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단
제바스티안 피체크.미하엘 초코스 지음, 한효정 옮김 / 단숨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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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린 구면이네요.

 작가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이름은 길고 복잡하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인상이 강렬하게 남는다. 기억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도 기억에 남는다. 사람에게 지문이 있는 것처럼, 목소리가 다르고, 체향이나, 분위기같은 것이 다 다르게 느껴져서 그 사람을 만드는 것처럼- 작가에게도 문체가 다 다르게 존재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떠올린다.

 

 솔직히 말하자면 차단이라는 제목과 색다를 것 없어 보이는 표지를 보면서 작가 이름을 살필 생각도 안하고 무심히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저 나오는 내용으로 조금 스릴러 장르이거나 추리 장르이겠거니 생각하고 읽다가 어느 순간에 이르러 전에 읽었던 책과 좀 비슷한데 하는 생각이 심히 들어왔다. 무슨 책이었더라, 이렇게 문득 일상에 끼어들어온 잔인하고 무자비한 살인마로 인해 긴장과 초조 속에서 인물이 극한까지 몰려가며 끝으로 끝으로 결말을 향해 독자와 함께 달려가도록 만드는 이 몰입감을 느꼈던 것은 -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 도 이와 비슷하지만 아니었다.

 

 그러다 작가 이름을 다시 보고 난 뒤에 생각나는 제목들이 있었다. "눈알사냥꾼" 과 "눈알수집가". 그랬다,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전작들을 차례로 읽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 느꼈던 특유의 분위기를 마치 전에 만났던 사람 특유의 냄새나 분위기 같은 것을 더듬어 재인식하듯이 '알아보게' 되었다. 신기한 점은 작가 본인이 같다는 것도 특유의 분위기가 날 수 밖에 없는 일이긴 하나 한 번 번역이 되어 완성된 책에서도 이 분위기가 똑같이 느껴진다는 거다. 심지어 번역을 한 사람도 다른데. 어떻게 서로 다른 사람을 거쳐서 만들어진 다른 책들이 결국은 같은 뿌리를 가지고 나온 것이라고 이리도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을까. 그만큼 제바스티안 피체크가 자신만의 색을 강렬하게 가지고 있는, 혹은 확립한 작가라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지난 두 권과 이번 새 책을 통해 독자 -나- 로 하여금 자신이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히 인식 시켰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작가가 독자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새 작품을 가지고 돌아오기란 참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 일테지만 제바스티안 피체크는 그 이상을 이번 "차단"을 통해 증명해 낸 것 같다. 법의학자인 미하엘 초코스와 함께 사실적이고 실감나는 부검 과정과 사후 반응 검사들을 설명해내면서 다소 강렬함이 지나쳐서 위화감이 들 수도 있는 부분들 마저도 제대로 보여주었다. 어떤 의의나 흠집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듯이. 하지만 숨가쁘게 몰아쳤던 것에 비하면 헤르츠펠트의 딸인 한나의 완고한 모습은 좀 애매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바는 아니었고, 여러차례 지나치게 과한 과정이 댓가로 주어졌다고 생각하도록 상황이 전개되었으나 글쎄, 한나의 심리가 제대로 반영이 된 것일까 십대라는 불안점함이 그 바탕에 깔려있다는 것을 고려하여도 말이다.

 

 이처럼 작가에게 있어서 가장 약점이 될 수 있는 부분은 인물들의 심리와 행동 근간에 대한 당위성이 아닐까. 고립된 장소 안에서 자신의 안위조차 감당할 수 없는 린다가 모든 두려움에서 매번 눈을 돌리지 않고 점점 더 깊은 사건의 중심으로 제발을 옮기는 일이 왜, 단지 한 생명에 대한 인류적 책임에서만 비롯되는지 그 끈도 약하게 느껴졌고 왜, 본보기 혹은 원망의 대상이 헤르츠펠트에게로 이렇게나 가혹하게 집중되어야 했는지, 잉골프는 제대로 된 설명도 해주지 않고 자신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던 상대의 개인적이면서도 위험한 일에 기꺼이 동행하기로 마음을 먹는지 설명해야 한다면 지금같은 전개나 결말로는 안될 것이다. 물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독자를 몰고가는 몰입도와 긴장감은 상당한 수준으로 이어지면서, 기꺼이 펼친 첫 장을 쉼없이 넘겨 끝내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한 장마저 덮어내도록 만드는 재미는 보장되어 있지만 말이다.

