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개 1~3 세트 - 전3권
강형규 지음 / 네오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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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반부와 후반부의 느낌이 많이 다른 만화였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주인공 쓸개의 외모도 초반이랑 끝이 많이 달라졌다. 외모로만 봐도 주인공이 성장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만화였다. 요즘 만화시장은 웹툰이 대세라는 말답게 단행본으로 쥐어진 최근의 몇 편들은 다 웹툰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웹툰으로 나왔던 것들이 다시 종이책으로 재발매가 되는 구조. 어찌보면 무료로 매회 진행을 지켜보던 것을 권당 만원 이상의 가격을 내고 종이책으로 보게 된다는 것은 그만큼 재미이든 작품성이든 인정을 받은 작품이 가능한 일일 것이라 쓸개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기대를 하고 시작했다.

 

 초반에는 다소 촌스러운 모양의 인물들에 크게 흥미도 없었고, 걸그룹의 안무에 코피를 흘리는 할아버지의 등장같은 것도 그저 그랬다. 마치 거북이 등껍질을 등에 단 캐릭터가 떠오르기도 했고. 어찌됐든 1권의 초반에서 등장할 인물들에 대한 설명은 하나하나 다 나왔고 만화의 내용은 쓸개가 어머니가 남겨둔 금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면서 급물쌀을 탄다. 종로 금은방에 전병모양으로 만든 금을 팔려는 시도를 하다 알게 된 세실리아 흥업의 존재부터 금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다음권을 궁금하게 만든다.

 

 3권까지 되는 분량이 아쉬운 것은 아닌데, 워낙 풀어놓은 이야기가 많다보니 내용이 급전개 된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일반 만화를 생각하면 왠만한 만화 중 스토리 탄탄하고 수작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그 이상의 분량을 가지고 있는데, 3권 분량으로 쓸개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금괴의 제작 과정에 대한 비하인드를 풀어내고 현재의 쓸개가 과거를 찾고 금괴를 가진 채 미래를 위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싸움까지 그려내려니 개인적으로는 아쉬웠다.

 

 어쩌면 쓸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이야기를 먼저 60페이지 분량으로 프리퀄을 내고 그 뒤로 다시 현재의 쓸개부터 시작했다면 가뜩이나 짧은 분량에 정리가 더 잘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영화로도 나올 예정이라는데! 각색이 들어가면서 좀 더 내용이 안정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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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의 집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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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한 채에 얼마나 많은 식구들이 모여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토우의 집'만큼 오래전은 아니었더래도 나의 어린 시절도 그러했다. 우리 집 하나에 여섯 집이 들어 살았는데, 때때로 내 또래의 아이가 있는 집도 한두집 있었다. 원이나 은철이처럼 어울려 지냈으면 좋았을텐데 왜인지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얌전히 지내야 하기도 했고, 다가가기에 숫기가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문득 한번 제대로 말도 나눠보지 않았던 그 어린 또래의 아이가 있던 게 떠올랐다. 아이들이 바글바글하게 뛰어다니느라 매일이 바빴던 어린 시절의 그 동네. 골목마다 무리지어 나이먹기를 하던 그 때. 옛일이 한숨처럼 떠오르는 소설이었다.

 

 난쟁이 식모가 손빠르게 일하는 우물집에 아이들을 때리지 않고, 제 남편을 사랑하는 새댁이 세들어 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딘지 남다른 새댁네는, 삼벌레고개보다는 삼악동에 살 것만 같은 특유의 묘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그 집 아이들은 영이 원이 그리고 희, 딸 셋인데 우물집 주인인 순분네 금철이 은철이와 또래가 맞았다. 금철은 새침하고 예쁜 영을 좋아해 곧잘 주변을 맴돌았고, 은철과 원은 서로 스파이가 되기로 약속하고 온 동네의 비밀을 함께 찾아다니는 등 어린 아이다운 모험을 하기도 했다.

 

 처음엔 그들의 지난한 삶이 이렇게 무거워지게 될 줄은 몰랐다. 그저 조금 지질하고 불편하지만 서로가 가깝게 사는 만큼 따뜻하고 엉뚱한 아이들이 이래저래 머리를 맞대로 자라는 만큼 재미있는 일들이 소소하게 펼쳐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불행의 전조가 점점 짙게 드리우면서 아아, 결국은 이렇게 되는구나. 싶게 우물집은 어둠에 삼켜져 버린다. 은철이의 앓는 소리, 자신을 잃어버리고 만 새댁, 말을 안하는 원이 모두를 신경써 우물집을 끌어안아야 했던 순분은 견디지 못하고 집을 팔아 우물집을 떠나기를 소망하기에 이른다.

