본 적 없는, 표조차 아직 떼어지지 않은 새 것이다. 왜 새 운동화를 반년이나 보관했느냐 하면, 운동을 결심하고 운동화를 샀을 때 회원등록을 알아보는 중에 공교롭게도 일이 생겼고, 일을 마치고 난 뒤에는 연초가 되어 일년 중 시설에 사람이 가장 많을 무렵이었다. 한달을 지나보내고 나니 달도 짧고 명절이 껴있어 쉬는 김에 한달을 더 미루고, 몇 달을 쉬고나니 체력이 떨어져 운동을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아 운동 대신 식이조절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리고 운동화는, 언젠간 회원권을 끊어 운동을 시작할 것이기 때문에 아직도 새 것이다.

 

 운동에 대해 말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시작하지 못한 일들은 이런 패턴으로 진행될 것이다. 시기가 맞지 않아서, 갑자기 다른 상황이 생겨서, 의지가 부족해서와 같은 변명들이 시작을 뒤로 미룬다. 책을 읽기 전에는 할 수 없는 '이유'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기 시작하며 '변명'이라는 말이 사실은 더 정확했음을 인정했다. 사실 "의욕의 기술"이 더 특별한 방법을 소개해 주었던 것은 아니지만, 손으로 그리고 쓴 것 같은 요약 메모가 곳곳에 있다는 점이 괜찮았다. 특별할 것 없는 단순한 표와 그림인데, 방금까지 읽었던 내용을 중간중간 지루하지 않게 환기해주는 작용을 한다.  

 

 보통 자기계발서들이 강조하는 방법들은 쉽고 작은 목표들을 만들어 성취의 기쁨을 천천히 느끼라는 것이다. 매일 일기를 쓰고 싶다면 우선 날씨만 기록해보고, 익숙해졌다면 뭘 먹었는지 간단히 쓰고, 특별한 일이 있는지, 기분이 어떤지 등등 점차적으로 늘려가라는 조언이다. 그리고 단기간의 목표를 만들라는 것이다. 보통 3일이면 자신이 목표했던 일에 실패하게 되는 고비가 찾아온다. 4일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면 5일째는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목표를 만들어서 또 시작하기를 반복하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습관이 형성된다는 요지다. 자기계발서의 내용이 너무 형식적이라 좋아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살면 더 나은 삶을 살지 고민하는 중에는 슬쩍이나마 보게 되어 이 정도의 내용은 술술 읊는다. "의욕의 기술"에서도 표현의 방식이 다를 뿐 비슷한 맥락을 소개한다.

 

 가장 넘어서기 어려운 상대는 같은 목표를 가진 라이벌이 아니라, 이쯤에서 타협하려는 자기 자신이라는 말을 공감한다.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기는 타인에게 관대하기만큼 어려운 일이다. 거친 세상에서 자신조차 스스로에게 엄격할 필요는 없지만, 목표한 것이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다른 무엇보다 의지라면 스스로를 관리하도록 노력하는 것도 좋겠다. 하루의 끝에 챙겨야 할 3가지 (p.202)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목룍을 조금 바꿔서 활용해봐도 좋을 것 같다. 근래 다이어리 사용이 다시 유행하면서 소개되고 있는 불렛저널을 이용한 다양한 목록작성과 확인 방법 등을 이용해 관리해보면 효율적이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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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MB의 재산 은닉 기술 : 이명박 금고를 여는 네 개의 열쇠 - 이명박 금고를 여는 네 개의 열쇠
백승우 지음 / 다산지식하우스(다산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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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한 말보다는 돈을 쫓으려고 했다. 말보다는 돈이 정직하다. - p.8 기자의 말"

 

 돈, 땅, 다스, 동업자. 네 개의 열쇠로 쫓는 이명박과 그 일가의 재산과 의혹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저자가 기자이기 때문에 문장들이 명료하다. 말보다 돈이 정직하다고 단언하는 그의 말처럼 문장은 쓸데없는 수식을 줄였고 집요하게 숨겨진 핵심을 향해 파고든다. 읽다보면 이미 지나온 자취에서 현장감마저 느껴진다. 주진우 기자의 책과 언론을 통해 대체적인 윤곽이 드러나 있는 내용이지만 충분히 흥미롭다.

