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해주려는데 왜 자꾸 웃음이 나올까 - 남의 불행에 느끼는 은밀한 기쁨 샤덴프로이데
티파니 와트 스미스 지음, 이영아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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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동안 큰 인기를 끌었던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들이 막을 내렸다. 수십년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었던 프로그램들이 더이상 안 먹히게 된 이유가 뭘까. 공중파에서 보여줄 수 있는 개그 형식에 점차 한계가 생겼다는 점이 가장 컸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을 때리거나, 외모를 비하하며 웃음을 유도하거나, 인종과 국가적 갈등을 초래할 수 있는 요소, 성별 차이를 담은 내용들을 담은 '개그'를 더이상 웃음거리로 삼아선 안된다. 위험천만한 사고 영상들에 방청객의 웃음소리를 덧입힌 '아메리카 퍼니스트 홈 비디오(41)'식의 영상을 보며 웃던 시대, 사람이 다쳤거나 죽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그걸 보고 웃느냐는 지적이 나오는 시대를 모두 겪고 있다. '샤덴프로이데'에 대해 읽으면서 사라진 코미디 프로그램들을 떠올렸다. 과거 우리가 웃었던 상황과 대사들을, 그리고 이제 더이상 웃을 수 없는 현시대를. 우리의 샤덴 프로이데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정말 '남의 불행에 느끼는 은밀한 기쁨'은 정상일까?

 

 책에는 다양한 갈래의 샤덴프로이데 경험이 등장한다. 외국인이 쓴 책이기 때문에 몇몇 예시들은 좀 낯설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우리도 한번쯤은 다 느껴봤을만한 사례들이다. 이를테면 길에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넘어진 사람 때문에 슬며시 나온 웃음, 개인 SNS 비공개계정에 올릴 글을 공개된 계정에 잘못 올려 검색어 1위를 차지한 연예인의 실수, 끔찍한 사건 사고의 현장 사진을 기사에 실은 기레기를 욕하면서도 클릭하게 되는 일, 열심히 노력한 친구가 성적이 낮게 나와 속상해하고 있을때 잘나온 내 성적표를 떠올리는 것. 부정하려 해봐도 샤덴프로이데의 순간들은 일상적이고, 치졸하며, 잔인한데다, 추악하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무엇보다 공감한 것이 자신이 경험한 샤덴프로이데를 공유한 사람들이 "자신이 인정한 모든 샤덴프로이데가 조금 꺼림칙하게 느껴진다(135)"고 인정하고 심지어는 이 대화를 둘만의 비밀로 붙이자고 했다는 사실이다. 문득 그 순간 누군가와 진정으로 친해지는 방법 중 하나로 드러내기 어려운 비밀을 공유하는 것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샤덴프로이데의 존재 의의에 어쩌면 부도덕함을 즐기는 속된 마음과 타인과 이를 공유했을때 나누게 되는 친밀함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긍정을 공감한 사람들보다 같은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부정을 공감한 사람들이 더 끈끈하게 친해지는 법이다. 저자와 대화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를 나누는 것을 숨기고 싶어하지만, 비밀스러운 즐거움을 인정하고 공유했다는 것만으로도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낸 듯한 태도를 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타인 앞에서 내가 느끼는 샤덴프로이데를 부정은 해도 인정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주변인들이 나에게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기 때문에, 때로 그런 악한 마음이 들면 '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지?'하고 죄책감이 생겼었다. 그동안은 주변인의 선의를 고맙게 생각하고 자신의 이중적인 모습을 자책했는데, 문득 혹시 내가 그것을 숨기듯이 타인들도 열심히 숨기고 있었던걸까 의심이 들었다. 내 마음의 불편함을 좀 덜어보려고 읽었는데 오히려 그동안 믿어왔던 주변 사람들에 대해 의심이 더해져서 찝찝해졌다. 그래서 더욱 주변의 타인들에게 이를 당연한 본성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적용하고 싶지 않다.

