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보그 가족의 밭농사 - 조기 은퇴 후 부모님과 함께 밭으로 출근하는 오십 살의 인생 소풍 일기, 2023년 국립중앙도서관 사서추천
황승희 지음 / 푸른향기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아이고, 늙고 힘들어서 농사 못 헌다고 시골마다 땅을 내논다는데, 시상에... 팔순 너머에 농사를 한다고 그걸 또 사는 사람이 있네. 아부지한테 늙어 편하게 사시라구랴. 머더러 힘들게 농사를... 쯧쯧. 농사 지긋지긋혀." 61" 

 남 일이 아니다. 함께 늙어가는 부모님과 밭농사라니. 그것도 칠할 정도를 살아온 동네를 벗어나 낯선 동네로 거처를 옮겨서. 있는 땅도 헐값이든 제값이든 팔아 없애라고 성화를 부리고 있는 나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나와 비슷한 세대에게는 그 분포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부모님 세대에는 귀농이나 전원생활이라는 비슷한 황혼기의 로망이 있는 듯하다. 평생을 한동네에서 떠나본 적이 없는 아빠가 느닷없이 차로 두시간쯤 떨어진 곳에 땅을 샀다. 본인 계획대로라면 아마 지금쯤 그곳에서 노년을 보낼 것이었겠지만 삶이 뭐 어디 계획대로만 흘러가던가. 노년은 되었지만 집과 땅을 오가며 두배로 바쁜 삶을 살고 계신다. 애물단지나 다름없어 보이는 땅을 정리하고 좀 편히 지내시라고 몇년 전부터 권유하다못해 진절머리를 내는 자식에게 부모님은 그저 묵묵부답이다. 생활반경에 모든 필요한 편의시설이 존재해야 함을 주장하는, 편의시설은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는 성향인 사람과 길이 다르기 때문일까. 자연으로 돌아가길 결심하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뭘 키워내고 싶은걸까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뱉으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 아빠는 누구보다 나를 사랑한다는 완벽한 사실, 나를 전적으로 믿고 내 선택과 인생을 소중하게 생각해주시는 아빠인데 말이다. 엄마를 구해야 한다는 만화 같은 마음이 언제 나에게 있었나 싶게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 만화는 나에게 아득해졌다. 아빠에 대한 두려움이 차차 무뎌진 건 사실이다. 119" 나이를 먹을수록 이상하게도 나는 아빠와 가까워지고 있다. 아주 잘 맞는 사이는 아니지만 나는 가족 중 아빠와 성격이나 외향이 가장 많이 닮았다. 내가 가진 성질머리도 친근한 사람들 앞에서 내보이는 유머감각도 불규칙해서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치열도 짙은 쌍커풀이 있는 눈매도 아빠에게서 가져온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대화를 나누고 이해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나이를 먹을수록 더 쌓여서인지 모르지만 아빠는 나에게 가장 많은 참을성을 보인다. 아빠와 의견 차이가 생길 것 같은 문제를 두고 협상과 회유 테이블에 가장 많이 올라가는 것은 내가 되었다. 이와 비슷한 관계의 모양이 책에서 보일 때가 종종 있었다.  

 비슷한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사이답게 '다인 가정'을 선택한 친구와의 일화(149)도 재밌게 읽었다. 인터넷에도 그런 불만은 종종 올라온다. 나는 친구를 만나서 대화하고 싶은 것이지 친구의 남편이나 아이를 함께 부르는 것은 아니라고. 결혼한 친구의 삶에서 자기는 없어지고 남편과 아이로 중심이 옮겨가는 것 같아 아쉽다고. 저자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고, 1인 가족을 선택한 자신의 삶과 다를 뿐 틀린 것은 아니라는 이해와 더 다양한 친구맺기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자꾸만 생일이 기대가 되지 않는 변화도, 폐경이 오길 바랐다는 얘기도, 심지어 요즘 더워할 때마다 증상으로 의심받고 있는 갱년기도, 부모님이 갈수록 여기저기 아픈 곳이 생겨난다는 것도 전부 공감가는 것들이었다. 사는 일이 다 똑같구나 싶어진다. 어떤 날은 나만 이렇게 사는가 싶은데 이렇게 문득 다 비슷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면 묘하게 안도하게 된다. 남들과는 다르게 살고 싶고 남보다 더 잘 살고 싶어서 아등바등 했던 것도 같은데, 인생이라는 큰 흐름 안에서 각자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 왜 위안이 될까. 

