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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가 왔다
정이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평점 :
" 그는 지리산 언저리의 보호소에서 혈혈단신 서울로 왔다. 살기 위해 왔다. ...중략... 내 두려움이 아무리 컸대도 녀석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린 개의 필사적인 용기에 대해, 하루하루의 그 마음에 대해 이제야 나는 헤아려본다. 14"
손수건을 준비하고, '어린 개가 왔다'를 손에 드세요. 저는 미리 경고했습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참 눈물날 일도 많다. 이런 말을 주위 사람들이 들으면 믿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어린 개가 왔다'는 그저 눈물 버튼이다. 개를 학대하고 버리는 사람의 대다수가 개를 좋아한다며 키우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믿을 수 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개를 키우려하지 않고, 키우지 않는 개는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도 없다. 버려진 개들은 누군가의 가족이었다. 나에게도 개가 한 마리 있는데 그 애를 키우며 다짐했다. 다시는 살아있는 동물을 들이지 않기로.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고 책임지는 것에는 차원이 다른 무게가 존재한다. 생명이 너무나 무겁고, 나의 사랑함과 개의 사랑함은 비할 바가 되지 않는다는 걸, 그애를 통해 자격없음을 배웠다.
가장 기대하고 재밌어 한 것은 역시나 '산책'이었다. 중대형 이상의 개들에게 특히 더 마음이 가는 탓에, 특히나 진도가 최애이기 때문에 그들의 성격 상 실외배변은 필수라 똥책 아니 산책은 웃음버튼이다. 수많은 견주들이 장마철과 태풍, 폭설이 오는 날이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산책을 나간다. 사랑 듬뿍 받은 개들은 날씨가 궂은 날에 똥자리가 마음에 안들거나 털이 젖는게 싫으면 어린아이가 투정 부리듯 견주에게 성질도 낸다. '너가 나오자며!', '제발 빨리 싸고 들어가자' 이 귀여운 승질머리들을 붙잡고 견주들이 진심으로 사정하는 모습은 봐도봐도 재밌다. 작가가 오자마자 '배변 천재(43)'였다던 루돌이를 데리고 실외배변을 결심하는 순간부터 정해진 미래 앞에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
또 하나는 루돌이의 응급실 방문기(206)들이다. 루돌이에겐 아주 위험한 순간임에 틀림없지만 언젠가 외국의 토크쇼에서 먹어서는 안 될 것을 먹은 개와 주인 이야기를 본 이후로, 산책하다 쥐랑 뽀뽀한 개가 주인에게 잔뜩 혼나면서 벅벅 닦여진 영상을 본 이후로 이 또한 의도치 않게 웃음버튼이 된 것이다. 이 두 영상은 유명하기도 하고 재밌고 귀여우니 안 본 사람들은 꼭 찾아보길 바란다. 초콜릿 먹은 개의 이야기는 코난쇼에 나온 미국 스탠드업 코미디언 루이스C.K 편이고, 쥐 때문에 멍빨 당하는 개는 대박이이다. 개들은 집에서 온갖 것을 물어 사고를 치기도 하지만, 똥책 중에 뭘 준 적이 없는데 갑자기 개가 우물우물 하고 있어서 사람들이 길에다 먹다남은 갖가지 음식물들을 함부러 버린다는 것을 체감한 견주들의 분통도 웃픈일이다.
물론 루돌이의 모든 이야기가 행복하고 웃음 가득하지만은 않다. 손수건 준비하라는 경고부터 시작한 것은 그만큼의 눈물과, 또 손수건을 반으로 나눌 수 있을만큼의 분노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루돌이도 진도들과 비슷하게 중대형에 속하는 체구인데, 이 친구들이 여성 견주와 산책할 때 겪어야 하는 무례들이 너무나 익숙해서 지금도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진도를 키우는 여성 견주들이 '우리 개는 안 물어요, 내가 물지!'하는 전사, 파이터, 공익신고자 그러나 열혈인 존재로 진화하는 과정을 숱하게 보았다. 시고르자브종인 루돌이에 대한 무례한 질문들도 그렇지만, 진도라는 종이 있어도 만만치 않은 편견과 오해를 받는 것은 마찬가지라 견주들이 마치 경찰 바디캠처럼 증거 영상을 찍으며 산책하는 것은 물론이요, 개는 정상인데 사람이 미친 경우를 참 많이 봤다.