 

 사실 주변 사람들의 마음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면 오히려 내 마음이 더 괴로워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이를테면 방금 일어난 나의 사소한 불행, 아끼던 테이블 매트가 책상과 벽사이의 좁은 틈에 빠져 꺼낼 수가 없게 된 것,을 하소연 할 곳이 없어지질 않겠는가. 이 작은 불행을 보고 즉각적으로 혹시 '헐, 어떡해ㅋ'하고 생각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20여분간의 난투끝에 책상 다리판이 조금 휘고 나는 녹초가 된 채 테이블 매트를 꺼냈음을 밝혀둔다. 그리고 더는 기운이 남아있지 않아 잠시 리뷰쓰기를 접어두었다 다시 이어쓴다. 어찌되었든 이런 일-사소한 불행-이 생기면 어디든지 얘기하고 위로받거나 털어넘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샤덴프로이데 못지 않은 본능같다. 인터넷에는 카펫 위에 엎은 라면, 떨어뜨려 깨진 고가 전자기기의 액정, 부주의로 분쇄기에 갈아버린 현금 사진 같은 불행의 공유처럼, 멘탈의 붕괴가 오는 불행의 순간들을 누군가에게 알리려는 사람들이 흔적이 가득하다. 나의 불행을 공유/전시하려는 본능과, 타인의 불행을 기쁨/위안 삼으려는 본능. 사람의 마음 안에서 이 두 본능이 공존하며 교묘하게 작용하도록 되어 있다니 마음이 복잡하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철저히 악한 마음과 하찮은 도덕성의 확실한 징후(15)"를 가지고 있다. 타인의 실패에 안심하기도 하고, 나의 상황과 비교하여 위로 삼기도 한다. 때로 우스꽝스럽게 넘어지는 사고 장면을 보면 걱정에 앞서 웃기도 한다. 웃음은 참으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면, 걱정은 웃음을 참고 건네야 하는 것을 보면 본성이 악한 곳에 기울어져 있는가 싶다. 어린아이들의 반응에 대한 실험(45)에서도 나오지만, 아주 아기일때부터 아이의 주의를 돌리기위해 보호자가 큰소리를 내며 부딪혀 넘어지는 시늉 혹은 맞아서 우는 시늉을 하면 아이는 울고 있다가도 멈추고 이를 바라보며 웃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비록 이것이 아기의 것처럼 악의없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해도, 성장하며 학습하고 관계를 맺으며 지내온 사람이라면 이 자연스러움을 억제해야 함도 옳은 것 같다. 내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 해서도 안된다는 간단한 원칙, 다른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내 입장으로 생각해본다면 이를 어떻게 해야할지 답이 나올 것이다. 샤덴프로이데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그래도 우리 착하게 살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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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에 대해 말하자면 - 김현진 연작소설
김현진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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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볼트, 너트, 전선과 드라이버가 얽힌 세계에서 그의 시간은 평온하게 흘러갔다. 그러다가 윤정화를 만나게 되었다. 윤정화는 지금까지 김병권이 알고 있던 세계의 생명체 중 가장 복잡한 존재였다. 그를 가장 매혹시키는 점이 그 점이었고,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점 역시 그 점이었다. 김병권으로서는 윤정화를 구성하고 있는 볼트와 너트, 전선과 동력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부품들이 망가지지 않도록 김병권은 윤정화를 가장 섬세한 전자기기를 다루듯 조심해서 다루어왔다. (109) "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을 가장 처음 연 것은 " 나 유부인 거, 정말 몰랐어? 대충 눈치 챈 거 아니었어? 자기가 워낙 쿨하길래, 나는 아는 줄만 알았는데.(85) " 이 뚝배기를 깨버릴 문구였다. 사실 저 문구와 제목을 함께 봤을 때는 어떤 팜파탈같은 여자가 할 법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책을 읽으니 저말을 묵묵히 듣고 있는 건 여자쪽이었다. 정말 몰랐을까 하며 읽었는데 마침 또 온 인터넷에 여자친구 몰래 다른 여자와 결혼식을 한 남자에 대한 글이 올라왔다. 작정하고 속이는 놈과 옆에서 '의리'지키며 침묵하는 놈들 사이에서는 피해자가 당해낼 수가 없겠다. 각종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두고 '소설'이라고 하지만 현실은 소설보다 더하다.

 

 무엇보다 에필로그와 작가의 말이 가장 강렬했다. 그 앞으로 죽 늘어선 단편들은 이 마지막을 위한 빌드 업이었다,고 해도 좋겠다. 가끔 시청자에게 사연 받아서 연애문제를 재연하는 프로그램을 볼 때면 아, 저기에 글 써서 보낼 시간에 그냥 헤어지면 될 것을. 하고 생각하곤 하는데,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에 담긴 얘기들은 그보다는 좀 덜 답답하고 좀 더 궁상맞다. 요즘 나오는 사연들은 앉아있던 패널들도 벌떡 일어서게 할만큼 기발하고 다양하게 분통터지던데, 책은 적어도 10년 정도 전의 감각이라 된장녀, 김치녀(혐오표현주의)같은 가난한 사랑노래 형식들만 조심하면 된다. 거기에 요즘 다양성을 이유로 필수로 끼워넣는 넷플감성이 없어서 더욱 아날로그적 전개로 느껴진다.