 

 이 내용 이상으로 작성했던 리뷰를 임시로 저장했었는데 잠시 다른 일을 마치고 불러오니 한문단만 남은 채로 사라져버렸었다. 전에 썼던 내용이 생생한 감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라 마음에 들었었는데 지금은, 지나간 글을 되살려 엉성하게 연결해놓은 느낌이다. 분명 버튼을 눌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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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의 중력 문학과지성 시인선 400
홍정선.강계숙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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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럴 줄 알았으면 읽지 않는 것인데.

 

 표지의 '엮음'이란 말의 뜻을 깨닫고는 먼저 든 생각이다. 30여년간 매해 10여권의 시집을 내온 '문학과 지성사'의 400호 기념 시집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이 400호 시집은 301호부터 399호의 시집 들 중 시인 83명의 시를 골라 수록하였다. 사실 100호, 200호, 300호 때도 이랬었다고 하나 - 시집 읽는 일이 영 둔하디 둔한 내가 어찌 알아, 그걸. 때문에 교과서 한번 처음부터 제대로 읽어본 준비없이 요약본을 먼저 본 것 같아 영 찝찝했다. 공부 못하는 애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것처럼 시 못 읽어 본 나도 핑계를 댄다. 내가 아직 시선집 모아읽을 레벨이 안되는데 벌써부터 읽어서 아쉽다고. 감상만 잘한다면야 이리 읽든 저리 읽든 뭐 어쩌겠냐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웠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고, 모르면 이렇게 손해다.

 

 그래도 몇 몇 시인들 이름이 눈에 들어와서 그래도 한달에 한 권 정도는 시집'도' 읽자고 생각했던 지난날의 나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덕분에 내가,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낯설지 않게. 다만 시인들의 시집에서 꼽힌 시들이 영 생소했다는 것은 아쉬웠다. 내게 무언가를 남긴 시가 꼭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남길 수 있다곤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 중 하나로 여기에 꼽혀 올라올 정도면 나도 좀 주의깊게 읽었어야 했는데 대부분 무심결에 지나쳐버린 시들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새삼 눈에 들어오는 시들도 있었고 또 아직 읽어보지 않는 시집에 들어 있는 시들 중 마음에 드는 것들을 꼽아볼 수도 있었다.

 

 [ 타마리스크 나무 아래  - 신대철 "바이칼 키스"

 

모래폭풍이 땅을 뒤집는 순간 황야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두운 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푸른 하늘, 붉은 흙먼지, 야생의 숨결을 받은 것들을 숨 돌릴 새 없이 몸부림쳤다. 무엇에 쫓겨 가는지 짐승들이 미친듯이 달렸다. 밤새 살아남은 발자국들은 거대한 먼지 굴 속에서 굴러 나와 먼지를 끌고 달렸다. 황야에 들어갈수록 긴 꼬리가 생기고 몸이 팽창했다. 달궈진 시간만 소멸하면서 생성되었다. 나는 내가 인간도 짐승도 아니라는 것 말고는, 내가 없는 곳에서 내가 무수히 태어난다는 것 말고는, 무엇이 소멸 속에서 생성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지평선은 둥글고 향긋해도

 그 중심은 깊고 황막한 곳

 

다시 황야로 들어간다면 모래폭풍 넘어 타마리스크 나무 아래 서 있고 싶다. ]

 

 신대철 시인의 "바이칼 키스"라는 시집은 제목이 워낙 강렬해서인지 읽었는가 헷갈릴 정도로 또렷하게 제목이 기억난다. 언젠가 읽어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미리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시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서 본문을 사진으로 찍어두기까지 했다.  '달궈진 시간만 소멸하면서 생성되었다. 나는 내가 인간도 짐승도 아니라는 것 말고는, 내가 없는 곳에서 내가 무수히 태어난다는 것 말고는, 무엇이 소멸 속에서 생성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는 부분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이를테면 영화 "인터스텔라"가 떠오르도록. 같은 시공간 안에 무수한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그 의식은 끊임없는 신호로 보내질 수도, 존재가 무엇으로도 규정될 수 없을 수도, 어느 지점에서 존재하고 부재하는지도 모를 그런 모든 차원을 포함하고 또 넘어선 면을 그려낸 듯 했다. 황야와 사막을 말하는데도 우주를 떠올리게 만드는 점도 좋았다. 꼭 읽어야지.