그리하여 이 어린 개가 15킬로그램 쯤 되는 중대형견으로 자라난 것이, '반려견 동반 가능(155)'마저도 어떤 개들에겐 해당되지 않음을 함께 겪는다는 것이 미안하게도 고마웠다. 누군가는 목소리를 좀 내줬으면, 목줄 안하는 소형견들은 보이지 않고 입마개 의무 대상도 아닌 개에게 흰눈을 뜨는 사람들도 한번씩 지적해줬으면 했다. 심지어 법적으로 출입보장을 받는 안내견들도 식당에서 자기 때문에 주인이 출입거부를 당하면 눈치를 채고 위축된다는데, 10키로 미만의 동물만 친화적인 공간들 앞에서 루돌이도 이 차별을 눈치채면 어쩌지 싶었다. 거부하려거든 귓속말이나 글씨를 써서 해주는 배려심을 보여주길. 애초에 모든 동물들에게 친화적이라면 더 좋겠지만.
저자는 안간힘을 다해 개와 자신의 세상이 분리되어 있었음을 주장한다. 무시무시한 '습관성 식물 킬러(12)' 출신이며 '고양이 알레르기(20)' 특성 보유자이고 '가족 중 25퍼센트(24)'를 담당하는 (불)균형의 소유자임을 계속해서 알렸다. 개를 키우며 식물 이야기를 하는 작가 마일로의 만화를 얼마 전에 열심히 봐서 일까, 같은 연쇄살식마 출신이어서 일까, 이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게 만들어주는 면모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개가 온 이후로 이전의 세계는 붕괴되어 버렸다. 가족 중 가장 먼저 '발라당(85)'을 선보여 준 강아지 앞에서 "이 개는 내 개야"(189)라고 소리치는 견주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 밖에. 훌륭한 견주의 모습으로 책을 마무리짓는 과정을 즐겁게 지켜볼 수 있어서 좋았다. 게다가 오죽하면 책까지 내는 이 얼마나 성덕인 견주인가.
물론 모든 내용이 다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보호소에서 혼자 남은 작고 안쓰러운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온 작가는 좋은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범법자이기도 하다. 무슨무슨 법에 의해서 가나디 사진 최소 열 장 이상 함께 보여줘야 하는데 읽어도 읽어도 그림만 있고 사진이 없다. 훈련받고 장염 왔을 때 강아지똥 사진도 계속 찍어서 기록하셨으면 그거라도 공개하셨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진짜 마지막까지 루돌이 실물이 없을지는 전혀 몰랐다. 믿었어요, 전. 믿었다구요, 작가님. 누가 '반려견 행동심리학 - 개의 행복을 위한 가장 과학적인 양육 가이드(93)'에 개에 대해서 뭔가를 하려면 사진 같이 올려야 한다는 내용 넣어서 개정판 발행하도록 해주길.
강아지였던 개와 함께 사는 견주들과 나만 없어 갱얼지, 하며 눈물 짓는 강아지사랑단들이 읽는다면 반드시 공감도 하고, 내 옆의 작은 생명체가 기특해 눈물도 나고, 자신도 모르게 잇몸이 드러날 책이다. 작가 정이현과 강아지와 함께하는 일상을 주고받을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내가 저를 향해 웃었기 때문일까, 루돌이의 고개가 옆으로 갸우뚱 기울었다. 절묘한 각도였다. 너도 나에게 무언가 궁금하구나. 내가 너를 알고 싶은 만큼 너도 그렇구나. 너도 나를 알고 싶구나. 그렇구나. 나는 그의 마음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우리에겐 주고받을 게 아주 많이 남아 있음을 알았다. 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