 

 "다스는 누구 겁니까" 라는 질문은 이제 우스운 말이 되었다. 모든 정황과 증거가 가리키는 곳이 분명한데도, 그에 얽혀있는 인물들은 모른다와 침묵으로 진실을 가리려 하고 있다. 무엇이 그들을 당당하게 만드는 것일까. 정의와 진실에 대한 국민들의 엄중한 요구가 두렵지도 않은 것일까.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정치적 보복'이라는 말도 환멸스럽다. 권력과 재물만을 좇아 눈과 귀를 가린 이들의 꼬리가 밟혔다. 퇴임 이후 5년만에 이명박 전 대통령은 구속되었다.

 

 실망스럽게도 책에 나오는 인터뷰의 내용은 한결같다. 다 다른사람들임에도 '시키는대로 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모른다'는 답변이 짠듯이 나온다. 막대한 금액의 출처와 용도를 모른채 굳이 복잡한 방법으로 옮겼어도, 몇달동안 맡겨진 80억원의 돈을 영문도 모른 채 차명계좌를 써가며 '관리'했어도, 시키는대로 했을 뿐 감히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과정에서 이명박의 이름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 주변의 모든 곳을 검은 자금이 샅샅이 훑어가더라도 교묘히 그 이름은 피해간다. 그럴수록 더욱더 애써 숨긴 그 이름이 미심쩍다.

 

 책을 읽던 와중이었다. 2018년 3월 22일 밤 11시 경 이명박에 대한 구속 영장이 발부되었다. 23일을 넘기자마자 호송차에 올라 구속되었다. 집 앞에 뺴곡했던 취재진과 함께 그 이동을 많은 대중들이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간신히 날을 넘겨 구속한 것처럼 하루도 헛투로 보내지 않길 바라는 이들의 마음도 이와 같았다. 구속 이후 서울동부구치소에서 나흘여의 시간이 지났지만, '모든 책임을 나에게 물으라'던 이명박은 혐의를 부인하고 검찰의 조사를 보이콧하고 있다. 그리고 SNS에는 글을 남긴다.

 

 그와 주변의 행태만 보더라도 구속은 끝이 아니다. 비록 여기까지 가기에도 오래 걸렸고, 긴 사투를 벌인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욱 중요한 것들이 남았다. 철저히 수사하여 무너진 사법제도와 정치를 바로 세워야 한다. 07년 대선부터 다스 문제가 제기된지 10년이 지났다. 뒤늦었지만 이제라도 정의가 실현되길 바란다. 이 뿐 아니라 청계재단, 전직 대통령에 대한 국정원 공작 의혹, 여론 조작, 불법 자금과 뇌물 등의 의혹과 혐의가 있다. 모든 진실이 밝혀지고 죄값을 받길 바란다.

 

 "이명박은 2007년 대선을 치르면서 모든 의혹에 대해 수없이 부인했다. 세 번 이상 부인했다. 정직했다면 걱정할 건 없다. - p.279 에필로그" '정직'이 자신의 가훈인 사람은 자신의 '기술'에 자신 있을테니, 다만 걱정할 것은 이제라도 진실이 밝혀지고 정의가 실현되길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자본과 권력 앞에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의 입에서 진실이 가리워지고 거짓이 뱉어지는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감시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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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18-04-02 2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기이익이 정의라고 아는 사람에게 아님을 이해시키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더구나 권력의 정점을 찍은 이에게 누가 이것을 조곤조곤 가르쳐 줄 수 있겠습니까?
그저 법이라는 제도에 의해 심판 받는 길 외에. 감사히 읽고 갑니다~~

테일 2018-04-06 15:28   좋아요 0 | URL
오늘, 지금 이 순간입니다. 417호 대법정에서 선고되고 있는 판결문, 법원 인근에서 중계되고 있는 태극기를 ‘장식‘한 사람들의 모습. 남겨주신 글과 함께 많은 생각에 들게합니다. 오늘의 선고가 법으로 다 갚아지지 않을 행동들에 어느 정도라도 위안을 줄 수 있는 길이 되길 바라야지요.
 