 

 이 시와 같이 [ 보이저 1호가 우주에서 돌아오길 기다리며 - 함성호 "키르티무카" ] 시도 같이 적어뒀다. 내 느낌 상으로는 마치 연작처럼 보이기도 하고 신대철 시인이 만들어 놓은 세계에서 함성호 시인이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용 중에 [ 어머니 전 혼자에요 / 오늘도 혼자이고 어제도 혼자였어요 / 공중을 혼자 떠도는 비눗방울처럼 / 무섭고 고독해요 / 나는 곧 터져버려 우주 곳곳에 흩어지겠지요 / 아무도 제 소멸을 슬퍼하지 않아요 ... 후략... ] 하는 부분이 있는데 왜 내가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지 소멸되면서도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는 존재로 남을 수 있는지 설명하긴 어렵지만 더불어서 느껴지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런데 이번에 내가 꼽은 시들은 공통점이 있는데 다음으로 적어둔 [ 책상 - 박형준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 에서도 비슷한 감각이 나온다. [ 책에는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 없어요 / 나는 책상에 강물을 올려놓고 그저 펼쳐 볼 뿐이에요 / 내 거처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일 뿐 ... 후략... ] 여기서도 내가 존재하는 것이 어떤 확고한 지점에 확실한 존재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시간' 어쩌면 순간 혹은 중복되어 산재할 수 있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그 모호함과 불확실함이 다른 두 편의 시와 비슷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책상'이란 시가 좋았던 점은 그 외에도 [ 나는 어스름한 빛에 얼룩진 짧은 저녁을 좋아하고 / 책 모서리에 닿는 작은 바스락거림을 사랑하지요 ] 하는 부분의 정경이 애틋함을 불러일으키기도 해서지만.

 

 읽지 않는 것인데 하고 생각한 것치곤 꽤 흥미롭게 읽었다. 문지의 시집을 고집스럽게 읽고 있는데, 고집스러운 것 치곤 더디게 읽지만. 시집 중에서 뭔가 기본을 제시하는 것 같단 느낌이 들어서 그렇다. 수학의 정석이나 성문기초영어 같기도 하고. 아직 안 읽은 100호, 200호, 300호도 곧 읽게 되기를. 이런 준비되지 않은 자세가 아니라 준비된 배경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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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의 나라
김나영 지음 / 네오픽션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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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겉모습에 속지 말자. 는 말은 사람이나 책이나 마찬가지로 통한다. 내용에 비해 책의 표지가 지나치게 동화적이다. 그래, 어떤 일면에서는 '도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사지가 멀쩡히 살아나오는 인물이 생긴다면 그야말로 동화같은 이야기이겠고, 그렇게 따지면 동화적인 요소가 충분하겠지만. 그래도- 이렇게나 살벌한 도박판 얘기를 저런 상큼한 색감에 예쁜 일러스트로 포장해놓으면 처음부터 겉과 속이 너무 다르다고 느껴지기 마련이다. 이렇게 겉과 속이 다름 역시 일명 '선수'들로 불리는 도박꾼들의 포커페이스와 뻥카에 속은 호구-혹은 피시- 독자 양산이라는 걸까. 처음 책을 봤을 땐 제목도 그렇고 표지도, 좀 더 메르헨적인 이야기를 예상했다. 옷장 안으로 들어가면 새로운 세계로 떨어지게 되는 '나니아 연대기'같은, 혹은 토끼굴에 빠져서 트럼프 여왕을 만나게 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같은. 하지만 '야수의 나라'는 지독히도 현실적이다. 밑바닥까지 한 세계를 통틀어보여주면서 그 현실성 앞에서 동화적인 결말을 꿈꾸게 만드는 작품이다.

 

 [ 재휘는 천진난만한 얼굴이었다. "아, 뭐. 그래, 내 확률이 얼마인지 계산한 건 그렇다고 치자. 그건 쉬우니까. 하지만 플러시 확률은 테이블에 있는 하트 카드를 모두 세지 않는 이상 어려워. 그런데 그걸 모두 셈했단 말이야? 네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거지?"

 "음...... 숫자가 보여요. 그게...... 하늘에 둥둥 떠다니거든요. 둥둥."