 

 클리셰들을 잔뜩 쏟아부어 놓았는데, 그때마다 웃겨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바바리맨을 만났을때 오히려 패기있게 나가면 변태쪽에서 기겁하고 도망친다는 썰(184)이나, 실수로 옆집 문을 열어 들어갔는데 침대 위에 옆집 사람이 헐벗은 채로 잠들어 있다(162)는 골자로 골방 문학계의 대표적 도입부가 나올 때면 입 밖으로 터져나오는 실수를 막을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단편'부장님 죄송해요'는 친구랑 나누는 대화 부분도 일명 싼티가 작렬하는 내용이라 항마력 끌어모아 버티며 읽는다. 저 두 단편이 특히나 길티플레져로 꼽힐만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너무나 착한 남자 김병권이 보인 태세전환도 재밌게 봤다.

 

 " 김은정은 빽 소리쳤다. "야, 나 아줌마 아니거든? 어디다 대고 아줌마래?" 남자는 움찔했다. "그러면...... 아가씨는 집에 가세요." (133)"

 

 솔직하자면 조금 조악한 듯도 했다. '82년생 김지영'이 파격적이었던 것은, 대문자로 아로새겨져 이리저리 조리돌림 당하고 돌팔매를 맞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 등장했기 때문이리라. 그 뒤로 나오게 된다면 같은 이야기를 같은 방식으로 해서는 안된다. 그 이상의 방식과 그 이후의 현실-그게 넷플감성이라면 더 별로겠지만-을 갖춰서 나와야 한다. '정아에 대해 말하자면'은 재밌긴 했지만, 되풀이되는 했던 말과 언제쯤을 말하고 있는거지 싶은 지나감이 느껴졌다. 우리가 '이거 정말 진짜'같은 현실반영을 원하긴 하지만, 통속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근근히 등장하는 '된장녀'같은 말들은 이미 죽은 말이다. 커피 한 잔 마음대로 사마실 수 없도록 여성을 압박하던 그 낙인같은 말이 한물 간 유행어로 치부되는 것이 한심스럽긴 하지만, 이제 사어가 됐을만큼 세상이 변하긴 했다. 스타벅스 커피 한 잔 쯤은 마셔도 거품물고 사망에 이르지 않는 것이란 사실이 남성 세계에도 충분히 전파된 지금, 신간 700원 구간 300원하는 만화 대여점이나(28), 데이트 통장(152), W호텔의 운우지정(173), 캐러멜모카 프라푸치노(27)나 칵테일 몇 잔에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여자에 대한 서술은 낯설다. 방정리하다 구석에서 찾아낸 예전 물건들보는 느낌처럼 낯설다. 만화 대여점들이 대부분 사라져 찾아보기 힘든 것처럼, 책속의 배경들도 그렇다. 

 

 재밌게 읽긴 했지만 다소 아쉬운 면면들이 눈에 밟혔다. 오랜 침묵 끝에 나온 글들이 그만큼의 세월을 담은 것인지, 지금에 국한 된 것이 아닌 시대적 여성의 삶을 폭 넓게 담으려 했던 것인지 생각해본다. 덧붙여 그동안 광장을 가득 채워왔던 시위들에 대해 냉소적인 시선이 보였다. 민주투사가 된 기분을 맛봤다거나, 소개팅 자리에서 오갈 법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냉소를 넘어선 듯도 했다. 세상엔 여러 사람, 여러 생각이 있으니까. 읽으면서는 여자들이 좀 더 똑똑하게 생각하고 행동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다 읽고 난 뒤에 생각해보니 사람들이 적당히 똑똑하고 또 적당히 착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든다. 