 그렇다고 우리가 모든 면에서 비슷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 이혼한다 하면 열이면 열 명이 왜? 라고 묻지만 결혼한다 하면 왜? 라고 묻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215"는 말에 결혼한다 하면 왜?하고 묻는 사람도 많다는 생각을 했다. 그 중 하나가 나다. 요즘은 더 많은 사람들이 왜인지 묻겠지만, 난 전부터 궁금했다. 어떤 점이 결혼을 결심하게 만들었을까, 그 쉽지 않은 결심을 하게 된 이유를 물어보곤 했는데 저마다 내놓는 답을 들어도 매번 궁금하고 신기하긴 했다. 그 밖에도 에어컨에 대한 이야기(197)나 예쁜 여자애는 꼭 못생긴 애들과 친한 법(226)이란 말들은 가까이 다가서러던 마음을 주춤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 나에게도 누군가가 다가오려다가도 발걸음을 돌리게 될 만한 점들이 있겠지 생각이 번져나가면서, 뭐 어떤 면들은 나랑 좀 다를 수도 있지 싶어졌다. 그보다는 평범하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사이보그 가족의 밭농사'는 이런 삶도 있다고 말해준다. 인간극장이나 자연인 같은 프로그램에 나올 것만 같은 독특함을 가지고 있는데 읽고 나면 나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결론을 맺는다. 남들은 대체 어떻게 삶을 견디고 있는지 궁금해질때, 인스타그램 밖에서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엿보고 싶을 때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린 개가 왔다
정이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그는 지리산 언저리의 보호소에서 혈혈단신 서울로 왔다. 살기 위해 왔다. ...중략... 내 두려움이 아무리 컸대도 녀석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린 개의 필사적인 용기에 대해, 하루하루의 그 마음에 대해 이제야 나는 헤아려본다. 14" 

 손수건을 준비하고, '어린 개가 왔다'를 손에 드세요. 저는 미리 경고했습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참 눈물날 일도 많다. 이런 말을 주위 사람들이 들으면 믿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어린 개가 왔다'는 그저 눈물 버튼이다. 개를 학대하고 버리는 사람의 대다수가 개를 좋아한다며 키우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믿을 수 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개를 키우려하지 않고, 키우지 않는 개는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도 없다. 버려진 개들은 누군가의 가족이었다. 나에게도 개가 한 마리 있는데 그 애를 키우며 다짐했다. 다시는 살아있는 동물을 들이지 않기로.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고 책임지는 것에는 차원이 다른 무게가 존재한다. 생명이 너무나 무겁고, 나의 사랑함과 개의 사랑함은 비할 바가 되지 않는다는 걸, 그애를 통해 자격없음을 배웠다.  

 가장 기대하고 재밌어 한 것은 역시나 '산책'이었다. 중대형 이상의 개들에게 특히 더 마음이 가는 탓에, 특히나 진도가 최애이기 때문에 그들의 성격 상 실외배변은 필수라 똥책 아니 산책은 웃음버튼이다. 수많은 견주들이 장마철과 태풍, 폭설이 오는 날이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산책을 나간다. 사랑 듬뿍 받은 개들은 날씨가 궂은 날에 똥자리가 마음에 안들거나 털이 젖는게 싫으면 어린아이가 투정 부리듯 견주에게 성질도 낸다. '너가 나오자며!', '제발 빨리 싸고 들어가자' 이 귀여운 승질머리들을 붙잡고 견주들이 진심으로 사정하는 모습은 봐도봐도 재밌다. 작가가 오자마자 '배변 천재(43)'였다던 루돌이를 데리고 실외배변을 결심하는 순간부터 정해진 미래 앞에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 