순간 용팔은 말을 뚝 멈췄다. 그는 설마설마하면서 물었다. "숫자가 공중에 떠다닌다는 말이야?" "네." 그는 입을 딱 벌렸다. 숫자가 떠다닌다고 말한 사람이 예전에 한 명 더 있었다. 재휘의 아버지, 이정연. 용팔은 더듬거리며 물었다. "하, 하지만 너 아까 그 양반이 플러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 "그 아저씨 눈을 보니까 아니더라고요." "눈?"

 "네, 눈동자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거든요. 아저씨도 아시죠? 고양이가 쥐 잡기 전에 동공이 커지는 거." ]

 

 처음엔 좀 식상했다. 선영의 아빠가 도박에 빠지게 되는 모습이 전개가 좀 빠른 듯 해서 딸까지 도박판 담보로 팔아버릴 정도로 광기어렸던가 의구심도 들었고, 천재 도박사의 아들이 그대로 자신의 아버지가 가진 카운팅 재능을 보이는 부분도 작위적이라고 여겨졌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했던 말을 그대로 주워삼기는 아들이라니. 하우스를 만들어놓고 선수들을 기용해 판을 벌리기만 할 뿐 자신은 직접 플레이를 하지 않는 강회장이란 인물 설정은 영화 '신의 한 수'를 떠올리게 한다. 거기서 이범수가 분한 '살수'라는 역이 딱 이 책의 강회장과 같았다. 그러고보니 여러모로 영화 '신의 한 수'와 비슷하다. 천재적 도박사인 재휘는 나중에 강회장 밑에 들어가서 선수로 뛰는 것까지 이시영이 맡은 '배꼽' 역과 비슷했고, 살수에게 원한을 가지고 복수를 꿈꾸면서도 '배꼽'의 안전까지 생각해야 하는 정우성 분의 '태석' 역은 전쟁의 여신 선영과 비슷했다. 딱히 멀리 바둑 영화까지 가지 않아도 '타짜 2'의 인물 구조에서도 비슷한 점은 보인다. '대길'이 자신의 삼촌과 같이 다녔던 '고광렬'과 함께 소규모 하우스 등을 돌며 판을 벌이는 내용도 재휘와 용팔의 관계랑 비슷하고 책에 나오는 '나비'라는 선수는 이하늬가 분했던 '우사장' 캐릭터와 비슷했다. 그렇게보면 일정 이상의 재미를 느끼게 되는 건 당연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전형성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속도감이 붙는다. 벌어져야 할 사건은 다 벌어졌고 강회장에게 복수를 해야 할 때가 왔음을 인물들뿐 아니라 독자도 느끼게 되는 시점이 온다. 거기에서 한 번 더 좌절을 겪게 되고 마치 정해진 수순인 것 처럼 과거의 모든 열쇠까지 판 위에 올라섰을때 선영은 새롭게 태어나는 존재가 되어 자신의 복수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의 삶을 다시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도박판 위에 뛰어든다. 실제로 레이스를 보는 것처럼 긴장감과 속도감을 느끼며 읽을 수 있었는데 우리는 등장인물들의 고군분투 속에 안전하게 빅게임을 관전하게 된다. 그게 바로 야수의 나라에 빠져드는 이유가 된다. 엄두내기도 어려운 빅게임을 지켜보고 그 승리감과 패배감을 내것처럼 느낄 기회가 주어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승자도 패자도- 선한 자도 악한 자도 없는 결국은 모두가 돈의 노예인 도박꾼에 다름 없는 사람들이라고 여겨지는 인물들과 마주하게 된다.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던 인물들이 자신의 전형성에서 얼핏 느껴지는 이중적인 면모도 함께 드러내는 것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가족을 잃고 원흉인 강 회장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강단있는 인물로 선영이 등장한다. 가장 의지가 강력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관철해나가려는 그녀의 행보를 자신도 모르게 응원하며 읽게 된다. 누군가는 강 회장을 꺾어야 하니까. 그런데, 천천히 반추해보면 여기서 선영이란 인물이 가장 탐욕스럽다고 여겨진다. 어쩌면, 강 회장 만큼이나. 그녀가 결국은 용팔과 재휘의 삶마저도 불안정하게 망가뜨리면서도 자신의 복수심을 이기지 못해 해선 안 될 선택을 했던 일과 그 와중에도 다시 도박판을 찾아들어 위험한 내기에 몸 담그는 행보는 그녀의 아버지라는 인물상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이 여겨졌다. 그래서 주인공임에도 무조건 좋아하게 되지도 않고, 오히려 떨어져서 관찰하며 바라보게 되는 그런 인물이었다.