 

65쪽 상 8 그 애도 했을 걸?" -> " 생략

138 상 6 / 143 상 1 흐름이? 맞지 않음 

189쪽 하 7 이 아저씨가 누구보고 미친 여자래! -> 미친 여자란 말이 전에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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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마음
이두온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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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환상, 앞이 보이지 않는 자들의 도시에서 눈을 가리고 있는 가림막을 제 스스로 걷어내버린 사람의 ‘타오르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더해가는 여름의 온도만큼이나 몰입도가 확 올라가는 탄탄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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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마음
이두온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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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살인사건으로 돈을 버는 마을이 있다?' 얼핏 서프라이즈나 생생정보통의 성우 톤으로 읽게 되는 단 한줄의 문구가 '타오르는 마음'의 거의 유일한 단서였다. 살인사건으로 돈을 버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하나, 청부를 받아서 진짜 사람을 죽인다. 둘, 살인사건이 일어났다고 꾸며내 관광객을 끌어모은다. 셋, 살인사건으로 죽은 사람의 시체를 대신 처리해서 돈을 번다. 이 세 가지 정도가 한줄의 단서를 가지고 내가 예상해 본 빈약한 마을의 비밀들이었다. 예상은 어느 정도는 맞았고 대부분은 틀렸다. 생각 이상으로 복잡한 인물과 사건들 탓에 저 세가지 추측 정도로는 이 이야기의 어떤 축도 세우지 못했다. 책을 읽기 전 당신은 어떤 예상을 할 수 있을까?

 

" 어렸을 때도 그랬지만 오기와 내 조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누구 하나 상황을 진정시키거나 멈춰 세우는 법이 없었다. 우리는 달릴 줄만 아는 수레바퀴였고, 그 질주는 꼭 바퀴가 망가지거나 수레가 똥더미에 처박혀야 끝이 났다. 서로가 서로에게 보태져 똥더미를 향해가는 그런 사이. 하지만 마음만은 기가 막히게 잘 맞았던 걸로 기억한다. (98) (413)" 

 

 밴나는 8년 전 있었던 살인 사건의 목격자다. 작고 쇠락한 마을인 비말의 모든 사람들은 대부분 살인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그들은 목격자이기도 하고, 용의자이기도 하고, 유가족이기도 하고, 추격자이기도 하고, 또 범인이기도 하다. 밴나는 과거의 이상행동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다. 그녀가 하는 말은 대부분 무시당하고, 행동에는 제약이 따른다. 그런 그녀를 유일하게 받아주었던 나조가 살해당하자 밴나는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로 마음먹는다. 그녀를 둘러싼 마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의적이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고, 밴나 본인도 어리고 불안정하기 때문에 그녀의 추적은 브레이크가 없이 질주하는 수레처럼 위태롭다.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숨기는 것 없이 다 보여주는데 왜 이렇게 길이 복잡하지 어리둥절했다. 하나의 그림이 그려져있는 큰 판을 솜씨좋게 오려내 전혀 다른 순서로 끼워맞춰놓은 것을 정리하며 보는 기분이었다. 아니면 뒤집힌 수많은 카드들을 딱 두번씩만 뒤집어가며 같은 패를 찾아내는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먼저 뒤집힌 그림들이 짝이 맞지 않는다면 다시 돌려놓되, 그게 뭐였는지 기억해야 게임에 유리하다. 기회를 놓치면 내가 뒤집어 확인해놨던 패를 저자가 먼저 맞춰 들이미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봐야한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먼저 맞추는 경쟁은 아니지만, 무심결에 지나쳤던 대목이 나중에 결정적으로 다가오면 눈치채지 못했던 게 아쉽다.

 

 읽는 동안에는 흥미진진하게 몰입할 수 있었지만 다 읽고 난 뒤에 차분히 생각해보니 언제나 이유는 참 별 것 아닌데 사건은 크게 벌어진다 싶었다. 소설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저 사람의 마음이 타오르기 때문에, 분노나 고통이나, 정확히는 욕망에, 그것들이 굴절되어 나타나는 모습이 이럴수도 있구나 싶어진다. 읽을 때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서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건지 파악하기도 어렵고, 다수의 억압이 소수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가 가장 무서워보였다.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이를테면 마피아 게임을 하는데 아무도 내가 시민임을 믿어주지 않고 몇 판 내리 시작만하면 무조건 죽인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좀 이상한 비유같지만 비말의 분위기도, '범인'을 잡는 축제의 게임도 그 이상으로 가혹했다. 가짜 광기와 진짜 광기의 차이점도 실감했다. 결국 살아남는 자는 진짜뿐이었다.