 또 하나는 루돌이의 응급실 방문기(206)들이다. 루돌이에겐 아주 위험한 순간임에 틀림없지만 언젠가 외국의 토크쇼에서 먹어서는 안 될 것을 먹은 개와 주인 이야기를 본 이후로, 산책하다 쥐랑 뽀뽀한 개가 주인에게 잔뜩 혼나면서 벅벅 닦여진 영상을 본 이후로 이 또한 의도치 않게 웃음버튼이 된 것이다. 이 두 영상은 유명하기도 하고 재밌고 귀여우니 안 본 사람들은 꼭 찾아보길 바란다. 초콜릿 먹은 개의 이야기는 코난쇼에 나온 미국 스탠드업 코미디언 루이스C.K 편이고, 쥐 때문에 멍빨 당하는 개는 대박이이다. 개들은 집에서 온갖 것을 물어 사고를 치기도 하지만, 똥책 중에 뭘 준 적이 없는데 갑자기 개가 우물우물 하고 있어서 사람들이 길에다 먹다남은 갖가지 음식물들을 함부러 버린다는 것을 체감한 견주들의 분통도 웃픈일이다. 

 물론 루돌이의 모든 이야기가 행복하고 웃음 가득하지만은 않다. 손수건 준비하라는 경고부터 시작한 것은 그만큼의 눈물과, 또 손수건을 반으로 나눌 수 있을만큼의 분노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루돌이도 진도들과 비슷하게 중대형에 속하는 체구인데, 이 친구들이 여성 견주와 산책할 때 겪어야 하는 무례들이 너무나 익숙해서 지금도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진도를 키우는 여성 견주들이 '우리 개는 안 물어요, 내가 물지!'하는 전사, 파이터, 공익신고자 그러나 열혈인 존재로 진화하는 과정을 숱하게 보았다. 시고르자브종인 루돌이에 대한 무례한 질문들도 그렇지만, 진도라는 종이 있어도 만만치 않은 편견과 오해를 받는 것은 마찬가지라 견주들이 마치 경찰 바디캠처럼 증거 영상을 찍으며 산책하는 것은 물론이요, 개는 정상인데 사람이 미친 경우를 참 많이 봤다. 

 그리하여 이 어린 개가 15킬로그램 쯤 되는 중대형견으로 자라난 것이, '반려견 동반 가능(155)'마저도 어떤 개들에겐 해당되지 않음을 함께 겪는다는 것이 미안하게도 고마웠다. 누군가는 목소리를 좀 내줬으면, 목줄 안하는 소형견들은 보이지 않고 입마개 의무 대상도 아닌 개에게 흰눈을 뜨는 사람들도 한번씩 지적해줬으면 했다. 심지어 법적으로 출입보장을 받는 안내견들도 식당에서 자기 때문에 주인이 출입거부를 당하면 눈치를 채고 위축된다는데, 10키로 미만의 동물만 친화적인 공간들 앞에서 루돌이도 이 차별을 눈치채면 어쩌지 싶었다. 거부하려거든 귓속말이나 글씨를 써서 해주는 배려심을 보여주길. 애초에 모든 동물들에게 친화적이라면 더 좋겠지만. 

 저자는 안간힘을 다해 개와 자신의 세상이 분리되어 있었음을 주장한다. 무시무시한 '습관성 식물 킬러(12)' 출신이며 '고양이 알레르기(20)' 특성 보유자이고 '가족 중 25퍼센트(24)'를 담당하는 (불)균형의 소유자임을 계속해서 알렸다. 개를 키우며 식물 이야기를 하는 작가 마일로의  만화를 얼마 전에 열심히 봐서 일까, 같은 연쇄살식마 출신이어서 일까, 이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게 만들어주는 면모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개가 온 이후로 이전의 세계는 붕괴되어 버렸다. 가족 중 가장 먼저 '발라당(85)'을 선보여 준 강아지 앞에서 "이 개는 내 개야"(189)라고 소리치는 견주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 밖에. 훌륭한 견주의 모습으로 책을 마무리짓는 과정을 즐겁게 지켜볼 수 있어서 좋았다. 게다가 오죽하면 책까지 내는 이 얼마나 성덕인 견주인가.
  