 

 [ "승부는 단 한 번. 저는 10억을 걸겠습니다."

 그 말에 모두 입을 딱 벌렸다. 한 판에 10억이라니. 이건 카운팅이고 뭐고, 순수 운에 맡기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돈 가지고 와." 수하는 강 회장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옆방에서 지폐무더기가 든 가방을 여러 개 들고 왔다. 오 사장은 예상치도 못했던 10억의 생생한 출현에 머리가 멍해졌다. "대신 오 사장님도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돈 1억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그에게 10억에 준하는 뭔가가 있을 리가. 순간 선영은 섬뜩한 강 회장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는 기겁을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아빠! 안 돼요!" ] 

 

 반면 강회장은 무서운 사람이라고 소문이 나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꼼꼼하지 못하거나 적당주의자인가 싶기도 할 만큼 사람을 잘 놓쳤다. 어린 선영이 필사적으로 도망친 탓도 있지만, 방금 공사쳐서 제 손에 떨어진 사람 목숨을 제대로 간수 못해서 번번이 놓치는 일도 많고 선영에게 공사를 쳐서 재휘를 손에 넣었다는 것으로 홍루나 종루를 놓아주었다는 것도 의외다. 너무나 잔인하다고 일컬어지면서도 추마담이 가진 총에 와해되는 수하들을 부리고, 수십억이 오가는 판을 벌이면서 총 한자루없이 칼만 들고 다닌다는 것을 보면... 그보다 더 잔악하고 인정사정 없는 인물들이 얼마나 많이 스크린 위에서 등장했다 파멸했는지 떠올려보면 강회장은 생각보다 관대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약속을 얼마나 칼같이 지키는 사람인지! 살리에리의 편에 선 전형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조금 비틀어보면 유일하게 행복한 번 제대로 손에 쥐어본 적 없는 배금주의의 노예였다- 결국은 몰락해버린 가장 불운한 인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가장 큰 장점은 재미였다. 저도 모르게 빠져들어가서 결말을 궁금하게 만들 정도의 몰입력과. 상당히 빠른 전개 때문에 다소 거친 부분도 있고, 용팔이 선영과 재휘를 엮어주려고 하는 시도는 좀 촌스럽게까지 여겨지기도 한다. 시대적인 배경이 언제인지 좀 애매하게 여겨졌는데, 요즘은 아니겠지 싶었다. 그런데, 그런대로 거칠어서 재밌고 또 좀 촌스러워서 재밌게 느껴질만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타짜', '신의 한 수', '21' 등의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면 이 책도 비슷한 느낌의 즐거움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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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위 실리콘밸리의 자유로운 업무 방식 - 구글 애플 페이스북 어떻게 자유로운 업무 스타일로 운영하는가
아마노 마사하루 지음, 홍성민 옮김 / 이지북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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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을 다니다 보면 3.6.9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보통은 3년 6년 9년에 한번씩 위기가 찾아온다는 것이지만 요즘은 이직율이 전에 비해 높아지다 보니 3개월 6개월 9개월에 한번씩 찾아오는 위기를 369가 왔다고 칭한다. 그만큼 사회초년생들에게 새 직장에서의 첫 1년 동안의 적응기가 험난하다는 것일 수도 있고, 전에 비해 직업과 직장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음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직업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난 뒤로 지금까지 약 2번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하나는- 이를테면 '아버지세대'를 기점으로 살짝 위였던 지금은 거의 퇴직 후인 세대겠다. 한 직장에 몸담고 정년이 될 때까지 그 직장에 충성하는 직장인들이 있었던 시기, 그리고 '아버지세대'. 경제 위기를 기점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사회에서 정년을 다 채우지 못한 채 중장년의 나이로 퇴직하고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하는 세대. 우리는 보통 어린 시절 한 직장에서 20년이고 30년이고 근속하는 직업군을 바라보고 '아, 일이라는 것은 저렇구나.'하고 자라왔다가 청소년기 즈음 그 개념이 흔들리는 것을 목격하고 성장하여 청년이 되어 자신이 일을 찾을 즈음에는 장기 근속이라는 것의 의미를 잃고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이리저리 분주히 이동하는 것이 미덕이 된 직장 유목민 세대인 것이다. 그리하여 전에는 년수로 찾아오던 퇴사/이직 욕구가 이제는 개월 단위로 찾아오는 것이리라. 이 책으로 일하고 싶어도 일하기 참 어려워진 한국 사회를 등지고 더 넓은 세계를 바라봐보고 싶다면 한번쯤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그들이 어떤 곳에서 어떻게 일하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읽어낸 책이 직업과 업무 방식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그런지 시작이 이리 장황했다. 물론 읽으면서 그동안 나는 '일'이란 것을 어떻게 생각했나 떠올리기도 하고 여러 생각을 하긴 했지만 대부분은 '이건 우리와 맞지 않아'하는 부정이 많았다. 무려 "세계 1위 실리콘밸리의 자유로운 업무 방식"에 대한 내용이니 나같은 평사원은 그저 읽으면서 '걔네는 그렇구나. 이런 부분이 다르구나.' 하는 정도지 '그래, 이걸 내 직업의식에 적용해봐야겠어!'하는 긍정적인 적용이나 공감은 그닥 되지 않는다. 물론 많이 나오는 고정적인 멘트가 [ 사람은 누구나 익숙한 환경이 마음 편하죠. 그래서 자신을 바꾸고 싶어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기가 쉽지 않아요. 하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첫걸음을 떼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돼요. 나처럼 평범한 사람도 했으니까 누구나 할 수 있어요. -p.33] 같은 말이긴 하지만, 여긴 한국 사회입니다. 라는 말로 모든 것이 상쇄되는 느낌이다. 이 책이 어떤 긍정적인 실천으로 이어지려면 직급이 어느 정도 있는 선에서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적게는 한 사무실의 업무 방식을 바꿔보자고 제안할 수 있는 정도의 직급, 많게는 직접 자신의 회사 인재를 오로지 능력 중심으로 뽑고 횡적으로 유지할 능력이 될만한 직급. 그리고 자신에게 익숙한 환경을 바꿀 시도를 할만한 깨어있는 생각도 가지고 직급도 있는 사람이 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점도 있다.