 

 한 울타리 안의 두 가족이 캄캄하게 물들어가기 까지 너무나 단숨에 읽어내려 이렇게 금방 두 가족의 삶이 파괴되어도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골똘했다. 책장을 덮고 한참을 가만 있다가 다시 책장을 몇번 뒤적이며 어디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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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홍의 황금시대 - 긴 사랑의 여정을 떠나다
추이칭 지음, 정영선 외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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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받아들고, 분명 낯선 여류작가에 대한 책인데 왜 이렇게 귀에 익은 것처럼 느껴지는지 의아했다. 보다보니, 그녀의 이야기가 배우 탕웨이의 분으로 재탄생한 동명의 영화 '황금시대'가 개봉했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녀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천재 여류 작가인 샤오홍의 일대기를 자신이 연기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고, 촬영을 앞두고 그녀의 작품들을 읽으며 영화를 준비했다는 내용이 주였다. 그때 문득 그런 작가도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그녀에 대한 책을 직접 읽게 되다니 또 새로웠다.

 

 샤오홍은 재능을 가진 여자로, 많은 재능있는 인물들이 그러했듯이 가까이서 보면 그녀의 삶은 그 재능과 그녀만의 열정이 가져다 준 희극이고 멀리서 보면 너무나도 짧고 강하게 빛났다 스러져버린 비극이었다. 사실 어떻게 보나 서른 한 살이라는 이른 죽음은 그녀의 삶을 비극에 좀 더 가깝게 만들지 모르지만. 샤오홍은 살아가면서 결국은 스스로의 의지대로 정해진 혼처를 버리고 도망을 가서 살거나, 자신의 재능을 발견해준 사람과 사랑을 나누게 되거나, 병이 들어 외로운 와중에도 끝까지 자신을 두고 떠나지 않은 두 남자를 만나 지냈던 일들이 본인에게는 삶의 매 순간이 변화와 운명이 흔들어대는 희망이거나 기쁨이었을 수 있어 그 여지를 남겨둔다.

 

 서른 한 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기까지 격변하던 당시 시대만큼이나 고난한 삶을 살았던 여자였던 그녀는 그럼에도 자신을 중국문학사에 천재 여류 작가로 이름 남길 번뜩이는 재능을 지녔다. 그 재능이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들을 만들어냈고 또 그들로 하여금 그녀 곁에서 괴로움을 느끼거나, 그녀를 떠나가게 만들기도 했다. 책은 그런 그녀의 만남들을 끈기있는 눈으로 지켜보고 때때로 당시 그녀가 느꼈을 감정의 여백을 추측해내기도 한다. 책을 읽으며 때때로 그녀는 충분히 자유롭게 강렬하게 살았지만 만약 그녀가 더 자유로운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떠올리게 만든다.

 

 책으로 읽게 된 것도 세세한 흐름을 직접 짚어가며 볼 수 있어 좋았지만, 탕웨이가 찍은 영화의 스틸컷을 보니 읽으며 이럴 것이다 생각만 해봤던 샤오홍의 모습이나, 감정선이 마치 그 자체인 듯한 얼굴과 눈빛 속에서 살아있는 것처럼 여겨져 영화로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책을 읽게 되면 그 안에 몰입하여 읽었던 흔적 때문에 다른 창작물로 나온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편이었는데, 샤오홍의 이야기는 그녀가 살았던 시대나 그녀 주변의 상황에 대해 일일이 떠올리기 힘들었던 부분도 있어서 그런지 영화의 스틸컷들을 찾아본 것이 다시 감상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많이 된 편이다. 책의 표지에 있는 샤오홍의 사진을 보다 탕웨이가 분한 그녀의 모습을 보면 또 그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잔상이 남아 비슷하게 여겨져 몰입이 잘 되는 면도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영화로도 그녀의 삶을 다시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더불어 그녀의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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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미인초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5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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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번을 더 해 읽으면서 이제, 소세키의 글에는 좀 익숙해졌구나 싶었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니 사실 조금은 읽기에 나태해진 면도 있던 것 같다. 가장 느린 호흡으로 중반을 다다르니 마치 히에이잔에 오르다 지친 고노의 심경이 되살아난다. 산에 오르는 것 같이 벅찬 호흡으로 첫 부분을 읽었던 것 같다, 나는.