 물론 모든 내용이 다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보호소에서 혼자 남은 작고 안쓰러운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온 작가는 좋은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범법자이기도 하다. 무슨무슨 법에 의해서 가나디 사진 최소 열 장 이상 함께 보여줘야 하는데 읽어도 읽어도 그림만 있고 사진이 없다. 훈련받고 장염 왔을 때 강아지똥 사진도 계속 찍어서 기록하셨으면 그거라도 공개하셨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진짜 마지막까지 루돌이 실물이 없을지는 전혀 몰랐다. 믿었어요, 전. 믿었다구요, 작가님. 누가 '반려견 행동심리학 - 개의 행복을 위한 가장 과학적인 양육 가이드(93)'에 개에 대해서 뭔가를 하려면 사진 같이 올려야 한다는 내용 넣어서 개정판 발행하도록 해주길. 

 강아지였던 개와 함께 사는 견주들과 나만 없어 갱얼지, 하며 눈물 짓는 강아지사랑단들이 읽는다면 반드시 공감도 하고, 내 옆의 작은 생명체가 기특해 눈물도 나고, 자신도 모르게 잇몸이 드러날 책이다. 작가 정이현과 강아지와 함께하는 일상을 주고받을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내가 저를 향해 웃었기 때문일까, 루돌이의 고개가 옆으로 갸우뚱 기울었다. 절묘한 각도였다. 너도 나에게 무언가 궁금하구나. 내가 너를 알고 싶은 만큼 너도 그렇구나. 너도 나를 알고 싶구나. 그렇구나. 나는 그의 마음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우리에겐 주고받을 게 아주 많이 남아 있음을 알았다. 87"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루언니 2025-06-17 09: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같은 마음으로 <어린 개가 왔다>를 읽고 반가운 마음에 댓글 남깁니다. 루돌이 인스타 계정 있어요! https://www.instagram.com/rudol.puppy?igsh=NDAxc2xjOTNoYjhx 그림과 똑같습니다 ㅎㅎ

테일 2025-06-20 20:3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루돌이 실물 궁금했어요!! 같은 마음으로 읽으셨다니 더더 반갑고 따뜻한 마음 써주셔서 감사드려요🫶
 
창조적 영감에 관하여 - 천천히 사유할 때 얻는 진정한 통찰의 기쁨
머리나 밴줄렌 지음, 박효은 옮김 / 다산초당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책을 읽으려고 자리를 잡고 앉아서 쉴 새 없이 딴 짓을 하는 자신을 보며 성인 ADHD가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집중력이 없고 산만하다니. 오히려 어렸을 때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이게 다 핸드폰 때문이다. 내가 보내는 한가로운 시간은 아무 의미도 없이 지나가버리는 것 같은데, '집중과 몰입의 시간(55)'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겠다. 아르키메데스가 욕조에서 "유레카"를 외칠 수 있었던 것은 답을 찾기 위해 몰입해온 잠깐의 '빈틈'에서 생각의 전환이 발생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책의 시작에 앞서 게으름과 산만함, 걷는 시간과 여유, 재충전과 환기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건 당신들의 이름 옆에 붙는 수식-교수, 소설가, 시인, 크리에이터 등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가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나약한 생각으로 책 안의 모든 내용을 신포도 보듯이 할 수는 없다. 책에서도 " 어떤 이들은 '유익한 산만함'은 한가한 철학자들이 꿈꾸는 허상이며, 권리가 아닌 특권에 불과하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자크 랑시에르는 '유익한 산만함'을 오직 '소수 특권층'의 전유물이라 여기는 회의론자들의 주장에 강력한 반증을 제시했다. 131"고 나와 같은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한다. 그리고 이 살짝 비뚤어진 시선이 책을 읽어나가며 점차 풀려짐을 느낄 수 있었다. 