 

 좋은 환경이나, 빠른 업무 처리, 명확한 표현으로 확실히 선을 그어두는 의사결정, 긴밀한 시장과 기업의 상호 반응, 국가를 초월한 다민족 글로벌 사회의 형성, 효율적인 인턴제도 -무급으로 업무 숙달을 위해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최근 열정페이라는 말로 비꼬아지는 일을 실리콘밸리의 신입 채용 효율화라는 장점으로 보는 부분은 어떤 특수성이 더있는지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됐다. - 능력제로 자신의 위치를 찾아갈 수 있는 횡적 사회, 전문성에 따른 분업화, 개인과 개인이 연결되어 기꺼이 서로의 멘토가 되어 주는 열린 구조 등등은 참 매력적이다. 하지만 매력적이면서도 한 편으로는 철저한 자본주의적 개인 평가가 냉정하게 여겨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위계가 분명하고 관료적이지만 그만큼의 책임을 위에서 분담하려는 성향이 있는 한국 사회의 업무 분위기에서, 개인의 발전이 없다면 도태 외의 길은 없어 보이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미국 스타일과의 차이를 느껴보면 각각의 장단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막연히 그렇게 되면 좋겠다.. 하고 회사생활 하다보면 누구나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을 확인함과 동시에 부담과 압박이 그만큼 개인에게 주어지는 현실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 실패해도 그만이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하고 싶을 때 하자, p.52] 라고 말하는 평범한 근로자들이 그곳에 있다. 그들은 자신이 도전하지 않았다면 남들과 다름없이 평범히 일하고 살았을 것이라 한다. 실패도 있지만 도전하다보면 그 안에서 성공을 발견할 수 있다고. 너무나 일리있는 말이다. 마치, '당신은 어린 시절에 한번 크게 아팠던 적이 있지?' 하고 묻는 말처럼.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떠올려볼 말이 있습니다. [ 승자 한 명당 패자는 열 명인데 솔직히 너는 후자일 것 같다. ]는 모 인터넷 사이트의 현실적인 명언이 있지 않은가. 물론 실패를 감수하고 도전한 자만이 성공이라는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안다. 그런데 그 실패로 감수해야 할 리스크들이 모두에 공평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열 명 쪽에 있을 수도 있는데 나는 한 명이 될 것이야, 하는 믿음을 감수하기에는 이 책은 너무나 한 명 들의 이야기만 있다. 한 명들은 그 나름의 준비와 운도 있었을테니까 혹시나 이 책을 읽고 감명받아 이런 자유로운 업무 방식과 높은 급여를 동경하며 도전할 것이라면 그늘 쪽의 이야기도 찾아보고 중심을 잡아보시길. 이 책에 나와있는 실감 나는 사례들은 하나같이 너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리스크는 있다. 하지만 그 리스크를 감수하고 도전한다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를 반복하고 있으니까. 게다가 비자에 관한 참고 내용 등등도 일본에 좀 더 포커스를 맞춰서 소개하고 있으니 이 책이 당신에게 현실적인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은 접자. 약간의 호기심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가볍게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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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 - 장석주의 서재
장석주 지음 / 현암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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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책을 읽을 때, 그래 얼마나 재미있게 잘 쓰셨는지 감상해보겠습니다. 하는 마음가짐 - 곱게 말하면 기대를 안고 읽는다. 그런데 책을 읽을 때 교과서가 아님에도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저자들의 책이 있다.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의 저자 장석주가 그러하고,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의 저자 정혜윤이 그러하고 또, 팟캐스트 '빨간책방'을 방송하는 '밤은 책이다'의 저자 이동진이 그러하다. 다독을 하며 그것이 깊은 사유와 통섭의 경계로까지 이어지는 소양을 지닌 저자들이라는 것이 그 공통이다. 때문에 저자 장석주의 신간 소식을 현암사로부터 들었을때 기대가 많이 됐다. 더불어 걱정도 됐다. 배우면서 읽는 시간들이 얼마나 더디게 지나는지 예상이 되니까.