 

 무대는 별 것 없는 쇠락한 마을인데 축제 시기와 겹치면서 너무 복잡하게 많은 일들이 생겨난 것도 난감했지만, 읽으면서 가장 몰입이 어려웠던 부분은 '깡'이란 의성어들이었다. 이쯤되니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집중하고 있다 갑자기 몰입이 확 깨져버렸다. 비운의 망곡이었던 비의 '깡'이 갑자기 밈화되어 이렇게 되살아나지만 않았더라면 좋았을텐데, 하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도배된 깡들을 바라보며 이게 다 몇깡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모르 파티'라는 말의 뜻이 마음에 들어 문신으로 새겼는데, 갑자기 김연자 선생이 노래로 불러 문신을 볼 때마다 난감해졌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세상은 그렇게 공교로운 일이 생기기도 한다.   

 

 " 산 사람이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그로부터 사랑받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굴절된 자아의 투영이나, 집요한 소유욕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없다고 하지는 않겠지만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만일 이 사실을 모르는 자가 있다면 그 우둔함에 축하를 보내고 싶다. 그렇듯 우둔하게 살다가 우둔하게 뒈지는 건 어떤 면에 있어서는 축복이라 할 수 있을 테니까. 인간은 인간의 쓰레기통이다. 인간은 인간에게 감정의 배설을 쏟거나, 진짜 배설물을 쏟는다. 그들은 그렇듯 서로에게 똥칠을 해대다 죽는다. (76) "

 

 사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소설에서 사랑에 대해 말하는, 사랑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사랑과 가장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 누구보다도 사랑을 집요하게 해체하려 들었다니. 그런데도 책을 읽으면서 이 문장이 가장 기억에 남고 공감됐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정신없이 끝을 향해서 내달리듯 책을 읽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오로지 끝이 궁금하다는 마음에 서둘러 읽어내느라 지나쳐버렸던 것들이 눈에 밟혔다. 자꾸만 그 사람의 행동을 의심해볼걸, 이 사람이 한 말이 뭘 가리키고 있는지 눈치챌 수 있었을텐데! 하며 아쉬웠다. 다음 상황이 어떻게 될까 궁금하더라도 꼼꼼히 살피며 천천히 한번에 읽어내거나, 성격이 급해 달리지 않고는 궁금해 못 견딜 것 같은 사람은 필히 한 번 더 읽어야 만족스러울 것이다. 끝을 알아도 서두르느라 놓쳤던 것들을 다시 찾아내 이걸 왜 놓쳤지?! 하며 곱씹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현실과 환상, 앞이 보이지 않는 자들의 도시에서 눈을 가리고 있는 가림막을 제 스스로 걷어내버린 사람의 '타오르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더해가는 여름의 온도만큼이나 몰입도가 확 올라가는 탄탄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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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3 :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 - 불타는 사막에 피어난 꽃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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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국 죽음의 사막을 뚫은 것은 돈과 신앙이었다. (10) "

 

 작년에 창비에서 돈황 실크로드 원정대를 모집한 적이 있었다. 컨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 응모자를 뽑아 약 300만원에 해당하는 비용 지원을 해준다는 공고였는데, 능력이 안되어서 그렇지 한동안 너무 부러워서 공고 게시물을 찾아보고는 했다. 이때 돈황이라는 지명을 처음 유의미하게 인지했는데, 그동안 실크로드라고 하면 죽 이어진 길의 관념으로 생각했으나 도시 거점으로 이어진 것임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 자세히 깨닫게 되었다. 어찌되었든 중국편의 시작은 꽤 큰 프로젝트로 느껴져 전부터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었는데, 저자의 문학적 소양과 어우러진 '누란'의 소개부터 시작되는 3편도 즐겁게 읽었다. 

 

 처음엔 답사기라기보다 역사서에 더 가까운 설명들 아닌가 싶기도 했다. 자세한 설명으로 실크로드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할 독자들을 이끌어주고 있지만 현장감이 부족하다고 할까. 하지만 쿰타르 사막의 전경이 나오면서 확실히 동경하는 여행자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사막의 모래언덕들이 겹겹이 솟아난 모습을 보니 여행하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커졌다. 이 고운 모래로 이루어진 모래산이 존재하고 있는 광활한 땅도, 또 그것을 사륜지프로 오를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저런 곳에서 밤하늘을 본다면 어떨까, 불빛의 방해없이 보는 별길이 어떨까 궁금했다. 아주 짧게 등장했지만 저자도 쿰타르 사막에서의 풍광을 가장 감동적인 순간(72)으로 꼽았으니 언제고 사막에 가보리라 생각했다.