 초반 다윈이 말하는 과도한 몰입에 따른 '쾌감상실증(33)'이란 것을 최근 읽은 "프랑켄슈타인"에서도 보았다. 빅토르가 생명을 창조하는 연구에 몰입한 나머지 주변사람들도 챙기지 못하고 감정이 둔화되는 부분이 나온다. " 하지만 나는 꽃이 피거나 나뭇잎이 우거진 광경을 보지 못했다. 예전에는 그런 풍경을 보고 기쁨을 느끼곤 했는데, 이제는 홀린 듯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었다.(69. 프랑켄슈타인, 책세상) " 절망감에 매몰된듯한 빅토르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는데 외골수적인 집중력이 우울감과 고립감을 주었다는 다윈의 사례를 통해 다시금 인물을 한층 더 이해하게 되었다. 

 현대의 우리 역시 원인은 다르지만 증상은 비슷한 중독을 가지고 있다. 2배속과 15~30초 정도의 짧고 직관적인 콘텐츠들을 통해 느끼는 자극에 익숙해져 긴 호흡으로 복합적인 감상을 스스로 이끌어내야 하는 콘텐츠들은 외면 받고 있다. '뇌의 스위치(39)'를 끄지 못하고 계속해서 핸드폰을 통해 이리저리 어플을 뒤적이는 일에 여가를 소모하고 있는 것이다. 수전 손택은 이를 핸드폰에 몰입하는 '주의력 과잉 장애'라 진단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콘텐츠의 시간이 길어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집중력 부족과 끈기없음이 더 두드러진다 여긴다. 이 주의력 결핍 장애는 느긋한 사색을 방해하는 지나친 흥분 상태(40)에 빠지게 만들 뿐이다. 

 가장 매력적으로 느꼈던 것은 책의 중간중간 짧게는 한쪽, 혹은 과감히 양쪽의 모든 면을 들여 실어둔 흑백 사진이었다. 처음 나는 이 사진들이 그리 맥락에 맞지 않아 흐름을 끊고 전체적인 분위기와도 어울리지 않다고 여겼다. 세번째 사진과 마주했을때 쯤 의도적으로 사진이 끼어들어와 집중을 깨고 정적이고 흐릿한 공간을 잠시간 바라보며 머리를 비우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느꼈다. 책을 읽으며 나에겐 집중이 부족하다고 여겼는데 사진이 등장할 때마다 어느 순간 몰입을 방해받고 있단 불편함을 느낀 것이다. 이 작은 장치로 몰입 사이에 틈을 만든 점이 흥미로웠다. 

 " 그런데 인류학적 관점에 따른 산만함에 대한 설명이 아무리 설득력이 있다고 해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이 주의력 결핍을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는 마당에 과도한 집중을 비판한 흄의 주장을 지지하거나 산만함을 옹호할 수 있을까? 112" '창조적 영감에 관하여'를 읽으며 반복해서 해온 행동이 있다. 다리떨기다. 긴 시간동안 다리떨기는 산만함과 복나감을 이유로 핍박 받아온 행동양식이다. 하지만 지금, 다리떨기에 대해 밝혀진 진실은 어떠한가? 스트레스 감소, 운동 효과 심지어 집중력에도 도움이 된다는 갖은 장점이 드러났다. 단점은 보기에 안좋다는 것 뿐. 다리떨기와 흄, 집중과 산만함에 대한 고정관념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가 되었다.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책이다. 언뜻 진부한 내용을 담고 있을 것 같지만 왜 '게으름에 보내는 찬사'라는 문제적 강의명을 달고 등장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됐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시간을 이렇게 써도 괜찮을까 염려되거나, 주의력 결핍 장애인가 걱정되거나, 어린시절부터 부모님 손에 이끌려 바둑이나 서예학원을 등록한 이력이 있거나, 지금 다리를 떨고 있다면 혹은 집중력이 좋은 편이라 한번 몰입하면 주변 상황이나 소리가 차단된다는 사람이라면 '창조적 영감에 관하여'를 읽어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주의 인사 소설, 향
장은진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살면서 책을 정리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에 대해 생각했다. 인생의 일부를 정리한다는 의미일까. 필요 없는 것들을 버리고 잊어서 새출발을 하겠다는 뜻일까. 무슨 일이 있으면, 어떤 마음이 생기면 필요한 게 아무것도 없는 인생이 될까. 39" 