 

 신간은 총 네분류로 나뉘어져 있다. 사계절. 계절마다 부제가 달려있는데, 각기 [ 봄 : 고갈된 사색의 능력이 살아나다 - 여름 : 책 읽기는 독충이나 돌발사고도 없고 그리고 비행기 편으로 부친 수화물도 분실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여행이다 - 가을 : 가슴이 뛰는 이유는 책상 위에 쌓인 책들로 인해 내 지고한 쾌락이 더 감미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 겨울 : 정신적 침잠 속에서 사소한 기억들을 모아 잇고 철학하기에 좋은 시간이다 ]으로 되어 있다. 봄의 부제를 보는 순간부터 저릿하고 달려오는 환기에, 저도 모르게 책장을 넘기질 못한 채로 지난 몇 개월의 시간을 돌이켜봤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여가라 여겼던 독서나 영화감상 등에서 멀어져 있었다. 아무리 보고 읽어도 지겹지 않던 것들을 지속할 수 있도록 유지하는 것 만으로도 버거웠던 시간. 멍하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려해도 집중도 되지 않고 그저 말초적인 자극에만 의지하여 핸드폰만 만지작대던 시간이 떠올랐다.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봤는데 당장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 내려놓고 사색하는 것이 부족했던 것이었다. 지나치게 광신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부제들이 삶과 사유를 한단계 더 풍요롭게 하기 위한 과정을 한 해 살이로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사계를 다 거치고 나면 끝나서 텅 빈 것이 아니라 자신을 리프레쉬하기 위해 다져진 한 해를 완성하게 되는 것 같이.

 