 

 소세키만의 표현법이라고 해야할지, 대체적으로 길고 긴 서술의 끝에 간신히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말하자면 방이 하나 있다, 소세키는 자신이 보여주고자 하는 그 방의 크기부터 시작하여 벽지의 색, 놓여진 가구의 위치나 빛이 들어오는 모양을 천천히 짚어 설명해주고 난 뒤에야 그래서 그 방에서 찾고자했던 인물이- 혹은 물건이 거기에 있었다고 말하는 식이다. 거의 매 장면이 그러한데, 책의 중반정도 가보니 어느 정도 서술이 시작되면 금새 그 방의 윤곽이 잡히고 이번엔 무엇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지 설명이 귀에 들어오게 된다. 그 뒤부터는 금방이었다. 정상을 지나 내려가는 길만 남은 것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그리하여 곧 내려오는 끝이 아쉽게 느껴진다.

 

 [다른 두 세계는 8시발 밤기차에서 뜻하지 않게 엇갈린다.

 내 세계와 내 세계가 엇갈렸을 때 할복을 하는 일이 있다. 자멸하는 일이 있다. 내 세계와 다른 세계가 엇갈렸을 때 둘 다 무너지는 일이 있다. 부서져 날아가는 일이 있다. 혹은 길게 열기를 끌며 무한한 것 속으로 사라지는 일이 있다. 생애에 한 번 굉장한 엇갈림이 일어난다면 나는 막을 내리는 무대에 서는 일 없이 스스로가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하늘로부터 받은 성격은 그제야 비로소 제일의로 약동한다. 8시발 밤기차로 엇갈린 세계는 그다지 맹렬한 것이 아니다. ]


 

 읽다가 모든 인물들과 관련된 첫 교차점이 보이는 것 같은 순간이 바로 여기서부터 였다. 삼분의 일 정도 읽었을까 싶었는데, 시치조의 밤 기차에 탄 채로 '서로의 세계가 어떤 관계로 엮어질지 모르는' 사람들이 같은 장소와 시간 안에서 운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얼핏 꽤나 중대한 운명에 대한 이야기같이 느껴지지만 삼각 혹은 사각 정도 되는 관계의 클리셰라고 할 수 있는 설정이 주를 이룬다. 얽힌 관계에 놓여있는 네 남녀는, 후지오를 결혼상대로 생각하고 있는 무네치카와 장래가 유망하지만 가진 것이 없어 자신 앞에서 약할 수 밖에 없는 오노를 결혼상대로 생각하고 있는 후지오, 오노가 힘든 시절 보살펴 준 은사의 딸로 오노와 결혼할 것이라 여기고 있던 사요코, 책임을 느끼는 사요코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 후지오 사이에서 선택의 갈등을 하고 있던 오노이다. 계속되는 오노의 치졸한 행동을 두고 무엇을 위해 두 여자가 그렇게도 신경쓰고 괴로워해야 하는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오노는 변했다.

 5년 동안 하루도 잊을 수 없었던, 목숨보다 확실한 꿈속에 있던 오노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5년 전은 옛날이다. 서쪽과 동쪽으로 갈리고, 길고 짧은 옷소매로 갈리고, 이별의 슬픔을 가리는 저녁 구름이 서로 그리워하는 마음의 빗장이 되어, 만나는 일이 점점 더 힘들어진 지난 세월 동안 변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바람 불면 변할 거라고 생각하고, 비 내리면 변할 거라고 생각하고, 달밤에 핀 꽃을 보고도 변할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이렇게는 변하지 않았기를 빌며 플랫폼에 내려섰다.]

 

 오노의 달라진 모습을 두고 사요코가 떠올린 생각을 읽으며 오래 전에 쓰여진 것이지만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정, 기대와 실망, 부질없어진 믿음의 변절이 얼마나 그대로 인간의 내부에서 선연히 이루어지고 반복되고 있는지 곱씹었다. 세계가 관통하는 느낌이 들었던 부분이었다. 이렇게 많은 시간을 두고도 그대로인 사람의 마음들이 지속되는 세계를 만들고 있다고. 또, 누군가를 만나고 또 짝을 이뤄 결혼을 하는 일이 복잡하고 미묘한 완력의 차이를 두고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그때나 지금이나 오래두고 만나온 사람과의 도의적 책임이나 앞으로 주어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자라는 인물을 둘러싼 이야기는 또 참 흥미진진하다는 것도 느끼게 된다.

 

 모든 등장인물이 한 자리에 서서 마주했을때 매력적인 인물이라 여기고 있던 사요코가 처참하게 무너지는 모습은 안타까웠다. 손 위에 놓여진 쉬운 상대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오히려 먼저 단절을 선고받고야 만 입장이라지만, 그녀의 자존심을 두고 더 강하게 대처할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나름의 응원을 보냈던 인물이라 더욱 그러했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는 그저 장을 덮고 시선을 멀리 두고 가만히 읽어온 시간을 반추했다. 누군가에게 함께 읽기를 권하기보다 그저 읽었다면 그 곁에서 따뜻한 겨울의 볕을 두고 마지막 장의 침묵을 함께 즐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독특한 아우라가 남았다. '이곳은      만이 유행한다네.'