 헤어진 전 연인이 내 집 현관문 비밀번호를 기억하고 들어왔었다는 시작은 불쾌함을 주었다. 훔쳐간 것은 없고 도리어 놔두고 간 것이 있었다고 해도 불쾌감은 여전했다. 헤어진 지 일 년이나 지났다니, 게다가 떠넘기듯 줘버린 것도 아니고 '부탁'한다니 언제고 되돌려받을테니 보관해달란 것일까. 무단침입으로 신고를 당해도 모자를 판에. 자유의 보장을 부르짖던 세주는 타인의 권리나 의사같은 건 발뒤꿈치로도 안 볼 자유도 포함해두었나 싶었다. 거기에 더해 이른바 '엑기스'인 책(18)을 두고 갔다고 " 나랑 다시 잘해보고 싶다는 뭐 그런 뜻일 수도 있을까. 21" 생각하는 동하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해시태그를 붙여 'ㅁ'으로 시작하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을때는 그래서 너희 둘이 사귀었었구나,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 뭐하냐너희들' 그래, 비밀번호 안바꿀때 알아봤다. 불만스럽고 의심스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세주가 없는 시간이 지나갔다. 

 세주없는 세주의 시간들 속을 동하는 천천히 거닌다. 밑줄 그은 책을 보며 누군가를 알아가는 일은 도서관에서 마주치면 화가 나겠지만 혹시,싶은 전 연인의 흔적이라면 다른 의미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왜일까 이유와 의미를 찾는 공백에서 동하는 자신 기억 속의 세주를 채운다. 누군가가 남긴 것들을 찬찬히 살피며 시간을 들여본 적이 있었나 생각해보니 딱히 떠오르는 사람도 물건도 없었다. 흔적은 커녕 대상마저도 그렇게나 열심히 들여다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나 자신도 그렇게 들여다보지 못했다. 거울 앞에서 주름이나 기미를 찾아보았던 것 말고는. 다 헤아리기도 어려운 많은 것들에 둘러싸여 지내면서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 왜 가지고 있는지 정리할수도 설명할수도 없었다. 미니멀한 삶의 방식이 유행할 때도 따를 수 없었던 버리고 줄이기를 냉장고에 담겨 입양된 세주의 책들을 보며 가늠해본다. 안되겠다. 

 동하와 세주가 연인으로 함께 한 6개월의 시간은 서로의 차이만 보였는데, 세주가 남긴 책과 화분으로 시작된 시간은 왜 서로가 달랐었는지를 헤아려 볼 수 있는 거리가 생겼다. 세주가 자신의 삶에서 언제든 한 번은 떠나야 했던 것처럼, 서로를 바라볼 수 있으려면 그만큼의 거리도 필요했었다는 듯이 서로가 없는 자리에서 밑줄과 사진, 시계나 케익을 통해 상대방을 바라보고 어긋났던 순간들을 이해한다. 처음엔 그런 둘의 모습이 꼴사나웠는데 세주의 집들이를 통해 그들이 함께한 시간동안 주고받은 것이 '다름'만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비밀번호를 알고 있어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서, 헤어진 사이인 것을 신경쓰지 않아서 라는 이유를 붙여도 왜 '엑기스'를 남기고 간 것이 동하였는지, 헤어진지 일년만인 상대의 무단침입에도 비밀번호를 왜 바꾸지 않고 '의미'를 찾았는지. 짜장면 냄새로 기억될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이해하고 스스로의 상처를 조금 더 돌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것 같아 결국엔 두 사람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책을 덮을 수 있었다.   