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 - 시곗바늘 위를 걷는 유쾌한 지적 탐험
사이먼 가필드 지음, 남기철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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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특한 느낌을 주는 책이다. "시곗바늘 위를 걷는 유쾌한 지적 탐험 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는 시간에 대한 다양한 소재들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이야기하고 있다. 시간에 대한 거의 모든 것들에 대해. 책에서도 설명하고 있듯이 '시간'은 그 사용 빈도가 높은 만큼 생활에 밀접하기 때문에, 다루고 있는 몇몇의 에피소드 들은 익숙한 내용이다. LP에 이어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는 CD 한 장의 용량이 어떤 계기로 정해졌는지에 관한 내용이나, 저 유명한 "베트남, 네이팜 탄, 소녀"의 사진 등이 그러하다. 익히 알고 있던 혹은 전에 생각해본적도 없던 내용이든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시간에 대한 '거의 모든' 것들을 만나볼 수 있다.

 

 '시간'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무엇인가? 과거-현재-미래라는 흐름, 시간을 표시하는 시계, 정해진 일과, 상대적으로 체감되는 동일한 시간 같은 것들을 떠올린다. 단순히 떠올리는 이 대부분의 내용들이 책에서 다뤄지고 있다. 덕분에 초, 분, 시, 일, 월, 년의 시간 흐름을 의식하고 의심하게 됐다. 시간이 아니라 그 흐름을 인위적으로 나눠놓은 단위에 대해 생각한다는 건 어딘가 불편하다. 마치 숨 쉬는 것을 매우 자연스럽게 하다 갑자기 의식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한편으론 2018년이 벌써 3월까지 됐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매일 아침 알람 소리에 일어나는 일을 반복하며 시간의 흐름에 무덤덤했다는 것이 오히려 아이러니하다. 책을 읽으며 흥미롭기도 하고 시간이라는 소재의 매력적인 부분을 발견했다.

 

 마침 백화점에 들렀다가 무심코 한 화장품 매장에서 이끄는대로 들어가 피부나이 측정을 받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쩌면 익숙한 체험일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생소하고 어딘지 얼떨떨한 일이었다. 구멍이 뚫린 플라스틱 상자같은 기구를 잠시간 얼굴에 대고 있자 사진이 찍히고, 피부상태에 대한 평가가 뜬다. 피부결, 주름, 유수분, 기미 등의 상태를 나이로 환산하여 알려준다. 이를테면 피부결은 20세, 주름은 35세, 기미는 40세와 같은 식으로.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지 알 수 없을 빈약한 테스트임에도 눈에 들어오는 나이라는 측정값은 무시할 수 없이 다가왔다. 어리진 못할 망정 제 나이와 비슷하게 나온 값들도 억울한데, 나이보다 많이 나온 항목에선 충격을 받고 열심히 설명해주는 상담사의 말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속으로 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라며 급작스런 공황에 빠졌다.

 

 집으로 돌아와 마음을 가라앉히고 문득 읽고 있던 "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를 떠올렸다. 가벼운 쇼크 상태에 빠져 내 얼굴, 피부에서 발견한 과거-현재-미래의 나이들. 그 '거의 모든 시간'들을 되짚어보다 불쑥 화가 치밀었기 때문이다. 시간과 나이라는 개념이 존재하기 때문에 젊음에 더욱 집착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 "사람들이 1월을 매우 싫어했고 1월이 얼른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나는 1월은 하나의 표식일 뿐이며 1월이 지나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p50)"

 2017년 12월 31일의 나보다 2018년 1월 1일의 내가 하루만큼 더 젋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하루가 1년의 나이를 가르는 역할을 함으로써 주는 부담감은 지나치다. 더욱이 스물 아홉에서 서른이 되거나, 서른 아홉에서 마흔이 되는 등의 변화가 있다면. 차라리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우리가 지나치게 신경쓰는 이 모든 것들에서 좀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사람의 마음이란 이리도 간사하여 시간으로 인해 얻은 수많은 편리를 쥐고서 고작 피부나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다며 시간의 파괴와 종말을 꿈꾼다. 시간에 관한 잡다한 지식을 얻고 싶다면 읽어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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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희와 나 - 2017 제17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이기호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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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이라는 분류에 속할만한 책은 오랜만이었다. 한동안 다른 분류의 책들을 읽어보자 싶어서 이것저것 읽어보았더니, 단편이어도 문학이라는 세계가 낯설었다. 제17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인 '한정희와 나'는 수상작인 이기호의 '한정희와 나'로 시작한다. 뒤를 잇는 쟁쟁한 작가들의 후보작들까지 전체적인 분위기는 사회문제/현실들을 꼽고 있다. 작가들이 시대와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작품안에 담아냈다는 점은 좋지만, 그것들이 다소 적나라한 분위기를 띄고 있어 어떤 사건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지목하는 글인듯해 아쉬웠다. 좀 더 견고한 세계의 구성이 아쉬웠는데, 아무래도 장편이 아쉬운 시점이었던가 보다.