 

 읽다가 문득 국립중앙박물관의 세계문화관 중앙아시아 전시실을 관람하기를 권하는 내용이 나오는데(141) 한국전쟁 때 소장하고 있던 벽화 파편들을 부산으로 피난시키며 보존하려고 노력한 일화가 나와 기록과 보존의 DNA를 가진 것이 분명한 한국인의 모습을 실감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을 한동안 찾지 않았는데, 책을 읽은 김에 다녀와보고 싶어졌다. 이 유물들이 우리나라에 남겨지기까지의 과정이 참 씁쓸하지만 중국으로의 먼 길을 떠나지 않고 책에서 본 로프노르 호수와 소하 유적지, 누란왕국, 호탄, 쿠차 등 서역 각지의 유물들이 망라된 것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하니 전에는 몰랐으나 이제는 찾아가보는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달걀 모래찜 구이는 못 먹겠지만.

 

 아무래도 책으로 읽으면서도 넓은 땅덩이에서 마주하게 되는 광활한 자연에 압도되는 순간들이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천산산맥의 모습이나, 키질석굴, 키질리아(천산신비대협곡), 사막과 들판이 광대하게 펼쳐진 끝없는 대자연의 모습은 경이와 매혹을 일으킨다. 우리나라를 좋아하지만 압도적인 자연경관을 마주할 수 있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외국의 이런 장소를 향한 여행 욕구가 샘솟곤한다. 그래서 타클라마칸사막 여정이 나오는 부분은 특히 더 재밌게 읽었다. 3대가 공덕을 쌓아 사막의 비를 맞이한(310) 내용은 부럽기까지 했다. 언제고 어느 곳의 사막이든 한번쯤은 찾아가봐야지 마음먹었다.

 

 책을 읽으며 등장하는 화가(221)와 무용가(267) 지인들과의 후일담이나 망자의 치아를 살펴 생전의 나이나 건강상태를 짐작해 본 함께 간 치과의사(127) 분, 간간히 설명을 곁들여 준 최선아 교수(211),  만화가, 스님, 무엇보다 '답사학'으로서의 답사를 이끈 저자 등 함께 한 구성원들의 조화가 참 좋았다.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한 삶의 궤적만큼 여행의 색이 풍부해짐을 느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낯설고 다양한 사람들과 여행을 나누는 일이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오죽하면 여행사 단체 관광을 기피 1순위로 꼽는 사람들이 있으려나 싶게, 언제고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여행이 있다면 배우는 마음으로 따라가고 싶었다.

 

 9장에 이르면 위구르 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최근들어서도 그들이 심한 격리와 산아제한 같은 비인간적인 처우를 당하고 있다는 뉴스를 종종 접한터라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저자 역시 위구르 민족에 대한 애정과 동정을 드러내었다.(388) 카슈가르로 향하는 길은 곤륜산과 향비묘라는 애칭을 가진 야르칸드한국의 '아바 호자' 가문의 공동능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둘 다 어쩐지 익숙한 이름들이라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중국보다는 이슬람 분위기가 강하게 엿보여 고성의 풍경을 그전까지와는 다른 느낌으로 볼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마침내 파미르고원 설산과 함께 펼쳐진 검은 호수의 풍경으로 답사가 마무리되었을때 깊은 몰입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매력적인 답사였다.

 

 여행을 할 때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기록이든 혹은 기념이 될만한 것들을 남겨두는 사람들을 아주 부러워한다. 언제는 일지처럼 꾸준한 일기를 써보려고 했으나 저녁만 되어도 기억이 가물했고, 좋은 장소에 가면 그림을 그려볼까 했는데 성미에 맞지 않았다. 지도며 영수증, 입장권 같은 것을 현지돈과 함께 모아둔 적도 있는데 그런 것들은 잉크가 이내 옅어져버렸다. 결국 전형적인 한국 여행자답게 셀카봉을 들고 사진을 찍으며 기념품가게에 들러 작고 저렴한 기념품이나 하나씩 사오는 것에 머물렀다. 답사기를 읽고 있자니 문득 지난 여행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세상이 전과 같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함께, 좀더 그때 그 순간에 충실할 걸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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