 " 그러나 막상 그 끝에 도착해 몇 달 살아보니 떠나왔나 싶을 정도로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세주는 늘 세계의 끝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떠나지 않았다면 자신이 머무는 곳이 끝이란 걸 몰랐을 테니 언제든 한 번은 떠나야 했다. 그러니 찾아 떠났던 그 험한 길과 시간이 전혀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많은 걸 잃고, 그것도 모자라 일부러 버리고도 후회하지 않는 건 그 때문이었다. 61" 

 쇼펜하우어는 불행은 우리가 외부에 의지하기 때문에 발생하며 진정한 행복은 스스로의 내면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외부의 조건은 불안정하며 불완전하다. 어떤 경우엔 그 의지처 자체를 잃게 되는 일도 생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오래도록 상실에 잠겨 있던 세주는 세계의 끝에서 외부가 아닌 내면을 향해 살아가야 함을 깨닫는다. 우리는 때로 낯선 여행지에서 자신만의 파랑새를 발견하기를 기대하며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우리가 찾던 것들, 채워야할 빈 공간이 생겨난 곳은 여행지가 아니라 떠나온 곳이다. 여행을 통해 다른 무언가로 채워 대체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잃어버린 것'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잃어버린 장소뿐이라는 사실을 파랑새와 세계의 끝을 통해 다시금 깨닫는다. 

 요즘은 사랑보다 이별이 더 쉽고, 누군가를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보다 구분짓고 단절하는 일이 더 빈번하다. 세주와 동하도 그렇게 헤어졌다. 하지만 각자의 방향으로 향하는 마지막 헤어짐에서 둘 사이에 남은 것은 단절이 아닌 이해였다. 'ㅁ'을 주고받을 때는 남들 다 보는데에서 이러지말고 갠톡을 하던 dm을 보내던 둘이서 하세요, 싶었는데 마지막이 되고 나니 'ㅁ'이 갑자기 내 앞에도 놓여진 듯 했다. 어떤 'ㅁ'을 남겨야할까, 어떤 '마음'을 남겨야할까. '세주의 인사'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볼보와 볼보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90
김혜연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고 슬퍼라, 책장을 덮으려니 소리보다 눈물이 먼저 나왔다. 정해진 상처가 눈앞에 보이는데도 그저 조금 어떤 인물인지 더 알게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동수에게 너무했다 싶었다. 조금 덜 아픈 인물로 그려주었어도 좋았을텐데, 세상에 아픈 일들이 너무나 많은데 차마 건축가를 꿈 꿀 줄도 몰라 포클레인 기사가 되고싶었던(142) 소년에게, 오래도록 누군가를 기다리느라 불조차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온종일 굶어도 가만히 있는 것 밖에 할 줄 몰랐던 어린아이였던(135) 소년에게 참 너무했다. 처음엔 애꿎은 포클레인에 돌을 던지던 주현이가 안타까웠는데 나중엔 나도 어딘가를 향해 돌을 던지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졌다. 

 " 그날 주현은 어른이 되는 장거리 경주에서 동수가 막 자신을 추월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 3이 되자 동수는 운 좋게 일찌감치 지역의 작은 건설 회사에 현장 실습생으로 취업했다. 그런데 그게 운이 좋았던 걸까?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동수의 첫 근무지는 아파트 건설 현장이었다. 거기서 쥐꼬리만한 실습비를 받은 날 주현에게 치킨을 사 주었다. 53" 

 처음 일을 시작했을때, 정말 얼마 되지 않는 월급을 받는 날이면 가족들을 불러모아 먹고 싶은 것을 고르게 했었다. 월급이 적으니 큰마음을 먹었어도 사줄 수 있는 음식은 고작해야 치킨이며 피자나 중식 요리 정도였었다. 몇만원을 계산하면서도 가끔은 손을 떨어야했는데 그때 마음은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이상하게도 지금은 수입이 생겼다고 해서 누군가와 함께 먹을 음식을 사지 않게 되었다. 그때보다 훨씬 더 비싼 식당에 가서 밥을 사도 그만큼 뿌듯한 기분이 들진 않는다. 그래서 동수가 쥐꼬리만한 실습비를 받은 날 주현이에게 치킨을 사주었다고 했을 때,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오래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던 것처럼, 또 어떤 어리고 꿋꿋한 사회초년생들이 작고 소중한 월급을 받는 날이면 적금, 교통비, 식비, 학자금, 공과금, 월세 사이에서 몇만원을 살짝 빼들고 한턱 낼 것이다. 소중한 사람들이 둘러앉아 맛있게 먹는 모습에 어깨를 으쓱하며. 