 

 

# 함께 들은 음악

김지연 Oblivion ; 학생 때 처음 들었던 탱고 곡이다. 음울한 느낌이 전반적이지만 그 중 열정적이면서도 관능적인 느낌이 묻어 있어 읽으며 자주 떠올라 들었다.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n6idiKuDi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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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빌라
전경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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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책은 아주 오래 전, 그런데 그다지도 멀지 않은 과거에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을 읽어봤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 이름은 너무 익숙해 내가 잘 알고 있는 저자의 신작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어떤 작가를, 또 그의 책을 봤다고 하여 그에 대해 잘 알게 되겠느냐 마는, 실로 오랫만에 읽은 저자의 책이었고 독특한 분위기가 느껴져 천천히 오랜 시간을 들여 멈춘듯이 읽은 책이었다.

 

 '해변빌라'는 표지 안에 책장 하나하나에 저자가 마치 그림을 그려넣은 듯 했다. 하얀 도화지 위에, 다른 것도 아니고 그저 도화지 위에 소녀가 꿈꿀 수 있는 애틋하고도 로맨틱한 장면들을 한장씩 그려넣어 놓은 듯한 소설이었다. 아버지나 혹은 어머니 같은 뿌리에 대한 부재가 전체적으로 푸르스름한 빛깔을 드리웠다고 해서 이 글이 소녀스럽지 않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 하나 하나, 외향에 대한 묘사 하나 하나가 전부 여성스럽고 그것이 지나치다 못해 소녀스러운 듯한 느낌을 준다. 약간은 극적이기도 한 구석이 있다는 점도 그렇다. 원래 소녀들의 상상은 어딘가 모르게 비극적이고 또 약간은 현실성이 부족하여 극적인 전개로 이어지는 일이 잦은 법이니까. 거기에 비밀스럽고 로맨틱한 요소들이 차례로 깔려있고.


  "여자의 진짜 능력이란, 제 남자를 알아보는 거란다."

 "남자의 진짜 능력은요?"

 "남자란 세상의 들판을 지나가는 바람과 같아. 하지만 자기를 알아보고 계산 없이 인생을 내놓는 여자를 만나면 자기가 줄 수 있는 것을 몽땅 주지. 거기에 제 생명을 쏟는 거다. 그게 남자와 여자 사이의 비밀 논리야."

 "그런 여자를 못 만나면요?"

 "바람처럼 들판을 떠돌다가 덧없이 세상 밖으로 사라지는 거지. 여자도 마찬가지야.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흩어지는 거지."


 유지와 노부인의 대화였다. 중간중간 생략된 부분이 있는데 두 인물의 대화만을 모아놓아 따로 옮겼다. 이런 식으로 읽는 이의 감성을 자극하는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그런 부분이 좋게 다가오면서도 현실에서 한참이나 붕 떨어진 것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어떤 소설들은 비현실적인 부분이 드러나서 좋은데, 어떤 소설들은 비현실적인 부분이 느껴질 때마다 아쉬움이 느껴지곤 한다. 해변빌라는 후자에 가까웠다. 세상에 저런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흐리거나 변질되지 않은 채 성인이 되어 살아갈 수 있을까, 저런 어조로 마음을 찌르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가끔은 너무나 연극적으로 느껴져 그 조차도 꾸며낸듯이 보이지 않을까 하고 의심하게 된다.

 

 책을 읽으며 문득 남에게 다정하면서도 건조하고 자신에게 애틋하면서도 무모한 유지나 이린, 이사경같은 사람이 되어 보고 싶다고 느껴진다. 그렇다면 굳이 이해하거나 해석하지 않으려 해도 순순하게 페루의 사과나 얼룩말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굳이 생물 선생님 앞에서 옷을 벗는 유지의 표정도 떠올려 보지 않았다. 나-읽는 이의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로 그저 인물들은 어디까지나 주어진 캐릭터 안에서 살 수 있는 삶을 살고, 행동을 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모든 정황을 관조적으로 바라보고 마지막 장에 가서야 서서히 페이드 아웃되는 슬라이드 필름 상영을 본 듯한 기분으로 책장을 덮었다. 가공된 것 같으면서도 자연스러운 삶의 단면들을 찍어 나열해놓은 이야기, 이야기라기 보다는 화면에 가까운 소설. 제 모습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담겨있는 의미는 어딘가 다른듯한 균열이 모여 있는 듯한 독특함이 특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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