 

 수상작 '한정희와 나'를 읽고 한동안 얼떨떨했다. '무엇이 어떻단 말이야'라는 의문이 남았다. "너 정말 나쁜 아이구나. 어린 게 염치도 없이......(p37)" 이란 말의 그늘 아래서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들과 해서는 안 되는 말들(p37)"이 무엇이었을지 감을 잡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정말 나쁜 아이 같이 순화된 표현으로 시작되는 물렁한 말에서 어떤 독설이 이어졌을지 잘 가늠되지도 않고, 그런 말이 나왔다 한들 그 정도는 이미 정희도 분위기로 읽었을 수준의 속내에 지나지 않았으리라 생각됐다. 면전에서 들으면 얼굴이야 굳히겠지만. 묘사된 정희의 모습에선 그저 "x발, x나 유세떠네."하고 뱉어내버릴 잔소리쯤 아니었을까.

 

 다만 그것이 모든 관계를 무너뜨릴 역할을 하는 이유가 자신이 특히 집착적으로 의식하는 '환대'라는 것에 얽혀있다는 점이다.

 "내겐 환대, 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느 책을 읽다가 '절대적 환대'라는 구절에서 멈춰 섰는데, 머리로는 그 말이 충분히 이해되었지만, 마음 저편에선 정말 그게 가능한가, 가능한 일을 말하는가, 계속 묻고 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고, 복수를 생각하지 않는 환대라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정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죄와 사람은 어떻게 분리될 수 있는가, 우리의 내면은 늘 불안과 절망과 갈등 같은 것들이 함께 모여 있는 법인데, 자기 자신조차 낯설게 다가올 때가 많은데, 어떻게 그 상태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p33)" 

 이 부분에서 '환대'가 가지는 의미가 죄와 사람, 복수 같은 것들의 연결을 자연스럽게 가지는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물론 어린 나이에 낯선 집 한 귀퉁이에 짐을 풀어야 하는 정희가 안타깝고, 집에 들이기로 결정한 이상 환대를 해줘야 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환대는 반갑게 맞아 잘 대접할 뿐이지 누군가의 잘못을 희석하거나 분리해야할 당위를 주진 않는다.

 

 덧붙여 이미 마석에서 정희가 오게 되었을 때 혹 과거 아내가 받았을지도 모르는 '절대적 환대'라는건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부분에서 희석되어 버린다. 때문에 그를 의식해서 되갚는 식의 '절대적 환대'를 내주어야 할 의무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정희를 맡게 되는 사정을 읽다보면 그들 내외, 특히 자신이 정희에게 해야만 마땅한 것으로 여기는 환대 자체는, 부채와 동정으로 얼룩진 양심의 조각일 뿐 그 아이를 향한 진짜 환대였던 적은 없었던 것이다. 읽고나니 딱 한 개의 고리만 더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하는 부분들이 있었다. 정희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아쉬웠던 그 한 개의 고리가 현실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다만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개인적으로는 '한정희와 나'보다는 자선작으로 뒤를 잇는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도 그렇고, 권여선의 '손톱', 김애란의 '가리는 손', 최은영의 '601, 602' 등이 더 인상적이었다. 특히 권여선의 '손톱'은 습관적으로 생활비를 헤아리는, 푼돈 쿠폰을 모으고 모아 최저가를 검색하는, 먹고 싶은 메뉴보다 가성비를 고려하는, 한달 생활 영수증을 모아 '스튜핏과 그레잇'을 평가받아야만 하는 젊은 세대의 궁핍함을 잘 드러냈다. 생각보다 페미니즘과 다양성에 관련된 내용이 드물었던 것 같다. 18회 작품집에는 더 많은 작품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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