 " 그날 밤 한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나 당신에게 진심으로 부탁하러 간 거야. 용기가 필요했어. 당신 말대로 일을 더 크게 벌이는 게 위험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해. 그래도 해 보고 싶어. 당신이 가까이에 있으면 덜 무서울 것 같아.
그는 메시지를 읽고는 휴대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쓰다듬었다. 130" 

 보통의 어른이 되는 일은 모두에게 숙제다. 주현이나 동수, 은수처럼 어른이 되어가는 길을 찾아가는 아이들에게도, 길 위에 서서 여전히 이 길이 맞는지 제각각의 방향을 찾아 헤매는 어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볼보와 볼보'가 좋은점 중 하나는 어른이 된 인물들의 시간도 진솔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한나와 헤어지고 혼자가 된 종훈이 느끼는 외로움과 혼란도 다른 아이들의 사정과 다르지 않게 숨김없이 드러내어 종훈이 동수를 일방적으로 구원해주는 완벽한 인물로 그리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은수의 삼촌도, 느닷없이 아이를 집 밖으로 뛰쳐나가게 만들었던 괴물같던 은수의 아빠도, 홀로서기를 시작한 한나도 나이를 먹고 저절로 어른이 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들도 세상 앞에서 여전히 흔들리고, 다시 단단해지기 위한 시간과 의지처가 필요한 사람들임을 말한다.  

 친구를 두고 혼자만 어른이 될 수 없어 방황하던 주현이도, 세상과 부딪혀 영혼이 다치고 혼자가 된 종훈도, 친구에게도 제 속내를 털 어놓지 못하던 은수도, 한때는 누군가의 꿈을 위한 표가 되어줄 수 있었던 은수의 아빠도 모두가 삶을 살아내기 위한 통을 겪어낸다. 알고보면 나쁜 사람은 없다고,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결국은 모두를 이해할 수 있어서 하나같이 애틋해진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몫만큼만 해내고 싶었을 뿐인데 그 '보통의 어른'이 되는 일이 가끔은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동수가 닫았던 마음을 열고 다시 주변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처럼, 종지부를 찍었던 종훈과 한나가 다시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기로 마음 먹은 것처럼, 방황하는 주현이에게 기회와 지지를 보내주는 가족이 있어준 것처럼, 은수가 친구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던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길은 있음을 보여준다.  

  처음 어린시절 너무나 좋아했던 '클라우디아의 비밀'이 나왔을 때(15) 반갑고 슬펐다. 몇번이고 다시 읽었던 그 책을 언제부터 책장에 꽂아둔 채로 다시 열어보지 않았을까. 분수대에 들어가 몸을 닦으며 사람들이 던져둔 동전을 줍던 장면을 누군가는 여전히 사랑하고 아껴주겠지,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볼보와 볼보'도 성숙하고 치열한 인물들이 유리창이 깨진 볼보 포클레인과 털이 잔뜩 엉킨 강아지 볼보를 두고 조심스럽게 얽혀 결국 서로의 방향이 되어주고 더 아래로 주저앉지 않도록 안전망이 되어 주는 관계성에 위로받고 공감해줄 것이다. 모두가 애틋해서 한참동안 표지를 눈으로 덧그렸다. 어린아이가 색연필로 그린 것 같이 빼곡하고 순수한 표지의 그림이 볼수록 여러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마음을 울리는 맑고 투명한 감성의 청소년도서를 만나보고 싶다면 '볼보와 볼보'를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