 대부분 배우면서 읽었는데, - 책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읽는 버릇만 없었다면 밑줄이라도 치고 필기도 할 요량으로- 그 중에서 공감하면서 읽은 부분은 도서관에 대한 언급이 되어 있는 단락이었다. [도서관은 가슴을 뛰게 하는 공간 중의 하나다. 도서관이 각별한 것은 젊은 시절 한때 절망과 불안을 억누르며 하염없이 소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도서관은 어떤 사람에게는 '비밀스러운 낭만의 공간'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꿈을 잉태하고 키우는 모태 공간이기도 하다. ...중략... 왜 도서관들은 접근이 쉬운 도심 한가운데 있지 않고 변방의 녹지나 공원 귀퉁이에 있는 것일까? 첫째, 도서관들이 도시 중심부에 상업 업무 시설이 다 들어찬 다음에 지어졌기 때문이고, 둘째, 도서관이 이윤 창출이 없는 공공건물이기 때문이다. 도서관이 무슨 수로 도심 한가운데의 높은 지가를 감당할 수 있으랴! 도서관이 소음이 덜한 도심 외곽에 있는 것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다만 더 다양한 작은 도서관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라는 내용인데, 이사오기 전 살던 지역이 작은 규모로 집중적으로 발달한 곳이라 중심부와 도서관이 멀지 않아 도보로 이동 가능하고 역사와 연계된 대여 서비스도 잘 운영하고 있어 정말 감사히 이용했던 기억이 있다. 즐겁게 사용했던 발달된 도서대여 시스템에 멀리서도 찬양과 감탄을 보내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눈에 많이 밟히는 내용이었다. 도서와 독서를 위해 마련된 도서관이 이윤 창출이 없는 건물이라는 이유로 외따른.. 곳에 지어져야 한다는 것 또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들의 가치라는 것이 이윤으로 상응되어야 하는 것일까, 하고.

 

 또 하나는 '미국이라는 타자'에 대한 내용을 담은 장이었는데, 개봉으로 한동안 화제가 되었다 생각 이상으로 졸렬한 내용에 모두가 실망을 감추지 못했던 '인터뷰'라는 영화가 떠오르기도 했고 마이클 무어 감독의 '화씨 9/11'이나 '식코'같은 영화들도 떠올랐다. 어떤 내용이 인상깊게 여겨지거나 더 주의깊게 보게 되는 계기가 내가 가진 바탕에 따라 좌우하기 마련이니, 감상과 생각은 자신이 체득한 만큼의 경험과 배경에서 이루어진다는 확실한 증거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단 한 장을 읽어보라 추천해줄 것을 말한다면 '이 여름은 전대미문의 여름이다'를 꼽을 것 같다. [ 태어남과 죽음은 우주적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나방이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게 아니듯 나도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게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존재의 일의성 앞에서 겸허하게 나의 태어남을 우주적 사건으로 받아들인다. 아울러 나는 정직한 방식으로 세계의 다채로운 삶에 참여하고 있다. ...중략... 나는 '영원성'에 대한 상념을 멈추지는 않지만, 오늘 여기에서의 하루가 결코 도무지 알 수 없는 추상적인 '영원성'에 견줘 하찮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내일은 또다시 황옥같은 해가 뜨고, 그 해가 내일의 삶을 비추리라. 이 여름이 내 생에게 단 한 번 나타나는 전대미문의 여름임을, 해가 뜨고 지는 이 평범한 하루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금보다 더 값진 하루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 일상적이면서도 시간과 공간의 분위기가 글 안으로 녹아들어가 있는 듯한 흐름이 영상을 읽는 것 같은 아름다움을 준다. 더불어 '8월에는 휴업 중이니, 글쓰기도 사양합니다'도 좋았다.

 

 책을 읽으면서 무심결에 떠올려봤는데, 물론 다 실행하기 정말 힘들겠지만 각 장마다 나온 책들 중 한권 정도를 선택해 사계절에 맞춰 읽으며 보내면 어떨까 생각했다. 12권에서 13권 정도 되니까 계절마다 3개월 일주일에 한 권의 책 정도면 된다는 계산이 얼핏 나온다. 이런 생각을 꿈같이 하면서 한편으로는 무서워진다. 이러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던 뜬구름이 진짜 계획이 되어 산처럼 내려지는 아득함? 책을 고르는 일부터가 1개월치의 괴로움은 될 것이다. 벤야민의 책은 '일방통행로'가 되겠다, 아마도. '아케이드 프로젝트'도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궁금하지만 1, 2권으로 나뉘어져 있기도 하고. 헤르만 헤세는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이다. 세번째부터는 롤랑 바르트의 책을 선택할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로 정하고 빼먹을지 선택의 연속이다. 이런저런 궁리를 책 덮기도 전에 시작하고 수많은 책들 중 읽은 것은 손에 꼽기도 어렵게 적다는 사실에 낙담하기도 한다. 사실 언급된 책들을 읽고 서평을 써보겠단 생각을 안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첫 장에서 이미 그 생각은 접게 되었으니, 떠올리며 읽을 수 있는 독자가 있다면 심히 부럽고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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